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관계, 그 숙명의 역사 - 주재우의 지략지계
주재우 지음 / 경계(도서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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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희대 중국어과 교수로 재직중인 주재우 교수는 미국 동부 코네티컷 주의 예술학교로 유명한 웨슬리언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이후 북경대의 국제관계학원에서 석박사를 취득했습니다. 그는 미 브루킹스 연구소의 방문학자를 거쳐, 국내에서 중국 정치와 중국 관련 외교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데요. 대학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것만큼 중국과의 외교 및 북한 문제와 관련해 전문가로서의 의견을 여러 지면을 통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의 '한국인을 위한 미중관계사'를 인상 깊게 일독했는데요. 한국전쟁과 냉전시기를 거쳐, 특히 1972년의 미중 수교와 관련한 정치적 배경과 그에 따른 저자의 분석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특히 북한의 핵개발 역사에 있어, 파키스탄 핵물리학자 압둘 카디드 칸의 존재를 저자인 주교수를 통해 인지하게 되었는데요. 당시의 그런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는 다소 충격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북한과 파키스탄의 핵 커넥션의 실체 또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처럼 학자로서 그리고 현재의 한반도 문제에 면밀한 자각을 갖고 있는 지식인으로서 관련 학계의 중요한 학자들 가운데에서도 훌륭한 학자라고 여겨집니다. 그의 이 글은 최근인, 2022년 2월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자인 주교수는 앞으로의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와 그리고 미국이 쉽게 인정하기 어려운 한 가지 전제를 언급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미국이 싫든 좋든 이제 북한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을 협상의 대전제로 삼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미국과 북한의 여러 입장차이와 서로 간의 몰이해를 다룬 3장의 '진정한 북한의 개혁 개방문제'와도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즉, 미국은 북한의 개방에 대한 대내외적인 선언을 선결 조건으로 보고 있으나, 이것은 흡사 과거의 서방세계가 중국을 개방으로 이끈다면 중국의 국내 정치에서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의 필요성과 그 이행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다소 헛된 기대와도 유사해 보이는 측면이 있습니다. 결국은 신자유주의가 베이징 컨센서스를 탄생시키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가 작금의 중국을 만드는데 일조한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결과'를 이끈 것과 전자는 어쩌면 유사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더군다나 다음 4장에서 미국이 "한반도 비핵화는 곧 북한 비핵화로 국한"하는데 반해, 중국이 말하는 범위는 "한반도 전체를 포괄"한다는 저자의 분석에서 이런 외교적 함의의 간극과 각 행위자들의 정치적 동상이몽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겠는데요. 마찬가지로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들이 무분별하게 북한 붕괴론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당시 한국 정부에도 이를 조장시켜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금쪽 같은 시간을 그냥 흘려버린 바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자의 이 글은, 과거 미국과 북한의 끝 모를 협상에서의 지나친 소모전과 거의 다름없는 역사의 기록을 꽤 면밀하게 자료로서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북한을 두둔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 북쪽의 정권이 일반 국가들의 외교 관념으로는 섣불리 예측할 수 없다는 것과 이 글에서 어느 정도 그 실체를 밝히고 있는 소위 '통미봉남'이라는 김씨 일가의 전략적 노선이 그저 허무맹랑한 논법이라는 식으로 치부하는 다수의 국내 진보세력에게 나름의 자각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즉, '북한의 김씨 일가가 그토록 주장하는 미국에 의한 자신들의 안보 보장'의 실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냉정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얼마 전에 서평을 쓴 라종일 교수의 글도 그렇거니와 북한은 거의 확실하게 핵 강국으로서, 미국으로부터 '핵보유국'의 인장을 받고 싶어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바로 이 핵보유국 지위를 통해 미국과 '제대로 된' 협상을 하고 싶어하는 것이겠죠. 다만, 이와 관련해 제가 아쉽게 생각했던 부분은 과거 조지 H. W. 부시 정권의 한반도 핵무기 철수가 너무 성급하게 이뤄지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물론 당시의 정치 외교적인 상황을 저자의 상세한 분석을 통해 그 정치적 배경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서독과 동독이 통일을 앞두고 있던 시점에 체코와 동독을 향하고 있던 미국의 핵무기를 철수시킬 필요성을 느꼈고 그러한 맥락에서 남한에 있던 핵무기까지 미 본토로 철수시켰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무엇보다 남한에 핵무기가 없다는 것을 북한에게 '핵포기를 요구하기 위한 정당한 명분'으로서 필요했던 것은 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행으로 어느 정도 국내의 안보 불안을 초래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물론 그와 관련한 미국의 후속 조치도 있었지만 이는 중요하게 중국측을 향한 미국의 요구로서 "우리가 남한의 핵무기를 철수시켰는데 너희는 평양에 마땅히 핵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설 것을 종용해야만 한다"는 것으로서 불행하게도 이는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는 4장과 5장에서 진술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핵은 중국에게는 그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증거라 생각됩니다. 어쩌면 중국이 북한의 김씨 일가가 소유한 핵무기를 언제든지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와 관련해 실질적으로 우려스러운 상황은 동북부 지역에 북한 유사시 상황에 투입될 군대를 국경 가까이에 주둔시키고 있다는 점일 겁니다.

저자가 이 글에서 단언하는대로 북한의 핵탄두는 그들의 장거리 미사일과 함께 미국에게는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이 핵탄두를 미국 서해안까지 실어 나를 수 있는 장거리 ICBM의 개발에 그치지 않고 외화 벌이를 위해 중단거리 미사일을 각국에 밀수출한 사례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북한 간의 수교 협상에서도 중요한 지렛대로 작용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최근까지 북한의 불법적인 미사일 수출이 국제 사회에 의해 적절하게 제한되고 있다고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부분은 파키스탄의 핵탄두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핵탄두 역시 테러 단체나 핵무기를 너무나 원하는 이란과 같은 나라에 흘러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문제를 미국 CIA가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겠지만 어느 누가 이러한 일들이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요. 다른 걸 다 차치하더라도 이 문제 하나만 가지고도 미국과 일본이 북한의 핵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용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는 마땅히 자신들의 안보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안보가 달려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죠. 진짜 막말로 평양의 김씨 정권이 그러한 참혹한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는 어떠한 정치적 보장도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이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맞닥뜨릴 수 있는 또 한 가지의 불안한 정치적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미국이 북한의 급변 사태 개입 작전을 계획대로 실천하려면 필히 극복해야 할 내부적 장애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미 연방 대통령이 "한반도에서 벌어질 모종의 유사 사태에 관련하여 의회로부터 어떠한 작전권이나 명령권, 출전권도 부여받지 못했다"는 의미인데요. 이 부분은 저자의 어떤 망상이 아니라 실제로 조약의 문구가 그러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부득 이 부분과 관련된 인터뷰는 아니겠지만 얼마 전에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만과 한국을 건드릴 시에 기필코 우리의 반응을 보게 될 것"이라는 그의 매우 강도 높은 발언을 접한 기억이 나는데요.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와 미국 간의 동맹이 대표적인 비대칭 동맹 관계로서, 유독 요 근래에 미국이 중국과의 마찰에서 우리 한반도가 중요한 입지적 조건을 갖고 있다는 것을 꺠닫게 된 이후로, 저들에게는 국익과 관련해 새삼 중요한 곳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역외 균형 전략을 실행하기 위해서라도 한국과 평택에 있는 미군 기지는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생각합니다. 물론 혹여 북한이나 다른 국가에 의한 한반도 침략 상황에 있어 미 의회가 사탕이나 빨면서 시간을 때우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유사시에 미국 의회가 미 본토의 65만 지원군을 재빠르게 승인하게 될지 걱정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안전 장치로서 최소한의 법리적 검토나 예비 조치가 있으면 좋겠지만 이것도 결국은 닥쳐봐야 아는 것입니다. 미국의 핵우산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죠. 제가 여러 서평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미국이 LA와 샌프란시스코가 핵무기에 의한 지옥이 될 것을 감수하고 서울의 핵공격에 대한 반격을 자신들의 핵무기로 실행할 수 있을지는 마찬가지로 닥쳐봐야 알 수 있는 일이겠죠. 다만, 미국이 단언하고 있는 동맹국들에 대한 안보 보장이 휴지 조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들 역시 최소한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있을 겁니다.  

끝으로, 그동안 미국 정치권에서 몇 번이나 북한 선제 타격론이 나왔던 것으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과거 클린턴도 그러했고 도널드 트럼프도 한 때는 이를 검토하다가 제2차 한국전쟁 개전 시에 발생할 막대한 민간인 피해를 보고 이 카드를 접게 되었는데요. 이와 관련해, 최근에도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북한 문제에 있어 군사적인 옵션을 먼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부분은 이러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언제까지 북한의 핵탄두를 미국이 용납할 수 있을지가 가장 큰 문제이며, 한반도는 직접적인 국지전 카드 하나만으로도 주변국이 참전하는 확전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에 전쟁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근래 들어 대만에서의 위기는 더욱 한반도 정세를 불안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런 북한이 핵 개발 자체에 있어 스스로가 이미 잘 인지하고 있듯이, 대내외에 자신들의 핵무기 문제에 따른 지역 내의 광범위한 안보 문제가 향후에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는 점은 확실해 보입니다. 저는 이러한 불확실한 환경 때문에라도 더욱 북한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남북한 간의 전쟁은 누가 승리하던 간에 한민족 스스로에게는 거의 민족의 종말에 준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어떤 위기 상황에서 김정은에게 전혀 살 구멍을 만들어주지 않게 되어 그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서울과 도쿄에 핵탄두를 투하하고 마는 비극적 결말을 미연에 방지하는 노력을 모든 이해당사자국들이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북한 내부의 군 강경파들에게 어떠한 명분도 주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그렇다고 우리와 미국이 김정은에게 끌려다니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라고 말하려는 건 절대 아닙니다. 오로지 한반도를 파멸에 이르게 할 비극적 전쟁을 함께 막아보자는 것이죠. 이와는 반대로 국내에 치킨 호크와 다름없는 정치인들의 위험한 언동이 이 같은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을지 저로서는 계속 의문이 드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또한, 글 말미에 저자가 단언하는 만큼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보다 북중 관계를 좀 더 제대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 몇 번을 반복해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는 우리의 외교 당국자들이 겸허히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이 글에서 보이는 여러 정치적 수사들 가운데 4장에서 등장하는 "북한의 행태는 세계의 불안을 갉아먹으며 부단히 몸집을 키워갔다"는 표현이 실로 마음에 와 닿는다고 느꼈는데요. 이것은 거의 반박할 수가 없는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특히 평양은 무엇보다 주한 미군 철수 문제만큼은 미국 정부와 직접적인 협상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북미 수교라는 과제가 미 행정부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결코 아니라는 데 있었다

반대로 미국의 정계와 사회 지도층 사이에는 북한이 전형적인 공산 국가로서 기만과 무책임한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에 대화의 결과 차원에서 그들에게 보상을 제공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마지막으로 1991년에 김일성 주석이 신년사에서 독일식 흡수 통일을 막기 위해서는 핵무기 개발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이 동원해 온 외교적, 평화적 노력은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이 북한의 핵미사일에 대해 미국과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 역시 그러한 지정학적 고려에서 출발한다

미국이 ‘한반도 비핵화는 곧 북한 비핵화‘로 국한하는데 반해, 중국이 말하는 범위는 한반도 전체를 포괄한다

무엇보다 중국은 신의주의 관광 개발 계획이 불쾌했다

그러나 미국이 북한 급변사태 개입 작전을 계획대로 실천하려면 필히 극복해야 할 내부적 장애가 있다. 바로 미 의회의 승인이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벌어질 모종의 유사 사태에 관련하여 미 대통령은 의회로부터 어떠한 작전권잉나 명령권, 출전권도 부여받지 못했다

다시 말해 상기한 결의안이 대통령과 의회의 의굔 불일치로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한반도 유사시 미국이 즉각 개입할 수 있는 소지는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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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의 길 - 엇갈린 남·북·미의 선택
라종일.김동수.이영종 지음 / 파람북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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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가천대학교의 석좌교수를 맡고 있는 저자는 서울대 정치학과와 동대학 석사를 마치고, 이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 정치학 박사 과정을 졸업했습니다. 그는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김대중 대통형 후보 선거캠프에 참여했고, 1998년 3월에 국가안전기획부 1차장이 되었습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는 주영 대한민국 대사관의 대사를 역임합니다. 여기 이 책은 라종일 교수와 함꼐 김동수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의 수석연구위원과 이영종 전 중앙일보 외교안보팀장과 함꼐 쓴 글이기도 한데요. 주된 배경은 평창 올림픽에서의 남북 화해 노력, 이후 싱가포르 북미 회담 및 트럼프 김정은 간의 하노이 정상 회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글은 거의 최근이라 볼 수 있는 2022년 2월 출판되었습니다.

흔히들 근래 미중 관계에 있어 양자간의 '전략적 불신'을 극복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화해 협력이 가능하다고 전문가들은 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요. 물론 현재 돌아가는 양상으로 봤을 때, 과연 워싱턴이 베이징과의 극적인 화해를 바라고 있는지는 극히 회의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남북관계에 있어 전략적 불신이야 말로 우리의 어려운 현실을 매우 극명하게 드러내는 문구가 아닌가 싶습니다. 거의 유례가 없는 전임 대통령의 탄핵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남북 화해와 북미 정상화에 사활을 걸고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과 싱가포르 회담 및 하노이 회담을 운전자와 중개인의 입장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데요. 바로 이 적은 분량의 글은 당시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의 바쁘게 돌아갔던 외교적 행로를 제법 차분한 어조로 그려내면서, 해당 당사자들의 막전막후의 여러 상황들을 거의 가감없이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일반 언론의 추정으로만 간접적으로 접했던 당시의 실상을 거의 진실에 가깝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우리 정부와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다소 파격적이고 예측하기 어려웠던 인물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한반도 비핵화를 비롯한 시급한 문제에 있어 어느 정도 긍정적인 역할을 기대했던 것이 이 글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이 부분에 있어 트럼프 대통령에게 각별한 기대를 가졌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 책에서도 존 미어샤이머의 입을 통해 트럼프에 대한 저간의 평가를 인용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트럼프가 비정상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라 외교에는 맞지 않는다"는 언급이었습니다. 원칙대로라면 백악관이 자신들의 국무부 관료 등과 백악관 내부의 참모들 의견을 수렴하여 미국의 외교 노선을 적절하게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일텐데요. 과거 클린턴 행정부나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도 바로 이러한 논의 과정을 거치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공개된 볼턴의 발언이나 폼페이오의 여러 심각한 의견들을 취합해 봤을 때, 트럼프는 정치외교적인 문제에 있어 다소 정상적인 범주 안에 속하는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나 트럼프가 혹여 국익에 반하는 예상치 못한 폭주를 감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김정은과의 싱가포르 회담에서도 볼턴과 폼페이오가 밀착 마크를 했다는 일화는 뭔가 희극 같지만 그 의미하는 바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종래의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백두 혈통의 존재는 여러 언론과 북한 정권의 세습을 다룬 논저들을 통해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이 백두 혈통에 대한 기본적인 저의 인상을 크게 바꾼 것은 이 글에서 보여지는 이들 남매들에 의해, 자신들이 과거 유럽의 구귀족보다 더한 혈통의 자손들이라는 것을 이미 자기들 스스로가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즉, 내부 단속과 체제 유지를 위해 백두 혈통을 일종의 정치적 선전 수단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 스스로가 '신의 자손'과 같은 맥락의 북한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유지 및 강화하고 있다는 부분이었는데요. 이는 평창 올림픽에서의 북한 당국자들의 언행이나 행동을 통해, 체제 자체보다 김정은과 김여정 남매에 대한 거의 신격화와 다름없는 숭배가 우리의 예측을 넘어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신정 국가와도 같은 북한과 가열차게 타협과 협의를 진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충분히 짐작할 만한데요. 민족의 대의라는 측면에서 북한과의 협의도 중요하지만 이들에 의해 자행된 한국 국민의 불법적인 납북에 따른 이들 납북자들의 송환 문제와 아직도 북한 내에서 핍박 받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국군 포로들에 대한 생환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보인다는 저자의 비판은 정치권이 새겨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미국과 일본이 기울인 노력과 매우 상반되는 면이라 비판할 수 있겠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종전 선언'에 다소 매몰되어, 1950년 한국전쟁을 일으킨 스탈린과 김일성의 군사적 모험주의에 대한 명백한 역사적 과오에 대한 반성 요구 없이 그저 종전 선언에 급급한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우리의 진보세력과 이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이와 같은 문제 등한시하고 있다는 점은 마찬가지로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점을 들어 당시 논란의 인물이었던 볼턴이 문재인 대통령을 현실을 보지 못하고 형식에 급급하다고 평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 가운데 나르시시즘의 화신이라고 평가 받는 도널드 트럼프에게 당시 우리 정부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큰 기대와 모험을 걸었던 것은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후에 정의용 실장이 백악관으로 가져온 김정은 위원장의 제안에 즉흥적으로 반응해, 모두의 예측을 벗어나는 백악관에서 회담 수락 기자 회견을 트럼프가 허락한 것은 이를 잘 증명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여기에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 맥마스터 보좌관을 차치하더라도 그저 우리측 특사인 정의용 실장의 '홀로 회견'은 워싱턴과 서울의 보이지 않는 선을 여실히 보여줬던 일화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의 청와대는 이 예측불가의 대통령에게 큰 기대를 보이게 되었고, 이러한 북미 간의 조율에 막대한 외교적을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북한 간의 동상이몽은 결국 손쉽게 드러났고, 트럼프 스스로가 '남들보다 먼저 배신을 감행하는' 캐릭터임과 동시에 김정은 위원장 역시 자신의 아버지가 힘들게 구축한 핵무기를 포기할 의도는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마찬가지로 타당해 보입니다. 김정은은 그저 미국과 적절한 협상을 통해, 핵보유국으로 인정 받고 미국 주도의 유엔 제재를 풀어내어 손쉽게 북한 경제의 정상화를 이룩하는 것이 자신의 시나리오였음이 분명해 보이는데요. 물론 많은 대내외의 전문가들에 의해 이 점은 충분히 예측된 부분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저자의 발언에 의하면 북한 당국이 미국 주도의 핵 시설에 대한 완전 검증 가능한 사찰을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려운 부분이었으며, 기본적으로 이러한 사찰을 북한이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자는 거듭 밝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적인 제약에서도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미국과 북한 양측을 조율하는데 엄청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고 봐야 하며, 이는 문 대통령 스스로의 신념을 떠나 매우 지난한 과정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더욱이 개성 공단의 남북협력사무소가 회담 실패를 경험한 김정은에 의해 무참히 파괴될 정도로 북한의 터무니 없는 책망과 비난의 화살을 이 정부에게 쏟아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국내 일부 언론들의 냉소와 많은 국민들의 지탄을 전부 받기까지 하였지요.

외교가 아무리 기본적으로 불활실성을 내재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 글에서 드러난 2018년의 험한 난맥상은 오로지 우리 정부만을 비난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에 오래도록 외교가에서 금언처럼 돌아다니고 있는 문구는 "상대방의 정확한 의도를 감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김정은이 과연 미국과 완전무결한 핵포기를 합의할 수 있었는지는 매우 불확실한 측면이 있습니다. 국내에 많은 전문가들이 현재의 우크라이나 사태에 있어 김정은이 값비싼 교훈을 얻었다고들 하고 있지만, 아마도 김정은이 원하고 있는 시나리오는 UN 안보리 이사국과 같은 핵보유 인정이 아니더라도 최근에 미국이 인도와 파키스탄에 내렸던 사실상의 핵무기 보유 묵인을 바라고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의 국내 정치에 있어 핵무기는 김정은 자신의 통치 명분이자, 내부의 강경파를 달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고 아마도 미국의 체제 위협에 대한 대처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일수도 있겠습니다. 설사 몇 년간에 협상으로 미국과 북한이 핵합의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김정은이 그에 대한 반대 급부로 한미 동맹 파기와 한국에 대한 미국의 핵우산 철폐 및 주한 미군 철수 카드를 꺼낼텐데 위의 사항은 현실적으로 한국이나 미국 양국에 있어 들어줄 수 없는 사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북한의 핵무기 포기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북한은 나름 ‘자신들이 미제의 침략을 막아주고 있으니 남한이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등 지원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을 개발했다

불충분한 대로 그사이 알려진 몇 가지 자료를 근거로 살펴보면 역시 이 회담에 가장 열성적인 것은 트럼프 대통령 본인이었고, 그 측근들 사이에서는 회담의 의미에 관하여 회의적인 의견과 우려가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일정한 기간이 지난 다음 핵무기 폐기의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러서는 합의를 중단하거나 번복하는 것으로 핵 보유와 함께 경제적인 실리를 기하는 것이 기본적인 북한의 입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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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중도 - 한없이 나약하고 터무니없이 가벼운 중도정치의 민낯
알랭 드노 지음, 클레망 드 골작 그림, 권희선 옮김 / 인문결출판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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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노는 캐나다 퀘벡 주의 아우타우아이스(지명의 독음이 정확한지는 불확실합니다)에서 태어나 독일에 소재한 마크 블로흐 연구 센터에서 연구 박사를 수여받고, 자크 랑시에르의 지도하에 파리 8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의 독특한 연구는 프랑스 철학에서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게오르크 짐멜에 집중되어 있기도 한데요. 너무나 의외이긴 하지만 국제 금융이 주도하는 세계화와 초국적 기업의 조세 피난처와 관련된 주제로 여러 글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철학을 전공한 학자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는 점은 저로서는 꽤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의 이력을 보면서 지식인의 진정한 의무와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금 고심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는데요. 그가 집필한 여러 논저들이 왜곡된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다루고 있어, 하루빨리 다른 글들도 역시 국내에 번역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이 글은 원제, "Politiques de l'extrême centre"로 지난 2016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11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알랭 드노의 이 글이 주는 인상은 흡사 타리크 알리의 대표적 논저를 떠올리게 합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다소 구색을 맞추기 위해 등장한 이 중도라는 개념은 드노의 말마따나 어떤 정치적 신념이나 명확한 정치적 의견 없이 그저 현실을 오도하는데 일정 부분 이용당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가히 영속된 위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자본주의에서 "자신의 생활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경제 사회적 변수에 어떠한 통제권도 없다는 점을 중산층을 포함한 다른 계층들이 미처 생각도 못하도록 하는 것이 기득권층의 숨겨진 의도"가 명확하다고 저자는 10장에서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단순히 좌우파의 구분과 진보와 보수라는 설명은 그저 자본주의가 이 정도로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데요. 마찬가지로 우파의 정치가 표면적으로는 자유를 표방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은 힘있는 자들을 위한 정치라는 점에서 이들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자유주의'라는 관념의 진실된 정체를 저자가 중도를 비판하는 논증 가운데서 얼마간 이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현 자본주의적 체제에서 어느 정도의 불평등을 통해 경제 발전을 추동하는 일련의 강고한 이행은 진정한 중도 따위는 이미 의미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됩니다. 명백하게 극우일 수밖에 없는 이들을 보수라고 치부하는 것처럼 스스로 중도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실상 어떠한 공동체적 이익에도 관심이 없으며, 진정한 이데올로기적 가치가 전무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이를 다시 풀어본다면 현재의 자유주의적 기조로 쌓아 올려진 자본주의는 명백하게 개인주의적이고 보다 이기심을 용인하는 분위기로써,  이것을 신자유주의이든 자유지상주의든 뭐라 부르던 간에, 변형된 보수주의와 아주 밀접하게 결탁해 이들 전부가 각국의 주도적인 세력이 되었다는 건 거의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이와 비슷하게 저자도 글 3장에서, "신자유주의자와 초자유주의자는 서로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구조적 형태의 발전이 자유를 추구함에 있어 불가피한 결과라는 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점은 신자유주의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정치적 이미지 문제 때문인지 이런 약탈적 이론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여왔으나 제대로 된 본질은 앞선 점을 거의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인 드노가 비꼬는 듯한 언설로 소개하고 있는 "나는 우파이긴 하지만.."이라는 스스로를 별볼일 없는 우파들과 구분하는 듯한 논법이 얼마나 허망한지 입증하고 있었는데요. 클린턴 대통령이 백악관의 주인이 되었던 그해부터 많은 미국의 리버럴들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투신한 것은 이를 잘 설명한다고 여겨집니다. 그저 솔직하게 "나는 시장 자유와 개인주의, 인간의 이기심과 이를 바탕으로 다수의 능력 없는 사람들이 불평등한 구조를 그저 감내하는 것 밖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더 설득력이 높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물론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러한 노골적인 논법에 전혀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맥락에서 글 13장에서는 "좌우를 가르는 스펙트럼 자체가 너무나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는데요. 이에 대중은 이러한 좌우의 근본적 차이를 구분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민주주의가 도식적인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아주 직접적인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수많은 무정부주의자들의 의견을 차치하더라도 현재의 민주주의가 엘리트주의에 다소간 매몰되어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부정하기 어려울 점일텐데요. 여기에는 시장 자유에 입각한 신자유주의자들이 민영화와 급격한 복지 축소를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몰아가 이 글에서 보여지는 중산층의 유명 무실과 더불어 시민들의 '정치적 의지의 거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가 구조적으로 강고하게 이식되는 과정에서 상위 기득권층을 제외한 다수의 일반 계층들에겐 별반 이득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밀턴 프리드먼은 애초에 사회에 정의 따위는 필요없다고 일갈하기까지 했습니다만 굳이 수십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 루소의 사회계약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러한 종교적 맹신과도 같은 개인주의와 이기심에 대한 믿음을 과도하게 정치화하고, 이외에는 전혀 어떠한 대안도 없다는 식의 그릇된 신념을 공익과 공동체주의의 회복을 위해 어떻게 하면 조절할 수 있을지 시민 사회가 의견의 공유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됩니다, 드노의 언급대로 중도라는 정치적 개념 자체가 현재의 극심한 불평등 상황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명확합니다. 그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익을 위해 사회의 모순을 용인할 수밖에 없다는 변명에 기대 숨지 않도록 비겁한 신념보다는 최소한의 정치적 선명성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시민이 지켜야 할 의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많은 시민들이 중도 놀음에 빠져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결국 과두제에 이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전에 다시 한번 극우 파시즘이 도래해, 정치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겠습니다. "자신들을 제외한 모두가 적"이라는 이들 극우주의자들이 나날이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은 앞으로 어떤 식으로 귀결될지 참으로 우려스러운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데요. 이 글 16장에서와 마찬가지로 "합리적 이성과 균형, 실용주의와 현실주의를 표방하며 좌우의 대립과 반목을 해소하겠다"는 일부 극중주의자들의 주장들은 이처럼 설득력이 낮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체제에 대한 순응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너무나 강고한 것이 현실이고, 철지난 이념적 구도를 바탕으로 반대의 비판적 의견을 묵살하는 것도 현재의 단면이기도 할텐데요. 무엇보다 조지 소로스와 같은 자가 현재의 금융 시스템을 이용해 한 국가의 경제를 투기로 절단 낼 수 있는 상황을 우리가 용인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를 통해 조세 피난처 문제를 비롯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관련된 시급한 문제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이러한 노정은 앞선 과두제를 미연에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고 마찬가지로 다수의 시민들이 극단주의의 포로가 되는 것을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개인주의는 개인 활동이 만들어 낸 산물이 아니라 고난에 처한 자들을 흉내 냄으로써 완성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신자유주의와 초자유주의자는 서로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구조적 형태의 발전이 자유를 추구함에 있어서 불가피한 결과라는 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아나키스트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자명하다. 현대 정치 시스템이 민주주의 무덤을 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폭압적 연대 행동에는 강력하다 못해 폭압적이까지 한 공권력의 진압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민중이 결집하여 조직화되면 어디에서나 그렇듯 카리스마적 권력이 출현한다

‘자유주의자이긴 하지만 좌파‘들은 모든 정치적 요구를 이상하다 못해 뒤틀린 방식으로 다룬다

그런가 하면 조지 소로스는 자기 혼자의 힘만으로도 한 나라의 경제를 붕괴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규모의 외환 투기가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도대체 어째서 현대 금융 시스템이 이를 용인하고 있는지 의아해 한다

비정상적인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정상적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하에서 중도층이라는 개념은 다양한 가능성에 기초한 분석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또한 자유주의 정책이 빈부 격차를 더욱 확대시키고 있음은 어린 아이도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주의를 신성한 가치로 떠받드는 자유주의자들과 사유재산 축적에 집착하는 초자유주의자 및 정치 활동의 의미를 신적 대상과 연계시키는 종교적 광신도 같은 ‘보수주의자‘들과 자신을 구분하려 할 때에는 그 명칭을 쓰지 않는다

전통주의자들은 국가가 집행하는 폭력에 대해 현실론을 내세우며 적극 찬성하지만 그들이 그러는 진짜 이유는 그것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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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복종에 관하여
에리히 프롬 지음, 김승진 옮김 / 마농지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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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은 독일계 유대인으로써, 전세계에서 인정받는 사회심리학자, 사회학자, 인본주의 철학자 그리고 사회 민주주의자였습니다. 특히 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며,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 여기 프롬 만큼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면밀히 연구한 학자는 보기 드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1900년에 프랑크푸르트의 정통 유대교 부모 밑에서 태어나 프랑크푸르트 대학을 거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이후 독일에서 나치가 권력을 잡은 이후, 여느 유대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스위스 제네바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에 정착을 하게 됩니다. 비로소 미국에서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주게 되는 정신 분석과 심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고 동일 학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에 이릅니다. 이 책은 원제, "On Disobedience : Why Freedom Means Saying 'No' To Power"로 지난 198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프롬도 이미 장 자크 루소를 접했을 수도 있겠으나, 단편적으로 이 글의 제목과 관련되어 떠오른 것은 루소의 "인민은 자신들의 정부를 갈아치울 권리가 있다"는 문구였습니다. 물론 프롬의 이 책이 시민들의 일반적인 야생성을 단순히 고취시키고자 쓴 글은 아니었는데요. 그가 버틀란드 러셀을 줄곧 인용하면서 우려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무분별한 핵전쟁으로 인한 전세계의 절멸이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첨예한 종말을 위해 대결하는 사실상의 맹목적 군사주의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심도있게 고찰해 보는 것이 그의 일관된 학문적 목적이기도 할텐데요. 그의 확신대로 러셀이 단순한 회의주의자가 아니라 "누구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무엇보다 긍정하고 중요시하게 여겼던 휴머니스트로서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고 봐도 크게 지나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바로 이런 우리의 삶을 위해 모든 시민들이 최소한의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지를 명확히 한 것이 바로 이 책의 꽤 숭고해 보이는 목적이라고 판단됩니다.

글의 2장에서 프롬은 과거 한정된 자원으로 인한 견고한 계급주의적 체제에 어떻게 소수의 지배자들이 다수의 피지배자들을 억압하고 제압해 왔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는데요. 그것은 일반적인 수준의 '복종'이라는 관념을 넘어서는 거의 세뇌에 가까운 '만연된 복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부분의 개념적 도출은 다음 3장에서 드러나는,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사색하고 생각을 진행시킬 수 있는 분위기"를 과연 이를 자본가들이 어떻게 볼 것인가를 단편적으로 추측해 볼 수 있기도 한데요. 프롬은 논리적 전개 과정에서 과거 자본주의적 관리 체계와 공산주의적 관리 체계의 양대 관리 체계가 실상은 많은 인류의 삶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바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그러한 측면에서 저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인 3장의 시스템적 모순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는 더 부유하지만, 덜 자유롭다"에 이르게 됩니다. 사실 배타적인 시장 자유에 경도된 자들은 오늘날 이룩한 자본주의가 아무런 결점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2008년의 대몰락을 차치하더라도 이런 자본주의가 '합리주의라는 만능의 잣대로 시민들을 세뇌'시킴으로써, 과거 소크라테스와 같은 현인들의 스스로의 양심에 따른 불복종과 저항을 거세시켜 버린 비극적 작용을 추동한 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그따위 사회 정의와 불평등의 개선이 뭐가 중요하냐는 것과 같은 주장들 말입니다. 이에 프롬은 프로메테우스의 불과 같은 우리의 불복종의 정신이 너무나 터무니없게 죄악시 된 것을 '권위주의적 양심'에 빗대고 있기도 한데요. 그래서 그가 강조하는 "서구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19세기의 공공연한 권위주의를 극복했다고 자랑스러워 한다"고 비꼬고 있기까지 합니다. 과연 우리가 이 권위주의를 극복했는지는 그 실상에 대해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프롬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해 크나큰 애정을 갖고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과거 권위주의적인 관리주의자들이 마땅히 누려할 시민의 자유와 권리들을 사회를 통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계층들을 위해 적절하게 관리해 왔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오늘날 우리의 사법제도가 과연 모두의 시민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를 최소한 한 번 이상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오늘날 심지어 내면화 되었다고 판단되는 자본주의 체제가 민주주의를 시녀로 거느리고 있는 상황에서 마찬가지로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사법제도가 과연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모두가 다시금 숙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대다수의 시민들이 보다 자유롭게 사회에 대해 혹은 체제 전반에 대해 인간이 지닌 이성의 권리로써 마땅히 사색해야만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입니다. 또한 다시금 강조하는 것이지만 프롬의 우려대로 인류와 인류 문명 전반을 절멸에 이르게 하기 충분한 핵무기의 위협에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이를 방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단초로서, '시민의 불복종'이 매우 시급한 상황입니다. 단언코 미국을 포함해, 순간 감행될 수 있는 군사주의적 모험을 얼마나 견제할 수 있는지가 우리의 의무이기도 할텐데요. 이렇게 암울한 냉전의 시기에서도 모든 인간의 삶과 자유를 위해 노력하고 경주했던 러셀과 프롬과 같은 소수의 지식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 정도의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끝으로 저자인 프롬은 3장과 4장에서 앞으로 우리에게 벌어질 경색된 시장 자유가 초래할 사회의 양상을 경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단순히 노동자들이 자본을 제어하는 것에 이르는 것을 추종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질적 목적이 삶의 주요 관심사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속박으로부터 삶이 해방되게 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언급하게 되는 것이지만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그토록 강조했던 화두였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진정한 합리적 이성에 기반한 시민들의 불복종 정신이야 말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욱 건전해지는 선결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저는 지금도 특히, 최상위에 위치한 자본가들과 엘리트주의자들이 시민들이 스스로 사색하고 자신의 삶을 위해 견실히 학습하고 사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지배와 피지배적인 관념에 노예가 되어 있는 저들의 인식론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 자본주의가 어떤 집단의 이해 관계에도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 속성 자체가 공익과 별반 상관없이 배타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에리히 프롬의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자의 번역이 거의 군더더기 없이 좋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향후 5년에서 10년 안에 인류가 인간 문명을, 아니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절멸시킬 가능성이 존재하며, 그것도 상당히 현실적인 가능성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에 복종한다고 할 떄 대개 그것은 권위주의적 양심에 복종하는 것이다

자유와 불복종의 역량은 분리될 수 없다

세상의 좋은 것들은 소수에게 돌아갈 만큼밖에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부스러기만 가질 수 있었으므로 불가피하게 이러한 규칙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예언자들은 가끔씩만 나타난다, 그들은 죽은 뒤 메시지를 남기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긴다. 그런데 바로 이 점 때문에 그 사상은 대중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사람들에게 악용되기 쉽다

지난 150년 동안 우리는 정치 사제들을 넘치도록 보아왔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 계급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자유라는 개념을 관리하고 집행했다

대부분의 사회체제에서 복종은 최고의 미덕이고 불복종은 최고의 죄악으로 여겨진다

버틀란드 러셀은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은 사악함과 어리석음의 깊이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산업 시스템이 지나온 경로를 그대로 계속 밟아간다면 우리는 어디에 도달할 것이며 인간은 어떤 상태가 될 것인가?

거대 기업은 피지배자들에게 통제받지 않는 권력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생산물이 우리 위의 객관적 요인들과 결합해 우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점점 더 거대해지면서 우리의 기대를 꺠뜨리고 우리의 계산을 무력화한다

우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책임을 두려워하고 그저 배불리 먹는 로봇 같은 노예가 되고 싶어 한다

연대와 사랑이 아니라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원칙, 인간의 의지와 비전과 계획이 아니라 비인격적 메커니즘인 시장이 사회의 삶을 조절해야 한다는 믿음 등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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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백인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 - 소셜미디어 시대의 고전과 여성혐오
도나 저커버그 지음, 이민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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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주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에 소재한 도브스 페리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도나 저커버그는 근래 이름을 알리고 있는 고전 학자입니다. 이쯤에서 눈썰미가 있는 분들은 짐작하셨을 수도 있겠는데요. 바로 그녀의 오빠가 페이스북의 창립자로 유명한 마크 저커버그입니다. 웹상에서는 그녀와 오빠인 마크 저커버그 간의 사적인 이야기들을 잘 찾아볼 수 없기에 어떻게 보면 두 남매가 각자가 서로 다른 분야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녀가 요 근래 등장한 SNS 인터넷 기업에 대해 상당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에 의외인 측면이라 생각되는데요. 더불어 그녀는 여성 지식인답게 넷상에서의 여성혐오와 남성 우월적인 인식에 대해 꾸준히 비판적인 글을 언론에 기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그녀의 학문적 경로는 미국의 사회과학 명문인 시카고 대학에서 예술학 학사를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에 고전 문학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그외에도 저커버그는 대안 우파 Alt-right 에 대한 비판과 이들의 움직임에 대해 마찬가지로 경고하고 있는데요. 지금 서평을 작성할 이 글 역시 이러한 학문적 연장선상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Not All Dead White Men"으로 지난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커버그의 이 글은 일종의 '사회학적인 르포르타주가 가미된 일부 사회계층에 대한 폭로성의 글'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것의 주된 대상은 대안 우파와 여성 혐오주의자 및 인종차별주의자들과 픽업 아티스트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소위 '레드필'이라는 반젠더적인 공간에서 "여성과 이민자들, 유색인들 그리고 자유주의 엘리트들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어떤식으로 표출"하고 있는지에 낱낱이 파헤치고 있습니다. 제가 일전에 서평을 작성했던 케이트 만의 논저에서도 그렇듯이, 이 글에도 등장하는 '인셀 Incel, 즉 비자발적 독신'들이 어떻게 죄없는 일반 여성들에 대한 터무니없는 분노로 점철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자신들의 권리가 여성들에 의해 짓밟힘을 당하고 있다는 측면의 인식이 그녀에 의해 가감없이 논증되기에 이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저들이 현재의 자유주의적 가치에 기반한 성평등주의를 옹호하고 특정 인종만을 향하는 특권에 반대하는 소위 계몽적 태도에, 어떻게 저들이 논리적 근거 없이 거의 반지성주의에 가까운 주장들로 일관하고 있는지를 글 전반을 통해 명확히 드러내고 있는데요. 이는 "대다수의 남성들이 극심한 차별에 놓여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내재되어 있는 비정상적이고 비도덕적인 정치적 신념을 무슨 정치적 박해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 마냥 '커밍 아웃'하는 꼴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끊임없는 노정을 기울여 온 사회적 진보에 대한 저런 터무니없는 분노와 혐오는 이 지점에서 저들을 민주주의적 가치 아래 포용해야하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하는데요. 뿐만 아니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철지난 이데올로기화를 시도하여 그것을 지지하고 인정하는 모든 계층을 극좌나 강고한 좌파로 몰아가는데 온갖 정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저들의 현재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저자인 저커버그는 경제사회적 체제의 해석에서 당시 합법적으로 노예제를 용인한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된 '스토아 철학'을 현재의 인셀과 여성 혐오주의자들이 앞뒤 맥락없이 자신들의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의 근거로서 무분별하게 내면화시킨 점을 2장 전반에서 비판적으로 논증하고 있는데요. 아주 단적으로 말해, 전체라고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스토아 철학 전반이 성차별주의와 엘리트주의를 직간접적으로 강조하고, 이렇게 드러난 성차별주의가 "오늘날 다수의 여성 혐오주의자들에 의해 공명한다"는 점은 학문적으로 매우 불행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과거 레오 스트라우스의 고전 연구가 그 양가적 측면에서 네오콘들에 의해 일종의 교리적인 측면으로 지지받은 것과 제법 유사하다고 여겨집니다. 이처럼 순수 학문조차도 어긋난 이데올로기화에 의해 철저하게 이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오늘날의 포퓰리스트들에 의해 확산되고 있는 '반지성주의'의 파급에도 이러한 왜곡된 학문의 인용이 분명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점은 분명합니다. 즉, 백인 우월주의자들이나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전체주의의 논법을 적극 차용하고 있는 점을 과연 어디까지 용인해야 할지에 대해 시민 모두가 고심을 해볼 시기라고 생각되는데요. 저들이 이 시점에도 '파시즘'과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적 가치와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야할 시민적 의무에 상당히 좋지 않은 영향이 될 것은 거의 자명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저커버그가 스토아 철학을 오용하는 이들의 행태를 낱낱이 지적하면서 소위 '자기 길을 가는 남자들과 픽업 아티스트 혹은 여성 혐오주의자들'의 아전인수격인 학문적 인용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상세히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는데요. 이들에게 꽤 높은 팬덤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인용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 3장과 4장은 스토아 고전 철학의 대표격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사랑의 기술'을 통해, 이미 원전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 자체가 지금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심각하게 여성차별적이고 좀 더 자세히 들어가면 강간에 대한 무분별한 찬양과 남성들에게 강간을 권유하는 등의 여성을 성적 도구로 삼는 저열한 시도의 근거로까지 삼고 있습니다. 저자는 다수의 인용을 통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거의 '강간 노트'라고까지 주장하고 있었는데요. 우리가 인정하는 고전의 향취가 지금에와서 어디까지 이를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꽤 중요한 바로미터로 취급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페미니즘의 철저하고 가차없는 성평등주의로 치부하지 말고 시대상에 따라 우리의 계몽주의가 그것을 면밀히 구분해 낼 수 있는 당위를 많은 시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어느 정도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요. 단순히 남녀의 문제라서가 아니라 여성의 권리, 아니 누구나 인간이라면 인간답고 평등하게 자신의 삶을 누리게 하는 인식적 차원에서 이러한 원칙을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자본주의적 이행 가운데서 사회 전반이 인정하는 시장 자유의 논법이 가미된 '능력주의' 같은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인정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의도된 사탕발림으로 결코 왜곡하거나 한정지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글의 앞선 부분에서 이러한 "레드필 남성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학과 역사를 자기들 멋대로 인용해 자신들만의 가부장제와 백인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로 강화시키는 것은 과거 히틀러의 나치와 매우 닮아 있습니다. 이처럼 백인 우월주의와 여성 혐오를 인정하고 찬양하는 것 자체가 파시즘과 유사한 맥락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논증 과정에서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과 근거의 제시는 고전 철학을 연구한 전공자답게 큰 설득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여성 고전 학자라는 점을 색안경끼고 보지 않는다면 꽤 논리적인 비판이라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텐데요. 이 뿐만 아니라 주요한 비교 분석 대상으로 인용되고 있는 픽업 아티스트와 관련해서도, 이들의 행동과 주된 목적이 여성의 성을 트로피로 삼아 보통 인셀들로 규정되는 여성 혐오주의자들과 비교적 상이한 측면의 인식을 소개하고 있었는데요. 저자인 그녀가 '픽업 아티스트'라고 규정된 여성의 성과 섹스만을 목적으로 삼는 이들의 매우 현실적이고 치밀한 분석은 꽤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마치 실제로 현역(?)에 있는 어느 픽업 아티스트가 직접 자신의 일화를 기록하는 것과 유사한 느낌까지 받게 되었는데요. 이는 온전히 글을 쓰기에 앞서, 치밀한 자료수집을 선행한 그녀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다시 앞선 논점으로 돌아와서, 대부분의 픽업 아티스트들이 일반적인 남성들을 대상으로 '여성을 쟁취'하는 방법을 교수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것이 이들의 명백한 목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인셀들과 마찬가지로 소위 '가스라이팅'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의 성관념 자체를 남성에게 전적으로 종속시키는 작업에 이들은 왜곡된 노력을 경주하게 됩니다. 이는 픽업 아티스트들이 다소 이질적이라고 볼 수 있는 여성 혐오주의자들과 비교해, 후자들이 '여성의 인정'을 광범위하게 거부하면서 전통적인 가부장적 체제의 복귀와 여성의 성을 남성들의 소유물로 만들고자 하는 계몽주의 시기 이전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터무니 없는 열망을 보이는 것과 유사한 인식적 체계를 짐작하게 되었는데요. 일반적인 남녀 관계에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사실상 거부하는 것과 "남성에게 성적인 욕망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원래 여성에게 내면화된 욕망이기도 하다"는 그들의 해석은 이들 픽업 아티스트들이 분명한 왜곡된 성관념을 보통의 남성들에게 전이시킬 수 있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이는 극단적인 여성 혐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건전한 사회적 관념에 있어 분명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을 무슨 컬트와 같은 개념으로 용인하는 것은 문제가 될 소지가 분명하고, 이에 대한 지속적인 학문적 연구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현재의 사회구조가 "오로지 여성들의 권리만을 위한 토대"로서 발전되어 왔다고 믿고 있는 여성 혐오주의자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의 관념 체계로 사회 전반을 변화시키는 것이 현재로선 거의 불가능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작게는 여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마땅히 섹스를 제공해야하며, 과거의 남성 권리를 비롯한 전근대적인 사회 관념을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점은 단순히 그들의 일관된 신념을 넘어 익히 부정적인 관념론 자체로 심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겁니다. 어쩌면 이러한 측면에서 자신들의 주장들을 사회 전체에 관철시키기 위해 이론적 근거로 '스토아 철학을 경쟁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전에 도널드 트럼프가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마땅히 키스를 해야하고, 자신은 여태 그렇게 살아왔다는 자랑스럽게 고백하기까지 하였는데요. 이들 여성 혐오주의자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지신들의 이상향으로써 여기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왜곡된 논법들이 다수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는 점은 심히 우려스러운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트럼프가 일개 사인이 아니라 한때 미국을 좌지우지 했던 정치인이었던 측면에서 미국 시민들의 정치인에 대한 변별력이 어느 정도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한편으론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여성을 일종의 소유물로 여기고 계몽주의와 그로인한 민주주의가 이룩한 사회적 진보를 오히려 남성 권리의 심각한 후퇴로 여기기까지 하는 이런 반지성주의적 인식은 실로 우려스럽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건전한 성평등주의 자체가 남성의 권익을 침해하고 있다는 식의 논리적 비약은 또한 민주주의 정치 자체에 있어서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여성 혐오와 백인 우월주의를 기치로 제도적 정치 무대에 속속들이 등장하는 극우 포퓰리즘과 같은 무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계몽의 가치로 시민의 삶을 위해 발전시켜온 남녀 평등과 다원주의적 가치를 또 한번 짓밟힐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낱 음모론 따위로 여겨서는 안될 겁니다. 과거 네오콘이 자신들의 정치적 행로에 대한 근거로 고전 철학을 이용했던 점은 시민들 개개인이 이를 마찬가지로 명확히 인지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민주주의를 전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치부했던 역사적 근거를 지금도 찾고 있는 어용 지식인들과 극단주의자들 또한 우리가 마땅히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30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약간 조심스러운 부분이지만, 역자가 본문에서 여성의 성기를 '음부'라 하지 않고 '보x'라고 지칭하고 심지어 '보슬아치'라는 번역까지 한 것으로 보아 일개 독자로서 역자의 고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대안 우파'를 알트라이트로 지칭하고 있었는데요. 아마도 역자의 의도적인 선택으로 여겨집니다. 대안 우파 자체가 갖는 의미가 다소 온건하게 보여, 저들이 극우주의자들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망각하기 마련인데요. 다만 알트라이트 역시 숨겨진 본질을 드러내는데 마찬가지로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원론적인 입장에서 단순한 저의 해석을 언급하는 것 뿐입니다. 오해가 없으면 좋겠습니다. 

온라인에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드러낸 여성은 레드필 커뉴니티에 드나드는 남성들로부터 악성 트윗과 이메일을 받게 된다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극우 세력이 고대를 전유한다는 점을 우려한다

이 남성들은 페미니스트 공간을 침해하는 것이 자신들의 권리이지 의무라고 믿는다

흑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사실이 인종주의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역사의 모든 여성들이 기만적이고 통제적이고 문란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우리가 여성중심적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양육법이 남성에게 압도적으로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앤드루 앵글린은 한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남성이 다른 인종과 관계를 맺는 것은 그다지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아무런 차이도 만들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이 그런다고 하면 화가 난다. 왜냐하면 그들의 자궁은 곧 우리의 자궁이기 때문이다!"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야‘라는 문장은 구조적인 성차별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남성이 흔히 하는 대답으로, 자신은 성차별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의 일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포스트는 "사회정의의 전사들이 대학을 가장 허접한 이들과 영합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제일 징징거리고 안쓰럽고 멍청한 루저들 말이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스토아 철학이 레드필 커뮤니티에 입성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왜곡이 필수적이다. 레드필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은 국수주의자이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데 반해, 스토아 철학은 세계주의적인 관점을 지향하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무소니우스는 스토아철학이 오늘날의 남성계에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질 만한 기본적인 전제를 둔다. 바로 남성이 태생적으로 여성보다 감정 절제를 더 잘한다는 가정이다

레드필 커뮤니티에 드나드는 남성들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덜 감정적인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이 남성들은 미국의 노예제가 남긴 유산과 그것이 흑인에게 장기적으로 미친 영향을 인정하지 않는다

레드필 스토아주의자들이 볼 때, 가부장제를 복원하려는 구조적 변화의 시도는 모두에게 이득이다. 이들의 관점에서 여성과 유색인은 비이성적이고 지도를 필요로 하기에, 이성적인 백인 남성이 책임자가 된다면 사회는 더 나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 속에서 오비디우스는 독자에게 오늘날이라면 성폭력으로 간주될 만한 일을 하라고 조언한다

그에 따르면 성공적인 픽업은 힘을 가진 남성잉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치를 절하시키고, 남성의 가치는 높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일련의 전략으로 이루어져 있다

픽업 아티스트들은 다양한 인종의 테스토스테론 수치, 성기 사이즈, 성격에 대한 고정돤념을 전시한다

"허락을 구하지 말라. 지배적인 태도를 가져라. 당신의 접근을 상대 여성이 거절할 때까지 밀어 붙여라. 허락을 구하지 말라. 여성의 손을 잡아끌어서 당신의 거시기 위에 올려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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