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헛소리.

제발 북한은 이런것좀 만들지좀 말았으면 좋겠다. 본인들이 체제를 유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런거 만들면 그냥 웃음거리로 밖에 안된다는 거를 왜 생각 못하는 걸까? 나도 평소에 북한을 이해하려 하지만 이건 진짜 뻥이 너무 심한건 둘째치고, 남한 민중에게 1도 안먹히고 조롱만 당하잖아. 솔직히 이 영상에 달린 댓글들만 봐도 조롱밖에 없는데...... 거기다 과거에는 이라크 전쟁때 이런 얘기를 했으면서.

(아래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에 나오는 내용)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라크의 최대 실수는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라크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미국은 절대 이라크를 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핵 관련 사찰도 무장해제도 절대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그런 타협을 해서 제국주의자들과 그 추종 세력이 제기한, 핵 사찰 및 무장해제 요구를 수용했더라면, 우리는 벌써 이라크와 같은 비참한 운명을 맞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조금만큼의 양보나 타협도 기대하지 말라”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32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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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주의로 이끈 길(The Path Which Led Me To Leninism)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저는 파리에서 생활했습니다. 사진관에서 일하기도 했고, ‘중국고미술’ 화가로도 일했습니다. 가끔은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이 베트남에서 자행한 범죄를 비난하는 내용의 간단한 인쇄물을 배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는 자연스럽게 10월 혁명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10월 혁명의 역사적 중요성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레닌은 자신의 동포들을 해방시킨 위대한 애국자였기에 저는 그에게 반했으며 그를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의 저서를 읽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프랑스사회당에 가입한 이유는 사회당의 ‘신사 숙녀, 여러분’께서 저를 포함해서 억압받는 인민들의 투쟁에 공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까지 당이 무엇인지, 노동조합이 무엇인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사회당 세포조직 사이에서는 제2인터내셔널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2.5인터내셔널’을 건설해야 하는지, 아니면 레닌이 만든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해야 하는지를 두고 열띤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정기적으로 모임에 참가했고 발표자들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이처럼 토론이 심각해지지? 제2인터내셔널이든, 2.5인터내셔널이든, 제3인터내셔널이든, 혁명을 수행할 수 있지 않은가? 왜 이처럼 언쟁해야 하나? 그럼 제1인터내셔널은 어떤가? 그것은 어찌되었을까?

어떤 인터내셔널이 식민지 국가 인민들의 편에 서 있는 가야말로 가장 궁금해 했던 문제이지만 모임에서는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이 질문을 한 모임에서 제기했습니다. 일부 동료들은 제2인터내셔널이 아니라 제3인터내셔널이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누군가 저한테 《뤼마니테》에 실린 레닌의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를 읽어보라며 건네주었습니다.

이 논문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적 개념들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복하여 읽고 또 읽었고, 마침내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 논문을 통해 위대한 감성과 열정, 계몽, 그리고 자신감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방에 혼자 앉아서 군중들에게 연설하듯이 외쳤습니다. “순교한 애국자들이여,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해방을 위해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완벽하게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세포조직 토론에서 주로 이야기를 듣기만 했습니다. 저는 발표자들의 논리를 분명히 이해할 수 없었고, 누가 옮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논문을 읽고 난 후부터, 저는 논쟁에 뛰어들었고 열정적으로 토론에 참여했습니다. 비록 제 프랑스어 실력이 부족하여 모든 생각을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저는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공격하는 주장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저의 유일한 논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식민주의를 규탄하지 않는다면, 만일 당신이 식민지 인민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도대체 당신이 하고자 하는 혁명이란 어떤 것입니까?’

제가 소속되어 있는 세포조직 모임에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다른 당 세포조직 모임에도 참여하여 저의 입장을 변호했습니다. 여기서 마르셀 카섕, 베이앙 쿠튀리에, 몽무소를 비롯한 여러 동지들 덕분에 저의 지식이 확장되었다는 점을 꼭 언급해야겠습니다. 결국 저는 투르 회의에서 그들과 함께 제3인터내셔널 가입 안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제가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신뢰하게 되었던 까닭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애국심 때문이었습니다. 투쟁 중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학습하고 실질적인 활동에도 참여하면서, 저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만이 전 세계의 억압받는 민족들과 인민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에는 마법의 ‘브로케이트 가방’에 관한 전설이 있습니다. 큰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이 가방을 열면 해결책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레닌주의는 우리 베트남혁명가들과 인민들에게 신비한 ‘브로케이드 가방’이자 나침반이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궁극적인 승리를 향한 길을 밝히는 태양과 같습니다.

1960년 4월
호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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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오! 베트남] 위안부ㆍ세월호 비하… 극소수 댓글을 ‘베트남 여론’으로 둔갑

<예전에 한국과 베트남 사이가 악화될 때, 이런식의 유언비어 내지는 과장 및 왜곡보도가 유튜브나 인터넷 그리고 나무위키 같은 사이트들을 통해 이어졌습니다. 알고보니 이것도 왜곡이었습니다.>
베트남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유튜버들은 최근 “베트남인들이 일본군 위안부를 조롱하고 세월호 참사를 계속 비하하고 있다”는 주장을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의 기원을 추적해 보면 출처가 모호하거나 극소수 네티즌의 의견을 마치 전체 베트남인들이 동조하고 있는 것처럼 확대 해석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베트남인들이 위안부를 조롱했다는 근거는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한 베트남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진행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대화 캡처 화면이다. 대화의 맥락이 잘려 있어 발언 취지는 추론하기 어려우며 해당 장면 만으론 베트남 사회에 한국인 위안부를 얕잡아 보는 현상이 실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나마 출처가 제시된 세월호 참사 비하 주장도 마찬가지다. 한국 유튜버의 영상에 어떤 베트남인이 “나는 세월호 때 많은 한국인이 죽어서 행복하다”는 댓글을 달았다는 것인데, 이 역시 베트남 전체 여론이라 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해당 댓글 외 다른 베트남인이 세월호 참사를 폄하했다는 추가 사례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한국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자체 조사 결과, 베트남 여론이 형성되는 웨이보와 페이스북, 주요 인터넷 커뮤니티 어디에도 위안부와 세월호에 대한 언급이나 논란은 없었다”며 “베트남 정부도 ‘위안부와 세월호가 뭔데 그러느냐’고 되물을 정도로 황당하다는 반응”이라고 말했다.

한국어를 전공한 하노이의 대학생 H씨 역시 “3월 반미 논란 때는 일부 과격한 네티즌이 ‘한국인은 너무 거만하다’는 취지의 글을 SNS에 자주 올리긴 했다”면서도 “웬만한 한국 관련 이슈를 다 아는 나조차 위안부와 세월호 비하 이슈는 처음 듣는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사례와 달리 유튜버들이 언급하는 태극기 모욕은 실제 발생한 ‘외교적 논란’이다. 올 2월말 한 베트남 네티즌이 ‘사우스 코로나’라는 제목으로 태극 문양을 코로나19 바이러스 형태로 변형시킨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고, 이후 각종 SNS로 확산됐다. 현재 해당 게시물은 삭제된 상태다. 베트남 당국은 계정 강제 폐쇄 여부에 대해선 즉답을 피했지만, “베트남이 똑같은 상황을 당했어도 매우 화가 났을 것”이라며 “일부 국민의 행동이었지만 상당히 부적절했다”고 밝혔다.

하노이=정재호 특파원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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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패한 프랑스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나게 됐다. 프랑스가 물러나자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 분단되었다. 북베트남에는 프랑스에 맞서 독립을 쟁취했던 호치민이 이끄는 공산당 정부가, 남쪽에는 1940년대 후반 프랑스가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선포했던 바오다이가 이끄는 베트남국이 유지됐다. 이 남북분단에는 결정적인 한 가지의 전제 조건이 붙었었다. 그것이 바로 2년 이내에 남북전역에서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부터 반공주의에 빠져 베트남 문제에 개입을 해왔던 미국은 당연히 이 조항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고, 당연히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군사기지를 만들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이 내세운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자 부패한 독재자인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었다.

 

응오딘지엠은 식민지 시절 고위 공무원직을 보냈던, 전형적인 반공주의 성향의 가톨릭 신자였다. 반공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던 그는 프랑스가 식민 지배를 하기 위해 일으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남을 떠나 유럽과 미국에서 살았던 인물로, 출신 성분이나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대한민국의 반공 독재자 이승만을 상당히 닮은 인물이었다.

 

1950년대 초 미국에 정착했던 디엠은 미국 뉴저지의 가톨릭 신학교에서 몇 달을 보낸 뒤 자신의 동포를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야 한다.”는 메시아적인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 응오딘지엠은 베트남으로 귀국했는데, 당시 프랑스의 괴뢰 황제였던 바오다이는 제네바 협정이 타결되기 2주일 전 응오딘지엠을 베트남국의 수상으로 임명했다.

 

19548월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기본 정책 구상은 바오다이를 통한 해결응오딘지엠에 대한 해결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물론 1954년 베트남에 귀국했던 응오딘지엠의 권력은 미약했다. 일단 군권은 디엠에 반대하는 친프랑스 집단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갱 집단인 빈쑤옌(Binh Xuyen)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친프랑스적인 호아하오(Hoa Hao)와 까오다이(Cao Dai) 교파들도 그에 대항하는 조직이었다. 비록 아직까진 프랑스가 만들어낸 토착 지배세력의 권력이 강했지만, 미국이 선택한 것은 토착 지배세력의 중심이 아닌 반공 민족주의적 관료계급인 응오딘지엠이었다. 그는 CIA 요원 에드워드 랜스데일의 지원을 받으며 즉각 반대파를 분쇄하고 베트민에 가담했던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으며, 베트민이 총선을 실시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위원회 사무실들을 강제로 폐쇄했다.

 

19554월 응오딘지엠의 강력한 지지자인 미국의 맨스필드(Mansfield)는 상원 연설에서 바오다이를 응오딘지엠으로 대체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미국의 계획대로 디엠은 바오다이를 중심으로 한 군주제를 그대로 유지할지, 혹은 디엠의 새로운 정부를 인정할지를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551023일 남베트남 전역에서 국민투표가 실행됐다. 결과는 득표율 98.2%의 지지를 얻은 응오딘지엠의 승리였다. 개표결과 찬성이 5721,735, 반대가 63,017표 그리고 무효표가 44,105표였다. 물론 이 투표 자체는 아이러니 하게도 부정선거였다.

 

이 시기 응오딘지엠을 후원하는 미국의 엘리트 계층은 꽤나 많았다. 그들은 베트남의 미국 친구들(American Friends of Vietnam)’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열렬한 디엠 지지파로는 프랜시스 스펠먼 추기경, 조지프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상원 의원 마이크 맨스필드, 휴버트 험프리, F.케네디 등이 있었다. 이들은 강경 보수 성향으로 반공주의자인 지엠이 입맛에 맞았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민족주의자인 그가 대세를 뒤집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와 더불어 응오딘지엠은 1954년부터 이른바 반부패운동을 전개했었다. 물론 이 반부패운동은 말이 좋아 반부패운동이지, 그 중심에는 관료들을 통제함으로써 디엠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한다는 목표가 자리잡고 있었다. 1955년 말 응오딘지엠은 이른바 4대 악덕운동으로 도박, 알콜, 마약중동 그리고 성매매의 추방을 추진했었는데, 이것은 대중들에게 정권의 정당성을 선전할 기회로 작용했으며, 이것 또한 정치 경제적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본인의 반대세력인 빈쑤옌의 경제적 기반을 파괴하는 데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친프랑스 빈쑤옌이 몰락하면서 이 4대운동 또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쉽게 말해 응오딘지엠은 이 프로그램을 본인의 권력 강화차원에서 이용한 것이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또한 응오딘지엠이 까오다이나 호아하오 그리고 빈쑤옌 같은 친프랑스적 토착 조직에 대항하였던 것 또한 프랑스 제국주의에 부역했던 세력이나 인사를 청산하고 숙청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었다. 물론 형식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프랑스가 물러나면서 남은 토착 지배층의 기반이 응오딘지엠의 숙청으로 사라지기도 했지만, 흡수되어 남베트남 정부의 지지기반을 형성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권력을 장악한 이후 구세력 척결 후 등용한 인물들은 월남한 가톨릭 세력과 친프랑스 매판세력 그리고 지주세력이었다. 또한 남베트남의 군부는 죄다 프랑스군 사관학교를 나온 매국노들이었다. 그래서 민주화운동가이자 베트남 전쟁을 연구했던 리영희 교수는 남베트남 군대에는 육군 중령 1명 외에는 죄다 친불친미 매국노들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19551023일 투표를 통해 옹오딘지엠은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되었고, 이른바 베트남 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후 응오딘지엠 정권은 제네바 협정에서 약속했던 총선거를 일방적으로 파기했고, 식민지 시절 일본 제국주의와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항불항일조직인 베트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이들을 공산주의자들로 몰아 구금하고 처형하는 반인륜적 범죄를 미국의 지원 아래 저질렀다. 따라서 응오딘지엠은 미제국주의자들의 하수인이었으며, 반동적 지배계급을 대변하였으며 당연히 혁명으로 타도되어야할 반동이었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이 1964년에 썼던 글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마치겠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뻔뻔스럽게도 제네바 협정을 파기하고 남베트남을 그들의 새로운 식민지와 군사 기지로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를 영원히 양분하는 음모를 꾸몄다. 정전협정 조인이래, 남쪽에서는 침략자에 의해 야기된 전쟁이 결코 그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미국의 허수아비, 응오딘지엠 정부는 파시스트적 독재 법률로 테러와 집단학살 정책을 추구해 왔다. 그 지도자들은 수백 번의 소탕작전을 감행하고, 말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으며, 적에 대항하고, 독립, 민주주의, 국가 통일과 생존권을 주장하는 정치적 투쟁에 가담한 비무장 동포들을 체포하고 죽였다. 지난 몇 년간, 미제국주의자들은 군 인사와 전투부대를 유입시키면서 남베트남에 공공연한 간섭을 자행했다. 그들은 수만 톤의 무기를 들여왔고, 수십억 달러를 지출했다. 그들은 여러 나라의 해방 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남베트남을 그들이 특별한 전쟁이라 부르는 이론을 시험하기 위한 전장으로 사용하면서 선언되지 않은 전쟁에 불을 지폈다.”

 

참고자료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을유문화사, 2002

 

호치민 평전, 윌리엄J.듀이커, 정영목(), 푸른숲, 2003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윤충로, 선인, 2005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 들녘, 2015

 

디엔비엔푸, 보 응우옌 잡, 강범두(), 길찾기,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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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은 남한 동해안 위쪽의 항구로 38도선에서 약 50마일(8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큰 시멘트 회사 오노다는 한국에 많은 공장을 세웠는데, 삼척에 있는 것을 제외하면 전부 북한에 있었다. 다른 곳의 공장과 마찬가지로 815일 공장노동자들로 구성된 자치위원회가 즉각 공장을 접수했으며, 그 결과 모든 것을 한국인들이 스스로 관리할 수 있었다. 이들은 오병호의 지도로 몇 달, 몇 년 동안 공장을 관리했다.

 

오병호는 1943년 공업학교를 졸업한 뒤 공장에 들어왔고, 전쟁 중에 일본인 기술자 6명이 군대로 징집되면서 빠르게 승진했다. 이는 식민지 시기 막바지에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오병호는 공장의 기술과장 구사가와 신타로 밑에서 실무를 익혔다. 신타로는 식민지 이주민 2세대로 1928년 북한의 승호리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진주의 지주 가문 장남이던 오병호는 1945년에 겨우 25살이었다.

 

공장의 숙련노동자였던 우진홍은 1920년 삼척에서 태어났고 나중에 서울의 선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우연히도 나(브루스 커밍스)는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그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43년 우진홍은 기술과의 숙련노동자였다. 일본인 기술자들이 공장에 흔히 길게는 3년까지도 머물렀던 북한과 달리 삼척 공장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으며, 따라서 해방과 더불어 즉시 한국인들이 기술직과 관리직으로 이동했다.

 

915일경 미군정 민정팀의 채프먼이라는 대위가 공장을 방문했고, 이제부터 공장의 모든 중요한 결정은 먼저 자신과 의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노다 공장의 주거 시설을 자신과 의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노다 공장의 주거 시설을 자기 팀의 본부로 썼다. 얼마 후 오병호는 서울로 가서 미군정에 공장 가동을 위한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상공부 공업국장 유한상으로부터 약간의 자금을 얻었고, 공장은 101일에 한국인 기술자와 공장노동자로 완전히 재가동되었다. 다음달 좌파-자유주의적인 전평(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에서 온 조직자들이 오노다에 지회를 설립했다. 우진홍에 따르면 노동자의 70%좌익이었는데, 이는 아마도 그들이 노동조합을 원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194512월 미군정은 명령 제33호를 발포하여 모든 공장의 자치위원회를 금지했다. 명령은 또한 이전에 일본인이 소유했던 모든 공공재산과 사유재산, 즉 큰 공장을 전부 포함하여 약 3000개의 재산이 군정에 귀속된다고 선언했다. 당시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서울 사람들이 공장 관리인을 선언했다. 당시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서울 사람들이 공장 관리인을 임명했다. 오노다의 관리자로 임명된 사람은 유한상의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부재 관리인으로서 1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고, 서울에서 임명한 다음번 관리자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누군가의 친구이자 부재 관리인이었다.

 

1947년 마침내 미군정은 좌익분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미군정이 전평을 불법 단체로 규정한 지 이미 1년이 넘었지만, 전평은 자치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번창했다. 공장위원회의 지도자 전부를 포함하여 이른바 좌익분자와 빨갱이 30명이 체포되었다. 우진홍의 기억에 따르면 몇 년에 걸쳐 노동자 정치는 서서히 역전되었다. 1950년대에는 70%가 이른바 우익이었다. 이들도 노동조합은 갖지 못했다.

 

19506월 재래식 전쟁이 발발했을 때, 자치위원회 출신자들은 대부분 공장노동자로 복귀했다. 일부 관리자와 기술자는 부산방어선으로 피신했으나 전부 다 달아나지는 않았다. 1950년 가을부터 19524월까지 남한군과 북한군은 서로 여러 차례 공장을 빼앗았고, 결국 석 달 연속으로 공장을 가동했던 북한군이 완전히 떠난 뒤로는 남쪽 사람들이 공장을 확보하여 보유했다.

 

1957년 마침내 이승만의 친구들은 서울에서 지명한 다섯 번째 부재 관리인 강직순에게 공장을 매각했다. 공장이 전쟁으로 파괴되지는 않았지만(자재 일부를 도둑맞았고 주 크레인이 파괴되었지만 나머지는 멀쩡했다), 미국은 국제연합 구호기금으로 공장에 632000달러를 배정했다. 매각은 그 후 4년 만의 일이었다. 구사가와 신타로 밑에서 기술을 배웠으며 남한 시멘트 기술자의 최고봉이었던 오병호는 1960년대 좌익이자 빨갱이라는 오명을 썼다. 이른바 좌익이었던 우진홍은 삼척에서 시멘트 관련 사업체를 소유했다.

 

이 이야기에서 끌어낼 논점은 많다. 20세기 중반 한국사를 풍부하게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곳은 단지 하나의 시멘트 공장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이 이야기는 필연의 정치, 즉 결정되던 그날(즉 채프먼 대위가 도착한 날)에는 작아 보였지만 나중에는 매우 크게 나타나는 정치적 선택에 관한 것이다.

 

채프먼 대위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잘하고 있군요, 미스터 오. 계속 잘 하도록 하시오. 나도 조합원이요.” 이러한 처리 과정에 중립이나 공평, 불간섭을 요구하는 정중한 항변, 자신들의 점령정부에서 순진한 방관자로 남는 미국인 따위는 없었다. 채프먼 대위와 서울에 있는 그의 정치적 상관들이 무엇을 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어쨌든 그들은 선택을 했다. 그리고 결국 미국인들이 잊힌 전쟁으로 알고 있는 그 내전을 초래한 것은 바로 오래전 따뜻한 9월의 그날들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미국인과 러시아인, 한국인이 했던 선택이었다.

 

출처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17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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