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의 회전 기담총서 1
헨리 제임스 지음, 임명익 옮김 / 크로노텍스트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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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는 1843년 4월, 미국 뉴욕의 맨해튼 자치구, 워싱턴 스퀘어 인근 워싱턴 플레이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헨리 제임스 시니어와 메리 월시로, 부친은 총명하고 거기에 호감가는 인물로 강사이자 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모친인 메리는 뉴욕시에 오랫동안 정착한 부유한 집안 출신의 여식이었습니다. 이런 헨리는 사남일녀 가운데 둘째로, 한 살 위인 윌리엄과 남동생인 가스 윌킨슨, 로버트슨이 있었습니다. 헨리가 한 살이 되기 전에 그의 부친은 워싱턴 플레이스의 집을 팔고 가족 모두를 데리고 유럽으로 기한 없던 이주를 하게 됩니다. 1845년까지 영국 윈저 그레이트 파크의 작은 저택에서 머물던 그들은 그해 뉴욕으로 다시 돌아왔고, 헨리는 유년 시절 대부분을 알바니에 있는 친할머니 집과 맨해튼 웨스트 14번가 58번지에 있던 집을 오가며 지내게 됩니다. 이후 1855년과 1860년 사이,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주된 직업적 관심사와 출판 사업의 향방에 따라, 런던, 파리, 제네바, 불로뉴쉬르메르, 본,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를 오가게 되었고, 간혹 가족의 자금이 부족할 때는 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헨리 제임스의 첫 출판물은 1863년에 출판된 연극 공연 평론으로, 첫 단편 소설인 "오류의 비극 (A Tragedy of Error)" 이 익명으로 출판됩니다. 이어지는 1869년부터 1870년까지 그는 14개월간 유럽 여행을 하게 되는데요. 이때 헨리 제임스는 존 러스킨, 찰스 디킨스, 매튜 아놀드, 윌리엄 모지스, 조지 엘리엇 등과 만남 및 교류를 이어가게 됩니다. 1875년이 되자, 그는 네이션 (The Nation)지에 매주 글을 기고하기에 이릅니다. 그해 가을이 되자, 그는 파리의 라틴 지구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미국으로 두 번 장기간 들른 것을 제외한다면, 그는 이후 30년 간의 남은 생애를 유럽에서 온전히 보내게 되었습니다. 또한 헨리 제임스의 작품 활동 역시, 1875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되는데요. 그해, "로더릭 허드슨"을 시작으로 "아메리칸", "워싱턴 스퀘어", "여인의 초상", "보스턴 사람들"과 같은 의미심장한 장편들을 세상에 내놓게 됩니다. 그의 작품 초기, 신대륙에서 구대륙인 유럽으로 향한 지식인이자 작가로서, 그의 작품에서 미국과 유럽, 양쪽으로 병렬적으로 경험한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유럽의 오래된 문학 역사에서 그도 역시, 일종의 이방인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헨리 제임스는 그의 많은 작품을 통해, 각 인물 간의 의식의 변화 혹은 자신만의 분명한 인지를 갖고 살아가는 인물들에 대한 애정을 표함과 동시에, 당시 시대와 관습이 배타적으로 강요하는 '인습의 굴레'에 대해서도 뚜렷한 비판 의식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시대상과 관습에 어느 정도 얽매여 있는 여성 캐릭터들을 잘 그려낸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Turn of the Screw"로 지난 1898년에 출간되었고, 이번에 제가 구입한 번역본은 2025년 8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접해보셨을 것 같은 헨리 제임스의 이 작품은 당시에도 큰 주목을 받았지만 이후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에도 여러 평론가들과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들에 의해 색다르고 다양한 분석으로 이름이 높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이 작품이 예전의 고딕 형식을 어느 정도 오마주한 공포 소설로 독자들이 은연중에 갖고 있는 내면의 공포심과 그것을 부추기는 드러나지 않는 '거대한 악'에 대해 일종의 작가 나름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일전에 히틀러의 나치가 사람들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저열한 측면을 끊임없이 부추긴 것처럼 일견 호의에 기반한 사람의 의도가 어떻게 붕괴될 수 있는지를 이 작품은 잘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초반 전개부터 정확히 어떤 의도로 쓰였는지 파악해야 될 수많은 수사와 수식어구(영문법의 표현으로)는 사건과 그에 따른 맥락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난해한 부분으로 작용했습니다. 특히 작가인 헨리 제임스는 이 작품에서 만큼은 그다지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는데요. 작품의 서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축이라고 볼 수 있는 어린 마일스가 퇴학을 당한 이유가 명확히 설명되지 않고 있는 점은 오로지 독자들의 상상과 그에 따른 추론에 일임 되어 있어, 극의 결말의 해석 부분과 맞물려, 꽤나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 자신의 소설을 쓰기 시작한 소위 견습 작가들과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중견 작가들에게서도 이 작품의 해석을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러한 부분은 사전에 인지해 두고 극을 읽어 내려간다면 독자에 따라 꽤나 흥미로운 부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이 이르게 되는 블라이 저택의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그로스 부인'에 대해 본의 아니게 많은 숙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극의 서두에서도 이미 드러나지만 주인공인 여성은 이제 갓 소녀티를 벗은 인물로 할리가의 아이들인, 마일스와 플로라를 적절한 지도와 정서적 보살핌을 제공하기 위해 블라이 저택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녀는 서사에서 잠깐 소개되고 있듯, "멸종되는 법이라고는 없는 유형인, 잘생기고 거침없고 호감형인, 소탈하고 쾌활한 독신남 할리 씨"의 크게 감화되어 (젊은 여성이 저런 축복을 타고난 귀족적 남성에게 받을 수 있는 인상은 아마 모두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동생의 아이들인 두 남매를 열성적으로 보호하고 가르칠 것을 스스로 다짐하게 됩니다. 이렇게 극에서 그녀의 수차례 언행과 바람을 통해, 이 '할리 선생'을 다시금 재회하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그와의 관계에 대해 꿈 같은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거의 상상과 같은 근거 없는 기대 말이죠. 이것은 단순히 여성의 신분 상승의 욕구라고 해석되기 보다는 그녀가 할리에게 받은 개인적 인상과 그로 인한 확고한 신념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요. 특히, 어느 정도는 이 아이들을 자신의 시야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던 할리가 그녀에게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타고난 재능으로 적절한 마음가짐을 그녀에게 추동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인 그녀로 하여금 자신이 책무를 다하게 만들기 위한 약간의 술책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오롯이 그 책임이 할리에게 있다기보다는 자기 나름의 희망적인 재해석을 감행한 그녀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인 그녀가 이 아이들과 대면하는 가운데, 할리와의 숭고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자신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갖고 어떻게 아이들을 인도할 것인지에 대한 일종의 압박과 사명감을 어떤 식으로 자신의 내면에 덧씌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규명된 여러 정신병증으로 대입해 본다면, "무조건 잘해야겠다"는 정신적 압박이 어느 정도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연계가 아주 직접적으로 극에서 묘사되고 있지는 않지만 결국 그녀가 맞닥뜨리게 되는 일종의 환시(幻視)를 초래하게 된 것인데요. '자연의 섭리'를 위반하는 '영적 요소'라는 문제가 인간이라는 피조물로서는 도저히 극복하기 힘든 치명적인 균열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는 극의 전반부 서사에서 가장 큰 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며, 극의 중반 이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그녀와 마일스와의 인식적 불협화음과 그녀 자신의 일방적인 기대로 말미암아 파국의 조짐이 드러납니다. 작가인 헨리 제임스는 이 두 사람의 파국을 작가 스스로 이해하는 인간 내면의 악을 드러내는데 이용합니다. 십 세 가량의 어린 남자 아이가 극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애어른 혹은 어른아이"로 규정하고 그가 구사하는 언어들이 천진난만한 소년의 그것과는 대비되어 나타나는데요. 이런 측면에서 이런 장면들을 접하게 되는 독자들은 마일스에 대해 무언가 섬뜩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단순히 "아이 치고는 영악하다"는 표현을 넘어, 전형적인 캐릭터 이상의 깊은 인상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는데요. 다만, 주인공인 그녀가 몸소 겪게 되는 환시에 대해선 아이의 수사와 행동에 의도적으로 겹쳐 놓게 됨으로써, 극 후반부에 그녀가 어린 마일스에게 추궁하는 대화가 거의 양쪽의 분열된 인식을 표출 시키기에 이릅니다.

순결하거나 그 반대의 두려운 의미로 함께 쓰이는 영체를 경험하는 주인공은 이미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의 영혼 혹은 (가능성이 높은) 환시를 겪게 됩니다. 마일스와 곧잘 어울렸다는 저택의 하인 피터 퀸트와 그녀의 전임자였던 제슬 선생이 가히 목격되는 것인데요. 그녀는 내가 '귀신'을 본 것 같다는 의미의 고백을 처음 그로스 부인에게 하게 되고, 일절 본 적이 없던 피터 퀸트와 제슬 선생의 추정되는 이미지를 부인에게 전달하게 되자, 그녀는 쉽게 '그 사건'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는 두 영혼의 외형상 보여지는 모습을 이 그로스 부인이 확인 시켜 준 것입니다. 바로 이 행동이 그로스 부인의 행적의 분석하는 가운데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부분입니다. 물론 단순하게 작가인 헨리 제임스가 그로스 부인조차도 주인공이 겪고 있는 '현상'을 같이 경험했다고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녀와 그로스 부인이 나누게 되는 대화나 그녀를 향한 부인의 일관된 동조와 신의는 단순한 극의 함정 요소를 넘어, 해석 상 난해한 설정으로 자리매김 합니다. 이 때문에 결말에 대한 많은 해석을 낳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 그로스 부인에 대해 첨언을 해보자면 그녀는 신분 상의 지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인물로 자신이 처해 있는 신분 상의 위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의 고용인인 할리의 신임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주인공에게 쉽게 수용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물론 그로스 부인이 어느 정도 저택 내의 주인공의 권위를 인정하고 이것에 대해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저택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부인의 위치로 봤을 때, 갑자기 나타난 가정 교사에 대해 은연중 저항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는 않습니다) 극의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물론 이는 작가의 의도된 상황 설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극의 후반부에서 마일스가 학교에서 퇴학 당한 이유에 대한 추궁이 마일스를 (물론 스스로 감행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의문이 들지만) 비극적 결말로 이끌게 됩니다. 그가 자신의 여동생과 이 저택에서 지낼 수 있게 된 것이, 큰아버지인 할리의 배려임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그 자신이 여동생의 안위까지 책임지고 있다는 점을 정신적 압박으로 지배 당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퇴학의 이유'를 추궁하는 (미처 서로 신뢰를 쌓지 못한) 가정교사의 압박은 어린 아이의 감수성으로는 아마도 쉽게 극복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극에서는 이미 그를 향해, 영악한 어른아이로 설명되고는 있지만 일상의 어른과 같은 보편적 인식과 태도를 갖추었다고는 볼 수는 없기에, 아이의 측면에서는 이러한 분위기가 원치 않는 압력이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졸지에 고아가 된 아이들의 심리 상태가 일반적일 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극 중반부터 이어지는 주인공의 의뭉스런 행동과 그를 향한 억측의 오해들이 중대한 압박이 되어, 굳이 영체나 자연의 흐름을 벗어나는 현상을 내밀지 않더라도 결말은 어느 정도 파국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이 작품을 일독하고 나서, 구글에 떠도는 이 작품의 해설 등을 살펴보니, 어느 블로거가 헨리 제임스의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다른 단편 들을 포함한 중요 작품을 일독해야만 한다고 언급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일부 단편들은 읽어볼 필요가 있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작품의 후기에서는 주인공인 가정교사가 일종의 성적 압박에 놓여 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관점도 있었는데요. 앞의 서사에서 그러한 인식을 뒷받침하는 간접적 문장들이 있어서 그런 쪽의 추론도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주인공이 사망한 전임자였던 '제슬 선생'의 아름다운 용모를 간접적으로 그로스 부인에게 구술하는 장면이나 이를 바탕으로 내려지는 전임자의 외모 평가는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본문 164페이지에 띄어쓰기 오류 한 곳이 있었습니다.


- 이 작품의 역자는 '거시기'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었는데요. 굳이 원문이 궁금하지 않더라도 이 단어를 쓰게 된 연유는 어느 정도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이런 번역이 신선하기 보다는 조금 부자연스러운 측면이 있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더욱이 번역된 작품 내에서 한자어와 같은 의도된 의미의 번역들이 여러 곳에서 보여서 저는 역자가 이 작품을 영어로 된 원전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일본어나 중국어로 번역된 작품을 중역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다른 역자가 번역한 글을 재차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풍채 좋고 단순하고 소박하고 깔끔하며 건전한 아낙, 그로스 부인이 무척 반가운 나머지 너무 티를 내지 않으려고 확연히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음을 인지하기까지는 도착 후 반 시간도 안 걸렸다.

"그 꼬마 신사에게는 정신없이 휩쓸리실 거예요."

잘 생각해 보니 나의 첫 임무는 내가 동원할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솜씨로 아이를 구슬려 나를 아는 삶으로 느끼게끔 하는 일이었다.

거기서 내가 품었던 공상은 우리가 거의 대형 표류선에 타고 있는 한 줌의 승객만큼 길 잃은 신세라는 것이었다.

확실히. 이 소년의 학교 행실이라는 영역이 계속 알 수 없는 어둠에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특히 마일스에게서 이를테면 과거라는 게 없는 아이 같다는 느낌을 받은 기억이 난다. (중략) 내가 아는 그 애 또래의 누구보다 매일 인생 새출발을 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아이였다.

"퀸트만 좋아라 했던 거죠. 도련님을 데리고 노는. 그러니까 제 말은, 도련님을 망치는 걸요."

그래서 나는 얼른 해당 화제에 대한 나의 관심이 이제는 거기서 탈출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형태를 취하느라 난리라는 말로 부인을 안심시켰다.

부인이 그토록 친밀한 연대의 적절성을 비평하고 부조화를 암시하며 심지어 제슬 선생에게 대놓고 건의를 할 정도로 나섰던 일은 기실 매우 적합한 진상이었다.

내가 압박하자 부인이 실토하길,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각각의 위치를 잊지 않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적어도 그런 소년이 학교장에게 쫓겨났다는 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유의하기도 했었다.

"우리의 기묘한 숙명 속에서 우리가 어디에 있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배울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어떻게 갑자기 무너졌는지, 틀림없이 저 애도 내가 자기에게 어떻게, 시쳇말로 넘어갔는지 알리라는 생각에 떠밀려 침대 가장자리에 주저앉았는지.

"그 한 쌍이 그 소름 끼치는 시절에 아이들에 쏟아부은 만악 때문이죠. 또, 그 죄악을 아이들에게 계속 더 권하려고, 계속 마귀다운 짓에 매진하려고, 그러려고 다른 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원래 남자가 여자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방식은 그저 본인 인생의 낙이라는 신성한 원칙을 더욱 신나게 즐기는 식이기 일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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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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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은 1948년 6월, 영국 햄프셔주 올더숏에서 부친인 데이빗 매큐언과 모친인 로즈 릴리안 바이올렛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스코틀랜드 노동계급 출신의 군인으로 소령으로 전역합니다. 매큐언은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어린 시절 대부분을 싱가포르, 독일, 북아프리카에서 보냈고, 그가 12살이 되어서야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이스트 앵글리아에 위치한 서퍽의 울버스톤 홀 스쿨 (런던 소재 남학생들을 위한 기숙형 중등학교)을 거쳐, 이스트 서식스 주의 팔머에 위치한 공립 연구 대학인 서식스 대학에서 영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뒤이어 그는 노리치에 위치한 연구 대학인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 (UEA)에서 논문 대신 자유로운 글쓰기를 할 수 있는 권리와 함께, 위탁 교육을 받게 됩니다. 이런 그의 첫 출판 작품은 단편 소설집이기도 한, '첫사랑, 마지막 의식'으로, 이는 1975년에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6년에 '서머셋 몸 상'을 수상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몇 년 간의 단편집을 시작으로 문단에 주목을 받다가 1988년 이후, 비교적 성공적인 작가의 경력을 이어가게 됩니다. '암스테르담', '속죄', '토요일', '체실 비치에서' 등의 작품들이 연달아 평단과 대중들에게 큰 찬사를 받게 되고, 특히 1998년에는 '암스테르담'으로 그해 부커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매큐언은 지금까지 부커상 후보에 총 여섯 번 지명되었으며, 이와는 별개로 왕립 문학회 (FRSL). 왕립 예술회 (FRSA), 작가 협회 회원에 등록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영국 인문주의자 협회의 저명한 후원자이기도 합니다. 이런 작품 활동 이외에, 매큐언은 공개적으로 여성과 동성애에 대한 폐쇄적인 이슬람주의의 종교적 견해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했는데요. 여기에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 인들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해결책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데 있어 비판을 가했고, 2016년 6월, 영국 정부의 유럽 연합 회원국 자격에 대한 국민 투표에서, 이러한 정치적 시도에 대해 매큐언은 "영국이 완전 변했다"며, 신랄하게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작품은 원제, "Lesson"으로 지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롤런드 베인스는 그의 부모라는 출신 배경과 자신이 태어난 연유에 있어, 작가인 이언 매큐언의 자전적 요소가 작품의 틀로 덧대어 나타납니다. 특히, 매큐언의 모친의 첫 남편이 전투에서 전사한 후, 애인과 재혼했다는 설정과 매큐언 자신에게 입양된 형제가 있다는 사실 역시, 이 작품에 간접적으로 등장합니다. 여타 다른 평론에 있어, 주인공인 롤런드가 자신의 삶을 통해,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삶'을 주목하고 이것을 개인의 선택의 문제를 중요시 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이데올로기에 비교하여, 다소 다채로운 평가를 내리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극중의 롤런드가 자신의 인생을 거치게 되는 시기가 첨예한 냉전의 시기에서 영국 사회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 대처의 대처리즘적 신자유주의 시대, 그리고 냉전이 종식되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거쳐, 최근인 2021년의 코로나 사태까지, 한 인간의 삶이 그저 온전하게 소급될 수 없는 그야말로 격동의 여러 시기를 작가의 평이한 서사를 통해, 우리는 롤런드라는 인간을 다시금 우리 방식대로 재조명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이 롤런드라는 인물을 반쯤 비극적으로 추동하게 되는 음악 교사 미리엄 코넬은 그가 14세가 되던 해에, 등장합니다. 그녀는 1959년에 왕립음악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인물로, 그녀는 쉽지 않은 가정에서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십대 시절을 보내고 있던 롤런드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대로, 어린 시절 가까운 지인이나 이웃을 통해, 불행하게도 성폭력을 당한 소녀들이 그 기억 때문에, 평생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롤런드 역시, 그의 십대로 인해 결국 온 평생을 저당 잡히게 되는 혹독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미리엄이라는 인물은 후반부에 설명되는 자신의 불행을 롤런드를 통해 어느 정도 불식시키게 되는데요. 이는 이 두 사람이 '피아노 수업'이라는 매개로 나이를 떠나, 양자가 본질적으로 한쪽이 우선권을 갖는 소위 '권력 관계'가 될 수밖에 없음을 당시 성인이었던 그녀가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관계를 교묘히 이용하여, 롤런드를 지배합니다. 이러한 부지불식간의 조건에서 롤런드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인간'으로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면서, 내면적인 갈등으로 삶에 있어, 많은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물론 작가인 매큐언이 이 때의 두 사람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결핍'을 안고 있는 롤런드가 이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 성적 충동, 성적 몰입에 몸을 맡기게 되면서, 성인이 아닌 십대 아이가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은 에둘러 '쾌락'과 비슷한 면모로 재해석 되기도 합니다. 물론 매큐언의 이런 묘사를 무조건 부정할 수 있는 건 아닐겁니다.

그렇게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서 학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물론 미리엄이라는 선생을 통해, 그야말로 아주 작은 그의 '빛나는 시기'가 극의 1부 마지막을 장식하지만 결국 그의 인생은 경제적 나락 그 이상의 충격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건전하게 정립하고 통제하는 능력 자체를 잃게 됩니다. 이런 롤런드의 삶이 극적인 대비로 그려지는 '엘리사 에버하르트'와의 짧은 결혼 생활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남자'의 그야말로 비극적인 귀결이 되고 말았습니다. 매큐언의 다른 작품인 '검은 개'에 등장하는 '준'처럼, 아내인 엘리사의 모친인 제인과 '딸보다 더 장모를 이해하는 사위'로 그려지는 듯했으나, 제인 역시, 어떤 면에서는 삶에 있어, 적극적으로 투쟁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엘리사는 그런 어머니의 '좌절된 꿈'과 단편적으로 자신이 이해한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남편', 이 두 사람을 경멸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의 파급은 꿈을 위한 '모성과의 단절'이었습니다. 제가 동아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정서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글쓰기를 위해, 남편과 아들을 버리는 엘리사의 그 가혹한 모성의 중단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과거를 극복하기는 커녕 그저 매일 섹스를 요구"하는 남편과, 다가오는 '엄마 노릇'에 자신이 매몰되게 된다면 더이상 자신의 꿈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그 절박함은 이 작품을 다 읽은 이후에도 짐작이 되지 않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기존의 관습과 모성성을 파괴하는 인물인 엘리사와 크게 대비되어 그려지는 성실하고 사려 깊은 대프니 이 양자는 그만큼 롤런드의 사랑, 그리고 그의 어긋난 삶을 드러내는 인물들입니다. 특히 대프니의 마지막 염원을 들어주기 위해 마지막 까지 노력하는 롤런드의 힘겨운 투쟁은 그가 마지막에 비로소 선택한 사랑에 대해 어디까지 지켜내고 헌신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작가인 매큐언의 의도를 전부 짐작할 수는 없겠지만 3부에서 드러나는 롤런드가 직면한 미리엄과 엘리사와의 어설픈 해후가 그렇게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런 배경에 있다고 설득이 되기도 했는데요. 더욱이 엘리사라는 인물이 표징하는 최악인 관점은 롤런드의 모친인 로절린드가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 그리고 후에 용기를 내어 그가 결정한 제2의 결혼 생활의 상대인 대프니가 전 남편에 의해, 자행된 가정 폭력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엘리사가 최근 내놓은 장편인 '그녀의 느린 몰락'에서 의도적인 인물 암시로 인해, 여주인공을 때리고 가정을 내팽개친 소설 속 남편을 롤런드로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등치시킨 점입니다. (극에서 이미 규명되지만 롤런드는 한번도 엘리사를 향해 폭력을 휘두른 적이 없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작가는 롤런드에 품에서 행복한 삶을 맞이하게 되는 대프니와 엘리사 에버하르트가 아주 명확히 서로 대척점에 있는 인물로 구성되었고, 이 양자의 언행과 행위 자체가 오직 극적으로 대비되어 나타나는 서사의 의도 역시, 아주 명확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엘리사는 그간의 작품 활동으로 충분히 자신의 재능을 증명했고, 이는 극중에서 현재의 평단들로부터 귄터 그라스와 토마스 만보다 더 훌륭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찬사도 받게 되는데요. 마찬가지로 치열한 신자유주의 시대 (엘리사가 자신의 꿈을 이뤄내기 위한 과정 자체가 신자유주의의 이상과 부합한다면)에 자신의 자식들을 건사시키고 평생 현장에서 일을 놓지 않은 훌륭한 어머니이자 조언자였고, 그리고 롤런드에게 더할 나위 없던 충실한 연인이었던 대프니의 예견하지 못한 불행한 말로는 어찌됐든 뒤이어 등장하는 후반부 극의 중요한 장치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은 주인공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는 물론, 그가 어느 정도 각성하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요.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저 납득하는 걸 넘어 안타까운 정면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주인공인 롤런드는 어떻게 보면 전통적인 남성성이 배제된 인물이기도 한 데요. 앞서 언급한대로 그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절대로 권력적 속성을 지향하고 휘둘렀던 캐릭터가 아닙니다. 실제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여타의 인물들과는 그 궤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 미리엄과의 왜곡된 성 경험과 그에 따른 피지배의 경험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노동당을 지향했으면서도 끝내는 소극적이었고 베를린이 분단 되었던 냉전의 시기에 그때 만난 어린 두 소녀를 지켜주지 못했다고 확신하는 그 찰나의 현실을 평생 안고 살게 됩니다. 여기에는 나치와 관련된 역사 약간의 팩션으로 쓰이긴 합니다만 전반적으로 매큐언의 이런 요소들은 과거 작품들처럼 현대의 굵직한 사건과 일개 개인의 삶이 어떠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지독한 탐구를 엿보이게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십대 시절의 롤런드가 그 당시 냉전의 핵무기 경쟁에서 어린 감수성으로 말미암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일상적인 삶 속의 공포'가 그저 허무맹랑한 무언가로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극에서 이 핵무기라는 단어가 적잖게 등장하지만 어떻게 보면 일상적 삶이 그것을 둘러싼 정치적 조건의 틀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과 그저 바등거리며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을 냉소하기보다는 그때의 현실이 어땠는지, 절묘하게 이원적으로 서사를 도입하는 작가의 구성은 여전히 생각할 거리를 남겨 주었습니다. 특히 냉전의 공포나 베를린에서 동독 당국에 의해 구금된 지인들의 생사 여부를 알 수 없던 상황은 개인이 그러한 통제 범위 이외의 정치적 문제를 읽는 내내, "우리라면 어땠을까?"를 고민해 보게 만들어줍니다. 매큐언의 글쓰기는 이런 부분에 있어 매우 탁월하기에 아무리 호불호가 갈리는 서사의 틀이라고 할지라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누구에게나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거나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그 시도 자체 만큼이나 가혹한 것은 사실일 겁니다. 물론 작가의 의도였겠지만 롤런드가 맞이하는 미리엄과 엘리사와의 그 불완전한 해후는 이 작품의 옥의 티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용기란 그만큼 쉬운 문제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 롤런드라는 캐릭터는 충분히 선량한 인물이었고 물론 우리의 삶에서 속속들이 타당하고 설득력이 있는 행동이나 언행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롤런드로 투영되는 평범한 삶의 의미는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서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일관된 무언가는 아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연유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이들이 과거의 철인들의 삶을 본받아 대오각성에 준하는 어떤 개선을 작가가 바란 것은 결코 아닐겁니다. 그렇다고 거대한 정치적 대립과 이데올로기 투쟁에 놓여 있는 평범한 삶의 아련하고 안타까운 측면을 그저 표면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 하나 만으로 점철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극 후반부에 롤런드가 거의 홀로 키워낸 자신의 아들로부터 탄생한 손녀에 대한 사랑이 자신의 내면을 모두 채워버리는 진정한 '사랑'이 되었음을 롤런드가 말년에 깨달은 것처럼 각자의 인생에서 이러한 깨달음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보여진다면 그 인생은 결코 실패한 인생은 아닐 겁니다. 은연중에 작가인 이언 매큐언이 극중에서 로버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를 롤런드의 서사로 스치듯 보여주고 있는 장면처럼 모든 걸 속속들이 다 버리지 않아도 충분히 인생의 도(道)는 각자가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본문 560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 책 제목은 다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극 후반부에 드러나는 '세월의 레슨'이라는 작가의 표현은 세월이 개인의 삶을 통해 가르치는 단련과 무뎌짐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과거의 롤런드가 미리엄 때문에 겪게 되는 삶의 파편들을 의미하는 것 같아 마음이 먹먹하기도 했습니다. 


-작품 말미에 작가인 이언 매큐언이 감사의 말을 적고 있었는데요. 그 마지막에는 자신이 수학했던 울버스톤홀학교를 언급하며, 그곳에는 미리엄 코넬과 같은 피아노 선생님은 없었다는 강렬한 문장에서 저는 크게 웃고 말았습니다. 다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저 문장은 그것대로 큰 위미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선생과 제자는 죄책감을 느끼며 서로 떨어졌고, 그는 무슨 상황인지 잘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그들이 이제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하나로 묶인 걸 알 수 있었다.

스스로 만든 지옥은 흥미로운 구조물이다. 누구나 평생에 적어도 한 번은 만들게 되어 있다. 어떤 이들의 삶은 그런 지옥일 뿐이다.

어떤 여자들에겐 홀로 아기를 키우는 남자가 매력적이고 심지어 영웅적으로 보인다. 남자들에게 그는 멍청이로 보일 것이다.

그는 선생님의 모욕적인 질문과 자신을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부른 것 때문에 아직까지도 당황한 상태였다. 그는 부모님과 작별한 이후로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 그 1984년 여름에 앨리사는 어머니의 일기장을 읽은 후 감정 기복이 심해지며 상태가 이상해졌다.

딸이라는 이유로 그녀에겐 오빠가 누린 대학 교육 혜택을 별다른 고민 없이 제공하지 않은 부모님에게 "섭섭하고 심지어 분노까지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폴란드 침공 이래 그곳에서 삼십만 명의 유대인이 가장 야만적인 방식으로 학살되었다."

하인리히 역시 자신의 고압적인 태도를, 아내는 마땅히 집에서 자신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는 가부장적 기대를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최고의 삶은 풍요롭고 다원적인 것이며, 의무는 불가피하고, 황홀경에 감싸여 그것을 위해서만 사는 건 불가능함을 알았다.

지난 수년간 베를린장벽에서의 돌발적인 대립으로 3차대전이 발발할 거라는 예측이 있었다.

롤런드가 어렸을 때 몹시도 격렬하고 소유욕이 강하고 무서운 사랑을 보여주었던 아버지는 로절린드에게 손찌검을 하고, 남편을 잃은 여자에게 사기친 일을 자랑하고, 모든 가족 행사를 - 대개 술주정을 부리며 - 좌지우지하고, 무자비하게 자기 생각만 반복해서 주장하고, 수전의 증오를 살 말 못할 짓을 저질렀다.

앨리사에게, 리베나우에서 눈길을 걸으며, 그녀의 소설에는 그 고백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 종말이 올 거라는 두려움에 즉각적인 성경험을 얻으러 간 건방진 어린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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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서태평양 전쟁 - 미국은 중국의 대만 침공을 어떻게 억지할 것인가
로버트 해딕 지음, 장성준.박남태 옮김 / 김앤김북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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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로버트 해딕은 예비역 해병대 장교로서, 과거 동아시아와 인도양 및 아프리카에서 안보 관련 지원 활동을 해왔고, 특히 인간 신뢰성 프로그램에 따라 핵 지휘 및 통제 임무도 맡은 이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현재 그는 미 공군 협회 산하 미첼 연구소의 객원 선임 연구원으로 공군, 우주군, 사이버 역량의 개발을 위한 연구를 지속하고, 이에 따라 미래 국가 안보 전략 전반에 기여를 하고 있는데요. 이런 그의 주된 연구 분야가 인도-태평양 지역의 전략적 경쟁과 현 지역 내의 특수 작전 등을 포함한 특수 상황이므로, 그에 따른 여러 강연 활동도 지속해오고 있는데요. 특히 그는 중국과 인도-태평양을 포함하는 지역의 미국 내 안보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이런 그의 이력이 녹아들어, 꽤나 암울한 전망이 그려지는 이 글은, 원제 "Fire on The Water"로 지난 202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11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해딕의 이 책은 지난 2014년에 처음 출간되어, 앞으로 직면하게 될 중국의 서태평양 위협에 대한 우려를 적시한 글로 당시 미국 내에서 큰 주목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출간된 같은 제목의 이 책은 변화된 중국 정치와 군사력 증강에 따라, 일종의 증보판으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저는 본격적인 글로 돌아가기에 앞서, 이번 판본의 한국어판 서문에 실린 저자의 우려섞인 진단을 적어보고자 합니다. "중국의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 역량의 급격한 성장으로 촉발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점증하는 안보 경쟁은 미국이 향후 20년 동안 직면하게 될 가장 중대한 국가 안보적 도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어쩌면 우리가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는 어두운 미래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에서 가까운 미래의 중국이 대만 침공으로 인한 그 불똥이 한반도에 미칠 수도 있다는 우려 섞인 전망이 눈 앞에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과거 냉전 시기 이후, 미 국방부의 군사적 과제이자 소위 부처의 독트린 혹은, 미 연방 정부의 군사 독트린이라고 볼 수 있는, "전세계에서의 동시다발적인 두 전쟁을 함께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저는 다시금 곱씹어 보게 됩니다.

일전에 지오바니 아리기는 당시 대두하는 중국을 보면서, 최종적으로 이 국가가 불완전한 강대국에 머물게 될 것이라고 진단했었는데요. 이것이 작금의 중국을 있게 한,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에 동의했던 엘리트 학자들의 자신을 속이는 변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이들이 더 큰 이익을 위해, 중국을 이용했고 그것의 수십 년의 결과가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중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빌 클린턴 행정부의 대다수 각료들은 중국을 세계 시장으로 인도해, 이 나라를 민주화로 이끌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는데요. 물론 저자인 해딕이 자신의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와 같이, 덩샤오핑이 강조한 '도광양회'과 시진핑의 집권 이후, 전반적으로 철회되어, "할 말을 하는 중국", "국제 사회에 국력에 맞는 대접을 받고 싶은 중국"이라는 정치적 수사를 넘어, 일종의 타협하지 않는 민족주의로 정치를 일관해 작금에 이르렀습니다. 시진핑 이전의 전임 국가 주석이 덩샤오핑의 사후 유지를 받들어, 지역 사회는 물론 전세계 국제 무대에서 어느 정도 자제를 하고 있었던 중국 외교 기조가 전자의 변화로 말미암아, 완전히 뒤바뀌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 책의 2장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듯이, 동남 아시아의 말라카 해협은 대만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에게는 매우 중요한 해상 교통로이기도 합니다. 뒤에서 더 논의되겠지만 이 미국인 저자의 눈으로 본, 말라카 해협의 지리적 의미에서,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의 원유 수입의 수송로는 물론, 각종 상품의 이동로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선험적으로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중국에게도 마찬가지로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미국과 주변의 동맹과 파트너국들로 이뤄진 '제1도련선'이 중국의 서태평양 진입을 사전 차단해왔다는 점에서, 이제는 대표적 무역국으로 올라선 중국 역시, 이 지역의 원할한 수송로 보호를 위해,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의 군사력이 '자신들이 동의하지 않은 통제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 어쩌면 국익의 심각한 위협으로 느껴 왔을 겁니다. 그런 연유로 남중국해의 각종 환초와 쓸모 없는 무인도를 기반으로 적극적으로 군사기지화에 나서, 이 거대한 바다를 자신의 영해로 주장하고 심지어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까지 무시하는, 중국의 소위 막무가내식 군사력 투사는 모두에게 우려를 끼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이징의 중국 지도부가 대만에 대한 '정상화'에 나설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해외의 전문가들은 중국이 2025년 내지는 2026년에 대만에 대한 군사적 침공을 시작하리라 예상했지만 푸틴이 일으킨 전쟁이 그것을 유예시키고 말았습니다. 물론 중국이 대만의 서부 해안에 대단위 병력을 상륙 시킬 수 있는 '대규모 상륙 전단'의 구축이 아직은 미흡하다는 평가가 대내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보면 이것은 시간 문제라고 여겨지는데요. 사실상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달러화를 고려해 봤을 때, 이것은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님은 명확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직면한 중국의 대만 정벌과 서태평양의 교역로의 위협은 어떻게 보면 미국이 반쯤은 자초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오바마 전 대통령의 2기 시절, 중국에 대한 그 나태함을 고려해 본다면, 당시에도 중국에 대해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했으나, 그것은 자유 시장이라든지 세계화의 기조, 내지는 2009년 이후의 충격으로부터, 세계 경제가 회복세에 들어서고 있었기에 아마도 환경 자체는 그다지 녹록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대만의 안보 위협 내지는 최종적으로 중국이 대만을 군사적으로 정벌하는 경우, 2장에서 저자가 경고하는 바대로, "경제적 충격은 논외로 하더라도, 자유로운 민주주의 국가인 대만이 중국에 예속되는 사태는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비극이며, 미국의 위신 또한 위태롭게 할 것이다."라고 진술됩니다. 또한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이 사태는 지역 내의 안보가 쇠퇴하게 됨으로써, 주요국들과 약소국들 사이에 소위 "홉스적 투쟁"을 촉발할 것이라는 일종의 비극을 예견하고 있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우울한 맥락의 비전에서 저자는 호주의 중국 전문가인 휴 화이트를 인용하여, "미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지킬 수도 없는 지위를 지키려고 하는 시도는 미국의 이익을 심각하게 손상시킬 불필요한 충돌로 이어질 것"이라고 언급하고, 결국 미국의 한발 후퇴와 더불어, "미국과 중국, 인도, 일본이 어떤 '세력권'을 형성"하여, 지역 강대국들의 협조체제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미래의 일본이 핵무장을 하는 것을 미국이 용인하고, 한국과 (대만)이 핵무장한 일본의 세력권으로 들어가 같은 지역 강대국인 중국을 견제한다는 정치적 발상이기도 한데요. 물론 현실 가능성을 떠나, 우리에게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휴 화이트의 저런 진술은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서태평양 지역 내의 미국의 영향력이 과거와는 달리 축소되어 왔고, 이것이 지금의 '대만 위협'과 같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고 보는 현실주의적 관점입니다.

확장된 군사력을 통한 자신의 비대해진 국력을 국제 무대에 투사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국익을 보호하려는 중국의 변화된 모습은 앞선 평가대로 미국의 군사력이 아마도 중국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겁니다. 이런 미국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대로 견실한 민주주의 국가이고 과거 전문가들과 우리가 숱하게 내뱉었던 '패권'에 대한 분석 여부를 떠나서, 미국 내의 여론 또한 행정부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입니다. 특히, 과거 냉전이 끝난 후,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언급한 "자유주의의 승리"에 따른 미국의 역할 변화, 그런 인식에서, 최근 이십여년간 진행되어 온, 중국과의 경쟁 혹은 미국의 통제력 유지는 그만큼 쉽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저자인 해딕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두번째 출범을 예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중대한 군사적 위기 상황에서의 트럼프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매우 불확실한 측면이 있기에, 과연 대만에 대한 침공 상황에서 지금의 미국 행정부가 어떠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그것 또한 우려스러운 입장입니다.

다만, 저자는 책의 2장과 3장을 통해, 지금이라도 미국이 서태평양 지역의 동맹과 파트너국들과 협의하여, 미군의 양적 주둔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한국과 일본 등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 만으로는 중국의 위협에 대응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더욱이 중국의 군사적 위협을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장비와 군대를 투입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군사적 현대화에 맞서, 미국이 재래식 군사력을 일선에 더 배치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약간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만, 앞으로 중국의 대만 침공을 전제하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대만을 방어하기 위한 실질적 자원들을 대만과 가까운 지역에 미리 배치하는 것도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저자는 4장 이후에서, 현대화된 중국의 미사일 전력과 조밀하게 배치된 인공위성 전력에 매우 큰 우려를 표시하고 있었는데요. 더욱이 양적으로 증대되고 있는 중국의 해군 전력 또한, 심각한 위협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석들은 저와 같은 비전문가가 보기에도 어느 정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첨단 미사일 발사체에 쓰일 수 있는 반도체와 일부 엔진 부품들은 수출 통제를 유지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국제 공조와 특히 일부 유럽 국가들의 비협조를 미국 관료들이 설득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중국 미사일의 현대화에 따른 사정거리 확대는 그만큼 미국이 자랑하는 대양 해군력에 실질적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끝으로 6장 이후의 논의들은 인공 위성과 같은 중국의 우주 전력 구축에 대한 함의, 중국 해군의 확장된 군사적 위협에 맞서, 미국이 어떻게 전략적으로 대응해야 되는지를 제언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후반부의 논증은 어떻게 보면 일반 독자들을 위한 목적보다는 현재 미국의 국방 관료라든지 혹은 군사 정책에 책임 있는 정치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읽힙니다. 그만큼 군사 분야의 전문적인 용어들과 군사 시스템 하의 복잡한 개념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책은 여타 전문가들보다 확실하게 중국의 대만 침공을 예견하고 있고, 디가오는 이런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대비 태세를 미국 책임 있는 관료들과 더 나아가 백악관에 일종의 대비 태세를 포함한, 경각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저자의 이 책에서 중국의 군사적 현대화가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충분히 목도할 수 있었는데요. 특히 전략 무기라고 볼 수 있는 순항 미사일을 비롯한 중국의 미사일 확충은 이웃 국가인 우리나라에게도 충분히 위협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게 될 경우, 이들이 북한을 움직여 휴전선의 도발을 획책한다는 가정보다, 순항 미사일로 평택 미군 기지를 무력화 시킬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렇게 될 경우 중국과의 불필요한 전면전이 발생될 수도 있는데 (우리가 미국과 동맹국임을 감안해 본다면) 이를 한국 정부가 통제할 수 있을지, 이 점도 크게 우려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까운 대만의 위협은 그저 바다 건너 나라의 문제가 아님은 분명해 보입니다.



- 저자의 설득력 있는 논증들 가운데, 그것들의 귀결은 한 가지 명확한 사실로 이어지는데요. 그것은 "중국에 대한 미국의 재래식 억지력이 무너졌다"는 평가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서구 연합국에 의해 형성된 기존 국제 제도와 규범은 법의 지배, 개방 경제, 모든 국가의 주권, 인권과 민주적 가치, 그리고 법과 규칙의 공정한 적용을 보호하고 확대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미국의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동맹국 및 우방국들에 대한 안보 공약의 신뢰성을 지키는 것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데, 미국이 방어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한 지역의 소유권이 불분명한 몇몇 경우에도 그랬다.

무력충돌이나 자유 무역 원칙의 쇠퇴로 이 지역 소비자들에 대한 접근을 잃게 된다면, 직접적 충격과 그 파급 효과로 인해 미국의 경제와 근로자들의 삶의 수준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중국의 제1인자로 등극하기 전에 시진핑과 교류했던 서구의 정책결정자와 외교관들은 그가 자신이 열성적인 마르크주의자이자 마오쩌둥과 그 노선의 추종자이며, 자신의 중앙집권적 권위 하에 있는 강력한 중국공산당만이 중국이 직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그 전략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임을 드러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번 장에서 중점적으로 논의할 가장 불길한 두 번째 경로는 이 지역의 안보를 유지하는 역할로부터 미국의 퇴각이 지역의 주요국과 약소국들 사이의 안보를 위한 홉스적 투쟁을 촉발하는 상황을 상정했다.

따라서 패권국들이 모두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역내 패권국보다는 역외의 패권국과 합의를 이루기가 더 쉬운 법이며, 이 지역에서 안보 유지를 위한 미국의 주둔이 환영받는 변치 않는 이유이다.

따라서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중국의 군사적 팽창에 맞서 미군의 전진 배치를 유지하는 비용과 인도-태평양 지역이 자체적으로 유지되는 안정을 구축하도록 내버려두는(만약 그러한 노력이 실패한다면, 미국과 나머지 세계에 미치는 결과가 파멸적일 것임을 알면서)비용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중국은 미국의 동맹관계를 와해시키고, 인권을 훼손하고, 세계 경제를 중국에 유리하게 조작하고, 그리고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수호하고 발전시켜온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폐지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인근에 집중 배치된 미군은 훨씬 남쪽 지역에서 증가하는 안보 문제와 화약고들에 대처하기에는 분명 부적절한 위치에 있다.

유감스럽게도, 지난 60년간 미군 전반의 경향은 장거리 타격 능력을 소홀히하면서 고도의 능력을 지닌 단거리 무기 플랫폼에 과도하게 편중되어왔다. 이러한 해로운 경향은 태평양에 있는 미군을 매우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무력충돌이 발행했을 때, 비교전국(예를 들면, 한국)이 자국에 주둔하는 미국이 자국의 영토로부터 중국을 대상으로 한 군사 작전을 벌이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그와 같은 미군 기지는 미사일 한 방 날아오지 않더라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것이다. 전진 배치는 침략의 확대를 억제하는 수단이지만 또한 군사 작전에 있어 잠재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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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포퓰리즘 선언! - 민주주의의 위기와 정체성 서사
로저스 M. 스미스 지음, 김주만.김혜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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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9월 20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스파턴버그에서 태어난 로저스 M. 스미스는 미국의 헌법, 정치 발전, 정치 사상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정치학자입니다. 그는 1974년 미시간 주립대학의 제임스 메디슨 칼리지에서 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영국으로 넘어가, 켄트 대학에서도 연구를 지속했습니다. 이후 하버드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해, 1978년에 석사 학위를, 2년 뒤인 1980년에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또한 스미스는 1980년부터 2001년까지 계량 경제학자인 알프레드 코울스를 기념한, 예일 대의 알프레드 코울스 정부학 교수이자, 인종, 불평등 및 정치 연구 센터의 공동 책임자로 일했습니다. 현재는 펜실베이나 대학의 크리스토퍼 H. 브라운 석좌 정치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그는 2018년부터 2019년까지 미국 정치학회 (ASPA)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at Is Not Who We Are! Populism and Peoplehood"로 지난 202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개인적으로 올해 읽은 사회과학 서적들 가운데, 로저스 스미스의 이 책에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이 책에서 명료하고 일관된 주장을 흔들림 없이 이어 나가면서, 그것의 논증 역시 매우 객관적이고 설득적이었는데요. 특히 극우 포퓰리즘에 대해 단순히 '시급히 처분되어야 할 문제'로 일부 학자들의 과격한 논점을 피해, 왜 이 극우 포퓰리즘이 작게는 미국 정치와 크게는 전세계 민주주의에 해가 될 수밖에 없는지를 훌륭한 논리적 귀결로 이를 알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번역 역시,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는데요. 대체로 국내에 학술서로 유명한 출판사의 기획 출판 치고는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도 일독이 나쁘지 않았고. 풍부한 역자들의 주석과 저자의 논조가 여타 불필요한 번역 문제에 빠지지 않게 사회과학 이상의 유려한 번역을 보여줘서 그것대로 역자들의 노고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공역임에도 불구하고 양질의 번역이 나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017년부터 시작된 미국 내의 정체성 정치에 대한 논쟁은 저자의 언급대로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영국과의 독립 전쟁 이후, 그동안 미국이라는 나라가 유지해 왔던 정체성이 이 극우 포퓰리즘에 의해 확실히 변질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도널드 트럼프로 대표되는 미국 내 극단주의적 포퓰리즘 정치가 어찌됐든 내부의 정화 작용으로 극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진 것은 분명해 보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 도널드 트럼프로 이해되는 극우 포퓰리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포퓰리스트라고 칭하면서 강한 반다원주의, 비자유주의, 권위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운동들을 가리켜, '병리적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로 규정하기 이릅니다. 스티브 배넌과 앤드루 브라이트바트와 같은 극단적 포퓰리스트들은 미국이 처한 상황을 대다수의 시민들을 향해, 선동으로 잘못된 서사를 부채질해왔으며, 전반적으로 이들이 보이는 반엘리트주의는 앞선, 반다원주의와 비자유주의를 고려해 봤을 때, 미국 내 리버럴 정치 세력에 대한 증오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과거 로버트 달의 확신과 마찬가지로 일전의 미국 정치와 시민들이 보이는 선명성은 다문화와 다원주의에 기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가 경제적 주도권을 가진 이후에도 미국의 헌법에 기초한, 다수가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누구에게나 중요한 자유에 있어, 다수의 시민들이 어느 정도 공감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해 본다면 최근에 무분별하게 드러나는 극단적 증오 발언에 어느 정도 양심의 분별력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동안 미국이 주도하여 구축한 전세계의 자유로운 시장과 그에 따른 세계화라는 본질은 국제 질서의 중요한 기조였고 전세계인들이 이러한 환경에서 서로 오고 가고, 경제적 거래 뿐만 아니라 문화적 교류를 이어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환경 자체를 극단적 포퓰리스트들은 리버럴들이 주도한 미국 정부의 주요한 패착이라고 규정했으며, 이는 과거 빌 클린턴 정부를 향한 화살이기도 했습니다. 세계화로 인한 명과 암은 미국조차도 명확한 부분이었습니다. 실질적인 예로 보다 값싼 생활 용품들이 미국에 수입되면서, 일반 시민들은 그나마 생활 물가 안정을 경험할 수 있었지만, 그에 반하여 미국의 일반 제조업은 날이 가면 갈수록 경영 환경이 악화되어 갔습니다. 그동안 데이비드 코츠, 앤드루 갬블, 리민치와 같은 학자들이 규명해 왔던 것처럼, 이 신자유주의가 구축한 세계는 사회의 계급에서, 중산층 이하의 시민들이 삶을 영위하기 더욱 힘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심각한 불평등의 문제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떠오른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습니다. 저자 역시, 이와 유사한 관점을 갖고 있었는데요. 이 글의 1장에서, 저자는 "현재 포퓰리즘 운동이 급격히 늘어나는 원인이 무엇인가"에서, 경제적 요인인 불평등 문제와 경제적 세계화로 인한 경제적 불안정한 상황, 그리고 문화적 측면에서 이민과 성소수자의 점진적인 권리 운동 등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시민들이 그 책임의 시선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가운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극단주의 정치가 등장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우리가 극단적 포퓰리즘을 제어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앞서 극명하게 언급했듯이, 나와 남을 가르는 이 정체성 정치는 상식과 분별력으로 해결을 볼 수 있는 문제가 더 이상 아니게 되었습니다. 저자인 스미스와 같이 이 정체성 정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느냐는 좀 더 논의가 필요하지만, 일단은 진보주의 운동을 비롯한 많은 시민 운동이 이 극우 포퓰리즘에 적절한 대응이 필요해 보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 저자는 일종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불안전하고 불확실한 존재로서, 진실에 기대지 않은 거의 허위에 다름 없는 '서사'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것을 단순히 옳고 그름이라는 기준으로 가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거짓 뉴스나 조작된 서사의 진위를 각자의 시민이 판단할 수 있을지는 그만큼 회의적이라는 점인데요. 최근의 세대에서 높은 비율로 대학 졸업자의 비중이 늘어났지만 조작된 정보에 대한 진실을 가리는 일은 보이는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만큼 비약적으로 발전한 네트워크 기술과 그로 인해 펼쳐진 각종 SNS와 포털의 양적 성장으로 일견 이해되는 현상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개인이 접하는 정보는 그만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에 비해 우리는 과거의 철인(哲人)처럼, 성찰과 사유를 밥 먹듯이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한계는 명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자는 저들이 저들 만의 왜곡된 서사를 바탕으로 정치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듯, 우리는 우리 식의 '국민 정체성'의 서사를 정립하고 시민들 사이에 이를 확대시켜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도널드 트럼프는 지난 대선에서 오바마 전 대통령의 출생지를 왜곡하여 그가 '진실된 미국인'이 아님을 강조해왔습니다. 또한 트럼프는 멕시코 계 연방 판사가 과연 판결을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고, 백인이 아닌 이질적인 문화와 종교를 가진 다른 인종, 이를테면 인종주의에 기반한 비백인 미국 시민에 대해 여러차례 나치와 같은 발언을 일삼은 바가 있습니다. 이는 미국 내에서 백인 정체성을 확고히 갖고 있는 시민들이 적지 않다는 분분이 선동의 배경이 됩니다. 즉, 이러한 트럼프를 상대로 그가 단순히 '정상이 아닌 인물'이라는 평가 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미국 시민 스스로가 자유 민주주의에 헌신하겠다는 과거 높은 수준의 정치 참여를 기억하고 시민 개개인이 정치적 책임감을 갖고 진실로 규명되지 않은 '대안적 사실'과 같은 것들로 만들어진 '의도된 서사'에 대응할 수 있는, 시민들을 하나로 모으는 통합된 서사를 지금이라도 만드는 것이 일련의 사건들로 보아, 중요해 보입니다. 이러한 대안의 한 방법인 서사 만들기는 이 글의 3장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요. 과거 미국이 유럽의 권위적이고 계급적인 정치에 환멸감을 가진 선조들이 신대륙에서 세운 국가의 가치가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이 바라던,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중요시하게 여기는 '다른 형태'의 정치였음을 기억하고, 그것의 유산이 얼마나 미국인들을 자랑스럽게 하는지 떠올려야 한다고 그는 강조하는데요. 또한 오바마 전 대통령이 과거의 독립선언서를 통해 해석한 '미국의 거대한 서사'에서, "시민의 덕성과 의무를 강조하는 공화주의적 사상이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는 미국의 종교적 전통의 관점"은 이후, "시민성의 의미를 다시 강조하고 우리의 공동 목적의식을 회복하는 데 관한 것"이라고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건전한 덕성과 도덕적 책임을 이해하고 그것을 민주주의의 이상, 그러니까 모두의 자유와 평등한 권리에 기반한 서로가 서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시민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미국 국민의 정체성 서사의 본질로 해석됩니다.


지금까지의 전반적인 서술 자체가 듣는 이에 따라, 낯 뜨거운 일종의 '미국 만세'로 비춰질 수도 있지만 논증된 내용은 실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미국 시민이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비롯한, 분명한 행복 추구권에 동의했듯, 그것이 실질적으로 펼쳐질 수 있는 자유 민주주의적 토대와 그 체제를 다시금 재인식하는 부분이 극단주의에 오염된, 자신들의 정치에 무엇보다 필요한 일이고, 이것은 현재 극우 정치에 물들어가는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해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과거 유럽의 군주정과 귀족정, 그리고 신정과 같은 구체제의 굴레에서 새로운 정치, 사회 제도를 대체한 미국의 유산은 그것만으로도 극단적 정치에 대한 일종의'다시 생각하기'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겁니다. 다만 극단적 정치가 뿌리를 내린, 경제적 불평등과 부의 집중 문제는 재분배와 공적 투자의 미국 내 여론 형성을 뒷받침하고 세계화가 추동한 긍정적인 부분과 그 이면의 좋지 않은 문제들을 정확히 일반 시민들에게 밝히는, 여러 온라인과 오프라인 활동을 지속해 나갈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는 그저 엘리트들에 대한 반감 만으로는 조금의 해결도 볼 수 없는 문제로 그저 미국의 문제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그동안 구축해 온 체제 자체의 근본적인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극우 포퓰리즘은 전형적으로 기존 엘리트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고 이들이 어떠한 대안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정치적 이익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어린 시절의 교육을 통해, 민주주의가 개인의 권리와 삶의 존중에 있어 중요한 체제임을 배워왔습니다. 이는 그만큼 민주주의가 시민의 자유와 권리에 긍정적으로 이바지하는 정치 제도임을 알게 합니다. 다만, 현 시점에서, "우리가 포용적이고 평등지향적이면서도 동시에 특유의 국민 정체성 서사를 제공하는 정치인들이 우파 포퓰리즘을 내세우는 다른 정치인들을 이길 수 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전 세계 상황을 살펴본다 하더라도 현재 그와 같은 사례가 많지 않다"는 점은 그다지 녹록하지 않은 정치 현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극단주의 정치에 대해 대항하는 것을 사실상 실패한 진보주의 운동에 대한 저자의 비판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정치인들이 극단주의 정치에 대항하는 것이 수월치 않은 것이 분명하다면 진보주의 정치 역시 이와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저자는 미국인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독립선언서'의 분명한 지향과 다수가 소수에 반해 이들을 억압하거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메디슨주의의 맥락은 미국의 민주주의 전통이 어디에 기반하는지 충분히 짐작하게 만듭니다. 즉 이런 유산에 기반하여, 미국인들은 도널드 트럼프나 스티브 배넌이 주구장창 외치는 서사 뿐만 아니라, 이들보다 더 나은 서사를 찾아야만 하는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이것은 "미국 국민의 정체성에 대한 더 나은 서사들이 있는지도 탐색해야 할 정치적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선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과거 움베르토 에코가 정치적 논리로 점철된 주장들을 끊임없이 의심하라고 조언했듯이, 민주주의적 이상과 공동체의 공존, 평화로운 평등적 삶, 그리고 이것들을 망라한 건전한 정치의 온존은 미국 시민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민주주의 시민의 직면한 의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가 인용하는 존 듀이의 경고를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민주주의를 일그러뜨리는 경제적 불평등과 기업 권력의 집중화에 대항해 싸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과 참여민주주의적 의사결정 (때때로 국가 간의 경계를 초월하는) 을 확장해야 한다"


-과거 신자유주의에 지리멸렬한 태도를 보였던 진보 세력에게 저자 역시, 극단주의 포퓰리즘이 일으키는 왜곡된 정체성 서사와 선동에 대해서도 진보주의 운동 자체가 다소간 무능했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이를테면 "많은 나라에서 진보 인사들은 자신의 정치공동체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거나 지배집단을 온당치 않게 칭송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을 기피한다고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이 점은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극단주의 세력에 비해, 이는 진보주의 운동과 중도 세력의 명백한 한계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현 시점에서, 샹탈 무페 특유의 민주주의의 확실성을 위한 조언을 따로 이곳에 적어보고자 합니다. "민주주의 기획들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서는 그 작업에 함께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나 그들의 정체성들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러나 오늘 세계 곳곳에서 자신의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정체성이 사라지거나 경시되고 있다고 가장 빈번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수 민족주의 운동 세력과 종교적 전통주의자이다.

만약 우리가 정치집단이 잘 결속할 수 있는 까닭이 부분적으로는 그들의 정체성에 관한 서사 덕분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면, 정치는 결국 모두 정체성 정치라는 사실 역시 확실히 인지해야 할 것이다.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 전통, 더욱더 완벽한 연방을 추구하는 미국의 연방 헌법 정신, 그리고 모둔 사람의 기본권을 보호할 수 있는 형태의 정부를 수립한다는 독립선언서의 기획에 기초하는 더 평등 지향적이고 포용적인 서사들을 가지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표방하는 ‘미국 우선주의‘에 입각한 민족주의적인 국민 정체성 서사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종종 느끼는 무력감과 좌절감은 기득권 엘리트에 맞서는 포퓰리즘식 반격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제공하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반란은 필연적인 것도 자생적인 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서사들이 가장 크게 의존하는 것은 주권자가 될 자격이 있는 국민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관한 핵심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구성적인 주제다.

여기서 내릴 수 있는 합리적인 결론은 이와 같은 정치적 서사들의 불협화음이 최근에 생긴 광범위한 경제적, 문화적 변화들과 더불어서오늘날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강력한 민족주의 형태의 포퓰리즘이 더 호소력을 가지도록 일조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각각의 집단들이 표방하는 가치가 여타의 도덕적 신념 가운데서도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관심을 포함하는지, 포함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포함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현재 실제 공동체에서 일반화된 도덕적 전통과 상식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그 사람들의 경험과 가치를 기반으로 하되 비판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면, 민주주의, 인간의 존엄성, 기본 인권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서사를 대체로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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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 누가 시민이 되는가 - 시민권의 기준과 정당성의 재설계
엘리자베스 F. 코언.시릴 고시 지음, 권용진 옮김 / 씨아이알(CIR)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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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인 엘리자베스 F. 코언은 미국 펜실베니아 주, 스와스모어에 위치한 사립 인문 대학인 스와스모어 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 학사 학위를 수여 받고, 이후 예일대 대학원에 진학해 2003년에 정치학 석사, 철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2004년에 시라큐스 대학의 맥스웰 시민 및 공공정책 연구소의 교수진으로 합류하고, 2010년 여름에는뉴욕 대학의 와그너 공공 정책 연구소의 방문 연구원으로, 2014년부터 2015년까지는 러셀 세이지 재단의 방문 학자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2009년부터 최근까지 시민권과 민주 정치라는 주제로 여러 논저를 출판했고, 2019년부터 2023년까지, 미국 정치학회지 (American Journal of Political Science)의 부편집자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다른 공저자인 시릴 고시는 1998년, 인도 콜카타의 자다브푸르 대학에서 정치학 학사를 취득하고 이후, 2년 뒤인 2000년에 국제 관계학 석사 학위 마칩니다. 그리고 2005년에는 미국 시라큐스 대학의 맥스웰 시민 및 공공 정책 대학원에서 정치이론과 미국 정치를 전공하여 2005년에 석사 학위를, 2008년에는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2017년에는 뉴욕 대학의 로버트 F. 와그너 공공 정책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MPA)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의 연구 분야는 미국 정치 사상, 정체성 정치, 다문화주의, 공법, 인권, 시민권, 이민 등을 아우르고 있으며, 동성애자들과 미국내 LGBT+ 권리 정치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공동 저작인 이 책은 원제, "Citizenship"으로 지난 201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명한 두 학자의 공동 저작물인 이 책은 오늘날 많은 관심과 논란을 낳고 있는 '시민권'에 대해 보다 현실적인 고민을 해보기 위해 출간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공통된 의견으로 작금의 세계에서 이 시민권은 이론적인 측면의 구상이나 분석보다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작동하고 더불어 어떠한 한계를 갖고 있는지 이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저는 이 글의 1장과 2장에서 논의되는 바와 같이, 이 시민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과거 계몽주의와 이를 통해 연계된 자유주의적 맥락에서 발전하고 이해되어 왔으며, 이후 국민주의적 국가의 구축과 주요 체제인 자유 민주주의 하에, 시민권이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주목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글에서도 인용되는 바대로, 과거 한나 아렌트의 "권리를 가질 권리"는 보편적 인격을 가진 모든 인간에게 어떻게 보면 사활적 문제로 이는 현대적으로 재조정된 시민권의 기본 가치와 상당히 결부될 수 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현재는 이 '시민권'이 기존 사회의 시민들과 최근에 유입된 이민자들과의 구분에서 특히 이들의 배제를 위해, 어느 정도는 작동되고 있는 것 만큼 우리는 '현실에서의 시민권'을 이 시점에서, 재인식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예를들어, 어느 국가의 '여권'을 갖게 된다는 의미는 단적으로 기본적인 시민권에 대한 이해를 돕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와 같이 '혈통주의'에 기반한 시민들은 태어났을 때부터, 국적을 취득하고 성인이 되면 자유롭게 여권을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자연스레 이어집니다. 하지만 기존의 국적을 뒤로 하고 현실의 여러가지 이유로 다른 국가로 이주해 소위, '시민권을 취득한다'는 의미는 전자와는 달리,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국적의 교체'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시민권의 국가의 사회적 관념, 정치, 종교, 문화 등을 이해하고 존중하겠다는 다짐이 필요하고 이는 단순히 그 나라가 양해하는 권리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의무와 책임감도 지겠다는 일종의 신중한 맹세이기도 합니다. 또한, 무엇보다 이 시민권 개념은 과거 유럽의 계몽주의적 전통에서 비롯되어, '근대의 자유주의적 시민권 모델'로 확장되어 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존 로크와 장 자크 루소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해 보이는데요. 그야말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의 증진"이라는 가치가 함축되어 있는 시민권은 그만큼 자유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가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어지는 2장에서 차츰 논증되는 바와 같이, 이 시민권이라는 개념은 어느 정도는 모호하고 경우에 따라 감정적인 호소로도 발현되기도 합니다. 흔히 어느 사회에서 시민권을 보유한 시민들과 여기에 편입하는 이주민들 사이에 감정적인 대립이 생기듯이 말입니다. 다만, 이번 장에서 서술되는 바대로, "많은 종류의 협회, 공동체, 조직들은 구성원을 포용하고 외부인을 배제하는 기준을 적용하는 것"처럼 일부 인식에 있어서 이 시민권도 누군가를 배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겠습니다. 특히 여기서 언급되는 것처럼, "광활한 시민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 권위주의적 국가의 시민권과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서 헌법과 인권이 보장이 보장하는 '시민의 자유'는 분명 구별될 만한 사항이고, 이에 따라 각 국가와 사회별로 시민 스스로가 누리게 될 권리와 의무가 상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 자리에서 명시하고자 합니다. 일전에 읽은 카밀라 샴지의 소설에서처럼, 뿌리 깊은 이슬람의 율법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이슬람 계 이주민들이 자신의 자녀들이 보다 개방되고 경제적 기회가 많은 사회에서 살아가길 바라는 부모로서의 소망이, '시민권의 현실적 가치'가 사회나 국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현실과 부딪치는 모습을 적잖이 볼 수 있겠습니다.


두 저자의 확언처럼, 시민권은 정치 이론상의 자유주의와 시민 공화주의에서 발전되어 왔고, 또한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4장에서 같은 맥락으로, "시민이란 일정한 권한과 권리를 행사하는 지위로 격상되어 다루어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여러 의무와 책임이 수반되는 존재"라고 서술 되어 나오며, 어쩌면 이는 같은 장에서 도출되는 결론과 마찬가지로, "시민권은 시민 공화주의적 헌신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원초적 이유일 겁니다. 또한, 정교 분리를 헌법에 규정하고 있는 우리나라처럼 종교적 근본주의를 삶의 근원으로 끌어올린, 유일의 종교를 갖고 있는 이주민이 그저 권리만을 생각하고, 일찍이 제러미 벤담이 구축한, 그 사회의 공동체주의적 가치를 흡사 나와는 다른 무언가처럼 취급한다면 이들 자체는 현 사회에서 배타적으로 구분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근래의 영국과 프랑스의 이슬람 이주민들과 현 시민들과의 갈등으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라면 국가의 시민이 아닌 사람을 그 국가 법의 영향력 아래 두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면, 시민권의 부여는 이처럼 그저 손쉬운 무언가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저는 이를 이론 상의 합리적 이상이 결국엔 현실의 엄연한 차이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존 로크와 장 자크 루소 등에 의해 점차 규명된 시민권의 논리가 사회계약론에 명시된 양도 불가능한 권리인, "재산에 대한 소유권, 자유로운 계약의 권리, 표현과 신념, 양심의 자유 등"으로 이러한 권리들이 대표권과 선거권을 있게 한 최초의 기본 인식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민적 권리'라는 개념은 법에 의한 지배가 확립되면서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하지만 이 재산권과 투표권, 그리고 공적 영역에서의 표현의 자유는 기존의 여성들에게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 거의 수 십 년 간의 사회 운동이 필요했고,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에 공저자들은 초기의 소위 시민권 운동은 평등에 대한 헌신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시민권의 핵심 가치로 자리매김했다고 평가합니다. 지금에서야 이 평등이 좀 더 확장된 의미겠으나 그 이전에는 남녀 평등의 기준점으로 시민권 운동이 자리매김했다고 보여집니다. 아마도 같은 시민으로서의 서로 간의 평등성과 이를 그저 시민 간의 유대로 치부할 수는 없겠으나, 시민으로서 보다 사회에 기여하게 되는 방식으로, 우리는 누구보다 평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다만, 자유주의에서 비롯된 개인individual 이라는 개념이 그 자체로 근대의 산물로서, 고전적 의미의 공공public과의 대비를 넘어, 오늘날 독보적인 가치가 되었으며, 이러한 기반의 개인주의는 모든 시민들이 그 (간접적) 의무로서의 정치적 삶의 지향에 심각한 방해물이 되어왔습니다. 결국 이렇게 규범화 되고 확장된 시민권 자체가 개인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공적인 측면에서의 가치조화적인 확립이 필연적으로 요구되고, 더 나아가 참여와 의무, 책임감이 없는, 오로지 권리만 누리려고 하는 이 '반쪽 짜리 시민권'은 그만큼 사회에 해를 끼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어지는 3장과 4장은 이 책에서 매우 중요한 챕터라고 여겨지는데요. 주디스 슈클라를 비롯한 많은 정치학자들이 인용되는 이 두 장은, 무엇보다 시민권의 분화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기존의 철저한 시민권의 부여라는 아이디어에서 벗어나, 현재 각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기 영주권을 갖고 있는 비시민들에 대한 여러 행태를 논의합니다. 즉, 여기서는 데니즌denizenship과 마지즌권margizenship으로 구별해 다루고 있었는데요. "이제는 자유로운 이주의 권리, 이주한 곳에 정착하거나 다중 국적을 가질 기회에 대한 요구가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고 평가하고, 심지어 "외국에서 태어난 장기 거주자들의 요구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더 취약한 사람들의 권리를 희생해서 그들의 권리를 우대하는 다른 구분점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의 시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정치적 주체성과 더불어 '민주적 포용'에 대한 기준과 범위를 다시금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기 영주권을 갖고 한 나라에 오래 체류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 나라의 일부 시민들이 타국에 나가 오랜 삶을 지속하고 있는 이 상반된 사례는 오늘날 시민권의 규명이 얼마나 복잡한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와는 별개로, 유럽의 이주 노동자들의 사례로 봤을 때, 그 사회가 이들의 사회적 기여를 차치하면서, 실제로는 이들의 시민권 취득이 대부분 좌절되었다는 점을 우리는 인식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분화된 시민권에 대한 논의들은 현재 상황에서 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데요. 종래와는 사뭇 다르게 기존의 시민권이 시민 사회 내부에서, 게이와 레즈비언 등 소수 성소수자들의 시민권 문제를 놓고 갈등에 놓이게 되는 것은 이처럼 난해한 현실을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물론 앞선 성소수자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같은 시민임은 분명하나, 이처럼 우리의 인식이 그렇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이러한 문제는 사회의 노골적인 갈등과 더 나아가 혐오를 주입하는 양상으로 불거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젠더 문제를 부각시켜, 기존의 타 종교 이주민들과 다른 인종의 장기 거주자들을 동시에 분리해 내려는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특정 계층에게 이 시민권 문제는 더욱 배타적 조건의 권리로 승화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사회가 보장하는 시민권의 자격을 어느 범주까지 인정해야 하느냐에 대한 첨예한 논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바로 4장이 이런 현실에서의 시민권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번 장의 도입에서 공저자들은 일견 특이하게도, 선거 투표권과 관련해, 다른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과 달리, 시민들에게 강제적인 법조항으로 의무를 지우고 있는 국가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호주, 브라질, 싱가포르, 페루와 같은 국가들은 시민의 투표가 사회적 권유가 아닌 의무로 못박고 있었는데요. 특히 호주의 사례는 투표권을 행사하지 않은 시민은 중대한 벌금에 처해지는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호주 시민권을 취득한 이주민은 이 나라가 시민들에게 의무적으로 가하고 있는 '투표 강제'를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귀화를 통한 시민권 취득은 각 국가별로 체류 조건에 있어 상이한 의무 기간을 드러냅니다. 이는 영주권자의 자격으로 얼마 간의 기간 동안 의무적으로 체류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항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시민권의 적격성 여부도 각 국가들이 내세우는 기준이 다르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오늘날의 시민권 문제는 각 국가가 처한 사회적 갈등과 여론 수렴 문제에 따라 이를 인식하는 방법이 천차만별이고, 국제 사회의 보편적인 도덕적 원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질적인 이주민들에 대한 자국 내의 시민권 취득에 있어서, 불편한 시각을 갖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다만, 독일의 사례와 같이, 자국내 1,2차 산업의 노동력 확보를 위해, 튀르키예와 같은 이슬람 계 노동력을 몇 십 년에 걸쳐 받아들였으면서도 이들의 사회적 권리를 지원하고 인정하는 것에 기존 시민 계층들이 난색을 표하는 점은 가히 낯 뜨거운 모습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칸트가 강조한 보편주의적 입장에서 다른 국가에서 유입된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 연민이 그 사회의 여력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인간적인 측면에서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조건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5장에서도 존 롤스의 인식 기반에서, 모두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인정한다면, 단순히 국경 개방과 같은 극단의 조건이 아니더라도 이주민들이 기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쪽으로 여러가지 연구를 해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심각한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일부 선진국들에게도 데이터를 열람할 구실이 된다고 여겨지는데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이주민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그것의 결정은 민주주의 체제 하의 여론과 공통된 의견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이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시민권 자체로서의 선명성과 오랜동안 그 사회가 구축한 여러 제반에서, 이미 그것을 항유하고 있는 기존의 시민들의 동의가 필요한 것도 분명한 사실일 겁니다. 물론 여기에 더해, 국제 사회가 나서서 여러 국가들의 시민권에 대한 함의를 조정하고, 이것이 어떻게 인류애에 기여할 수 있을지, 그것을 더욱 논의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과거 우리의 일제 치하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조선인들에 대한 귀속과 동질감을 '같은 신민(臣民)으로 그때의 일본인들과 다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일부 역사학자들의 면면이 야멸차게 떠올랐습니다. 소위 그 시대의 신민권은 결정적으로 조선인들에게는 그 자격이 없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일부 매국노들을 제외한다면 당시의 조선인들은 일본 제국에 있어, 2등 혹은 3등 시민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세계시민주의는 모든 인류가 단일 공동체의 구성원이자 도덕관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세계관이다.

시민권은 법적 신분, 사회적 지위, 제도, 정치적 범주화의 도구, 도덕적 행동규범의 목록, 시민됨, 자아정체성의 한 형태, 절차, 효능, 그외 여러가지 것들로 불리어왔다.

시민권에 대한 규범적 이론에서는 우리가 시민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가를 실생활에서 시민권에 대해 실제로 무엇이 관찰되는가의 문제보다 우선시한다.

이와 달리 로크는 무엇보다도 법의 지배가 없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특정한 ‘불편사항‘들을 겪게 된다는 점을 우려하였다.

우리는 시민적 권리가 발전함에 따라 평등에 대한 포용적 헌신이 근대적 시민권의 핵심 가치로 자리잡게 되고, 이것이 재산권이나 혈통과 같은 구시대의 권력조건들을 대체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시민권을 자유주의적 발식으로 구성하려면, 시민적 권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개인주의적 개념화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구성원을 동등하게 대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시민권은 특정한 공동체나 집단의 구성원 자격을 설명하기에는 어색하지만 보편주의적 이상으로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강점을 보인다.

점점 더 많은 시민권 학자들이 시민권이 완전히 포용적이든지 배제적이든지, 또는 어느 것도 아닌 애매한 것으로 되는지의 여부와 정도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기르고 있다.

자유주의 철학의 원형과 다수의 민주적 헌법에서 묘사하는 규범들의 포용성과는 대조적으로, (2차대전 이후 수십 년간 프랑스나 독일 같은 국가에 대부분 거주하던) 이주 노동자와 외국인들은 시민권을 얻을 수 없었음은 물론 시민권을 취득하려는 시도 또한 대부분 좌절되었다.

젠더에 근거한 차별과 권리 박탈은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역사에서 여성에게 주어진 것을 ‘2등 시민권‘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이다.

이언 샤피로가 날카롭게 지적하듯이, 이 ‘무정부적 자유지상주의‘지지자들은 "민주주의 내에서 생존하고 잘 자랄 수 있는 아이를 길러내는 대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따라서, 시민에게만 국한하여 투표권을 허용하는 미국 같은 나라의 경우 영주권을 획득하고 아직 시민권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능력을 갖추기 위한 발달과 성숙의 단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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