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정되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주루트, 원주민들의 이주루트에 대해선 다양한 주장들이 있지만, 대채로 이 루트를 따르는 것 같다.)

 

메머드(Mammoth)라는 털덮인 거대 코끼리가 살던 14,000년 전 혹은 16000년 전에는 아시아 대륙과 북아메리카 대륙이 연결되어 있었다. 확실한 시기는 현재까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 시기부터 인류는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돌창을 비롯한 성능 좋은 연장들을 개발해 큰 동물들을 사냥했고, 이 유목민들은 해마다 조금씩 신대륙으로 건너가 점차 더 깊이 내륙으로 이동했다.

(매머드, 매머드는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전 대륙에 걸쳐 서식했던 코끼리와 비슷하게 생긴 돔울이다. 멸종 원인으로는 기후 변화에 적응 실패를 들기도 하지만,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의 과도한 사냥으로 명졸했다는 얘기도 있다. 최근 연구결과 러시아의 브랑겔 섬의 경우 비교적 최근은 기원전 1500년 경까지 살았다고 한다.)

 

기원전 8000년경에 이르러는 남아메리카 남단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남부 아메리카 대륙과 멕시코 지역에는 정교한 사회가 등장했고, 현재 페루에서는 잉카인의 인구가 거의 600만 명에 달하는 제국이 건설되었다. 중앙아메리카와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서는 마야인이 문자, 아라비아 숫자와 비슷한 숫자 체계, 정확한 달력 그리고 발달된 농업 체계를 갖춘 복잡한 문명을 발달시켰다. 그 문명은 한때 북부의 유목 전사 부족이었던 아스텍인에게 계승되었으며 13세기 말경이면 아스텍인은 멕시코의 중남부 지역 대부분을 지배했다. 우수한 행정·교육·의학 체계도 발전시켰다. 종교도 발달했다.

(마야 최대의 유적지 치첸이트사의 쿠쿨칸에 있는 피라미드 엘 카스 티요)

 

멕시코 이북에 살던 사람들 또한 정교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수준의 문명을 발달시켰다. 신대륙 북부 지역의 사람들은 사냥이나 채집, 고기잡이를 하며 살았다. 그들 가운데는 바다표범을 사냥했던 북극권의 에스키모, 북부 산림지역에서 큰사슴이나 순록과 같은 큰짐승을 쫓던 수렵꾼들, 해안을 따라 안정된 주거 지역을 형성하고 주로 연어를 잡아 생활했던 북서부 태평양 부족들 그리고 극서부의 비교적 건조한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고기잡이와 식용 가능한 식물을 채집하고 작은 짐승을 사냥해 생활하며 성공적인 공동체를 발달시켰던 부족들이 있다.

(에스키모인과 허스키 그리고 이글루, 과거 북아메리카 북부대륙에도 이러한 생활을 하는 원주민들이 있었다고 한다.)


(고래사냥을 하는 에스키모인)

 

현재 미국의 1/3을 차지하는 동부 지역은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서 가장 식량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대부분 숲으로 덮혀 있었 우드랜드(Woodland)라 불리던 이곳은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 거주한 대부분의 부족은 농사와 사냥, 채집, 고기잡이를 병행했다. 현재 미국 남부 지역에는 상당히 안정된 사회가 형성되었는데, 미시시피강 유역의 옥토에서 자라는 옥수수와 기타 농작물을 기반으로 커다란 교역망이 형성되어 있었다. 오늘날의 세인트 루이스(St Louis) 부근에 위치했던 카호키아(Cahokia)가 그 교역의 중심지로 서기 1200년 전성기 때에는 인구가 4만 명에 달했다.

(우드랜드 당시 거주하던 원주민들의 주거지역)

 

유럽에서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것은 스칸디나비아에 거주하던 바이킹(Viking)족들이었다. 그들은 서기 1000년경에 북대서양의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거쳐 북아메리카 대륙의 북쪽 해안에 도착했다. 사실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의 경우 이곳을 방문한 바이킹들이 현재 아이슬란드 땅이 살기가 좋아서 다른 외부인들이 오지 않게 그 땅을 아이슬란드라 이름을 지었고, 실제로 얼음이 가득 찬 곳을 그린란드라고 불렀다 한다.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던 바이킹들이 도착했던 곳이 어디인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던 바이킹족의 레이프 에릭손(Lief Ericson)은 그곳은 빈랜드(Vinland)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와인랜드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아마 포도주하고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바이킹족, 바이킹족은 서기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유럽을 휩쓸고 다니던 스칸디나비아인들이다. 이들은 1000년 경에 북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던 적이 있었다.)


(레이프 에릭손의 빈랜드 상륙을 그린 상상화)


(현재 캐나다 지역에 복원해 놓은 바이킹 가옥)

 

바이킹족이 북대서양에 도착한지 10년 뒤, 토르핀 칼세프니(Thorfinn Karlsefni)가 이끄는 소수의 노르만족이 현재 캐나다의 세인트로렌스 강 유역에서 약 1년간 정착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원주민들의 적대적인 태도에 부닥치자 되돌아오고 말았다. 이들의 모험에 관한 이야기는 입을 통해 후손들에게 전설로 계속 구슬로 전해지다가, 14세기에 이르러 문자로 옮겨져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유럽에서 이 미지의 땅을 동경하게 되는건 15세기에 이르렀다. 1347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nople)에서 시작된 치명적인 전염병인 흑사병이 1/3의 유럽 인구를 죽게 만들었다. 1세기가 지나 유럽은 원래의 인구로 회복할 수 있었고, 이와 더불어 전반적으로 상업이 부활했다. 그러자 해외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고 이에 부응해 새로운 상인 계층이 생겨났다. 교역이 증대하고 항해술이 발달해 장거리 항해가 가능해졌다. 따라서 교역에 대한 관심이 한층 더 높아졌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됐다. 그 결과 육로를 통한 동방무역이 막히자 유럽 중 일부는 항로개척에 나서게 된다.)

 

14세기 초 마르코 폴로(Marco Polo)를 비롯한 모험가들이 동양에서 향신료, 옷감, 염료 등 이국적인 상품과 그보다 더 이국적인 이야기들을 안고 돌아오자, 교역으로 부자가 되기를 갈망했돈 유럽인들은 무엇보다 동방과의 교역을 꿈꾸기 시작했다. 지난 2세기 동안 동방과의 교역은 아시아 왕국까지의 긴 육로로 가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제역을 받아왔다. 또한 1453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당하자 육로를 통한 아시아와의 교역은 더 막히게 되었다.

(희망봉, 희망봉은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다. 1486년 당시 포르투갈이 항로개척을 통해 희망봉에 도달했고, 이는 이후에 인도로 가는 길이 되기도 했다. 명나라와 일본의 명주도 이곳을 통해 오는 포르투갈과 무역을 하게됐다. 현재는 아프리카에사는 펭귄 서식지이기도 하다.)

 

서유럽 사회에서 항해술이 발달하자 보다 빠르고 안전하게 동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찾을 수 있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해상무역과 항로개척에 뛰어든 나라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현재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15세기 당시 포르투갈의 항해술은 발달되어 있었고, 이것은 항로개척에 기여한 헨리 왕(Prince Henry the Navigator)의 덕택이었다. 헨리가 사망한 후인 1486년에는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를톨로뮤 디아스(Bartholomeu Dias)가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돌았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미국의 민중사학자 하워드 진의 경우 그를 악랄한 정복자와 학살자로 강도높은 비판을 하기도 한다. 2009년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우고 차베스는 그를 학살자로 규정하고 콜럼버스의 날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선언하기도 했다.)

 

1480년대 당시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한 남성의 후원요청을 받았다. 이사벨라는 여러 번 거절했지만, 1492년에 그를 후원하기에 이르렀다. 이사벨라 여왕이 후원한 이가 바로 그 유명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당시 스페인의 이세벨라 여왕은 해외 진출에 관심이 많았기에 콜럼버스를 후원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소위 계약서를 작성하게 했는데, 이계약이 바로 산타페 계약(Santa Fe)’이다. 149283일 스페인 팔로스 항을 출발한 콜럼버스 일행은 120명의 선원과 3척의 배를 동원했다. 이들은 1년을 버틸 수 있는 충분한 양의 보급품도 실었고, 인도를 찾기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서쪽으로 향해 계속했다. 14921012일 항해를 시작한 지 약 70일이 지났을 무렵 그들은 바하마 군도에 상륙했다. 이것이 바로 소위 콜럼버스의 신대륙 개척 역사의 시작이었다.


참고자료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1(개정판), 앨런 브링클리, 황혜성(역), 휴머니스트, 2011


미국사(완전 개정판), 이주영, 대한교과서,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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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0-12-30 1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분야로는 찰스 만의 <인디언>(원제: 1491)도 추천합니다

NamGiKim 2020-12-30 12:33   좋아요 0 | URL
그런책도 있군요. 호기심이 생기네요.
 

1. 새 과업

 

상황이 바뀌자 과업이나 지침, 전술까지 바뀌었습니다. 거의 9년 세월 동안, 우리 민족과 군은 당과 정부의 지도 아래 숱한 역경을 극복하고 용감하게 싸워 자랑스럽게 승리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 병력은 발전했습니다. 당과 정부의 올바른 정책에 힘입어 훌륭한 공적도 쌓을 수 있었습니다. 현재 상황이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도 바뀌고 있고, 이에 따라 정책과 슬로건도 바뀝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프랑스 제국주의 세력을 일소하는 데 온힘을 집중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프랑스인들과의 대화가 가능해진 반면, 미제국주의자들이 우리의 주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공격의 초점을 후자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평화를 되찾을 때까지 프랑스와의 전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뿐 아니라 전 세계 민족 모두가 미국에 대한 공격에 집중해야 합니다. 미국은 인도차이나 전쟁을 확신하여 국제화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 싸우며 미국의 전쟁 정책에 반대합니다.

 

우리 당은 9년 동안 계속해서 당의 방침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즉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의 완전 독립을 지지하고, 프랑스 연합을 인정하지 않으며,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을 모조리 몰아낼 것입니다. 그리고 괴뢰정부와 괴뢰 무장세력을 제거하고, 제국주의자와 반역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농업개혁을 위한 단계적인 조치로 지대와 이자율을 삭감할 것입니다. 또한 전 민족이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저항전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고 말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부분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했습니다. 실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상황에서 낡은 방침에만 매달릴 순 없겠지요. ‘끝까지 저항하자가 예전의 모토라면, 지금은 평화, 단결, 독립, 민주주의라는 새 모토를 내걸어야 합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이 인도차이나 전쟁에 개입하여 전쟁을 확산하려는 정책에 반대하여, 평화의 기치를 강력하게 내세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정책도 바꾸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프랑스 제국주의 세력의 재산을 몰수했다면, 이제는 협상이 진행중인 만큼 평등과 호혜의 원칙에 따라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자국의 경제적, 문화적 이익을 보호하도록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협상에는 양쪽의 분별있는 용인이 필요합니다. 예전에는 프랑스 침략 세력을 일소해야만 한다고 말했지만, 이제는 우리 쪽에서 상호 협의하여 프랑스군 철수 날짜를 확정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며 프랑스도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과거에는 민족통일을 위해 괴뢰정부와 괴뢰군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제는 관용을 실천하며 선거를 통해 국가의 통일을 달성하고자 합니다.

 

평화를 얻으려면 전쟁이 종식되어야 합니다. 전쟁을 종식시키려면 정전에 합의해야 합니다. 정전을 위해서라면 지역 재정비 작업이 필요합니다. 즉 적군이 어느 한 지역에서 점진적으로 병력을 철수하기 위해 조직을 재정비하면, 우리 군 역시 다른 지역에서 재편성 작업을 진행하여 합니다. 병력의 조직, 확대, 강화에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얻을 수 있도록 넓은 지역을 확보하여 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통일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역 재정비가 나라의 분할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이건 단지 통일에 필요한 한시적인 조치일 뿐입니다. 이때 지역의 경계를 정하고 통치 구역을 바꾸는 일도 생기기 때문에, 기존 해방구 중 일부는 한시적으로나마 적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고, 이 경우 그곳 주민들의 불만도 높아지겠지요. 어떤 사람들은 낙담한 채 적군의 기만에 넘어가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동포들에게 잘 알려야 합니다. 나라 전체의 이익을 위해 견뎌야 할 시련은 영광을 낳고, 시련을 견뎌낸 자에겐 민족 전체의 찬사가 따를 거라고, 모든 사람들이 비관주의나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돕고, 프랑스군의 전면 철수와 더불어 독립을 이룰 그날을 위해 열렬히 투쟁해달라고 호소합시다. 평화를 위해 지역을 재정비하고 민족통일을 위해 전국적인 선거를 치르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저항전은 독립, 단결,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를 목표로 합니다. 새로운 상황을 맞아 새롭게 성공하려면, 새 정책이 필요합니다. 전쟁이냐 평화냐를 가르는 중요한 시점인 만큼 솔선수범합시다. 선견지명을 가지고 항상 철저히 준비합시다.

 

평화를 지키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길고 복잡하며 거친 투쟁입니다.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도 있지만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유리한 조건이란, 우방국과 전 세계 인민이 우리를 지지한다는 것, 왕성한 혈기를 자랑하고 당과 정부를 신뢰하며 항상 단결 투쟁하는 인민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에게 닥친 난관이라면, 미국이 인도차이나에서 평화가 다시 꽃피지 못하도록 철저히 방어하고 있으며, 프랑스의 평화주의자들이 미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현재 상황은 어렵과 복잡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이제는 구해방구와 신해방구에 각기 다른 정책을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장악한 해방구와 재편성 작업 후 한시적으로 적군이 관할하는 지역에 대해서도 각기 다른 정책을 펴야 합니다. 이제는 농촌뿐 아니라 도시 정책도 마련해야 합니다. 대프랑스 정책 역시 과거와 달라야 합니다. 친미, 친불 반역자에 대한 정책 역시 예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국내 문제와 우방국과의 외교에만 신경 썼다면, 이제는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단기적 이익과 장기적 이익을 구별해야 하고, 지역별 이해관계와 전체의 이해관계 역시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엄청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여러 난관이 겹치면서 상황이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인민과 간부들의 생각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요.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고 적절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념적인 오류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먼저 좌파적 편향성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러 번의 승리에 도취되어 무조건 끝까지 싸우려 듭니다.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격이죠. 그들은 프랑스군의 철수에만 목을 맨 나머지, 적의 책략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프랑스와의 싸움에만 열중할 뿐, 미국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또한 군사행동에 치우쳐 외교를 경시합니다.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려면 전장에서뿐 아니라 국제회의에서도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새 슬로건에 대해, 그 내용이 우파적이며 주체성을 많이 잃고 양보한 것 같다면 반대합니다. 그리고 적이 받아들일 수 없는 과다한 조건을 내걸기도 합니다. 평화를 위한 투쟁이 어렵고 복잡할 거러난 생각 대신, 결과만을 재촉합니다. 이러한 좌파적 편향성 때문에 자민족뿐 아니라 전 세계 민족들에게서 멀어지고 고립되어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 우파적 편향성은 비관주의와 무기력, 원칙 없는 관용을 낳습니다. 더는 인민의 힘을 신뢰하지 않고 전투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그들은 역경을 견뎌내기 위한 에너지를 상실한 채, 조용하고 평안한 인생만을 꿈꿉니다. 이와 같은 좌파적, 우파적 경향은 옳지 않습니다. 둘 다 적들에게 이용당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에게는 해를 끼칠 것입니다.

 

2. 과업과 노동

 

이처럼 상황이 바뀌면서, 우리에게도 세 가지 의무가 생겼습니다.

 

(1) 평화를 보장하고 공고화하며, 나라 전체의 단결과 독립, 민주주의를 달성한다.

(2) 인민무력부대를 강화하고, 새로운 상황에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강력한 인민군을 건설한다.

(3) ‘경작자에게 땅을이라는 슬로건을 실천에 옮긴다. 생산 복구와 국가 재건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이 세 가지 의무를 이행하려면, 열 가지 과업을 수행해야 합니다.

 

(1) 새로운 상황과 과업을 위해 당과 인민이 한마음으로 뭉친다.

(2) 외교전에 필요한 지도력을 강화한다.

(3) 인민군을 보강한다.

(4) 신해방구를 장악한다. 특히 도시를 장악하고 관리하는 문제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5) 적의 재편성 이후 한시적이나마 그들이 장악한 지역에서의 활동에 새 지침을 제시한다.

(6) 구해방구를 통합 정리한다.

(7) 열성을 다해 토지개혁에 필요한 대중동원에 나선다.

(8) 경제와 재무 관련 업무를 개선하고 국가 재건에 필요한 여건을 조성한다.

(9) 파테트 라오와 크메르군을 후원한다.

(10) 신해방구 내 당을 재정비하고 이념 개조 작업을 실시한다.

 

이상 열 가지 과업은 중앙위원회가 지도합니다. 모든 지역과 지부가 열 가지를 모두 완수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각 지역에 의무적으로 일정량을 할당할 예정입니다. 이중에서도 이념적 리더십이 가장 중요합니다. 당원뿐만 아니라 비당원도 새로운 상황과 과제를 제대로 이해해야 생각을 모을 수 있고, 생각이 모여야 행동이 하나가 됩니다. 당 안팎, 각 단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생각과 행동을 하나로 통일할 때,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일이라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은 현재 전 세계 인민의 주적이며 인도차이나 인민을 직접 위협하는 세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국을 반대하는 데 활동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심지어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미국에 우호적이지 않은 국가나 개인은 연합전선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평화와 독립과 단결, 민주주의는 변하지 않는 목표입니다. 원칙은 확고히 지키되, 전술은 유연해야 합니다. 각 활동이 전체를 구성하니, 모든 활동은 서로 연결되어야 하며 조화로워야 합니다. 각 지역의 구체적인 상황에 맞게, 주어진 시간에 과업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당과 정부의 올바른 지도력, 간부와 인민 모두의 노력과 단결, 전 세계 우방국과 평화를 사랑하는 인민들의 지지와 격려가 있으니, 우리는 위의 세 가지 의무와 열 가지 과업을 반드시 완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54715

호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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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프 브로즈 티토, 그는 현재는 해체된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유럽의 대다수 국가를 침략하여 점령했다.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은 전쟁 초기 유럽 정복에 착수했다폴란드를 성공적으로 점령한 나치독일은 1940년 덴마크와 노르웨이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그리고 프랑스까지 점령했고덩케르크에서 철수한 영국을 상대로 대규모 항공기 공습을 개시했다그 이후 1941년 나치 독일은 알바니아와 루마니아헝가리불가리아그리스를 침공하여 점령했고그해 4월 6개의 연방이 모인 국가 유고슬라비아(Yugoslavia)를 점령했다유고슬라비아는 아돌프 히틀러의 군대에 굴복한 13번째 국가가 되었다.

(나치의 유고슬라비아 침략, 1941년 4월 나치는 유고슬라비아를 침략했다. 그 결과 유고슬라비아는 나치독일에게 항복한 13번째 나라가 되었다.)


(당시 루프트바페의 폭격을 받은 베오그라드)

 

1941년 4월 6일 루프트바페(독일공군)의 지원을 받은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수도 베오그라드를 공습했다. ‘보복작전이라고 명명한 공습으로 최소 5,000명에서 17,000명의 사상자가 속출했고나치의 침략 11일 만에 유고슬라비아는 독일군헝가리군불가리아군 그리고 이탈리아군의 수중에 떨어졌다이러자 유고슬라비아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하던 한 인물은 파시스트의 침략에 맞서 군대를 결성하고 게릴라전을 전개했다그가 바로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였다.

(나치독일군에게 항복하는 유고슬라비아 정규군)

 

티토는 1941년 6월 이른바 파르티잔 (Partisan) 즉 빨치산이라 알려진 반나치 게릴라 전투 집단을 결성했다그는 빨치산 부대를 직접 지휘하고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티토가 결성한 빨치산은 초기엔 도끼몽둥이엽총 정도로 무장한 부대로 무장력이 형편없었다그러나 파르티잔 투쟁을 통해 세력을 넓혔고전쟁이 끝날 무렵엔 사실상 정규군 수준으로 성장했다또한 티토가 이끄는 빨치산은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이 빨치산은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민족·종교·언어를 초월하여 연합한 집단이었고다수의 여성대원들이 포함되어 있었으며이들은 단순히 사무실과 병원에서 일하는 것만이 아니라 남성대원들과 똑같이 무기 사용법을 훈련받고 똑같이 전투에 참여했다이런 점에서 티토의 파르티잔은 민족과 언어종교 그리고 성별을 초월했다.

(여성 파르티잔 대원, 티토가 이끄는 빨치산은 성별과 종교 그리고 인종을 초월했다.)

 

빨치산 설립 초기인 1941년 6월 티토는 무전기를 사용하여 모스크바와 연락할 수 있었지만당시 소련 또한 독일의 침공을 받고 있었기에 티토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결국 티토의 빨치산은 소련의 지원 없이 전쟁 초기 외로운 투쟁을 이어나가야 했다. 1941년 여름이 끝날 무렵 티토는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떠나 빨치산 부대를 찾아가 그들이 해방시킨 산악 지방의 소도시 스톨리체에 본부를 세웠다이 시기 그가 이끄는 빨치산 집단은 그 밖에도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 및 몬테네그로에서 나치에 맞서 투쟁을 벌였는데, 1941년 10월 빨치산 여단이 베오그라드 근처에 있는 크라구예바츠 근교의 독일군 탄약창고를 기습하여 26명의 독일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체트니크군, 나치의 침공 이후 이에 저항하는 또 다른 세력이 있었다. 그게 바로 체트니크군이다. 그러나 체트니크군은 친서방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했고, 빨치산과의 협력을 거부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나치나 파시스트 조직인 우스타샤와 협력하여 빨치산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있자 독일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2,600여 명의 민간인을 기관총으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나치 치하 초기 유고슬라비아에선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체트니크라는 왕당파측 저항집단이 있었는데이들은 이 사건 이후 티토의 빨치산과 협력하는 것을 꺼렸다당시 영국과 미국은 언론서 체트니크군의 활약만 다뤘는데이들이 동조하던 체트니크는 11월 1일 독일군을 도와 빨치산을 소탕하는 작전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된다이렇게 하여 티토는 독일군과 세르비아군체트니크군까지 맞서 싸우게 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탈리아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작전을 펼쳤다. 다른 전선에서도 그랬듯이 이탈리아군은 유고슬라비아에서도 무능했다.)

 

1942년 1월 독일군은 티토 빨치산에 대한 제1차 공세를 전개할 준비를 완료했다이들은 우스타샤군의 도움을 받아 빨치산을 남쪽의 포차로 내모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포차는 이탈리아측이 점령하고 있었다물론 티토는 초기에 이탈리아측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이탈리아측은 폭격기의 지원을 받는 기계화 부대를 동원하고이쪽 지역에서 몬테네그로인들이 총구를 빨치산쪽으로 돌리면서 퇴색에 직면했다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몸소 몬테네그로로 간 그는 빨치산을 지휘했고겨울이 끝나갈 무렵 파시스트들로부터 잃었던 영토 대부분을 재탈환하기에 이른다당시 티토는 스탈린에게 더 많은 물질적 원조를 호소했지만정신적인 지원은 있었지만 물질적인 지원은 없었다.

(빨치산 부대를 사열하는 지도자 티토)

 

이에 따라 티토의 부대는 1942년 5월 치열한 전투 끝에 한 차례 퇴각할 수 밖에 없었고보스니아 경계로 후퇴했다이 과정에서 티토의 군대는 또 다른 시련에 직면하는데 바로 굶주림이었다따라서 티토는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고서부 보스니아의 다른 빨치산 부대와 합류하기 위해 320km에 걸친 4개월의 대장정을 실행했고성공적으로 완료했다이 과정에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패배한 적군들로부터 필수식량과 탄약을 노획했다.

(1943년 당시 지휘본부에서 찍은 티토의 사진)

 

이러한 티토의 활약으로 빨치산의 영토는 넓어졌고크로아티아 주 경계 지역까지 장악하게 되었다전황이 티토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것이다이때도 티토는 스탈린으로부터 지원을 받고자 했지만안타깝게도 없었다이 과정에서 티토는 1942년 11월 유고슬라비아 반파시스트 위원회를 결성함으로써 빨치산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한편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유고에서의 빨치산을 소탕해야 한다 생각했다.

(1944년 동료들과 함께 있는 티토)

 

그 당시 유고슬라비아에는 독일군 10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이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연합군이 유고슬라비아에 상륙하는 것과 상륙한 연합군이 티토의 빨치산과 협력하는 일이었다만약에 연합군이 유고슬라비아에 상륙하여 게릴라군과 손을 잡게 된다면 히틀러로선 굉장히 큰 골치였다따라서 1943년 1월에 나치는 이른바 백색작전(Operation Weiss)’을 개시했다백색작전은 티토의 빨치산이 4차 공세라 불렸던 작전으로 독일군 2개 사단이탈리아군 4개 사단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파시스트 세력인 우스타샤군 2개 사단이 동원되었다나치의 백색작전 당시 티토는 네레트바 강을 건너 독일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체트니크군을 대파하는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백색작전 당시 동원된 추축국의 탱크)

 

1943년 3월 빨치산 공병대가 네레트바 강에 걸쳐 있는 여러 개의 교량을 폭파하고티토가 이끄는 빨치산 제1, 그리고 7사단이 이 작전에 동원되었다이들은 이탈리아군으로부터 탈취한 15대의 전차를 앞세워 20km에 걸쳐 전선에 포진하고 있는 독일군을 공격하기도 했다그러나 독일군은 이에 맞서 흑색 작전이라는 빨치산 토벌 작전을 전개해 2만 명의 빨치산에 대항하여 독일·이탈리아·불가리아군 및 크로아티아 괴뢰 정부군으로 구성된 10만 병력을 동원했다여기서 독일군은 잔인무도한 작전과 학살을 벌였고티토의 빨치산은 다시 한 번 독일군의 포위망을 돌파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했다.

 

티토 또한 여기서 독일군에 체포되거나 사살될 수 있었지만다행히도 이들은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고보스니아로 들어가 독일군의 추격을 따돌렸다이후 티토는 전술을 바꾸어 빨치산 부대를 작은 규모의 집단으로 세분해서 소규모 지역에 국한하여 작전을 펴게 했으며독일군에게 빨치산을 일거에 전멸시킬 기회를 다시는 더 주지 않기로 결심했다물론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의 대부분 지역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지만티토의 생존만으로도 큰 승리였고이런 사실을 알게 된 미국과 영국은 체트니크의 미하일로비치가 아니라 티토를 유고슬라비아의 항독 지도자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2차 세계대전 초중기 티토의 빨치산은 서방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정보가 들어오더라도 런던에 망명중인 페테르 국왕 정부의 검열을 거치면서 들어왔다그러나 추축국인 이탈리아와 독일의 사정은 달랐다이들이 나누는 메시지에는 티토의 언급이 많았다이걸 해독한 영국측은 독일군의 제5차 공격이 진행되던 1943년 5월 네 명의 영국군 장교들을 몬테네그로에 잠입시켜티토의 빨치산과 접촉했다이후 영국의 수상 처칠이 여기에 개입했고육군 준장 피츠로이 매클린을 유고슬라비아로 보낸다이렇게 되면서 영국의 처칠은 티토에 대해 보다 정확한 평가를 내리게 되었다.

 

1943년 7월 영미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섬 시칠리아에 상륙하고이탈리아 본토에 진격하게 되면서 무솔리니는 몰락에 직면했다무솔리니 몰락 이후엔 독일군이 이탈리아에서 전권을 주도했다티토는 무솔리니가 전쟁에서 제거되는 기회를 틈타 이탈리아군이 점령했던 유고슬라비아 영토를 장악하기 시작했고그리하여 몇 달 만에 유고슬라비아의 대부분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유고슬라비아의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 내 독일군 주둔 병력을 20만 명으로 증강했다그 외에 불가리아세르비아 및 크로아티아군을 포함하여 16만 명을 합치면 총 36만 명의 추축국 측 군대가 빨치산을 추격했다.

 

나치 독일은 36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 빨치산에 대한 제6차 공격인 번개 작전을 개시했다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한 독일군은 이 같은 수적인 우세를 바탕으로 과거 이탈리아군이 차지했던 점령 지역을 재탈환하고보스니아로 밀고 들어갔다그 무렵인 1943년 11월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은 테헤란에서 히틀러를 몰락시키기 위한 조치들을 논의했고서유럽에 대한 제2전선 구축과 더불어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작전에 관해서도 논의했다여기서 연합국은 티토에게 물자를 보내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그리고 1943년 11월 말 티토는 보스니아의 도시 야이체에서 유고슬라비아 민족 해방 위원회라고 일컫는 공산주의 정부를 구성하여 왕정에 대체한다고 선언했다이것은 독일군의 제6차 공세인 번개 작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와중의 일이었고이 회의에서 티토를 유고슬라비아군 원수로 임명한다는 내용도 선포되었다.

(티토와 처칠, 1944년 당시 티토와 처칠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회담을 가졌다. 생각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전개되었다고 한다.)

 

독일군과의 전쟁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당시 독일군은 공군과 기갑부대를 동원하여 티토를 야이체에서 몰아냈다. 1944년 2월 독일군의 공격은 흐지부지되었다이번에도 독일군은 티토를 생포하는 데 실패했다이후 티토는 산악 지대로 나와 본부를 드르바르 시 부근의 한 동굴로 옮겼고여기서 연합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승인 받게 된다유고의 지원에 비적극적이던 소련도 지원에 나섰다한편 1944년 5월 독일군은 티토가 있던 동굴에 대해 공수 부대 공격을 감행했다이것이 기사의 이동 작전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티토는 여기서도 탈출에 성공했다이후 영국은 나치하고 일부 협력하던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와 결별하고티토를 승인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되는 마지막 장애물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이에 따라 티토는 연합국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 완전히 인정받게 되었다.

 

1944년 여름 그는 영국의 처칠과 소련의 스탈린하고 회담을 가졌다처칠과는 친근감 있는 분위기에서 회담이 이어진 반면스탈린과의 화담은 아니었다티토는 스탈린의 주장을 일방적인 명령으로 인식했고그 명령에 반대하기도 했다이후 티토가 귀국했을 때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북쪽으로 후퇴했다. 1944년 9월 중순에는 소련의 붉은 군대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해방시키고 유고슬라비아 국경으로부터 불과 몇 마일 밖에 주둔하고 있었다그리고 10월 1일에는 소련의 붉은 군대가 유고슬라비아에 입성했다.

(1944년 10월 베오그라드를 해방시킨 티토의 빨치산과 소련의 붉은 군대)

 

티토 휘하의 다프체비치와 포포비치의 군대는 소련의 지상군 지원과 미군의 공중 지원 아래 베오그라드로 접근했고시가전을 치러 수도 베오그라드를 해방시켰다. 1944년 10월 20일 독일군 16,000명이 죽고 8,000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1주일간 치열한 시가전 끝에 마지막 독일군 거점이 유고슬라비아 빨치산 제프롤레타리아 여단에 의해 함락되었다이에 따라 독일군이 후퇴하자 세르비아인과 체트니크군 및 우스타샤 지지자들도 함께 달아났다이렇게 해서 베오그라드가 해방된 것이다.

(베오그라드 해방 당시를 제현한 그림, 소련의 T-34전차에 탄 병사가 유고슬라비아 깃발과 소련 깃발을 흔드는 것이 인상적이다.)

 

전쟁 과정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엄청난 피해를 봤다. 1942년 1월 나치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유대인들을 독일의 점령지 폴란드의 가스실에서 처치해야 한다고 제안한 반제회의가 있을 때까지 대략 25만 명 이상의 세르비아인유대인 그리고 집시들이 크로아티아에서 죽어나갔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유고슬라비아에서 죽은 사람들은 역사학자들의 간추려 본 바에 의하면 최소 33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많게는 70만 명 이상이 죽었다는 얘기도 있다또한 1941년 당시 12,000명이었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원 중 9,000명이 전쟁 기간 동안 죽었고생존자 3,000명도 친구동료남편아내가족들을 잃은 사람들이었다이처럼 나치의 침략은 참혹했다.

(티토와 스탈린, 1945년 5월 전승기념 퍼레이드에서 참석한 티토는 스탈린을 만났다.)

 

소련군과 티토의 빨치산이 수도 베오그라드를 해방시키자 독일군은 1944년 겨울 동안 크로아티아 북부에서 버티는 신세가 되었다. 1945년에 접어선 유고슬라비아 땅에서 완전히 후퇴했다. 1945년 초 티토가 이끄는 반파시스 위원회가 최고 입법 기구가 되고행정부는 군주 정부와 공산당 대표가 공동 참여했다티토가 수상을 슈바시치가 외상을 맡게 되었다이 타협안은 영국과 소련의 승인을 얻었다. 1945년 유고슬라비아의 인민해방군은 트리에스테로 진격했다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5월 1일 오전 9시 트리에스테에 무사히 입성했다연합군의 선봉이었던 뉴질랜드 대대가 그날 오후 5시에 도착했고, 5월 3일에는 영국군 주력부대가 밀려들어왔다.

 

소련군이 베를린을 함락시킨지 일주일 후 티토는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베오그라드에서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공격이 시작된 지 49개월 3일째가 되는 오늘유럽의 침략자 독일이 항복을 했습니다.”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게 항복했다이로써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은 종식되었다유고슬라비아는 나치로부터 해방되었고새로운 정부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참고자료

 

인물로 읽는 세계사 티토루프 시스먼대현출판사, 1993

 

티토위대한 지도자의 초상재스퍼 리들리을유문화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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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rial of the Chicago 7: The Screenplay (Paperback)
Beto / Simon & Schuster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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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영화 포스터)

 

전 세계에 있어서 1968년은 혁명의 해였다그해 1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감행한 이른바 구정공세(Tet Offensive)는 전 세계를 혁명과 저항의 길로 인도했다프랑스 파리에선 5월 혁명이라 하여 기존의 보수주의에 맞서는 것과 동시에 체게바라와 마오쩌둥 그리고 호치민의 초상화가 곳곳에 등장했다이것은 단순히 프랑스뿐만이 아니었다미국과 영국서독이탈리아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네덜란드일본 등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다베트남 전쟁의 당사자인 미국에선 반전운동과 더불어 대통령 선거 그리고 흑인인권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구정공세로 거짓말이 다 드러난 린든존슨 정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그 이유는 미국 내의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이 거세졌기 때문이다.

 

반전운동이 미국 전역에서 확산되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바로 흑인인권운동의 상징인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이 암살당하고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온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또한 암살당했기 때문이다이 과정에서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가 시카고에서 열리게 되었다시카고에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리자정치적 분파를 막론하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모이게 되었다그러나 문제가 있었다그것은 바로 시카고 시장이 집회를 불허한 것이었다결국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들은 체포되었고평화롭게 진행하고자 했던 시위는 경찰과 주방위군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해산됐다.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

 

린든 존슨 대통령이 구정공세의 여파로 물러나게 된 이후 공화당 출신 대통령 닉슨은 반전시위를 주도한 이들을 본보기 삼아 법정에 세우려 했다닉슨 정부와 재판을 담당한 법정은 이미 자신들만의 결론을 낸 상태에서 6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시위를 주도했던 대표적인 8명을 불법시위 주동 및 내란선동으로 구속시키고자 했다그러나 여기에는 문제점이 있었다구속된 이들은 서로가 소속이 달랐다한쪽은 1960년대 문화운동 혹은 혁명을 주장하던 국제청년당 즉 히피(Hippie)계열이었고다른 한쪽은 민주사회를 위한 청년학생 모임(SDS) 계열이었으며 또 다른 한쪽은 급진적인 흑인인권운동을 전개하는 흑표당(Black Panther Party) 계열이었다그러나 이러한 소속 및 정치성향의 차이는 재판을 계획한 측에게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전운동에 참여했던 히피, 이들은 프리섹스, 마약, 너덜너덜한 복장 등으로 대표되는 당시 1960년대 저항의 상징이기도 하다.)

 

재판을 시작하기 전부터 재판을 담당한 측은 이 사건을 내란음모와 폭력시위 선동으로 몰기 위해 온갖 조작과 음해를 계획했다그리고 그러한 행위는 재판 과정에서도 끊이질 않았다이들의 치졸한 행위는 특히나 급진적 성향이 강한 흑표당 대표에게 가장 많았다재판 시작부터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도 주지 않고, “변호사가 없는 피고는 발언할 수 없다와 같은 황당무계한 짓도 행한다즉 헌법에 보장된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더 나아가 조작된 경찰 살해사건으로 몰아가기까지 했으며심지어 검사조차도 용납할 수 없을 정도의 무자비한 폭력을 재판에서 자행하기 까지 한다이것은 바로 재판을 담당한 판사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톰 헤이든, 영화상에 나오는 톰 헤이든은 SDS의 대표이다. 그는 나중에 4,572명의 미군 전사자 명단을 마지막 공판에서 읽어 내려간다.)

 

결국 흑인 인권 운동가인 프레드 햄프턴 흑표당 일리노이 지부장이 경찰에 의해 살해된 것 등을 항의하며 법정에서 고함을 질렀다는 이유로 고문을 받았고이후 슐츠 검사는 그런 실의 모습이 배심원단이 피고인들에 대한 동정심을 갖게 할 것을 우려하여 실을 재판에서 제외시킬 것을 판사에게 요구해 관철시킴으로써재판은 시카고 8의 재판에서 시카고 7의 재판으로 바뀌게 된다이렇게 해서 영화 제목이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8이 아닌 7인 것이다.

(반전운동을 진압하는 경찰과 최루탄 때문에 피하고 있는 반전 시위대)

 

그 외의 다른 인물들에게도 자신들의 무고함을 증명하고 입증할 기회를 재판 담당판사는 주지 않는다이것은 바로 이 재판 자체가 조작되었기 때문이다사실 이들을 폭동 혹은 내란선동으로 몰고 가려고 했던 사법 측은 이들이 폭동을 선동하고 계획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지는 못했다그래서 이들은 정보 및 자료조작과 그들의 녹취된 연설에서의 몇몇 단어들을 꼬투리 잡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재판을 이끌어 가려 했다애초에 민주당 전당대회에서의 시위는 경찰과 주방위군이 정부의 명령을 받고 폭력을 부추긴 사건이었기에이들의 조작은 갈수록 더 사악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시카고 재판 당시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 당시 사건 담당 판사였던 율리우스 호프먼은 어떻게든 사건을 조작하려 했다.)

 

몇 개월간의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SDS 래니 데이비스는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의 명단을 매일같이 작성해 나갔다그렇게 해서 총 4,752명의 미군 장병 명단을 확보했고, “전 세계가 우릴 지켜보고 있다는 메아리 속에서 열린 마지막 공판에서 SDS의 지도부인 헤이든은 최후변론 과정에서 재판 시작부터 그날까지 베트남에서 전사한 4,752명의 미군 명단을 줄줄이 읽어 나간다.

(극증에서 나오는 재판 당시 모습)

 

영화를 보면서 국내에서 개봉했던 영화 ‘1987’과 변호인이 꽤나 오버랩 됐다배경은 다르지만 국가의 조작과 각본에 의해서 전개된 재판이라는 점그리고 안보라는 핑계로 무고한 이들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점이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영화상에선 전 세계가 보고 있다(Whole World is Watching)”라는 명대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영화에서 얘기하는 전 세계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시카고에서 열린 재판을 생각할 것이다물론 맞는 말이다이 형식재판은 반전운동을 하던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었기 때문이다.

(사건 담당 검사 리처드 슐츠, 그는 반전 시위대를 싫어하는 보수주의자였지만 이 재판 자체가 무리수가 많다는 사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본분을 다하면서도 어떤면에선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 더 큰 그림을 보자면 이것은 당시 이런 재판을 주도해가며 침략전쟁인 베트남 전쟁을 지속하고 있던 미국 그 자체에 해당되는 얘기이기도 하다영화상에서 억울한 재판을 받는 이들이 정파를 떠나 민주당 전당대회에 모였던 결정적인 이유는 미국이 자행하고 있던 부도덕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고그 전쟁을 끝내기 위함이었다이런 점에서 생각해볼때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는 말은 미국이 저지르고 있던 베트남 전쟁과 그 자체의 범죄와 부도덕함을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영화에 나온 히피와 흑표당등과 같은 1960년대에 대해 더 얘기하겠다. 1960년대의 미국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혁명과 저항의 시대였다당시 여성운동을 하던 이들은 보수적인 성적 억압에 맞서 자유연애를 주장했고흑인인권운동을 하던 이들은 말콤X나 마틴 루터 킹의 영향을 받아 더 나은 권리와 평등을 주장했다그 외에도 미소냉전에서 전쟁의 무서움과 부도덕함을 알게 된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미국의 침략전쟁인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다이러한 변화가 미국사회에서 일어났다영화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을 꽤나 잘 표현했다그리고 무엇보다 실화를 한 작품이기에 현실성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많이 반영된 것도 보였다베트남 전쟁 당시 반전운동과 사회 변혁 그리고 부조리한 권력에 맞서는 것이 왜 필요한지 영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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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당시 북한에서 발행한 몽양 여운형 우표)

 

무릇 인생길에는 곧을 정()자도 있고 갈지()자도 있다고들 말한다그러나 나는 여태 그런 것을 모르고 살아왔으니 행운아였던가 싶다내 나이 고희에 이르러 새삼스레 지나온 나날들을 돌이켜보았다특히 나의 인생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해서 감회 깊이 추억하게 되었다민족 수난의 시기에 태어나 망국의 설움을 안고 파란만장의 풍운을 헤쳐온 나의 아버지 여운형(呂運亨)은 이 나라의 근현대사를 피로 물들인 수많은 반일 애국 열사의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해방 후 여러 차례 38도선을 넘어 평양에 와서 김일성(金日成주석을 만나보았다나와 동생 원구는 1946년부터 김 주석 댁에 살면서 공부하였고또 다른 동생 영구도 평양에 와서 대학을 다니다가 한국전쟁 때 죽었다난구 언니와 아저씨(이만규)는 1948년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때 평양에 왔고어머니와 동생 봉구는 전쟁 때 이북으로 왔다결국 우리 가족은 시기와 경로는 달라도 모두 이북에 모여 김주석의 각별한 관심을 받으며 살았다그래서 나는 나와 우리 가족을 감히 김 주석과 한 식솔로 여기는 데 버릇이 들었다.

 

그런데 1994년에 갑자기 김 주석이 별세하였다내 머리에 흰서리 내리도록 주석님 앞에서 응석을 부리며 살아온 지난날이 못 견디게 그리워지고 내가 오늘까지 곡절도 풍파도 모르고 행복하고 보람있게 살라온 것이 누구의 덕이었는가를 날이 갈수록 더 깊이 깨닫게 된다그리고 떠나가신 지 반세기가 되었으나 오늘도 영생의 광망(光芒속에 살고 계신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오늘의 시점에서 재조명해 보게 된다.

 

과거 없는 현재가 없고현재는 미래를 예언한다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한 생이 보다 값있고 아름답기를 바란다사람의 존재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사람은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놓고 아버지의 지나간 인생 행로를 파헤쳐 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선뜻 펜을 들었다그러나 정작 쓰자고 보니 어려운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워낙 졸문인데다 수집된 자료가 너무 부족했다.

(1970년대 당시 북한의 김일성과 몽양 여운형 선생 가족분들)

 

아버지가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을 한창 벌이던 젊은 시절에는 내 나이가 너무 어렸고 철이 들어서는 아버지와 함께한 기간이 너무 짧았다내가 알고 있는 자료란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생활 외에 아버지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친지들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가 전부다그것도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은 것이 유실되고 삭막해졌다아직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더듬고 되살리고 모아서 쓰다 보니 아쉬운 것도 많고 공백도 많다나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 대하여 밝히고 싶다.

 

첫째나의 아버지가 일찍이 독립운동에 발벗고 나섰던 초기부터 풍파 사나운 이국 땅에서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어떻게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구김새 없이 수행해 나갈 수 있었는가.

 

둘째일제통치의 가장 엄혹하던 시기에 숱한 선각자들과 유명인사들이 독립운동을 외면하고 포기하며 일제에게 아부굴종할 때 아버지만은 독야청청하면서 마지막까지 민족적 지조를 견지하여 나갔는데과연 그러한 힘의 원천그 강의한 신념의 뿌리는 어디에 있었는가.

 

셋째지난 시기에 나온 나의 아버지에 대한 글들에서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되고 축소된 것들을 바로잡고 보충하고자 하였다.

 

자식인 내가 인생 황혼기에 아버지의 인생 행로를 더듬어 보게 되는 것은 자못 감회가 깊은 일이다나는 아버지가 길지 않은 인생 길에서 남들보다 곡절도 풍파도 괴로움도 많이 격었지만 뜻을 바로 세우고 끝까지 깨끗하게 열렬하게 산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비록 미숙하나마 이 글이 아버지 여운형의 지향과 포부의지와 염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미흡한 점에 대하여 독자들의 사려 깊은 양해를 빌면서.

 

평양에서

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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