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들어 한국에선 소위 페미니즘이라는 주제가 많이 주목받았던 것 같다. 물론 페미니즘이라는 담론이 비단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사회현상은 아니지만, 현실적인 공간에서의 남녀차별 및 여러 사회적 모순에 대한 반작용으로써 나타난 것도 분명히 있다. 아마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전사회적인 영역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15년 메갈리아의 등장이 컸던 것 같다. 물론 그 방법론에 있어서 시민들에게 충격과 혐오를 준것도 사실이지만, 이 계기를 통해서 페미니즘이라는 주제가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면서 연결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페미니즘에 대해 좋고 싫고의 단순한 감정을 떠나서 페미니즘이라는 사회의 한 현상이 전 사회적 영역으로 확산되었다는 점은 분명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아닌게 아니라 페미니즘 진영에서 가장 많이 강조하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페미니즘에 대한 반대급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매우 강력하게 존재를 드러냈다. 그것이 바로 안티 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다.

안티 페미니즘은 원래부터도 일간베스트와 같이 차마 입으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저급한 반동조직에 항상 존재해 왔지만, 페미니즘의 부상과 더불어 일부 인사들의 주장에 살이 붙어 사상화 되었고, 조직화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올해 봄에 강남역에서 열렸던 안티 페미니스트들의 집회를 예로 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들은 페미니즘에 대한 반대급부로 엄청나게 조직하고 세력을 부풀렸지만, 일간베스트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로부터 전혀 벗어나지 못했고, 오히려 더 타락의 길을 걸었다. 왜냐하면 반공주의라는 극단적 반혁명 사상이 머리에 주입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페미니즘=사회주의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여성에 대한 맹목적인 혐오심을 드러내고 있고, 좌파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며, 심지어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계승받아 이승만과 그의 반공사상을 내세우고 있는 중이다. 그들의 반북관 또한 마찬가지다. 아니 그냥 안티페미니즘=반공주의라는 공식이 대체로 성립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처럼 이번에 강남역에서 혐오집회를 벌였던 한국의 안티 페미니즘 진영은 본질적으로 반동이며, 사회적으로 청산해야할 암덩어리고 우리가 연대해야할 대상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현재 주류 페미니즘의 의견을 다 동의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다는 것은 절대 아니며, 그들이 범하는 일부 비과학적 접근은 상당히 경계해야 한다 생각한다. 그리고 나 또한 이쪽 분야에 대해선 학습이 부족하기에 어디까지나 개인의 생각을 적어놓는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말이다.

내 sns 친구들 중에는 페미니스트들도 있고, 안티 페미니즘의 주장에 상당부분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들의 주장을 양면 다 보려고 하는 쪽이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도 있겠으나, 이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로선 그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난 본질적으로 페미니즘의 진영보다 안티 페미니즘 진영에 반감이 더 강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부터가 좌파를 자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치녀'나 '보슬아치' 등등의 단어들을 쓰는 이들 그리고 반공을 내세우는 그들을 지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슬슬 결론을 내리자면 반공을 중심으로 두고 있는 한국의 안티 페미니즘은 당연히 청산해야할 대상이다. 따라서 이들은 동맹세력이 아니라 사회주의에 있어서 적이고 반동이다! 이들을 분쇄하지 않는 이상 사회주의가 얘기하는 여성해방과 남녀평등은 실천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주류 페미니즘에 대한 이론적 그리고 과학적 비판과 더불어 이들에 맞선 투쟁도 당연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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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0-11-26 1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 페미니즘도 신-신보수주의로 볼수 있지요..

NamGiKim 2020-11-26 13:57   좋아요 1 | URL
그런 측면도 없지는 않겠죠. 어디가 되었든 문화 탈레반이 되서는 안되겠죠.
 
아옌데의 시간
카를로스 레예스.로드리고 엘게타 지음, 정승희 옮김 / 아모르문디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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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초로 국민투표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체제는 칠레였다. 1970년 9월 5일 칠레를 강타한 투표는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세계최초로 투표를 통해 사회주의자 대통령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당선된 이는 바로 칠레 사회당 소속의 지도자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였다. 그는 1952년과 1958년 그리고 1964년까지 총 네 번의 대통령 선거 출마 끝에 당선된 인물이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아옌데는 국민들에게 점진적인 사회개혁과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과 같은 사회주의적인 복지를 약속했다.

아옌데의 사회주의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사회주의하고는 좀 달랐다. 우선적으로 그의 정권은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당선되었고, 의회민주주의를 유지했으며, 우익들의 활동을 아주 체계적으로 분쇄하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좌파내부의 갈등과 비판도 적잖게 있었지만, 한편으론 민중의 대대적인 지지를 얻기도 했다. 그의 인민연합은 각종 좌파세력들을 결집함으로써 사회주의 체제를 수호하고자 했고, 칠레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기업들에 대해 국유화를 단행했었다. 따라서 아옌데 정권은 개혁을 얘기하면서도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목표에 있어선 절대로 벗어나지 않았다.

아옌데의 이러한 노력은 초반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우선 지배계급으로 있던 우익과 기득권층은 민중의 삶을 악화시키기 위해 가뜩이나 부족한 물자 및 생필품들을 대대적으로 사재기하여 민중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자 했다. 이들은 당연히 라틴아메리카에 제2의 쿠바를 막고자 했던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거기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던 상황이라 남미에 대한 개입을 통해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미국은 CIA를 통해 칠레의 극우세력과 파시즘 세력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을 이용함으로써 흑색선전도 일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옌데는 포기하지 않았고, 초기에 많은 성과를 내기도 했다. 아옌데 정부는 토지개혁을 실시했고, 칠레의 핵심자원인 구리를 국유화하여 외국기업의 착취로 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아옌데 정권은 대농장을 몰수하여 정부와 협동조합이 관리하도록 하거나 농민들에게 배분했다. 따라서 아옌데는 대농장을 포함한 4,400개가량의 토지를 몰수하고 보상, 분배 그리고 국유화하였다. 아옌데는 미국의 케네코트와 아나콘다 사의 재산을 몰수하는 절차를 거쳐 이런 기업들을 국유화했다.

따라서 미국은 칠레 문제에 개입하여 사회주의 정권을 타도하고자 했다. 미국이 개입하여 주도한 위장파업과 아옌데 암살 시도 등은 아옌데에 대한 민중의 지지율을 하락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지지율을 상승해갔다. 그것은 아옌데 정권이 민중에게 많은 신뢰를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이 선택한 것이 바로 군사 쿠데타였다. 쿠데타를 일으킨 미국과 피노체트 세력은 수도 산티아고에 있는 아옌데의 대통령궁을 전투기로 폭격하고 탱크로 포위하여 신속히 군대를 포위했다. 결국 아옌데는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라는 말을 남기고 피델 카스트로가 준 AK-47 소총으로 자결은 선택했다. 이렇게 해서 아옌데의 사회주의는 끝이 났고, 칠레에는 피노체트가 주도하는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이 책은 아옌데가 집권한 1,000일을 아주 생생히 다룬 그래픽 노블이다. 존 니치라는 미국인 기자의 눈을 통해 아옌데의 1,000일을 아주 생생히 기록하고 그렸다. 책의 시작은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가 보낸 전투기가 아옌데가 있는 대통령궁을 폭격하면서 시작한다. 그러면서 다시 1970년 칠레에서 있던 대통령 선거 시점으로 돌아와 얘기가 진행된다. 아옌데가 집권한 1,000일은 제국주의와 부조리에 맞선 민중들의 투쟁의 기억이다. 책을 읽다가 순간 울컥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진보의 꿈이 무너지는 순간에선 나의 눈물샘을 아주 격렬하게 자극했다.

2020년 10월 26일 칠레에선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바로 피노체트 헌법을 국민의 힘으로 폐지한 것이다. 1973년 군사 쿠데타로 잡았던 피노체트는 17년간 군사독재를 해왔고, 반대파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 및 민간인 학살을 게시했다. 그의 집권기간 동안 수만 명이 학살당했다. 빅토르 하라 같이 칠레의 예술가들은 목숨을 잃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문당하고 고통 받았다. 이처럼 칠레의 현대사는 아옌데가 죽고 난 뒤 끊임없이 비극의 비가 내렸다. 2019년에 칠레에서 시작된 집회는 아옌데의 유산을 다시 부활시켰다. 그 결과 칠레 민중은 자신들의 힘으로 피노체트 헌법을 폐지했다. 참으로 기쁘고 감동적인 일이다.

대통령 선거 당시 아옌데를 지지하는 측에서 불렀던 노래가 있다. 그 노래가 바로 “우리는 승리하리라!”라는 이름을 가진 <벤세레모스>다. 진보의 꿈을 버리지 않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며 마지막으로 벤세레모스의 가사를 공유하면서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다.

1절

Desde el hondo crisol de la patria
조국의 깊은 시련으로부터
se levanta el clamor popular,
민중의 외침이 일어나네
ya se anuncia la nueva alborada
이미 새로운 여명이 밝아와
todo Chile comience a cantar.
모든 칠레가 노래 부르기 시작하네
Recordando al soldado valiente
불멸케 하는 모범을 보여준
cuyo ejempla lo hiciera inmortal
한 용맹한 군인을 기억하며
enfrentemos primero la muerte,
우리는 죽음에 맞서
traicionar a la patria, jamás!
결코 조국을 저버리지 않으리!
Venceremos, venceremos,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mil cadenas habra que romper.
수많은 사슬은 끊어지고,
Venceremos, venceremos,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la miseria sabremos vencer.
우리는 비극을 이겨내리라.
Venceremos, venceremos,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mil cadenas habra que romper.
수많은 사슬은 끊어지고,
Venceremos, venceremos,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la miseria sabremos vencer.
우리는 비극을 이겨내리라.

2절

Campesinos, soldatos y mineros,
농부들, 군인들, 광부들
la mujer de la patria tambien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여성과
Estudiantes, empleados, obreros,
학생, 노동자들이여
cumpliremos con nuestro deber.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의무를 완수할 것이다
Sembraremos las tierras de gloria,
영광의 땅에 씨를 뿌리자
socialista sera el porvenir,
사회주의의 미래가 열린다
todos juntos seremos la historia;
모두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가자
a cumplir, a cumplir, a cumplir!
이룩하자, 이룩하자, 이룩하자!
Campesinos, soldatos y mineros,
농부들, 군인들, 광부들
la mujer de la patria tambien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여성과
Estudiantes, empleados, obreros,
학생, 노동자들이여
cumpliremos con nuestro deber.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의무를 완수할 것이다
Sembraremos las tierras de gloria,
영광의 땅에 씨를 뿌리자
socialista sera el porvenir,
사회주의의 미래가 열린다
todos juntos seremos la historia;
모두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가자
a cumplir, a cumplir, a cumplir!
이룩하자, 이룩하자, 이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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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화민족의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문화란 도데체 어떠한 문화를 말하는 것인가? 일정한 문화(관념형태로서의 문화)는 일정한 사회의 정치와 경제의 반영이며 그것은 또 일정한 사회의 정치와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주며 크나큰 작용을 한다. 그리고 경제는 이러한 문화의 토대이며 정치는 경제의 집중적인 표현이 된다. 이것은 문화와 정치, 경제와의 관계 및 정치와 경제와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견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정한 형태의 정치와 경제가 먼저 그 일정한 형태의 문화를 결정하며 그런 다음에야 일정한 형태의 문화가 다시 일정한 형태의 정치와 경제에 영향을 주며 작용을 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의식이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고 하였으며, 또 종래의 철학가들은 여러 가지로 세계를 설명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혁시키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의식과 존재와의 관계문제를 정확히 해명한 과학적 규정이며, 또 그 후 레닌에 의하여 심오하게 전개된 능동적이며 혁명적인 반영론의 기본적 견해이기도 하다. 중국의 문화문제를 토론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이 기본적인 견해를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문제는 아주 명확해진다. 우리가 제거하려는, 중화민족의 그 낡은 문화에 들어 있는 반동적 요소들은 중화민족의 낡은 정치, 낡은 경제와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가 건설하려는 중화민족의 이 새 문화도 역시 중화민족의 새 정치, 새 경제와 분리될 수 없다. 중화민족의 낡은 정치와 낡은 경제는 중화민족의 낡은 문화의 토대이며 중화민족의 새 정치와 새 경제는 중화민족의 새 문화의 토대이다. 그렇다면 중화민족의 낡은 정치와 낡은 경제란 무엇인가? 그리고 중화민족의 낡은 문화란 또 무엇인가? 주나라, 진나라 때부터 중국은 봉건사회였고, 그 정치는 봉건적 정치였으며 그 경제는 봉건적 경제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와 경제의 반영으로서 지배적 지위에 있던 문화는 봉건적 문화였다.

 

외래 자본주의가 중국을 침략하여 중국사회 내부에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점차 생장하게 되면서부터 중국은 식민지, 반봉건적 사회로 점차 전환하게 되었다. 오늘의 중국은 일본 점령구에 있어서는 식민지사회이고 국민당 통치지구하에 있어서는 아직 기본적으로 반식민지 사회이며, 일본 점령구거나 국민당 통치기구거나 할 것 없이 그것은 다 봉건적, 반봉건적 제도가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다. 이것이 목하 중국사회의 성격이며 중국의 실정이다. 지배라는 측면에서 말한다면 이러한 사회의 정치는 식민지, 반식민지, 반봉건적 정치이고, 경제는 식민지, 반식민지, 반봉건적 경제며 이러한 정치 및 경제의 반영으로서 지배적인 지위에 있는 문화는 식민지, 반식민지, 반봉건적 문화다.

 

이러한 지배적인 정치, 경제 및 문화 형태가 바로 우리 혁명의 대상이다. 우리가 제거하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식민지, 반식민지, 반봉건적인 낡은 정치와 낡은 경제이며, 또 이러한 낡은 정치, 낡은 경제에 복무하고 있는 낡은 문화다. 그리고 우리가 건설하려는 것은 이와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그것은 중화민족의 새 정치, 새 경제, 새 문화다. 그러면 중화민족의 새 정치, 새 경제란 무엇이며 중화민족의 새 문화란 또 무엇인가?

 

중국혁명의 역사적 행적은 반드시 두 개의 행보로 나누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첫 번째 행보는 민주주의 혁명이며, 그 다음 행보는 사회주의 혁명이다. 그것은 성격이 다른 두 개의 혁명과정이다. 그리고 지금에 있어서 민주주의라는 것은 이미 낡은 범주에 속하는 민주주의, 구민주주의가 아니라 새 범주에 속하는 민주주의, 신민주주의다. 이로부터 중화민족의 새 정치라는 것은 신민주주의적 정치며 중화민족의 새 경제라는 것은 신민주주의적 경제며 중화민족의 새 문화라는 것은 신민주주의적 문화라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이것이 목하 중국혁명의 역사적 특성이다. 중국에서 혁명에 종사하는 모든 정당, 모든 사람들이 이 역사적 특성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이 혁명을 지도할 수 없고 이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는 인민들에게 버림을 받아 한족 구석으로 가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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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여러 해 동안 중국의 정치혁명과 경제혁명을 위하여 투쟁해왔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문화혁명을 위해서도 투쟁해왔다. 이 모든 것은 중화민족의 새 사회와 새 국가를 건설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새 사회와 새 국가에는 새 정치, 새 경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새 문화도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정치적으로 억압을 당하며 경제적으로 착취를 당하고 있는 중국을 정치적으로 자유로우며 경제적으로 번영한 중국으로 전환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낡은 문화의 지배로 인하여 우매하고 낙후된 중국을 새 문화에 의한 지배를 통하여 문명되고 선진적인 중국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새 중국을 창건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화민족의 새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문화영역에서 우리가 하려고 하는 목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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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전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선생이 8년만에 개정판을 낸 이승만 평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이승만이 어떻게 해서 분단을 추구했고반소 반공의 지도자로 부상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아래에 있는 내용은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전라도 정읍에서 열린 자신의 환영강연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공식적으로 제기하였다남북한 정치지도자 중에서 나온 최초의 분단정권수립론이다.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그리고 민족 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 있어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시기 바란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가히 폭탄선언이었다비록 탁치문제로 좌우가 분열되고소공위가 성과없이 결렬 상태에 놓였으나 아직 누구도 분단정권을 세우자고 나서지는 못한 상황이었다영구분단으로 갈지 모르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소공위가 장기 휴회로 들어가고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여운형·김규식 등 중도파 인사들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일반 민중과 정치지도자들이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어떤 이유에서도 분단정권의 수립을 막아야 한다는 충정에서였다이런 시점에서 이승만의 단정수립 주장은 정치인들과 국민에게는 충격과 분노’ 그 이상이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에는 배경이 있었다이승만의 발언이 있기 전부터 미 군정 측에서 간헐적으로 단정관련 발언이 제기되었다다음은 4월 7일 미국 발신으로 국내 한 신문의 보도 내용이다미국과 미 군정은 이 발언을 부인했지만 이승만은 미국의 의도를 간파하거나 뜻을 전달받고 정읍발언을 했을지 모른다.

 

미점령당국은 남조선만에 한하여 조선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 한다조선의 미 군정당국은 남조선 정부수립 계획에 있어서 미국인은 고문격으로 참여하여 전면적으로 지도하고 조선문제는 조선인에게 일임되리라 한다또 일부 정보에 의하면 민주의원 의장을 사임한 이승만 박사는 재차 출마하여 남조선정부의 주석이 되리라 하는데 미측이 남조선정부 수립안을 제의한 중요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① 소련 측이 정치적 이유로 미소공동위원회를 천연시키려고 하는 것② 미군의 복원계획으로 조선미군정 당국의 미군 장교급이 축차 귀국하여 그 수가 희소하여 지는 것.”

 

실제로 이승만과 그의 측근은 정읍발언’ 이전에 몇 차례 단독정부 수립론을 언급했다이승만은 5월 10일 미·소공위가 휴회에 들어가자 자율적 정부수립에 대한 민성이 높은 모양이며 하루라도 빨리 정부가 수립되길 갈망한다” (주석 28)고 발언하였다또 하지의 정치고문이자 이승만의 로비스트인 굿펠로는 5월 24일 귀국에 앞서 가진 회견에서 소련이 조속히 무산된 제1차 미·소공위를 재개시키지 않는다면 미국은 남한 단독정부의 구성을 추진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이미 1946년 초반부터 미·소 협력의 불가를 내세워서 단정노선북진 통일노선을 측근들에게 공언했다. 5월초에는 미·소공위가 휴회되면 단정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고공위가 휴회된 지 한 달 만에 공개적으로 단정 수립을 주장했다미 군정 내부에서는 4월 초에 단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미 군정의 정치 고문 겸 이승만의 로비스트였던 굿펠로는 5월 말에 남한을 떠나면서 단정을 주장했다이승만굿펠로우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서로 단정을 주장했고미 군정은 공식적으로 단정론을 부정했다.

 

이승만의 일련의 발언은 미국(군정)의 의도를 어느 정도 꿰고서 한 것으로 풀이된다굿펠로를 통해 하지의 의중을 읽은 것이었다하지만 이즈음만 해도 미국의 한반도 기본 정책은 소련을 적대시하지 않고 좌우합작을 통해 통일정부의 수립 쪽이었던 것 같다러치 군정장관은 6월 11일 출입기자단 회견에서 만일 이박사가 남조선에 따로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면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한 말이고나는 군정장관으로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절대 반대한다고 언급하면서 이승만의 단정론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또 하지는 1946년 6월초 서울에 온 이승만의 측근인 올리버를 만나 이승만이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가이기는 하지만끊임없는 그의 반소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미국의 후원 하에 수립될 어떠한 정부에도 이승만은 결코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단정수립 쪽으로 노선을 정한 이승만은 좌우합작운동에도 참여하지 않고 단정행보에 매진하였다광산 스캔들로 민주의원 의장을 물러나고정읍발언으로 정계에서 외톨이가 되다시피한 이승만은 탈출구를 찾았다방법은 모스크바 3상회의 철회와 남한 단정수립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미 국무성을 움직이는 것이라 믿었다이것은 국내의 정치적 불리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길이기도 했다.

 

미 군정은 해방 직후 이승만을 자신들의 대리인처럼 지원하였으나 차츰 그의 존재에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이승만은 하지에게 좌우합작은 사실상의 공산주의자 지원이고중도좌파는 공산주의자라며 보다 완강한 반공적 태도를 촉구하였다하지도 반공적 입장에선 이승만에 못지않았으나 이승만의 이러한 맹목적 태도가 미국의 입장을 곤란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크게 의가 상하게 되고 대립 관계가 형성되었다.

 

12월 5이승만은 미 군정에서 제공한 미 군용기로 워싱턴을 향해 출발했다방미는 유엔총회에 조선실정을 호소한다는 명목이었다도쿄에 들러 출발을 하루연기시켜 가면서 맥아더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맥아더는 그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으나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그에게 수분간 면회를 허락했다.” 맥아더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인해 그와의 면담 자체가 미국과 한국에서 커다란 정치적 의미를 띨 수 있었고이승만은 그와의 면담을 정치적 선전을 위한 재료로 이용했다.

 

이승만이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유엔총회는 이미 폐회 상태에 있어서 한국문제 호소의 의제 상정이 불가능하였다그의 실제 방미 목적은 미국 정부와 여론을 움직여 한국에 단독정부를 세우고 대통령이 되는 일이었다그의 방미 기간에 국내의 어려운 상황까지 겹치면서 오히려 크게 도움을 주었다.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주도한 전국적 규모의 총파업같은 해 10월 1일 대구를 중심으로 전개된 10.1항쟁 등 민중항쟁으로 남한 정국이 크게 불안하고 요동치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 언론계와 정계에 있는 지인들은 물론 자신의 로비활동 단체들을 동원하여 미국 정부와 여론을 움직였다보다 강력한 대소련 정책과 반공주의남한 단독정부 수립론이었다이승만은 미 국무성에 6개항의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안>을 제시했다.

 

1. 양단된 한국이 통일되어 그 후 즉시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남한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

 

2. 한국에 대한 미소 양국간의 협상에 구애됨이 없이 임시정부는 유엔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임시정부는 한국의 점령 및 기타 현실문제에 관하여 미국 및 소련과 직접 협상할 수 있도록 한국의 주장이 검토되어야 한다.

 

3. 남한의 경제재건을 원조하기 위해 일본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의 주장이 검토되어야 한다.

 

4. 한국 통화는 국제적인 교환원칙에 입각하여 안정되고 확립되어야 한다.

 

5. 타국과 동등한 원칙에 입각하여또한 어떤 국가에 대한 편중이 없이 완전한 통상권한이 한국에 허용되어야 한다.

 

6. 미군은 미소 양국의 점령군이 동시에 철수할 때까지 남한에 주둔해야 한다. (주석 36)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맥아더를 치켜세우고 하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하지가 좌익을 편애하고 우익을 탄압하는 반면에 맥아더의 대일 정책은 성공적이라고 선전하였다대소 강경론과 냉전 분위기가 일기 시작한 미국 조야와 언론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또 이것은 국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미 대통령의 대소 봉쇄정책인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것은 이승만에게는 행운이었다미국 언론과 조야에서 이승만의 반소반공주의가 트루먼독트린을 이끌어 낸 원동력인 것처럼 보도되었다미국 사회에 이승만은 단번에 아시아의 반공반소 지도자로 부각되었다여기에 미국 정부가 향후 3년간 한국에 6억 달러의 원조 계획이 언론에 보도되어 이것도 이승만의 공으로 돌려지고, 3월 22일 국무장관 마셜의 남한 단정 적극 계획’ 발언까지 보태져 이승만은 예기치 않았던 성과를 얻어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이번 방미가 그 자신에게는 권력획득의 길이 되고국가적으로는 분단정권 수립의 한 계기가 되었다이승만에게는 행운이었고민족사적으로는 비운이 되었다.

 

이승만은 4월 5일 미네아폴리스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재차 동경을 방문해 맥아더를 만났고국빈으로 중국에 들러 상해와 남경에서 장개석을 만났다이승만은 4월 21일에 광복군총사령관 이청천을 대동하고장개석이 제공한 전용기 자강호’ 편으로 귀국했다이승만은 아시아 최고의 반공 지도자인 맥아더장개석을 만났고그들의 전용기를 마음대로 이용했으며, ‘청산리전투의 항일명장 이청천을 수행원처럼 동반했다맥아더는 하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귀국을 승인했다이승만의 도미 외교는 그 자체로는 미국의 대한 정책에 아무런 영향이나 변화를 주지 못했다그러나 이승만은 트루먼 독트린대한원조 계획 등 미국의 대한 정책에 생긴 변화를 자신의 외교성과로 포장하는데 성공했다.”

 

출처 이승만 평전 p.182~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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