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스탈린 포스터)

“스탈린의 진정한 핵심적 업적은 나무 쟁기를 가지고 일하던 러시아를 원자로를 완비한 나라로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아이작 도이처

“스탈린은 지도와 사업에서의 집단성을 전혀 용납하지 않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변덕과 독단을 기준으로 자기 방침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흐루쇼프의 연설문,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한 쪽에서는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다른 한쪽에선 아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오늘은 그의 일대기를 정리해보겠다.

1. 초기 생애

이오시프 스탈린은 1879년 현 그루지야(조지아) 동부에 있는 고리에서 3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시빌리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하면서도 무차별 폭력을 서슴없이 휘두르는 폭군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이유 없이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스탈린은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 1888년 9살이 되던 해 그는 교회 소학교를 다녔지만, 그의 아버지는 스탈린으로 하여금 강제로 구두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졌던 어머니의 항의와 노력으로 스탈린은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고, 1894년 스탈린은 최고 성적으로 종교학교를 졸업했다.

(종교학교를 졸업할 시기의 스탈린 사진)


1894년 종교학교를 졸업한 스탈린은 트빌리시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트빌리시 신학교에서 스탈린은 성직자 교과목 외에 문학과 역사, 라틴어, 수학, 그리스어 등 폭넓은 교육을 받았고, 성적은 우수하였다.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강철권력’라는 책에는 당시 그의 성적표가 나와 있다. 이 성적표는 5점 만점 기준이다. 그의 성적은 다음과 같다.


성경 5

러시아 문학 5

역사 5

수학 5

그루지야어 5

라틴어 (모름)

그리스어 4

교회 슬라브어 5

그루지야-이메레티 노래 5


그 뿐만 아니었다. 젊은 시절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루지아 문인들과 지역 유지들을 감동시켜 격찬을 받을 정도로 시를 매우 잘 썼다 한다. 그가 칼마르크스나 블라디미르 레닌의 서적을 접하게 된 것은 1899년이었다. 그 서적을 접한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고, 혁명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2. 은행 강도와 혁명가

(젊은 혁명가 시절 스탈린)

 

스탈린이 혁명가로서 활동했던 것은 1900년이었다. 당시 그는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며 캅카스 지방의 주요 공단 지대에서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을 선동했었다. 스탈린은 탁월한 언변으로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웠지만,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워 경찰과 유혈 충돌을 벌이게 하는 데 지나치게 열성을 보이면서 동료 공산주의 혁명가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했었다. 혁명가로써 활동했던 스탈린은 1902년부터 1903년까지 경찰당국에게 체포되어 투옥과 추방을 되풀이했다. 1903년 스탈린은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 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1900년대 찍은 머그샷)


1907년 볼셰비키당에서 활동하던 스탈린은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티플리스 시내에서 대규모의 수송방해작전을 획책 하는 데 기여했다. 은행 강탈은 성공하여 대량의 현금을 확보했고, 며칠 뒤 가족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 바쿠로 피신했다. 당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스탈린의 강도 행각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계속 성공에 성공을 거듭한 스탈린의 은행 강도 행각은 농촌과 중소 도시 은행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의 대도심의 대형 은행과 현금 수송 차량까지도 탈취했었다.

(1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다.)

(2월 혁명 당시 러시아 시위대.)


1912년 2월 당시 러시아 국외에 체류 중이던 레닌이 멘셰비키파와 최종적으로 결별한 볼셰비키당을 조직하면서, 스탈린은 제1차 중앙위원회의 신입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스탈린은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1913년 스탈린은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 되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은 운 좋게도 왼쪽 팔이 불구였던 바람에 병역을 기피할 수 있었다. 2월 혁명 이후인 1917년 3월 25일 스탈린은 시베리아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왔고, 거기서 프라우다 편집진을 다시 한 번 맡게 되었다.

(4월 테제 이후 군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레닌)


2월 혁명으로 들어섰던 임시정부는 결국 레닌과 볼셰비키가 이끈 10월 혁명으로 무너졌다.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는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적군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원아래 구 황제를 복원하고자 하는 백군과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른바 적백내전이었다. 적백내전 시기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더불어 레닌이 선출한 볼셰비키당 정치국의 위원이 되었고, 1918년 5월에는 차리첸(현 볼고그라드)에서 적군을 지휘했었다.

(적백내전 당시 트로츠키, 그는 수천 밖에 안 되던 군대를 수백만으로 늘렸고 덕분에 볼셰비키는 적백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내전시기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자주 경쟁 했었다. 1919년에 일어난 소련-폴란드 전쟁 당시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경쟁은 격해졌다. 당시 스탈린은 남부 전선의 사령관으로서 폴란드의 도시인 리보프를 향한 공세를 명령했지만, 트로츠키는 수도 바르샤바를 공격하려 했었다. 둘 다 서로를 지원하지 않았고, 결국 소련 폴란드 전쟁은 1921년 평화협정으로 끝을 맺었다. 1921년 적백내전은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났지만, 혁명 러시아는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다. 내전으로 인한 경제난은 러시아인 수백만을 기아와 굶주림에 빠뜨렸고, 결국 레닌은 기존의 전시공산주의를 포기하고 NEP(신경제정책)을 실행하게 되었다. 이후 건강의 악화되어가던 레닌은 1924년 사망했다. 레닌 사망으로 인하여 소련은 또 다른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3. 권력을 획득하다

(스탈린 사진)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소련은 당내 투쟁에 휩싸였다. 레닌 사후 가장 인기가 있었던 인물은 트로츠키였다. 당시 까지만 해도 소련 공산당에서의 스탈린의 인기는 그리 높지 못했다. 트로츠키와 그 외의 당내 투쟁이 치열할 때 트로츠키 반대세력은 스탈린하고 협력하고자 했지만, 나중에는 트로츠키와 연합하여 스탈린에 맞서야할 처지가 되었다. 즉 레닌 사후 스탈린은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대해가며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1928년 당내투쟁의 혼란속에서 최종적인 권력을 잡은 사람은 결국 스탈린이 되었다. 이때 트로츠키는 국외로 추방당했고, 추방당한 트로츠키는 1940년까지 국외에서 외로운 투쟁을 이어가다가 스탈린이 보낸 첩자에 의해 암살당했다.


4. 경제 개발과 대숙청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과 더불어 우상화된 스탈린)


1928년 소련에서 최종적인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기존에 펼쳤던, 신경제정책(NEP)를 포기하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이 경제개발은 국가주도의 경제 개발이었다. 즉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고 계획하는 정책이었던 것이다. 스탈린식 경제개발이라 불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엄청난 착취와 인권유린이 있었지만, 그 나름 놀라운 경제 성장을 보였다. 1931년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속도를 늦추면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뒤떨어지면 패합니다. 우리는 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는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뒤떨어진 탓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에서 100년이 뒤떨어졌습니다. 10년 안에 그 격차를 없애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노동자 스타하노프는 자신의 할당량에 7배 이상의 광물을 채굴했다.)


스탈린의 연설처럼 소련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1929년 경제 대공황으로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아서 고통에 시달릴 때 스탈린의 소련은 초고속 성장의 연속이었다. 1930년대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문맹은 거의 사라졌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기도 했다. 1938년이 되어서는 경제규모로만 세계 2위에 도달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경제 성장과 동시에 자유를 억압하고 1936년부터 1938년 까지 대숙청을 감행하여 공포정치를 실행하였다. 스탈린은 비밀경찰인 NKVD를 이용하여 인민들을 감시하였다. 대숙청시기 목숨을 잃은 사람이 약 200만이 넘고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추방당한 사람이 수백만이 넘었었다. 1931년 일본의 만주침공과 1933년 히틀러의 등장으로 스탈린의 소련은 소수민족을 억압했다. 그 당시 연해주에 있던 수십만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추방됨에 따라 수만 명의 고려인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대숙청시기 수많은 사람들이 공포 속에서 살았었다. 대숙청을 통하여 스탈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절대자가 되었다.

 

5. 대조국전쟁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


1930년대는 파시즘이 부상하던 시기였다. 1931년 만주를 침공한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33년 나치독일의 총통이 된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재무장을 선언한 뒤 유럽정복의 야욕을 드러냈다. 그러던 1939년 히틀러는 스탈린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뒤 폴란드를 침공했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 이후 스탈린은 히틀러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했었다. 이후 스탈린은 핀란드를 침공했지만 핀란드군에 10배나 되는 사상자를 내고 대패했다. 심지어 스탈린의 심복인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네 놈이 유능한 장교들을 다 죽였잖아”라고 말했고, 결국 스탈린은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게 되었다. 히틀러와의 협정은 매우 불안정한 협정이었다. 영국을 굴복시키는데 실패한 히틀러는 서부전선에 있던 군대를 동부로 돌렸고, 1941년 6월 히틀러는 결국 소련을 침공했다. 개전 초반 소련은 우세한 화력을 가진 독일군에게 밀렸다. 레닌그라드는 포위되었고, 1941년 12월에는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각까지 들어왔었다.(그리고 실패했다.) 1942년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까지 진격했었다.

(1941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러시아 혁명 퍼레이드)

(1943년 쿠르스크 전투)


히틀러의 침공으로 소련은 단결하게 되었다. 산업화 시기 중공업 위주의 성장을 했던 스탈린의 소련은 전쟁이 터지자 탱크와 비행기를 비롯한 군수문자를 초고속으로 찍어냈고, 수많은 소련의 젊은이들이 독일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이 연합군 편에 서게 되자 미국의 수많은 물자가 소련으로 들어가게 됐고,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물자를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1943년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쿠르스크에서 대 반격을 시도했지만, T-34전차의 물량에 밀려 이마저도 실패했다.

(1945년 베를린 국회의사당에서 소련 깃발을 휘두르고 있는 소련군)

(1945년 승전 기념 퍼레이드 당시 백마타고 개선식을 하는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


1943년부터 소련은 전선 전역에서 독일군에 대항하여 반격을 개시했다. 쿠르스크 전투와 바그라티온 작전이 성공한 이후 수많은 동유럽 국가들이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되었다. 1945년 4월 소련군은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고, 26일에는 라인강에서 미군과 만났으며,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함에 따라 나치 독일은 무조건 항복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2500만 명(이중 1000만명 이상은 소련군인이다.)이나 되는 소련인민이 목숨을 잃었지만, 궁극적으로 소련은 승리했다.

(만주 진격 작전 당시 소련군)


그해 7월 스탈린은 유럽에 있던 군대를 시베리아 열차를 이용하여 만주로 옮긴 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난 이후인 1945년 8월 9일 일본에게 선전포고 했고, 만주에서 부터 밀고 내려와 일본을 압박했다. 이때 한반도 북부가 소련 군정하에 들어갔고, 러일전쟁 당시 빼았겼던 사할린을 되찾았다.

(종전 이후 스탈린)


6. 냉전의 시작과 스탈린의 사망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


2차 세계대전은 나치독일과 일본의 패망으로 끝이 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체주의 맞서 손을 잡았던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경쟁하기 시작했다. 냉전이 시작됨에 따라 소련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미국과 경쟁했다.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 편에 서게 되었고,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은 미국편에 서게 되었다. 1948년에는 소련으로부터 지원받던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고, 1949년 스탈린의 지원을 받던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내전에서 승리했다.

(동과 서로 분단된 독일)

(한국전쟁)


1949년에는 독일이 동과 서로 분단되며 냉전을 알렸다. 스탈린의 소련은 미국과의 경쟁에서 군사비용을 굉장히 많이 투자했다. 그 외에도 여러 분야에서도 경쟁했다. 1949년에는 미국의 원자폭탄보다 강력한 수소폭탄을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스탈린은 개입하지 않았다. 심지어 스탈린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김일성의 요청을 수차례 거부했다. 냉전이 격화되면서 소위 서방세계는 공산주의의 공포를 조성시킬 때 마다 스탈린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특히 미국의 겨우 스탈린에 대한 공포심을 부각시킴에 따라 자신들의 반공체제를 강화시킬 수 있었다. 2차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됐던 소련 경제는 1940년대 중후반부터 다시 회복됐고, 1950년대 초의 소련은 초강대국이 됐다.

(미라가 된 스탈린)


한국전쟁이 진행중이던 1952년 스탈린의 건강이 조금씩 악화됐다. 스탈린은 말년에 흑해 연안 별장에서 주로 생활했다. 거기서 여유롭게 살다가 1953년 3월 5일 생을 마감했다. 사후 그를 추모하는 행렬이 있었고, 그는 방부처리 되어 레닌과 더불어 레닌 묘에 전시됐다. 그러던 3년 후 소련의 후르쇼프는 제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전세계 공산권 국가들을 놀라게할 스탈린 격하 연설을 한다. 이후 소련에서는 스탈린을 격하하는 운동이 벌어졌고, 굴라그 수감자 90% 이상이 석방됨에 따라, 스탈린은 격하운동은 격렬해졌다. 그리고 레닌과 같이 합장되었던 스탈린의 시신은 화장되어 레닌 묘 옆에 묻어졌다.


7. 현재 러시아에서 내리는 스탈린애 대한 평가

(현재 러시아에서 내리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인 시각이 앞선 것 같다.)


스탈린 사후 권력을 잡은 후르쇼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전개했지만, 그렇다 해서 소련 사회가 스탈린에 대한 업적을 아주 무시한 것만은 아니었다. 1960년대 흐루쇼프 실각 이후 브레즈네프는 더 이상 스탈린을 격하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1980년대 고르바쵸프가 스탈린에 대해서 강력히 비판하기도 했지만, 1991년 소련 연방 해체 이후 빈곤에 직면한 러시아에선 스탈린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의 대통령 푸틴 또한 스탈린의 시대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견해를 밝혔고, 러시아의 제2정당인 러시아 공산당은 지금도 스탈린 찬양에 열을 올리고 있다. 긍정과 부정이라는 시각을 초월해서 현재 러시아에서 내리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대조국전쟁에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승리를 일구어낸 강력한 지도자이다. 앞으로의 러시아 사람들이 내릴 스탈린에 대한 평가가 어떨지 궁금하다.


8. 스탈린을 알기 위해 더 읽을거리


국내에도 스탈린 관련한 책이 몇권 출판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3가지 책을 추천한다.

(스탈린 공포의 정치학, 권력의 심리학. 로버트 서비스 지음)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올레크 흘레브뉴크 지음)

(젊은 스탈린.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이자면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평전은 영국 보수쪽 학자가 쓴 것 치고는 스탈린에 대해 긍정과 부정적인 서술을 나름 균형있게 했다. 올레크의 스탈린 평전은 스탈린에 대한 가장 최신의 정보를 담았다는 점에서 분명 명저이지만 너무 부정적으로만 서술했다는 비판이 있다. 사이먼의 젊은 스탈린은 아직 끝까지 안 읽어 봤지만 젊은 시절 스탈린을 잘 다룬 책이라는 평가가 있다. 3권 다 이 쪽 분야 연구자가 쓴 책이다. 따라서 스탈린을 알기 위해선 읽어야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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