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의 세상 - 트위터 팔로워 총 490만 명, 글로벌 인플루언서 9인 팬데믹 대담
말콤 글래드웰 외 지음, 이승연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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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토론토에서 개최되는 주요 정책 문제 토론인 멍크 디베이트 The Munk Debates 는 피터 멍크와 그의 아내 멜라니 멍크가 설립한 자선 재단에 의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멍크 디베이트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에서는 너무나 잘 알려진 토론회이기도 한데요. 특히, 광범위한 주제를 바탕으로 심도 있는 토론으로 유명합니다. 더욱이 사회적 명사 혹은 충분히 존중 받을 만한 저명한 여러 지식인들을 초대해, 이들이 단순히 손쉬운 수입과 공짜 캐나다 여행으로 치부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인식은 멍크 디베이트의 수준 높은 명성으로 인해, 여기에 초대된 인사들이 토론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토론회의 사회자로서는 내셔널 포스트와 토론토 스타의 칼럼니스트이자 작가인 러디어드 그리피스가 나서고 있는데요. 그의 깔끔한 진행 역시 멍크 디베이트의 명성을 올리는 데 한 몫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사회자인 그리피스가 2020년 4월 9일에서 6월 10일까지 진행된 멍크 다이얼로그 시즌1을 기반으로 정리한 내용을 출간한 것입니다. 원제는 "The World after COVID : The Munk Dialogues on a Pandemic edited by Rudyard Griffiths"로 2021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알고 있기로는 국내에 번역된 멍크 토론은 2편으로 알고 있는데요. 저의 북플 친구분이기도 한 얄라님을 통해 이 글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간단히 글을 요약해 보자면, 2019년 11월에 발생한 전세계적인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세계는 어떻게 변화되어 왔으며,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세계의 양태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전망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여기에는 전세계에서 존경 받는 지식인들의 현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를 좀 더 면밀히 풀어본다면,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떤 위기를 겪게 되고 그동안 누적된 전세계의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 문제는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주된 관심이 담겨 있는데요. 더불어 넷 미디어 시대에서 우리의 정치적 권리가 안전하게 보호 받을 수 있을 것인지도 현재의 양상과 돌아가는 모습을 통해 규명해 보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이곳에 등장하는 소위 명사들은 미국의 민주주의, 더 나아가 전세계의 민주주의에 대해 걱정과 희망을 동시에 피력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전세계가 매우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현실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전염병 사태는 막대한 인명 피해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니얼 퍼거슨의 주장대로, 이러한 팬데믹 사태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이었습니다. 이것은 수많은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입증된 바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기에 이름을 올린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과 대만, 싱가포르의 성공적인 방역 정책을 칭찬하고 있는 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동시에 '작은 규모의 민주국가들'이 권위주의적 수단이 아닌 민주주의 방식으로 팬데믹 사태를 통제한 것에 대해 마찬가지로 그 결과를 인정하고 있었는데요. 사실 팬데믹 초기에 미국을 비롯한 많은 유럽 국가에서 '개인의 자유'라는 논법에 -분명 중요하지만- 가열차게 매몰되었습니다. 이 개인의 자유는 직면한 문제에서 대부분을 이슈로 빨아들이게 됩니다. 즉, 자신들의 자유는 팬데믹이라는 비상상황에서 조차 절대 교환할 수 없다고 강조한 것인데요. 자신이 죽음에 이른다 하더라도 스스로 마스크를 안 쓸 자유와 권리는 지켜야겠다는 맥락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우리의 확진자 동선 추적을 한국의 민주주의가 종말을 고했다는 식으로 왜곡하기에 이릅니다.

파리드 자카리아가 논평한 대로, 종래의 신자유주의자들이 흡사 앵무새처럼 부르짖었던 '큰 정부 vs 작은 정부'라는 논법은 팬데믹 상황에서 사실상 무의미해진 상황입니다. 물론 아직도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2008년의 그 끔찍한 사태에서 정부 아니, 국민의 세금으로 자신들을 살려준 것도 망각한 채, 2010년 즈음이 지나자마자 더 이상 정부는 금융 시장에 개입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물론 제가 정부의 금융 시장 개입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부분에 있어 카라 스위셔는 현재까지의 금융 정책 대부분이 최고 부유층을 위한 것들이었으며, 그러한 가운데 나날이 심화된 소득 불균형에 대한 정부의 어떠한 대책이 없었다는 점을 꼬집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여러 논평들 가운데, 팬데믹 이후의 아메리카 2.0에 대해 냉소하는 부분은 절로 저의 눈길을 끌었는데요. "아메리카 2.0은 뭘까요? 엄청난 로비력, 미다스 같은 엄청난 재산, 많은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능력을 갖춘 거대 기업들로 가득한 나라인가요? 아니면 소득 평등을 이룬 나라일까요?"라는 질문의 진정한 해답은 아주 명확합니다. 존 듀이의 주장대로 많은 시민들이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그리고 카라 스위셔 역시, 부자들이 더욱더 방탄 승용차를 타는 상황을 바라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사회 안전망에 대한 함의를 다시금 꺼내 들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민주주의 2.0'의 미래에 대해 열띤 논의를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다른 토론자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색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소위 '사회적 신뢰'에 대한 문제인데요. 그의 말대로 라면 이 사회적 신뢰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양자 간에 어느 한쪽이 더 유리하다고 주장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는 중국의 일례를 들며, 그동안의 눈부신 중국의 경제 발전으로 인해 자신들의 정부가 분명 권위주의적인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중국인들은 현재의 정치 체제에 신뢰를 느낄 수밖에 없다는 요지였는데요. 단순히 풍족한 돈의 소유를 넘어 전체적으로 삶의 풍요로움을 보장하여 이를 사회적으로 자리매김한 정부에 대해 시민들이 '사회적 신뢰'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그의 분석은 실로 현실적이라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앞선 논평에 대해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있어 유권자들의 투표와도 결부지을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되는데요. 물론 신자유주의 이행 이후, 민주주의 국가들의 좌와 우의 논법이 다소 정치적 본류에서 벗어나게 되고 이런 이념적 선택은 현재의 직면한 경제적 불평등을 어느 한쪽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게 됩니다. 저는 과거의 미국 리버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셈법에 의거 신자유주의에 대거 투항한 사건을 앞선 현실의 예로 들고 싶은데요. 자크 랑시에르나 샹탈 무페의 언급처럼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우파들의 득세에 진보 좌파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 점은 분명한 사실일 겁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좌파 언론인인 로버트 미지크 역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요. 그렇지만 최소한의 정치적 신념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리버럴들의 그 같은 투항은 소위 자본주의적 독재와 다름없는 광범위한 이행에 있어 보수는 물론이고 진보 역시 어떠한 견제가 되지 못했다는 불행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욱 견고화 되기 위해서는 서멘사 파워의 진단처럼 현재 유럽이 직면하고 있는 반자유주의자 혹은 반민주주의자들의 대두에 시민들이 즉각 나설 수 있는 결단이 필요 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어떤 가치인지에 대해 더욱 고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선 자카리아의 평가대로 팬데믹 상황의 소위 '비상 대책'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비상 대책과 같은 수단을 오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휘두르는 헝가리의 오르반과 같은 자들에 의해서 위기가 짙어질 가능성이 더 높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민주주의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실패한 것이다"라는 자카리아의 뼈아픈 고백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도널드 트럼프와 오르반의 연결은 이처럼 지독한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이에 필연적으로 우리는 모두의 안전과 공익을 위해 시민들이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정치적 공감대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이언 브레먼이 강조하는 대로 미국과 캐나다와 같은 민주적 국가들이 팬데믹 사태로 인해 단번에 권위주의 독재 국가로 나아갈 가능성은 그만큼 희박하다고 보는 것이 옳은 해석일텐데요. 그동안 민주주의를 경험한 시민이 다시 과거로 회귀하거나 독재를 추종하기란 너무나 어렵다는 노엄 촘스키의 주장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좀 더 면밀히 따진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충분한 시스템적 역량과 자원은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민주주의를 시녀처럼 부린 자본주의와 경제적 우월 담론을 거의 비판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시민들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어 보이는 것도 확실합니다. 물론 현재 미국과 같은 로비스트들에 의한 광범위한 금권 정치에 있어 힘의 차이가 분명한 것은 사실이기도 한데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저버릴 수는 없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모두의 안전을 위한 공적인 담론 역시 민주주의가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이처럼 팬데믹 사태에서 만약 한국과 대만이 그만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다면 확진자의 동선 파악과 같은 행동에 정부가 쉽게 나서기란 어려웠을 것이란 평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여기에 자주 언급된 한국과 대만의 사례는 충분히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긍정적인 이정표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아직도 국내의 많은 이들이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해 상당한 불신을 갖고 있는데 반해 전세계인들이 갖는 우리의 평가는 이처럼 상반되기까지 합니다. 특히나 근래 출판되는 많은 팬데믹 관련 글에서 우리 정부에 대한 대처와 방식에 대해 호감을 표하는 저자들이 많다는 점은 아직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건전하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 우리는 팬데믹 상황에세도 질서정연한 선거도 치루고 시민들 대다수에게 있어 민주주의에 대한 함의 역시 중요한 문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다만, 팬테믹 상황에서 나날이 세를 불린 인터넷 기업들이 민주주의에 초래할 부정적인 전망 또한 다른 논저들에서 처럼 반복되고 있기도 한데요. 러시아나 중국과 같은 국가들이 이런 기술 기반으로 정치를 쥐락펴락 하고 있는 것은 충분히 우려할 만한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는 인터넷 기업의 사주들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는 비평은 우리 시민들이 귀담아 들어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이익에 따라 규정되는 인터넷 환경의 전반적인 혼란이 민주 정치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모두가 인지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영국에는 처칠 수상이 있었다. 두 명의 비범한 정치 지도자가 위기를 틈타서 공공 제도를 강화했던 건 순전히 운이 좋았던 것이다

미국은 국민을 보호하고 안전을 지켜야 할 아주 결정적인 국면에서 최고가 아니라는 게 이 위기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지금은 중국 중심의 세계가 아니다. 미국 중심에서 벗어난 세계일 뿐이다

트럼프가 자신에게 절대 권한이 있다고 떠들 수는 있어도 미국 시스템이 갖춘 강점 덕분에 12시간 내에 주지사 10명이 트럼프를 비난했고 트럼프가 뭐라 말하든 대통령의 선언에 따라 주를 봉쇄하거나 개방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물론 아무도 민주주의에 책임감이 없는 독립적인 관료를 원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겐 잘못된 성장 모델이 있었다. 금융에 의존하는 성장 모델에 깊이 빠져들었다. 인력과 자본의 생산성에 의존하는 성장 모델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어떤 백신을 개발하든 도움을 주기 위해 어떤 검사를 할 수 있든, 서구 사회에는 분명히 그 일을 빨리 해내야 할 도덕적 책무가 있다

팬데믹이 누구의 잘못이었는지 국가 간에 책임 공붕이 벌어질 테고 민족주의를 부채질 하게 될 것이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라면 미국 뿐 아니라 캐나다, 유럽 국가, 한국, 일본 모든 민주 국가가 함께 그런 접근을 요구했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 민주 국가들이 더 이상 한 팀으로 협력하지 않다 보니 공백이 생겼고, 중국은 그 자리를 채울 준비가 완벽히 되어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초기부터 코로나19에 ‘우한 바이러스‘란 이름을 붙여 써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느라 이번 팬데믹에 대한 결속을 다지려 모인 G7 공동 성명에 동의를 거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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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뉴스 - 디지털 저널리즘, 위기의 실체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33
박영흠 지음 / 스리체어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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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박영흠 교수는 현재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2020년에 불거진 검찰과 기자 간의 소위 부적절 관행에 대해 양자 관계를 명백히 '갑을 관계'라고 비판을 한 바가 있는데요. 저는 이런 검찰과 일부 언론의 밀착 관계가 민주주의에 어떠한 긍정적 영향이 있는지 명백하게 알지 못합니다. 이 책의 저자인 박교수 역시 기성의 한국 언론이 얼마나 권력과 자본에 유착되어 있는지 그동안 끊임없이 발언을 해왔습니다. 특히, 그가 관심을 보여온 언론과 민주주의 그리고 언론 윤리에 대해 저 역시 많은 부분 공감하고 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박교수의 이 글은 최근의 언론 지향 뿐만 아니라 우리의 언론이 디지털 시대에 어떠한 변화를 맞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2019년 2월 출간되었습니다.

다소 이른 결론일 수도 있지만 저자는 "언론과 시민 간의 건강한 파트너십"이야 말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정리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정치인들이 오로지 입으로만 민주주의를 외친 것과 마찬가지로 언론 일각도 건전한 민주주의를 위해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기 보다는 돈벌이와 자신의 얄팍한 권력을 위해 앞선 두 가지를 망각해 왔습니다. 아마도 많은 시민들은 현재 자신의 삶에 있어 돈을 추구하고 이익을 우선하는 일련의 노력들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심이 있을 겁니다. 어쩌면 이런 고심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부분일 겁니다. 마찬가지로 언론과 기자들 역시 과연 자신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특별한 노력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해 가감 없는 성찰이 필요하다 여겨집니다. 그런 측면에서 박교수의 이 글은 일관되게 기자들의 윤리관에 대해 논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반 시민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본과 언론,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따른 전통적인 사회 개념의 형태를 유지하는 이론적 가지들이 어떻게 시장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지 약간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즉, 자본의 지배적 논리화 과정에서 이 언론도 그러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이런 사회적 이익화에 따라 언론 사주들도 돈을 벌고 싶어하고, 그런 측면에서 언론의 독립성이 크게 흔들리고 또한, 자본의 입맛에 맞는 기사들을 생산해, 이를 답습하고 시민들에게 강고한 인식으로 주입되는 등의 일련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글의 4장인, "일상적 삶 속에서 모든 자원의 배분을 오로지 시장 논리에 따라 수행해야 한다는 시장 물신적 사고가 빠르게 내면화되었다"는 주장이 이를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기본적인 헌법적 기초에서 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는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사항입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에서 만큼은 그저 이상주의적이고 이론적인 측면으로 치부될 것이 아니라, 언론이 시민의 권리를 위해 사회의 정의를 위해 제 기능을 다해야 한다는 당위는 그저 책에서만 이론으로 배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일반적인 의사들이 환자의 건강과 인간의 존엄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언론인들 역시 이 점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어야만 하겠는데요. 여기에서도 인용된 아마존닷컴의 창립자 제프 베조스의 공격적인 워싱턴 포스트 인수를 자본과 언론과의 관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사례로 뽑고 있습니다만, 더 엄밀히 현재의 언론 기반이 비정상적으로 변화된 것에는 1장과 2장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기득권의 권력 강화와 사회 전반에 대한 자본의 물리적 지배력 확대 그리고 이러한 이행들 속에 시민들이 정치 감시와 같은 본연의 의무에 더욱 멀어진 결과가 원인이 되었을 겁니다. 저자는 이 부분과 있어, 5장에서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이미 불신과 회의,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고 뼈아픈 고백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 글의 앞선 2장은 '시장이 우선이냐, 광장이 우선이냐'라는 해석으로서 마누엘 카스텔식의 초기 인터넷 공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더 함양하고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어떻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반적인 자본의 물리적 지배는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언론은 기존의 민주주의를 위해 어떤 보루로서의 역할이 요구되었으나 실상은 자본의 논리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정치를 시녀로 만들었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하는데요.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가치라고 할 수 있는 '법의 지배'가 '시장과 경제 전반이 위기에 놓일 수 있다는 이유로 죄를 지은 경제인들이 풀려나는 상황'을 우리는 이미 목도한 바가 있습니다. 도식적으로 '사법체계-언론-시장'을 삼각 구도로 본다면, 결정적으로 시장이 사법제도와 언론을 지배하고 있다는 식의 논리가 현실적으로는 통용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뭐 엘리트들과 기득권들은 이를 강력하게 부정하겠지만 실상은 어떠한지 시민들은 이미 충분히 분석 가능한 수준일겁니다.

따라서, 노무현 시대의 언론들의 광범위한 디지털 진행화가 결국은 민주주의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고, 언론의 사적 지배 뿐만 아니라 자본의 지배 역시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정치 따위에 신경 쓰지 말고 너의 밥벌이나 먼저 해결하던가 하라"는 왜곡된 사회적 논법들이 시민들에게 언론과 민주주의를 더욱 멀어지게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5장의 맥락을 아우르는 "저널리즘, 민주주의와 분리되다'는 문장은 이처럼 현실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사실상 대다수 정치인들에 의해 주도된 언론을 통한 당리당략을 위한 사적 이익 추구가 하버마스가 강조한 '건전한 공적 토론장'으로서의 기능이 유명무실해진 것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 이에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의 우리 정치는 18세기 이전의 '교육 받은 남성들에게만 투표 권리를 부여한 영국의 상황'과 거의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그리스 민주주의처럼 시민이 노예와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직업 정치인이 국민과 민주주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이 정치를 하는 정당성으로 주장들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저들 역시 스스로의 사적 이익에 충실해, 민주주의 자체를 부차적으로 만든 주범이기도 합니다.

클로드 르포르를 포함해, 많은 정치 이론가들이 자본주의 안에 집 나간 도덕주의를 되찾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도덕을 상실한 자본주의'가 과연 시민들에게 '시민 본연의 시민 다운 삶'을 보장하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합니다. 과연 언론과 시민들간의 진정한 파트너 십이 가능할 수 있을런지는 앞선 분석과 동일하게 회의적입니다. 저자의 강조대로 기사를 작성하는 언론인이 "투명한 증거를 기반으로 진실을 숭배"해야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가 못합니다. 기사의 독립성 역시, 사주나 언론사 고위층의 정치적 지향에 따라, 진실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아예 언론 기업 자체를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매우 고약한 사정이 있습니다. 자본가의 이익, 자본의 이익추구는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관점이 우리 사회에 뿌리 깊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조지 스티글리츠는 한국에 대해, "여느 서구 국가들보다 짧은 시간 내에 신자유주의화가 급속하게 이뤄진 국가"라고 논평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진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치를 위해 언론 자체가 자본에 대해 독립성을 갖고 있어야만 하고 언론인들 역시, 자신의 직업이 어떠한 의무를 갖고 있는지 한번쯤은 돌이켜 볼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널리즘이 부유한 지배 계급의 이해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며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또한 주권자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은 대리인으로서 시민들이 생업에 바빠 미처 하지 못하는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의 임무를 수행하여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형 규범적 모델은 민주주의에 대한 강력한 지향성과는 달리 자본 권력으로부터 사회 평등을 보호하려는 노력에는 소홀했다

이러한 재화나 서비스가 무차별적으로 상품으로 교환되는 것은 사회 정의와 정치적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적절히 규제되어야 한다

시민 사회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국가 엘리트 집단과 대자본 중심의 지배 연합이 오랜 권위주의 정권 기간 유지해 온 기득권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한국 사회의 보수 헤게모니는 여전히 강고했고, 디지털 대안 언론의 인기와 영향력은 아직 인터넷이라는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했다

자본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변화는 당시 전 세계를 강타한 신자유주의 경제 프로그램과 무관하지 않다. IMF 외환 위기 이후 한국 경제가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 더 깊숙이 결합하고 신자유주의화가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시장 논리와 자본의 성장을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하는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쳤다

일상적 삶 속에서 모든 자원의 배분을 오로지 시장 논리에 따라 수행해야 한다는 시장 물신적 사고가 빠르게 내면화 되면서 한국인의 생활 세계는 자본에 의해 잠식되었다

포털에 이르러 디지털 기술은 비로서 수익 창출의 도구로 확고히 자리매김했고, 사회 변혁을 바라는 이용자들의 정치적 열정은 포털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자본 축적의 수단으로 전유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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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구하기 - 어떻게 미디어는 '생존'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의 보루가 될 것인가
줄리아 카제 지음, 이영지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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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카제는 프랑스에서 근래 각광받는 여류 경제학자로, 개발 경제와 정치 경제학, 경제사를 주로 연구하고 있는데요. 파리 1대학과 파리 경제 대학 수학한 후, 도미해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수여 받습니다. 그녀는 하버드에서 다니엘 코헨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2012년에는 프랑스 올랑드 대통령을 공개지지 했던 9명의 경제학자 중 한 사람이었고 2017년 대선에는 사회당 후보인 베노이트 하몬을 지지했습니다. 그녀의 개인사와 관련해. 한가지 유명한 점은 현재 전세계 경제학의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토마 피케티의 배우자라는 사실입니다. 두 사람은 2014년에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됩니다. 이 책은 지난 2015년 원제, "Sauver les Médias"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7년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우선, 저자인 줄라이 카제가 이 책을 통해, 명확히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데요. "진정한 민주주의는 극소수 부유층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만으로는 유지되어서는 안 되고, 양질의 민주적 토론을 책임지는 미디어는 부호의 독점적 영향력 아래 있어서도 안 된다"는 서론의 주장입니다. 사실 그동안 많은 미디어 전문가, 언론학자들의 입을 통해 언론이 어느 정도로 자본주의의 영향력 하에 있는지 설왕설래에 가까운 평가가 지속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언론 재벌들 가운데 꼭집어 언급되는 루퍼트 머독의 행적에 있어, 그와 코크 형제와의 긴밀한 관계는 보수주의자들의 단순한 연계를 떠나 정치 자체에는 해악이 될 만합니다. 더욱이 머독은 과거 대처 영국 총리와 긴밀한 관계이기도 했는데요. 이들이 단순히 함께 커피나 마시자고 가까이 지냈던 것은 분명 아닐겁니다. 또한, 아마존닷컴의 설립자이자 CEO인 제프 베저스가 2013년에 미국 저널리즘의 기반인 워싱턴 포스트를 인수한 일은 그러한 과정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자본에 의한 언론지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될 만합니다. 이미 미국 정부는 꽤 오래전부터 언론의 소위 경제적 독립을 위해 세금 감면을 비롯한 적잖은 지원을 하고 있기도 한데요. 민주주의에서 언론의 독립적인 기능은 무척 중요하다는 점은 모두가 알고 계실 겁니다. 카제는 이러한 명시적인 전제 뿐만 아니라, 1장에서 "실제로 기자의 일이란 부분적으로는 지식경제의 다른 주역들이 생산한 지식과 문화재화를 최대한 많은 이가 접할 수 있도록 보급하는 것"라고 첨언하고, 오늘날의 언론의 위태로움이 각 언론사들의 경영 문제로 인한 기자들의 대폭적인 해고에 원인이 있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아예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대부분의 언론 사주들은 돈을 벌고 싶어 합니다. 앞선 문단에서 인용된 아마존닷컴의 거부 제프 베저스는 보유자산이 대략 300억 달러에 이르는데, 그의 사례는 좀 특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소 돈에 구애받지 않는 사주의 존재는 언론사를 보유해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것보다는 저자의 언급대로 약간은 취미 생활로 혹은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을 위해 언론사 사주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하지만 대부분의 언론들은 급격한 광고 수입의 하락과 기존의 신문 영향력의 축소로 상당히 어려운 현실에 놓여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단순히 언론사를 일반 사기업처럼 설정해 본다면, 소모되는 각종 부대 비용이 마찬가지로 상당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래서 최근에 언론사들이 거대 인터넷 기업인 구글과 같은 '네이티브 광고'의 제공 의미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어느 언론사나 전혀 돈이 되지 않는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비용이 소모되기 마련입니다. 특히, 공익을 위한 목적의 기사들은 기자들에게 거의 돈이 안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적지 않은 기자들이 견고한 윤리관으로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긍심을 갖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현실은 또 이런 이상과 다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기자들에게 과거 전통적인 언론의 책무와 사명감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을정도로 최소한의 경제적 보장이 필요해 보이는데요. 물론 기자들과 비교하여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의 경제적 보장에 있어 사회적 동의가 부족한 측면도 분명 있습니다. 정부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언론사들이 각종 공적 자금을 지원받지 않는 것도 중요하고 그러한 독립적인 위치를 견지할 수 있어야만 민주주의를 떠받칠 수 있게 되는 맥락일겁니다. 더욱이 기자들 스스로 시민의 이익과 권리에 힘써야 하는 것은 더는 강조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글의 1장에서 "미디어 한 곳이 탐사보도 전문기자 한 명을 고용하고 업무를 지원하려면 연간 25만 달러 이상을 지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2002년에 미국 보스턴글로브지가 가톨릭 성자의 성추행 사건을 8개월 동안 취재하면서 100만 달러를 지출했다"는 점은 기사 자체가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세간의 선입견을 날리기도 하는데요. 현재 우리의 탐사보도만을 전문으로 하는 소규모 언론사의 경제적 자립이 왜 중요할 수밖에 없는 가에 대한 앞선 미국의 사례는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듯합니다. 특히, 사회의 각종 비리와 정치권의 부정부패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언론사일 경우 경제적 자립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사주의 영향력을 거의 받지 않는 소위 독립 언론사의 존재는 작게는 사회 안전과 크게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런 독립 언론사들은 눈엣 가시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수록 이들에 대한 시민들의 지원은 마땅히 당위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저자인 카제는 3장에서 '비영리 재단'에 의한 언론 설립을 지지하고 있었는데요.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방안이라고 여겨집니다. 국민주를 모집해서 언론사를 운영하는 방법도 한 방안이 될 수 있고, 시민들이 특정 정당을 지지하고 그에 따라 소규모 계좌 지원을 하는 것처럼 언론사를 그런 식으로 운영하는 것이 가능할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얼마 없는 그런 소규모 독립 언론의 존재가 얼마간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합니다.

끝으로, 개발 경제와 경제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한 경제학자가 그다지 고유하지 않을 수 있지만 언론 독립의 명료한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는 점은 꽤 귀담아 들을 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관련해, 여기에 인용되고 있는 프랑스 언론계의 상황이 상당히 우려스러워 보이기도 했는데요. 현재 러시아의 푸틴이 자신의 권력으로 언론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있는 것처럼 사실 시민들에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정치적 보장은 언론 자유와 독립 경영일 겁니다. 지난 역사에서 권위주의 정권이 제일 먼저 언론을 제압하려했던 부분은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이에 한가지 아쉬운 점은 기자라는 직업군의 다수가 돈벌이에 치중하고 있고, 어떤 부류는 정치 권력에 너무 닿아 있어 한 사람의 기자가 언론의 독립을 보호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라면 현재 우리의 현실은 아무래도 낙관적인 기대를 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데요. 저는 기자들에게 전문직에 준하는 보수를 보장하여, 이들이 어느 이익 단체나 어느 정권, 어느 경영자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스스로 원하는 기사를 쓸 수 있는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약간의 극약처방으로 기자들의 경제적 독립성이 시급하다는 요지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어찌됐든 언론에 대한 여러분들의 많은 의견 개진과 관심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의식하는지 못 하는지 모르겠으나, 사람들은 미디어에 대한 신뢰를 점점 잃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미디어가 제공하는 뉴스 자체에는 늘 관심이 많지만, 프랑스인의 약 4분의 1은 이제 더 이상 미디어를 믿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대체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것인가? 미국의 부호들이 점점 쇠약해지는 신문사에 거액을 내놓는다는 이유로 미국 미디의 새로운 ‘도금 시대‘가 도래했다고 환호할 수 있는가?

비영리 미디어 주식회사는 자기자본의 안전성과 투자의 영속성을 통해 미디어의 품질을 보장할 것이다

부호 (또는 대기업)들이 미디어에 쏟아부은 거액은, 독립된 양질의 뉴스를 최대한 제공하는 것에 기반하는 미디어의 기능마저 악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언론사들의) 수익성 증가는 민주주의를 대가로 치르고 얻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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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3 07: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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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3 07: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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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3 08: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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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3 09: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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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작한 미래 - 기후재난과 인공지능, 대학과 강의실, 민주주의와 기본소득, 그리고 코로나19
강남훈.송주명.안현효 지음 / 다돌책방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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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대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국민 기본 소득'과 관련해, 제안과 설계를 맡은 학자인 한신대 강남훈 교수와 최근인 2월에 경기도 교육감 출마를 선언한 같은 대학의 송주명 교수, 그리고 오늘날 대학 교육의 위기 상황에 있어 언론을 통해 꾸준히 의견을 피력한 대구대 안현효 교수가 모여 아주 얇은 분량의 글을 출판했습니다. 여기 이 책은 최근 전세계의 큰 고통을 안겨준 펜데믹 사태와 더불어 그동안 전지구적 위기로 경고등을 밝혀온 지구 온난화와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독자가 보다 이해하기 쉬운 논법과 대안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총 3장의 분량의 이 책에서 공저자들이 어떻게 글에 관여하고, 어느 정도의 분량을 개인의 역량으로 채웠는지는 불명확하지만 그럼에도 글은 평이하면서도 논점은 얕지 않은 수준을 답보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최근의 펜데믹 사태로 인한 사회 변화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이 책이 일말의 이해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따라서 이 글은 지난 2020년 6월 19일 출판 되었습니다.

이 글은 초입에서 케이트 레이워스의 '도넛 경제학'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레이워스의 이 글은 전반적으로 설득력이 꽤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신자유주의화로 악화된 '시민들의 경제적 불평등'과 그에 따른 사회 구조의 변화 등을 담고 있지요. 이러한 문제가 제기된 상황에서 갑자기 촉발된 펜데믹은 그동안 이론적으로만 인지하고 있었던 경제적 불평등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데요. 우리가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들을 통해 인식하고 있었던 자본주의의 천국인 미국이 그리 인간다운 국가가 아님을 극명하게 알게 되었고,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불합리한 의료 보건적 차별은 펜데믹 사태로 말미암아 더욱 두드러지게 됩니다. 이 글에서도 역시 펜데믹 상황에서 미국의 주요 카운티 별로 흑인과 백인, 유색인의 인구 10만명당 사망자 비율을 현지 자료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거의 압도적인 흑인 인구의 사망률은 현재 미국이 어떠한 지경에 있는지 깨닫게 되는데요. 물론 이 자료를 보고 백인이 흑인에 비해 바이러스 면역력이 월등히 좋아서 그런 것이라고 오해하는 분은 분명 없을거라 믿습니다.

미국은 우리와는 달리 극명하게 자유와 공동선 즉, 공동 안전에 대한 관념에 있어 이념적으로 혹은 선동적으로 아귀 다툼을 벌인 국가입니다. 물론 중요한 사실은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안전은 둘 다 중요하다는 관점이죠. 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만, 마스크를 쓸 필요는 없다고 방송에서 일갈한 전직 대통령의 전적인 문제인지, 아니면 공동체 이전에 자신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는 자유 지상주의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파행은 장 자크 루소가 개념적으로 만들어 놓은 공화주의에 큰 타격이 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공화주의 3.0이나 민주주의 3.0을 대비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무슨 소설적 언급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글 3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바와 같이, 역시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사실상 침해한 것이 미국의 사례로 보아 거의 사실로 판명되었다는 점이죠. 일전에 대니 로드릭은 민주주의의 기본적 관념과 가치를 그저 자신의 위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자들이 너무 많다고 언급했었죠. 시장에 대한 민주주의의 역할에 대해서도 로드릭의 관점은 그와 같습니다. 파리드 자카리아 역시 현재의 전세계 민주주의의 위기는 민주주의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제도의 방만한 운영 혹은 제도의 본질을 무시하고 기득권과 엘리트들이 멋대로 자의적인 해석을 취하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오늘날 러시아의 푸틴을 비롯한 권위주의의 대두가 이러한 맥락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부패'라는 것은 어느 정도 어불성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민주주의가 그 속성이 부패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방만한 시장 자유가 민주주의에 강요 되면서 발생하는 '견제의 원리' 자체가 소멸된 것으로 봐야겠죠. 더욱이 오늘날 강화된 능력주의적 관점도 이에 한 몫을 했을 겁니다. 하여튼 이렇게 진행된 민주주의의 위기,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이기도 할 텐데요. 특히, 우리나라에서 경제적 불평등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부동산 문제는 거의 사회 안전망을 뒤흔드는 원인으로 심화되어 왔습니다. 저는 일전에 작금의 부동산 거품은 언제든 꺼지게 마련이고 호주와 스페인과 더불어 부동산 거품이 심각한 지경에 이른 우리나라도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같은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었는데요. 아마도 강남훈 교수의 의견으로 여겨지는 부동산 문제의 실질적 해결 방안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미 여러 기사를 통해 '토지 기본 소득'에 대한 개념을 접할 수 있었는데요. 이 책에서는 "토지 보유세를 늘리는 것이 부동산 문제를 한번에 잡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지만 국민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지금의 은행 대출 제한이 돈 없는 사람들의 부동산 투기만 제한하는 것에 그치고 있기에 풍부한 여유 자금을 갖고 있는 중상위층의 견제는 사실상 실효가 없었던 것이죠. 이미 미국 알라스카 주는 석유 수입에 대한 주민 기본 배당제를 실시하고 있는데요. 앞선 사례를 토지세에 적용한 것이 강남훈 교수의 제안입니다. 어차피 정기적으로 정부가 전국 토지 조사를 하고 있기에 토지세 부여는 꽤 객관적으로 실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한 토지세 수입을 바로 국민 배당으로 하자는 강교수의 제안은 크게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었는데요. 다만 이렇게 하려면 기존 경제학계의 이념적 공격을 물리쳐야만 하지만 충분히 불평등한 부동산 불로소득에 대한 대안이 될 수는 있었을 겁니다.

여기에 공저로 참여한 세 명의 학자들 뿐만 아니라 지난 몇 년 간의 펜데믹 사태로 인해 무엇보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존재 위기를 겪었던 점은 모두가 부인하기 어려울 겁니다. 사회 내부에 도사리고 있던 반민주주의자들이 '민주적 의견'이라는 미명 하에 정권을 쟁취하는 등의 권위주의화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폴란드 우익이 헌법 재판소를 손에 넣으려는 시도나 헝가리의 의회 장악 기도,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사례 역시 우리의 정치가 위중한 상황임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의견대로 대다수의 시민들은 정의로운 사회에서 자신 본연의 삶을 영위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이념적인 의견 따위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러한 맥락 하에 정치인들과 언론 모두는 '공공선'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그런 충분한 의지를 피력해야 하며, 자본주의가 우선이냐 공공선이 우선이냐 이런 문제에 자신들의 이익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펜데믹 사태가 종료되고 나서도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실시된 마땅한 민주주의적 통제가 지속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광범위한 안전 사회라는 분명한 가치를 위해, 민주주의의 정당한 부활을 강조했던 많은 민주주의자들에게 있어 펜데믹의 종말은 또 다른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견제, 그리고 민주주의의 확대가 왜 당위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고찰이 무엇보다 중요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58페이지에 인용된 영화 엘리시움에 대한 영문 철자가 오기 되어 있었습니다. 본문 136페이지에는 조사 하나가 탈락 되어 있었습니다. 매번 하는 말이지만 이런 편집 오류는 정말 실망스런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신자유주의로 비롯된 불평등은 코로나19 전보다 더 심해질 수도 있다. 이 불평등은 다시 미완의 민주공화국, 우리의 역동적 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심각하게 침식할 것이다

그런데 제도적 민주주의가 여전히 약하고, 가장 신자유주의화되어 있는 한국에서, 권위주의적이고 강제적인 통제가 아닌 민주주의적 방법으로 코로나19 방역에 독보적인 성과를 냈다

민주적 시스템과 시민성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곳에서 집행권력이 지나치게 과도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안전,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을 막으면서 함께 막히는 개인의 권리, 단호한 방역 전문가의 처방과 이에 대한 민주적 합의, 어제까지의 민주주의에서 당연했던 것들과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질문이 던져진다

감염병이 더 자주, 더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사회적 방어가 성공해 자본주의의 덩치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토지 보유세와 토지 기본소득은 불로소득을 걷어내고,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며, 불평등을 줄여 한국 경제에 오랜 부담이었던 큰 숙제를 풀어줄 수 있다

공식에서 부동산 소유 수익을 줄이는 효과적인 대책은 보유세를 늘리는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3년 만에 20억 원 가까이 자산이 늘었다면,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정도의 부동산 불로소득은 사회를 분열과 붕괴에 빠뜨릴 만한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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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공부 - 개나 소나 자유 평등 공정인 시대의 진짜 판별법
얀-베르너 뮐러 지음, 권채령 옮김 / 윌북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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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바트 호네프 출생의 얀-베르너 뮐러는 정치사상사와 정치이론을 전공한 학자입니다. 그는 베를린 자유 대학을 거쳐 옥스포드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학하기도 했는데요. 또한, 그는 최근 베를린에 설립된 바드 자유 예술 대학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이에 독일 같은 경우는 2차 대전 당시 파시즘의 영향으로 현재까지 독일 학계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으며, 미국보다도 더 사회내에서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한데요. 이와 관련해, 뮐러 역시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위기, 즉, 우익 포퓰리즘의 선동 정치를 비판적으로 분석해 내고 이를 어떻게 정상적인 민주주의와 구별할 수 있는가에 대해 학자로서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정치학자로서의 풍부한 인용과 더불어 정확한 논증과 결말로 마무리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는데요. 그저 제법 잘 쓴 학술서로서가 아니라 이 책은 모든 시민들에게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우리가 어떻게 건강한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훌륭한 해답이 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글은 원제, "Democracy Rules"로 지난 202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2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참고로, 국역된 것으로 보이는 책의 부제에 대해 저렇게 자극적인 표현으로 정했어야 했나 의문이 듭니다. 아마도 출판사의 책 판매고를 위해 저리 쓴 모양인 것 같지만 책을 구입한 사람의 입장에서, 이미 책 내용은 저런 묘사가 없어도 너무나 좋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아직도 저를 포함한 많은 시민들은 "민주주의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하는데 있어 적잖은 어려움을 느낄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동안 로버트 달과 찰스 틸리, 샤츠슈나이더 등과 같은 훌륭한 정치학자들의 글을 통해, 표면적으로나마 민주주의가 인류에게 정지체로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규명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최근에 지지 파파차리시가 언급한 민주주의의 대한 명료한 정의로서, "모두가 평등하게 자유를 누릴 권리"라는 문장을 계속 되내이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이 글의 저자인 뮐러 역시 2장에서 "평등한 자유가 실재하는지 여부는 헌법의 모호한 약속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필수 인프라, 즉 정당과 시민사회, 언론의 상태에 달려 있다."는 문장에서 파파차리시와 거의 동일하게 이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평등한 자유'라는 단어의 울림은 꽤 오랫동안 제 마음속에 기억될 것 같습니다.

이에 저자는 작금의 '우익 포퓰리즘의 왜곡된 선동 정치'에 따른 민주주의의 혼란에 있어 대의의 측면에서 한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모든 시민이 정치 체제의 자유롭고 평등한 구성원으로서 입지를 누려야 한다"는 매우 중요하고 침해 당할 수 없는 테제입니다. 저자가 이렇게 강조하게 된 연유에는 "시민은 정당과 언론의 혁신 방안을 스스로 결정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논리가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앞서 제가 강조했던 대로 오늘날의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와 건전할 필요가 있는 정치체의 왜곡은 바로 '우익 포퓰리즘 내지는 극우 포퓰리즘의 발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네덜란드의 저명한 포퓰리즘 연구자이자 정치학자인 카스 무데보다 더 실용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글의 1장과 2장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꼽는다면 서두의 두 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기존의 엘리트 지배체제의 소위 고인물 정치로 많은 시민의 불만으로 점철된 현재의 우리 정치는 다분히 우익 포퓰리스트들의 공격 거리가 되었습니다. 저 포퓰리스트들이 정치 체제 전반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 역시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이 마땅히 발언할 수 있는 권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외형을 갖고 있다고 봐야할 텐데요. 여기에서 시민들이 먼저 인지하고 있어야만 하는 부분은 우익 포퓰리즘과 그 안에 있는 포퓰리스트는 스스로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을 뿐이지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저들이 정치적 선명성을 갖고 양심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적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를 이용하고 있는 것인데, 표면적으로는 항상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는 점에서 왜곡된 보수주의와 그 맥락이 유사합니다. 이를테면 보수적 권위주의라든지 과거의 매카시즘과 같은 것들 말입니다. 물론 이런 상황을 많은 시민들이 일종의 정치적 딜레마로 여길 수는 있겠지만 저자의 의견대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이상 건전하지 않다는 점은 사실상 진실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는 어처구니가 없게도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사적 이익이라는 숨겨진 의도를 갖고 기존 체제를 심지어 악으로 비난하는 것으로 이들 포퓰리스트들이 전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행태일텐데요. 그럼에도 저 포퓰리스트들 역시 비난해 마지 않는 소위 엘리트 지배체제와 다름없이, 저들 역시도 좋은 교육과 사회적으로 많은 인맥을 쌓아 돈과 권력을 동시에 얻은 기존의 기득권 엘리트들과 하등 다를바가 없다는 점이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글에서도 거의 가감없이 언급되는 도널드 트럼프의 충실한 대변자였던 스티브 배넌의 전반적인 발언들을 통해 저자는 포퓰리즘 정치의 실체를 가감 없이 밝히는데 노력하고 있는데요. 트럼프는 펜데믹 초기 워싱턴의 실패와 관련해서, "이런 실책에 대해 사과하기는 커녕, 국민에게 어떤 종류의 공감이 애도의 말도 건네지 못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었다"고 2장에서 그의 행태를 꼬집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일독하고 들었던 생각은, 과연 도널드 트럼프가 전염병에 희생된 국민들에게 애도를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그런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맞다고 느꼈는데요. 이미 여러 논저들을 통해 트럼프가 일반적인 공감 능력이 결여된 극도의 나르시스트로 그려진 바가 있습니다. 이 글의 전반적인 성격을 규정하는 듯한 1장 초입의 등장 인물들, 즉, 오르반 빅토르, 에제프 아이이프 에르도안, 야로스와프 카진스키, 나렌드라 모디, 도널드 트럼프, 베냐민 네타냐후, 자이르 보오소나루 등은 사뭇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푸틴의 이름까지 넣는 것이 마땅하겠죠. 이들 포퓰리스트들의 여러 해악들 가운데 가장 큰 해악은, "저들의 진짜 국민과 가짜 국민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 논리"입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기존의 엘리트들에 비해 도덕적으로 이미 우월하기 때문에(자신들은 기존 엘리트 지배 체제에서 만연된 정치 부패와 무능과는 일절 관계가 없다는 식입니다) 마땅히 다수 시민들의 선택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규정하면서 이런 중차대한 상황에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은 다수의 국민들을 적이나 다름 없는 비국민 논법으로 치부하는데 이르는데요. 이 포퓰리스트들이 얼마나 카를 슈미트를 섭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 이러한 논법들은 파시즘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더욱이 여기에 증오를 더 부추겨, 이주민들에 대한 극도의 혐오 발산은 앞선 우리의 국민이 아니라는 극악의 이분법과 맞닿아 있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런 표면적인 정치적 상황 만으로 시민들이 파시즘을 지지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진지하게 단언하는데요. 물론 이 글 3장에서도 짤막히 언급되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철회할 생각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논리일겁니다. 이렇게 사회에는 반민주주의자들이 적지 않게 존재하지만 이들이 주요한 정치 세력이라고 보기에는 실상 한계가 있어 보이기도 하는데요. 물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파시즘과 저자가 미헬스의 입을 통해 시종일관 비판하고 있는 과두제는 매우 친숙한 관계라는 점은 이 글을 일독하는 모든 분들이 기억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은 작고한 역사학자인 토니 주트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고 언급하고 싶습니다.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의 너저분하고 짜증나는 민주주의를 증오했던 카를 슈미트는 생전에 그렇게 자신을 위해 자기 변명에 나섰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극단주의자들의 사상적 매파가 되었습니다. 나를 제외하고는 온전히 전부 적이라는 개념의 이식 내지는 확대는 지금의 우리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의 위기에 놓여 있는지 실로 가늠하게 합니다. 일전에 많은 인용을 했던, "리버럴을 포함한 진보주의를 격멸의 대상으로 삼았던 티파티"의 존재와 현재 미국 내의 극심한 인종 차별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고 봐야 하는 BLM Black Lives Matters 운동과 이와 유사한 정체성 정치에 대한 경멸 등은 마치 "선거에 패한 패자들이 마땅히 어떠한 보복을 당하지 않을 권리"를 언급하는 이면에는 어떠한 정치적 불확실성이 있는지 대변하고 있는 듯 한데요. 이와 동일하게도 우리가 포퓰리즘을 지지하고 그것에 귀를 기울인 시민들을 절대 대적하지 않아야만 하는 당위가 바로 앞선 부분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의 설득력 있는 주장대로 포퓰리스트 편에 선 시민들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을 선동한 극우 포퓰리스트들의 더러운 의도가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선동을 당한 많은 시민들에게 결코 그 죄를 물어서는 안된다고 여기는데요. 어쩌면 거듭 진지한 논의로서 민주주의의 필요불가결의 문제를 논하고 있는 3장의 "민주주의를 위한 필수 인프라"는 무엇보다 시민들 서로 간에 "광범위한 토론'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서로 검증하여 토론하고 더 나아가 리처드 번스타인이 새롭게 규명했던 '가류주의'와 거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나 주장이 오류나 터무니 없는 거짓으로 판명되었을 때, 그것을 즉시 철회하고 올바른 사실과 주장을 수용할 수 있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글의 마지막에 이르러 시민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합법적인 불복종 운동'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더불어 '주민 소환제'를 추천하고 싶은데요. 저자의 강조대로, "서로 다른 두 정당이 번갈아 가며, 집권하는 것 만으로는 우리 대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약간의 참고로 추첨 민주주의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현실적으로 이탈리아에서 제기된 그런 민주주의가 실효성이 있기는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존재합니다. 반대로 투표를 통해 정치 권력을 교체하는 시스템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전형이기도 하지만, 시민들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는 제도적 문제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매개라고 볼 수 있는 언론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견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자유와 평등은 명문화된 헌법의 보장만으로는 이 절대 가치들을 지속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겁니다. 이는 먼저 언론이 제 일을 다하고 있는지 견제하고, '경제적 이익을 얻고 싶어하는 언론 사주'를 어떻게 언론의 중요한 기본적 의무와 분리할 수 있을지 먼저 고심해 봐야 할 텐데요. 아마도 이 지점에 시민들의 합법적인 불복종 운동이 명분을 갖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선출 권력의 소환'이라는 주민 소환제 역시 구상해 볼 수 있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는데요. 현재의 우리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지게 된 연유에는 산업 자본주의가 근 백 년 동안 자신들이 투입한 돈으로 언론을 통제하는데 노력을 기울였기 떄문입니다. 물론 자본가들이 민주주의를 길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 보장과 안전망 구축을 위해, 그리 나섰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불행하게도 현 시점의 언론은 자본의 광범위한 통제를 받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여기에 더 나아가 부(富)로서 사회의 맨 꼭대기에 자리한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지속적인 부의 창출과 되물림을 위해, 신자유주의와 언론, 가용할 수 있는 자본의 삼위일체로 발화된지 오래인 상황입니다. 물론 민주주의가 기본적으로 사적 재산을 보장하는 것이 마땅히 중요하지만 정치 전반이 자본주의에 종속된 상황으로서 근본적으로 시민 다수가 용납할 수 없는 불평등한 자유를 거부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점이 정확한 현실 분석일 겁니다. 


현재 우리가 마주한 민주주의의 실체적인 축소화 혹은 경량화는 대의 민주주의가 내재한 정치적 한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오직 반대만을 위한 투표가 전세계에서 횡행하고 있는 상황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일텐데요. 좀 더 최악인 상황은 민주주의의 제도적 맹점만을 교묘히 공격하여 정치적 이익화에 나서고 있는 전세계의 포퓰리즘이 저자가 우려하는 데로 오로지 반대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혹은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정치를 제외하면 현질 정치에서 어떠한 것도 남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울며겨자 먹기로 권위주의적 과두제를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하는 것인데요. 그럼에도 저자는 아직까진 우리의 민주주의에 희망이 있다고 역설합니다. 아마도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그렇게 쉽게 으스러지기는 어려울 것이며, 이러한 심각한 불평등의 상황에서도 많은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고 다른 건 몰라도 정당의 비민주주의화와 대의제 민주주의 전반을 어느 정도는 감시하고 있기 떄문일겁니다. 물론 버틀란드 러셀의 아주 찬란한 희망대로 민주주의보다 더 좋은 정치 체제가 시민들에게 나타나는 것도 좋은 일일겁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더이상 우리 민주주의가 누더기가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감시에 나서야 할 겁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동안 우리와 같이 세상을 살다가 간 사상가들이 무엇보다 정치적 분별력이 시급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존 듀이의 거친 희망대로 우리가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스스로 증명해 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 이러한 논저를 정말 완벽하게 번역한 역자에게 자리를 빌어 감사하단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일개 독자로서 역자들의 숱한 노고를 익히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만, 과거 일제 치하에서 대다수 노예주와 같은 일본인들은 너희와 같은 조선인들을 천황 폐하가 가엾게 여겨 제국의 신민으로 만들어 주었으니 이를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어떠했습니까. 조선인들은 대부분 이등 국민이었죠. 이런 어처구니가 없는 진짜 국민 가짜 국민의 논법이 저런 일등 국민 이등 국민의 논법과 하등 다를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둘다 겉으로는 꿀을 바른 듯 사탕 발림으로 현실을 현혹하려 들지만 내포한 실상은 화자의 이익을 위해, 여지없이 휘둘림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이래서 극우 포퓰리스트의 선동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증오와 분노 정치에도 결코 눈을 돌려서도 안되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입니다.

그 어떤 오래된 시민교육 교과서를 봐도 ‘권력자를 잘 감시하는 것이 훌륭한 민주 시민의 덕목‘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도 요즘은 그런 행태가 바로 ‘포퓰리즘적‘이고 따라서 민주주의와 법치에 해롭다는 것을 우리 모두 끊임없이 주입받고 있다

또 항상 대비책으로 투표 억압 등의 전략을 구사하여 실질적으로 소수 독재 체제가 유지되도록 하는데 이는 공화당이 존경한다고 주장하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면서 깊이 우려했던 시나리오다

많은 이들이 적어도 오르반이나 트럼프 부류가 민주주의를 해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이렇게 과두정 체제의 지배 계급이 우익 포퓰리즘 정당에서 긍정적인 점을 찾아내는 이유는 그 정당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즉 ‘나라 잃을 공포‘를 부추기면서 자기 생각에 ‘진짜 국민‘이 아닌 이들을 정치 체제에서 퇴출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반면 포퓰리스트는 ‘누가 국민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언제나 하나뿐인 답을 이미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정답은 정해져 있는 것, 반박 불가한 팩트라고(어쩌다 보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정답이라고)여긴다

우익 권위주의 포퓰리스트는 모든 시민이 진짜 국민이 아니라는 늬앙스를 풍긴다. 어떤 구성원은 아예 국민에 속하지 않고, 잘해봤자 이등 시민이라는 것이다

나쁜 점은 진정한 ‘비존중‘의 평범한 무교양보다 훨씬 더 민주 정치에 중대한 위협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거는 정부를 상대로 집단적 찬성 또는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이 주도해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발언이나 전례 없는 정치 조직 등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기회인 것이다

스티브 배넌은 2016년 대선 당시, 혹시 상대 후보가 승리하면 "완전히 엿을 먹여서 통치 행위라고는 할 수 없도록 하는 게 백업 전략"이라 선언한 바 있다

실제로 일부 동료 학자들은 연구를 통해 대부분의 시민이 얼마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이성적이고 식견이 부족한지를 계속해서 증명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듯 하다

평등한 자유가 실재하는지 여부는 헌법의 모호한 약속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필수 인프라, 즉 정당과 시민사회, 언론의 상태에 달려 있다

내부적으로 민주주의가 결여된 정당은 사회 전체의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인식에 따라, 여러 나라의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인터넷에서 마침내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관점부터 ‘페이스북은 파시즘‘이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의 영향력에 대한 의견이 양극단을 오가는 광경은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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