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 커뮤니케이션이해총서
정병기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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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정치학과 사회학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영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정병기 교수는 한국에서는 드물게 포퓰리즘 연구를 해오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그는 문학에 있어서도 시집을 발표하는 등 꽤 다방면의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우선 이 책은 전반적인 포퓰리즘 정치에 대한 꽤 원론적인 개론서라 할 수 있겠는데요. 1980년대 이래로 포퓰리즘을 연구한 해외 학자에 대한 연구 결과도 요약해서 친절히 소개하는 등의 일반 독자들에도 꽤 유익한 글이라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포퓰리즘‘과 ‘포퓰러리즘‘에 대해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동안 포퓰리즘에 대한 서평을 많이 썼기에, 다른 서평에서 별다른 비판없이 포퓰리즘을 ‘대중 인기 영합주의‘로 써왔던 점은 저의 큰 오류라고 생각됩니다.

카스 무데는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에서 현재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이 어떻게 좌절한 수많은 시민들에게 파고 들었는지 설명하고 있었는데요. 마찬가지로 이 글에서도 포퓰리즘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견고하지 않은 약한 측면을 갖고 있어서 민족주의와 인종 혐오, 배외주의 등에 숱하게 결합하는 등의 일종의 그 폐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는 따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포퓰리즘 자체를 사회학 내에서의 고정되고 인식되는 학문의 범주로 넣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그동안 많은 논의가 있어 왔는데요. 포퓰리즘 현상 자체가 학자들 사이에서 잘 규명이 되지 않았고 ‘시민 대 엘리트 기득권 정치‘를 구도로 거의 기존의 정치 체제를 불신하는 등의 파행적 언행들이 흡사 반정치의 논법과도 유사해 보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이 포퓰리즘 정치는 이 글 3부에서 논의되고 있는 바와 같이 소위 이들 정치 세력이 집권에 성공하게 되면 기존의 정치적 입장은 사라지고 체제에 대한 대부분의 강경 발언이 사라진다는 점은 포퓰리즘 정치를 현격한 정치 현상으로 인정해야 될지 다소 명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생각됩니다. 예를들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는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까지는 그토록 현 체제와 엘리트 기득권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해댔으나 그가 기존 시스템에 들어와서는 특별히 엘리트들과 각을 세운일이 없었다는 것은 이를 잘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트럼프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자신의 확실한 의견을 피력한 바가 없었고 임기 중에는 오히려 월스트리트와 별 문제없이 잘 지내왔다는 점에서 이 포퓰리즘적 정치인들은 오로지 권력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서 ‘민주주의‘와 시민들을 이용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포퓰리즘 정치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범은 시민들이 이들에 대한 엄격한 분별력을 갖추는 것 일 텐데요. 그러므로 토크빌과 듀이의 경고는 이처럼 중요한 맥락으로 다가온다 여겨집니다.

또한, 4부에서도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이 인종적 선동과 혐오를 방관하고 오히려 부추기고 있는데 비슷한 역사와 보편성을 띠는 동일 민족의 민주주의적 함의가 중요하다고 인식한 유발 하라리의 입장을 차치하더라도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 유입된 이슬람인들의 노동력을 시의적절하게 이용해 왔으면서도 이제는 다른 말을 하는 정치인들의 논법은 유럽의 합리주의와는 거리가 먼 발언일 텐데요. 이슬람 이주민들 자체가 유럽 산업에서 단물만 빤 것이 아니라 이들이 유럽인들 대부분이 기피하는 산업 노동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며,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등의 이중적 행태를 스스로 돌아보지도 않고 종교 갈등, 민족적 차이 등만을 내세워 사회의 불안심리를 더욱 자극하는 것은 이 극우 포퓰리즘을 과연 정치의 카테고리로 편입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파시즘을 인정하고 배려해야할 대상으로 여길 수 없는 것과 동일한 기준이라 첨언드리고 싶습니다.

보수주의가 관련된 시장 자유의 논법과 관련해 저자는 객관적인 논법으로 신자유주의적 포퓰리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요. 보수주의가 일찍이 자본주의와 화합한 것은 일전에도 언급했습니다만 ‘보수주의-신자유주의-기득권 정치‘가 견고하게 결합되어 직간접적으로 그동안 대의 민주주의의 훼손을 초래한 것은 분명하며, 이에 부역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시민은 전문 관료와 지식 엘리트들의 전문성을 굳게 신뢰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목에 핏대를 세워 강조해왔습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흐름 자체가 기존의 시민들의 정치 불신과 맞물려 자본주의 하에서 엘리트 지배체제가 의심을 받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똑똑하고 대단한 경력의 엘리트주의가 유능하지 않고 무능할 수 있다는 불신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따라서 대의 민주주의 건전성은 시민들의 건전한 참여가 뒷받침 되어야 하며, 엘리트 지배 체제가 민주 정치의 일부분을 떠안으면서 ˝너희들은 스스로의 생업에만 중시해라. 그리고 다소 생활 여건이 힘들더라도 참아보도록 해라˝라는 대책없는 요구를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강요해 왔던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이 부분의 역할을 신자유주의가 주도적으로 맡았던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글 초입에 저자는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그림자˝라는 캐노밴의 주장을 인용하는데요. 저는 미처 글을 다 읽지 않고 저자에 대해 분통을 터트릴 뻔 했습니다. 이후에 포퓰리즘은 사실상 민주주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저의 성질 급함을 반성하였는데요. 이처럼 포퓰리즘이 아무리 민주주의를 신물나게 강조한다 하더라도 이들은 이 민주주의와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4부에서 ˝포퓰리스트의 성격이 주요 고객인 시민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언급되는 것은 이를 잘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보수에 있는 정치인이든 진보에 있는 정치인이든 일정 부분 시민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이를 완벽하게 부인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스스로 각자의 대의를 주장하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정치인들 스스로 여러 갈래로 얽혀 있는 사익을 절대 거스를 수 없다는 점에서 이는 현대 민주주의의 명확한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신자유주의가 이렇게 정치인들의 가려운 곳을 적극적으로 긁어 주었으나, 그 반대급부로 저들이 가져간 것은 시장에서의 민주 정치였습니다. 우리의 대의 민주주의가 쇠퇴한 것은 이들 직업 정치인들에 의해 왜곡된 것이 거의 절반 이상의 책임을 갖고 있으며, 이를 반대로 시민들의 마땅한 정치 관심의 결여라고 반론을 펼치는 자들은 거의 회색분자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대의 민주주의 하에서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나 그 기반을 이렇게나 왜곡 시킨 것은 생산성이 없는 이데올로기 싸움 자체가 아니라 전문적인 직업 정치인들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 시민들을 이용만 했던 것에 크게 기인합니다. 영민하고 머리가 잘돌아가는 정치인들이 대의 민주주의의 맹점을 파고들어 이러한 정치적 불신을 조장한 것은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포퓰리즘은 바로 이러한 맥락 가운데 등장한 반정치의 냉엄한 현실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현재의 포퓰리즘이 우려스러운 것은 끝내 파시즘을 다시 정치 무대에 등장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겁니다.

엘리트들에 대한 포퓰리스트들의 공격은 정치 엘리트에 국한되지 않는다. 경제 체제를 장악하고 있는 경제 엘리트와 학계 및 언론 엘리트를 포함한 지식 엘리트도 중요한 공격 대상이 되며, 이들의 무능, 탐욕, 부패의 피해자인 나머지 인민을 이들과 구별한다

하지만 이들의 논리에는 국적이나 인종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사회적 열패자라는 점이 핵심적 근거로 제시된다

포퓰리스트들은 기득권 질서에 반발해 침묵하는 대중을 동원하지만, 자신들이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회피하는 언술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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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성호 옮김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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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은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대학을 거쳐 현재 영국 런던 대학의 버크벡 연구소의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더불어 미국에 소재한 뉴욕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중이기도 한데요. 그는 라캉 연구에 대한 명성과 함께 프로이트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도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을 세계에 알린 것은 세계화 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왜곡된 보수주의자들에 대해 보였던 첨예한 공격이었습니다. 특히 우파에 대한 그의 비판은 스스로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일부에게는 보수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탁이 꽤 완벽해 보이는 한쌍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오늘날 사회 전반의 불안전성을 고려해 봤을 때, 그동안 제대로 된 비판이 전무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기도 합니다. 어찌됐든 지젝은 강요된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분석해 비판하고 그 실상을 널리 알리는 데 노력한 지식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First As Tragedy Then As Face˝로 지난 200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6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먼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배경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데요. 모두가 짐작하고 있다시피 전세계에 충격을 가져다 준 2008년 뉴욕 발 세계 금융위기를 주제로 방만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중점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미 라구람 라잔이 금융 엘리트들의 거대한 ‘도덕적 해이‘를 언급하며 이와 같은 금융 위기를 예언한 바가 있습니다. 여기에 지젝은 이 ‘도덕적 해이‘에 대해 좀 더 노골적이고 흥미로운 정의를 내리고 있었는데요. 앨런 그리스펀의 철지난 큰 깨달음을 언급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그가 깜박 잊고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은, 금융 붕괴가 발생할 시에는 국가가 자신들의 손실을 보상해 줄테니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으리라는 금융 투기꾼들의 매우 합리적인 기대였다˝는 폭로입니다. 이들 경제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경제학에서 오로지 국가가 시장에 개입할 명분이 딱 한 번 있는데 그것은 위기에 빠진 시장을 구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나설 때일 뿐입니다. 일찍이 밀턴 프리드먼은 ˝시장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러한 신념으로 ˝사회에는 정의 따위는 필요 없다˝고 일갈했는데요. 물론 그의 믿음은 상당 부분 현실과는 거리가 있음이 밝혀졌지만 아직도 그의 추종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언급되는 기 소르망이 이 프리드먼주의자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공격을 받았다는 것을 무슨 훈장처럼 여긴다는 스스로의 고백은 꽤 아이러니한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지젝에 의해 적잖게 인용되고 있는 소르망의 주장들은 보통의 경제학자가 말할 법한 시장주의적인 언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시장주의자들과 국가 개입주의자들의 대비가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둘 다 유사해 보인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시장 자유에 대한 믿음이 일부 시민들에게는 깊이 체화되어 있고 그것의 진위 여부, 실현 가능성을 떠나 무의식적으로 추종하게 되는 현실은 우려의 차원을 넘는 안타까운 일면이라 생각됩니다.

어제 서평을 쓴 ˝천하대혼돈˝에서도 지젝은 일관되게 좌파들이 적확한 피아 구별을 통해 좀 현실적인 비판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이념의 구분을 떠나서 지식인의 의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다수의 공익에 기여해야 하는 점은 명백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지젝은 ‘도덕적 의무‘를 철지난 이론 정도로 격하시키는 세태 내지는 자신들의 이익 추구와 그 보존을 제외한 다수의 도덕적 의무에만 열을 올리는 자본가들과 그 추종자들의 도를 넘는 왜곡 행태가 있어 왔는데요. 여기에는 다수의 시민들이 이를 면밀히 구분하고 비판할 수 있는 분별력이 전무하다는 것에 있어 마찬가지로 현실과 이상의 분명한 괴리라고 말할 수 있을겁니다. 이렇게 교묘하게 감춰진 권력 문제가 달린 이데올로기들은 정확히 규명하지 않는다면 실체를 벗겨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다수의 자본가들이나 소수 기득권층에 있어 ‘약탈 경제가 자신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이익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여기에 일언반구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는 것˝은 사회 전반의 여러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조차 시도하기 어려운 장벽이 되고 있습니다. 결국 2008년의 대위기는 이러한 고착화 된 사회경제적 분위기와 투자 은행들의 방만한 경영 및 한탕주의가 몰고 온 비극이라 할 수 있을 텐데요. 이 파국을 수습하기 위해 나섰던 오바마 행정부에 대해 공화당 내의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이 국가가 시장에 나서는 것을 무슨 공산주의적 기법으로 확대해석 하면서 그것에 대한 어떠한 대책도 내놓을 수 없었다는 것은 당시 사태의 숨겨진 본질일겁니다. 즉, 이익을 둘러싼 이데올로기만을 비판적 분석없이 맹종하는 행태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오바마 행정부가 의회를 설득해 7천억 달러가 넘는 공적 자금을 지출하게 되었을 때, 이 파국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는 금융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노후 자금을 따내기 위해 이 공적 자금을 유용해 왔으며, 어떠한 금융인도 기소되지 않고 예전과 다름없는 예우와 명성을 존치시킨 것은 지젝이 보기에도 불합리한 모습임에 분명했을 겁니다. 심지어 이러한 비판 의식을 갖고 있는 정상적인 시민들을 반자본주의자로 몰고 갔던 수많은 보수주의자들과 보수적 지식인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깨닫게 됩니다. 사실 저들이 믿고 있는 바대로 ˝경제학이 스스로 자신들이 사회를 지배해야 한다고 믿는다˝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1장에서 나오는 ˝우리가 민주주의나 정의를 믿지 않아도 그것들은 작동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에 참여하고 그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라는 맥락은 일종의 소극적인 내면화의 증거로 이해됩니다. 이처럼 기 소르망이 피력하는 대로 ˝자본주의가 인류의 비참한 조건을 구원해 낸 것˝을 일언지하에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다수의 시민들을 자본주의에 있어서 맹목적인 상태로 만들어 내고 심지어 그것에 일절 반항 조차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시민의 운명인지 아니면 자본주의가 그렇게 설계되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결국 자본주의 체제 전반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자연적 고리를 주장하는 자들이 이런 사실들을 놓고 사기를 치고 있는데, 극 방식이란 가톨릭 교회가 전체주의의 위협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자연적‘수호자로 자처할 때의 사기 방식과 똑같다˝고 저자인 지젝은 비판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진술은 아주 명확하게 경제학자들과 시장 자유를 주장하는 자들에게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와 연관이 깊고 그에 따라 자본주의의 논리에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봉사를 할 의무가 있다는 식으로 해석˝되기도 하였습니다. 시장이 인간에게 마땅히 필요한 모든 것을 해줄 것이라는 믿음과 그것에 따라 행동해야 될 시민의 의무라든지 민주적 합의를 다소 희생시키더라도 시장의 선택을 보장하는 쪽으로 진행되는 규모적 움직임에 권위까지 얻게 된 것은 아마도 적극적인 우파의 항복과 수동적인 좌파의 합류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보수 우파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본주의와 화해 했지만 좌파는 민주주의의 보존과 (믿기지는 않지만) 시민들의 삶을 위해 같이 행동하기로 하였으나 결국 그것은 패착으로 끝났습니다. 그래서 지젝은 일반적인 보수 우파들보다 좌파들에게 끊임없이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일겁니다. 일전에 저도 샹탈 무페를 인용하며 신자유주의 시기에서 좌파의 실패를 언급한 바가 있는데요. 도덕적인 의무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삶에서 조차 좌파는 그냥 지리멸렬 했던 것이었습니다. 현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저 신선 놀음과도 같은 관념적 조언은 시민들에게 어떠한 기대도 갖게 하지 못했던 것이죠. 이러한 맥락의 인식이 꽤 오랫동안 자리했던 나머지 전세계 진보주의 세력에게 지금까지도 이들의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글 초반에 지젝은 이러한 사회적 뷸균형 상황에서 2001년과 2008년의 위기 가운데 전세계에 ˝극우 포퓰리즘˝ 정치가 태동할 것이라 예견했던 것입니다. 이 책이 쓰여진 때가 2008년인데 지젝은 이미 트럼프와 같은 극우 포퓰리즘이 나타날 것을 예측했던 모양입니다. 이를 명확히 드러내는 진술로 ˝포퓰리즘은 결국 언제난 보통사람들의 좌절 섞인 격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더는 못 참겠어! 이대로는 안돼! 이젠 끝을 봐야 돼!˝라는 외침에 의해 지탱된다 강조하고 포퓰리즘 운동 자체가 기존의 체제 전반을 부정하면서도 그에 대한 어떠한 대안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시민들이 프로파간다에 의해 그저 이용당하고 심지어 사회 전반을 증오와 혐오로 이끈다는 점에서 실로 반동주의 정치라고 할만합니다. 이 포퓰리즘을 반동주의 정치라 규정한 지젝의 인식은 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물론 도식적으로도 부유한 자들 대 근면한 보통 사람들의 대결 구도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이것이 민주주의 자체에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정치였으나,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스트들이 언론을 통해 몇 번이나 내비쳤던 주장들은 실제로 금융 시스템과 금융 엘리트들에게 있어선 전혀 적의 조차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명백한 기만의 정치라 할 수 있을겁니다. 포퓰리스트들이 입으로 주장하는 것이 힘이 없는 자들의 권리를 위해 나서게 되었고 이를 위한 민주주의의 확대를 일견 주장하고 있지만 그 내심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핵심이겠죠. 결국 저들은 그저 자신의 정치 권력을 위해서 입을 놀린 것이며 ˝자유로운 섹스와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저 자유주의자들을 증오하기에 급급한 평범한 노동자들˝이 철저하게 포퓰리스트들에게 이용당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자유주의적 보편주의는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던 사상이었습니다. 보편성 자체가 모두를 위한 가치로서 수렴하는 것임에도 자유 자체가 실질적으로 시민 모두가 누릴 수 없는 것임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도 지젝은 ˝우리가 위험한 선택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사회에서는 소수만이 선택하기 choosing 를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기 risking 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앞선 ˝천하대혼란˝에서도 지젝은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많은 시민들은 그저 덜 나쁜 것을 선택하기에 급급하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능력주의에 기반한 저 알량한 선택의 권리는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처럼 명백합니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자유를 위치는 자들은 이러한 차별적 기반을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가 아니라 ˝평등은 절대 안되는 자유˝를 부르짖고 있으니 이것은 다수 시민들을 기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화주의 전반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그저 예전에는 평등을 공산주의로 몰아가기가 쉬웠으나 이제는 탈이데올로기 시기에 교묘한 화법으로 평등 자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교묘한 언설로 선동하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이제는 ˝공익˝을 사회주의로 몰고가는 지식인까지 있으니 탈이데올로기의 변화는 실로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실패한 사회주의가 못한 것을 지금의 우리 민주주의가 해낼 수 있다는 확장된 인식은 꽤 신선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보수주의자들보다 오히려 진보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더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더 많은 민주주의와 함께 ˝좌파 포퓰리즘˝을 한쌍으로 제시한 샹탈 무페의 인식론은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앞으로 20년 내의 진보주의의 성쇠는 얼마만큼 시민들에게 확대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심어줄 수 있겠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는 높은 확률로 폭주한 자본주의를 제어할 수 있으며, 모두가 적절한 수준의 자유와 충분한 수준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젝의 다음 2부는 이러한 맥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부의 핵심 단어인 ˝민중에 대한 신뢰˝는 건전한 시민의 전제를 바탕으로 현재의 질서 전반을 재구축하고 좀 더 인간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기 위한 틀 잡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지젝처럼 평등이 해방주의적 관점으로 사회를 크게 변혁시킬 수 있다 보지는 않지만 자유와 평등의 균형적 발전과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민주적 합의를 바탕으로 시장의 건전성을 답보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오판을 막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리라 여겨집니다. 다시 1부로 돌아가서 ˝오도된 경제학˝이 이미 시민들의 삶을 크게 뒤흔들었듯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모든 시민들이 마땅히 품위있는 삶을 이룩해 나갈 수 있도록 모든 체제의 균형적인 진보가 수반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와 더불어 더욱 파급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극우 포퓰리즘에 대한 대응과 정치 전반의 불신을 포퓰리즘으로 해소하길 원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오판을 좀 더 개선시킬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현명하게 대처를 해야 할 것입니다. 즉, 잠시 오판과 오해를 하고 있는 시민들을 대적으로 여기지 말고 좀 더 제 2의 교육에 나서는 것을 추천합니다. 아주 확대해석해서 얘기하자면 존 듀이는 이러한 미래를 염두해 두고 교육의 문제를 다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가지 지젝에게 조언하고 싶은 부분은 좀더 너그러운 언설로 자신의 이야기를 해줬으면 합니다만 과격함˝이 빠진 지젝은 지젝으로 살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 지그문트 바우만이 없는 시점에서 그가 자신의 역할을 오랫동안 수행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외래어 표기에 있어서 된소리로 강조하는 표기법이 이 출판사의 특징인 모양입니다만 엄연히 규정된 표기법이 있음에도 이런식으로 출판되어 나오는 것은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국가와 경제적 자유주의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으며 오히려 둘 사이에는 복잡한 동맹이 있다. 나는 자유사회가 복지국가를 필요로 한다고 보는데 이는 우선 지적 정당성과 관련된다. (기 소르망의 인용)

이에 그린스펀은 답했다 "저는 제가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을 규정하는 결정적 작동구조로 보았던 모델에서 결함을 발견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린스펀은 "백년에 한번 찾아올 만한 신용 쓰나미"가 금융 시작을 덮쳤을 때 규제를 멀리 하려는 자신의 자유시장 이데올로기가 결함을 지닌 것으로 판명되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지배 계급‘은 비록 포퓰리스트들의 도덕적 의제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하층계급을 억제하는 수단으로서 ‘도덕적 전쟁‘을 용인하기는 한다

지난 몇달간 교환에서 그 아래로 이어지는 공인들은 과욕과 소비의 문화에 대항해 싸우라는 명령을 우리에게 폭탄처럼 퍼부었다. 값싼 도덕화의 이런 역겨운 광경이야말로 이데올로기 공작이라는 범주에 딱 들어맞는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자연적 고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이런 사실들을 놓고 사기를 치고 있는데, 그 방식이란 가톨리교회가 전체주의 위협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자연적‘ 수호자로 자처할 때의 사기 방식과 똑같다

우리의 정치적 풍경이 관대하고 자유주의적인 테크노크라시와 근본주의적 포퓰리즘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면, 베를루스코니의 위대한 업적은 이 둘을 통합해낸 데에, 둘을 동시에 붙잡은 데에 있다

일상생활상의 소외, 소비의 상품화, 우리가 ‘가면을 쓰도록‘ 강요되고 성적 억압과 그밖의 억압을 당하며 사는 대중 사회의 비진정성 따위 말이다

자본이 우리 삶의 실재, 사회적 자연적 현실의 가장 긴급한 요구보다도 훨씬 더 절대적인 명령을 내리는 실재라는 데 대해 더이상의 증거가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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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대혼돈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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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슬로베니아 인이라는 이명을 갖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은 우리에게 있어서 때론 대중 철학자의 면모를 보이거나 혹은 번뜩이는 사회 비판과 견고한 정신분석학의 토대를 갖고 있는 전문 지식인으로도 읽혀지기도 합니다. 그를 비판한 로버트 미지크나 노엄 촘스키의 사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세계 대중들에게 있어서도 극명하게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기도 한데요. 하지만 그의 광범위한 사회 비판과 변질된 자본주의적 세계에 대한 일침은 입으로는 열심히 ‘민주주의‘를 주창하면서도 내심 금융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 전반에 비판의 날을 세우지 못하는 다른 지식인들에 비하면 지젝의 존재는 실로 귀중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젝을 강한 맛의 ‘토니 주트‘라고 언급하고 싶은데요. 약간의 개인적 소감이지만 지젝의 글을 보노라면 이상하게 토니 주트가 더욱 그리워집니다. 지젝의 이 글은 마오쩌둥의 일화를 인용한 제목으로 원전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한국판 서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지젝의 오랜 지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경희대 이택광 교수의 노력으로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경희대학교가 준비한 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글은 ˝천하대혼돈 Disorder˝라는 제목으로 지난 2020년 경희대출판부에서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아마 독자들은 출판사가 선정했을지도 모를 이 특별한 제목으로 말미암아, 근래 전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사태를 맞이하여 지젝이 특유의 현실 비판을 담은 글이라 여길 수도 있겠는데요.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실린 글들은 ‘전세계적 전염병 사태‘와는 별반 관련이 없습니다. 좀 더 이 글의 성격을 밝히면 ˝변질된 자본주의와 그에 따른 강요된 자유주의가 어떻게 우리의 정치를 극단적으로 이끄는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즉, 이 글의 3장에서 지젝은 오늘날의 당면한 문제를 ˝포퓰리즘적 국수주의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꼽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나레이션은 제가 얼마전에 서평을 쓴 콜린 크라우치의 인식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앞선 문장의 전자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후자는 아마도 강요된 자유주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는데요. 지젝은 이에 대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 세계의 자유는 그저 ˝몇 개의 불행들이나 고통을 선택하는 수준의 자유˝로 반대로 진정한 자유주의란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개인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자유주의의 오랜 전통˝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사실 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는 누구에게나 자유로운 시장의 참여를 주장하지만 실질적으로 그 시장의 자유를 완벽하게 누릴 수 있는 자들은 매우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이행 가운데 지젝은 자본이 ˝금융 엘리트들의 교묘한 사기술˝에 의해 변질되어 왔으며,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이런 측면에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지젝의 이 글을 일독하면서 문득 한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는 반대하지만 (건전한)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에 관한 것인데요. 우선 이 신자유주의와 금융 자본주의를 과연 분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을 먼저 고민해 봐야겠죠. 건전한 자본주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젝이 설명하는대로 ˝민주주의적 합의˝를 자본주의에 더 많이 요구하면서 금융 엘리트들이 ˝공익과 개인의 권리 및 다수 시민들의 삶의 통제와 품위있는 삶˝을 먼저 인정하게 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입니다. 금융 자본주의가 본격화 되면서 소위 ‘카지노 자본주의‘에는 전통적인 가치들이 비집고 들어갈 만한 공간이 현재로선 보이지 않는 점은 우려할 만하다 여겨집니다.

여기에 지젝은 1장에서 ˝오늘날의 고삐 풀린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대 새로운 권위주의는 형이상학적으로 볼때 모두 동일하다˝고 주장합니다. 고삐 풀린 자유주의는 만연한 신자유주의로 해석할 수 있고 제한이 없는 개인주의는 과거 토크빌이 우려한 모습과 일맥상통합니다. 즉, 수많은 시민들의 삶을 옥죄어 온 신자유주의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개인주의적 이득을 더욱 옹호한 이 개인주의는 결국 극단의 정치를 탄생시켰습니다. 지젝이 인식하고 있는 이러한 모습이나 앞서 인용한 크라우치와는 동일한 주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현재의 유럽은 과거의 전통을 잃어버리고 이러한 파급의 한 가운데 놓여있다고 봐야할텐데요. 이에 지젝은 유발 하라리의 ˝민주적 선거의 필요불가결한 선제 조건인 선천적 유대감˝이 건강한 의회 민주주의의 선결 조건이지만 유럽에서 지금 드러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은 보편적 다원성을 거부하고 우리들의 민주주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상 정치를 해체하고 있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그는 이 글의 중요한 대안을 다루고 있는 2장에서 ˝의회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어떠한 당위성을 옹호하고 있었습니다. 무기력한 좌파들에 의해 사실상 의회 민주주의가 제 힘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좌파들이 관념적인 비판과 관성적인 자본주의적 수용을 그만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현실적인 좌파가 되기를 지젝은 기대하고 있었는데요. 바로 이 부분에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가 주장한 ‘좌파 포퓰리즘‘을 확대시켜 옹호하기에 이릅니다. 따라서 좌파는 보편적 다원주의에 입각해, 시민의 인권과 마땅한 권리 보장, 도덕적 해이에 빠진 금융 자본주의에 대한 현실적 비판, 신자유주의의 무결성을 주장하는 자들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논증 등을 전세계적 네트워크와 시민들의 연대를 통해 이를 진보의 포퓰리즘적 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지젝의 요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러한 선명한 대결적 구도를 좌파는 인지하고 있어야만 하며, ˝금융 엘리트, 근본주의자, 진보 진영의 다른 용의자들을 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일종의 좌파들의 사회적 대적에 대한 회복이라고 언급하고 싶은데요. 진보 좌파는 현재의 무기력한 상황에서 수많은 시민들을 위해 대안을 제시하고 날이 선 비판을 하는 것이 사회 진보에 필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겠죠. 카를 슈미트의 결단주의를 이곳에 굳이 대입하고 싶진 않지만 수많은 좌파 사상가들이 카를 슈미트를 왜 열독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파행의 근본적 원인은 ˝자유주의적 합의의 실종과 좌파 무능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을겁니다. 피터 콜로지의 언급대로 산업 혁명 이후 우파 보수주의는 자본주의와 너무나 쉽게 화해를 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화 된 자본주의를 마땅히 비판할 세력은 좌파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유럽의 진보 좌파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쉽게 두 손을 들고 맙니다. 이것은 지젝이 인용하는 바디우의 명제인 ˝우리는 자본주의와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기에는 비판 세력의 몰락이 급속도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좌파의 몰락 혹은 좌파의 실패는 바로 이 점을 명백하게 정의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시장에서의 개인의 자유˝에 너무나 현혹된 나머지 그 이후의 실체를 예견하지 못했습니다. 시민들에게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부자유‘를 떠밀게 만들었고 이러한 사회 시스템의 이데올로기적 강화는 금융 엘리트들과 결탁한 수많은 지식인들, 그리고 ˝포드에게 좋은 것은 미국에게 좋은 것˝이라는 배타주의를 우리의 삶 곳곳에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파행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연유에는 그만큼 신자유주의 자체가 우리들에게 깊숙히 내면화 된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

끝으로, 지젝은 여기에서 따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세계의 좌파들이 왜 우파들보다 더 민주주의를 강조하게 되었는지는 ‘도덕적 민주주의‘의 사실상 소멸이 정치사회적으로 더 위기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일겁니다. 여기에 극단의 정치를 비롯해 거대한 정치 불신과 의회 민주주의의 사실상의 몰락 그리고 군산 복합체와 엘리트들에 의한 과두제 함의까지 심지어 허무맹랑하게 전세계에 민주주의가 너무나 과용되어 왔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이런 프로파간다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인데요. 지젝은 앞서 트럼프와 푸틴 그리고 시진핑을 한 묶음으로 받아들이면서 현실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극단주의가 얼마나 권위주의와 맞닿아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결국 만연된 극단주의 정치는 민주주의를 쇠퇴시키기에 이른다고 봐야하는데 트럼프가 미국 정치 일선에 나오게 된 것이 어떻게 ‘민주주의의 과잉‘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많은 지식인들의 오도된 해석이 얼마나 노골적이었는지 충분히 짐작될 만한데요. 따라서 이런 트럼프를 실패한 민주주의의 사례라고 해석해야 될까요. 이 극우 포퓰리즘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인데요. 이처럼 오늘날의 세계는 시민 개개인이 계몽되었다는 이성으로도 제대로 된 현실을 해석하기 어려운 환경이며, 지젝이 몇번이나 언급한대로 ˝기업들이 벌이고 있는 시민들에 대한 자본주의적 매수와 세뇌˝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가 다음 백년의 과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랑시에르 조차도 인정한 시민들을 정치에서 더욱 멀리하기 위한 왜곡된 자본주의의 술수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양립하기 어려운 부분일 수도 있으며, 또한 지젝의 말대로 우리의 다음 세기가 어떤 의미로는 ‘진정한 후쿠시마적 자유 민주주의‘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에 동의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에 대한 사활적 질문일 것입니다.


-유사한 맥락이겠지만 진보에게 있어서 민주주의의 확대는 부식되어 가는 정치를 위해 시급한 것이며, 지젝이 언급한대로 케인스 이상의 요술 상자를 꺼내지 않더라도 민주주의적 합의가 시장의 왜곡을 조금이나마 해결해 줄 수 있는 가능성을 답보하리라 생각됩니다.

포퓰리즘은 바로 이 실패의 중심, 그 헌팅턴식 질환이다

고삐 풀린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대 새로운 권위주의는 형이상학적으로 볼 때 모두 동일하다

포퓰리즘은 언제나 국민의 화합을 위협하는 외부의 적을 필요로 한다

신자유주의 경제를 승인한 ‘제3의 길‘ 좌파의 문제는 과도하게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면이 아니라 진정으로 합리적이지 못한 측면이다

좌파가 편가르기식의 대결을 폐기한 이유는 그것이 자본주의와의 싸움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며,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패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포퓰리즘의 진실, 즉 자본의 실재와 대결하는 일의 실패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우파의 포퓰리즘적 수사는 자신이 반대하는 척하는 바로 그 금융 엘리트를 위해 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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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전쟁책임 - 쇼와초기 20년과 헤세기 20년의 역사적 고찰
코케츠 아츠시 지음, 김경옥 옮김 / 제이앤씨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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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 학계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진보적 역사학자라고 할 수 있는 고케츠 아츠시는 기후현 출신으로 도쿄도 쿠니타치시에 위치한 사회과학 명문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야마구치현에 소재한 야마구치 대학에서 인문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그는 과거 일본 제국 시절의 아시아 침략에 대한 문제에 있어 꽤 단호한 입장을 갖고 있는데요. 명백하게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에게 사죄를 해야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저자인 고케츠 아츠시와 일본 내의 일반적인 리버럴 지식인들과의 극명한 차이점은 현재의 반일과 혐일에 대한 인식론이 상이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오에 겐자부로와 더불어 대표적인 리버럴 지식인인 강상중 교수가 한국의 반일에 대해 일본의 혐한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고케츠 아츠시는 이 책을 통해 그와 같은 인식론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반일과 혐한에 대해 비교론에 대한 비판에 있어 면밀한 논리적 근거는 거의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반일과 혐한은 그 궤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에 대한 상세한 서술을 뒤에서 다시 하기로 하겠습니다. 더불어 저자에 대해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일본에서의 활동 뿐만 아니라 중국과 한국에서도 드물지만 연구활동을 해왔다는 점에 있을 겁니다. 이 책은 지난 2009년, 원제 ˝私たちの戰爭責任˝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3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약간의 논외로 이 글의 진정성 자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여느 일본의 학자들과는 달리 일본의 전쟁 책임과 역사 수정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그대로 책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이 글의 8장인 소제목 하나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전쟁 책임은 국경과 시효를 넘는다˝는 일본인으로서의 저자 자신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기본적으로 이 책은 과거 일본제국주의 시기인 쇼와 20년간과 최근의 헤세 20년간을 비교하면서 어떻게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이 과거 제국주의 시절로 회귀하기려는 욕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학자로서의 비판적 분석을 하고 있는데요. 저는 얼마전 모 티비 프로그램을 통해 어느 일본인이 고백하는 일본 내의 역사 교육에 관한 실체를 파악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요지는 ˝현재 일본 교과서가 조선 침략과 식민지 수탈 및 아시아 대동아 공영에 대한 짤막한 기술과 그와 반대로 진주만 침공으로 비롯한 미국과 전쟁 과정에 대부분의 서술을 할애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언급하고, ˝그동안 한국과 중국에서 심각한 문제제기를 해왔던 난징 학살과 같은 문제는 일본을 포함한 세 국가의 입장 차이가 있어, 그것을 제대로 기술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과거 일본 제국 시절의 침략의 역사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기도 한데요. 이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가 ‘자학 사관의 타파‘라는 미명하에 과거 역사 기술을 마음대로 재단해 가르쳐 온 결과가 현재의 혐한과 혐중을 비롯 일본 내의 자정의 목소리가 전무해진 결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일본 정부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일본 정부 스스로의 역사 묵인과 날조가 원인이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여기에 저자인 코케츠 아츠시는 이를 두고 6장에서 ˝비열한 역사수정주의˝라고 일본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패전을 앞둔 일본 제국의 쇼와 일왕은 원자 폭탄 두 방에 의해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됨으로써 실질적인 제국의 시기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특히 일왕은 스스로도 ˝일왕제=국체˝임을 강조하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전쟁 책임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는데요. 물론 여기에는 당시 내각 각료와 일본 정치권이 일왕의 전쟁 책임을 놓고 맥아더와 협상을 한 연유도 있었지만 당시 일왕 스스로가 소위 조서를 통해 ˝타국의 주권을 배제하고 영토를 침범하는 것과 같은 것은 처음부터 짐의 뜻이 아니었다˝는 내용의 광범위한 책임 회피를 시도합니다. 이와 관련해 우리 내부 특히, 사학계에서는 일왕의 저런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자들이 있는데요. 여기에서 그 이름들을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추종 세력들이 한국에서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원칙적으로 일본의 진정한 반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5장에서 ‘조선근대화론‘과 같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언급하면서 조선을 중국 대륙 진출의 기반으로 삼으며 수탈에 나섰던 역사를 희석하기 위한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2차 대전 이후 냉전의 도래와 더불어 일본의 반공 세력과 한국 내부의 개발 이데올로기를 등에 업은 자들의 반공 정치가 교묘히 미국을 기반으로 양자의 이해관계가 일치되면서 독일과 달리 일본의 전쟁 책임이 적극적으로 회피되었다는 사실도 뒷받침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 사학계가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하는 사조와 더불어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한 다년간에 걸친 미국 백악관의 미온적 대처가 이러한 문제를 심화시켜 왔으며, 그런 연유로 일본 내의 ‘총체적인 역사 수정주의의 기반˝이 구축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즉, 전후 일왕이 과거 막부 시기와도 일맥상통하는 ˝입헌군주제의 군주˝로 회귀하고 미국 국익에 의해 전쟁 책임에 대한 모든 면죄부가 주어지면서 요시다 정권 이후 나카소네 정권부터 ˝일본이 전쟁에 진 것은 미국 때문이지 조선이나 중국 때문이 아니다˝라는 전쟁 책임의 회피론이 고개를 들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차례대로 이어지는 자민당 정권이나 짧았던 민주당 정부에서도 노골적으로 ˝전쟁 국가˝라는 측면의 배타주의가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저자의 거듭된 논증은 쇼와 시기로의 복구에 집착한 헤세 시기의 고이즈미 정권이 미국의 군사 동맹을 기반으로하는 일본의 전쟁국가론이 대두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비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점은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의 정계 복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전쟁을 일으킨 부역자들의 위패 뿐만 아니라 전몰자들의 야스쿠니 합사 문제에 있어 주도적으로 나선 일왕의 선택과 국체와 일본의 전쟁 국가론이 맞물려 주변 국가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상징적인 야스쿠니 합사 문제에 있어 이러한 일왕의 주도와 정치권의 이해관계 및 미국의 일본 재무장에 대한 막연한 인식이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에 부정적 파급으로 이어진 것이라 파악되는데요. 일본 내부적으로는 일왕의 국체가 무엇보다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일개 국왕을 숭고히 ‘천황‘이라고 취급하는 자들이 어느 정도 진행된 정치적 논리에서 이를 철회하기란 상당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일본의 국격을 이 일왕의 존재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는 자들이 태반인 지금에서는 유신을 통해 일본 정치 전면에 등장한 과거를 어쩌면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도 잠재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현재의 자민당 독주채제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다시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정치 체제가 상상속의 산물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일본의 민주주의가 비정상적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것과 정치적 정당성의 기반 모두가 미국에게 달려 있는 상황은 다른 의미로 우려할 만하다 생각됩니다. 따라서 동아시아 지역의 역사문제에 있어서 해결을 근원적으로 방해하는 구조적인 문제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즉, 일왕제의 정치적 문제이자 역사적 왜곡의 실체라 할 수 있는 야스쿠니 신사 문제를 꼬집은 저자의 다음과 같은 문장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듭 강조해 두고 싶다. 고이즈미 수상이 말한 대로 일본국가를 위해 사지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은 자연스런 감정‘이라고 한다면, 원폭 공격을 포함한 공습 및 전투로 말미암아 죽게 된 비 전투원, 특히 오키나와의 피해자를 왜 모두 ‘합사‘하지 않는 것인가. 또 시베리아 억류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나 강제적으로 일본인이 되어 일본인으로서 전사한 예전의 조선 및 대만 등의 식민지인 모두를 필히 합사 대상으로 하지 않는 것은 왜 인가. 이 비합리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로 그 논리적 허점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정부나 국민으로서는 과거 조선인 희생자들이 일본의 일개 신사에 합사되는 것은 극히 반대할 것입니다.

저자는 글 곳곳에서 내면화된 일본인들의 우월 의식과 아시아 인들을 고통에 빠트렸던 대동아 공영 및 서구 열강에 대한 그 정의로운 전쟁에 대해 반성이 없는 일본에 대해 학자로서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불법적인 조선의 강제 병합이 자신들이 조선의 이익을 위해 나선 것이 아니라 그저 중국 대륙의 진출 교두보로서 여겼다는 것은 미개한 자들을 마땅히 문명인들이 통치해야된다는 서구 제국주의의 저 알량한 논법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식일텐데요. 물론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었던 윌슨의 자결주의를 갖다 붙일 생각은 없지만 침략 전쟁 자체를 미화하고 그것을 아시아인들의 해방 전쟁으로 날조하는 것이 일본의 국격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묻고 싶을 따름입니다. 본질적으로 일본의 안보를 비롯한 자위권 문제가 오로지 미국과의 안정적인 관계에서 시작된다 믿고 있다면 그것은 일본의 오판이라 할 수 있을겁니다. 현재 저들이 너무나 원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견제는 한국의 진정한 협조가 없어서는 이뤄질 수 없는 것이며 더 나아가 아시아 대륙 내에서 실질적으로 존경받는 국가가 되고 싶다면 독일과 같이 역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코케츠 아츠시의 겸허한 이 글이 일본 내의 리벌럴 지식인들인 강상중 교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반일과 혐한이 어떻게 다른지 잘 설명해주고 있다 생각합니다. 저자는 기존의 일본 극우 정치가 한국의 반일을 그저 국내 정치로 이용할 수 있는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폄하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일본이 과거 문제를 사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로서 반일과 혐한은 그 궤가 다르다는 것을 명백하게 주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점은 오에 겐자부로를 비롯한 소위 리버럴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그와 같은 인식을 개선해야하는 문제이며 일본 내의 정치권 뿐만 아니라 한국이나 중국 내의 진보적인 인사들에게 조차 일본 리버럴의 한계로서 여겨지는 점으로 치부되는 것에서 스스로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라도 급히 개선해야 되는 시각이라 여겨집니다. 자신들의 양심이 어느 정치나 어느 세력에게서 이용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러한 관점부터 고쳐 나갈 필요가 있겠습니다. 특히 저 리버럴들이 한국내의 식민지 개발론을 주장하는 파렴치한 자들을 다각도로 비판한다면 그 양상이 사뭇 달라질 가능성이 있는데요. 하지만 이 조차도 저들이 일본의 국내 정치에 휘말려 자신들의 주장을 제대로 펼쳐내지 못하는 것에서 그 한계가 명확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는 최근에 날치기로 합의된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일본 리버럴들의 인식적 한계가 이를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207 페이지의 띄어쓰기 오류, 258 페이지의 오타가 있었습니다. 참고로 번역 자체가 매끄럽다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일왕은 신과 다름없는 존재로서 삶을 마치고 현생을 떠나 일왕이 안배하는 세상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안식을 취한다는 일종의 구원론을 저자가 소개하고 있었는데요. 야스쿠니의 존재 이유도 바로 저런 인식에 기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후에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일왕제가 혁파되지 않은 상황은 이처럼 유감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소위 말하는 승전국 미국 조차도 하늘의 인정을 받은 일왕의 존재를 인력으로 무너뜨릴 수 없었다는 허무맹랑한 일본 내부의 프로파간다와 함께 말이죠.

일찍이 청일, 러일 전쟁에서 많은 일본인들이 피를 흘렸다. 이는 요컨대 만주와 몽고의 패권을 둘러싼 대외전쟁이었으며 이 지역의 확보는 일본인의 권리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는 반전평화 운동이 고조되지 못하고 데모크라시와 같이 파시즘에 대항하는 사상도 성숙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쇼와 일왕은 아시아의 해방자이며 국내에서는 대일본제국을 아시아의 일등국으로까지 끌어 올린 최대유일의 공로자라는 역사인식이 지금까지 계속 살아있는 것이다

원자폭탄의 투하에 이르는 경위 및 배경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하고 오히려 원폭투하의 책임을 넌지시 암시할 뿐 원폭투하를 유인한 국가의 잘못된 지도에 대해서는 모른척 했다

결과적으로 쇼와 일왕의 면책은 전쟁책임 문제를 불투명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전후 일본사회가 당연히 정면으로 직시해야만 했던 전쟁 책임 소재의 추궁작업 자체를 보류시켰다

이러한 대국 내셔널리즘을 배경으로 일반 국민들이나 다수의 기업가 및 기업노동자들도 아시아 태평양전쟁 이후의 부정적 역사를 없애버리고 싶은 욕구를 갖게 되었다

중국 및 한국에서 분출하는 민중의 반일 내셔널리즘 심층에는 일본의 역사상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이 있다는 것은 지적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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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은 없다 - 사회이동이 우리를 어떻게 호도하는가
하다스 바이스 지음, 문혜림.고민지 옮김 / 산지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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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 하다스 바이스는 이스라엘 출신의 문화인류학자이자 현재는 베를린훔볼트 대학의 아시아-아프리카 학과에서 독일 정부의 지원을 받아 아프리카 연구를 하고 있는 학자입니다. 그녀는 미국 사회과학의 요람이라 불리우는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독일과 핀란드 등지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던 이력을 갖고 있는데요. 이번에 ‘중산층은 없다‘라는 책은 거의 처음 출판되는 바이스의 논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그녀는 경제인류학과 사회비판이론 및 자본주의의 금융화 등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류학자에게 경제학은 조금 상상하기 힘든 분야일 수도 있겠는데요. 다만, 이 책을 읽어보니 그녀가 왜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학이 인간 사회와 밀접한 학문이고 특히 인간의 역사적 변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왜 현 시대의 인간 사회가 과거와는 달리 자본주의 체제에 어떻게 종속되었는지에 의문을 품고 이를 규명하는데 온 노력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의 무리한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그녀의 학문적 진정성은 높이 살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이 책은 원제, ˝We have never been middle class˝로 지난 2019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제목과 더불어 그녀가 이 책을 통해 명확히 밝히고자 하는 점을 먼저 소개하고 싶은데요. 현재 우리가 익히 관념적으로 혹은 체제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중산층 혹은 중간계급‘이라는 용어 자체가 자본주의가 노동력을 근간으로 하는 시민들을 착취하고 이를 잉여 자본의 축적으로 이용하면서 그것에 대한 본질을 호도하기 위해 이와 같은 개념을 만들어냈다고 일관되게 논증되고 있습니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 ˝중산층 이데올로기˝ 자체가 교묘하게 진보와 보수 그리고 좌와우 할 것 없이 사회정치적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여기에는 자본주의의 꽤 면밀한 작업이 동반되었다고 저자는 보는 듯 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이데올로기 자체가 강요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맥락으로 저자인 바이스는 설명하고 있었는데요. 이미 이 중산층 middle class 은 현재의 전반적인 금융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평범한 시민들의 노동이라는 측면에서 자본의 축적과 잉여 가치의 지속적인 생산을 위해 이용되고 있어서 그에 따른 자본에 의한 사회적 작업을 면밀하게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주된 목적으로 판단됩니다.

우리에게 신자유주의적 경제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프랭크 나이트는 금융 자본주의의 인정을 위해 ˝소유와 불확실성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강력한 논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즉, 오늘날의 금융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갖고 있는데 이것을 시장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대적으로 금융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홍보하면서 금융 자본주의에 의한 장미및 전망을 이론적 기반에서 정립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마찬가지로 밀턴 프리드먼 역시 이와 유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식 체계는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을 분석하며 한스베르너 진이 꼬집은 ‘카지노 자본주의‘의 일면이라 봐도 지나치지 않아 보입니다. 그동안 저는 포스트 포드주의에 따른 자본주의의 금융화에 대해 인용을 자주 해왔는데요. 또한 자본주의 자체가 자아실현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체계로 시민들의 활발한 계급 이동을 원칙적으로는 옹호한 것으로 재생산 되어 왔습니다. 물론 현실은 이와는 매우 다르죠. 애초에 이 자본주의는 계급주의적 고착화를 용인하거나 긍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금융 자본주의는 본래 자본주의의 교리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글 3장에서 이 시스템에 대한 대략의 얼개가 드러나고 있습니다만 수많은 시민들이 교육을 통한 인적 자본의 투사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남들과는 확연히 다른 사회경제적 우위였습니다. 즉, 사회적 자원을 부모로부터 지원받아 그렇지 않은 다른 계층의 사람들보다 더 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 자체가 불평등한 전제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따라서 척 콜린스나 매트 스튜어트가 이 계급 세습에 대한 비판을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의 견고한 교리와는 별개로 극심한 불평등을 양산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능력주의 meritocracy 의 역설적 측면이라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흔히 수많은 부유층들이 자신들의 근면과 성실로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주입된 능력주의의 일면이며 실상은 사회적 자원과 인적 자본의 화려한 네트워크로 인한 결과물인데도 그것을 오로지 개인의 노력으로 치부하는 것은 오늘날 금융 자본주의의 불확실성을 감추려는 노력이라 손 치더라도 그것은 실질적으로 대다수의 시민을 기만하는 행위라 여겨집니다.

그런 연유로 이 글에서도 금융 자본주의의 시대의 도래는 ˝모두가 이익을 얻지 못한다˝는 체제의 속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잉여 가치만을 위한 체제 우선이 금융 자본주의와 만나면서 이익의 편중화는 더 노골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일부 시민들이 주식과 여러 금융 시장에서 기초적인 자본가의 위치를 경험할 수도 있으나 현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삶의 지표까지도 희생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 것인데요. 흔히 ˝포드에게 좋은 것이 미국에도 좋다˝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관념을 차치하더라도 1980년대 이후 소수의 자본가의 이익을 사회 전체의 이익으로 오도하게 만든 자들이 너무나 많았으며, 또한 이 글 4장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이러한 주의(主義)를 주장하는 자들이 도덕적 한계 뿐만 아니라 공익을 위한 정치 마저도 제거시키기에 이르자 사실상 민주주의가 쇠퇴하게 되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사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의 입으로는 일절 내색하고 있지 않지만 민주주의 자체를 매우 불편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고 자본주의적 체제 하에서 주도하는 세력 이라든지 계층이라든지 뭐라 부르던 간에 소수 엘리트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관점은 저들이 어떻게 자기들 입맛대로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저자가 다시 강조하고 있듯, 시민들이 자신 스스로와 가족만을 위한 협소한 이익에 몰두하게 만들고 그것이 사회의 이익과 결부되어 있다는 식으로 오도하게 한 것은 무엇보다 왜곡된 관념이라 할 수 있을텐데요. 이렇게 주입된 소위 개인주의적 관념이 사회적 개선에 시민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하고 더욱이 여론을 파편화 시켜 시민들 내부에서 일상적으로 불협화음을 조장하게 만든 것은 고약한 현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결과적으로 현재 진행된 우리 사회의 모습에서 앞선 ‘중산층 이데올로기‘로 인한 소위 일부 국가에서의 중산층 확대의 현상을 분석한 후쿠야마의 이해는 명백하게도 이들 중산층 확대로 해석되는 국가들에게서 실질적으로 ˝민주주의적 요구 또는 민주주의의 확대˝의 목소리가 거의 전무하다는 점에서 중산층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떨어져 있는지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생각합니다. 소위 이들 중산층에게서 사회적 맥락으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객관적인 도덕적 공동체‘의 개념을 분리시키고 다수의 시민들을 일개 개인들로 파편화 시켜 오로지 자신들의 문제에만 몰입하게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차별적인 자본주의의 모순을 체념하게 만드는 것으로 작용되어 왔다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금융화가 내세우는 수많은 미사여구˝는 공공의 이익을 결여한 것은 기본으로 이러한 불가항력적인 체제를 강고하게 만들면서 어떠한 개선이나 개혁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점에서 실로 우려할 만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자본주의가 정치의 영역을 잠식시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임에도 그것에 대한 아무런 의문을 표하지 않게 되는 현 시점의 중산층 이데올로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사회 이동이라는 미명하게 시민들을 근본적으로 잠식하고 조종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손에 넣을 수 없는 목표를 던져놓고 다수의 사람들을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는 이러한 체제 자체가 시민들의 비판적 인식을 성공적으로 제거했다는 점에서 금융 자본주의의 대단한 성공을 축하할 만하다 생각됩니다. 그래서 랜들 콜린스가 부동산 금융화에 따른 배타적 금융 자본주의를 부채질 한 것이 신자유주의였음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점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나는 중산층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주장을 했다. 이 이데올로기는 투자 주도의 자기 결정을 가장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사회이동으로 돌림으로써, 노동 가치 저하와 이러한 저하로 인한 사람들의 고충을 불분명하게 만든다

자유주의 사상의 주류에서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재산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어떤 것보다 많이, 그리고 더 잘 투자하도록 유혹한다는 것이 나의 논지이다

중산층의 몰락을 진단하면서 이를 실질임금 상승의 정체, 공적 지원의 감소, 일자리의 자동화, 보건 및 교육비용의 상승, 투기적 금융과 기업 이익의 무제약적인 힘, 금융 위기에의 취약성, 부당한 수수료의 불공평한 세금 부담 등에 기인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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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5 1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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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5 1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