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역사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인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최초로 군사적 패배를 경험한 전쟁이다총인원 280만의 참전했고, 5 8천 명이 전사했으며핵무기를 제외한 모든 군사적 수단을 미국은 이 전쟁에 동원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 전쟁에서 패배했다그와는 별개로 베트남 전쟁은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전쟁이기도 하다. 1776년 건국 이래 경험해보지 못한 대규모 반전운동이 미국 내에서 일어났고심지어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마저 자신들이 받은 훈장을 백악관 건물에 던지는 일도 일어났다이처럼 베트남 전쟁은 전쟁의 주체인 미국에서도 대규모의 반발에 휩싸이게 됐다.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1960년대 한국의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 전쟁을 공산 월맹의 침략으로부터 자유월남을 구하기 위한 전쟁으로 규정했었다그러나 이는 박정희 정부가 제국주의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내세운 주장이었을 뿐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베트남 전쟁의 원인은 1971년 이른바 펜타곤 페이퍼가 유출되면서 그 진상이 드러났다이것은 결국 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의 사악한 음모와 계략에서 시작된 전쟁이었다즉 당시 미국이 적으로 내세운 북베트남의 호치민과 공산당 그리고 남베트남의 베트콩 전사들은 과거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것처럼자신들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따라서 오늘은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어떠한 방식으로 베트남을 침략했는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1. 미국과 디엠정권의 제네바 협정 파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됐다그러나 프랑스의 식민지 전쟁에 물자를 지원하던 미국은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을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분단시켰다물론 여기에는 “2년 이내에 남북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다이에 따라 북베트남에는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호치민 정권이 들어섰고남베트남에는 과거 프랑스가 지원한 바오다이 정권이 유지됐다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남베트남을 자신들의 군사기지로 만들기 위해 선택한 카드가 있었다그것이 바로 반공주의적 민족주의자 응오딘지엠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베트남의 이승만인 응오딘지엠은 제네바 회담 시기 바오다이가 총리로 임명한 인물로 공산당에 대한 혐오감이 넘치는 인물이었다우선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바오다이 황제를 부정선거로 축출하고, 1955년 남베트남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이와 더불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남베트남에서 항불투쟁을 했던 전직 베트민에 대한 탄압을 가속화 했으며미국 아이젠 하워 대통령과 더불어 총선거를 파기해 버렸다.

 

미국의 아이젠하워와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이 총선거를 파기해버린 이유는 간단했다민중의 80%가 호치민과 공산당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 사실을 이 두명의 반공주의자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총선을 파기함과 동시에 응오딘지엠은 전직 베트민 투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구금하고 처형하는 천인공노할 만행들을 남베트남 곳곳에서 저질렀다그러면서 남베트남의 내각을 민주적인 투표로 결정된 인물들이 아닌 가톨릭 신자들과 디엠의 일가친척들로 구성했다응오딘지엠은 동생 응오딘 누를 수석보좌관으로응오딘 누의 부인 마담 누를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퍼스트 레이디로마담 누의 아버지는 미국 대사로어머니는 유엔 옵서버로자기의 친형은 후에의 추기경으로다른 2명의 형제들은 지방의 권력자로 임명하였으며사촌들과 일가친척들에게는 내각의 주요 직책과 지방 관공서의 요직을 내주었다.

 

2.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창설과 케네디 정부의 고문단 지원

 

제네바 협정을 파기하고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원한 미국은 남베트남을 자신들의 반공기지로 만들고자 노력했다미국의 남베트남 정권 지원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와중에 진행됐고응오딘지엠 정권 하에서도 지속됐다이에 따라 남베트남에는 소수의 미군사고문단이 활동했다그러나 응오딘지엠 정권은 막장에 가까운 통치를 통해 이미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특히 가톨릭 우대 정책과 불교도들에 대한 탄압 그리고 전직 베트민 인사들에 대한 구금을 가속화했다그 결과 분노한 민중은 1960년에 군사조직을 창설했는데 그것이 바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이다.

 

초기의 베트콩은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활동했었다. 1960년에 창설된 베트콩은 과거 프랑스에 협력한 반역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남베트남군 보다 훨씬 높은 전투력을 보였다거기다 남베트남군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인하여 미고문단이 지원한 무기들이 베트콩측에게 넘어갔다베트콩의 활동이 급증함에 따라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군사고문단 지원도 급증했는데특히 존 F. 케네디 정부가 등장하면서 확장됐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부터 남베트남에 주둔한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증강했다고문단으로 파견된 병력 중에는 이른바 그린베레로 불리는 대게릴라전 특수부대도 있었다. <베트남 미국의 홀로코스트>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마틴 쉰의 표현을 빌리자면프랑스 베레모에서 미국의 그린베레로 바뀐 셈이다이들은 남베트남군을 지원함과 동시에 남베트남 지역에 있는 소수민족들을 민병대로 훈련시켰다또한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도 활동했다.

 

또한 케네디는 네이팜 폭탄 사용과 인체에 치명적인 고엽제 살포를 허용한 장본인이었다이에 따라 베트콩이 있을 것이라 추정되는 남베트남의 시골에는 네이팜 폭탄과 고엽제가 살포됐다그리고 미군의 최신식 전투 헬기와 장갑차량 등의 기계화된 전쟁무기들이 남베트남군에게 지원됐다즉 미국은 베트남에서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벌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이 시점부터 동원했다더 나아가 케네디의 최측근인 로버트 맥나마라는 응오딘지엠의 동생 응오딘누를 도와 전략촌 계획을 세웠고이런 전략촌 건설은 남베트남 농민들의 반발을 제대로 샀다그 결과 대다수의 전략촌은 1963년에 베트콩에 의해 파괴됐다.

 

3. 응오딘지엠 암살과 통킹만 사건

 

이런 지원에도 불구하고 베트콩들은 남베트남군과의 전투에서 항상 우수한 성과를 올렸고남베트남군은 부정부패와 무능력 그 자체였다그리고 케네디 정부가 지원한 응오딘지엠 정권은 독재 정치와 부정부패로 인하여 민중들의 반발을 제대로 사고 있었다특히 1963년 6월 남베트남의 한 승려가 수도 사이공 거리에서 분신자살을 하자민중들의 반응오딘지엠 집회도 더 심해졌다응오딘지엠 정권은 반체제 시위를 계엄령으로 대응했고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이 구금되고 투옥됐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폭력적이고 부패한 체제에 회의감을 느낀 케네디는 CIA를 동원하여 남베트남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응오딘지엠을 제거해버린다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지만이 정권 또한 쿠데타에 시달렸고정권 전복을 시도한 쿠데타는 1965년까지 지속됐다즉 이렇게 되면 남베트남은 민중 봉기로 무너질 상황이었다이런 혼란속에서도 미국의 지원은 지속되어 1964년에는 남베트남 주둔 미군사고문단의 숫자가 3만 명을 돌파했다.

 

혼란스러운 남베트남 상황에 우려를 느낀 미국의 린든 B. 존슨 정부는 맥스웰 테일러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그리고 로버트 맥나마라 등과 논의하여베트남 침략전쟁을 시작할 계획을 비밀리에 준비했다그것이 바로 통킹만 사건이다이들의 계획에 따라 1964년 7월 31일 남베트남 공격 보트들이 다낭을 떠나 북베트남 영해에 진입하여북베트남의 섬 혼메(Hon Me)와 혼니우(Hon Nieu)에 상륙했다또 한 이들은 그 전에 라오스에서 비밀리에 공중 작전을 벌였다.

 

작전에 따라 북베트남 영해에 잠입한 미국 구축함과 해군들은 1964년 8월 2일 통킹만에서 1차 교전을 벌였고, 2일 뒤인 8월 4일에는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통킹만 공격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그 발표에 따르면 2차 공격이 있었다고 했지만이는 미국 측의 자작극이었다즉 여기서 베트남 전쟁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미국 측의 새빨간 거짓말이 주지의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러한 새빨간 거짓말을 한 린든 B. 존슨은 뻔뻔스럽게도 다음 날인 8월 5일 미공군을 출격시켜 북베트남 어뢰정 기지석유 저장소 등 4개소를 공격하고 어뢰정 및 그 밖의 함정 25척을 격침 또는 격파했다이것은 아무런 선전포고도 없이 행해진 미국 측의 침략행위였다이른바 북폭을 감행한 미항공기 중 하나가 격추됐고탈출한 조종사는 북베트남군의 포로로 붙잡혔다이러한 기만과 위선속에서 벌어진 사건이 바로 1964년 통킹만 사건이었던 것이다.

 

4. 북폭과 미지상군 파병

 

통킹만 사건 이후 남베트남 주둔 미군사고문단의 숫자 또한 계속 증가했고이에 따른 베트콩 측의 대응도 격해졌다. 1964년 12월 사이공 근처에 있던 비엔호아 공군기지가 공격받아 수십대의 항공기와 헬기가 파괴되는 사건과그 다음 해인 1965년 2월 중부고원지대 플레이쿠에 있는 미군 특수부대 그린베레 기지가 베트콩의 공격을 받아 미군 8명이 전사하고 100명이 부상당하자 미국은 이에 대한 엄청난 보복을 준비했다그것이 바로 롤링썬더 작전이었다.

 

롤링썬더 작전은 1965년 3월 2일에 게시됐다미군 항공모함과 비행장 그 외의 기지에서 이륙한 항공기와 폭격기들이 북베트남 전역을 말 그대로 달의 표면으로 만들어 놓을 정도로 폭격을 감행했다이러한 폭격은 당연히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았으며이에 따른 민간인 사망자도 급증했다베트남 전쟁에서 최소 200만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민간인 사망자 대다수는 이런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서 나온 것이었다.

 

미국의 린든 존슨 정부는 북폭 게시와 더불어 지상군 파병을 감행했다베트남의 첫 번째 파병 부대로는 미 해병대가 선택되었다대략 3,000명 정도의 미 해병대가 남베트남의 항구도시이자 휴양지인 다낭(Da Nang)에 상륙하는 걸로 결정됐다. 1965년 3월 8일 미국 정부는 극적인 효과를 보이기 위해 미 해병대 대원들로 하여금 상륙정에 태워 해안가에 상륙하도록 했다이렇게 하여 1858년 침략자 프랑스 군대가 다낭에 상륙한지 100년 만에 또 다른 외세의 지상병력이 베트남을 침략했다.

 

1달 뒤인 1965년 4월 존슨은 병력 4만을 추가로 파병했고남베트남 주둔 미군은 75,000명으로 증가했다이렇게 해서 남베트남 주둔 미군의 숫자는 1965년 말에 20만으로 증가했으며그 이후에는 더 증가하여최대 병력 54만 9,000명까지 늘어나게 된다미국의 베트남 침략 전쟁의 발판은 이런 식으로 마련됐고또 전개됐다.

 

5. 결론따라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침략전쟁이다.

 

지금까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시점부터 1965년 린든 B. 존슨 정부가 북폭 게시와 더불어 대규모의 지상병력 파병까지를 알아보았다베트남 전쟁은 이렇게 미제국주의자들의 기만과 위선속에서 계획되고실행된 전쟁이었다미제국주의자들은 민주주의라는 위선적이고 부르주아적인 단어를 통해 남베트남 친불 매국노 정권에 대한 지원을 합리화 했다또 미제국주의자들은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우던 호치민과 민족해방세력들을 그저 빨갱이로 몰이하는 철면피스러운 행위를 했다미제국주의자들은 남베트남 민족반역자 정권을 지원하며북폭이라는 천인공노할 대량의 민간인 학살을 게시했다그리고 1858년 프랑스 제국주의 군대가 상륙했듯이다낭에 미제국주의 상륙부대의 주력인 미해병대를 상륙시키는 이미지 매이킹도 시도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보았을 때베트남 전쟁은 미제국주의자들이 거짓말과 위선 그리고 기만속에서 일으킨 침략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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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전쟁 - 무릎 꿇지 않는 베트남-중국
오정환 지음 / 종문화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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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들어 한국과의 문화적 교류가 많아진 베트남은 상당히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역사는 한국의 고조선과 같은 반랑(Văn Lang)부터 따지면, 대략 4천 년의 역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만 반랑(Văn Lang)의 경우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단군신화처럼 연대기를 입증할 수 있는 사료는 빈약하다 할 수 있다. 그것과는 별개로 베트남은 유례를 찾기 힘든 저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2천년 동안 중국의 침략과 지배에 맞서 저항해온 역사가 바로 베트남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을 방문했던 윌프레드 버체트 기자는 팜 반 동(Phạm Văn Đồng) 수상과 인터뷰를 했던 적이 있다. 버체트는 팜 반 동에게 당신들 마음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이 당신들을 이렇게 끈질기게 만들지요?”라고 질문을 하자, 팜 반 동 수상의 대답은 명확했다.

 

궁금하면 우리 역사를 한번 보시오. 외국 침략자들에 대한 투쟁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적들은 항상 우리보다 강한 상대였습니다. 자연과의 투쟁도 많았지만 피할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리에서 싸워서 이겨야 했습니다. 과거 2,000년에 걸쳐 이런 시련을 겪은 우리 인민들은 어지간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 신경 체계를 가지게 되었지요. 우리는 외세의 위협에 당황해 본 적이 없습니다. 새로운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 인민들은 , 또 시작이군!’이라고 말할 정도로 적응 훈련이 잘되어 있습니다.”

 

북베트남의 팜 반 동 수상이 대답과 같이, 베트남의 역사는 2천년에 걸친 저항의 역사이기도 하다. 중국에 맞선 베트남의 투쟁은 쯩 자매의 반란부터 시작이 된다. 쯩 자매는 한나라의 지배에 맞서 병사들을 이끌고 게릴라전을 전개했었고, 한무제가 보낸 토벌군에 맞서 결사항전 하다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로 생을 마감했었다. 베트남 저항의 역사 시작점인 쯩 자매는 베트남인들의 마음속에 외세에 대한 항거와 독립 의식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물론 중국의 베트남 지역 지배는 오래됐고, 그 과정에서 지배에 대한 저항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서기 900년대 들어서 응오꾸엔이 이끄는 군대는 바익당 강 전투에서 중국의 대군을 무찌르고 독립국가를 세웠다. 또한 300년 뒤에도 그 바익당 강에서 몽고군의 대함대가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격파됐다. 몽고의 베트남 침략은 12차 그리고 3차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1차 칩입때는 게릴라전으로 몽고군의 지상병력을 고전하게 만들었다.

 

200년 뒤에는 명나라의 지배를 받았을 때, 레러이(Lê Lợi)가 기나긴 대명항쟁 끝에 명나라의 지배로부터 독립국가를 세웠고, 20세기 미국에 맞선 베트남의 게릴라 전술의 기초가 여기서 탄생했다. 300년 뒤에는 청나라의 대군이 침략했으나, 떠이선(Tây Sơn) 반란의 지도자 응우옌후에(Nguyễn Huệ)이 지휘아래 청나라 침략군을 무찔렀다. 그리고 그로부터 200년뒤인 1979년 이른바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인 중월전쟁이 일어났는데, 베트남은 중국의 침공에 맞서 보조병력만으로 막아내는 저력을 보여주기 까지 했었다. 이러한 역사를 생각해 보았을 때, 베트남의 역사는 중국에 맞선 저항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트남 역사에서 중국에 맞선 저항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지배 과정에서 중국 문화가 베트남에도 자리를 잡았고, 관습이나 학문 제도, 도량형 등 중국의 영향을 역사적으로 지대하게 받았었다. 중국의 지배와 간섭 그리고 침략 속에서 남부에 있던 강대국 참파와 라오스를 대상으로 정복전쟁을 벌였으며, 참파의 경우 16세기쯤에 베트남에게 사실상 정복당했다. 그 외에도 현재 캄보디아의 크메르 제국과 태국하고도 전쟁을 적잖게 치렀으며, 프랑스 식민지 시기 코친차이나라고 불렸던 베트남 남부의 경우 17세기에 베트남 영토로 편입됐다. 물론 이 영토의 경우 베트남 전쟁 이후 베트남과 캄보디아간의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이번에 읽은 오정환 전 MBC 본부장의 저서 천년전쟁은 말 그대로 중국의 침략에 맞선 베트남 저항의 역사를 다뤘다. 저자가 서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은 베트남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인 프랑스와 미국과의 전쟁은 하나도 다루지 않고 있으며, 국내에서 깊이 다루지 않는 역사인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중월전쟁을 다루고 있다. 다만 좀 아쉬운 점은 중월전쟁 관련 부분의 내용은 다른 파트에 비해 그다지 자세하지 않고, 상당히 짧은 분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베트남의 대중항쟁 2천년 사를 알기에는 상당히 유용한 서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어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베트남 역사에 관심이 많지만, 사실 베트남의 대중항쟁 역사에 대해 그리 깊이 알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이 책을 읽음으로써 베트남 역사에서 중요한 대중항쟁 역사를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중국 침략에 맞선 베트남의 역사가 참으로 놀라웠다. 무엇보다 세계 최강이라고 불리던 몽고군의 침략을 3차례나 받고도 버텨낸 것을 보면,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거기다 베트남 원정에 실패했던 몽골은 이 굴욕을 못 이겨 4차 원정까지 준비했었다. 물론 1294년 쿠빌라이칸이 사망하면서 시도되지 않았다. 이런 저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현재 베트남인들이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 현대사에서는 중월전쟁에서 중국까지 이겼으니, 자부심이 한층 더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베트남의 대중항쟁 역사를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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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6 0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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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4 1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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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4 1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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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6 1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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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4 1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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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4 1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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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빅 쇼트(The Big Short)’로 유명한 감독 아담 맥케이(Adam McKay) 2018년 딕 체니(Dick Cheney)의 생애를 다룬 영화 바이스(Vice)’를 제작했다영화 바이스는 2001년 오사마 빈라덴의 9.11 테러부터 시작한다이슬람 극단주의자의 테러 공격을 받은 미국은 전역에 비상이 걸리고백악관의 지도부들 또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인다그러나 영화상에서 아주 침착하게이 사건을 대응하며 즐기고 있는 한 인물이 있었는데그것이 바로 영화의 주인공 딕 체니였다영화에 따르면 많은 미국인들이 이 딕 체니라는 인물에 대해 잘 모르고 있고그가 어떠한 짓을 저질렀는지 자세히 모른다고 한다그렇다면 딕 체니는 어떠한 인생을 살아온 인물일까?

 

딕 체니는 1941 1월 30일 미국 네브래스카 주에서 태어났다그가 태어날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전개되는 와중이었고그의 부모님은 열렬한 프랭클린 루스벨트(FDR)의 지지자였다어린 시절 그는 성적이 우수했으며정통적인 미국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기에미국에 대한 애국심과 자부심이 투철했다그는 1950년대 미국 와이오밍주 캐스퍼에서 자랐는데고등학교 시절 앞으로 아내가 될 여자 린 빈센트 즉 린 체니를 만났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성적이 좋았기에 1960년대 초 그 둘은 예일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그러나 대학에 진학하자 체니는 아주 방탕한 생활에 찌들어음주운전과 패싸움 등등을 하다가 학교에서 퇴학당하고결국 일용직 노동자로 노가다를 뛰게 되었다. 1962년 당시 체니는 아내 린 체니와 사실혼 관계였는데부인 린 체니가 그를 아주 강력학세 갱생시켰다린 체니의 도움으로 방탕하고 술에 찌들었던 생활에서 벗어난 딕 체니는 와이오밍 대학교에 입학했고, 1964년 미국 국회의사당을 뽑는 보좌관 시험에 합격했다여기서 만난인물이 이후에 이라크 전쟁을 같이 계획하게 되는 도널드 럼즈펠드(Donald Rumsfeld).

 

1960년대는 베트남 전쟁이 격해지면서적잖은 미국 젊은이들이 징병으로 동남아시아 밀림으로 끌려갔다그러나 딕 체니는 대학 진학생에 이미 1965년 정식 결혼까지 한 상태였기에징집을 보류 받을 수 있었고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수 있었다그러나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반전운동이나 기존 보수주의에 대항한 히피(Hippie)에 대해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이들을 비난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이후 위스콘신 대학교에 들어가 박사과정을 밟게 된 체니는 도널드 럼즈펠드 밑에 있으며닉슨 정부 측근들과 인맥을 맺기 시작했다또한 이 과정에서 1970년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공화당 측에 있으면서 활동한 딕 체니는 1976년 카터가 당선된 이후 잠시나마 정치인생에서 정체기를 맞게 되는데, 1978년 와이오밍주 선거에 도전했다다만 젊은 나이에 심근경색이 와서 병원 신세를 졌고연설력도 부족하여 밀리는 상황이었는데그의 와이프가 선거에 나가 유세를 적극적으로 하면서간신히 당선됐다이렇게 해사 1988년까지 체니는 무려 6선에 성공하였다물론 공화당으로써 보수층 지지자들을 끌어들이는 정책들을 얘기했고실행하고자 했다체니의 꿈은 1980년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다시 꽃을 피게 된다. 1970년대는 베트남 전쟁 종결과 더불어 로 vs 웨이드 사건’, 낙태 문제환경 문제 등이 사회적으로 급부상했다물론 딕 체니는 이른바 신보수주의자로서 이런 것들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1980년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되면서딕 체니의 정치 일생은 다시한번 도약을 한다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하에서 딕 체니는 레이건을 따라 무기 제한법을 막고카터 정부 시기의 친환경 정책들을 폐기 시켰으며로널드 레이건의 중남미 정책을 적극 옹호하고 지지했다당시는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섰는데당연히 딕 체니는 로널드 레이건처럼 잔학하고 무자비한 콘트라 반군을 지지했던 것이다그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 있으면서 1987년연 공화당 하원 회의 의장이 되었고그의 아내 린 체니 또한 국립인문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국방장관을 하기도 했지만, 1992년 공화당의 빌 클린턴이 당선되자 레즈비언인 딸 메리 체니를 위해서 잠시마나 정치에서 물러나 있기도 했었다즉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것이다물론 그는 기업 하나를 운영하기도 했는데석유 대기업인 핼리버튼의 사장이 된 것이다이후 그는 이 핼리버튼 CEO로 있으면서 이라크 전쟁에서 엄청난 부를 얻었다.

 

1990년대 후반 들어 딕 체니를 다시 찾게 된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그가 바로 아들 부시였다아들 부시 또한 딕 체니의 젊은 시절과 상당히 비슷한 막무가내 생활을 했었다아들 부시의 러닝메이트 제의를 수락받은 그는 2000년 조지 부시가 당선됨에 따라 부통령이 되었다. 1991년 걸프전쟁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그는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자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이후 이라크를 침공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이런 과정에서 국제법과 여러 비윤리 비상식적인 행위들을 벌였으며,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당시 딕 체니와 그 일당들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의 명분은 이른바 후세인 정부의 신무기였으나사실 이것은 거짓말이었고 진정한 목적은 미국의 패권 정립과 석유강탈에 있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초기는 미국이 수도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후세인을 체포하면서빠르게 전게 되었으나결국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사실과 거짓말이 드러나면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이라크 전쟁의 책임으로 부시 임기 말기 민주당 하원의원이 탄핵안까지 내놓는 등 엄청나게 비난받으며 역사상 가장 많이 욕먹은 부통령 중 하나로 남게 되었지만탄핵은 부결되었고부시정부가 임기를 마칠 때까지 부통령의 자리에 있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던 딕 체니는 2008년 남오세아티아 전쟁(러시아와 그루지아 사이의 전쟁)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을 일으키자고 주장했었다거기다 2015년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것과 그것이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많은 이들에게 비판받았다사실 딕 체니는 남에게 총을 쏘아놓고도 사과하지 않은 인성을 보유한 인물이었는데그런 인성을 가진 그가 이라크 전쟁에 대해 진실이 드러났음에도 반성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그러나 그가 일으킨 이라크 전쟁으로 60~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학살당했다는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당연히 비판을 받아야 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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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닉슨, 1970년대 초 데탕트 시대를 열었던 그는 베트남 전쟁을 확전했고, 칠레에서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1972년 미국 대통령 최초로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방문하여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가졌던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은 소련의 브레즈네프 총리와도 회담을 가지며 이른바 데탕트 시대를 열어갔다그러나 그의 전임자 린든 B. 존슨(Lindon B. Johnson)이 매듭짓지 못한 동남아시아의 전쟁은 지속되고 있었다물론 그는 전임자와는 다르게 이른바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이라 하여베트남에서 단계적인 철수를 게시했다그러나 그 과정에서 베트콩을 소탕한다는 목적으로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폭격하고 침략하여 베트남 전쟁(Vietnam War)을 확전하고수십만에 달하는 동남아시아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72년 닉슨은 이른바 데탕트(Détente)를 진행했지만그런 한편 북베트남에 대한 역대급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다이것이 바로 라인배커 작전이었다하노이와 하이퐁을 포함하여 북베트남 전역이 미국 B-52 폭격기의 폭탄세례를 받았다물론 이 최신식 기계가 공격한 곳 대부분은 군사시설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들이 대다수였다결국 이러한 폭격은 제2의 게르니카 폭격이라는 국제적인 비난에 시달리게 되었고미국에 대한 이미지가 악화되는 영향을 불러왔다특히나 미국의 침략에 맞서 저항하던 북베트남측은 이에대해 강도 높은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닉슨은 결국 1973년 1월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북베트남과 평화협정을 맺고미군을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280만이 참전하고 최대 54만 9,000명이 주둔했던 미국의 베트남 전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닉슨의 제국주의 정책을 비판하는 프랑스 좌익성향 단체가 만든 포스터)

 

닉슨이 베트남에서 대량의 학살극을 벌이고 있을 시기 남아메리카 국가중 하나인 칠레에선 세계최초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그것은 바로 민주적인 선거 절차를 통해 칠레에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그 정권이 바로 좌파들이 이끄는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였다. 1970년 9월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아옌데는 곧바로 칠레를 변혁시키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실행했다과거 연합과일 회사(United Fruit Company)와 같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착취 기업들에 대한 국유화와 각종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칠레에서 실행됐다미국 기업이 독점하다시피 한 구리광산 또한 국유화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가고 있던 닉슨 정부는 곧바로 아옌데 정부에 대한 정치공작을 게시했다사실 미국은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쿠바에 사회주의 정권을 세웠을 때곧바로 극우파 망명자들을 모아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다여기에 기본적으로 경제제재도 당연히 단행했다마찬가지로 1970년 아옌데가 정권을 잡자 미국은 경제제재부터 단행했다그리고 CIA를 통해 칠레의 극우파들에게 막대한 정치자금과 흑색선전도 게시했다미국의 이러한 제국주의적 행위는 이들이 최소한의 도덕성도 무참히 어기면서 시행됐다칠레의 어린이들이 먹는 분유에 대한 경제제재를 시행하여칠레 아동들을 영양실조에 실리게 만들었으며이를 통해 아옌데 정권을 몰아내려했다.

(살바도르 아옌데, 1970년 선거를 통해 집권한 그는 칠레 민중을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군부 쿠데타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더 나아가 아옌데를 암살하기 위해 온갖 정치공작을 일삼았고칠레의 기득권 세력을 이용하여 사회주의 정권을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키려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옌데 정권은 좌파 포퓰리즘적 정책으로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고민중들은 우익들의 공작에 맞서 자발적으로 공장의 생산을 증가하고생필품의 사재기를 차단하며우익들의 공작에 맞선 집회와 시위를 주도했다즉 미국의 경제제재와 정치공작에도 아옌데 정권의 지지율이 상승한 것이다.

 

이러고 있는 사이 미국은 1973년 1월 베트남에서 철군하면서 베트남 전쟁에서 완벽히 패배했다뿐만 아니라 대니얼 엘스버그의 펜타곤 페이퍼 유출과 워터게이트 사건도 터져서 닉슨 정부는 국내외적으로 비난에 시달렸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었을 당시 우리는 중국을 잃었다.”라는 주장을 하며트루먼 정부를 맹비난했던 그는트루먼 못지않은 혹은 그 이상의 반공주의자였다따라서 그는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킬 계획에 착수했는데그것이 바로 군부 쿠데타였다닉슨 정부는 칠레의 군부 인사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에게 막대한 자금을 풀어쿠데타를 일으켰다그것이 1973년 9월 11일이었다.

(쿠데타군에게 포위당한 아옌데의 대통령궁)

 

닉슨이 주도한 칠레의 쿠데타는 성공적이었다아옌데는 수도 산티아고의 대통령궁에서 AK-47 소총을 들고 저항하다가 자결했다이렇게 해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 정권이 칠레에 등장했다이에 따라 좌파 인사들이 무차별적으로 대규모 학살당했고수십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고문과 감금 그리고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피노체트 정권은 집권 당일에 3,200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며 시작했고그의 집권 기간 동안 최소 3만 5,000에서 6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닉슨 정부는 쿠데타라는 아주 부도덕하고 반인륜적인 방법을 통해 칠레에서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켰다그렇다면 왜 닉슨은 이런 짓까지 하며 칠레의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킨 것일까이것은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자 해석이지만얘기하자면 베트남 전쟁에서의 굴욕적인 패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이미 1959년 미국 아래에 있는 식민지 쿠바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됐고, 1960년대 중남미 국가들에서 좌파 정권이 들어섰다. 1970년 칠레도 마찬가지였다다른 중남미의 좌파정권들은 CIA의 가벼운 정치공작에 제법 손쉽게 전복시킬 수 있었지만칠레는 아니었다즉 칠레가 제2의 쿠바가 될 것이라는 판단이 닉슨에게 있었던 것이다거기다 국내외적으로 비난받고 규탄 받던 베트남 전쟁은 구정 공세를 기점으로 미국의 패배로 이어지고 있었다따라서 이러한 국제적인 맥락 속에서 닉슨은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쿠데타로 없애고우익 독재정권을 세운 것이다.

(쿠데타쿤과 교전 중이었던 아옌데 대통령)

 

이런 점에서 자칭 데탕트를 주도했던 미국의 닉슨 정부는 매우 폭력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수법으로 사회주의 정권을 짓밟았다또한 전임자가 일으킨 베트남 전쟁에서 B-52 폭격기와 같은 최신식 전쟁기계들을 이용하여 무수히 많은 민간인을 대량 학살했다이것이 바로 미국 닉슨 정부가 저지른 또 다른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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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테러리즘이, 그 뿌리 깊은 기원과 경제적·정치적 발생 요인들, 또 생존과 관련된 원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근절되어야 하는, 위험하고 윤리적으로 옹호될 수 없는 현상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국 국민에게 닥친 인간적·정신적 피해, 무고한 수천 명의 시민이 예기치 못하게 죽은 충격이 야기한 분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이익을 보았습니까?

 

그들은 극우세력, 가장 퇴보한 우익세력들입니다. 그들은 세계에서 점점 고조되는 저항을 분쇄하고, 지구상에 아직 남아있는 모든 진보세력을 청산하고 싶에 합니다. 그러한 행동을 조직하거나 부추기는 세력은 그 누구든 간에 커다란 오류, 엄청난 불의 가공할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비극은, 정의의 이름으로, 특이하고 기이한 이름의 무한한 정의(Infinite Justice)라는 작전으로, 그만큼 무고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게 될 전쟁의 빌미로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며칠 사이 우리는, 그러한 전쟁을 위한 전제, 구상, 진정한 목표, 정신, 조건들이 황급히 만들어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아무도 이것이, 단지 기회만 기다리면서 예전부터 구상해 오던 것이 아니라고는 못할 것입니다. 이른바 냉전종식 이후에도 군사력 증강과 인류의 살해와 말살을 위한 가장 고도의 수단을 계속 개발해 왔던 세력들은, 자신들의 대규모 군비투자가 세계 다른 민족에 대한 절대적이고 완벽한 지배 특권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국주의 체제의 이데올로기 주창자들은 자신들 행위의 성격과 이유를 물론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 국민을 목표로 한 이번의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테러 공격에 대해 지구상 모든 민족이 충격을 받고, 진심으로 함께 아파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가장 극단적인 이데올로기 주창자들과 이미 특권을 차지하고 있던 가장 호전적인 매파들은 무한한 군사적·기술적 역량을 갖춘 세계 최강대국의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 국가의 파괴·살상 능력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반면, 침착한, 차분함, 사려 깊음, 자제력은 최저선에 머물렀습니다. 비슷한 특권을 같이 즐기는 다른 부유한 강대국들까지 공모하여, 팽배한 기회주의, 혼돈, 공황상태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제는 예측할 수 없는 유혈적 결과를 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군사적 행동이 취해지더라도, 그 첫 번째 희생자는 저발전된 가난한 나라에 살고 있는 수십억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믿기 힘든 경제·사회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 변제 불가능한 외채, 고가의 생필품, 증대되는 자연적·생태적 파국, 기아와 비참한, 그리고 아동, 10, 성년에게까지 나타나는 광범위한 영양실조, 심각한 에이즈 유행, 말라리아, 민족의 전멸을 위협하는 결핵과 여타 전염병들이 그것입니다.

 

심각한 세계경제워기는 이미 경제 강대국들의 중심부에도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고, 그 위기는 이러한 새로운 환경 하에서 필연적으로 더욱 심화될 것이며, 절대 다수 사람들에게 참을 수 없는 부담이 될 때 그 위기는 혼돈, 저항, 통치불능상태를 수반할 것입니다.

 

그 비용 또한 부국들에게 지불될 수 없는 선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수년 동안은 환경과 생태에 관해 거론하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자연보호 프로젝트나 그 연구결과를 거론하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주제들을 거론할 공간과 기회가, 아직 시작하지 않은 군사행동, 전쟁, 범죄행위, 이른바 무한한 정의에 모두 사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6시간 전에 미국 대통령이 의회에서 행한 연설을 들으니, 도대체 무슨 희망이 남아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나는 그 연설문 작성자를 향해 형용사나 수식어 또는 다른 도발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그러한 용어는 전혀 불필요하고, 현 시기처럼 긴장되고 심각한 시기가 사려 깊음과 침착함을 권고하고 있는 때에 전혀 시의적절하지도 못합니다. 나는 모든 걸 말해 주는 짧은 몇 문장만 인용하겠습니다.

 

1. “우리는 필요하다면 모든 전쟁무기를 사용할 것이다.”

 

2. “미국인들은 한차례의 전쟁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전례가 없는 장기전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3. “전 지역의 모든 국가는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우리편 아니면 테러리스트 편 가운데 한쪽을 선택하라.”

 

4. “나는 군에 경계정보를 발령시키고,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미국이 행동을 취하고, 당신들이 우리를 자랑스럽게 만들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5. “이 전쟁은 세계의 전쟁이며, 문명의 전쟁이다.”

 

6. “나는 장기전이 될 것에 대비해서 당신들의 인내를 요구한다.”

 

7. “우리 시대의 위대한 업적과 모든 시기의 위대한 희망은 이제 우리 손에 달려있다.”

 

8. “이 전쟁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결과는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중립이 아님을 알고 있다.”

 

나는 쿠바 시민들 모두에게, 앞에서 언급된 문장들에 담긴 사상에 대해 깊이, 그리고 조용히 생각해 볼 것을 당부 드립니다.

 

당신들은 우리 편 아니면 테러리스트 편 아니면 테러리스트 편 가운데 한 편이다.” 세계 어느 국가, 심지어 거대한 강대국들조차 이 딜레마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전쟁이나 공격의 위협으로부터 빠져가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무기라도 사용할 것입니다.” 그 무기의 윤리적 가치나 치명적인 위험 여부와는 관계없이 모든 사용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핵전쟁, 화학전, 생물학전에 관계없이 말입니다.

 

이 전쟁은 단기전이 아니라 장기전이 될 것이다. 역사상 전례가 없이 오래 걸릴 것이다.”

 

이 전쟁은 세계의 전쟁이자 문명의 전쟁이다.”

 

마지막으로, 거의 종말론적 모험의 시기처럼 전쟁 전야에 행해진, 이전의 정치적 연설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었던 고백, “이 전쟁의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결과는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중립이 아님을 알고 있다.”는 이 말은 놀라운 주장입니다. 지금 막 시작하려 하는 기이한 성전(?)에 참여하는 현실의 적들, 혹은 가상의 적들에 대해 생각해 볼 때 나는 어느 쪽 광신주의가 더 강력한지 도저히 판단을 내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목요일에, 미국 의회에서는 국제법이나 국제기구와 관계없이 배타적인 힘의 법칙을 갖게 될 세계군사독재라는 이념이 개진되었습니다. 이번 위기에서 철저히 무시당한 유엔은 그 어떠한 권위나 특권도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단 한 명의 보스, 한 명의 판사, 하나의 법만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미국정부 아니면 테러리즘 둘 중 한편과 동맹관계를 맺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쿠바는 테러주의 행동으로부터 가장 심각하고 가장 오래 고통을 받아 온 국가라는 사실에 근거한 도덕적 권리 위에서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쿠바국민을 협박할 수 있는 위협이나 권력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국민이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현재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쿠바는 예측할 수 없이 참담한 결과를 가져올 전쟁을 피해야 할 필요성을 재차 강조합니다. 연설자 부시 대통령 자신이 인정했듯이 그 전쟁이 어떻게 될는지는 전혀 모릅니다. 쿠바는 테러리즘의 완전소멸을 위해 모든 국가들과 기꺼이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재차 밝힙니다.

 

미국의 우방국들은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미국에 조언해야 합니다. 저 멀고 고립되고 접근 불가능한 오지에, 그 유령이 어디에 있는지, 심지어 과연 있기는 한지도 잘 모르면서, 또 미국이 죽이려는 민족이 미국에서 죽은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에 실제로 책임이 있는지도 잘 모르면서, 마치 유령과 싸우는 것처럼, 미국정부가 젊은 미국 병사들을 내던져 버리지 못하도록 조언해야 합니다.

 

쿠바는 결코 미국민의 적으로 스스로를 천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민은 오늘날, 증오와 복수심을 유포하기 위해 고안된 전례 없는 홍보 캠페인에 노출되어, 심지어 평화를 고무시키는 음악마저 금지시켰습니다. 이와는 달리 쿠바는 그 음악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입니다. 쿠바 어린이는 선포될 유혈 전쟁이 계속되는 한 평화를 위한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쿠바 영토는 미국민을 향한 테러행동을 위해서는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미국 국민을 향한 그러한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연대감을 표명하고, 또한 평화와 평온을 주장합니다. 언젠가 그들은 우리의 행동이 옳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공격을 받으면, 우리는 독립과 원칙, 그리고 우리의 사회적 업적을 명예롭게 지키기 위해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다하여 방어할 것입니다! 미국이 공격할 명분을 조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미국이 필요한 모든 무기를 사용할 전쟁에 관해 언급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런 경험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적시에 기억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40여 년 전에, 수백 가지 전략·전술 핵무기가 쿠바를 목표로 했지만, 우리 동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처럼 영웅적인 민족의 후선이며, 우리의 애국적 혁명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합니다. 지금은 침착과 용기가 소중한 시기입니다.

 

세계는 이러한 사실을 점점 더 잘 알게 될 것이고, 지금 막 겪기 시작한, 심각하고 위협적인 드라마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를 높여갈 것입니다.

 

쿠바국민에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긍심과 결연함을 가지고 우리의 의지를 선포해야 할 시점인 것입니다.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사회주의가 아니면 죽음을!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2001922

수도 아바나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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