자유 - 지성의 근본주의 비투비21 1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문성원 옮김 / 이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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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동하는 근대 혹은 액체 근대의 개념을 창시한 것으로 유명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금세기의 수많은 사회학자들 가운데 가장 존경 받는 진정한 지식인이자, 학문의 길에 있어 모두의 귀감이 되었던 학자였습니다. 그는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이기도 했지만 이스라엘의 시오니즘 운동에는 평생에 걸쳐, 반대하는 입장에 섰기에 이런 학문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주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세계와 사회를 좀 더 한 발 물러서 분석할 수 있었던 그의 주변 환경은 근대의 수많은 문제들과 자본주의적 종속성, 인간의 소외라는 현실적 문제들을 다루면서도 엄청난 독서와 사유에 근거해, 고결한 논증과 실제적인 비판을 지속할 수 있었던 그의 학문적 일관성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여기에 수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바우만의 글과 발언을 놀랄 만큼 증오했던 점은 특히 유명하기도 합니다. 물론 저는 이보다 그의 유작이었던 "레트로토피아"에서 드러난 남은 사람들, 특히 인류에 대해 그가 본질적으로 가졌던 깊은 애정에 큰 감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마치 토니 주트의 그것과 다름없는 '인간에 대한 애정'은 그가 왜 자본주의를 그리 신랄하게 비판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진정한 이유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원제, "Freedom"으로 지난 198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2년에 초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현재 국내 번역본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바우만은 글의 서두 뿐만 아니라 각 장에서 틈만 나면 자유의 정의에 대해, "너무나 모호하고 실체를 파악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요.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바우만이 자유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속에서 그저 모호하게 인지하고 있는 이 자유가 현실의 범주에서는 이른바 자원과 권력의 유무로 그 실효성이 구별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 하에 극소수의 기득권들과 엘리트 지배층이 절대 다수의 보편적 자유에 대해 명확한 규명을 얼마간 회피해 왔다는 점을 바우만의 이 글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좀 이른 도입이겠지만 바우만은 3장에서, "자본주의에서 자유란 자기 자신의 자원에 의존해야 할 필연성"이 있다고 전제하는 것에서 막대한 자원을 보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간의 자유는 확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동안 자본주의가 '근대에서의 자유 개념'를 도출시키고 이것이 개인주의와 맞물려, 인간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자유에 대한 실현 가능성과 그 보장에 대해 발언해 왔는데요. 5장에서 인용된 한나 아렌트는 "공공의 자유를 향한 혁명적 추구가 실패한 것은 진정한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탓"이라는 그녀의 비평이 역으로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는 개인의 자유에 의지가 될 수 있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이해를 1장에서 전반적으로 논증되고 있는 제러미 벤담의 '판옵티콘'과 연계해 분석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시민들이 공공의 안정과 더불어 그것에 기반한 자유를 원하고 있을텐데요. 반대로 모든 개인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누리고자 한다면, 그 사회는 거의 폭력적인 종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펠라지우스 (펠라기우스)의 언급대로, "구원을 향해 사는가 아니면 멸망을 향해 사는가는 인간들에게 달려있다"는 헉슬리 식의 극단적인 논법과 맞닿아 있습니다.

당시 사회지도층과 가까웠던 제러미 벤담은 그 소수의 계층이 원하면서, 그것대로 확실한 이익이 되는 통제 사회의 틀을 판옵티콘으로 그려보았는데요. 관리자들의 자율과 수용자들의 통제는 기본적으로 대립되는 조건이지만 이러한 양가적 틀 안에서 균형과 통제를 통해, 사회가 모든 사람들의 통제할 수 없는 자유에 대한 요구를 효과적으로 공공의 이익(엄밀히 따지자면 소수 기득권들의 이익과 안전)에 부합할 수 있느냐를 실험해 본 당시로서는 꽤 근사한 사회적 모델이라고 평가 받을 수 있을겁니다. 저는 이 글의 1장에서 바우만이 왜 판옵티콘을 끌어왔는지에 대한 실로 현실적이고 정확한 이유는 "모두의 자유는 사회의 계층화에 따라 차별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들이 요구하는 '안정'이라는 가치가 이처럼 받아들이는 상대의 입장에 따라 양가적일 수밖에 없기도 한데요. 물론 공공의 이익 차원에서 사회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은 저 역시 이에 동의합니다. 즉, 벤담의 판옵티콘은 다수에게 어떻게 거의 자발적은 수준에 준하는 통제를 받아들이게 할 것인지에 대한 아주 노골적인 모델화라고 전제한다면 '자유선택'.'자유의지'와 같은 자유의 갈래들은 확실히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불행한 건지 좋은 건지는 쉽게 단언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동안 바우만은 사회학에 대한 관점에 대해 뒤르켐보다 더 일관되게, '인간을 위한 학문'으로서의 일종의 의무를 강조해왔습니다. 그의 이런 사회학으로서의 개념적 범주 안에 들어가 있는 이 '자유'역시 인간의 진보와 인간의 삶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데요. 다만, 2장에서 약간 드러난 바와 같이 중세의 시기에 있어서도 '자유민'에 대한 봉건 영주들의 야료와 술수가 음이든 양으로든 존재했고, 다음 3장에서도 근대에 있어서 자유가 자본주의에 의해 거의 강제적으로 규정됨으로 인해, 우리가 미약하게 나마 인지하고 있었던 자유에 대한 본질이 어쩌면 자본을 위한 부차적인 수단으로 국한되었다 볼 수 있겠는데요. "만인을 위한 자유, 기본적 주권이 포함된 자유"가 자본과 자원 그리고 권력의 유무에 따라 그 정의가 달라졌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는 일관되게 바우만이 "유동하는 근대"와 맞물려, 다수 시민의 자유라는 함의의 소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수많은 정치인들에 의해 이 자유라는 단어는 재생산되었고, 누구나 손쉽게 손에 쥘 수 있을 정도로 자유와 자유주의에 대한 강조는 틈만 나면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한편, "자유를 향한 욕망은 억압의 경험에서 온다"는 3장의 도입은 "자유에 대한 요구와 동일하게 사회적 작용에 대한 소위 긴장 관계"와 연관되어 있고, 앞선 자유의 근대적 형태는 "개인성과 자본주의와 맺는 밀접한 연관"에 있어서, 근대와 자본주의 사회가 시작된 이래로 개인이 자기 확증적이고 독립적이며 주권을 지난 개인의 형태를 띠지 못하고 있는 점은 일종의 억압의 새로운 형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바우만은 자신의 여러 논저에서 '자본주의적 소비 사회'에서 개인이 주도권을 갖기란 실질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며, 노동 자체가 인간의 삶 전반을 좌우하고 있기 때문에 안토니오 네그리의 "삶 자체가 노동에 처해졌다"는 다소 불편한 현실 인식은 이를 아주 잘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유가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제로 계층과 계급에 따라 격차가 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차이와 혹은 차별에 설사 사회에 '겸허한 도덕적 중재자'가 존재한다 손 치더라도 우리가 깊이 자본주의를 내면화한 상황에서 모두에게 '주권이 포함된 자기 확증적인 자유'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 글의 전체적인 논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우만은 자신의 이 글을 통해, 시민들에게 현실의 실체를 면밀하게 폭로하고 싶었던 것으로도 여겨집니다.

당시에는 뭔가 혁명적인 사건으로 미화되는 '근대적 개인의 탄생, 개인주의의 발명' 등은 이처럼 현실을 오도하기도 했는데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본주의 하에서 '진정한 자유'라는 의미는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막대한 자원의 보유와 그에 준하는 권력의 유무가 대체로 좌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비 자본주의가 모두의 자유에 부합되지 못하는 것도 실로 자명한데요. 한나 아렌트의 시민 모두의 자유에 대한 선결 조건이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경제적 조건의 현실화가 실질적으로 필요하다고 전제했다면 오늘날 서구 사회가 그러한 조건을 표면적으로는 어느 정도 충족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 비용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많은 기득권들과 엘리트들에게 있어 평범한 시민들의 삶의 안정이 자신들이 바라는 체제 안정과 자유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 시민들의 자유와 삶의 안정이 오로지 개인의 책임으로 국한시켜 버리는 것은 아주 손쉬운 태세지만 이를 조금만 들여다 보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저들이 하이에나 무리와 같은 단순한 '약탈적 사회'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실로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모두의 자유'에 고개를 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이 글의 서두에서 "민주적 통제에 따라 잘 수행되고 있는 국가에서 시민들의 자유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보다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는 문제로, 앞선 신자유주의가 국가의 해악을 설파하면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미 모두가 인지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결국은 자유의 본질적 증대와 같은 문제를 포함한 것들이 사회의 자본의 종속화는 물론 시민들에게도 내면화가 됨으로써, 크나큰 문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후세에게 베버가 여실히 비판한 대로 "이성을 그 자신의 행위에 직접적으로,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해 적용하는 일은, 선택된 소수에게만 열려 있었고 또 열려 있게 될 선택지였다"는 일종의 경직된 미래가 되물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자본의 민주적 통제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감시 사회가 그려나가고 싶어하는 그러한 일방적인 통제 사회에 대한 견제와 가까운 미래의 민주주의 붕괴에 따른 '과두제' 출현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르는 '시민의 야생성'을 잃어버린 우리의 현재 모습을 각자가 노력하여, 바꿔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에 대한 조언은 이미 존 듀이가 우리에게 명확히 보였던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벌을 받거나 감옥에 가거나 고문당하거나 박해받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바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우리의 행동이 얼마나 효과적인 것이 될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점도 염두해 두자.

그러므로 자유에는 제한이 없다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자원 resource이 있어야 한다.

계몽 시대의 다른 사상가들과 더불어 사회학자들도 세계를 탐구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사람들이 살기에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우월한 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행동의 순응성일 따름이므로, 지속적인 보상의 흐름을 만들어 나가는 기술은 배우기 쉽고 학습자에게 어떤 갈등도 일으키지 않는다.

통제의 영속성과 편재성은 수용자에게 자유만 빼앗는 것이 아니다. 효과적일 경우, 그런 통제는 수용자가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 자기 자시느이 행위를 선택하고 이끌 수 있는 능력, 자기 자신의 삶을 틀 잡고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을 앗아가 버린다.

‘자유‘라는 제목이나 부제를 달고 있는 책들은 대부분 이상과 비슷한 ‘자유‘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책들은 대개 아 주제에 대해 쓴 영향력 있는 지적 저작들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며, 비판적으로 접근하려고 시도한다.

자유민은 주인에게 충실할지 또는 배신할지를 선택할 수 있었으며, 그 선택에 따라 보상을 받거나 처벌을 받아야 했다

오직 타율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쓰기 위해 자유를 정식으로, 또 정면에서 악의 편에 가져다 놓은 이론이 등장한 것은 아마 이것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자연을 정복하고 복종시킬 것이며, 물리 법칙을 지배하고 사물에 대한 권력을 가질 것이다. 이런 심성은 배운 대로 사람마저도 사물을 취급하는 방법과 똑같은 방식으로 취급하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 속에서도 표현된다. 우리는 사람들 역시 사물인 듯이, 서로를 주조하고 조작하는 수단으로 본다‘

베버가 볼 때, 이성을 그 자신의 행위에 직접적으로,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해 적용하는 일은, 선택된 소수에게만 열려 있었고 또 열려 있게 될 선택지였다.

우리 사회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유가 무엇이든 그 자유는, 근대와 자본주의 사회가 시작된 이래로 우리가 자유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이라고 간주했던 자기 확증적이고 독립적이며 주권을 지닌 개인의 형태를 띠지 못하고 있음이 확실하다고 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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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미래 - 경제에 현혹된 믿음을 재고하다
장 피에르 뒤피 지음, 김진식 옮김 / 북캠퍼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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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피에르 뒤피는 프랑스의 엔지니어이자 최근에는 철학자로서도 이름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는 파리 남부에 프랑스에서 권위있는 그랑제꼴 중 한 곳인 에꼴 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하고 도미해, 스탠포드 대학의 언어 및 정보 연구센터 CSLI 의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작가이자 지식인으로 유명한 장-마리 도메나흐와 더불어 에꼴 폴리테크니크 내에 인지 과학 및 인식론 센터를 설립하기도 했는데요. 이에 프랑스 가톨릭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한 뒤피는 철학과 사회 문제에 대한 여러 저작 활동을 왕성하게 해오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12년에 원제, "L'Avenir de l'économie: sortir de l'économystification , Flammarion"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2년 4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일전에 질베르 리스트는 비경제학자들이 경제와 경제학에 대해 더 많은 비판적 의견 개진과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사실 경제학의 영역이 경제학자들 특유의 전문가주의론에 매몰되어 사회에서 어떠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폐쇄적인 지경에 이른 것은 매우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만약 소위 전문가의 영역, 전문가의 정치라는 것이 시민과 일반 정치에 괴리되어 있다면 그만큼 사회에 득이 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에 저자인 뒤피는 이 글의 2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경제학 전반의 비타협적인 자기 초월적인 측면에 대해 비판하고 이를 베버의 인식론대로 인류가 탄생시킨 많은 학문이 실질적으로 아주 기초부터 형이상학적 토대에서 발전하여 이것이 입증된 것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철학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자기 초월적 관념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뒤피는 이 점을 도식적으로 비판하기 전에 자본주의가 이와 같은 연료를 바탕으로 생명력을 발휘하기에 어쩌면 터무니 없는 자기 예언적 측면의 인식을 기반으로 경제가 추구하는 미래가 항상 장밋빛 전망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비평은 그만큼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뒤피는 이러한 경제학에 대한 굳건한 믿음들에 대해 (거의 불가능한 예측까지 포함하여) 동일한 2장에서 학계와 사회 전반이 경제에 '현혹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는데요. 일정 부분은 소위 전문가들에 의해 경제학이 신학의 범주 안에 스스로의 대관식을 치러낸 이래로 비판에 대한 전면적인 성역화가 강요되어 왔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 지점에서도 뒤피는 이러한 맹목적인 분위기 자체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 의지'를 사실상 박탈당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라 일관된 논점으로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식들은 경제가 스스로의 가치보다 더 많은 권위와 권력을 부여받으며 정치를 단순화 시키고 정치학 전반을 경제학을 뒷받침 시키는 소위 '시녀'로서의 역할로 한정했습니다. 미국과 같은 경우는 이미 경제 엘리트들과 정치인들, 정치 엘리트들 간의 서로의 이익에 따른 아주 긴밀한 협조가 증대되어 왔고 일반적인 자본이 이러한 사회개조가 이뤄졌을 때, 흔히 쉽게 내면화 된다는 점에서 어떤 이의 발언대로라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텐데요. 사실 여기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강의를 할 생각은 없지만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가 경제적 자유와 배타적인 이익을 더 증대시킬 수 있는 소위 경제 권력에 대한 자율성을 보장하는 쪽으로 강화되어 왔다면 이쪽에 있는 이들이 보기에 평등과 경제적 분배 역시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얼마나 눈엣가시 같았는지 쉽게 짐작할 만합니다. 저는 애초에 경제학에 대한 어떤 권위 부여와 권력화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학문의 입장에서 공공의 이익과 보편적인 사회의 안정을 위해 과연 경제학이 어느 정도의 기여를 할 수 있겠느냐에 대해 프리드먼과 같은 자들의 왜곡에 거짓으로 휘둘려 왔다는 점을 먼저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인식에 있어서도 뒤피 역시 일관되게 동의하고 있었는데요. 저의 이러한 인식이 뭐 거창한 측면의 주장이 아니라, 이미 많은 학자들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나 합리적 이익이라는 것 자체가 거의 허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증명해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좀 더 솔직하게 경제학과 시장이 원하는 사회와 정치라는 점을 우리가 먼저 인식하고 이들에 대한 어떠한 신성한 측면 내지는 고유한 가치 체계에 시민들이 더 이상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의무와 채무와 전혀 존재 하지 않는 이익"이란 세상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먼저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 글에서 저자는 이런 경제학에 최근 윤리학의 가치가 필요하다는 여러 학계의 의견을 터무니 없는 조언으로 치부하고 있었는데요, 3장에서 인용 된 피터 틸의 투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지만 하이에크를 비롯한 사이비 경제학자들이나 경제적 이익에 함몰되어 있는 이들이 주장하는 합리주의라는 문제는 그저 얼마나 자본의 이익에 부합할 수 있느냐는 의도가 강력하게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미 보이지 않는 손이 허구에 불과한 것임이 입증되었는데도 경제학이 윤리학의 당위를 받아들여 '인간 다운 경제학'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달걀에서 마땅히 꿩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 경제와 경제학에는 오로지 모두가 동의하는 법에 의한 규제와 책임과 책무에 대한 원칙이 물리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더욱 강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뒤피의 4장에서 논의되는 내용은 그만큼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자본의 이익에 결코 반할 수 없는 것이 경제학의 관념이라면 지금은 무엇보다 자본이 갖는 역설들을 타파하고 수많은 경제학자들에게 터무니 없이 공격당한 우리의 민주주의를 제 궤도에 올리는 길만이 시민들의 보편적 이익과 수요와 공급이라는 맹신의 굴레에서 조금이나마 우리들의 삶을 보전하는 방편이 될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비합리적인 선택'에 대한 자본의 맹비난은 이처럼 다시 생각해 볼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보다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모인 사회 역시 타도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이 얼토당토가 되지 않는 것처럼 인간 스스로가 비합리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장 자크 루소가 견지한 일반 의지는 이러한 대목에서 도출되었다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뒤피가 인식한 루소의 공화론, 즉, 어떠한 매개조차 없이 시민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행위 자체가 진정한 정치 행위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어쩌면 자연 상태를 올바르게 벗어날 수 있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자기 운명적인 서사에 있어서 우리 인류의 미래는 단순한 인과론의 굴레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경제와 자본이 추구하는 이윤에 대한 문제도 그런 식으로 살펴 볼 수도 있고 뒤피의 말마따나 "냉전 시대에 전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었을 핵전쟁을 그야말로 '가까스로' 모면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제가 신성한 범주 안에 마땅히 들어가는 그리고 시민들이 결코 그것의 권위를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옥죄고 있는 원인일지도 모릅니다. 글 서두에 뒤피의 언급대로 이러한 경제적 초월성이 실제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실질적으로 박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했던 것이죠. 즉, "경제인들이 오로지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지고 이타심도 관대함도 없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단지 그들이 '비도덕적'이어서일까?"라는 주장은 이처럼 자본과 경제의 메커니즘을 실질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물론 로드릭의 글이나 크라우치의 글들에서 시장과 경제에 좀 더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가치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어느 정도는 인정하고 있었는데요. 경제에 대한 아주 평범한 인식을 갖고 있는 많은 시민들에게 뒤피의 이 글은 매우 적나라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르네 지라르의 주장대로 어떠한 것의 권위를 제거하는 일이 그것으로 인한 문제를 파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은 더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전문가들의 무조건적인 소멸을 바라는 반지성주의자는 결코 아니지만 많은 시민들의 견제, 토론, 비판적 의견 개진 등은 전문가 혹은 전문가의 영역이라 하더라도 현대 사회에서는 무조건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엘리트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의 오해일 수도 있지만 경제와 사법을 막론하고 사회 내의 '완벽한 균형자'를 엘리트 사이에서 찾기 힘든 연유는 이러한 무관심과 괴리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계급주의적인 배타성을 더욱 심화시켰다는 점은 그래서 더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뒤피는 이 글의 4장에서 '논리적 선택이라는 가설'로서 경제학에서의 합리주의 및 자본의 이익추구가 어떠한 형태를 띠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학문에서의 형이상학적 연구가 실질적으로 불가하다는 점을 뒤피가 피력한 것일까요. 물론 저의 억측 일수도 있겠습니다.

사회와 한 민족의 정치 형태가 아무리 민주적이라 하더라도 모든 시민은 항상 자기를 감시하는 몇 개의 지점을 느끼면서 끈질기게 그 시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은 학문을 행하고 있으므로 모든 관념적 가설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순을 시장주의자들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개인들이 가격에 대한 인과율적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격을 고정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경제에 이런 정책적 문제가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경제학이 철학적 노력을 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상호 의존성이 강한 경제에서 구매력의 회로는 매우 복잡하므로 기업가들이 과잉 생산한 상품이 결국 재고품 전문 가게로 가지 않는 것만 바랄 수 있을 뿐이다

경제 이론이 최대 이익을 추구한다고 말하는 합리적 인간이 서로를 신뢰할 근거는 하나도 없다

루소가 규정하려 한 것은 중개자도 대표자도 없는 국민에 의한 국민의 직접 통치이다

하지만 경제는 정치를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면서 절실히 필요한 외부 힘을 상실한 채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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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의 자유로 가는 길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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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버틀란드 러셀은 아마도 그 시기의 진정한 백과전서를 추구한 지성인으로 충분히 존경 받을 만한 인물이라 여겨집니다. 물론 저 역시도 러셀에 대해 온갖 미사여구를 쓰고 싶은 충동에 빠지기도 합니다. 혹자들은 그런 러셀을 허버트 스펜서에 빗대어 분석하기도 하는데요. 아마도 다방면의 분야에 관심을 갖고 당시의 선도적 연구를 해왔다는 측면에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체로 이에 반대하는 편입니다. 사회학에서의 스펜서의 악명을 고려한다면 러셀을 거기에 비교하는 행위는 다소 옳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러셀은 생애 말년에 이르러서 자신이 사회주의자인지 평화주의자인지, 자유주의자인지 모르겠다고 밝히기도 했는데요. 특히 인류와 정치에 관련된 그의 사상이 격동의 세기를 거치면서 다소 변화될 수밖에 없는 요인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사회주의에 대한 불신을 몸소 겪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것은 시대의 첨예한 굴곡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The Proposed Roads to Freedom"으로 지난 1918년에 첫 출간되었고, 지금 국역본은 2006년의 영국 스포크스먼 출판사에서 새로 찍은 것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국내에는 2012년 10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러셀의 이 책은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이 피력하는 당시 시대의 여러 문제들과 그러한 것들을 과연 정부가 해결해 낼 수 있느냐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기반해, 대다수 시민들을 위한 자유 자체를 어떻게 하면 소수의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서 이를 보장하고 어떻게 하면 모든 시민들이 마땅히 누리게 되는 균형적인 자유 사회가 될 수 있는지를 논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글의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5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국가의 권력에 대한 장(章)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거듭 중요해지고 있는 경제, 즉, 경제 권력의 국가와 정치 침투에 대해 본격적인 논증이 부족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다음 6장에서 러셀은 앞으로 금융 자본주의가 더욱 세를 얻을 가능성을 예측하고, 반대로 종래의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했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분배가 오늘날 이 시대에 더욱 사활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은 아마도 예측하기가 어렵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여기에 러셀은 그 시대의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대의제 민주주의에 극도의 회의를 느낀다고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앞선 장들에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이 민주주의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에 대해 러셀 역시 이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평가하고, 민주주의가 어떤 시대의 정치 체제보다도 낫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 만하나, 민주주의가 절대 만능이 아님은 모두가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다만 제 생각으로는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한계들 가운데 무엇보다 민주 체제에서 자본 권력을 분리하지 못한 지난 1세기 간의 실패가 가장 큰 요인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이것은 슘페터가 비판한 민주주의의 부패의 문제가 어느 정도는 자본 권력의 영향 하에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글에서 러셀은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한 세간의 평가와 분석을 늘어놓으면서, 정작 본인은 생디칼리슴 (노동조합주의)에 대해 이들이 주장하는 정치적 가능성에 대해 논하고 있기도 한데요. 우선, 그 시대의 아나키즘의 영향이라고 단언하고 있는 '정치적 불신'이 노동자들의 노동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들의 정치 세력화가 이를 개선할 수 있는 이론으로 충분히 가능성이 엿보였으나, 과거 아이젠하워 정부를 거쳐, 기존의 뉴딜 경제 정책이 전부 철회되고, 신자유주의에 의해 노동 조합이 전반적으로 분쇄되었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일부 국가를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멀지 않는 미래의 결과물을 러셀이 제대로 목도하지 못한 점은 꽤 유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제가 보기에 이 글에서 논의되고 있는 "자유의 불평등 문제'가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이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일반 시민들에게 자신의 경제적 조건이 자유의 문제를 가늠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가능하다면 충분한 생산력을 보이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생활 수준을 영위할 수 있는 경제적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는 러셀의 원칙에 일정 부분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 3장에서 인용된 길드 사회주의는 확실한 대안일 수는 없겠으나, 꽤 고려해 볼만한 대안이라 여겨졌습니다. 이 길드 사회주의로 의회와 길드 평의회라는 양원화 된 권력 분업 체제가 소비자와 생산자라는 입장에서 균형적인 정치 권력으로 이원화 가능성이 점쳐졌는데요. 이것은 클라우스 오페의 독일 정치에 대한 평가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아직도 노동자주의와 이들의 권익에 민감한 독일은 자신들의 주류 정치가 사회 민주주의라는 것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많은 독일 제조업자들이 노동자들과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내고 있는 점은 길드 사회주의의 정치적 제안들이 아주 허무맹랑한 것이 아님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생산된 것들이 노동자들에게 좀 더 돌아가야 한다는 생디칼리슴의 주장을 정치적 맥락에서 받아들여 자본가들의 권력 비대화를 줄여나가는 쪽으로 견제할 수도 있겠는데요. 하지만 이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만큼 정치에 있어 자본의 잠식이 그동안 아무런 사회적 동의 없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거의 반증한다고 생각됩니다.

아나키스트들에게 있어서 국가에 대한 혐오와 분쇄 노력은 지금에 와서는 다소 맞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보다 아예 직접적으로 언급하자면 이러한 국가 혐오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아주 반기는 내용이기 때문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데요. 물론 국가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반대의 의견을 찍어 누르기 위해, 그 권력을 폭력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인간의 진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죠. 저는 아직도 경제적 재분배에 있어서 국가가 소기의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단순히 시민의 자유와 체제 전반을 자신의 의도대로 오용될 수 있다는 국가의 공포에만 집중한다면 자본의 횡포를 제한할 길이 거의 없을 겁니다. 그동안 많은 보수 우파들이 현재의 정치적 불신을 조장하는 쪽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챙겨왔는데요. 신자유주의와 보수 우파가 오래전에 결탁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국가로 인한 위협의 문제는 본질을 한참이나 벗어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지금으로선 국가 사회주의와 같은 강력한 국가 체제의 출현이 실질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이는 역사학자인 크리스토퍼 클라크가 분석한 것과 같이. 1914년 이후의 유럽의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의 본질은 폭력적인 민족주의가 바탕이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처럼 어느 주의나 주장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그 본질이 나타내는 것이 무엇이냐를 밝혀내고 구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민주주의에 대한 한계를 꼬집은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의 연구는 오늘날의 사회 분위기와는 다소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최근에 겪은 펜데믹 사태로 보았을 때, 국가가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 따위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는 것이죠. 러셀이 작금의 펜데믹 사태를 예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염병에 걸린 사람은 공동체의 위협이 될 수 있으므로 이동할 자유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사회에 왜 형법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가와 맞물린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개인의 자유는 필요에 따라 공동체를 위해 제한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러셀의 말마따나 이 자유는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공동체와 공공선 역시 중요한 화두이기도 합니다. 저는 민주주의가 자유 그리고 평등을 가장 잘 보장할 수 있는 정치 체제라고 여기지만 반대로 오로지 자유만을 위해 민주주의가 오남용 되는 일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글 5장에서 언급되는 위선의 탈을 쓴 민주주의의 정치인들의 모습이나 "가장 정직한 사람조차 소름끼치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평가로 보건대, 선출된 자들의 특유의 자리보전이 민주 정치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그러한 저들의 정치적 이익이 한편으로는 시민의 자유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익히 모두가 알다시피, 아주 친자본적인 입장에서는 경제적 권력이 월등한 자가 그렇지 않은 모든 자들을 부릴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되고 있기도 합니다. 자신 스스로가 속으로는 민주주의를 극도로 경멸하면서도 겉으로는 민주주의의 신봉자처럼 연기하는 자들이 있듯이, 자본이 은연중에 이룩해 민주주의에 반하게 되는 이 계급주의적 열망은 이처럼 명백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측면에서 아나키즘이 시민들에 대한 경제적 분배의 필요성을 역설했는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래서 민주주의에 대한 자본의 지배가 이제는 아주 명확하다고 볼 수 있는 이 시점에 시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직접적인 투쟁에 나설 수 있는 지점이 있을지는 다소 회의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민주 정치에 있어 자본의 지배는 너무나 면밀하고 치밀하기 때문에 우리가 신봉하는 제도와 법률 역시 경제적 자유와 자본의 권력화를 사실상 용인되는데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자본에 대한 건전한 비판 역시 점차 성역화 되는 실정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러셀이 이 책의 본질이 가까운 우리의 현재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요. 사회주의와 아나키슴은 물론 저자인 그가 그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했던 생디칼리슴 역시 그 전망이 비관적이었던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에 실현 가능한 최선의 체제는 길드 사회주의이다. 길드 사회주의는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요구와 생디칼리스트들의 국가에 대한 두려움을 모두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는데, 이러한 태도는 국가 간의 연방주의를 지지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 여러 직종들로 구성된 연방주의 체제를 채택함으로써 가능하다

반면 아나키스트와 생디칼리스트는 모든 대의제 기구에 반대하며 공동체의 정치적 사안을 다른 방식으로 규제할 것을 지향한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특권과 인위적 불평등의 철폐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들 모두 민주주의자이며, 기존 사회의 임금 노동자들을 위해 싸우는 투사이기도 하다

생디칼리스트들은 현대 사회에 필요한 것은 여기저기 조금씩 해대는 땜질이나 기득권층이 기꺼이 동의할 만큼 사소한 조정이 아니라 근본적 재건, 즉 압제의 모든 근원을 일소하고, 인간의 건설적 활력을 해방하며, 생산 및 경제 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고 규제하는 것임을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프랑스는 권력을 거머쥔 수많은 정치가들을 보면 원래 사회주의자로 정치 이력을 시작했으면서도 결국에는 군대를 동원하여 파업 노동자들을 탄압한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이보다 더 큰 소득은 생산된 재와의 총량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공동체가 유용하다고 인정하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만일 모든 사람이 외부 권력에 일절 간섭을 받지 않고 생동한다면 우리는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일을 즐거운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한, 사회가 선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 따위는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는 주로 권력이 부와 결탁하여 낳는 해악을 근거로 들며 부의 불평등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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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미래 - 7개 키워드로 보는 미국 파멸 보고서
크리스 헤지스 지음, 최유신 옮김 / 오월의봄 / 2019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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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크리스 헤지스는 중앙아메리카와 구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종군 기자로 활약했고, 글로벌 테러리즘에 대한 주제로 퓰리처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는 뉴욕 주 해밀턴의 사립 명문 대학인 콜게이트 대학을 거쳐, 하버드 대학에서 신학 석사를 수여 받았습니다. 현재는 미국 자유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자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신자유주의와 그에 따른 정부의 기업에 대한 맹종을 맹렬히 비판하고 있기도 한데요. 특히, 그는 과거 종군 기자의 이력으로 인해 탐사 보도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언론인이기도 합니다. 그는 기자로서 뉴욕 타임즈에서 오랫동안 경력을 이어가다 현재는 1인 미디어와 다름없는 다큐멘터리 제작과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활동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헤지스는 모국어 외에 레반트 아랍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구사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원제, "America : The Farewell Tour"로 지난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10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이 글에 나타난 저자의 한 가지 일화를 먼저 소개하고 싶은데요. 현재 대안 우파 alt-right에 대항하여 소위 선제적 폭력 시위를 조장하는 미국내 과격 좌파 운동에 대해 저자인 헤지스는 여러 강연을 통해 이를 신랄하게 비판한 바가 있는데요. 이 글 5장에서, "좌파들이 도덕적 자산을 포기할 때, 기업 국가에 반대하는 어떤 저항도 정당성을 잃는다"는 맥락으로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강연을 위해 바깥 출입을 한 헤지스는 강연장 밖에 있던 과격 좌파들이, "엿이나 먹어! 크리스 헤지스"라는 간판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는 점은 저자인 헤지스가 양쪽에서 얼마나 적잖은 미움을 받고 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반적인 기업 이익에 전도된 신자유주의들에게도 비판의 강도를 멈추지 않고 있는데요. 이 글의 7장 말미에서 "기업의 힘에 굴복한 미국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현재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범위한 사회적 '병리 현상'의 책임은 전적으로 신자유주의와 이들의 이익을 위해 고군분투한 엘리트 지배 계층에 있다고 논증하는데 이릅니다.

주를 포함해, 거의 550여페이지에 가까운 이 글은 한국에 있는 독자들이 미국 사회적 병폐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르포르타주이기도 합니다. 이에 헤지스는 미국의 유구한 자유주의의 역사와 이를 바탕으로 구축해 온 사회 체계 전반이 최근의 신자유주의화에 의해 '공공선의 개념'이 분해되면서, 이 모든 피해는 고스란히 중산층 이하의 계층이 몸으로 감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밝히고 있습니다. 기업들의 막대한 이익을 위해, 아웃 소싱을 용인한 연방 정부는 과거 대기업의 생산 공장이 있던 작은 마을들이 경제적으로 파탄이 나면서, 동시에 해당 지역의 커뮤니티가 어떻게 슬럼화가 되었는지 잘 서술해내고 있는데요. 여기에는 의료 민영화에 따라 막대한 의료비 지출을 감내하고 있는 시민들은 정의나 도덕에 관심을 가질 틈도 없이, 오로지 얼마나 많은 총기를 보유할 수 있는가에 몰두하고 각 주택가에 흘러 들어온 마약과 이보다 더 많은 개인 병원들이 마약성 의약품을 처방하는 식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는 현실을 종군 기자의 날 선 글로 낱낱이 까발리고 있었는데요. 저는 여기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많은 소시민들의 몰락과 크나큰 아픔을 가슴 아프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여성을 성상품화하여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는 거의 360억 달러에 이르는 포르노 산업과 여기에 어쩔 수 없이 종사하게 된 하위 계층의 여성들, 더 나아가 이를 통해 매춘 산업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인간의 상품화의 모든 원인 제공은 '인간마저도 상품화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에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저자는 논증을 통해 거듭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제3세계 국가들에서나 벌어지는 각종 인신매매의 극악한 현실에서 "인신매매업자들은 가난한 여성들에게 합법적이 수입이 좋은 직장을 알선해주겠다고 약속하지만, 희생자들이 나타나면 인신매매업자와 포주는 그들에게서 서류를 빼앗고, 조작한 비용을 청구하고 마약중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돈을 빌려주고 회복하지 못할 빚의 노예로 만든다."는 일종의 '악의 구렁텅이의 매커니즘'이 선도적인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음지에서 자행 되고 있다는 점에서 실로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특히, 2장에서 논증되고 있는 오늘날 미국의 심각한 마약 문제에 있어, 마약상의 판매 루트가 제거되지 않고 판매 자체가 도저히 근절되지 않는 연유에는 거의 1조 달러를 투입하고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당국의 무능함도 한 몫을 더하고 있었습니다. 마약에 중독된 10대부터 성인들까지 이들이 현 사회에 다시 건강하게 복귀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이 일개 시민이 부담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억 단위의 비용이 소모된다는 점에서 미국의 의료 민영화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했는데요. 마약 중독이었던 딸의 장례비까지 포함해 거의 60만 달러를 소모한 어느 가정의 상황을 지켜보니, 이 나라는 사회 안전망이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껴졌습니다. 자신의 삶을 유지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자원을 오로지 스스로의 돈으로만으로 쟁취해야하는 이런 약육강식의 사회 체제를 신자유주의자들이 아주 침을 흘리며 칭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공동체의 의미, 공공선, 최소한의 타인을 위한 도덕심, 자신의 이기심을 제어할 수 있는 이성의 유무 등'을 무력화시켜야 할 정도로 이 미국 사회가 저들이 보기에는 이익에 위배되는 이르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평범한 시민들에게는 삶을 영위하기가 순탄치 않은 세상임은 일견 분명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처절한 상황에서, "기업 엘리트들은 세계적 무정부 상태에 대한 그들의 책임을 인정하기보다는 이것을 서양 문명과 인종주의적 폭력배와 중세기적 야만인들의 충돌로 치부한다"고 저자는 까발리고 있었는데요. 저자인 헤지스는 새뮤얼 헌팅턴의 저런 혐오를 조장하는 거짓된 관념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최소한의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사회를 거의 약탈상태에 이르게 만든 '기업 엘리트들'에 화살을 향하는 것 그 자체보다 기업 엘리트의 이중성, 탐욕, 무차별적인 노동자에 대한 폭력, 위선 때문에 그들을 증오하는 것이라고 밝혀두고 있습니다. 사실 스스로의 지성으로 사회가 당면한 문제와 그 원인을 탐구하는 능력이 오늘날 시민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일텐데요. 반대로 증오의 칼날을 엉뚱한 곳으로 향하게 하는 대안 우파 alt-right의 조직적인 반동적 운동은 공화당이 스스로 저런 행동들에 있서 스스로 정화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새로운 양상을 만들었는데요. 이는 프랑스나 헝가리 혹은 폴란드까지 최근의 극우 포퓰리즘이 우리의 시야 안으로 들어오게 했으며, 우리 역시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소위 자칭 보수들이 극우(혹은 극우 반동)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같은 맥락의 저들 대안 우파들은 인종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 신나치즘, 신파시즘, 신남부군주의, 음모론 등을 신봉하며, 사회를 절단내려 노력하고 있는데요. 소위 '미국 사회의 건전성'이라는 맥락은 이미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자면 시민의 정치적 분별력이라는 중요한 화두가 미국 사회에서는 거의 실종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리버럴을 자처하는 미국의 민주당 역시, 오래된 정치적 지지 기반이었던 노동자들을 끝내 배신하기에 이르렀는데요. 이브닝 드레스와 고가의 수트를 입은 좌파 기득권들이 파티장에서 모여 새로운 미국을 만드는 데 노력한 나머지, 1970년대 미국의 노동 조합의 무력화 되어 혹은 레이건이 올린 노동조합 무력화 법안에 이름을 올린 수많은 민주당 인사들의 면면은 거의 자신들의 일과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치부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배반에 있어서의 결과물이 최근의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과 이를 지지한 수많은 노동자 계층의 지지라는 현상이었습니다. 이들은 지금도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이슬람 세계의 숨은 지령을 받고 미국 연방 대통령에 오른 인물로 믿는 자들이 아직도 많은 지경인데요. 이를 단순히 반지성주의적 해체로 보기에는 음모론에 심취한 대안 우파들이 거짓 정보를 재생산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헤지스는 전반적인 논증 가운데, 아주 강도 높은 어조로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시민들의 적으로 자리매김했다고 평가하고, 이 신자유주의의 이행에 따른 광범위한 세계화의 이득이 소수인 엘리트 계층에게 돌아갔으며, 그 반대의 충격 여파는 평범한 시민들이 고스란히 받았기에 그 비판의 화살을 신자유주의자들과 엘리트들에게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장 철폐를 수단으로 주정부와 세금 감면 딜을 한 다국적 에어콘 제조 업체 캐리어 Carrier의 사례는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세계화에 따른 공장의 아웃 소싱은 워낙 유명한 개념이고 결국은 도시의 황폐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이런 대규모의 공장 이동이 자본의 이익을 위해 종용되었다는 점에서 일말의 사회적 합의나 정치적 토론이 어떻게 거세되었는지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여겨집니다. 즉, 일전의 뉴딜 시대의 정치와 노동조합의 사회적 합의를 꺼내지 전에, 시민이 노동자이자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단위로서 결국은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에 어떠한 식으로 해를 끼쳤는지 모두가 이해할 수 있을겁니다. 마찬가지로 이 글의 7장이 이러한 맥락으로 논증되고 있었습니다.   

끝으로, 우파의 병리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 저 대안 우파들이 저렇게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2008년의 심각한 경제 위기로 중산층이 붕괴되고, 부의 불평등이 더욱 심화된 상황이 있었습니다. 저들은 잘못된 비난의 화살을 이슬람계 미국인들과 흑인들을 비롯한 유색인종들에게 돌리고 있었는데요. 오로지 순수 백인들만의 아메리카가가 바로 그런 맥락입니다. 그런 면에서 신자유주의가 저런 사회적 폐단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도 헤지스의 논법대로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현재 미국 사회는 터무니없는 인종적 증오가 조장 되어 있고 이것은 저들 말마따나 사회를 완벽하게 분열 시킬 수 있는 시한폭탄과 다름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위험한 상황이기도 한데요. 이러한 시급한 분위기에서 미국의 존경받는 많은 저명 인사들과 지식인들이 수수방관하지 말고 한 목소리로 발언에 나서야 될 때라고 생각합니다. 시민들 사이에 편을 갈라 오히려 자중지란을 조장하는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 자체는 이미 역사에서 많이 본 것이기도 한데요. 한나 아렌트의 경고도 그렇거니와 글 초반에 보였던 발터 벤야민의 거의 울음을 토해내는 듯한 목소리로 인류의 비애를 묘사하는 것은 거의 음울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정치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그것에 기반한 것이 저들의 이익이기 때문에 사회가 선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라이트 밀즈의 분석은 우리가 더욱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헤지스는 사실상 자신들의 자유주의가 고삐 풀린 자본주의를 제어하는 데 실패했다고 사실상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자본주의를 제어하는 민주주주의 제도의 실패라고 요약할 수 있겠는데요. 언론 역시 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고 민주주의의 근간 대부분이 자본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도 그와 같은 평가를 내렸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물론 저로서는 자유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제어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는지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사회를 총체적으로 손아귀에 넣은 뒤, 오로지 이익에만 힘쓰게 한다'는 문구는 이처럼 너무나 익숙한 느낌이 들게 되는 것이죠.



-헤지스에 의하면, 과거 남북전쟁 이전의 시기에서 노예 농장주들은 흑인 노예 여성 사이에 태어난 자신의 자식들을 노예로 팔았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많은 백인들이 지난 역사에 대해 진정한 반성을 보이지 않는 연유인 걸까요. 



이런 기업들은 금융 산업이든, 화석연료 산업이든, 농업과 식품 산업이든, 군수 산업이든, 통신 산업이든 모두 그들의 강력한 힘을 사용해서 국가의 메커니즘을 장악하고 누구도 그들의 세계적 독점에 도전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들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가격을 조정할 것이다

스티브 배넌은 이런 약탈 행위를 "행정국가 해체"라고 명명했는데, 아주 적절한 말이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에 입각한 진리가 완전히 거짓으로 둔갑하는 일이 계속 일어나면 거짓이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진리가 거짓으로 오명을 쓰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보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실제 세계에서 우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감각, 즉 우리의 정신적 기능 가운데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는 기능 자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영구적 거짓은 전체주의의 극치이다

지배 엘리트들은 탐욕과 쾌락에 빠져서 특권을 가진 울타리 (파리 서남쪽의 도시 베르사유와 같은 금단의 도시)에 틀어박혀 살았다. 그들은 민중의 비참한 생활, 굶주림, 점증하는 가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부를 축적했다

철학자 존 그레이는 말했다. "우리가 가진 진보의 핵심적 신념에 의하면, 인간의 가치와 목표는 지식의 증대와 함께 진보한다. 20세기에는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인간은 이미 가지고 있던 가치와 목표를 주장하고 옹호하기 위해 과학적 지식의 힘을 사용한다. 신기술은 인간의 고통을 줄이고 자유를 증대시킬 수 있다.그러나 이것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혹은 전제정치를 강화하는 데 쓸 수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과학은 산업혁명의 동력인 기술을 가능하게 했다. 동시에 20세기에 이 기술은 전례 없는 규모로 국가적 테러와 대학살에 이용되었다. 그러므로 윤리와 정치학은 지식의 성장과 일치해서 진보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리 긴 안목을 가지고 역사를 보아도 그렇지 않다"

모든 공공기관과 제도는 부패했다. 언론, 대학, 예술, 법원, 교회를 포함한 모든 종교기관은 미국 예외주의, 미국의 덕목에 대한 신화, 자유와 융합한 고삐 풀린 자본주의를 섞어 만든 독이 든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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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4-20 1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터라이프님, 안녕하세요? 지난 주에 올려주셨던 멍크 디베이트 관련 글을 폰으로 읽어서, 다시 읽고자 서재 들렀다가 보물같은 글부터 만나게 되었네요.

저자가 종군기자에 다중언어 구사자에, 신학을 학문으로 접근했던 이력 그 자체가 크리스 헤지스란 분에 대한 호기심을 들게 합니다. 좌우, 양쪽에서 비판 들어가면서도 소신 발언하고 발로 뛰는 이 분 대단하단 생각도 들고요. 다행히 한국어판도 있군요^^ 표지 그림, 쪼그려 앉은 자유의여신상이 내용 이미 말해주는 것 같네요.

˝ 이브닝 드레스와 고가의 수트를 입은 좌파 기득권들이 파티장에서 모여 새로운 미국을 만드는 데 노력한 나머지˝ 노동자들을 배신한...이 대목 너무 그림이 잘 그려지고 익숙한 이유가 뭔지, 씁쓸해집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베터라이프 2022-04-20 18:42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얄라님 ^^. 저 개인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좌파 언론인인 로버트 미지크와 여기 헤지스를 종종 비교하기도 하는데요. 미지크가 자비가 없는 독설가라면 헤지스는 약간 순한 맛이라고 할 수 있어요 ^^;;;;

저는 헤지스의 서평을 쓸 때 마다 구글링을 제법 했었는데요. 그는 꽤 민주주의에서 시민의 정치 참여를 강하게 바라고 있는 언론인이기도 합니다. 많은 언론인들 가운데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같은 거 아니냐 하는 무지몽매한 자들도 있지만 헤지스는 이러한 언론 상황에서 매우 귀한 인물입니다. 저는 속된 말로 헤지스가 대안 우파들한테 암살이라도 당할까봐 걱정이 되기도 해요.

그리고 이 책을 읽다보니 다시금 알게 된 것이 미국의 사회 안전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어요. 형태만 민주주의라 할 수 있는 금권 민주주의에다 자본의 이익 메커니즘을 최대한 보장하는 쪽으로 사회 전반이 개조되었죠. 윤석렬 당선인이 의료 민영화를 추진할지 안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미국의 현재 모습이 반면 교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의료 민영화가 미국처럼 우리에게 진행된다면 거의 인세의 지옥이 펼쳐지리라 판단됩니다.

그리고 빌 클린턴 대통령과 유사한 미국 리버럴들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항은 민주당이 평범한 노동자들의 삶과 괴리되어 정치 엘리트화가 급속히 진행된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사실상 기존의 기득권과 자본가들에게는 신자유주의가 이득이 되면 이득이 되었지 손해 볼게 없는 상황이라 정치-경제 엘리트간에 전에 없는 결속력을 보이고 있는 미국 상황에서는 리버럴들에게는 아마도 거스를 없는 기회였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서 ˝위 아 더 월드˝는 그저 눈속임에 불과했던 것이죠.

끝으로 다시 한번 저의 보잘것 없는 서재 와주셔서 감사해요 ^^;;
 
정치 전쟁 - 2022년 대선과 진보의 자해극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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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는 강준만 교수는 익히 알려진 대로 쾌도난마의 글로 유명한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강교수의 여러 글들 중에 공저로 쓴 '문학 권력'을 읽고 당시에 제가 느꼈던 한국 문단에 대한 실체는 실로 충격이기까지 했습니다. 강교수는 글을 쓰기에 앞서 자료 조사를 철저히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고 잘못된 대상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거의 거리낌이 없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다소 도가 지나치기도 합니다만 현재로선 강교수와 같은 사람은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20대 대선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저에게 강교수의 이 책은 뭔가 훌륭한 배경 설명이 되어주지 않을까 반쯤 그런 기대를 갖고 완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출간은 아시다시피, 2022년 4월에 이뤄졌습니다.

언론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유권자들에게 20대 대통령 선거는 과도하게 불거진 '비호감 선거'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양 후보 둘 다, 대통령의 자격이 없다고 했었죠. 이에 저자는 아주 큰 틀에서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의 오판과 무능이 전 검찰 총장인 윤석렬 당선인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큰 책임을 갖고 있고, 역시나 민주당 대선 후보인 이재명 후보와 그의 아내에 대한 여러 문제점을 지목하면서 전반적으로 이번 대선은 진보 세력의 실패로 귀결되고 있었습니다. 소위 '싸가지 없고', '팬덤에 휩싸인' 진보 세력이 결국은 국민의 심판을 받은 것으로 규정되기까지 하는데요. 기존의 승자 독식의 선거판과 정치 대결에서 대통령에 오른 이들이 과열된 충성으로 인해 현실을 망각하게 되었고, 특히나 과거 김영삼 대통령부터 시작된 '캠프 정치'가 오히려 대통령을 잘못된 길로 가게 한다는 저자의 비판적 분석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아마도 문재인 정부의 조국 사태는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번 대선의 가장 큰 패착의 요인으로 작용한 문 정부의 부동산 대책은 저자의 언급대로 '내집 마련의 꿈을 갖고 있는 수많은 무주택자들을 사실상 일부러 망각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는데요. 한편으로는 은행 대출을 받아 부동산 갭투자를 하며 짭짤한 이익을 거둔 기존의 사람들을 보며 자신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보통 사람들의 허망한 기대조차 날려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이는 진보든 보수든 대의나 명분의 정치가 이미 저물어버렸다는 명백한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스티글리츠의 언급대로 신자유주의화가 아주 잘 이루어진 국가인 한국에서 개인의 이익 추구는 그만큼 중요해진 화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대선 캠프에 이름을 올린 인사들이 당선 이후, 이익과 권력을 위해 이전투구를 벌일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분석은 그래서 의미심장한데요. 사실 기존 세대들이 자신의 자식들에게 그렇게 많은 자원과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아이들이 나중에 좀 더 수월하게 자신의 이익을 취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됐든 대학 입시도 그러한 맥락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그래서 이번 대선을 경험한 모든 국민들이 자신이 바라보는 정치인 아무개의 이익이 어디에 존재하고, 이 사람의 인맥과 행적들이 어떤식으로 이루어져 왔는지 면밀히 감시하면서 동시에 정치인의 순수한 정치적 사명감은 그저 겉으로만 보이는 치장과도 같은 것임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버틀란드 러셀의 언급대로 이제는 사실상, 정치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이익 추구만을 위한 무대로 전락해져 버린 것이죠. 

약간 상이한 인용이겠지만 브레진스키는 국제 외교 무대는 선과 악의 대결장이 아니라 전부 회색지대라고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의 정치 역시 어느 정도는 그런 일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특히 양당 체제에서 각자가 속한 정치 그룹 이외에 다른 이들을 극명하게 혐오하고 백안시하는 건 사실상 진보 보다 보수가 더 수월하게 잘하는 것이었습니다. 강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많은 진보 세력이 반대편의 보수를 토론과 타협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사실상 극도로 혐오했다고 놀라운 평가를 하고 있는데요. 저도 스스로 보수라는 분들과 단순히 정치적 대화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눠봐도 의견 교환과 그들이 갖고 있는 기본적 인식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인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선거 기간에 진보에 있는 사람들도 과격한 카를 슈미트가 연상 될 정도로 상대방과의 소통을 거부했으니, 저자의 말이 아주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부분만은 명확히 하고 싶은데요. 전 정권인 박근혜 정부 때의 인사들과 그 정권의 탄생에 관여한 인물들이 반대편에 있었던 당 관계자들이 아직도 그 시기의 '국민에 대한 정치적 배반'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다는 점인데요. 분명한 것은 정부 자체를 그런식으로 무능과 파탄에 이르게 한 일차적인 책임이 그 당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누구 하나 책임을 지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죠. 이걸 단순히 정치적 연좌제를 거론하자는 것이 아님에도 그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 여기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또 정치 공세는 정치 공세대로 아랑곳 없이 퍼부어 댔죠. 저는 저들이 단순히 법적으로 책임을 지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사과의 현장이 있어야만 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대다수는 전 대통령의 연고지라고 할 수 있는 대구와 경북의 분위기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기에 바빴죠.


그럼에도 이 글을 통해 알게 된 이재명 후보의 여러 소명되지 않은 문제, 후보의 아내에 대한 과도한 의전 문제는 충분히 비판을 받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의 후보로 지명 받기 전에 이낙연 전 의원과 이 의원 캠프에 대한 석연치 않은 이 후보 측의 행동 등은 다시금 이 후보가 문제가 적지 않은 사람이었구나를 깨닫게 되었는데요. 이 부분에서 일개 정치인에 대한 과도한 팬덤까지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증명된 이재명 후보에 대한 과도한 팬덤은 정청래 의원의 실망스런 발언들과 더불어, 진보 역시 기존 정치와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자신들이 이미 기득권임을 인정하고 이 기득권 비판을 할 수 있는 권리는 수많은 보통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저자의 언급이 크게 다가왔는데요. 더욱이 그전까지 터무니 없는 정치 공세로만 여겼던 여권 인사들이 수사 성역에 한 가운데 있어 어느 정도 검찰의 눈치보기가 있었다는 부분도 그 배경에 대해 인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윤 당선인이 대권을 쟁취하고 나서, 단순히 영부인에 대한 알려진 의혹들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아서 문제였다는 것보다 이제 그녀에 대한 의혹을 검찰이 과연 수사를 할 수 있겠느냐는 모두가 짐작하는 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아 이것도 현재 정치의 한계인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글 서두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고 강교수는 개탄하고 있었는데요. 이보다 오랫동안 검찰에 몸을 담으며 상명하복의 조직에서 검찰총장까지 지낸 분이 과연 쓴소리를 소화시킬 수 있을지 저역시 강하게 의문이 듭니다. 그리고 일개 시민으로서 검찰 출신 대통령의 검찰과 또한 막역한 전 부하 직원이고도 할 수 있는 한 모 씨의 법무부 장관 기용과 같은 뚜렷한 정치 일색이 과연 우리의 민주주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 많은 고민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민주주의를 30여년이나 경험한 국민이니 일개 검찰 출신 대통령의 탄생이 체제 전반의 위협이 되리라는 예측은 어쩌면 철지난 억측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선인이 국회를 파트너로 삼아 국정을 이끌게 될지는 앞으로 두고 봐야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진보 역시 더 나은 정치를 위해 자신들이 스스로 쇄신의 대오에 서는 것도 정치의 건전성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윤 당선인의 정부가 국민을 위한 정책을 펼치려고 나아가고자 한다면 거대 야당 역시 이에 발을 맞추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일견 대적의 정치라는 극도의 대결 논리가 아직도 한국 정치에서 중요한 어필임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중도 정치에 반대하지만 이런 대결 국면에서는 중도의 정치 세력화가 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차기 정부가 과연 국민의 견제를 마땅히 받을 것인지는 앞으로 좀 더 두고 볼일이라 생각합니다.


-저자의 언급대로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던 검찰 개혁은 2017년에 시도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국 전 장관의 내각 기용은 그것대로 불행이었고, 그로 인해 2019년 전후로 문 정부의 민심 이반이 시작되었다는 분석은 거의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구조적 여성 차별 문제를 훤히 꿰뚫고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걸 넘어서기 위한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자들이고 했던 민주당 여성 의원들이 ‘박원순 사건‘떄 ‘피해 호소인‘운운하면서 보여준 비겁한 추태는 어찌 이해해야 하는가?

이른바 ‘캠코더(대선 캠프,코드, 더불어민주당)인사‘를 통해 공공기관과 공기업의 요직을 장악한 문재인 정권 인사들은 우선 자신들의 분야에서부터 그 문제와 더불어 비정규직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어야 했다

즉, 당위적으로 옳다고 해서 무조건 지지하는 동시에 이의 제기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대남 선거 전략에 관한 한 윤석열은 이준석을 멘토로 모심으로써 이준석이 저야 할 이미지 책임까지 덮어쓰고 말았지만, 이제부터는 이대남과 페미니즘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런 네거티브의 소재가 무엇이냐에 따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점도 없진 않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증오,혐오 마케팅‘에 치중했기에 그런 기대를 걸기도 어려웠다

대통령은 주로 그들이 선별적으로 전해주는 정보에만 접하기 때문에 자신이 잘하고 있는 걸로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혹 반정치주의는 무조건 비난하기보다는 그게 나올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일종의 ‘딜레마‘로 다루어야 하는 게 아닐까. 반정치주의의 토양이라 할 유권자의 정치 불신과 혐오는 심각한 수준이며, 이에 대한 해결책도 사실상 없는 상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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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4-20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책 한 권 들고 까페에 앉았다가 베터라이프님 리뷰들이 오늘의 제 책이 되어줍니다.

강준만 교수님께서는 자료수집 정리하시는 특화된 능력이 있으신지, 그렇게나 텀 짧게 신간을 내시면서도 허투루가 없으신 듯 자료 인용이 상당하시더라고요. 늘 어떻게 자료 정리, 저장하시는지 궁금해지게 만드는 교수님.

2022년 4월이면 최신간이군요. 요것도 읽어보겠습니다.

˝과연 쓴소리를 소화시킬 수 있을지.....˝ 강력 동감입니다.

베터라이프 2022-04-20 19:13   좋아요 2 | URL
저의 부실한 글이 도움이 되셨다니 약간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

강교수의 이 책은 사실 저번 대선을 분석하고 진보에게 어떤 책임이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서였어요. 다른 것보다 강교수는 진보 세력의 내로남불을 유독 강하게 비판했는데요. 논증이 전부 완벽하다고 볼 순 없지만 대체로 인정할만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진보는 분명 성찰할 부분이 있었습니다.

전에 기사로 얼핏 본 것 같은데, 강교수가 중요 인사들에 대한 어록? 뭐라고 불러야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그와 같은 걸 데이터화 해 놓고 활용하고 있다고 본 것 같아요 제가 지그문트 바우만의 주장과 인상 깊은 문장들을 수집하는 것처럼 강교수도 그와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는 거겠죠? 근데 이분한테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자기의 발언이 고스란히 수집되고 있으니 발뺌은 뭔가 통하지 않을 것 같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