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의 만주 진격 작전 당시 지도)

 

2차 세계대전(World War 2)은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초래한 전쟁이었다시작은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만주사변중일전쟁스페인 내전 등이 시작이라는 논쟁이 있긴 하지만)이지만종결은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이었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두 개의 원자폭탄(Atomic Bomb)은 일본의 저항의지를 꺾었고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일본 정부는 결국 항복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그러나 일본이 진짜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이 아닌 소련군의 만주진격이라는 얘기가 학계에서 주장되기 시작했고, <폭격의 역사>를 쓴 아라이 신이치나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올리버 스톤(Oliver Stone)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을 중심으로 연구한 데이비드 글랜츠(David Glantz)등과 같은 인물들도 일본이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이 아닌 소련군의 만주 공세에 있다고 주장한다.

 

1945년 5월 나치독일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하면서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났다그러나 미국은 그 와중에도 오키나와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치렀고치열한 전투 끝에 오키나와를 겨우 함락시켰다오키나와 전투(Battle of Okinawa)에서 많은 전사자를 냈던 미국은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작전을 펼치면 대략 100만 이상의 미군 전사자가 속출할 것이라는 계산을 하기도 했다실제로 미국은 일본 본토 전역을 대상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군사작전을 계획했었으며그렇게 될 경우 태평양 전쟁을 1,2년 더 진행할 것을 감안하고 있었다.

 

미국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소련이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반소련감정을 내려놓고소련에 대한 칭찬을 아낌없이 했다심지어 반공주의자인 더글라스 맥아더고 독일에 맞선 소련의 공로를 매우 높게 인정했을 정도며정훈교육 차원에서 만들어진 동영상도 소련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또한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강력히 요구했다하지만 이런 미국의 입장은 나치독일이 패망하고 미국이 오키나와 전투에서 고전하면서 점차 달라졌다.

(만주에 진주한 소련군 병사들)

 

당시 미국은 비밀리에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 하여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1945년 5월쯤 되어 핵폭탄 실험이 완성단계에 도달했고,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외곽 사막에서 처음으로 실행한 핵실험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원자폭탄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트루먼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지지했었지만핵실험이 성공한 이후 그의 생각은 바뀌었다그가 생각하기에 핵 보유는 소련의 도움 없이도 미국이 원하는 조건대로 일본의 항복을 앞당길 수단을 갖게 된 것이었다루스벨트가 급병으로 사망하고 나서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은 매우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다따라서 트루먼은 핵실험이 성공한 이후 더 이상 소련의 참전을 환영하지 않게 됐다.

 

포츠담 회담에서 스탈린을 만난 트루먼은 회담이 끝나기 전 슬며시 다가가 지나가는 말투로 미국이 비상한 파괴력을 지닌 신무기를 개발했다고 말했다물론 소련은 이미 정보부를 통해 맨해튼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고따라서 스탈린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스탈린은 포츠담에서 트루먼의 행동을 보면서 미국은 전쟁을 빨리 끝냄으로써 소련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결국 1945년 8월 6일 리틀 보이(Little Boy)를 탑재한 B-29 폭격기가 마리아나제도의 티니안 섬 기지를 이륙해 일본으로 향했고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원폭투하 이후 미국의 트루먼은 환호했다당시 원폭투하의 소식을 들은 소련 지도부는 원자폭탄 투하의 진짜목적은 일본의 항복이 아닌 소련을 견제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또한 소련은 미국이 일본을 무찌르는데 원자폭탄까지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려는 이유는 소련이 아시아에서 이득을 취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고, “히로시마에 원폭을 사용함으로써 소련이 미국의 이익을 위협할 경우 주저 없이 소련에도 원폭을 사용할 것이라는 신호로 생각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만주 전역에서 공세를 개시했다소련군이 공세를 개시하자 일본 외무성 최고위급 관리 4명이 스즈키 간타로 총리 관저로 달려가 나쁜 소식을 알렸다스즈키의 반응은 우리가 우려하던 일이 마침내 일어났다였다일본이 소련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나가사키에 또 다른 원자폭탄을 투하했다당시 소련군의 공세가 있자 비상 내각회의를 소집한 일본 관리들은 회의도중 나가사키 원폭 투하 사실을 알게 됐다확실한 것은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미국이 300대의 항공기와 수천 발의 폭탄으로 도시들을 쓸어버리느냐한 대의 비행기와 한 발의 폭탄으로 그렇게 하느냐에 대해 별로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소련 깃발을 세우는 소련군)

 

무엇보다 소련의 만주 공격은 일본 지도부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렸다당시 소련군은 소만 국경지대와 몽골 만주 국경지대에 배치된 자바이칼전선군연해주 지역과 블라디보스토크 쪽에 배치된 제1극동전선군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주 샤오싱안링 산맥을 향해 공격하게 될 제2극동전선군이 공격을 개시한 상황이었고이들은 만주와 몽골중국한반도 이북 그리고 그 외의 쿠릴열도와 사할린 이남을 통틀어 공격을 개시했다당시 일본이 소련군의 만주진격에 사기가 완전히 꺾인 것은 이러했다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은 남방정책으로 동남아와 태평양 일대를 장악했고미군과의 전투는 태평양에서 일어났다비록 보급이 안되긴 했어도 일본군은 주로 만주와 중국 그리고 한반도를 통해 보급물자와 지원병력을 받을 수 있었다즉 일본 지도부는 미국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더라도 만주와 중국 한반도를 포함한 지역에서 지원을 받음으로써 미국에게 격렬히 저항할 생각이었다그러기 위해선 소련과 접촉하여 외교적인 해법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만주에서 진격을 개시하면서 그런 계획은 무산되었다또한 소련군의 진격은 매우 신속했다동부전선에서의 4년간의 경험은 소련군을 전차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기술을 발전시켜 놓았고만주에서 작전을 개시한 소련군은 아주 빠른 속도로 일본군의 만주전선을 붕괴시켜버렸다비단 만주뿐만 아니라 소련군은 중국 일부와 쿠릴열도사할린 이남그리고 한반도 이북까지 진격하여 그곳에 있던 일본군을 궤멸시켰다결국 일본 지도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소련의 참전을 통해 알게 됐다스즈키 총리의 경우 즉각 항복해야 한다고 단언했다결국 일본 지도부는 무조건 항복의 길을 선택했고, 1945년 8월 15일 옥음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추축국의 패배로 끝이 났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알리는 기사)

 

종전 후 일본 지도자들은 항복의 이유를 미국의 원폭투하와 소련의 만주 진격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일본의 해군참모총장 도요다 소에무 역시 원자폭탄보다는 러시아의 대일전 참전이 항복을 더 앞당겼다고 본다라고 말했으며당시 내각종합계획국 책임자였던 이케다 스미히사 중장도 소련이 참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우리는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따라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진짜 이유는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라기 보단 소련의 만주 진격 작전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판단이다


참고자료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현대사 1』, 들녘,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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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민에게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동맹국 군대들이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새조선 역사의 첫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노력과 고심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조선의 행복도 조선 인민의 영웅적인 투쟁과 꾸준한 노력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일본 통치하에서 살던 고통의 시일을 추억하라! 담 위에 놓인 돌멩이까지도, 조각돌까지도 괴로운 노력과 피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누구를 위하여 당신들이 일하였는가? 왜놈들이 고대 광실에서 호의호식하며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굴욕한 것은 당신들이 잘 안다.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절머리나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구히 없어져버렸다.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붉은군대는 조선 인민들이 자유롭게 창작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주었다. 조선 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

공장, 제조소 및 공작소 주인들과 상업가, 기업가들이여! 왜놈들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들을 회복시켜라. 새 산업 기업소들을 개시하라. 붉은군대사령부는 모든 조선 기업소들의 재산 보호를 담보하며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함에 백방으로 원조할 것이다. 조선 노동자들이여! 노력에서의 영웅심과 창작적 노력을 발휘하라. 조선 사람의 훌륭한 민족성 중 하나인 노력에 대한 애착심을 발휘하라. 진정한 사업으로서 조선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에 대하여 고려하는 자라야만 모국 조선의 애국자가 되며 충실한 조선 사람이 된다.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

붉은군대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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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북 - 리비아혁명의 정치철학
무아마르 알 카다피 지음 / 형성사 / 1985년 6월
평점 :
품절


다시 생각해보니 카다피는 위대한 혁명가다. 그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건 미제국주의 반대했기 때문이다. 미제가 남미에서 좌파정권을 어떻게 전복시키는지를 생각해봐라. 그놈에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자유니 떠들어 대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그 나라 자본 강탈 아니던가. 현재의 리비아가 그런 상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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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북주의자들이 항상 집회에서 하는 주장이 있다. 그 주장은 바로 ‘북진통일‘ 혹은 ‘북한동포 해방‘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북진통일과 북한동포 해방은 군사력 증강을 통해 북한을 굴복시키자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깔려있는데, 즉 전쟁을 해서라도 북한을 멸망시켜야 한다는 얘기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류의 주장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때부터 친일파 세력을 결집하여 권력을 차지했던 이승만이 해왔던 것이었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북한을 무력으로 정복시켜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주장에는 북진통일만 하면 모든게 해결될 것이라는 의도도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이승만이 외치던 북진통일론은 박정희가 한국을 반공국가로 체계화하면서 소위 반공웅변 대회를 포함한 전 사회적 영역에서 이를 더 확실히 적용했다. 따라서 북한을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한다는 관점은 박정희 시절 전 국민들에게 교육됐다.

그런 반공주의적 통일론은 이후 반민중 반통일 세력에게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통일 레파토리가 됐다. 그들에게 있어 북한은 통일의 대상이 아닌 무너뜨려야할 적일 뿐이다. 거기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고립되어 기근에 시달리기 시작할 때 1990년대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실제로 북폭과 제2차 한국전쟁을 준비했었고, 전쟁이 일어날 뻔했다.

그러나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필자는 아주 확실하게 말 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해법은 없다!˝라고 말이다. 북한 정권을 무력으로 정복하자는 이들의 주장은 군사적 통일만 하면 다 끝날 것이라는 저급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일 군사적으로 대한민국과 미국이 북한을 정복한다면, 그 결과는 절대로 긍정적일 수가 없다.

얘를 들면 북폭과 북진에 성공하여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은이 죽거나 체포당했다고 가정해보자. 어쨌든 북의 사회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북의 지도자를 북인민들이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인민들은 미국의 고립속에서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살아남은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대다수의 인민들이 그러하다. 따라서 그 사회가 미국의 고립속에서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던 상태에서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들이 과연 북한에게 총구를 돌릴까? 이건 현실성 없는 상상력이다. 북진통일이 모든것을 해결할 것이라는 관점도 전혀 상황파악을 하지 못한 관점이다. 북진을 하게 되면 북한에 있는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미국은 폭격을 감행하게 된다. 그렇게 됐을 시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미국의 폭격으로 죽게 된다. 이런 참상을 북한인민들이 경험하게 되면 설사 북진통일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북한민중이 전 게릴라화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들과 북베트남군이 미국과 남베트남에 저항했던게 그런 이유였다.

김정은 정권 전복도 마찬가지로 오히려 더 상황을 악화시킬 것이다. 2003년 미국은 현재 북을 보듯이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보고 독재라고 하며 무력으로 침공을 감행했다. 초기 전세는 미국이 이라크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면서 다 끝나는 것 같았다. 후세인도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미국을 다시한번 전쟁의 수렁에 빠지게 했다. 후세인 처형과 이라크 침공이 결과적으로 ISIS를 불러왔다.

2011년 리비아 내전도 그랬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NATO군은 반카다피 세력에게 공군력을 지원하여 카다피 세력의 거점을 폭격했고, 궁극적으로 카다피를 살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카다피가 죽고나서 리비아는 더 혼란스러워졌고, 지금도 내전이 벌어져 상황만 악화됐다.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등도 비슷하다.

지금까지 미국의 군사적 개입사례를 보았을때 북한을 무력으로 통일하고 김정은을 죽인다면 다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말 그대로 국제정치와 역사를 너무나도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의 기원을 집필한 브루스 커밍스가 얘기하듯이 북한에 대한 군사적 해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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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없는 북진통일론과 반공포로 석방 그리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승만과 워커 장군)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인민군의 진격도 신속했지만전쟁 초기 인민군의 진격 속도만큼이나 미군의 군사개입 또한 매우 신속했다지난번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학살 파트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승만은 전쟁 초기 도망치기 바빴으며미국의 즉각적인 군사개입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영토 90%가 인민군이 점령하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됐었다그러나 그 시기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딴 워커라인 즉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면서 인민군 또한 길게 진격하지 못했다미국은 이 전쟁에서 UN군이라는 이름하에 총 15개국을 전쟁에 끌어들였고영국프랑스캐나다호주뉴질랜드터키태국필리핀 등이 이 전쟁에 군대를 보냈다.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면서 전세는 인민군 쪽에게 불리해졌지만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기치를 내세운 마오쩌둥(Mao Ze Dong)의 중국군대가 참전하면서 북진했던 연합국은 다시 후퇴하여 1951년 1월 4일엔 수도 서울이 인민군과 중공군에게 함락 당했다이렇게 되자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는 1951년 4월 중국공산당 영토인 만주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 및 핵폭격 그리고 국공내전 당시 대만으로 피신한 장제스 군대의 반격을 주장했다만약 맥아더의 말대로 만주에 핵공격이 가해졌다면 만주와 한반도 지역의 방사능 피해는 이루 해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결국 스탈린의 참전으로 인한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한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 의해 해임됐고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활약했던 매슈 리지웨이(Matthew Ridgway)가 임명됐다.

 

1951년 봄에서 여름 사이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우선 맥아더가 해임되고 리지웨이가 임명되었다그리고 그해 7월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됐다하지만 전쟁초기부터 미국이 군사적인 목적을 가지고 해오던 폭격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계속됐다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위해 사용했던 폭탄은 네이팜 폭탄을 합쳐 20만 톤 안팎이었지만한국전쟁 시기 북한을 폭격하기 위해 사용된 폭탄개수는 네이팜 폭탄을 포함하여 66만 7000톤이나 달했다당시 이승만은 미공군이 한국전쟁에서 감행한 폭격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미국 전투기가 적의 주요시설을 강타하고 대단히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이번 전쟁에서 미국 전투기가 중요하다는 걸 우리는 압니다.”

 

이승만의 이러한 발언에는 미군 전투기가 행하고 있던 폭격의 민간인 피해에 대한 고려나 비판의식이 1% 존재하지 않는다당시 미국은 주로 북한을 타켓으로 폭격을 감행했지만남한땅 안에서도 비인간적인 폭격을 감행했었다따라서 이승만에게 있어 미국의 폭격 학살은 그저 공산주의자들을 약화시키고 섬멸하는 자유를 위한 반공성전의 위대한 과정이었다. 1951년 휴전회담이 진행되자 이승만은 휴전회담을 결사반대하고 나섰다여기서도 이승만이 주장한 것은 바로 그의 정복주의적 비전인 북진통일론이었다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계속 주장하면서 휴전회담을 주선하는 미국과 북한중국 측에 강력히 반발했다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외치던 북진통일처럼 휴전회담 과정에서도 그가 외친 북진통일은 정치적 허세 혹은 무의미한 정치적 구호였다.

(북진통일 시위,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수립부터 물러날 때까지 항상 북진통일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승만은 휴전문제 그 자체를 문제 삼았었다그리고 그가 외치는 북진통일론을 국민들로 하여금 구호로 외치게 했다. 1952년 부산을 비롯하여 광주대구대전서울에서 학생들이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여기에는 이승만이 미국으로부터 휴전회담 압박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일정한 대가를 받아내려는 그의 정치적인 계산도 있었다조성훈의 책 <왜 이승만은 휴전협정에 반대했을까>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승만은 아무런 성과 없이 휴전이 성립되면국민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그의 정치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휴전회담은 거의 2년을 끌었다휴전회담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논의된 사항은 3가지로 나눌 수 있다첫 번째는 비무장지대 설치 즉 군사분계선의 설정 문제였고두 번째는 양측에 대한 휴전감시기관 설치 문제였으며세 번째는 양측의 포로교환 문제였다이중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 내지는 대치했던 문제가 바로 양측 포로문제였다우선 세계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포로에 대한 보호를 우선시하고 있었다이에 따라 유엔군 쪽은 포로 개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남쪽과 북쪽 그리고 중국과 대만으로 갈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했고북한과 중국측은 모든 포로가 그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맞섰다따라서 양측의 회담이 난항에 빠졌던 것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친공포로들, 한국전쟁 당시 남한에 있던 포로수용소는 친공포로와 반공포로로 나뉘었다. 이 사진에서 스탈린 초상화를 들고있는 친공포로가 참으로 인상적이다.)

 

남한에는 인민군 및 중공군 포로가 거의 13만 2474명이 있었고북한에는 한국군 및 유엔군 포로 1만 1559명이 있었다북한측에 잡힌 포로들의 경우 인민군 측이나 중공군 측의 포로 학대 및 고문이 있었다는 일부 증언을 하기는 했지만대체로 큰 반발 없이 지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적어도 북한에 있던 포로수용소의 경우 국군이나 유엔군 포로가 편이 갈려 서로를 죽고 죽이는 일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한국전쟁 당시 북한측 포로의 대우에 대해선 아직 연구가 많이 되지 않은 편이라 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한 것도 있겠지만북한에 있던 수용소의 경우 포로들이 모여 체육대회도 하는 화기애애한 모습이 서방측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던 것을 보면적어도 남한 내의 포로수용소하고는 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남한에 있던 포로수용소의 경우 포로들 끼리 편이 갈려 죽고 죽이는 일이 반복됐다남한 내에 최대 포로수용소 시설인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소위 북측을 따르는 친공포로와 북측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반공포로로 나뉘었다반공포로의 경우 전쟁 초기 인민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인민군이 되었다 다시 국군의 포로가 된 사례로 북한과 인민군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결국 유엔측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그들을 분리해서 수용했지만이들끼리의 싸움은 끊이질 않았으며양측은 서로에 대한 반감만 생겨갔다.

(석방된 반공포로들, 수용소에는 소위 인민군과 북한체제를 싫어하는 반공포로들이 있었다. 이승만은 이들을 휴전회담을 막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휴전회담은 양측 포로문제로 중단되기도 했었다이러는 도중 휴전회담을 좀 더 앞당긴 사건이 일어났다. 1953년 3월 5일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이 사망한 것이다스탈린이 사망하자 포로교환이 이루어지면서 휴전회담이 재개됐고포로 송환협정이 조인되었다그러나 이승만은 휴전회담에 반대하여 이 회담에 찬물을 끼얹었는데그게 바로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다마산대구영천논산부산 등 7개 수용소에 갇혀 있던 3만 7000명의 반공포로 중 2만 7000명을 석방시켰다그러면서 이승만은 한국 측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휴전협정 파기를 위해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라며 엄포를 놓았다이것은 결국 국제적인 물의를 일으켰다이에 분노한 북한 측은 포로들의 재수용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휴전회담 당시 사진, 휴전회담은 2년을 끌었다. 회담을 2년이나 끝 이유에는 양측 포로문제가 항상 있었다.)


(휴전협정에 조인한 각국 대표자들의 서명, 당연히 여기에 이승만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다.)

 

이승만이 반공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하면서 휴전회담이 진행되지 않을 뻔했지만결국 휴전협정은 1953년 7월 27일 유엔군수석대표 해리슨 중장과 공산군 측 대표 남일(南日사이에 3통의 휴전협정서와 부속협정서에 각각 서명한 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김일성 북한군총사령관중국의용군사령관 팽덕회가 각각 자신들의 후방사령부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하면서 3년 1개월간 지속되던 한국전쟁도 끝이 났다당연히 이승만은 휴전회담에는 서명하지 않았기에 휴전회담도 미국과 북한만 한 것이 됐다거기다 전쟁 초기 이승만은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을 미국에게 넘겼기에 한국의 작전권은 현재 미국이 가지고 있는 상황에 놓여있다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국은 소련과 중국의 팽창을 막고 한국일본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를 목적으로 1953년 10월 1일 수도 워싱턴에서 한국 측 전권위원 변영태와 미국 측 전권위원 델러스 사이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전문과 6조로 된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식, 사진속에는 이승만도 보인다.)

 

① 미 양국은 국제평화와 정의를 위협하는 무력행사를 삼갈 것을 약속한다.

② 양국 중 어느 1국이 외부로부터 무력공격의 위협을 받을 때는 양국이 상호 협의하여 외침을 방지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

③ 양국은 자국의 영토 및 자국의 영토를 위태롭게 하는 태평양지구에 있어서의 무력적 외침에 대처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언한다.

④ 양국은 상호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공군을 대한민국 영토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에 대해 대한민국은 이를 허용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

⑤ 이 조약은 양국이 각각 자국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비준한다.

⑥ 이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며어느 1국이 이 조약을 폐기할 의사가 있을 때는 그 의사를 상대국에 통고한 지 1년 후라야 폐기될 수 있다.

 

이 조약은 궁극적으로 1954년 1월 13일 양국의 국회에서 비준이 이루어지면서 발효되었다결과적으로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이 미국과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현재까지 대한민국 영토에는 주한미군이라는 형태로 미군이 주둔하게 된 것이다일각에서는 주한미군이 한국에 주둔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숭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어쨌든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는 명분은 소위 양국 공동의 적인 북한에 맞서 군사력으로 견제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반공주의적인 시각에 근거한 것이고이런 시각의 근본은 바로 이승만식의 반공사상에 있다.

(윤금이, 1992년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던 윤금이는 주한미군 병사에 의해 아주 잔혹하게 살해됐다. 당시 주한미군 병사가 저지른 폭력은 올해 이슈가 됐던 N번방을 능가했다.)

 

또한 주한미군이 주둔함으로써 대한민국 내에서 일어나는 미군문제는 이루 해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대표적으로 1992년에 일어났던 윤금이 피살 사건을 들 수 있다당시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던 술집 종업원 윤금이는 주한미군 소속 케네스 마클 이병에게 살해당했는데사망 원인은 콜라병으로 맞은 얼굴의 함몰 및 그로 인한 과다 출혈이었지만살해된 시신에는 차마 입으로 표현하기 힘든 폭행이 저질러졌으며소위 N번방 사건을 능가하는 수준이었다그랬지만 이런 범죄를 저지른 미군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2012년에 한 미군이 저지른 성폭행 사건도 처벌를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평택 코로나 확진자, 2020년 전세계를 강타한 전염병에 가장 무능한 나라는 미국이다. 이에 따라 주한미군에게도 코로나가 퍼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거나 대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2002년엔 소위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라 하여 두명의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의해 압살당한 사건도 일어났다이것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즉 한국전쟁 이후 주한미군이 저지른 범죄는 무수히 많다그러나 더욱 기가막힌 건 한국정부는 미국이 저지르는 짓에 대해 어떠한 조치조차 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올해 7월 전 세계적으로 강타한 전대미문의 질병인 COVID-19가 미국 전역에 퍼지면서 한국사회에도 피해를 줬다미군기지가 있는 평택은 현재 확진자 72.5%가 미군이지만한국정부는 아무런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따라서 주한미군의 이런 악순환적 구도의 뿌리는 바로 1953년 이승만 정부가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즉 이승만 정부가 심어놓은 반공의 뿌리는 주한미군이라는 형태를 남겨 이러한 피해에도 확실한 처벌조차 못하는 구도를 만들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승만과 응오딘지엠, 1957년 이승만은 남베트남의 지도자 응오딘지엠이 서울을 방문하자 매우 환영해주었다. 둘의 반공성향은 일란성 쌍둥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매우 유사하다. 이승만에게 있어 응오딘지엠은 공산주의에 맞서는 투사였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뒤 이승만 정부는 또 다른 흑역사를 시도했었다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반공십자군을 파견하는 것이었다한국전쟁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에는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는데미국은 자신들의 우방인 프랑스를 지원하고 있었다물론 프랑스는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병한 국가였고이승만의 입장에서 프랑스가 치르고 있던 전쟁은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한 전쟁이 아닌 공산주의에 맞서는 성전이었다. 1954년 1월 이승만 정부가 자청한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한국군 1개 사단 파병이 미국 정부에 의해 재검토되었는데당시 이승만은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16개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 정부를 도와준 데 대한 보답과 동남아시아에서 반공정신의 고취가 파병의 목적이다라고 말했다물론 이 요청을 미국이 거절하면서 실패했지만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에 맞서기만 한다면 식민지 해방 전쟁도 결국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 되는 이승만의 저급한 인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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