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은 없다 - 문제는 불평등이 아니라 빈곤이다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안규남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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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고든 프랭크퍼트는 미국 펜실베니아 출신의 철학자로 모교인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뒤에 에일대와 오하이오 주립대 등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현재는 프린스턴 대학의 철학과 명예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도덕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행동철학과 자유의지 및 평등론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주요 철학자들 사이에서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관련한 고유 해석으로도 유명한데요. 거기에다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도덕적 책임이라는 과제를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그의 철학은 개인들의 의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공동체 사회내에서의 서로간의 배려와 존중을 매우 중요시여기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윤리철학이 학자들 사이에 다소 논쟁적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철학 전반이 식자들에 의해 해석상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상황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겁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On Inequality˝로 지난 201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4월 번역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보통 평등이라는 가치는 민주주의적인 원리에서 뿐만 아니라 철학을 비롯한 사회학 등에서 18세기 이후로 학계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치열한 이데올로기 시대였던 최근의 냉전 시기를 비롯, 하이에크와 같은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은 이 평등은 현재에도 광범위한 오해로 인해 일정 부분 터부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글에서 저자인 프랭크퍼트 역시 평등과 관련해, 자신이 철학자임을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과 같은 주장을 펼치고 있었는데요. 그런 연유로 저명한 도덕철학자가 자본주의에 대해 어떠한 관점을 갖고 있는지 일반 독자로서 개인적인 호기심을 갖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먼저 소위 경제적 불평등이 만연된 신자유주의적 시대에서 불평등 자체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돈을 많이 가진 부자를 원칙적으로 도덕적 비난을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과 유사한 맥락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에 프랭크퍼트는 단순히 경제적 평등에 대한 저간의 요구를 먼저 불식하면서, 무엇보다 시민들에게 우선되어야 하는 ‘사회적 자원의 충분성‘이라는 관점에서 새뮤얼 모인과 거의 동일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즉, 저자는 시민들에게 스스로를 위해, ˝자신의 가장 참된 욕구, 이익, 목적들을 효율적으로 추구하기 위해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요. 이것이 보편적으로 각 개인들이 보유하는 어느 정도의 ‘화폐량‘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분명하고, 그런 차원에서 ‘충분한 소유‘에 대한 원리가 좀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점을 일관되게 이 글에서 명시되기에 이릅니다.

사회적 차원에서 심각한 빈곤의 상황에 처한 시민들에게 현 상황을 타파할 지원이 필요한 것은 이 글의 논리로 보건대 큰 설득력을 답보하고 있다고 봐야 할텐데요. 지그문트 바우만의 언급대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 체제의 건전한 존속을 위해서는 시민들의 통제력 있는 삶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자원의 충분성은 이처럼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도덕적 수준의 요구를 강조한다는 것이 현시대에서는 거의 의미없는 일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일종의 수단으로 삼아 사회 각 전반을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으로 몰아 사회를 극명하게 분리시키는 점은 도덕적 기준이든 뭐든 간에 우리 정치 전반에 있어 바람직하지 못한 일임은 분명합니다. 물론 완벽한 소유를 통해 자신의 삶을 가장 잘 통제하고 있는 소수의 부유층들이 더이상의 ‘소유‘를 중지하고 자신의 건전한 삶을 위한 노력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소위 ‘20 대 80의 사회‘도 그렇거니와 오늘날의 유산 계층이 자신들의 부를 되물림하려는 강한 경향으로 봤을 때, 그리고 어느 정도의 부를 소유한 계층 역시 불완전한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사회적 불안정을 위해 더 많은 안전 자산을 소유하려는 의지가 쉽게 꺾일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랭크퍼트가 이 글에서 차용한 ‘한계효용의 법칙‘은 자신의 말마따나 그 한계를 부정할 수 없을텐데요. 원칙적으로 그가 강조하는 바대로 ˝어떤 사람이 자신을 위해 추구하는 합리적이고 적절한 삶에 필요한 그 자원의 기준˝은 무엇보다 그 자신에게 달려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정이 철학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일전의 데이비드 코츠의 비판대로 신자유주의적 돛을 단 자본주의가 스스로 AI처럼 적절한 통제력을 보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츠는 지금의 자본주의 자체가 좀 더 많은 자원과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훨씬 더 많은 자본이 쏠리게 될 것으로 본 것인데요. 자본주의 나름으로는 개인의 이기심과 욕망을 바탕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뻔뻔한 얼굴로 절대 선이라 규정하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그것의 논리로는 ‘선‘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적절한 통제에 이르러야 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텐데요. 그동안 신자유주의자들이 ‘시장 근본주의‘를 내세워 국가와 사회 전체 그리고 세계 전반을 거의 제멋대로 주물렀던 점은 쉽게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전반적인 이러한 논리 가운데서 단순히 경제적 평등을 강조하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따른 광범위한 자본주의적 논리가 많은 시민들에게 ‘내재화‘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겠죠. 이 자본주의적 논리가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큰 영향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이를 통해 시민들이 자신들 스스로의 ‘삶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매번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빈곤한 자신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스스로의 노력 뿐만 아니라 사회의 도움과 국가의 배려를 요청할 수 있는 점도 마찬가지로 비난할 수 없는 부분인데요. 개인의 마땅한 이익추구와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무분별한 개인주의가 기존의 사회 원리를 침해하는 지경에 이르는서는 안되는 이유가 이러한 배경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등과 관련해 한가지 확실한 점은 빈곤 상태에 있거나 가진 바 사회적 자원이 빈약한 사람이 평등을 제약하는 발언을 하는 것보다 상당한 자원과 동시에 엄청난 화폐를 가진 사람이 평등 자체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평등이라는 문제를 사회에서 더욱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내몰려는 의도를 가진 그러한 기득권 층의 숨은 의도가 더 위협이라는 사실입니다. 사회의 모든 기득권층들의 대다수가 민주주의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현재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어떠한 불만이 없는 자들이 평등 자체를 자신들의 권리를 제약하는 것으로 오도할 수도 있겠는데요. 더욱이 아직도 전반적인 상황에서 평등을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로 보지 않고 이미 의미가 없는 사회주의의 산물로 취급해, 이데올로기적 공격으로 몰아가는 상황이 근절되지 않는 것은 그것대로 문제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극우주의를 다른 건전한 의견들처럼 같이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받아들이자는 일각의 목소리와 하등 다를바가 없다는 것이죠. 우리의 평등에 대한 요구를 이 곳의 저자처럼 도덕적 우위를 통해 펼쳐나가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 곳곳에서의 경제적 평등에 대한 요구를 그저 도덕적 원리주의 차원에서 취급하고 저자와 같은 철학자들이 자본주의의 심각한 문제들을 단순히 이론과 현실의 괴리처럼 취급한다면 사회가 어떠한 지경에 이를지는 거의 자명해 보입니다. 저자인 프랭크퍼트는 일반 시민들과 거의 모든 자원을 손에 쥔 부유층과 기득권 층의 힘의 차이를 먼저 인정할 필요가 있어보이는데요. 더불어 현재 자본주의에 대한 보다 냉정한 비판을 기반으로 경제적 평등에 대한 좀 더 세밀한 분석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우리의 민주주의가 기본적으로 서로간의 존중과 이해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지만 현재의 심각한 불평등 상황에 대해 어떠한 가치 판단 조차 없으며, 현재의 상황 자체를 현실을 왜곡하는 부류들의 철지난 주장쯤으로 여기는 세태가 분명 존재한다는 점도 명확히 인지할 필요가 있을겁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대로 무분별한 합리주의가 거의 절대 선으로 취급하는 판단은 개인적으로 동의하기가 어려웠는데요. 합리주의와 개인의 이익 추구, 그리고 시장 근본주의가 어떠한 메커니즘 상에 있는지를 사회학적으로 한번이라도 고려해 봤다면 저자 스스로도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임을 인지했을 겁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질베르 리스트의 위와 같은 연계의 인식은 우리가 귀담아 들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빈곤과 과도한 풍요를 모두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하고, 그 결과는 분명 불평등의 축소일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은 도덕적으로 특별히 중요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것도 아니다.

또한 평등의 추구는 보편적인 경제적 충분성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길일 수도 있다

경제적 평등주의에 대한 반대 논거로 흔히 제시되는 것이 평등과 자유의 충돌이다. 이 주장의 밑바탕에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내버려두면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가정이 깔려 있고, 이런 가정은 화폐의 평등 분배를 실현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확대하는 자유를 억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타인들의 가용 화페량은 어떤 사람이 자신을 위해 추구하는 합리적이고 적절한 삶에 필요한 것과는 직접적 관계가 전혀 없다

자신이 소비해온 것에 싫증이 났다 해도, 아직 소비해보지 않은 것 중 앞으로 좋아할 만한 것은 항상 남아 있을 수 있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전체 인구 중 일부가 가진 것이 충분한 양보다 적으면 아무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물론 현재 그가 만족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자신의 경제적 상황이 향상될 수 있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이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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