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와 로마 제국 세계 석학들이 뽑은 만화 세계대역사 50사건 11
김창회 지음, 진선규 그림, 손영운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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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 차원에서 읽어 봤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어보는게 낫지만, 읽기가 귀찮아 청소년용인 이 책을 읽었다.

초중학생을 위한 책 치고는 내용이 꽤 탄탄했다. 그 많은 내용을 집약적으로 잘 썻다. 만화의 첫 시작은 스파르타쿠스의 반란부터 시작한다. 자유를 위해 싸웠던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 부터, 폼페이우스 그리고 카이사르의 등장과 몰락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율리우스 시저를 읽으면 드는 생각이 있다. 전략가로서는 뛰어난 명장이지만, 지도자로서는 황제를 꿈꾸었던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그는 독재관을 지내다가 갈리아 내전기 포로로 잡았던 브루투스에 의해 살해당했지만 말이다.

이 책은 시저가 암살당하면서 끝이난다.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그가 이룩하고자 했던 개혁과 정복전쟁에서의 공로 그리고 독재자로서의 모습을 얘기하며 과연 위대한 지도자인지 혹은 독재자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아마 이후에 나타날 마키아벨리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리고 베니토 무솔리니가 카이사르를 꿈꿨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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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 비판 - 『환단고기』와 일그러진 고대사
이문영 / 역사비평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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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역사학 비판 서평: 유사역사학은 파시즘의 변형된 형태다.

내가 환단고기를 처음 알게 됐던 것은 대학교 1학년 때다. 당시 고구려사를 전공한 모 교수님은, ˝한국에도 대마도 회복을 외치는 모 집단이 있다.˝ 혹은 ˝환단고기라는 판타지 위서를 추종하는 집단이 있다.˝라고 주장했었다. 당시 환단고기에 대해 모르던 필자는 ˝무슨 소고기 이름이냐˝하고 그냥 넘겼던 것 같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16년이었다. 당시 페이스북을 굉장히 열심히 했던 필자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과 페친을 맺었다. 이를 통해서 굉장히 많은 환빠들이 우리나라에 존재하고, 이런 말도안되는 주장들을 진서라며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2017년 대전에 있는 증산도라는 사이비 종교를 알게 됨으로써, 그들이 참으로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시중에 나온 책들 중엔 환단고기와 유사역사학을 비판하는 책들은 찾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수많은 서점에서는 소위 환빠 교주 안경전이 저자인 환단고기와 개벽과 같은 종교화된 서적들이 시중에 나도는 모습을 보았고, 굉장히 거부감을 느꼈다.

그렇게 해서 난 가끔씩 환빠들을 까는 글들을 SNS를 올렸다. 2018년 소방서 사회복무요원을 마치고 그 기념으로 1달간의 미국여행을 갔다오고 나서였다. 내가 미국여행을 마치고 귀국했을쯤 이 책이 출판되었고, 책의 저자인 이문영 선생을 SNS를 통해 알게 됐다. 그를 통해서 ‘유사역사학 비판‘을 알게됐고, 궁극적으로 환빠들에 대한 위험성과 비판부분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이 내리는 결론은 자명하다. 유사역사학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외세에 대한 알 수 없는 열등감에서 부터 시작된다. 즉 한국 역사는 대륙을 정복하지 못한 역사이기에, 과거의 영토들 왜곡하고 과장해서 ‘민족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정상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세력들을 죄다 ‘이병도 제자‘라는 프레임을 씌워 마녀사냥을 한다.

그들에게 있어 다른 나라의 유사역사학자들이 한 얘기는 그리 큰 문제가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에서 주어와 목적어만 약간 변형시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캐임브릿지 대학에서 인정한 하버드대 한국사 교수가 한국의 과도한 민족주의를 비판하면 유사역사학은 입에 개거품을 물고, 성난 침팬지들 처럼 날뛴다.

참으로 재밌는 사실은 그들이 그리도 진실이라 하고 싶은 환단고기를 진실로 규정한다면 그건 역으로 과거에는 위대했으나 중국에게 털려 시간이 갈수록 영토가 줄어든 열등한 역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위대함만을 고수하는 그들에겐 그런건 전혀 상관없다.

과거에도 했던 생각이지만, 이들의 사상은 전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나치와 비슷하다. ˝아리아인의 위대함˝을 외치던 그들의 구호에서 주어만 바꾸면 환빠가 된다. 20세기 역사가 증명하듯이 민족우월주의와 과도한 민족주의에 경도된 나치독일과 일본은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6천 5백만명의 목숨을 빼았았다. 그렇다. 이 처럼 위험한 사상이 바로 유사역사학이다.

몇몇이들은 이들도 종교니까 종교로서 인정하면 된다고 한다. 그것은 이들에 대한 위험성을 인식하지 못하고서 하는 소리다. 그렇다면 네오나치도 허용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유사역사학은 학문과 사실관계를 자신들 멋대로 조작하여 식민사학과는 무관한 역사학계를 공격하고, 자신들의 추종하는 파시즘을 대중들에게 이식시킨다.

따라서 굉장히 위험하다. 물론 여기에는 역사학문이라는 것을 대중들과 소통하지 못했던 학계의 잘못도 있다. 어쨋든 유사역사학은 굉장히 위험하다. 이를 알고 비판적인 의식을 길러야 한다. 이문영 저자님의 저서 ‘유사역사학 비판‘은 올바른 길을 제시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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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레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건 3년 전 이맘 때 쯤이었다. 지금으로 부터 4년 전 마르크스가 쓴 '공산당 선언'을 읽고 감동했었던 필자는 러시아 혁명을 성공 시킨 레닌을 알고 싶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사회주의나 혁명사에 대해 지식이 전무했던 필자는 레닌 하면 뭔가 찬양을 하고 사상을 따르기에는 알 수 없는 이상한 거부감 같은 것이 존재했던 것 같다. 현 민중당 계열에 가까운 어떤 단체에서 활동 하면서, 개인적으로 여러권의 책을 읽었던 2016년 필자는 레닌을 알기 위해 처음에는 현 노동자 연대 대표가 쓴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러나 그 책은 레닌과 러시아 혁명에 대해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입문서 정도였기에, 이쪽 출판사에서 출간한 레닌 전기를 읽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이 책갈피 출판사에서 출간한 레닌 평전이다.

 

이 책은 영국 트로츠키주의 계열 사회주의자인 토니 클리프가 쓴 레닌 평전이다. 토니 클리프에 대해 조금 소개하자면 그는 사회주의 계열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국가 자본주의'라는 이론을 창시해낸 인물이다. 국가 자본주의란 무슨 뜻이냐면 레닌 사후 등장한 소련의 스탈린 체제가 사회주의를 져버리고, 국가라는 시스템이 주도적으로 자본주의를 컨트롤 한다는 얘기다. 즉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소련, 중국, 북한과 같은 국가들은 당과 관료계급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가들이 하는 역할을 대신 하기에, 구공산권 국가들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는 비운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창설한 제4인터내셔널이 주장하던 "소련은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는 이론과는 다른 해석이다. 박노자가 쓴 '러시아 혁명사 강의'에 따르면 토니 클리프가 이끌던 사회주의 단체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다른 사회주의 단체들이 이를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에서 지지했던 것과 달리 그 어떠한 지지도 표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즉 그 당시 토니클리프 계열의 단체들은 한국 전쟁을 "미국과 소련 간의 제국주의적 전쟁"으로 봤고, 따라서 국가 자본주의 대 미제자본주의의 전쟁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1991년 소련 해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사회주의의 실패로 생각했을 때, 이들은 국가자본주의의 몰락으로 봤고,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를 내세웠다. 즉 현재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국내의 노동자 연대라는 단체가 이쪽의 이론을 그대로 계승한 셈이다.

 

따라서 토니클리프가 쓴 이 4부작 짜리 레닌 평전은 당연히, 레닌 사후 건설된 소련 체제와 정권을 잡은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이 사회주의로의 이행 단계였다고 보는 시기는 1917년 러시아 혁명부터 1924년 레닌이 사망하기 이전까지이다. 즉 그 이후는 스탈린이 정권을 잡았기에 사회주의가 아닌 국가 자본주의로 갔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스탈린에 대한 그들의 비판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다만 비판을 하는 방법과 전술에 있어선, 분명한 오류가 있다. 스탈린의 권위주의적 독재체제나 대숙청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스탈린이 건설한 체제는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었다. 이는 분명히 사회주의 체제였다. 당시 소련엔 자본가 계급이 없었고, 스탈린 체제는 사회주의로의 이행 단계인 제1차 과제인 국유화를 마침으로서, 사적소유 철폐에 기반한 공업화를 이루어 냈다. 그 이면엔 일부 관료들의 부패가 존재하였으나, 현 자본주의 체제에 있는 재벌들 처럼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자본가는 없었다. 비록 양질은 아니더라도, 사회주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복지, 의료, 주거, 교육이라는 것이 적어도 자본주의였던 박정희 정권보다 우선시 되었고, 이는 대기업 위주의 박정희식 경제성장과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필자는 토니 클리프가 주장하는 국가 자본주의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고, 책을 읽을 때 이런 부분은 좀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과거 소련 시절 스탈린 체제가 만들어낸 필요이상의 우상화 된 레닌의 이미지를 조리있게 비판했다는 것이다. 그저 절대적이고 사실상 전지전능적인 인물로 묘사되던 레닌도 실수도 하고, 프롤레타리아적 대의를 위해 헌신도 하는 인간이자 혁명가였던 레닌을 잘 재조명 했다. 그리고 적백내전 당시 백군 파시스트들과 제국주의의 침략과 테러에 맞서 볼셰비키들이 왜 체카를 창설하여 맞서 싸운 것은 당연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또 혁명의 비극인 크론슈타트를 왜 레닌과 볼셰비키들이 진압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잘 설명했다. 그 외의 독일 혁명 당시 독일 사민당의 배신이나 코민테른의 변질화 또한 잘 조명했다.

 

즉 토니 클리프의 레닌 평전은 5~6개월전 필자가 읽었던 영국 우익 학자 로버트 서비스가 쓴 레닌 평전하고는 확실히 다르고, 보다 진보적인 관점에서 레닌의 생애를 잘 조명해냈다. 과거 우리는 반공주의라는 전근대적인 사고에 빠져 레닌이라는 인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비록 토니 클리프의 레닌 평전은 일부 오류가 있긴 하지만, 혁명가 레닌을 알려주는 좋은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체제는 실패했다고 한다. 그건 단순히 소련 해체라는 표면적인 현상만 가지고 판단한 생각일 뿐이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자본주의의 성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부패와 제국주의의 악랄함을 고발하는 역할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사회주의를 공부해야 한다. 혁명가 레닌의 생애는 사회주의를 원하는 이들에게 분명 영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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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 제작년이나 작년쯤이었던것 같다. 개인적으로 베트남전쟁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이 전쟁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미국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년전 하더라도 필자는 베트남 전쟁을 한국경제에 이바지한 전쟁이라 생각했었다. 그 관점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을때 틀린말은 아니다. 실제로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외화벌이는 분명 경제적으로 막대한 이득을 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쟁은 잘못된 전쟁이었다. 비록 우리는 돈을 벌었지만, 그 나라에 가서 민간인을 학살했고, 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오늘은 반성하는 차원에서 베트남 전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 올려볼까 한다.

 

1. 경제 성장이라는 단어에 감춰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는 군복을 벗은 뒤 대통령이 되었다. 박정희가 집권하던 시절 초기에는 한국의 경제력이 매우 열악했다. 한국전쟁 이후 천리마 운동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한 북조선보다 훨씬 못살았고, 이승만과 친일파 정권의 극에 달한 부정부패는 한국 경제를 더더욱 망쳐놓았다. 따라서 박정희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경제를 성장시켜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정권 기간동안 경제개발을 주도했다. 그러던 시기 박정희는 미국에게 요청을 받았다. 바로 베트남 파병이다. 외화를 벌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박정희는 전세계가 비판하는 그 전쟁에 군대를 파병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은 미국 다음으로 가장많은 군대를 파병했고, 전쟁 기간동안 연 5만 이상의 군대를 베트남에서 유지시켰다.

(베트남으로 파병 되는 한국군 병사들. 악수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베트남 전 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이다.)

 

박정희가 파병한 그 전쟁은 결국 미국이 철수하기에 이르렀고, 한국군 또한 1973년 3월에 완벽히 철수했다. 그리고 1975년 전쟁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승리로 끝났다. 유신독재를 감행하며 민주주의를 퇴보시킨 박정희는 베트남 전쟁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성전"으로 미화했고, 대한뉴스같은 선전매체들은 베트남 전쟁을 왜곡했다. 거기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전쟁을 핑계삼아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여 다시한번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탄압했다. 그 당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얘기하던 민주화 운동가 리영희 선생이 옥살이를 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일반인들에게 베트남 전이 진실이 알려질 리가 없었다.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사건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 성에서 청룡부대에 의해 벌어진 학살이다. 퐁니 퐁넛 학살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군이 벌인 퐁니 퐁넛 학살로 인하여 70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 당했다. 이들 중 대부분이 여자나 아이였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죽었어요. …… 우리 작은 절 안에는 그들 모두를 위해 향을 피울 공간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ㅡ 미안해요 베트남 p.157

(퐁니 퐁넛 학살을 담은 사진)

 

10일 뒤인 2월 22일 청룡부대는 꽝남 성에 있는 또다른 마을인 하미 마을에서 135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135명을 학살한 한국군은 그 시체를 암매장해버렸다. 학살당한 민간인들 중에는 1살이나 2살 짜리도 있었다.

 

“학살이 일어난 것은 아침 9시 경이었어요. 7 - 8시 경에 호이안쪽에서 군대가 들어왔지요. 학살이 있기 며칠 전부터 한국군들은 사람들을 모아서 빵을 주었어요. 그래서, 그날 아침도 빵을 주나보다 하고 한 군데로 모였지, 한국군들이 우리를 죽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면 도망을 가지 그렇게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모이지 않았을 거야.”

 

ㅡ 팜티호아, 하미 마을 학살 생존자의 증언

(하미마을 학살 위령비)

 

퐁니 퐁넛과 하미 마을 학살 사건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66년에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베트남 떠이션 현에 있는 고자이 마을에서 일어난 학살이고, 다른 하나는 꽝응아이 성에 있는 빈호아라는 곳에서 일어난 학살이다. 맹호부대에 의해 일어났다고 알려진 고자이 학살 사건으로 인하여 총 380명의 민간인이 학살 당했고, 청룡부대에 의해 일어났다고 알려진 빈호아 학살로 총 430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빈호아 학살 한국군 증오비)

(고자이 학살 위령비)

 

"한국군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땅굴에 숨었지. 그들이 땅굴 속으로 최루탄을 던져넣었어. 눈물콧물이 뒤범벅이 되고 ‘컥’하니 숨이 막혀왔어.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땅굴 밖으로 기어오르면 한명씩 총을 쏘아 죽였지."

 

ㅡ 고자이 학살 생존자 판티부이 할머니의 증언

 

“1966년 12월3일(음력 10.22) 빈호아 사, 롱빈마을의 쩌우레 언덕에 주둔하고 있던 청룡부대 1개 대대가 이곳 9개 마을에서 소탕작전을 펼치면서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3일에서 6일까지 모두 430명이 집단학살을 당했지요. 응옥흥마을에서는 80살 노인인 후인의 목을 잘라서 논에 걸어놓기도 했어요. 희생자들 중에는 임산부도 7명이 있었고, 2명의 여성이 강간당하기도 했지요. 또 2명이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졌고, 1명은 배가 갈라져 창자가 꺼내졌습니다.”

 

ㅡ 1999년 한겨레21의 구수정 통신원과 인터뷰를 한 마을 부주석의 증언

이외에도 한국군이 저지른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80여 건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총 5개 성에서 9000여 명이 사망했고, 꽝남성에서만 4000여 명이 죽었다. 즉 이 글에 언급된 것 외에도 학살이 존재했다는 얘기다.

 

2. 학살 부정측에 대하여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전면 부정하는 월남전 참전 용사들)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공론화 된 것은 1990년대 베트남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구수정 박사가 공론화를 하면서 부터였다. 그래서 그 이후 베트남 전에 참전했던 군인들을 비롯하여 베트남 전쟁을 찬양하는 극우계열 인물들과 세력들은 학살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히 위에 언급한 고자이 학살 사건을 예로 들며 "그 마을 벽화에 그려진 고양이과 동물은 호랑이가 아닌 흑표범이다. 즉 남베트남군 레인져 부대의 흑표범 마크지 맹호부대의 호랑이 마크가 아니다."라고 한다. 이 얘기를 들으면 마치 정말 그러한듯 하다. 실제로 찾아보면 비슷해 보이는 측면이 있으니까 말이다. 분명한 것은 그 피해자들은 분명히 한국군의 했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즉 이 부분은 정확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

(보도연맹 학살. 1950년 6.25 전쟁 당시 한국군은 잠재적인 빨갱이일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최소 30만 이상의 민간인을 3개월 동안 대량 학살했다.)

 

학살 부정측은 베트남 전 당시 한국군의 대민사업을 예시로 들며 한국군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매우 강조한다. 따라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은 거짓이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얘기하는 것과 달리 한국군은 그리 이성적인 집단이 아니었다. 한국군의 뿌리는 태평양 전쟁 시기 친일했던 장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전쟁 당시 '잠재적인 빨갱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심증만 가지고, 최소 30만이나 되는 자국 민간인을 단기간에 학살했던 전력이 있다. 많게 보면 100만까지도 잡는다. 즉 한국군은 자국민 수십만을 학살했던 전력이 있기에, 절대 깨끗한 집단이 아니다. 자국민을 수십만 학살했던 집단이 과연 타국에서 도덕성이 지켜진다는 믿음은 그저 학살을 무조건 부정하고 싶어하는 그들만의 상상이다.

(미라이 학살. 1968년 3월 16일 윌리엄 켈리 중위의 부대는 미라이라는 마을에서 총 504명이나 되는 민간인을 하루 만에 학살했다. 이 사건은 군에 의해 철저하게 은폐되었지만, 양심있는 기자의 폭로를 통해서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들이 부정하기 위해 드는 것들은 많지만 마지막으로 하가지만 더 들겠다. 학살 부정측은 미국의 미라이 학살을 들며 한동안 여론화 되지 못했던 한국군 학살을 부정한다. 그들 주장에 따르면 "한국군의 그리 학살했으면 미군처럼 이미지가 낭떠러지로 떨어져야 했을 것"이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의 미라이 학살 사건 또한 파뭍힐 사건이었다. 파뭍힐 뻔하던 사건이 양심적인 기자에 의해서 공론화 된 케이스다. 즉 그 사건도 얼마든지 한국군의 학살처럼 장지간 동안 묻힐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사건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만든 베트남 전 관련 서적들을 보면 한국군에 대한 언급이 그리 많지 않다. 이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가 동원했던 알제리측 부대가 그리 유명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즉 서방세계는 명성이라곤 별로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존재에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고, 동맹인 미국 또한 한국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다. 즉 그들은 이점을 놓치고 있다.

 

3. 결론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를 붙히자면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극우반동세력의 모략을 잠재우는 방법은 공동 진상조사다. 현재 승전국 위치에 있는 베트남 입장에서도 입을 닫고 있는 상황이라 진상조사는 좀 힘들것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따라서 지금당장의 해결이 힘들지라도 최소한 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지해야 한다고 본다.

(이라크 전쟁. 2003년 미국이 공격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이었다. 당시 한국의 한나라당은 베트남 전쟁을 운운하며 이라크 파병을 적극 주장하였다.)

 

극우세력들이 학살에 대해 부정하려고 하지만, 필자는 분명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있을거라 믿는다. 왜나하면 필자는 내 나라의 군대가 아주 쓰레기 같은 똥별 똥군기 집합체들로 인하여 민간인 수십만을 학살했던 사실을 역사를 공부하며 배웠기 때문이다. 즉 필자는 한국군을 신뢰하지 않는다. 따라서 극우세력이 뭐라하든 구수정 선생을 비롯한 진보 계열 학자들이 주장에 대체로 동의한다.

 

필자는 학살에 대해서도 반성이 필요하다 보지만, 베트남 전 참전 자체에 대한 깊은 반성이 필요하다 본다. 베트남 전쟁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구정 공세 이후 대규모의 반전운동에 휩싸였던 적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랬던 전쟁이기에 미국사람들이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은 매우 부정적이다. 이는 미국이 만든 수많은 베트남 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베트남에서의 잘못을 반성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일어난 '미안해요 베트남'운동 )

 

그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이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은 돈을 벌었다다. 즉 긍정적인 인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난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당시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세력들은 "경제 성장을 할 수 있는 제2의 베트남 전쟁이다"라며 전투부대 파병을 주장했었다. 한나라당 세력들의 무책임하고 무지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 한국이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인식을 아주 잘 보여준 거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인식부터가 잘못됐다. 이제는 진실을 알아야 하고, 반성의식을 가져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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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1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1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9-02-01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기님 명절연휴 잘 보내시고 늘 건필하시길^^

NamGiKim 2019-02-01 22:23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벨루치님도 즐거운 명절 잘 보내시길^-^
 

(이오시프 스탈린 포스터)

“스탈린의 진정한 핵심적 업적은 나무 쟁기를 가지고 일하던 러시아를 원자로를 완비한 나라로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아이작 도이처

“스탈린은 지도와 사업에서의 집단성을 전혀 용납하지 않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변덕과 독단을 기준으로 자기 방침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흐루쇼프의 연설문,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한 쪽에서는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다른 한쪽에선 아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오늘은 그의 일대기를 정리해보겠다.

1. 초기 생애

이오시프 스탈린은 1879년 현 그루지야(조지아) 동부에 있는 고리에서 3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시빌리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하면서도 무차별 폭력을 서슴없이 휘두르는 폭군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이유 없이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스탈린은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 1888년 9살이 되던 해 그는 교회 소학교를 다녔지만, 그의 아버지는 스탈린으로 하여금 강제로 구두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졌던 어머니의 항의와 노력으로 스탈린은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고, 1894년 스탈린은 최고 성적으로 종교학교를 졸업했다.

(종교학교를 졸업할 시기의 스탈린 사진)


1894년 종교학교를 졸업한 스탈린은 트빌리시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트빌리시 신학교에서 스탈린은 성직자 교과목 외에 문학과 역사, 라틴어, 수학, 그리스어 등 폭넓은 교육을 받았고, 성적은 우수하였다.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강철권력’라는 책에는 당시 그의 성적표가 나와 있다. 이 성적표는 5점 만점 기준이다. 그의 성적은 다음과 같다.


성경 5

러시아 문학 5

역사 5

수학 5

그루지야어 5

라틴어 (모름)

그리스어 4

교회 슬라브어 5

그루지야-이메레티 노래 5


그 뿐만 아니었다. 젊은 시절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루지아 문인들과 지역 유지들을 감동시켜 격찬을 받을 정도로 시를 매우 잘 썼다 한다. 그가 칼마르크스나 블라디미르 레닌의 서적을 접하게 된 것은 1899년이었다. 그 서적을 접한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고, 혁명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2. 은행 강도와 혁명가

(젊은 혁명가 시절 스탈린)

 

스탈린이 혁명가로서 활동했던 것은 1900년이었다. 당시 그는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며 캅카스 지방의 주요 공단 지대에서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을 선동했었다. 스탈린은 탁월한 언변으로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웠지만,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워 경찰과 유혈 충돌을 벌이게 하는 데 지나치게 열성을 보이면서 동료 공산주의 혁명가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했었다. 혁명가로써 활동했던 스탈린은 1902년부터 1903년까지 경찰당국에게 체포되어 투옥과 추방을 되풀이했다. 1903년 스탈린은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 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1900년대 찍은 머그샷)


1907년 볼셰비키당에서 활동하던 스탈린은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티플리스 시내에서 대규모의 수송방해작전을 획책 하는 데 기여했다. 은행 강탈은 성공하여 대량의 현금을 확보했고, 며칠 뒤 가족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 바쿠로 피신했다. 당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스탈린의 강도 행각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계속 성공에 성공을 거듭한 스탈린의 은행 강도 행각은 농촌과 중소 도시 은행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의 대도심의 대형 은행과 현금 수송 차량까지도 탈취했었다.

(1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다.)

(2월 혁명 당시 러시아 시위대.)


1912년 2월 당시 러시아 국외에 체류 중이던 레닌이 멘셰비키파와 최종적으로 결별한 볼셰비키당을 조직하면서, 스탈린은 제1차 중앙위원회의 신입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스탈린은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1913년 스탈린은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 되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은 운 좋게도 왼쪽 팔이 불구였던 바람에 병역을 기피할 수 있었다. 2월 혁명 이후인 1917년 3월 25일 스탈린은 시베리아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왔고, 거기서 프라우다 편집진을 다시 한 번 맡게 되었다.

(4월 테제 이후 군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레닌)


2월 혁명으로 들어섰던 임시정부는 결국 레닌과 볼셰비키가 이끈 10월 혁명으로 무너졌다.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는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적군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원아래 구 황제를 복원하고자 하는 백군과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른바 적백내전이었다. 적백내전 시기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더불어 레닌이 선출한 볼셰비키당 정치국의 위원이 되었고, 1918년 5월에는 차리첸(현 볼고그라드)에서 적군을 지휘했었다.

(적백내전 당시 트로츠키, 그는 수천 밖에 안 되던 군대를 수백만으로 늘렸고 덕분에 볼셰비키는 적백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내전시기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자주 경쟁 했었다. 1919년에 일어난 소련-폴란드 전쟁 당시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경쟁은 격해졌다. 당시 스탈린은 남부 전선의 사령관으로서 폴란드의 도시인 리보프를 향한 공세를 명령했지만, 트로츠키는 수도 바르샤바를 공격하려 했었다. 둘 다 서로를 지원하지 않았고, 결국 소련 폴란드 전쟁은 1921년 평화협정으로 끝을 맺었다. 1921년 적백내전은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났지만, 혁명 러시아는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다. 내전으로 인한 경제난은 러시아인 수백만을 기아와 굶주림에 빠뜨렸고, 결국 레닌은 기존의 전시공산주의를 포기하고 NEP(신경제정책)을 실행하게 되었다. 이후 건강의 악화되어가던 레닌은 1924년 사망했다. 레닌 사망으로 인하여 소련은 또 다른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3. 권력을 획득하다

(스탈린 사진)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소련은 당내 투쟁에 휩싸였다. 레닌 사후 가장 인기가 있었던 인물은 트로츠키였다. 당시 까지만 해도 소련 공산당에서의 스탈린의 인기는 그리 높지 못했다. 트로츠키와 그 외의 당내 투쟁이 치열할 때 트로츠키 반대세력은 스탈린하고 협력하고자 했지만, 나중에는 트로츠키와 연합하여 스탈린에 맞서야할 처지가 되었다. 즉 레닌 사후 스탈린은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대해가며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1928년 당내투쟁의 혼란속에서 최종적인 권력을 잡은 사람은 결국 스탈린이 되었다. 이때 트로츠키는 국외로 추방당했고, 추방당한 트로츠키는 1940년까지 국외에서 외로운 투쟁을 이어가다가 스탈린이 보낸 첩자에 의해 암살당했다.


4. 경제 개발과 대숙청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과 더불어 우상화된 스탈린)


1928년 소련에서 최종적인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기존에 펼쳤던, 신경제정책(NEP)를 포기하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이 경제개발은 국가주도의 경제 개발이었다. 즉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고 계획하는 정책이었던 것이다. 스탈린식 경제개발이라 불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엄청난 착취와 인권유린이 있었지만, 그 나름 놀라운 경제 성장을 보였다. 1931년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속도를 늦추면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뒤떨어지면 패합니다. 우리는 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는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뒤떨어진 탓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에서 100년이 뒤떨어졌습니다. 10년 안에 그 격차를 없애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노동자 스타하노프는 자신의 할당량에 7배 이상의 광물을 채굴했다.)


스탈린의 연설처럼 소련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1929년 경제 대공황으로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아서 고통에 시달릴 때 스탈린의 소련은 초고속 성장의 연속이었다. 1930년대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문맹은 거의 사라졌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기도 했다. 1938년이 되어서는 경제규모로만 세계 2위에 도달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경제 성장과 동시에 자유를 억압하고 1936년부터 1938년 까지 대숙청을 감행하여 공포정치를 실행하였다. 스탈린은 비밀경찰인 NKVD를 이용하여 인민들을 감시하였다. 대숙청시기 목숨을 잃은 사람이 약 200만이 넘고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추방당한 사람이 수백만이 넘었었다. 1931년 일본의 만주침공과 1933년 히틀러의 등장으로 스탈린의 소련은 소수민족을 억압했다. 그 당시 연해주에 있던 수십만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추방됨에 따라 수만 명의 고려인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대숙청시기 수많은 사람들이 공포 속에서 살았었다. 대숙청을 통하여 스탈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절대자가 되었다.

 

5. 대조국전쟁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


1930년대는 파시즘이 부상하던 시기였다. 1931년 만주를 침공한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33년 나치독일의 총통이 된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재무장을 선언한 뒤 유럽정복의 야욕을 드러냈다. 그러던 1939년 히틀러는 스탈린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뒤 폴란드를 침공했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 이후 스탈린은 히틀러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했었다. 이후 스탈린은 핀란드를 침공했지만 핀란드군에 10배나 되는 사상자를 내고 대패했다. 심지어 스탈린의 심복인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네 놈이 유능한 장교들을 다 죽였잖아”라고 말했고, 결국 스탈린은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게 되었다. 히틀러와의 협정은 매우 불안정한 협정이었다. 영국을 굴복시키는데 실패한 히틀러는 서부전선에 있던 군대를 동부로 돌렸고, 1941년 6월 히틀러는 결국 소련을 침공했다. 개전 초반 소련은 우세한 화력을 가진 독일군에게 밀렸다. 레닌그라드는 포위되었고, 1941년 12월에는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각까지 들어왔었다.(그리고 실패했다.) 1942년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까지 진격했었다.

(1941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러시아 혁명 퍼레이드)

(1943년 쿠르스크 전투)


히틀러의 침공으로 소련은 단결하게 되었다. 산업화 시기 중공업 위주의 성장을 했던 스탈린의 소련은 전쟁이 터지자 탱크와 비행기를 비롯한 군수문자를 초고속으로 찍어냈고, 수많은 소련의 젊은이들이 독일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이 연합군 편에 서게 되자 미국의 수많은 물자가 소련으로 들어가게 됐고,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물자를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1943년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쿠르스크에서 대 반격을 시도했지만, T-34전차의 물량에 밀려 이마저도 실패했다.

(1945년 베를린 국회의사당에서 소련 깃발을 휘두르고 있는 소련군)

(1945년 승전 기념 퍼레이드 당시 백마타고 개선식을 하는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


1943년부터 소련은 전선 전역에서 독일군에 대항하여 반격을 개시했다. 쿠르스크 전투와 바그라티온 작전이 성공한 이후 수많은 동유럽 국가들이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되었다. 1945년 4월 소련군은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고, 26일에는 라인강에서 미군과 만났으며,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함에 따라 나치 독일은 무조건 항복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2500만 명(이중 1000만명 이상은 소련군인이다.)이나 되는 소련인민이 목숨을 잃었지만, 궁극적으로 소련은 승리했다.

(만주 진격 작전 당시 소련군)


그해 7월 스탈린은 유럽에 있던 군대를 시베리아 열차를 이용하여 만주로 옮긴 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난 이후인 1945년 8월 9일 일본에게 선전포고 했고, 만주에서 부터 밀고 내려와 일본을 압박했다. 이때 한반도 북부가 소련 군정하에 들어갔고, 러일전쟁 당시 빼았겼던 사할린을 되찾았다.

(종전 이후 스탈린)


6. 냉전의 시작과 스탈린의 사망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


2차 세계대전은 나치독일과 일본의 패망으로 끝이 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체주의 맞서 손을 잡았던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경쟁하기 시작했다. 냉전이 시작됨에 따라 소련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미국과 경쟁했다.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 편에 서게 되었고,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은 미국편에 서게 되었다. 1948년에는 소련으로부터 지원받던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고, 1949년 스탈린의 지원을 받던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내전에서 승리했다.

(동과 서로 분단된 독일)

(한국전쟁)


1949년에는 독일이 동과 서로 분단되며 냉전을 알렸다. 스탈린의 소련은 미국과의 경쟁에서 군사비용을 굉장히 많이 투자했다. 그 외에도 여러 분야에서도 경쟁했다. 1949년에는 미국의 원자폭탄보다 강력한 수소폭탄을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스탈린은 개입하지 않았다. 심지어 스탈린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김일성의 요청을 수차례 거부했다. 냉전이 격화되면서 소위 서방세계는 공산주의의 공포를 조성시킬 때 마다 스탈린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특히 미국의 겨우 스탈린에 대한 공포심을 부각시킴에 따라 자신들의 반공체제를 강화시킬 수 있었다. 2차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됐던 소련 경제는 1940년대 중후반부터 다시 회복됐고, 1950년대 초의 소련은 초강대국이 됐다.

(미라가 된 스탈린)


한국전쟁이 진행중이던 1952년 스탈린의 건강이 조금씩 악화됐다. 스탈린은 말년에 흑해 연안 별장에서 주로 생활했다. 거기서 여유롭게 살다가 1953년 3월 5일 생을 마감했다. 사후 그를 추모하는 행렬이 있었고, 그는 방부처리 되어 레닌과 더불어 레닌 묘에 전시됐다. 그러던 3년 후 소련의 후르쇼프는 제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전세계 공산권 국가들을 놀라게할 스탈린 격하 연설을 한다. 이후 소련에서는 스탈린을 격하하는 운동이 벌어졌고, 굴라그 수감자 90% 이상이 석방됨에 따라, 스탈린은 격하운동은 격렬해졌다. 그리고 레닌과 같이 합장되었던 스탈린의 시신은 화장되어 레닌 묘 옆에 묻어졌다.


7. 현재 러시아에서 내리는 스탈린애 대한 평가

(현재 러시아에서 내리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인 시각이 앞선 것 같다.)


스탈린 사후 권력을 잡은 후르쇼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전개했지만, 그렇다 해서 소련 사회가 스탈린에 대한 업적을 아주 무시한 것만은 아니었다. 1960년대 흐루쇼프 실각 이후 브레즈네프는 더 이상 스탈린을 격하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1980년대 고르바쵸프가 스탈린에 대해서 강력히 비판하기도 했지만, 1991년 소련 연방 해체 이후 빈곤에 직면한 러시아에선 스탈린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의 대통령 푸틴 또한 스탈린의 시대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견해를 밝혔고, 러시아의 제2정당인 러시아 공산당은 지금도 스탈린 찬양에 열을 올리고 있다. 긍정과 부정이라는 시각을 초월해서 현재 러시아에서 내리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대조국전쟁에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승리를 일구어낸 강력한 지도자이다. 앞으로의 러시아 사람들이 내릴 스탈린에 대한 평가가 어떨지 궁금하다.


8. 스탈린을 알기 위해 더 읽을거리


국내에도 스탈린 관련한 책이 몇권 출판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3가지 책을 추천한다.

(스탈린 공포의 정치학, 권력의 심리학. 로버트 서비스 지음)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올레크 흘레브뉴크 지음)

(젊은 스탈린.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이자면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평전은 영국 보수쪽 학자가 쓴 것 치고는 스탈린에 대해 긍정과 부정적인 서술을 나름 균형있게 했다. 올레크의 스탈린 평전은 스탈린에 대한 가장 최신의 정보를 담았다는 점에서 분명 명저이지만 너무 부정적으로만 서술했다는 비판이 있다. 사이먼의 젊은 스탈린은 아직 끝까지 안 읽어 봤지만 젊은 시절 스탈린을 잘 다룬 책이라는 평가가 있다. 3권 다 이 쪽 분야 연구자가 쓴 책이다. 따라서 스탈린을 알기 위해선 읽어야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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