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과 미국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을 잊지 말자는 미국 포스터)


 

(1942년 당시 제2차 세계대전 전황을 보여주는 지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정책을 펼치던 1930년대의 국제 정세는 또 다른 전쟁을 향해 돌진했다. 소위 ‘파시즘(Fascism)’ 혹은 ‘전체주의(Totalitarianism)’를 표방하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서구세력들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만주사변(Japanese Invasion of Manchuria)을 일으켰고, 1933년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이끄는 나치당이 정권을 잡았다.

(나치 독일의 총통 히틀러. 콧수염을 단 외모로 유명한 그는 반인륜적 인종범죄를 저질렀다.)


 

(1937년 국민당 수도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 여기서 일본군은 무차별 학살을 저질렀다.)


1933년에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1934년 독일의 ‘총통(Führer)’이 되었고, 하늘 높이 솟아 있던 독일의 실업률을 낮추고, 경제 성장을 해나갔다. 1935년부터 군비를 대폭적으로 증강하고 군방력을 강화하던 나치독일은 1936년 3월 라인란트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1920년대 이탈리아에서 파쇼국가를 세운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1935년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여 합병했고,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를 순식간에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32년에는 상해사변을 일으켰으며, 1937년엔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중국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은 난징 대학살을 벌여 30만 명의 중국인을 학살했다.

(스페인 내전 당시 병사들)


1936년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세력인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다. 스페인 내전은 파시스트 프랑코 세력과 민주세력 간의 전쟁이었는데, 민주세력은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소련의 지원을 받았고, 파시스트 세력은 나치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는 양상을 보임으로써 세계대전을 얘고 하는 것 같았다. 1938년 히틀러은 자신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1939년 초에는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점령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걸로 대응했지만, 1939년 9월 1일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독일에게 선전포고하게 된다. 이로써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폴란드 침공 당시 병사들을 격려하는 히틀러)


‘전격전(Blitz Krieg)’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구사했던 히틀러의 독일군은 단숨에 폴란드를 점령했다. 더 나아가 독일군은 1940년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했으며, 1940년 5월에서 6월 사이에는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와 프랑스까지 전격전을 통하여 점령했다. 프랑스까지 점령한 히틀러는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대규모의 항공부대를 조직하여 영국을 상대로 공습에 나섰다. 지구 반대편에 있던 일본 또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다. 그리하여 1940년 9월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군사동맹을 맺음으로써 ‘추축국(Axis power)’을 형성했다.

(추축국을 나타내는 일본제국의 포스터)

 

1930년대 뉴딜정책을 추진했던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우드로 윌슨이 그랬듯이 표면적으론 중립정책을 내세웠다.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도 그랬고, 영국이 폭격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 때까지도 미국은 그저 유럽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 초반기에도 영국에게 적잖은 물자를 지원해주고 있었다. 그 때문에 독일의 유보트(U-boat) 부대가 미국의 상선을 침몰시키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미국은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시키게 만든 장본인은 히틀러가 아니라 일본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 영토인 하와이를 기습 공격했기 때문이다.

(진주만 기습 공격 당시 침몰하는 애리조나호)

(추축국의 정복 야욕을 보여주는 미국의 포스터)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감행한 진주만 기습공격에서 미군 2400명이 전사하고, 애리조나호와 오클라호마호를 비롯한 전함 7척이 침몰 및 손상당하였으며, 순양함 3척, 구축함 3척이 손상을 입었다. 항공기 150대가 파괴됐으며, 민간인 100명이 공습으로 사망했다. 진주만 기습공격 다음 날인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서 일본의 불법 기습을 공식 발표했고, 연설 직후‘전쟁 참가법’을 발표했다. ‘전쟁 참가법’은 상원에서는 만장일치로 하원에서는 388:1로 가결됐다. 이로써 미국은 일본에게 최종적으로 선전포고했다. 그러자 일본의 동맹국인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미국에 선전포고했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탱크 공장.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수만대의 탱크를 생산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비행기 공장.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수만대의 비행기를 생산했다.)

 

경제 대공황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미국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기관총, 탱크, 비행기, 군함과 같은 군수 물자들을 대량생산하는 체제에 돌입하면서 뉴딜정책이 해내지 못했던 성과들을 만들어 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의 국민총생산이 증가했고, 개인소득도 증가했으며, 실업률이 급감소했다. 또한 전시체제로 돌입하며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많은 여성이 일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여성의 고용률도 높아졌다. 전시 대량생산 체제에 돌입하게 된 미국은 전쟁 초기에 있었던 물자 지원을 보다 확산시켰고, ‘랜드리스(Land Lease)’라 하여 추축국에 맞서 싸우고 있던 영국과 중국 그리고 소련까지 보급물자를 지원했다. 이러한 물자 지원은 파시즘에 맞서던 연합군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2차 대전 당시 여성들을 격려하는 미국 포스터. 2차 대전의 대량 생산 체제는 여성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미군 모자를 쓴 도날드 덕.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디즈니 캐릭터 도날드 덕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을 홍보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 사회를 단결하도록 만드는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특히나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일본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에 매우 분노했다.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자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대에 자원했다. 군대에 자원한 이들 중에는 16, 17살이나 되는 청소년들도 존재할 정도였다. 이들은 주로 나이를 속여서 입대했고, 군대에 자원했다가 부적격 판결받은 이들 중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이라는 사회를 단결시켰던 것이다. 심지어 미국 공산당도 제2차 세계대전을 “파시즘에 맞서는 전쟁”으로 규정하며, 이 전쟁을 지지했다. 하워드 진(Howard Zinn)과 같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이 전쟁에 참전했던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또한 이런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미국인의 지지는 도날드 덕(Donald Duck)과 같이 당시 디즈니에서 만든 만화에도 잘 반영이 되었다.

(미드웨이 해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시기의 전황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갔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공격을 감행한 일본은 홍콩과 말레이시아 싱가폴, 버마(현재 미얀마), 괌, 필리핀,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등을 단기간에 점령했고, 더 나아가 태평양의 중간인 미드웨이까지 점령했다. 한편 1942년 유럽에서는 독일군이 동쪽을 향해 소련 영토로 진격해 들어가며 스탈린그라드에 도달했고, 북아프리카에서도 롬멜장군이 이끄는 독일군 부대가 영국군을 이집트로 압박하고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러했던 세계대전의 전황은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독일군이 패하고, 미드웨이 해전이 미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연합국에게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1942년 미국은 영국군을 돕기 위해 북아프리카에 병사들을 투입했고, 1943년 5월엔 아프리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그해 7월엔 시칠리아섬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본토에 입성했다. 또한 1944년 6월 영미연합군은 지상최대의 작전인 노르망디 상륙작전(Invasion of Normandy)을 감행하여 성공시킴으로써 소련의 요구했던 제2 전선을 형성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시작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프랑스를 천천히 해방해 나갔다. 1944년 8월에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입성했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차례대로 해방했으며, 1945년 4월에는 독일 라인강에서 소련군과 만나 악수를 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했고, 5월 8일 독일은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오키나와 전투. 병사 한명이 톰슨 기관단총을 쏘고 있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은 일본군은 태평양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했다. 미드웨이 해전이 승리로 끝나면서 미군은 태평양 전역에서 상륙작전을 개시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군은 1942년 과달카날 전투(Battle of Guadalcanal)와 1943년 타라와 전투에서 일본군에 맞서 승리했고, 1944년 펠렐리우섬 전투와 1945년 이오지마 전투(Battle of Iwo Jima)에서 승리했다. 또한 미국은 1941년 일본군에게 빼앗겼던 필리핀도 되찾았고, 수많은 해전에서 일본의 막강한 해군력을 무력화시켰다.

(세계 최초의 핵폭탄 리틀보이. 이 리틀보이가 바로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이다.)

 

(원자폭탄 버섯구름)

 

1945년 5월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났을 때, 태평양에서는 전투가 계속됐다. 특히나 1945년 4월에 시작되었던 오키나와 전투는 6월까지 계속되어 미군에게 적잖은 사상자를 안겨주었다. 그 해 7월 미국에서 극비리에 진행된 맨해튼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미국은 원자폭탄을 소유하게 되었다. 당시 루스벨트가 사망함에 따라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결과적으로 그 원자폭탄을 일본에 사용하기로 했고, 1945년 8월 6일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3일 뒤인 8월 9일 또 다른 원자폭탄이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되었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은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 선언식은 1945년 9월 2일 전함 미주리호에서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8월 15일에 끝이 났다.

(연합국의 반파시즘 연대를 상징하는 포스터)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영국 소련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6년이라는 전쟁 기간 동안 대략 7000만 명이 사망했다. 4년간의 참전 기간 동안 대략 40만 명의 미군 병사가 사망했다. 28만 명은 유럽 전선에서 사망했고, 12만 명은 태평양 전선에서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나치독일이나 일본 제국과 같은 파시즘에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 전쟁에서 미국이 소련과 더불어 승리의 주역이었고, 독일과 일본의 파시즘 체제를 종결시킨 역사적인 사실은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벌인 잘못된 것들은 쉽게 잊혀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치부를 보는 관점도 필요하다.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선한 이미지에 반론을 제시한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일본계 미국인들은 사막과 같은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당했다. 1942년 2월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함으로써 영장이나 기소절차, 심문과정 없이 대략 11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사막 근처로 이주시켜 살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일본계 미국인들은 대략 3년 이상 그런 수용소에서 지내야 했다. 그렇게 이주당한 동양인 중에선 제2차 대전 당시 유럽 전선과 한국전쟁에서 미군으로 활약했던 김영옥과 같은 한국계 미국인들도 존재했다. 그리고 이 조치가 특징적이었던 것은 당시 파시스트 국가였던 독일과 이탈리아 쪽 미국인들에게는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는 점에도 있다. 쉽게 말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루스벨트의 이런 조치는 당연히 인종차별이라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미국 사회의 가장 큰 치부라고도 할 수 있는 흑인에 대한 차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엄연히 미국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략 100만 명에 달하는 흑인들이 군복무를 하게 되었음에도 미국 정부는 군대 내에서도 흑인과 백인을 분리해서 수용했다. 심지어 수천 명의 목숨을 구한 혈액은행조차도 백인과 흑인의 혈액을 따로 보관했다. 이런 시스템에 반대했던 흑인 의사 찰스 드루는 그저 그것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부당해고 당하는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분명 미국인들을 단결시켰지만, 한편으론 미국의 노동자들에게 파업권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실업률이 낮아졌고 경제 대공황이라는 위기를 극복했지만, 한편으론 미국 기업의 이윤률을 높이며 노동자들의 임금은 아니었다. 전쟁 중이었던 1944년에만도 광산과 철강공장, 자동차 및 운송설비 산업에서 10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벌였다.

(폐허가 된 드레스덴)

(도쿄 대공습 당시 투하되는 소이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B-17과 같은 폭격기들을 적국을 폭격하는 데 사용했다. 1943년엔 독일 함부르크를 폭격했고, 그 외의 각종 독일 공장 시설 등을 폭격하였다. 그러나 1000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었던 1945년 2월의 독일 드레스덴 폭격은 대략 2일 동안 10만 명의 독일 민간인들을 죽였다. 1945년 3월 10일의 도쿄 대공습(Bombing of Tokyo)은 당일 공습으로 8만 명의 민간인을 죽였다. 적국의 사기를 저하시킨다는 차원에서 실행된 거지만, 한편으론 상대편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폐허가 된 히로시마)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한 것은 또 다른 치부일 것이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2개의 원자폭탄으로 대략 16~20만명의 민간인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물론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이를 가지고 물타기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그런 대량 살상 무기를 실전에 투입했다는 사실은 당연히 인도적인 차원에서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얄타 회담. 왼쪽에서 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추축국과 싸웠던 이유 중 하나를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끝내려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전쟁 기간 동안 600만 명이 유대인이 나치가 만든 독가스실에서 죽어갈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미국 정부는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942년 초에 나치가 그런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를 확보했음에도 말이다.

(미주리호에서 진행된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전쟁 승리에 큰 역할을 맡았던 미국과 소련은 신강대국의 위치에 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명실상부 초강대국이 된 것이다. 구제국주의로 대표되는 영국과 프랑스는 전후 복구 과정을 거쳐야 했고, 사회주의 국가 소련도 전후 재건에 나서야 했지만, 미국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쟁 기간 설비해 놓은 인프라가 고스란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미국은 1950년대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경제적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전시 기간의 대량생산 체제는 미군을 현대화시켰고, 대규모의 군대로 성장시켰다. 거기다 미국은 대량 살상 무기인 핵폭탄까지 가지게 되어서 냉전 초기 소련보다 군사적으로 우위를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한편으로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가 국제무대로 뻗어 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런 경제적 토대와 군사적 토대를 통해 미국은 냉전시기 소련과의 경쟁에 나섰고, 점차 제국주의 국가의 면모를 국제적으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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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선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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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남단에 존재하는 섬 제주도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관광지 중 하나다. 연애 중인 커플들이나 결혼한 연인들끼리 놀러 가는 곳이기도 한 제주도는 평화롭고 경치도 매우 아름다우며 자연환경도 좋은 섬이다. 중국인 관광객들도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휴양하기 위해 많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제주도는 미국의 하와이나 일본의 오키나와 중국의 하이난도(해남도)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발리와 같이 참으로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이렇게 평화롭고 여행하기 좋은 제주도는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참으로 비극적이다 못해, 지옥과도 같은 섬이었다. 그 당시 제주도는 송장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고, 투명하고 푸른 바다나 계곡은 피로 물들었으며, 한라산에 핀 꽃들은 붉게 물들었었다. 왜냐하면, 1948년 4월 3일을 시작으로 제주도에선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광기 어린 대학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제주 4.3 항쟁이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자 제주도는 해방을 맞았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물러나자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전국적으로 새 조국 건설을 위한 사업을 해나갔고, 제주도에서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자체적으로 조직되어 그 사업을 진행해나갔다. 그러나 그런 희망찬 사업은 1945년 9월 28일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미군정이 제주에 들어왔을 초기 제주도에 자리를 잡은 인민위원회와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정은 일제 친일 경찰들을 등용하여 제주도를 통치하려 했고, 이러한 미군정의 행동은 제주도민들의 불만을 샀다. 더 나아가 미군정의 자본주의 경제 정책으로 제주도의 경제 사정 또한 안좋아 졌기에 민중들은 점차 미군정에게 반감을 사게 되었으며, 미군정 또한 제주도민에게 지배자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그 때문에 1947년 초에는 대략 300~400명의 학생이 미군정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는 3.1 운동 제28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대략 3만 명 이상이나 되는 제주도민이 참가했던 이 행사에는 국내의 사회주의 조직이었던 남로당도 참가했었는데, 이를 좋지 않게 본 경찰이 어린아이를 말발굽에 부딪치게 만들면서 죽였고, 이에 반발하는 시민에게 총을 발포하여 1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했다. 그 사건 이후인 3월 10일 남로당을 이끄는 좌익 계열 인사들과 민중들은 이에 총파업으로 맞섰고, 미군정과 경찰은 이 집회를 진압했다. 진압한 이후 그들은 서북청년회 출신의 인물들과 더 많은 우익경찰들을 제주도에 배치했고, 대대적인 좌익 탄압으로 나섰다. 그리고 이런 탄압은 서북청년단의 민간인 테러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1948년 3월 초 제주도 내에 있던 남로당원들은 이러한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선택했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인사들은 무장봉기를 일으켜 반미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나섰다. 이들이 무장투쟁으로 맞서자 이에 당황한 미군정과 경찰은 본토로부터 더 많은 병력을 투입했고, 우익 출신 경찰과 군인 그리고 서북청년단 단원들은 제주도에서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광적인 학살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진압군 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이 이른바 ‘초토화 작전’으로 나서면서 수많은 민간인이 우익경찰과 군인 그리고 서북청년단에게 학살당했다. 좌익이 저지른 것도 없진 않았으나, 대체로 서북청년단과 같은 우익세력들을 대상으로 일어났다.


1948년 11월부터 시작되었던 초토화 작전은 1949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진압을 거부한 여수 순천의 14연대는 이에 저항하여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었다. 아무튼 이러한 우익들의 학살로 인하여 제주도민 희생자 80% 이상이 우익들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었다. 3만 명 이상의 민간인 희생자가 거의 다 우익들이 저지른 학살에서 생겼다는 것이다. 제주 4.3 항쟁 시기 우익들이 저지른 학살은 아이, 어른, 노인, 여자, 장애인을 가리지 않았다. 진압 작전에 나섰던 토벌대는 초등학교까지 가서 한 아이를 체포하여 운동장에서 총으로 쏴 죽이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고, 빨갱이라고 의심한 무고한 민간인 여성을 강간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1살, 2살짜리 영유아도 마을 주민들과 같이 학살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심지어 어떤 마을에선 수백명 단위로 학살되어 마을 하나가 전멸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광적인 학살은 1948년과 1949년 사이에 일어났다. 따라서 제주도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푸른 바다는 죽은 사람의 피가 넘치는 바다가 되었으며, 한라산에 있는 꽃들은 죽은 사람의 피로 붉게 물들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제주도의 비극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다시 한번 반복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제주도민들은 다시 한번 검거당해야 했고, 이들 중 대다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당해 암매장 되고 했다. 따라서 빨갱이로 몰리는 것이 두려웠던 살아남은 제주의 젊은이들은 국군에 자진해서 자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빨갱이’라는 의심의 눈초리하고 연좌제라는 사회 제도적인 공권력 탄압이었다. 4.3을 겪었던 제주도민들은 자신들의 겪은 고통에 대해 말할 권리를 잃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 시기 과거에 침묵하며 살아야 했다. 이들의 억울한 죽음과 기억이 재조명되기 시작한 건 대한민국이 민주화가 되면서부터였다.


1948년 제주 4.3 항쟁 당시 대략 3만 명 이상이나 되는 민간인들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그 학살에는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있었고, “대한민국을 위해 전도에 휘발유를 부어 30만 도민을 모조리 죽이고 모든 것을 태워 버리라”라고 말하며 강경 진압에 나섰던 조병옥이 있었으며, 미군정이 있었다. 누군가는 제주 4.3 항쟁을 폭동이라고 한다. 특히나 이승만 찬양에 열을 올리는 극우 뉴라이트 세력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제주 4.3 항쟁을 무고한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던 토벌대와 이승만의 입장에서 제주 4.3 항쟁을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역사관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 추천해주고 싶을 정도다.


허영선 시인이 집필한 이 책을 읽으면서 슬픔과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책 한 페이지씩 넘기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책 한 페이지마다 지옥도를 경험했던 제주도민들의 고통이 너무나도 잘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저자가 시인이다 보니 시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요소들도 많았기에 더 와닿았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2018년 1월 필자는 제주 4.3 박물관을 방문했었다. 당시 그곳을 방문한 필자는 눈물을 흘렸었다. 도대체 왜 이 무고한 사람들이 이렇게 학살당했는지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물이 흘렀다. 이번 기회에 허영선 시인의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를 읽게 된 건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책의 장점은 제주 4.3 항쟁과 그 역사적 배경 그리고 한국 현대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반인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쓴 책이다. 따라서 역사 지식이 없더라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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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호황과 경제 대공황

(1920년대 당시 뉴욕)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전쟁을 계기로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경제 호황과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유럽과는 달리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쟁의 피해가 없었던 미국은 전시에 돌렸던 산업 시설과 같은 기존 인프라가 고스란히 유지가 된 상태에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1920년대의 뉴욕 타임즈 스퀘어)

 

1920년대 미국은 소위 ‘풍요와 번영의 시대’라는 말처럼 수요와 공급이 부족하지 않았다. 1920년대를 거치며 미국의 산업 생산은 60%가 증가했고, 개인소득도 3분의 1이나 증가했다.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가 쓴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보면 당시 돈이 있는 미국인들이 파티를 자주 하고 물질적 향락에 심취하여 과잉소비와 낭비를 일삼는다. 이는 1920년대 당시 미국 부르주아 계층의 삶이었다. 또한 그들은 그런 풍요로움 속에서 주식시장에 과잉 투기했다.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가 쓴 위대한 개츠비. 영화화되어 국내에서도 개봉했었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한 장면. 이 처럼 1920년대 미국의 부르주아들은 파티와 과잉소비를 즐겼다.)

 

1920년대의 미국 사회가 경제적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기술력의 발전이었다. 기술력 발전 결과 그 기술발달로 나온 물질적인 것들을 사람들이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자동차 분야에서의 발달은 미국인들의 교통을 바꿔놓았을 뿐만 아니라, 철, 고무, 유리 제품 공구회사 등의 산업도 활기를 띠게 했다. 가솔린 산업과 도로 건설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1920년대 말엽에는 3000만 대가 넘는 자동차가 미국의 도로를 달리게 되었다. 1920년대 미국 사회에선 광고 산업과 영화 소비량이 증가하였고, 신문도 전국적으로 보급되었으며, 이러한 것들은 강력한 정보 전달의 수단이 되었다. 무엇보다 라디오의 보급을 통해 미국인들은 다른 곳에서도 뉴스를 접함으로써 소식 전달의 속도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했다.

(1920년대 등장한 신 여성 플래퍼. 1920년이 되서야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할 정도로 미국 사회는 여성을 억압했었다.)

 

미국 역사에서 1920년대를 표현하는 말 중에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 또는 ‘재즈 시대(Jazz Age)’라는 표현이 있었다. 즉 번영과 즐거움의 시대라는 뜻이다. 물론 1920년대 미국사회에선 실업률이 감소하고 노동자들의 임금이 상승하긴 했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와 과잉의 시대’에도 미국 내부의 문제는 많았다. 대표적으로 들자면 여성 문제, 흑인 차별를 비롯한 인종 차별 문제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의 고질적 문제인 빈부격차의 문제가 그러했다.

 

1920년대 당시 소위 ‘플래퍼(flapper)’ 불리는 신여성이 미국에서 탄생했다. 이들은 다리가 노출되고 몸이 노출되는 비키니를 입었고, 몸을 드러냄으로써 여성적 아름다음을 추구했었다. 이들의 패션은 미국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고, 보수주의자와 미국 전통주의자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플래퍼의 등장에서 알 수 있듯이 1920년대 미국은 그만큼 여성을 성적 혹은 제도적으로 억압하는 체제였다. 심지어 미국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지게 된 것이 1920년의 일이었다. 물론 남성들에게 억압당했던 백인 여성들 또한 흑인과 같은 미국내의 유색인종들에겐 차별과 혐오를 보였지만 말이다.

 

 

1920년대 미국에서 살던 흑인들은 여전히 차별화된 사회에서 살아갔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의 흑인들은 “자신들이 돌아오면 이전과는 달리 미국인들이 환영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미국의 흑인들에게 미국사회가 준 것은 극심한 인종차별과 탄압이었다. 1919년엔 귀국한 흑인들이 “자신들에게 더 나은 대우를 달라”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 사회는 그들이 백인 폭도들에게 살해당해도 신경쓰지 않았고, 기존에 있던 흑인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해고시켜 일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또한 흑인과 같은 유색인종을 대상으로 한 혐오나 폭력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KKK와 같은 인종차별 단체가 부활했다. 이들은 비단 남부 뿐만 아니라 북부까지 조직을 확대했고, 1924년에는 단원 수가 450만에 이르기 까지 했다.

(1920~1930년대 당시 뉴욕 노동자들의 삶. 이들은 어떠한 안전 장비 없이 고층 빌딩에서 이런 위험한 식사와 생활을 이어나갔다.)

 

따라서 소위 1920년대 미국의 번영은 오직 상층부에만 집중됐다. 대략 600만 가구가 연간 1000달러 이하의 소득을 벌였다. 브루킹즈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최상층 0.1%의 가구가 최하층 42%의 총합과 비슷한 소득을 올렸다고 한다. 1920년대에는 매년 약 2만 5000명의 노동자가 작업 중에 사망하고 10만 명이 평생 장애인이 됐다. 뉴욕 시의 경우 200만 명이 화재 시 비상구가 없는 건물로 신고된 셋집에서 살았다. 즉 이런 빈민층들은 1920년대 번영의 시대에서 소외되었고, 넘치는 공급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생필품을 구할 만한 돈조차 벌지 못했다.

(1929년 검은 화요일을 알리는 뉴스 기사)

(1929년 검은 화요일 당시 미국 뉴욕의 월 스트리트)

 

 

1900년부터 1920년까지 대략 1400만 명의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왔다. 1924년 의회는 이들을 제한하는 ‘이민법’을 통과시켰다. 당연히 이 법은 영국과 독일 프랑스와 같은 백인 이민자들만 선호했다. 동유럽이나 남유럽 그리고 러시아 슬라브 계통의 백인들은 당연히 제한받았다. 특히나 중국이나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온 이민자는 한 해에 100명을 넘을 정도였다.

(경제 대공황 당시 일자리를 잃은 미국인들)

 

 

1920년대 미국사회는 자본가들 입장에서는 과잉과 풍요의 시대였으나, 그 이면에는 여성 문제, 빈부격차의 문제 그리고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였다. 아무튼 이런 경제적 호황은 192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1929년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오른 하버트 후버는 당당하게 “빈곤의 시대는 끝났습니다.”라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후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이 터졌기 때문이다. 19세기 위대한 철학자인 독일의 칼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인 자본론(Das Kapital)에서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지적했었다. 1929년 경제 대공황은 칼 마르크스가 지적한 대로 사태가 터지고 만 것이다.

(배급줄을 선 아이들. 경제 대공황은 많은 사람들을 굶주리게 만들었다.)

 

 

경제대공황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있지만, 대표적으로 들자면 지나친 부동산 투기 열풍, 경제적 다양성의 부재, 그리고 수요를 생각지 않고 공급에만 충실했던 과잉생산체제를 들 수 있다. 1929년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검은 화요일(Black Tuesday)’이라고도 불린 주식시장 붕괴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5000개가 넘는 은행들과 수천 개의 회사가 도산했다. 도산하지 않은 회사나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1932년에 들어 대략 25%되는 노동자들이 실업 상태였고, 고용 노동자들 또한 대체로 불완전고용 상태에 있었다. 1933년에는 1500만 명이나 되는 미국인이 실직했다. 경제 대공황이 실행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집값을 낼 수 없어 ‘후버빌(Hooverville)’과 같은 판자촌에서 살아야 했다.

(경제 대공황 당시 배급줄을 선 시민들)

 

1920년대 자본가들은 과잉과 풍요속에서 사회에서의 빈곤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만 돌렸었다. 경제 대공황을 겪였던 하버트 후버 또한 대공황의 과정속에서 빈부격차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했다. 그러던 1933년 미국에서 한 대통령이 당선되었는데, 그가 바로 FDR로 불리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미국의 하버트 후버 대통령. 1929년에 당선된 그는 빈곤의 시대 종결을 주장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경제 대공황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떠한 반성없이, 빈부격차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지극히 자본가적인 스텐스를 보였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당선이 되자마자 ‘뉴딜정책(New Deal Policy)’를 내놓았다. 뉴딜정책은 소위 수정 자본주의로 유명한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정책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정책을 하며 전국부흥법, 농업 조정법 테네시 계곡 댐 건설 등을 실행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도 생기고 경제도 차츰회복세를 보였고 나름 안정을 되찾아 갔다. 이런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은 국가가 경제 문제에 개입해서 민생을 책임지는 방향으로 나갔던 데에 의미가 있었다. 당시 미국의 부르주아들은 이 정책을 두고 사회주의화를 추구하는 정책이라며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뉴딜정책은 대공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긴 했지만, 반란을 혁명으로까지 연결되지 않도록 하층계급을 충분히 원조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또한 흑인들은 1920년대와 마찬가지로 미국 사회에서 소외되었고, 뉴딜정책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이는 1930년대 중반 흑인 시인 랭스턴 휴스(Langston Hughes)의 “미국이여, 다시 미국다워져라(Let America Be America Again)”라는 시를 보면 잘 나타난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그는 1933년에 당선되어 1945년까지 대통령을 했던 인물이다. 미국 최초로 4선까지 했던 그는 경제 대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뉴딜 정책을 펼쳤다.)

 

나는 가난한 백인, 바보 취급을 받아 구석으로 밀려나 있고,

나는 흑인, 노예의 낙인이 찍혀 있지.

나는 인디언, 살던 땅에서 쫓겨났고,

나는 이민자, 내가 찾는 희망에 매달려 있지.

그리고 발견한 것이라곤 그저 똑같이 낡고 어리석은 계획뿐.

동족상잔과 약육강식뿐.

아, 미국이여, 다시 미국다워져라,

지금껏 존재하지 않던 그런 나라로.

(후버 댐. 후버 댐은 1930년대 미국 애리조나와 네바다 주 사이에 건설되었다. 미국 뉴딜 정책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다.)

 

193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실행한 뉴딜정책은 경제 대공황으로 허덕이던 미국 경제를 완벽히는 아니지만, 최소한 생명을 연장해주는 호흡기 정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 공산당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것과 같이 뉴딜정책은 기본적인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한 정책”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라는 괴물같은 체제는 그대로 유지가 되었고, 탐욕스러운 자본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또한 뉴딜정책은 1929년에 시작된 경제 대공황의 여파를 종식시키지 못했다. 그런 경제 대공황을 돌파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해준 것은 1930년대의 국제정세였다. 1939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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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파크스 나의 이야기 - 미국 흑인 시민권 운동의 어머니
로자 파크스.짐 해스킨스 지음, 최성애 엮음 / 문예춘추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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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사소한 행동이 사회를 변혁하기도 한다.

1955년의 미국의 남부에선 그 악명높은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s)‘이 여전히 실행되고 있었다. 사회의 공공시설에서 흑백분리가 이어졌고, 식당, 화장실, 식수대, 도서관 등에선 흑인과 백인을 분리했다. 그 중에서 가장 문제가 심각했던 게 버스안에서의 흑백분리였다.

이런 흑백분리는 많은 흑인들로 하여금 반감을 가지게 했다. 그 반발은 1955년 몽고메리 지역에서 발생했던 한 여성의 사건에서 비롯됐다. 그 여성이 바로 ˝미국 흑인민권운동의 어머니˝라고도 불리는 로자 파크스(Rosa Parks)다.

로자 파크스는 1913년 미국 저남부인 엘라배마에서 태어났다. 로자 또한 다른 흑인인민들과 다를게 없이 어린 시절부터 미국사회의 극심한 인종차별을 겪었었다. 심지어 그의 할아버지는 KKK의 습격을 받을까 두려워 했고, 그 바람에 로자와 그의 가족들은 침대에서 잠을 잘 때도 평상시 옷을 입고 자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로자 또한 남부에서 살면서 그 힘든 밭농사도 했었고, 흑인들이 어떠한 고생을 하며 사는지 몸소 체험했다.

당시 미국남부에선 흑인 투표권을 막기 위해 흑인들에게 도저히 맞출 수 없는 문제를 내어 투표권을 부여치 않게 했는데, 로자 또한 그 때문에 3번이나 유권자 등록을 신청했다.

로자의 말에 따르면 사실 1955년에 미국 경찰에게 체포당했을 때, 버스에서 일어나길 거부했던건 일부러 의도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저 일하고 난 뒤 몸이 피곤했고, 버스에서 자리를 비키는 것이 피로로 인하여 짜증이 났었던 것이고, 그 때문에 백인들에게 자리를 비키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

로자가 체포되어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자 미국에 있는 흑인들은 이에 저항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렇게 해서 벌어진 것이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이다. 로자 파크스 사건을 계기로 미국 몽고메리주의 흑인들은 힘들더라도 버스를 이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투쟁했다. 그 결과 1956년 11월 미국의 연방 대법원은 버스안에서의 흑백 분리주의를 위법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후 로자는 1957년 미국 디트로이트로 이사했고 흑인인권운동에도 참여했다. 1963년 마틴 루터 킹이 주도했던 워싱턴 대행진과 1965년 셀마 투표권 투쟁에도 참여했다.

로자 파크스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한 사람의 사소한 행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역사적인 사실을 찾을 수 있었다. 또한 미국이라는 사회가 인종차별이 심한 사회였다는 사실을 로자의 자서전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우리는 20세기 흑인민권운동하면 그 운동을 이끌었던 분리주의자 말콤X와 통합주의자 마틴 룾더 킹을 생각하곤 한다. 물론 그들의 투쟁은 역사적인 측면과 인류애적인 측면에서 존경받고 본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안에는 로자 파크스와 같이 미국사회에서 직간접적으로 인종차별에 저항하며 투쟁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된다. 로자 파크스의 자서전은 암울했던 20세기 미국의 인종차별주의 역사와 그 민낯을 독자들로 하여금 얘기해줄 것이다. 많은 동지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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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맞짱뜬 나쁜 나라들 - 악의 뿌리 미국이 지목한‘악의 축’그들은 왜 나쁜 나라가 되었을까?
권태훈 외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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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정권을 잡은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귀가 따가워지도록 했던 발언이 있다. 그 발언 바로 소위 반미국가들에게 ‘악의 축(Axis of Evil)’이라는 단어를 시전하는 것이었다. 조지 부시는 반미국가인 북한, 이란, 이라크를 지목하여 악의 축이라 결론을 내림과 동시에 그 나라를 대상으로 하여 각종 경제 제재를 걸었고, 더 나아가 2003년에는 이라크를 침략했다. 그렇다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목했던 국가들은 과연 악의 축인 것일까?

책 ‘미국과 맞짱뜬 나쁜 나라들’은 “이것이 미제국주의와 지배계급이 미국 인민들과 전 세계 인민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해온 선전”이라고 반박한다. 사실 미국은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한 것처럼 과거에도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고 경제적으로 제재를 걸었었고, 현재도 진행중에 있다. 적잖은 나라들이 미국에 맞서 나름의 방식으로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 대표적으로 책에서 다룬 쿠바,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베트남, 북조선, 이란, 리비아가 그러했다.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저자로 유명한 임승수 선생을 포함하여 대략 7명이서 집필한 이 책은 7개 국가의 반제국주의 투쟁과 정치체제와 경제정책 그리고 그 투쟁이 전 세계적으로 미친 여파를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서술했다. 미국이 경제적으로 고립시켰던 쿠바의 사례를 먼저 보자. 미국 남부의 플로리다주에서 보일 정도로 아주 가까이 존재하는 쿠바는 콜럼버스의 약탈로 시작된 스페인의 식민지배에 맞서 독립투쟁을 전개했었다. 그러나 미서전쟁을 통하여 쿠바를 식민지배로 만든 미제국은 쿠바를 경제적으로 식민지배 했다. 그래서 20세기의 쿠바는 풀헨시오 바티스타와 같은 친미 제국주의자들은 미제국의 기업들이 쿠바를 착취하도록 도왔고, 쿠바 인민들은 값싼 사탕수수를 미국에게 바쳤다.

 

그러던 1956년 그런 미제국의 착취와 제국주의 지배에 반대하여 의식있는 82명의 젊은이들이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축출하기 위해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에 상륙했다. 상륙하자마자 항공기의 지원을 받은 바티스타군의 포위를 받았던 그들은 대략 12명만이 살아남아 쿠바의 밀림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해 나갔다. 그 게릴라전을 지휘했던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는 민심을 잘 사로잡았다. 의대를 나온 체게바라는 마을에 사는 민간인들을 무료로 치료해줬고, 수많은 민주인사들과 정당인들 그리고 종교인과 학생운동가들까지 혁명적인 게릴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결국 그렇게 민심을 잡은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는 1959년 쿠바 혁명을 성공시켰다.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그들은 미제국이 쿠바에 퍼뜨려 놓았던 악덕 자본기업들을 국유화했고, 자본주의적 착취를 종결시켰으며 무상의료 무상복지에 입각한 정책들을 실행했다. 그러자 미국은 쿠바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피그스만 침공을 벌이기도 했고, 쿠바 미사일 위기를 시작으로 쿠바 전체를 포위하여 3차 대전의 위기까지 이끌어 갔었지만, 그들은 제국주의에 굴복하지 않았다. 심지어 피델 카스트로는 미제국주의의 고립속에서도 예산 절반을 의료에 투자하기도 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그 이후에도 제국주의의 고립속에서 무상의료를 중심으로한 국가를 탄생시켰고, 1990년대 구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붕괴속에서도 무상의료를 비롯한 복지제도를 고수했다. 또한 식량 생산도 자급자족 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매우 친환경적인 시스템적 생산을 유지하며 발전해나갔다. 이것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의 고립속에서 쿠바가 해낸 것이다. 쿠바의 무상의료가 얼마나 대단한 시스템인지 알려주는 단편적인 예가 있다. 이는 9.11 테러 당시의 얘기인데, 9.11 테러 당시 미국의 소방관들을 치료한 것이 바로 쿠바였다. 책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겠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식코>라는 다큐멘터리에서 9.11 테러의 영웅들인 미국 소방관들이 유독물질에 따른 후유증으로 온갖 병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미국의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의료보험의 폐해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다. 미국의 의료는 국가가 아닌 기업에서 모든 것을 통제해 값 비싼 의료보험에 들지 않으면 치료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치료받은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쿠바였다. 마이클 무어 감독이 이들을 직접 쿠바로 데리고 가 치료를 받게 해준 것이다.(쿠바는 외국인도 무료로 치료한다.) 병원에 입원하여 쿠바 의료인들의 정성어린 치료를 받으면서 소방관들은 눈물을 흘린다. 미국이 외면한 자신들의 병을 미국의 적국인 쿠바 의사들이 치료해준 것이다.”

 

출처: 미국과 맞짱뜬 나쁜 나라들 p.42~43

 

이렇듯 비록 미국이나 한국보다 가난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한국 같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도저히 해내지 못한 일이 쿠바에서는 가능하다. 이러한 쿠바의 사례를 따라 냉전의 종식 이후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맞서 21세기 사회주의를 선언했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가 바로 트럼프가 전복시키고자 했던 베네수엘라다.

 

2019년 당시 미제국주의자 도널드 트럼프가 우익 반혁명 분자 후안 과이도를 내세워 전복시키고자 했던 베네수엘라는 각종 사회주의적 정책을 시도했던 나라였다. 비록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와 서방의 극심한 고립으로 인하여 현재의 경제 사정은 좋지 않지만, 베네수엘라 인민들은 신자유주의적 흐름을 거부했다.

 

니콜라스 마두로가 정권을 계승하기 이전 베네수엘라를 신자유주의로부터 방어했던 인물은 바로 우고 차베스였다. 우고 차베스는 2000년대 당시 미국과 서방으로부터 온갖 음해와 근거없는 비난을 받았던 인물이다. 심지어 미국의 제국주의 세력들은 그를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하는 망발을 일삼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만큼 미국에게는 눈앳가시와도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남미 원주민 혈통을 가지고 있는 우고 차베스는 참으로 멋있는 인물이었다. 우고 차베스가 집권하기 이전 베네수엘라는 빈곤층이 총 인구의 80%에 달하는 나라였다. 우고 차베스는 노동자가 주인인 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조합장과 조장을 직접 투표로 선출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민주적인 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그 결과 2006년 베네수엘라에는 10만 개가 넘는 협동조합이 생겨났다. 아무튼 이런 협동조합의 증가로 1999년에 16.6%였던 실업률이 2007년 1월에는 11.1%로 감소했다.

 

또한 우고 차베스는 무상교육과 무상의료에 기반한 복지정책을 실행했다. 그 결과 베네수엘라에선 글을 배우지 못한 노인들이 무상으로 글을 배울 수 있었고, 많은 지역 학생들이 무상으로 대학에 진학하여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차베스의 무상의료 정책은 많은 부분에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무상의료 정책으로 인하여 암치료와 같은 수술을 무상으로 받을 수 있었고, MRI 치료와 같은 것도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쿠바와 마찬가지로 외국인도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게 되었다. 즉 이런 무상치료는 단순히 감기치료와 같은 간단한 치료만이 무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책에선 베네수엘라의 무상의료 혜택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난한 나라에서 무슨 무상의료, 무상교육이냐고? 혹시 감기주사 한 방 놔주고 무상의료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남한에서는 100만 원을 줘야 받을 수 있는 MRI 진료가 공짜다. 남한에서는 200만 원이 드는 임플란트가 공짜다. 한 번 걸리면 집안이 풍비박산 날만틈 엄청난 치료비가 드는 암 치료가 베네수엘라에서는 공짜다. 놀랍게도 외국인도 공짜로 치료해준다. 앞서 얘기했듯이 필자는 2007년 1월에 비행기를 타고 직접 베네수엘라를 방문해서 이러한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 중에는 무상의료, 무상교육은 우리의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나라보다 못 사는 베네수엘라에서 지금(2008년 기준)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베네수엘라가 가능하면 우리도 당연히 가능하지 않을까?”

출처: 미국과 맞짱뜬 나쁜 나라들 p.65~66

 

비록 이 책 자체가 11년 전에 나와서 그 이후의 상황을 어느정도 생각하고서 봐야할 수 있겠으나, 미국과 소위 자본밖에만 모르는 자유주의자들이 내세운 신자유주의에 맞서 그러한 시험을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권이 했다는 사실 만큼은 역사적인 재평가가 필요하다. 아무튼 이 책은 정말 감명깊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부분이 많은 책이다. 필자가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챕터가 쿠바와 베네수엘라였기에 대표적으로 쿠바와 베네수엘라이기에 이를 좀 더 중심적으로 얘기 했다. 그 외에도 미제국주의의 노골적인 콘트라 우익 반동 지원 맞선 니카라과 인민들의 투쟁, 미국의 침략에 맞선 베트남 전쟁에서의 민중들의 투쟁,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맞선 북조선의 저항, 미제국의 봉쇄에 맞선 이란 인민들의 저항 그리고 미국의 탄압에 맞선 리비아의 저항 등 필자는 아주 흥미롭게 잘 읽었다.

 

이 책을 통해 필자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소위 미국이 악의 축으로 간주하거나 침략하여 전복시키고자 했던 국가들은 절대 악의 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 마지막 파트로 다룬 리비아만 보더라도 카다피 정권 시기 많은 진보적인 성과물이 있었다. 즉 미국이나 서방에서 얘기하는 것만큼 인간쓰레기 정도의 통치를 보였던 지도자는 절대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이런 국가들에게 무자비한 폭력과 억압 그리고 경제적 고립을 통해 고통을 주었던 미국의 행위가 더더욱 비판받을만 하다. 무슨 반미하면 오히려 더 못살기에 미국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역으로 친미를 강하게 해서 경제적으로 더 힘들어진 나라들도 많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그러한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있는 좌담회의 한 구절과 노엄 촘스키의 말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도록 한다.

 

“제가 베네수엘라 쪽 연구하면서 들여다보면서 놀란 게 뭐냐면 이 나라가 옛날에 꽤나 잘 살았다는 거에요. 아르헨티나도 굉장히 잘살았잖아요. 세계 4대 부국 중 하나였다던데. 우리는 남미를 되게 무시하는데 옛날에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들 많아요. 그리고 민주주의 수준도 우리보다 훨씬 높았고요. 그런데 그런 나라들이 한순간에 망하더라고요, 한 순간에. 그놈의 신자유주의 때문에요……. 제가 우려스러운 건 뭐냐면 남미가 옛날에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았고, 민주주의 수준이 더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IMF, FTA 같은 거 통해서 신자유주의식, 미국식 사회경제 체제가 들어가면서 쫄딱 망했거든요.”


출처: 미국과 맞짱뜬 나쁜 나라들 p.288


“미국이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불량국가’는 이라크나 리비아가 아니라 미국 자신이다.”


-노엄 촘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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