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류알바 단상

오늘 난생처음으로 몸으로 뛰는 노동을 했다. 용인에 있는 어떤 고기 공장이었고,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총 9시간을 노동했다. 비록 쉬는 시간도 중간에 있고, 점심도 공짜로 제공됐지만, 하나에 최소 10kg 이상이나 되는 고기상자를 수백개씩 옮기는 작업은 신체적으로 단련되지 않은 사람에겐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량생산체제를 통해 생산된 고기상자를 옮기면서 ˝이 노동을 통해 오늘 내가한 잉여노동은 어느정도 일까? 혹은 기업의 이익을 위해 창출한 잉여가치는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까지 노동현장에 대해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도 참으로 많이 들었다. 그부분에 있어서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나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였다.

첫날 치고 일을 그렇게 나쁘게 한 것은 아니어서 크게 혼나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노동을 했던것 같다. 힘들게한 노동이라 더 보람찬 일이었다. 이번에 막노동을 해보게 되면서 올해 내가 가야할 길을 잡을 수 있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매주 1번씩은 그런 노동을 통해 일을 해야겠다.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이로써 앞으로 노동현장에서 경험을 쌓을 것이다.

위대한 혁명가이자 휴머니스트인 에르네스토 체게바라 동지가 쿠바의 높은 고위직에 있으면서 신성한 노동을 통해 혁명사상을 고취시키고 남는시간에 독서를 하며 모범을 보였듯이 당분간 나 또한 신성한 노동을 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학습하는 모습을 실천할 것이다. 적어도 올해는 매주 1번 혹은 2주에 1번씩은 노동을 통해 학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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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 : 아바나 선언 레볼루션 시리즈 6
피델 카스트로 지음, 강문구 옮김, 타리크 알리 / 프레시안북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미국 플로리다주 최남단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나라 쿠바는 미제국의 각종 경제적 고립과 탄압 속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해온 나라다. 게릴라 투쟁으로 친미괴뢰정권을 몰아내고 사회주의를 건설한 쿠바는 1959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 미제국주의의 극심한 고립과 테러 속에서 생존해왔다. 195910월 쿠바에 대한 불법공습을 개시했던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19603월 쿠바의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망명자들로 구성된 반공 게릴라를 양성했고, 44세의 나이로 미국 대통령이된 존F케네디는 19614월 쿠바의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1500명으로 구성된 병사들을 피그스 만에 상륙시켰다. 피그스만 침공이 처절한 실패로 끝나자 케네디 정부는 그해 11월 소위 몽구스 작전(Operation Mongoose)’을 실행하여 쿠바 정부를 위협했었다.

 

이런 미제국의 위협이 지속되자 쿠바는 소련과의 관계를 형성해나갔고, 소련의 도움을 받아 미국의 노골적인 테러 및 간섭행위를 막기 위해 각종 미사일을 배치했었다. 이중의 소련제 핵ICBM이 있자 미국은 쿠바 전역을 함선들로 포위하여 고립시키고 소련까지 위협했었다. 미국은 데프콘2까지 발령하며 쿠바와 소련을 위협했으며, 결국 흐루쇼프가 미사일을 강제적으로 철수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였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소련의 굴복으로 끝난 이후에도 쿠바에 대한 미제국의 탄압은 중단하지 않았다. 1970년대 미국의 CIA는 질병을 퍼뜨려 쿠바 국민들이 식용으로 기르는 돼지 50만 마리를 폐사시켰고, 쿠바에 대한 경제적인 제재를 풀지 않았으며, CIA를 통해 쿠바 지도자를 암살하려 했었다. 미국이 그토록 암살하고자 했던 인물이 바로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미국이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에 저지른 테러리즘(Terrorism)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미국은 카스트로를 죽이기 위해 수백 번이나 암살 시도를 했었다. 미국은 왜 카스트로를 죽이려 했던 걸까? 그것은 바로 피델 카스트로가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들을 했기 때문이다. 1959년 바티스타 친미 괴뢰정권을 몰아낸 피델 카스트로는 당시 쿠바를 경제적으로 수탈하고 있던 연합 과일 회사(United Fruit Company)’와 같은 미국의 기업들을 국유화 했고, 거기서 창출되는 이익을 인민들에게 분배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농지개혁을 실행하여 미국이 지원하던 지주세력들이 개인적인 단위의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러한 조치들을 통해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인민들에게 무료로 공부할 수 있는 자유와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고자 했다. 또한 피델 카스트로는 미국에서조차 하지 못하던 인종차별 철폐를 이루어 냈고, 남녀평등정책을 추진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피델 카스트로를 죽이고자 했던 이유다.

 

혁명 시리즈 중 하나인 카스트로 아바나 선언은 총 3가지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파트는 1953726일 몬카다 병역 습격 이후 재판과정에서 피델 스스로가 변호사를 자처하며 법정에서 했던 발언인 역사가 나에게 무죄를 선고하리라. 두 번째는 1960년에 발표했던 제1차 아바나 선언이며, 세 번째는 1962년에 발표한 제2차 아바나 선언이다. 이 책의 첫 번째 파트인 역사가 나에게 무죄를 선고하리라를 보면 당시 피델이 어떠한 사회를 추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인민을 억압하고 미제국의 경제적 지배를 돕고 있는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을 축출해야 한다 생각했다. 피델이 보기에 바티스타 치하의 쿠바는 미제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로 사회의 소수계급이 다수를 착취하고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바티스타 치하의 쿠바에선 미국의 기업들이 쿠바의 자원과 생산물 대다수를 독점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익에 따라 쿠바 인민들은 착취에 시달리다 죽어 나갔다. 재판 당시 피델 카스트로는 법정에서 자신이 꿈꾸는 혁명정부의 비전을 얘기했다. 카스트로가 꿈꾼 사회는 주거 문제가 해결된 사회, 토지 불평등 문제가 해결된 사회, 부패한 관리들을 청산한 사회, 인민들에게 질좋은 유급휴가와 저렴한 대중교통 수단을 제공하는 사회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이루기 위해 더 이상 국고를 횡령하지 않고,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는 대기업으로부터 관료들이 착복하지 않으며 국가의 막대한 자원을 온전히 활용하고, 국가를 위해(방어할 국경도 없고 구입한 전쟁 무기는 오히려 국민을 향해 사용되는) 탱크나 전투기 등의 무기를 지나치게 구입하지 않으며, 국민을 교육하는 데 더 관심을 쏟는 사회였다. 따라서 카스트로는 자신의 진보적인 비전을 제국주의자들의 횡령과 착복행위를 청산하고 기업을 국유화함으로써 달성할 것이라 생각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비록 혁명이 성공한 이후 쿠바는 미제국주의의 극심한 경제제재에 시달렸기에, 경제적인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피델 카스트로와 쿠바 공산당은 인민들의 복지와 삶을 개선하기 위해 각고한 노력을 보였다. 실제로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는 미제국의 극심한 고립을 받고, 경제적 위기가 있을 때, 국방 예산을 줄여서라도 의료와 교육 정책에 많은 투자를 했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오늘날 쿠바의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제도다. 쿠바의 이와 같은 진보적인 제도는 2020년인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으며, 쿠바에 사는 외국인들 또한 이러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20019.11 테러 현장에서 부상을 당한 소방관들이 의료비가 비싼 미국에서 치료받지 못하고, 쿠바로 넘어가서 제대로 치료받은 일이 있었다. 아무튼 이와같은 피델 카스트로의 사회주의적인 이데올로기가 적용된 쿠바 사회는 세계적인 의료강국으로 우뚝 서 있다. 1차 아바나 선언과 제2차 아바나 선언에는 사회주의 쿠바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미제국주의자들이 악랄함과 사악함이 아주 잘 드러나 있다. 2차 아바나 선언에서 카스트로는 미제국주의를 아주 잘 분석했다. 대표적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제국주의 세력이 촉발시킨 2차대전은 파시즘의 격퇴, 세계 사회주의 형성, 식민지 종속국가들의 주권 투쟁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1945년과 1957년 사이 12억 이상의 인구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독립을 쟁취했다. 민중이 흘린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식민지 종속국가의 민중운동은 세계를 뒤흔들고 제국주의의 최후 위기를 특징짓는 보편적 현상이다. 쿠바와 남아메리카는 세계의 일부다, 우리의 문제는 제국주의라는 일반적 위기와 예속 민중의 투쟁이 야기하는 문제의 일부다. 즉 그 분쟁은 새로 탄생하는 세계와 죽어가는 세계의 분쟁이다. 우리 조국을 음해하는 섬뜩하고 잔인한 캠페인은 제국주의자들이 민중의 해방을 방해하기 위해 자행하는 부질없고 처절한 노력이다. 쿠바는 특별한 방식으로 제국주의자들을 괴롭힌다. 쿠바혁명에 대한 양키들의 증오에 무엇이 은폐되어 있는가? 현 세계에서 침략 목적으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제국주의 세력과 전 대륙의 독재 세력을 연합시키는(35000만 인구를 대변하는 이 세력은, 다른 국가의 안보를 위협할 금융, 군사 수단도 없이 경제적으로 저발전 상태에 있는 고작 인구 700만 명의 소국을 공격하려 한다) 그 음모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들을 연합시키고 부추기는 것은 공포다.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공포다. 혁명적 수단을 통해 쿠바에서 집권한 노동자, 농민, 지식인, 학생, 진보적 중산층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인, 진보적 중산층이 혁명적 수단으로 양키 독점 세력과 아메리카 대륙의 반동적 독재자들이 착취하고 억압해온 가난한 국가들에서 권력을 쟁취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아메리카 대륙의 약탈 당한 민중이 압제자들에게서 총칼을 회수하여 쿠바처럼 아메리카의 자유 민중으로 우뚝 설지도 모른다는 공포다.”

 

출처 : 카스트로 아바나 선언 p.115~116

 

미제국이 두려워했던 것은 남아메리카의 반미화였다. 이는 피델 카스트로가 제2차 아바나 선언을 발표할 시기 미국이 베트남 전쟁 개입 명분으로 내세웠던 도미노 이론처럼 참으로 제국주의적인 생각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미국은 어떻게든 피델 카스트로를 죽이려 시도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기록된 피델 카스트로의 연설들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의 투쟁적인 삶과 이데올로기가 있는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피델 카스트로 그는 분명 위대한 혁명가였고,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등을 통해 사회주의 쿠바를 세계 사회주의자들의 추구하는 목표 지점을 세운 인물이었다. 피델 카스트로가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벌써 4년이 넘었다. 피델의 죽은 뒤 그 뒤를 이은 동생 라울 또한 사회주의 쿠바를 번영으로 이끌고 있다. 더 이상 피델 카스트로는 살아있지 않지만, 그가 이룩한 사회주의적 업적은 지금도 많은 혁명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사회주의 쿠바는 앞으로도 자본주의에 맞서 사회주의 혁명을 수호할 것이다.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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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붉은광장 입구에는 말을 타고 있는 한 장군의 동상이 있다. 그 장군이 타고 있는 말은 나치깃발을 짓밟고 있고, 붉은광장에 놀러오는 관광객들을 항상 맞이한다. 그가 바로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 게오르기 주코프는 1896122일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생 시절의 주코프는 성적이 우수했다. 그의 어머니는 주코프를 그이 외삼촌에게 보내 가죽 가공 기술을 배우게 했지만 그는 끝까지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고, 독학으로 시립 중학교 입학시험을 통과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주코프는 항상 돈을 벌어야 겠다는 생각이 항상 있었지만, 군인의 길을 걸을 생각은 전혀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바뀌었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게오르기 주코프는 러시아 제국의 기병대에 입대했다. 두 달 동안 전투에 참여하여 두 차례나 훈장을 받았다. 특히나 훈련과정에서 우수한 능력을 보인 그는 장교의 권유로 부사관 교육과정에 다시 들어갔고, 1916년 봄 부사관으로서 교육을 받기 위해 제10 용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주코프가 전선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던 1917년 러시아에서는 레닌이 일으킨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10월 혁명이 승리한 이후 볼셰비키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있던 러시아의 군대를 불러들였는데, 주코프가 소속된 부대도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여기서 모스크바로 돌아온 주코프는 볼셰비키가 이끄는 당에 입당한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 1년도 지나지 않아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공으로 적백내전이 발발했다. 적백내전이 일어난 이후 주코프는 과거 차르 정권을 복구하려는 백군 세력에 맞서 싸웠다. 당연히 그는 내전 시기에도 기병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적군편에 서서 전투를 치렀고, 19199월에는 왼쪽 다리와 옆구리에 수류탄을 맞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적백내전이 끝난 이후 주코프는 기병 연대장, 여단장, 사단장 등을 거쳐 부사령관의 지위에 올랐다. 1920년대와 1930년대를 거치며 게오르기 주코프는 소련에서 유명한 군사 지휘관으로써 거듭났다. 스탈린이 추진한 공업화에 따라 소련의 기병대가 탱크를 이용한 기계화 부대로 거듭나면서 주코프 또한 기갑부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이 되었다. 보로실로프, 프룬제 등 소련의 육군 원수들은 주코프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

 

그는 탁월한 지휘능력을 가진 인물이었기에 스탈린의 대숙청도 피해갔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몇 개월 전 만주와 몽골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노몬한 전투에서 수많은 탱크 부대를 앞세워 탁월한 전략전술로 일본군을 섬멸했다. 여기서 주코프의 탱크 부대와 격전을 벌였던 일본군 부대는 소련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침략의 야욕을 동남아시아 쪽으로 돌리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19415월 소련군 참모총장이었던 주코프는 소련이 먼저 독일군을 선제공격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었다. 그의 걱정은 1941622일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전개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히틀러의 기습적인 침공으로 독소전쟁이 일어나자 게오르기 주코프는 여러 전선에서 활약했다. 19419월 독일군의 포위로 시작된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그는 히틀러가 그리고 점령하고 싶어했던 레닌그라드를 사수했다. 그가 이끈 군대가 레닌그라드를 사수하면서 히틀러의 계획은 무산됐다. 모스크바 전투 당시 주코프는 도시 방어의 책임자로서 모든 군사 활동을 지휘했고, 독일군 주력부대에 큰 타격을 주는 성과를 이룩했다. 결국 모스크바 전투에서도 승리를 이룩했다. 1942년 여름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시작되자 주코프는 최고사령관으로써 도시를 방어했다. 그는 독일 주력군을 스탈린그라드 밖에 묶어 둘 계획을 세워 이를 실천함으로써 독일군에게 25만 명이라는 엄청난 손실을 입혔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게오르기 주코프는 쿠르스크 전투를 포함한 여러 전선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1945년에는 벨라루스 제1군 사령관으로서 베를린 공방전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베를린 공방전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운 주코프는 58일 나치 독일의 무조건 항복 선언을 주관했고, 소련의 대표로 문서에 서명했다. 즉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는 전투와 항복 선언식에도 있었던 것이다. 이후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개선식에서 백마를 타며 장군으로서 큰 위엄을 보였다. 이후 주코프는 스탈린하고 사이가 크게 좋지 않았기에, 1950년대에는 원래의 직위보다 한참 낮은 우랄 지역의 사령관직으로 쫓겨났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소련 국방 제1부부장이 됐다.

 

그러나 1957년 국방부장으로 일하던 주코프는 당시 흐루쇼프와 불가닌 그리고 몰로토프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면직됐고 부장직에서 물러났다. 권력에서 물러난 이후 그는 자택에 머무르며 쿠르스크’, ‘베를린으로 향하는 길’, ‘수도 방어 전투 중에서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이러한 저서를 통해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직접 경험했던 기록을 후대에게 남겼다. 그러던 19746187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 그는 소련의 영웅으로서 크렘린궁 근처에 안장되었다.

 

게오르기 주코프는 훌륭한 군사 전략가였다. 그는 전장에서 탁월한 공을 세워 레닌 훈장 6, 10월 혁명 훈장 1, 붉은 깃발 훈장 3, 1급 수보로프 훈장 2, ‘승리최고훈장 2개 및 각종 상장뿐만 아니라 네 번에 걸쳐 소련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이렇게 혁혁한 공을 세웠던 주코프였기에 그는 러시아의 민족 영웅으로 이름을 남겼다. 여담으로 그는 미국산 코카콜라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스탈린이 그를 좋지 않게 보았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아무튼 그는 현재 러시아사람에게도 영웅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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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엔푸 전투 66주년 글

지금으로 부터 66년 전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마지막 보루인 디엔비엔푸 요새가 잡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1946년 프랑스가 함대로 하이퐁을 무차별 포격하여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시작했을때, 전쟁의 승자가 베트남이 될줄은 아무도 몰랐다.

기본적으로 장비와 무기면에서 프랑스군에 딸렸던 베트민은 프랑스군으로 부터 노획한 것과 일본군이 남기고 간 것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OSS가 지원했던 무기를 들고 싸웠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통일을 이룩하면서 그때부턴 중국에서 지원한 장비와 무기들이 들어왔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는 프랑스군을 고전하게 만든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뒤 프랑스의 앙리 나바르 장군은 라오스 국경지대에 있는 디엔비엔푸에 비행장을 세워 방어선을 구축했고, 16000명으로 구성된 프랑스 최정예부대를 투입했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은 5만 명의 병사와 이를 자발적으로 돕는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의 도움을 받아 디엔비엔푸 요새를 사방에서 포위할 수 있었다. 1954년 3월 13일 200대의 대포가 디엔비엔푸 요새에 포격을 가했고, 프랑스군의 포위망은 점점 좁아져 갔다.

5월 초 베트민군은 디엔비엔푸 방어선을 뚫는데 성공했고, 5월 7일 베트민은 카스트리 장군과 수십명의 장교를 포함한 11000명의 프랑스군 정예부대를 포로로 붙잡았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가 진 것이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구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를 종결 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식민주의에 맞서 싸웠던 대다수의 인민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승리였지만, 프랑스에 빌붙었던 반공주의적 민족반역자들에게는 끔찍한 소식이었다. 그들이 바로 남베트남의 지도부와 군관료들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주인으로 섬기던 프랑스가 물러나자 섬기는 주인을 미국으로 바꿨을 뿐이다. 따라서 디엔비엔푸 전투는 이후에 있을 베트남 전쟁이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가 아닌 ‘제국주의 대 반식민주의‘의 대결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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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 지음, 최호정 옮김 / 박종철출판사 / 1999년 2월
평점 :
절판


이번에 세미나를 하면서 레닌이 쓴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 Что делать)’ 읽었다.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었지만 다른 사회주의 원전들이 혼자서 공부하기는 좀 어렵듯이 레닌이 쓴 무엇을 할 것인가도 쉽지 않은 책이기에, 이번에 노정협에서 하는 세미나에서 같이 공부하게 됐다. 솔직히 공부하면서 어렵긴 했지만, 다를 사람들과 같이 공부하니 그래도 좀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었던 기회였다. 즉 레닌을 공부할 수 있었던 참으로 뜻 깊은 일이었다.

 

필자와 같은 또래인 20대 중에는 칼 마르크스와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름조차 모르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심지어 명문대를 나온 이들 중에도 위대한 사상가의 이름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 내 또래 중에는 꽤 있다. 이처럼 현실 사회주의 소련의 해체는 80년대 운동권의 몰락과 더불어 대학생들의 사상적 비무장화를 제도적인 틀 아래 자생적으로 창설했다. 이 때문에 20~30년이 지난 현재의 대학생들은 사회주의를 공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아래 살며 어떻게 하면 이 사회에 적응하여 돈 많이 벌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실천적인 변혁 행동에는 매우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동으로 집필한 독일 이데올로기 초반 부분을 보면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세계를 해석해 오기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은 철학이란 한 가지 사물이나 세계를 해석하는 것만이 아닌, 그 사물과 세계에 존재하는 모순적 구조를 변혁하는 게 더 핵심적이라는 얘기다. 그렇다. 철학을 비롯하여 우리가 다른 여러 가지를 공부하는 이유는 세상을 변혁하고 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이바지하기 위함에 있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가 마르크스와 레닌 그리고 사회주의를 학습하는 데는 여기에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필자가 읽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레닌이 집필한 제국주의론(Imperialism the highest rank of Capitalism)’, ‘국가와 혁명(States and the Revolution)’과 더불어 레닌의 3대 주요 저작 중 하나다. 또한 이 저작은 당시 레닌이 존경했던 러시아의 급진적 민주주의자인 체르니셰프스키의 동명 소설과 같은 제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레닌이 집필한 무엇을 할 것인가는 20세기가 시작되던 1901년에 집필됐고, 1902년에 출판되었다는 점에서 3대 저작 중 가장 먼저 나온 책이기도 하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이 가장 주요하게 비판하는 대상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당 안에 있는 소위 에뚜아르트 베른슈타인류의 경제주의자들이다. 이들이 발행하는 신문 중 하나인 노동자의 대의에 대한 레닌주의의 비판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아주 날카롭게 비판된다. 레닌은 이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증하는 빈곤과 프롤레타리아트화와 자본주의적 모순의 심화 등의 사실을 부정한다는 데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쉽게 말해 자본주의적 모순속에서 나타나는 민중의 프롤레타리아트화를 소위 개량주의적 성향을 가진 경제주의자들이 사회주의의 원칙을 부정하고 있고, 이것이 사회주의 혁명에 해가된다고 판단했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그 시기 러시아와 국제 사회민주주의 내에서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경향이 형성되어 있음을 분석하고, 맑스주의를 수정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꾸어 국제적 노동운동을 소위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를 침투시키는 기회주의적 경향의 본질을 소위 러시아의 경제주의자가 독일의 베른슈타인주의, 프랑스의 말레랑주의, 영국의 노동조합주의등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따라서 레닌은 이런 기회주의적 조류를 극복해야 하고, 이들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마르크스주의 혁명당이 승리할 수 없음을 책에서 밝힌다.

 

사실 이러한 레닌의 주장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운동권에도 어떤 면에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운동권의 현실은 대체로 경제투쟁에 집중해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가 현대사회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 복지가 예전보다 좀 더 갖추어진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기 이전에 마르크스가 가장 싫어했던 개량주의의 일환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는 복지가 발달했더라도 기업단위의 이윤추구를 봉쇄함으로서 개개인의 상호경쟁 등을 불필요하게 만든 생산양식 즉 사적소유의 철폐로 이어진 사회는 절대 아니다. 이것은 다른 유럽국가들보다 복지가 좋은 북유럽 또한 마찬가지다. 즉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시위는 경제투쟁에 기반한 부분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투쟁 자체가 의미가 없고 아예 중단해야 할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현실도 분명 반영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해 혁명적 실천력을 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닌의 무엇을 할것인가?’를 보면 엥겔스는 사회민주주의 투쟁의 커다란 형태로 두 가지(졍치 투쟁과 경제 투쟁)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즉 그 둘과 나란히 이론 투쟁도 인정한다. 여기서 레닌은 엥겔스가 쓴 독일 농민 전쟁이라는 책을 인용하면서 독일 사회의 예를 들었다. 그러면서 레닌은 엥겔스의 말이 예언되었다고 하며 몇 년 뒤 독일의 비스마르크 정권은 소위 사회주의자 특별법을 제정하여 독일 노동자들은 중대한 시련을 겪었었는데, 독일의 노동자들은 이에 준비했고 결국 승리하여 사회주의자 특별법을 폐지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던 점을 강조했다. 솔직히 제1장에 나온 이 장면은 국가보안법이 살아있는 대한민국의 현실과 오버랩됐다. 여기서 레닌의 주장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 앞에는 이보다 더한,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한 시련이 놓여 있다. 괴물과의 투쟁이 그들 앞에 놓여 있으니, 입헌 국가의 특별법이라는 것은 이 괴물에 비하면 그야말로 난장이에 불과하다. 이제 역사는 우리에게 당면 임무를 제기했다. 그것은 다른 어떤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당면 임무보다도 혁명적인 것이다. 이 임무를 실행한다면, 즉 유럽의 반동의 가장 강고한 보루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 반동(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의 가장 강고한 보루이기도 한 것을 파괴한다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가 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70년대 우리의 선각자들과 같은 헌신적인 결의와 열정으로 그보다 천만 배 더 넓고 깊은 우리 운동을 고무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선각자들, 70년대의 혁명 운동가들이 이미 얻은 바 있는 그 영예로운 칭호를 우리가 획득하리라 기대해도 될 것이다.”

 

출처 : 무엇을 할 것인가? p.34~35

 

이걸 또 한국의 현실에 반영하자면, 경제투쟁과 정치 투쟁 뿐만 아니라 이론적 투쟁을 통한 실천도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즉 노동운동과 더불어 사상적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 투쟁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위에 반대하는 투쟁도 노동계급의 의무로서 실천돼야 하는 사안이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투쟁을 목표로도 삼아야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바로 레닌이 쓴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해 얻어야할 결론이다.

 

사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당시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당 안에서의 역사적 맥락을 모르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책이다. 솔직히 어떤 러시아 사람이 현재 대한민국의 여러 사회주의 단체들의 논쟁과 대립 그리고 단체와 사상적 경향을 전반적으로 깊게 이해하는 것은 힘들 듯이, 우리 또한 마찬가지라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운동권 경향을 이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 기본적으로 레닌이 주장하는 사상적 맥락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레닌이 쓴 무엇을 할 것인가?’는 앞으로도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변혁적 실천을 이루고자 하는 인물들에게 분명히 많은 것을 가르쳐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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