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일관한 신뢰의 지도자 독립기념관 :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88
변은진 지음,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역사공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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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조선을 이끌어나갈 저도자"를 선택하는 여론조사에서 이승만과 김구를 재치고 단연 1위를 한 지도자가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집에 있는 노비를 해방시켰고, 1919년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 3.1 운동의 불씨를 제공했으며,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햐여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몽양 여운형이다.

 

해방 정국 시기 그의 인기는 참으로 대단했었다.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 노선에서 친일로 변절할 때, 일본제국주의의 회유와 억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지조를 지켰던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인 1944년 8월 국내에서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국내에서 대비했던 인물이었다. 마치 나치독일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가 좌우연합하여 나치독일에 맞서 파리 해방을 미리 대비했던 것 처럼 말이다. 비록 광복군 국내 탈환 작전이 성사되지 않아서,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민중봉기를 일으켜 그 민중의 군대가 일본군을 무장 해제 시키지는 못했으나,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친일파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을 미화하며 그들조차 속고 있었을 시기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그 이후를 대비했다는 사실 자체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는 총독부의 엔도 류사쿠 정무 총감과 협상하여 총독부로 부터 행정권을 이양받고, 일본 천황의 항복 소식과 동시에 감옥에 있던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자신의 조직인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촉시켜 무정부 상태를 막고, 전국적으로 치안유지와 조국건설 사업을 추진해나갔었다.

 

그랬던 여운형이기에 해방 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거의 다 아는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초대 총령이자 대한민국 제1공화국 대통려인 이승만보다 더 인기가 높았던 것이다. 일제시기에는 독립운동 해방 이후에는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정부수립에 힘을 썼던 그는 안타깝게도 12번의 테러 끝에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총탄에 맞고 비명횡사했다. 그가 암살로 생을 마감한 이후인 1948년 남북분단정부가 수립되고, 1950년에는 우리 역사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일어나 수백만이 죽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봤을 때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건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시기 잊혀진 인물이었고,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의 이름을 모른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2005년 공로를 인정받고, 2008년에는 대한민국장 1급에 추서됐으나, 일반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가 이룬 업적에 비해 많이 잊혀졌다.

 

해방정국 시기가 아닌 그의 독립운동 행적만 보더라도 몽양 여운형은 분명 이룬 업적에 비해 많이 잊혀졌다는 주장은 맞는 말이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젊은 시절 그는 을사조약 이후 자신의 집에 있던 노비들을 전부 해방시켰고,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했다. 경술국치 이후 그는 중국으로 넘어가 유학했고, 1918년에는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여 3.1 운동에 불씨를 제공했으며, 임시정부의 일원으로써 일본으로가 일본고위급과의 회담에서 조선독립을 역설하였다. 그는 1920년대 초 한국 노병회를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했었고, 모스크바에가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1920년대 중국에서 활동하며 중국의 손문, 마오쩌둥, 장개석을 비롯한 중국의 좌우를 아우르는 인물들 사이에서 제1차 국공합작에도 일부분 기여했고, 베트남의 호치민과도 만나 교류했었다. 1930년대에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있으면서 언론활동을 통해 일제시대의 현실을 비판했고, 1936년 일장기 말살사건을 주도했다. 그리고 일제가 패망하기 1년 전인 1944년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일제의 패망을 대비했었다.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그를 빼놓고 논하는 것은 사실상 주연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그가 꿈꾸던 남북통일정부수립은 우리에게 있어서 현재진행형이다. 현재 한반도는 평화를 향해 변화해가고 있다. 최근 들어 북한과 미국간의 제2차 정상회담이 베트남 다낭에서 열릴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이는 한반도의 정세가 대립에서 평화로 바뀐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지금으로 부터 70년 전 좌우와 남북의 통일을 꿈꾸던 그를 돌아보는 일은 필요하다. 그를 다룬 대중적인 영화나 드라마가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며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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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와 로마 제국 세계 석학들이 뽑은 만화 세계대역사 50사건 11
김창회 지음, 진선규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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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 차원에서 읽어 봤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어보는게 낫지만, 읽기가 귀찮아 청소년용인 이 책을 읽었다.

초중학생을 위한 책 치고는 내용이 꽤 탄탄했다. 그 많은 내용을 집약적으로 잘 썻다. 만화의 첫 시작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부터 시작한다. 자유를 위해 싸웠던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 부터, 폼페이우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등장과 몰락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율리우스 시저를 읽으면 드는 생각이 있다. 전략가로서는 뛰어난 명장이지만, 지도자로서는 황제를 꿈꾸었던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그는 독재관을 지내다가 갈리아 내전기 포로로 잡았던 브루투스에 의해 살해당했지만 말이다.

이 책은 시저가 암살당하면서 끝이난다.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그가 이룩하고자 했던 개혁과 정복전쟁에서의 공로 그리고 독재자로서의 모습을 얘기하며 과연 위대한 지도자인지 혹은 독재자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아마 이후에 나타날 마키아벨리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리고 베니토 무솔리니가 카이사르를 꿈꿨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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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 비판 - 『환단고기』와 일그러진 고대사
이문영 / 역사비평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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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 비판 서평: 유사역사학은 파시즘의 변형된 형태다.

내가 환단고기를 처음 알게 됐던 것은 대학교 1학년 때다. 당시 고구려사를 전공한 모 교수님은, ˝한국에도 대마도 회복을 외치는 모 집단이 있다.˝ 혹은 ˝환단고기라는 판타지 위서를 추종하는 집단이 있다.˝라고 주장했었다. 당시 환단고기에 대해 모르던 필자는 ˝무슨 소고기 이름이냐˝하고 그냥 넘겼던 것 같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16년이었다. 당시 페이스북을 굉장히 열심히 했던 필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과 페친을 맺었다. 이를 통해서 굉장히 많은 환빠들이 우리나라에 존재하고, 이런 말도안되는 주장들을 진서라며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2017년 대전에 있는 증산도라는 사이비 종교를 알게 됨으로써, 그들이 참으로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시중에 나온 책들 중엔 환단고기와 유사역사학을 비판하는 책들은 찾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수많은 서점에서는 소위 환빠 교주 안경전이 저자인 환단고기와 개벽과 같은 종교화된 서적들이 시중에 나도는 모습을 보았고, 굉장히 거부감을 느꼈다.

그렇게 해서 난 가끔씩 환빠들을 까는 글들을 SNS를 올렸다. 2018년 소방서 사회복무요원을 마치고 그 기념으로 1달간의 미국여행을 갔다오고 나서였다. 내가 미국여행을 마치고 귀국했을쯤 이 책이 출판되었고, 책의 저자인 이문영 선생을 SNS를 통해 알게 됐다. 그를 통해서 ‘유사역사학 비판‘을 알게됐고, 궁극적으로 환빠들에 대한 위험성과 비판부분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이 내리는 결론은 자명하다. 유사역사학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외세에 대한 알 수 없는 열등감에서 부터 시작된다. 즉 한국 역사는 대륙을 정복하지 못한 역사이기에, 과거의 영토들 왜곡하고 과장해서 ‘민족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정상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세력들을 죄다 ‘이병도 제자‘라는 프레임을 씌워 마녀사냥을 한다.

그들에게 있어 다른 나라의 유사역사학자들이 한 얘기는 그리 큰 문제가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에서 주어와 목적어만 약간 변형시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캐임브릿지 대학에서 인정한 하버드대 한국사 교수가 한국의 과도한 민족주의를 비판하면 유사역사학은 입에 개거품을 물고, 성난 침팬지들 처럼 날뛴다.

참으로 재밌는 사실은 그들이 그리도 진실이라 하고 싶은 환단고기를 진실로 규정한다면 그건 역으로 과거에는 위대했으나 중국에게 털려 시간이 갈수록 영토가 줄어든 열등한 역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위대함만을 고수하는 그들에겐 그런건 전혀 상관없다.

과거에도 했던 생각이지만, 이들의 사상은 전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나치와 비슷하다. ˝아리아인의 위대함˝을 외치던 그들의 구호에서 주어만 바꾸면 환빠가 된다. 20세기 역사가 증명하듯이 민족우월주의와 과도한 민족주의에 경도된 나치독일과 일본은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6천 5백만명의 목숨을 빼았았다. 그렇다. 이 처럼 위험한 사상이 바로 유사역사학이다.

몇몇이들은 이들도 종교니까 종교로서 인정하면 된다고 한다. 그것은 이들에 대한 위험성을 인식하지 못하고서 하는 소리다. 그렇다면 네오나치도 허용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유사역사학은 학문과 사실관계를 자신들 멋대로 조작하여 식민사학과는 무관한 역사학계를 공격하고, 자신들의 추종하는 파시즘을 대중들에게 이식시킨다.

따라서 굉장히 위험하다. 물론 여기에는 역사학문이라는 것을 대중들과 소통하지 못했던 학계의 잘못도 있다. 어쨋든 유사역사학은 굉장히 위험하다. 이를 알고 비판적인 의식을 길러야 한다. 이문영 저자님의 저서 ‘유사역사학 비판‘은 올바른 길을 제시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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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레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건 3년 전 이맘 때 쯤이었다. 지금으로 부터 4년 전 마르크스가 쓴 '공산당 선언'을 읽고 감동했었던 필자는 러시아 혁명을 성공 시킨 레닌을 알고 싶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사회주의나 혁명사에 대해 지식이 전무했던 필자는 레닌 하면 뭔가 찬양을 하고 사상을 따르기에는 알 수 없는 이상한 거부감 같은 것이 존재했던 것 같다. 현 민중당 계열에 가까운 어떤 단체에서 활동 하면서, 개인적으로 여러권의 책을 읽었던 2016년 필자는 레닌을 알기 위해 처음에는 현 노동자 연대 대표가 쓴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러나 그 책은 레닌과 러시아 혁명에 대해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입문서 정도였기에, 이쪽 출판사에서 출간한 레닌 전기를 읽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이 책갈피 출판사에서 출간한 레닌 평전이다.

 

이 책은 영국 트로츠키주의 계열 사회주의자인 토니 클리프가 쓴 레닌 평전이다. 토니 클리프에 대해 조금 소개하자면 그는 사회주의 계열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국가 자본주의'라는 이론을 창시해낸 인물이다. 국가 자본주의란 무슨 뜻이냐면 레닌 사후 등장한 소련의 스탈린 체제가 사회주의를 져버리고, 국가라는 시스템이 주도적으로 자본주의를 컨트롤 한다는 얘기다. 즉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소련, 중국, 북한과 같은 국가들은 당과 관료계급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가들이 하는 역할을 대신 하기에, 구공산권 국가들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는 비운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창설한 제4인터내셔널이 주장하던 "소련은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는 이론과는 다른 해석이다. 박노자가 쓴 '러시아 혁명사 강의'에 따르면 토니 클리프가 이끌던 사회주의 단체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다른 사회주의 단체들이 이를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에서 지지했던 것과 달리 그 어떠한 지지도 표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즉 그 당시 토니클리프 계열의 단체들은 한국 전쟁을 "미국과 소련 간의 제국주의적 전쟁"으로 봤고, 따라서 국가 자본주의 대 미제자본주의의 전쟁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1991년 소련 해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사회주의의 실패로 생각했을 때, 이들은 국가자본주의의 몰락으로 봤고,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를 내세웠다. 즉 현재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국내의 노동자 연대라는 단체가 이쪽의 이론을 그대로 계승한 셈이다.

 

따라서 토니클리프가 쓴 이 4부작 짜리 레닌 평전은 당연히, 레닌 사후 건설된 소련 체제와 정권을 잡은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이 사회주의로의 이행 단계였다고 보는 시기는 1917년 러시아 혁명부터 1924년 레닌이 사망하기 이전까지이다. 즉 그 이후는 스탈린이 정권을 잡았기에 사회주의가 아닌 국가 자본주의로 갔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스탈린에 대한 그들의 비판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다만 비판을 하는 방법과 전술에 있어선, 분명한 오류가 있다. 스탈린의 권위주의적 독재체제나 대숙청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스탈린이 건설한 체제는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었다. 이는 분명히 사회주의 체제였다. 당시 소련엔 자본가 계급이 없었고, 스탈린 체제는 사회주의로의 이행 단계인 제1차 과제인 국유화를 마침으로서, 사적소유 철폐에 기반한 공업화를 이루어 냈다. 그 이면엔 일부 관료들의 부패가 존재하였으나, 현 자본주의 체제에 있는 재벌들 처럼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자본가는 없었다. 비록 양질은 아니더라도, 사회주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복지, 의료, 주거, 교육이라는 것이 적어도 자본주의였던 박정희 정권보다 우선시 되었고, 이는 대기업 위주의 박정희식 경제성장과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필자는 토니 클리프가 주장하는 국가 자본주의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고, 책을 읽을 때 이런 부분은 좀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과거 소련 시절 스탈린 체제가 만들어낸 필요이상의 우상화 된 레닌의 이미지를 조리있게 비판했다는 것이다. 그저 절대적이고 사실상 전지전능적인 인물로 묘사되던 레닌도 실수도 하고, 프롤레타리아적 대의를 위해 헌신도 하는 인간이자 혁명가였던 레닌을 잘 재조명 했다. 그리고 적백내전 당시 백군 파시스트들과 제국주의의 침략과 테러에 맞서 볼셰비키들이 왜 체카를 창설하여 맞서 싸운 것은 당연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또 혁명의 비극인 크론슈타트를 왜 레닌과 볼셰비키들이 진압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잘 설명했다. 그 외의 독일 혁명 당시 독일 사민당의 배신이나 코민테른의 변질화 또한 잘 조명했다.

 

즉 토니 클리프의 레닌 평전은 5~6개월전 필자가 읽었던 영국 우익 학자 로버트 서비스가 쓴 레닌 평전하고는 확실히 다르고, 보다 진보적인 관점에서 레닌의 생애를 잘 조명해냈다. 과거 우리는 반공주의라는 전근대적인 사고에 빠져 레닌이라는 인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비록 토니 클리프의 레닌 평전은 일부 오류가 있긴 하지만, 혁명가 레닌을 알려주는 좋은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체제는 실패했다고 한다. 그건 단순히 소련 해체라는 표면적인 현상만 가지고 판단한 생각일 뿐이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자본주의의 성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부패와 제국주의의 악랄함을 고발하는 역할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사회주의를 공부해야 한다. 혁명가 레닌의 생애는 사회주의를 원하는 이들에게 분명 영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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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 제작년이나 작년쯤이었던것 같다. 개인적으로 베트남전쟁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이 전쟁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미국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년전 하더라도 필자는 베트남 전쟁을 한국경제에 이바지한 전쟁이라 생각했었다. 그 관점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을때 틀린말은 아니다. 실제로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외화벌이는 분명 경제적으로 막대한 이득을 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쟁은 잘못된 전쟁이었다. 비록 우리는 돈을 벌었지만, 그 나라에 가서 민간인을 학살했고, 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오늘은 반성하는 차원에서 베트남 전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올려볼까 한다.

 

1. 경제 성장이라는 단어에 감춰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는 군복을 벗은 뒤 대통령이 되었다. 박정희가 집권하던 시절 초기에는 한국의 경제력이 매우 열악했다. 한국전쟁 이후 천리마 운동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한 북조선보다 훨씬 못살았고, 이승만과 친일파 정권의 극에 달한 부정부패는 한국 경제를 더더욱 망쳐놓았다. 따라서 박정희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경제를 성장시켜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정권 기간동안 경제개발을 주도했다. 그러던 시기 박정희는 미국에게 요청을 받았다. 바로 베트남 파병이다. 외화를 벌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박정희는 전세계가 비판하는 그 전쟁에 군대를 파병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은 미국 다음으로 가장많은 군대를 파병했고, 전쟁 기간동안 연 5만 이상의 군대를 베트남에서 유지시켰다.

(베트남으로 파병 되는 한국군 병사들. 악수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베트남 전 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이다.)

 

박정희가 파병한 그 전쟁은 결국 미국이 철수하기에 이르렀고, 한국군 또한 1973년 3월에 완벽히 철수했다. 그리고 1975년 전쟁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승리로 끝났다. 유신독재를 감행하며 민주주의를 퇴보시킨 박정희는 베트남 전쟁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성전"으로 미화했고, 대한뉴스같은 선전매체들은 베트남 전쟁을 왜곡했다. 거기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전쟁을 핑계삼아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여 다시한번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 당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얘기하던 민주화 운동가 리영희 선생이 옥살이를 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일반인들에게 베트남 전이 진실이 알려질 리가 없었다.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 성에서 청룡부대에 의해 벌어진 학살이다. 퐁니 퐁넛 학살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군이 벌인 퐁니 퐁넛 학살로 인하여 70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 당했다. 이들 중 대부분이 여자나 아이였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죽었어요. …… 우리 작은 절 안에는 그들 모두를 위해 향을 피울 공간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ㅡ 미안해요 베트남 p.157

(퐁니 퐁넛 학살을 담은 사진)

 

10일 뒤인 2월 22일 청룡부대는 꽝남 성에 있는 또다른 마을인 하미 마을에서 135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135명을 학살한 한국군은 그 시체를 암매장해버렸다. 학살당한 민간인들 중에는 1살이나 2살 짜리도 있었다.

 

“학살이 일어난 것은 아침 9시 경이었어요. 7 - 8시 경에 호이안쪽에서 군대가 들어왔지요. 학살이 있기 며칠 전부터 한국군들은 사람들을 모아서 빵을 주었어요. 그래서, 그날 아침도 빵을 주나보다 하고 한 군데로 모였지, 한국군들이 우리를 죽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면 도망을 가지 그렇게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모이지 않았을 거야.”

 

ㅡ 팜티호아, 하미 마을 학살 생존자의 증언

(하미마을 학살 위령비)

 

퐁니 퐁넛과 하미 마을 학살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66년에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베트남 떠이션 현에 있는 고자이 마을에서 일어난 학살이고, 다른 하나는 꽝응아이 성에 있는 빈호아라는 곳에서 일어난 학살이다. 맹호부대에 의해 일어났다고 알려진 고자이 학살 사건으로 인하여 총 380명의 민간인이 학살 당했고, 청룡부대에 의해 일어났다고 알려진 빈호아 학살로 총 430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빈호아 학살 한국군 증오비)

(고자이 학살 위령비)

 

"한국군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땅굴에 숨었지. 그들이 땅굴 속으로 최루탄을 던져넣었어. 눈물콧물이 뒤범벅이 되고 ‘컥’하니 숨이 막혀왔어.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땅굴 밖으로 기어오르면 한명씩 총을 쏘아 죽였지."

 

ㅡ 고자이 학살 생존자 판티부이 할머니의 증언

 

“1966년 12월3일(음력 10.22) 빈호아 사, 롱빈마을의 쩌우레 언덕에 주둔하고 있던 청룡부대 1개 대대가 이곳 9개 마을에서 소탕작전을 펼치면서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3일에서 6일까지 모두 430명이 집단학살을 당했지요. 응옥흥마을에서는 80살 노인인 후인의 목을 잘라서 논에 걸어놓기도 했어요. 희생자들 중에는 임산부도 7명이 있었고, 2명의 여성이 강간당하기도 했지요. 또 2명이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졌고, 1명은 배가 갈라져 창자가 꺼내졌습니다.”

 

ㅡ 1999년 한겨레21의 구수정 통신원과 인터뷰를 한 마을 부주석의 증언

이외에도 한국군이 저지른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80여 건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총 5개 성에서 9000여 명이 사망했고, 꽝남성에서만 4000여 명이 죽었다. 즉 이 글에 언급된 것 외에도 학살이 존재했다는 얘기다.

 

2. 학살 부정측에 대하여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전면 부정하는 월남전 참전 용사들)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공론화 된 것은 1990년대 베트남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구수정 박사가 공론화를 하면서 부터였다. 그래서 그 이후 베트남 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을 비롯하여 베트남 전쟁을 찬양하는 극우계열 인물들과 세력들은 학살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히 위에 언급한 고자이 학살 사건을 예로 들며 "그 마을 벽화에 그려진 고양이과 동물은 호랑이가 아닌 흑표범이다. 즉 남베트남군 레인져 부대의 흑표범 마크지 맹호부대의 호랑이 마크가 아니다."라고 한다. 이 얘기를 들으면 마치 정말 그러한듯 하다. 실제로 찾아보면 비슷해 보이는 측면이 있으니까 말이다. 분명한 것은 그 피해자들은 분명히 한국군의 했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즉 이 부분은 정확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

(보도연맹 학살. 1950년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은 잠재적인 빨갱이일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최소 30만 이상의 민간인을 3개월 동안 대량 학살했다.)

 

학살 부정측은 베트남 전 당시 한국군의 대민사업을 예시로 들며 한국군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매우 강조한다. 따라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은 거짓이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얘기하는 것과 달리 한국군은 그리 이성적인 집단이 아니었다. 한국군의 뿌리는 태평양 전쟁 시기 친일했던 장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전쟁 당시 '잠재적인 빨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심증만 가지고, 최소 30만이나 되는 자국 민간인을 단기간에 학살했던 전력이 있다. 많게 보면 100만까지도 잡는다. 즉 한국군은 자국민 수십만을 학살했던 전력이 있기에, 절대 깨끗한 집단이 아니다. 자국민을 수십만 학살했던 집단이 과연 타국에서 도덕성이 지켜진다는 믿음은 그저 학살을 무조건 부정하고 싶어하는 그들만의 상상이다.

(미라이 학살. 1968년 3월 16일 윌리엄 켈리 중위의 부대는 미라이라는 마을에서 총 504명이나 되는 민간인을 하루 만에 학살했다. 이 사건은 군에 의해 철저하게 은폐되었지만, 양심있는 기자의 폭로를 통해서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들이 부정하기 위해 드는 것들은 많지만 마지막으로 하가지만 더 들겠다. 학살 부정측은 미국의 미라이 학살을 들며 한동안 여론화 되지 못했던 한국군 학살을 부정한다. 그들 주장에 따르면 "한국군의 그리 학살했으면 미군처럼 이미지가 낭떠러지로 떨어져야 했을 것"이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의 미라이 학살 사건 또한 파뭍힐 사건이었다. 파뭍힐 뻔하던 사건이 양심적인 기자에 의해서 공론화 된 케이스다. 즉 그 사건도 얼마든지 한국군의 학살처럼 장지간 동안 묻힐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사건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만든 베트남 전 관련 서적들을 보면 한국군에 대한 언급이 그리 많지 않다. 이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가 동원했던 알제리측 부대가 그리 유명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즉 서방세계는 명성이라곤 별로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존재에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고, 동맹인 미국 또한 한국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다. 즉 그들은 이점을 놓치고 있다.

 

3. 결론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를 붙히자면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극우반동세력의 모략을 잠재우는 방법은 공동 진상조사다. 현재 승전국 위치에 있는 베트남 입장에서도 입을 닫고 있는 상황이라 진상조사는 좀 힘들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따라서 지금당장의 해결이 힘들지라도 최소한 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지해야 한다고 본다.

(이라크 전쟁. 2003년 미국이 공격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다. 당시 한국의 한나라당은 베트남 전쟁을 운운하며 이라크 파병을 적극 주장하였다.)

 

극우세력들이 학살에 대해 부정하려고 하지만, 필자는 분명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을거라 믿는다. 왜나하면 필자는 내 나라의 군대가 아주 쓰레기 같은 똥별 똥군기 집합체들로 인하여 민간인 수십만을 학살했던 사실을 역사를 공부하며 배웠기 때문이다. 즉 필자는 한국군을 신뢰하지 않는다. 따라서 극우세력이 뭐라하든 구수정 선생을 비롯한 진보 계열 학자들이 주장에 대체로 동의한다.

 

필자는 학살에 대해서도 반성이 필요하다 보지만, 베트남 전 참전 자체에 대한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본다. 베트남 전쟁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구정 공세 이후 대규모의 반전운동에 휩싸였던 적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랬던 전쟁이기에 미국사람들이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은 매우 부정적이다. 이는 미국이 만든 수많은 베트남 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베트남에서의 잘못을 반성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일어난 '미안해요 베트남'운동 )

 

그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이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은 돈을 벌었다다. 즉 긍정적인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난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당시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세력들은 "경제 성장을 할 수 있는 제2의 베트남 전쟁이다"라며 전투부대 파병을 주장했었다. 한나라당 세력들의 무책임하고 무지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 한국이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인식을 아주 잘 보여준 거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인식부터가 잘못됐다. 이제는 진실을 알아야 하고, 반성의식을 가져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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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1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1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9-02-01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기님 명절연휴 잘 보내시고 늘 건필하시길^^

NamGiKim 2019-02-01 22:23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벨루치님도 즐거운 명절 잘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