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진주만 기습공격을 이미 알고 있었다(United States already expected the Japanese Attack in Pearl Harbor)?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이유는 일본때문이었다. 1939년 9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중립국(Neutral)‘을 표방했었다. 폴란드 침공이 시작된 1939년 9월부터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던 1941년 12월까지 미국은 총 27월이라는 기간동안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고, 그과정에서 대다수의 유럽은 나치 독일이 점령했다.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때도 미국은 중립을 유지했을 정도인데, 이는 미국이 유럽 문제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기를 꺼려했다는 반증이다.

물론 미국은 전쟁에 참전하기 이전부터 연합국들(특히 영국)에 막대한 물자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나치독일의 유보트(U-Boat)가 이에 훼방을 놓기도 했다. 유보트의 어뢰공격으로 미국의 상선들이 침몰당했지만, 히틀러에 대한 선전포고는 있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경험에 있었다. 1917년 4월 2일 참전을 결정했던 윌슨 행정부는 자원병 100만 명 확보를 목표했지만 모집 공고 6주 동안 입대를 자원한 사람은 7만 3천 명에 불과했다. 결국 자원이 아닌 징병을 통해 병력을 충원할 수 있었다. 여기서 윌슨 행정부는 방첩법, 선동금지법 등 악법을 제정해 시민들의 반전운동을 철저히 억압하는 한편, 대대적 선전 선동을(참전 결정 직후 결성된 선전기구 CPI의 홍보 요원은 자그마치 7만 5000명이었다) 통해 국민들의 전쟁 의욕을 고취시켰다. 결국 100만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확보한 미국은 러시아 혁명 이후 대부분의 병력을 서부전선에 투입한 독일 제국의 군대의 공세를 무찌를 수 있었고, 1918년 11월 독일측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1차 대전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미국인의 반전여론은 극에 달했다. 수정주의 역사가들과 의회 청문회 등을 통해 미국의 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JP 모건 등 대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무고한 미국 시민의 목숨이 희생됐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미국인들의 시각은 어떤면에선 전쟁 참전을 회피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미국인들의 강력한 반전 여론에 따라 미 의회는 1935년 이후 4차례 중립법을 제정해 미국의 해외 전쟁 참여를 막으려 했지만, 국제 정세는 또다른 전쟁을 향해 나아갔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자리에 올랐고,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으며,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이처럼 전세계는 전운에 휩싸였고, 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은 27개월 동안 중립국을 표방했지만,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됐다. 진주만 기습공격 다음 날인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서 일본의 불법 기습을 공식 발표했고, 연설 직후‘전쟁 참가법’을 발표했다. ‘전쟁 참가법’은 상원에서는 만장일치로 하원에서는 388:1로 가결됐다. 이로써 미국은 일본에게 최종적으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던 날을 ‘치욕의 날(Day of Infamy)‘로 선포했을 정도로 이 사건은 미국인들에게 역사적으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이 진주만 기습 공격이 사실은 ˝미국이 알고서 계획한 것˝이라는 주장이 역사학계에서 나오기도 했었는데, 이들의 주장은 상당한 근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진주만 기습 공격을 미국측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 ‘루스벨트를 비롯한 미국의 핵심 정책 입안자들은 일본을 자극함으로써 일본이 먼저 미국을 공격하도록 도발한 것은 아닌가?‘

두번째, ‘미국이 일본의 비밀 암호문을 감청하고 해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감춤으로써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부추긴 것은 아닌가?‘

세번째,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막거나 방해할 수도 있었던 미군의 군사 활동을 미국의 고위 정치지도자가 고의로 저지하지는 않았는가?‘

이와같은 시각이 등장한건 1948년 미국 역사가 찰스 비어드가 <루스벨트 대통령과 1941년 전쟁의 도래 : 겉모습과 실제에 관한 연구>를 펴내면서 본격 제기됐는데, 이 시기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데다가 미소냉전이 격화되는 시기어서, 그의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한 수정주의적 역사관은 그 시기 철저히 매장당했다. 하지만 이런 수정주의적 시각은 다른 미국인 학자들이 이어받기도 했는데, 1970년대 ‘일본 제국 패망사(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apanese Empire 1936~1945)‘의 저자인 존 톨랜드(John Tolland)가 그러했다. 이후에도 이런 수정주의적 주장들이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수정주의적 논란을 확실히 잠재우지는 못했다. 즉 진주만의 진실은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은 한편으로 우리에게 큰 논란거리를 만들기도 한다. 일본 제국 패망사를 쓴 존 톨랜드의 주장을 보면, 태평양 전쟁을 백인 대 아시아인의 구도로 보았는데, 그런 구도에 증거하여 ˝미국이 일본을 자극하지 않았다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발상도 있다. 저자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일본 제국의 위험성을 간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진주만 기습 공격 이전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조셉 그루(Joseph Grew)‘라는 인물이 루스벨트에게 ˝미국에 대한 일본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번 알렸다. 또한 11월 25일 미국의 최후통첩을 일본에 보내기 하루 전날, 루스벨트는 ˝미국이 며칠 안에 일본과 총격전을 벌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일본의 공격이 11월 27일-12월 1일에 있을 것으로 예상하기까지 했다. 이날 전쟁부 장관 스팀슨은 백악관에서 헐, 녹스, 마셜 육군 참모총장, 스타크 해군 작전부장 등과 회합을 가진 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문제는 어떻게 해서 일본이 먼저 공격하도록 할 것인가, 우리 편에 지나치게 큰 피해가 없이 일본의 선제공격을 유도할(maneuver) 것인가이다˝

이와같은 사실을 생각해볼때 미국이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유도했을거라는 주장이 그저 빈말은 아니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미국의 의도하고 안하고를 떠나 진주만 기습 공격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초기 미국은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군한테 밀렸다. 필리핀 사령관이던 맥아더는 필리핀을 등지고 호주로 도망쳤고, 괌과 웨이크 같은 미국측 섬들과 심지어 알래스카령 섬들까지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일본군의 진격은 거침없이 이어져 버마와 말레이시아, 싱가폴,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까지 접수했다. 이것은 영국 미국, 중국,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했던 ‘ABCD 포위망‘의 일시적 붕괴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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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도모르에 대한 우크라이나 측의 입장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의도적인 제노사이드라는 것이다. 즉 1932년에서 1933년에 발생한 기근에는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하겠다는 스탈린의 의도적인 목표가 있었고, 또 그의 명령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이다. ‘붉은 기근(Red Famine 1932~1933)‘의 저자 애플 봄도 자신의 책에서 홀로도모르를 볼셰비키 정권의 태생적 잔인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실제로 이오시프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하려 했다는 사료적 증거는 하나도 없다.

또한 제1차 5개년 계획에서 곡물 징발은 계속되었지만, 기근이 일어났을때 곡물 징발은 됐어도 목표치를 보다 더 낮게 잡는 완화된 초치가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홀로도모르의 특징은 크게 세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고 본다. 

첫번째는 당시 우크라이나의 기후가 최악이 었다는 점이다. 그 시기의 기상기록을 보면 날씨가 좋지 않은 날들이 많았고, 지금보다 농업기술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염두해두어야 한다.

두번째는 소위 우익들이나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농민 학살이라는 극단적 표현을 사용해가며 비판하는 부분인데, 이것은 소작농 입장에서 보면 계급투쟁적 관점에서 해석할 여지가 있다. 소위 쿨락(Kulak)이라 불리는 부농은 땅을 일반적으로 더 많이 소유하고 있던 계급으로 볼셰비키에 저항하려 했다. 쉽게 말해 해방 후 월남한 서북청년단과 같은 부류라 봐도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땅이 소작농들에게 분배되는 것이 싫어 소유하고 있던 농촌의 곡식을 불태우고 가축을 도살했다. 결국 부농들의 비협조 또한 기근의 영향이 분명 있었다. 따라서 경작할 토지가 없는 소작농들 입장에선 이들에 맞선 계급투쟁적 성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이 기근이 비단 우크라이나에서만 일어나는 기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현재 카자흐스탄과 남부러시아 그외의 스탄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국가들에서도 기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물론 기근의 심각도에 있어서 우크라이나가 심각하긴 했지만, 한가지 알 수 있는건 기근이 비단 우크라이나의 문제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에서의 기근을 가지고 학살이라고 얘기하긴 힘들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종합적인 결론은 스탈린의 의도적인 학살이라는 우크라이나의 주장은 그다지 현실성이 없는 얘기다. 무엇보다 기근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을 혼내주기 위해 스탈린이 조장했다는 얘기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황당무계한 소리다. 기근 도중에 곡물 징발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볼셰비키가 정책을 잘못잡았다는 주장은 할 수 있지만, 이것을 가지고 학살이라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기근에서의 아사자 수치가 서방에 의해 지극히 과장되었다는 것도 무시해선 안된다. 대숙청을 지극히 과장했던 로버트 콘퀘스트는 1980년대 자신이 쓴 책에서 기근으로 1500만이 죽었다고 했는데, 이게 니얼 퍼거슨이나 다른 우익학자들 구미에 맞아 그대로 인용되고 있는 수준이다. 전원책이 쓴 ‘자유의 적‘들에서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런 과장된 학설들은 1990년대 소련 문서가 개방되면서 수정주의적 학자들에 의해 반박당했다. 

또한 우크라이나 대기근 600만 아사라는 숫자단위의 제1차 출처가 1930년대 나치의 괴벨스 연설에서 사용됐다는 것도 알 필요가 있다. 나치는 노골적으로 반볼셰비즘을 표방했던 집단이었고, 소련에 대한 악마화를 했었던 집단이다. 나치가 제시한 자료는 반소정책이 강하던 미국이나 영국의 구미에도 맞아 1930년대 영국이나 미국의 신문사에서도 괴벨스 연설 자료가 그대로 인용됐다. 즉 충분히 아사자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난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스탈린의 일방적인 학살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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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모아 - [할인행사]
테리 조지 감독, 에이미 메디건 외 출연 /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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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고 이 리뷰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개봉하던 1998년 베트남 전쟁 관련한 한 영화가 개봉했었다. 이 영화는 1960년대 초 남베트남에서 미군사고문단을 지냈던 존 폴 밴(John Paul Vann)’이라는 인물의 일생을 영화화 한 것으로 종군기자 닐 시핸(Neil Sheehan)’이 쓴 밝게 빛나는 거짓말(A Bright Shinning Lie)’라는 책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바로 크레모아(A Bright Shinning Lie 1998)’. 왜 국내에선 영화 이름이 크레모아로 번역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올레티비에 있길래 한번 감상했다.

 

영화의 시작은 주인공인 존 폴 밴(John Paul Vann)’의 장례식부터 시작한다. 장례식에서 존 폴 밴에 대해 설명하는 나레이션이 나오더니 냉전 초기 전 세계적으로 있었던 사건(마릴린 먼로나 인공위성 발사,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 유리 가가린의 모스크바 방문, 무하마드 알리 등)들이 영상속에서 흘러나오며, 미군 장교들과 건배를 나누는 주인공의 모습부터 시작한다. 거기서 외치는 밴의 대사는 여러분 서베를린으로, 내년에는 모스크바로라는 대사를 외친다. 이 대사에서 밴은 미국의 가치를 믿는 미국주의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베트남에 군사고문단으로 배치된 밴은 남베트남군과 함께 여러 군사작전을 전개해 나간다. 그는 부패한 남베트남군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전략전술을 구사하도록 진심으로 돕고 싶어 하지만, 워낙 부정부패가 심각한 남베트남군은 밴의 충고와 조언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나 1963년 밴이 비행기를 탄 채로 작전을 지휘했던 압박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의 무능한 모습은 여실히 드러난다. 최신식 전투헬기와 수송헬기 15대와 APC 장갑 차량 10대 그리고 수천 명의 병사를 동원한 남베트남측 동원된 전투에서 무기나 화력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200~300명의 베트콩에게 아주 처참하게 패배하는데, 여기서 문제의식을 느낀 밴은 농민들이 왜 베트콩을 지원하는지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다.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밴은 남베트남군의 무능과 부패를 본국에 폭로하고자 했지만, 남베트남에서 비밀스런 작전을 전개하던 밴의 군 사령관은 그를 다시 본국으로 보낸다. 그것과는 별개로 밴은 미국에 아내와 여러 명의 자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베트남 여학생과 사랑에 빠져 바람을 일삼는다. 귀국한 이후 그의 바람행위에 와이프는 질타하고 경고하지만, 그의 바람기는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는 와중에도 지속적으로 있었고, 결국 남베트남 길거리에서 만난 어떤 젊은 여자와 사랑에 빠져 임신시키고 결혼식까지 올리게 되며 미국에 있는 가족과 해어지기까지 한다. 그의 과거는 참으로 처참했다. 밴의 어머니는 매춘부였고,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살아왔다. 결국 이런 배경이 그의 바람행위에 영향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무튼 본국으로 귀국한 밴은 미군 지휘부 인사들에게 자신이 찾게 된 미국과 남베트남군의 문제점을 직시한다. 그가 보기에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같은 인물들은 농민들에게 정당한 토지를 분배하기로 약속한 인물들이었고, 남베트남 농민들에게 있어 베트콩은 자신들을 지지해주는 세력이었던 것이다. 그는 베트콩이 농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좋은 정강정책을 내세우고 있고, 반면 이점에서 아무런 도움이 없는 미국이나 남베트남측은 지지를 얻지 못한 다는 점을 아주 명확하게 파악했다. 또한 그는 미국이 생각하는 데로 베트남 전쟁이 흘러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를 자신이 아는 기자에게 폭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베트남에 대한 사실적인 분석과는 달리 미국입장을 대변하는 결론을 지었다. 그는 이들의 지지를 베트콩이 아닌 미국과 그의 동맹 측으로 바꿔 전세를 역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1960년대 중반 그는 베트남에서 민간 선무 프로그램을 감독하는 인물이 되는데, 여기서 자신의 베트남 비젼을 마을에 실현시키고자 했다. 거기서 그는 낡은 마을과 학교에 있는 나이든 여교사와 초등학생 아이들을 위해, 낡은 건물을 고쳐주고 사탕과 물자를 공급해준다. 하지만 이런 밴의 행동은 그 지역을 담당하던 남베트남군 지휘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부패한 남베트남군 장교는 그 지역을 베트콩 출몰지역으로 규정한 뒤 마을을 네이팜 폭탄으로 폭격해버린다. 결국 그 폭격으로 마을은 파괴되고, 애꿎은 민간인들이 죽게되며 밴이 지원했던 초등학교의 학생들 또한 폭격으로 죽게 된다.

 

이후 밴은 베트남에서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한 늙은 베트콩 여성의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알고보니 그 여성은 과거 밴이 지원했던 학교의 교사였다. 이걸 목격한 밴의 동료는 우리가 애꿎은 민간인들을 베트콩으로 만들고 있어. 저 여자는 그 일만 아니었으면 베트콩이 되지 않았을 거야라고 하며, 베트남을 떠난다. 1968년 구정공세가 시작되는 당시에도 베트남에 남에 군생활을 계속한 밴은 군에서 높은 직종을 맞게 되고, 본국에서 반전시위가 계속되는 와중에도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전투에 임한다. 결국 존 폴 밴은 1972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되고, 콘툼 성 전투에서 사망하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존 폴 밴의 행동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상당히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동맹군인 남베트남이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알았고, 오히려 이에 맞서는 베트콩은 일본과 프랑스에 싸웠던 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영화 초반에 야 그 국(Gook, 동양인 비하 단어다.)들이 프랑스을 무찔렀어라고 한다. 그는 압박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이 소수의 베트콩에게 참패하는 것을 지켜봤고, 베트남 전쟁 승리 대안으로 농민지지 획득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도와줬던 한 여교사가 남베트남군이 저지른 학살행위를 보고 베트콩이 된 것을 봤다. 하지만 그는 절대적으로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 숭리를 추구했다.

 

그렇다면 왜 밴이라는 인물은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알면서도 미국편에 서서 싸웠던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존 폴 밴이 가지고 있던 미국주의라는 사상에 있다고 본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 전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었다. 그는 미국이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구심점으로서 필요하다면 미국이 개입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작중 초반에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한 남베트남측의 보도가 나오는데, 그는 소련이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켰다는 보도를 듣고 아주 열광한다. 글 초반에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농담으로 내년에는 모스크바에서라는 구호를 건배구호로 사용했다. 이는 마치 영화 공작에서 흑금성을 보내는 조진웅이 탱크밀고 평양까지 가야지라는 구호를 연상시키기 까지 한다. 즉 밴의 이데올로기에는 기본적으로 반공주의를 바탕으로한 미국주의가 깔려있었던 것이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밴이라는 인물의 치명적인 한계와 실책이 아주 명확히 보였다. 심지어 그는 대니얼 엘즈버그가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한 것을 들었음에도 자신과 친한 기자의 의견에 절대적으로 공감하지 않는다. 반공주의라는 사상이 결국은 최악의 실수인 베트남 전쟁이라는 수렁에서 그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이게 바로 반공과 미국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의 한계다. 영화 크레모아는 존 폴 밴의 이야기를 통해 미국이 저지른 베트남 전쟁의 실책을 꽤나 잘 파악했다. 일각에서는 미국주의를 향한 존 폴 밴의 투지에 감명 받아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존 폴 밴은 미국입장에서 보면 애국자이기 때문이다. 영화 크레모아는 미국주의자의 치부를 파악하기 매우 좋은 영화였던 것 같다. 결국 그러한 잘못된 믿음과 신념이 베트남 전쟁이라는 냉전 최악의 대학살극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깨달아야 하는 교훈은 반공주의와 미국 우월주의의 한계와 치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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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엔푸 - 1945~1954 베트남 독립전쟁 회고록
보응웬지압 지음, 강범두 옮김 / 길찾기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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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프랑스를 패배시킨 디엔비엔푸 전투(The Battle of Dien Bien Phu)20세기 역사에 있어 식민지 지배를 종결시킨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다.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는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야욕으로 8년간 지속되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종결시켰고, 베트남이 독립국가로서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은 20년 동안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 했지만,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는 식민주의에 맞서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대다수의 베트남인들에게는 영광적인 승리였다. 식민주의에 맞서 영광적인 승리를 거둔 이 전투를 보다 더 자세히 알고 싶었던 필자는 이번에 길찾기 출판사에서 출간한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장군의 회고록 디엔비엔푸를 읽게 됐다.

 

작년 12월 밀리터리 관련 책들을 많이 출간하는 길찾기 출판사에서 출간한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장군의 회고록 디엔비엔푸는 그의 또 다른 회고록인 디엔비엔푸로 가는 길디엔비엔푸의 합본이다. 책 디엔비엔푸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 식민주의에 맞서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웠던 호치민(Ho Chi Minh)을 포함한 베트남 공산당 인사들과 민중들이 전개한 투쟁의 기록으로써, 당시 베트남인들이 어떻게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승리를 쟁취했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그렇다면 디엔비엔푸 전투가 종결시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어떤 전쟁이었을까?

 

책의 시작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중국의 지원을 받아 반격에 나서던 동케 전투(Battle of Dong Khe)’부터 시작한다. 동케 전투를 시작으로 책은 홍강 삼각주 전역, 드라트르 장군의 반격, 호아빈 전투, 응이하로 점령,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의 전투들, 베트남 북부와 중부 그리고 남부에서의 투쟁과 마지막으로 디엔비엔푸 전투까지 포괄한다. 1950년부터 1954년까지 약 4년간 베트민군이 치렀던 수많은 전투들은 디엔비엔푸 전투까지 가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 속에서 잡 장군 휘하의 베트민군은 무수히 많은 프랑스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이들의 사기를 저하했으며, 각 전투 마다 수백 명 내지는 천명 이상 단위의 프랑스군을 사살하거나 생포했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민군은 무수히 많은 프랑스군을 사살하거나 생포했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궁극적으로 영광스러운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로 이어졌다.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주로 북베트남 지역에서 치러줬지만, 라오스와 캄보디아, 베트남 중부와 중부고원지대 그리고 베트남 남부를 포괄한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에서 전투가 전개된 전쟁이었다. 물론 베트남을 침략한 프랑스의 주력은 베트남 북부에 있었지만, 다른 전선에 있던 베트민들 또한 강력한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많은 물자와 무기를 노획하기도 했었다. 1950년 당시 베트남 남부에서 있었던 전과를 예시로 들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부에서는 제7구역에서 7번 국도와 14번 지방도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투저우못(Thu Dau Mot)에서 벤깟(Ben Cat) 작전을 전개해 게릴라전 수행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고, 메콩 삼각주 보급로를 소통시켰다. 작전사령부는 사령관 토끼(To Ky), 참모장 레득아인, 정치지도원 응우옌 주 아인(Nguyen Duy Anh)이 보직되었다. 그 작전은 남부 베트남의 동부지방에서 프랑스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최초의 작전이었다. 한 달 동안 지속된 작전 기간 중, 우리 군은 전술기지에 대한 38회의 공격, 증원군에 대한 2차례의 매복 공격 및 차량화 부대에 대한 43회의 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은 두 차례 소탕작전과 204회의 강습작전을 통해 사살 509, 부상 155, 생포 120, 10여 개소의 감시초소 및 검문소, 12개의 교량, 84대의 차량, 5대의 오토바이 및 7대의 모터보트를 파괴했으며, 총기류, 탄약, 장비 및 식량을 노획했다.”

 

출처 : 디엔비엔푸 p.98~99

 

194611월 프랑스의 하이퐁 폭격과 12월 하노이 전투를 시작으로 일어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은 전쟁 초기 프랑스군에게 아주 유리하게 돌아가는 전쟁이었다. 전쟁 초기 프랑스는 하이퐁에서 무차별 함포사격으로 600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고, 12월에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수도인 하노이를 점령했으며, 194710월에는 레아 작전(Operation Lea)’이라 하여 10,000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한 대규모 공세를 전개했다. 그 공세는 호치민과 베트민의 해방구인 비엣박을 대상으로 한 공격이었지만, 초반의 신속한 습격과는 달리 전선이 교착되었다. 이후의 전선은 점차 베트민에게 유리해지기 시작했고, 1949년 중국 혁명의 승리와 더불어 1950년에는 베트민 군대가 프랑스군에 맞선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1950년 당시 잡 장군 휘하의 베트민 군대는 가을과 겨울에 걸쳐 수많은 프랑스군을 섬멸했는데 동케 전투에서만 최소 300명 이상을 사살하거나 생포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의 정예부대들이 축출되었고, 그 부대들 중에는 프랑스 해방 전쟁에서 라인강을 건넜던 최초의 부대이자 북아프리카에서 명성을 떨쳤던 타보르 부대도 있었다.

 

잡 장군의 회고록 디엔비엔푸를 읽다보면 프랑스군이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악행들을 일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프랑스군은 베트민을 축출하기 위해 인근 마을로 들어가 민간인들을 죽이고 학살했다. 아이와 노인들이 프랑스군의 총에 희생되기고 했고 여성들은 강간당했으며, 마을에 있던 물소는 사살되고 식량은 약탈당했다. 반면 베트민들은 민중을 존중했고, 그들과 함께 연합하여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에 맞서 싸웠다. 당시 프랑스군이 베트민군을 타격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책에 아주 명확하게 나와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는 우리 식량 보급을 고사시키고 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냈다. 그들은 베트남의 인력과 식량의 주 근원인 메콩 삼각주와 홍강 삼각주를 점령하고, 임시 피점령지역에서 해방 구역으로 가는 모든 길을 차단했다. 그리고 많은 지역에서 추수를 마친 농민들에게 벼를 특정한 장소로 집하하도록 하고, 가족의 수를 기준으로 필요 최소한의 양만 되돌려줬다. 그리고 평정작전을 수행할 때는 베트민군을 찾는 한편으로 농작물과 생산기구들을 파괴했다. 그들은 물소 한 마리를 죽이는 것을 게릴라 두명을 죽이는 것과 동일시했다. 벼나 다른 곡식을 발견하면 불태우거나 강에 쏟아버렸다. 프랑스인들은 항공기와 대포를 사용해 논을 파괴하고, 농부들이 논에서 일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상륙용 장갑차로 논을 깔아뭉개기도 했다. 더 야만적인 것은 탁후옹(Thac Huong), 바이트엉(Bai Thuong), 퐁락(Phong Lac), 반타익(Ban Thach) 및 도르엉(Do Luong)의 댐에 대한 폭격으로, 이로 인해 200,000헥타르 이상의 논이 말라버렸다.”

 

출처 : 디엔비엔푸 p.197~198

 

위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베트민은 민중과 함께 혁명투쟁을 했다. 혁명투쟁을 하던 베트민들은 마을에 머물 경우 민간인들의 의사를 존중했다. 베트민은 절대로 민가에서 약탈하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그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했다. 소수민족 마을의 경우 그들의 종교와 관습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베트민은 민중에게 혁명전쟁의 대의가 무엇인지 아주 명확하게 알려줬다. 즉 베트민은 민중에게 우리가 왜 프랑스에 싸워야 하는지 그리고 왜 이 전쟁을 지지해야 하는지를 알려줬다. 베트민이 민중과 공동투쟁을 했다는 사실은 호치민 주석의 연설에 아주 잘 드러나 있다.

 

농민계급은 국가의 토대입니다. 그들이 인민의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저항전쟁을 승리로 매듭지으려면, 그리고 인민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면, 농민들의 경제적 이익이 현실적으로 증진되고 경작지는 농민들에게 할당되어야 합니다.”

 

출처 : 디엔비엔푸 p.338~339

 

프랑스군은 무수히 많은 마을에서 베트남인들과 소수민족들을 괴뢰군대에 징집했고, 꼭두각시 황제인 바오다이를 내세워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의 대결로 포장하고자 했다. 이런 프랑스의 전략은 전쟁에서 미국의 도움을 받기 위한 하나의 책략이었고, 냉전이 격화됨에 따라 미국은 프랑스에게 식민지 지배를 유지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이 부분에서 많은 분노를 느꼈다. 당시 미국은 반공의 논리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접근했다. 특히나 1950년 한국전쟁은 미국에게 있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반공주의 전쟁으로 보게 되는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미국의 군사물자 원조는 19511,490억 프랑에서 19521,960억 프랑으로 증가했고, 인도차이나로 항공기, 전투차량, 중화기, 탄약, 상륙함, 차량, 무전기, 네이팜탄, 연료를 신속히 보내주었다. 미국은 19521월까지 항공기 178, 각종 함정 170, 다수의 전투차량, 탄약 및 통신장비룰 포함해 120,000t의 전쟁 물자를 인도차이나에 보급했다. 그들은 인도차이나 전쟁의 전체 전비 가운데 40%를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1950년 동케 전투를 시작으로 북부 베트남의 홍강 삼각주 지역을 장악했던 베트민이 1951년 초에 프랑스군을 향한 총 반격에 나섰을 때 그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프랑스의 드 라트르 장군이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네이팜 폭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미국의 지원은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고, 전쟁 말기 미국은 프랑스 전쟁비용의 80%를 부담했다.

 

잡 장군이 역사적인 디엔비엔푸 전투를 전개하기 까지, 프랑스군을 상대로 치렀던 전투는 대부분 승리의 기록이었다. 비록 1951년 잡 장군이 주도했던 총 공격은 프랑스군이 미국에게 지원받은 네이팜 폭탄을 사용하면서 일시적인 후퇴로 끝났지만, 1952년 호아빈 전투에서 베트민군은 수개월간의 전투 끝에 대략 6000여 명의 적군을 소멸(사살, 포로, 실종)시켰다. 이 전투는 미국의 역사학자인 버나드 폴(Bernard Fall)호아빈 전역에서 프랑스가 입은 병력과 무기의 손실은 국경 전역이나 이후 발생한 디엔비엔푸 전역의 피해와 비교해도 결코 작지 않았다.”고 얘기했을 정도였다. 호아빈 전역을 시작으로 베트민군은 응이하로에서도 승리를 거뒀다.

 

1953년 춘하 기간 중 베트민군은 홍강 삼각주에서는 7,200명을, 연합구역에서는 5,970명을 소멸시키는 성과를 이룩했다. 1952년과 1953년 북베트남 지역에서 많은 승리를 이룩한 잡 장군의 베트민군은 라오스 지역에서도 수파누봉 왕자를 포함한 라오스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라오스 혁명군과 연합하여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이룩했다. 특히나 삼네우아의 해방은 크나큰 승리였다. 수파누봉 왕자는 삼네우아 해방은 침략자들에 대한 라오스 모든 민족들의 수년간에 걸친 투쟁의 결과입니다. 베트남-라오스 결속의 결과이며, 공동의 적에 대항해 싸운 베트남 인민과 군의 무조건적인 지원의 결과입니다.”라고 말했다. 20세기 최고의 명장 보 응우옌 잡 장군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1953517, 98연대는 제148연대와 협조해 무옹코아를 두 번째로 공격했다. 무옹코아는 남오우강 우안으로 디엔비엔푸에서 50km가량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약 300명의 적을 소멸 또는 생포했다. 무옹코아 지휘관인 뙬리에(Teulier) 대위도 포로 중 한 명이었다. 베트남과 라오스 군은 북부 라오스 작전에서 약 2,800명의 적을 소멸시켰는데, 이는 라오스에 있던 적 병력의 1/5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와 같이 4,000이상의 지역과 수십만 명의 주민들을 해방시켰다. 이 지역은 삼네우아 전역과 시엥쿠앙 및 퐁살리성의 일부를 포함했으며, 북부 라오스 지역의 1/5에 해당했다. 마강 및 추강 유역의 땅도 해방되었다. 라오스 저항군은 처음으로 광활한 혁명기지를 갖게 되었다. 라오스 혁명 후방은 우리의 북쪽 해방구역 및 제4구역과 인접했다. 그래서 중국과 인접한 북베트남 국경지역의 광대한 지역이 해방된 후, 이제 라오스와 인접한 서쪽 변경의 일부가 해방된 것이다.”

 

출처 : 디엔비엔푸 p.367~368

 

1953년 새로 임명된 프랑스군 사령관 앙리 나바르(Henri Navarre)는 그해 11월 라오스 국경지대에 있는 디엔비엔푸 요새에 군대를 배치하게 되는데, 10,000명 이상의 군대를 투입했다. 그 이후에도 병력을 지속적으로 증강하고 지원하여 디엔비엔푸 병력 규모가 16,200명까지 증가했다. 잡 장군이 책에서 쓴 표현을 빌리자면 디엔비엔푸는 완전히 무장된 방어체계로서 전반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미국과 프랑스는 베트민이 디엔비엔푸를 공격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이 예상과는 달리 탁월한 전략가였던 보 응우옌 잡 장군은 디엔비엔푸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연공연진의 접근법으로 디엔비엔푸 요새를 함락시키고자 했다.

 

잡 장군이 지휘하는 5만 명 이상의 군대는 200문 이상의 대포를 산에다 배치했다. 트럭이 이동할 수 없는 곳으로는 대포를 인력으로 진지까지 끌고 갔다. 대포를 배치하기 위해 일부 병사들은 대포가 굴러 떨어지자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 이를 막기도 했다. 절대로 포를 적 집단전술기지 근처까지 옮길 수 없다는 프랑스인들의 예상과 달리 베트민들은 수백 톤에 달하는 대포와 탄약을 가파른 경사와 깊은 계곡을 극복하며 전장으로 옮겼다. 심지어 옮겨진 대포는 프랑스군의 105mm, 155mm 야포 공격에도 견딜 수 있는 유개포상이 구축된 곳에 배치됐다. 또한 수만 명의 민간인이 디엔비엔푸 전선에서 베트민군을 자발적으로 도왔다. 민간인들은 식량과 물자를 인력이나 자전거 내지는 말이나 당나귀를 이용하여 옮겼다. 이렇게 만발의 준비를 끝낸 베트민군은 195431317:00시에 포격을 개시했고, 점진적으로 프랑스군의 진지와 거점을 무너뜨렸다. 초기 베트민군의 포격으로 프랑스군은 비행장을 잃었고, 물자를 비행기로 수송 받으며 점차 고립되어 갔다. 잡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군은 19545756일간의 포위 끝에 디엔비엔푸 요새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잡 장군은 이 영광적인 승리를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총공격을 위한 준비가 끝났다. 195457일 오전, 작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적이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극소수의 항공기가 식량만을 공수투하할 뿐, 탄약을 운반해 온 항공기들은 하노이로 돌아갔다. 적 지역 여기저기서 무기를 파괴하는 것 같은 폭발음이 들려왔다. 일련의 병사들이 무기와 탄약을 넘롱강에 던져 놓고 있었다. 우리는 적이 혼란에 빠졌다고 판단했다. 아군은 준비 명령을 수령했다.

 

14:00, 어느 아군 부대가 507번 거점을 공격했다. 적은 미미한 저항 끝에 항복했다. 이 승리에 이어 우리는 넘롱강 좌안의 508, 509번 진지를 소멸시켰다. 적이 큰 혼란에 빠져 전투 의지를 상실했음이 명백해졌다. 백기가 여기저기에 내걸렸다. 15:00, 우리는 밤이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집단전술기지에 대한 총공격을 곧바로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아군 여단들은 동쪽과 서쪽에서 상호 협조 하에 적 지휘소를 직접 타격했다. 비록 적은 아직 10,000명이나 남아있었지만 완전히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아군이 가는 곳마다 적은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17:30, 우리는 지휘소를 탈취했다. 드 카스트리와 참모들은 모두 생포되었다. 계곡에 있던 모든 적들이 나와서 항복했다. 그들은 포로로서 잘 취급되었다. ‘결전필승이라는 구호가 적인 깃발들이 디엔비엔푸 상공에 휘날렸다. 우리는 바로 그날 야간에 남부구역을 공격했다. 그곳에 있던 2,000여 명의 강력한 적들은 북부 라오스로 철수를 시도하고 있었다. 아군은 추격을 단행해 20:00시까지 따라잡았다. 우리는 자정까지 그들 모두를 생포했다. 55일간 지속된 전투 끝에, 디엔비엔푸에 있던 적 집단전술기지는 완전히 궤멸되었다. 우리의 역사적인 디엔비엔푸 작전은 완전한 승리였다. 1953~1954 동춘 기간의 전략적 공세가 위대한 승리로 끝을 맺은 것이다.”

 

출처 : 디엔비엔푸 p.491~493

 

보 응우옌 잡 장군의 자서전 디엔비엔푸는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베트민 투사들의 투쟁 과정과 디엔비엔푸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쟁취하는 과정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책에 기술되어 있듯이, 1950년부터 1954년까지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기록은 베트민군이 쟁취한 승리의 연속이었고, 최종적인 전쟁 승리인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연속된 과정이었다. 이 역사적인 디엔비엔푸 전역은 베트민 군과 인민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거의 1세기에 걸친 항불전쟁에서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들 그리고 베트남 민중이 거둔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역사상 약소국이 제국주의자, 식민주의자들의 침략군을 상대로 거둔 가장 위대한 승리 가운데 하나였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군은 총 16,000명 이상의 적을 사살하거나 생포했고, 집단전술기지의 최고사령부를 전부 포로로 잡았으며, 거기에는 장군 1, 대령과 중령 16, 장교와 부사관 1,749명이 포함되었었다. 또한 62대의 미군 폭격기, 전투기, 수송기를 격추시켰다. 다른 전선에서는 177대를 격추했다. 프랑스군 병력은 17개 정예 보병대대(7개 공정 대대)뿐만 아니라 3개 포병대대와 약 1개 공병대대가 있었는데, 베트민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이런 프랑스 최정예부대를 섬멸했다. 따라서 디엔비엔푸 전투는 엄청나게 위대한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은 앙리 나바르가 패배한 이유를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던 베트민군의 의지를 간과했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필자 또한 이와 같은 잡 장군의 주장에 동의한다. 잡 장군의 명언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바르는 디엔비엔푸를 보강하고 우리 정규군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한다는 전략적 결심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그리고 이 일대를 우리가 계곡을 공격하더라도 심각한 손실을 입힐 수 있는 이상적인 전장으로 여겼다. 나바르가 이 진지에 집중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저지른 실수는 디엔비엔푸의 장점에만 주목했을 뿐, 약점을 보지 못했다는 데 있다. 더 큰 실수는 부르주아 전략가의 개념에 골몰하여 국가의 독립, 자유, 그리고 사회주의를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던 인민군과 전 인민들의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 인민과 군의 진화와 괄목할 만한 성장, 그리고 필승의 신념을 가진 인민군의 불굴의 투쟁정신을 깨닫는 것은 나바르에게 여전히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출처 : 디엔비엔푸 p.452~453

 

따라서 프랑스 최정예부대가 디엔비엔푸에서 패배한 이유에는 이러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의 근원을 찾자면 프랑스 제국주의 그 자체에 있었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베트남 민중과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던 공산당 지도부와 베트민 병사들에겐 영광스러운 승리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쟁을 일으켰던 프랑스 제국주의자들과 이를 지원하던 미국의 제국주의자들 그리고 식민주의에 협력한 베트남의 식민주의자들에게는 뼈저린 패배였다. 뼈저린 패배를 경험한 베트남의 식민주의자들은 제네바 협정 이후 남베트남에 정착했고, 이들이 남베트남 사회의 지배세력이 됐다. 따라서 디엔비엔푸 전투는 이들에 맞서 싸운 민족해방투쟁이자,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이들이 치르게 될 ‘20년의 전쟁또한 민족해방투쟁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역사다.

 

책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지만 디엔비엔푸 전투는 우리하고도 연관이 있다.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의 이승만 정부가 19541월에 자청한 한국군 1개 사단의 파병도 재검토 했었다. 이승만 정부는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으로써 도와줬던 프랑스에 대한 보답과 동남아시아에서의 반공정신 고취 및 강화하고자 파병하려 했었다. 물론 미국이 거절해서 실행되지 않았지만, 식민주의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려 했던 이승만 정부의 행동은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라 할 수 있다.

 

길찾기 출판사에서 출간한 디엔비엔푸는 베트남의 명장 잡 장군의 입장 즉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당사자인 베트남인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디엔비엔푸 전투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책이 잡 장군의 두 회고록인 디엔비엔푸로 가는 길디엔비엔푸의 합본으로서 디엔비엔푸 전투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승리를 만들어낸 일련의 전투 과정(1950년부터 1954년까지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전투들)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아주 좋은 자료다. 무엇보다 2020년 기준으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디엔비엔푸 전투를 주제로 한 유일무이한 책이라는 사실에서 그 중요성과 상징성이 매우 높다. 특히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필자로선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크나큰 영광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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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19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은 남북한 모두에게 치명적인 파괴를 가져왔고, 전후 분단모순을 극대화했다. 한국전쟁은 1953727일 휴전협정으로 끝이 났다. 말 그대로 휴전이란, 전쟁을 잠깐 쉬는 것으로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종결은 1945년부터 시작된 분단 모순을 극대화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나 1948년 정부수립 이래로부터 반복적으로 북진통일을 주장해오던 이승만 정권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도 그리고 휴전회담 이후 자유당 독재정치를 공고히 하면서도 정복주의적 통일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난 이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과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도 이승만 정권과 다르지 않게 북을 적대시하는 반공주의적 정책을 따라왔다. 따라서 반공주의라는 시대사적인 트라우마 및 부작용이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학자들에게 부여하지 않았다. 정부가 제시한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에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다면 목숨을 걸어야 하거나, 사회적 신분을 박탈당한 각오를 해야 했다.

 

1987년 민주화 투쟁으로 민주화를 이룩하기 전까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던 30년의 지적·사상적 암흑기는 민중에게 한국전쟁을 국가가 제시한 시각에서 다르게 해석할 여지를 남기지 않았지만, 민주화 운동은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미약하게나마 부여했다. 특히나 1980년대 극심한 전두환 군사독재의 안티테제로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학생들은 실제로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전제를 두고 역사를 바라보기도 했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 of Korean War)’은 운동권에게 있어 한국전쟁을 정부가 제시한 관점과는 다르게 해석하게 되는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그러나 1987년 대한민국이 민주화를 이룩한 이후에도 친일세력으로부터 시작된 반공주의라는 망령은 민중 대다수를 지배하고 있었다. 1990년 전 빨치산 출신인 이태라는 인물이 자신의 빨치산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남부군이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되기도 했지만, 보수세력들의 극심한 저항과 항의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후에도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는 대체로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인식되어 왔고, 대중의 주류적 흐름 또한 대한민국 피해자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한국사회에서 우파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는 주제중 하나고, 다른 한편에선 역사를 인식하는 관점에 차질이 생기는데 악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주제다. 그러나 한국전쟁 또한 얼마든지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 역사학자 EH카의 주장대로 역사란 현재와 과거 끝없는 대화이기 때문에 기존 주류사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적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전쟁이 어떻게 해서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전재로 해석할 수 있고, 그 근거가 무엇인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2. 한국전쟁을 인식하는 관점

 

한국전쟁을 인식하는 관점은 국가에 따라 다양하다. 우선 한국전쟁을 먼저 시작한 북한은 이 전쟁을 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남조선 괴뢰 도당을 몰아내는 전쟁으로 인식하는 의미에서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명칭은 북의 대중매체나 자료들에서 자주 사용된다. 그에 비해 오히려 북한에게 공격을 받았던 대한민국의 경우는 “1950625일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 전쟁이라 하여 ‘6.25전쟁이라는 명칭을 대체로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물론 현재는 한국전쟁이라는 표현도 쓰긴 하지만, 6.25전쟁이라는 명칭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반면에 한국전쟁이라는 내전에 개입을 했던 미국과 중국 또한 명칭이 다르다. 195010월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한의 수도인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자 군사적 개입을 감행했던 중국은 미국에 맞서 조선을 지원한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항미원조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 명칭은 지금도 중국에서 한국전쟁을 부르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반면에 미국은 한국전쟁이 지금까지 미국이 치른 전쟁에 비해 잊혀졌다 하여 소위 잊혀진 전쟁(Forgotton War)’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한국전쟁(Korean War)’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의미에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곧바로 개입한 미국은 이 전쟁은 자신들이 지키고자 했던 국가 한국이라는 이름을 따서 부르는 의미가 존재한다. 이런 미국의 인식은 2013년 한국전쟁 휴전협정 60주년을 맞아 워싱턴 한국전쟁 메모리얼(Korean War Memorial)에서 연설을 했던 버락 오바마의 한국전쟁은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승리라는 발언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2016년 임기 마지막에 베트남에 가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오바마의 발언과는 큰 차이가 있다.

 

오바마의 발언이 보여주듯이 이런 발언은 대체로 민주주의 국가 남한은 세계 경제력 10위의 강대국에 올랐지만, 전체주의 국가 북한은 사회주의의 실패로 인하여 최빈국이자 최악의 독재국가로 전락했다는 생각에서 발현됐다. 이와같은 관점이 1990년대 미국을 향해 대화와 수교를 요구했던 김일성의 시도를 듣지 않게 만들었고, 1994년 한반도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으며, 20029.11 테러라는 충격과 공포를 또 다른 폭력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부시의 소위 악의 축(Axis of Evil)’발언과 북에 대한 경제재제로 이어졌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우월주의에 심취한 사상과 생각이 점철된 폭력성을 간과한다면, 한반도의 위기는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런 반공주의적 관점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이런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해 국방력을 강화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것이 바로 북한 핵무장의 맥락이다.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서방에서 인식하는 한국전쟁의 시각은 대체로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인 요소가 분명 내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과 서방의 역사학자들은 한국전쟁을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많이 해석했다. 후버 연구소 출신의 영국인 우파 학자 로버트 서비스는 자신의 저서 스탈린 강철권력에서 3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자칫하면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전면적인 충돌이 일어날 수 있었고, 그 책임은 많은 부분 스탈린에게 있었다. 그가 만일 김일성에게 재정 지원을 하지 않고 무장도 시키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그렇게 치열한 내전이 또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스탈린 강철권력 p.937~938)라고 할 정도다. 로버트서비스가 자신의 책에다 쓴 비슷한 맥락으로 미국 또한 한국전쟁을 그렇게 본다. 미국학자들이 인식하는 한국전쟁은 “1950년 스탈린과 김일성이 시작했고,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625일 버튼을 눌렀다는 것이다. 미국의 반공주의 학자 애덤 울람은 1990년대까지 한국전쟁을 스탈린의 전쟁(Stalin's War)’라고 불렀을 정도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북한에게 공격을 받았던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미국과 서방에서도 반공주의적인 시각에서 해석되어 왔던 것이다.

3. 한국전쟁의 기원

 

위에 상술한 것처럼 미국과 서방 그리고 한국이 인식한 한국전쟁은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와 함께 하고 있다. 이는 한국전쟁의 시작을 1950625일 북한군이 대대적으로 진격한 시점부터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런 관점은 1945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맞은 것과 미국과 소련의 38선 분단을 예시로 들기도 하지만, 해방 이후의 한반도 상황이나 그 이전의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놓여있던 상황은 항상 생략되면서 한국전쟁을 바라보게 되기 마련이다.

 

1980년대 한국 운동권에 큰 영향을 준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전면적인 전쟁이 시작된 날인 1950625일부터 보지 않고, 일제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 한국전쟁이 이미 초기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얘기한다. 이것을 알기 위해선 북한의 최고 지도자였던 김일성의 이력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했던 친일파들에 대해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1912년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김일성은 1931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시기부터 소규모 독립군대를 조직해 중국 공산당과 더불어 항일투쟁에 나섰던 인물이었다. 1933년 둥닝 전투에서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인 유격대 2개 중대의 지원을 받아 이 도시에 전에 없이 대규모로 공세를 퍼부었고, 김일성의 부대는 이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 스중헝을 구하며 그 일대에서 유명해졌다. 이 때문에 피바람이 불었던 민생단 사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 김일성은 백두산을 근거지로 하여 여러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본격화 되기 1달 전인 19376월 김일성 부대는 만주 국경지대에 있는 식민지 조선 치하의 보천보 지역을 습격하여 유격전을 벌이다 후퇴했고, 이후 간삼봉 전투에서 일본군 수십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김일성의 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착수했고, 김일성과 그의 부대들은 이른바 고난의 행군에 나섰다. 그러던 1940년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 부대는 홍기하 지역에서 대략 100~120명 이상의 일본군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고, 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번지던 그해 말 쯤에 소련으로 넘어가 이후 소련군 제88여단에 소속된다. 그러나 남아있던 잔존 항일 유격대는 1942년까지 작전을 전개했고, 1945년 소련 연해주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후 김일성과 그의 항일 독립군 동료들은 소련의 푸가초프 함을 타고 귀국하여 평양에서 기반을 다졌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것이 바로 북한의 김일성과 그의 만주 빨치산 부대 동지들의 삶이었고, 그들이 북한 정권의 핵심이 되었던 것이다.

 

1930년대 만주에서 김일성과 그의 항일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는데, 이러한 독립군 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일본이 조선인 출신들로 만든 부대가 활동했었다. 이들이 바로 간도 특설대였다. 당시 간도특설대에는 대한민국에서 소위 명장 내지는 나라를 구한 위인으로 알려진 다부동 전투의 지휘관 백선엽도 있었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이들 중에는 일본이 김일성을 추적하여 죽이기 위해 이용했던 군 장교 김석원도 있었다. 당시 그의 일본 이름은 가네야마 샤쿠겐으로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일본군 대좌로 복무했던 인물이었다. 이렇게 독립군을 토벌하러 나섰던 이들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군의 핵심이 되었고, 대한민국 군부를 장악한 이들은 한국전쟁에서도 독립운동을 했던 김일성과 항일연군 출신의 장성들이 지휘하는 군대에 맞서 싸웠던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말하는 한국전쟁의 가려진 진실이었다. 국내에서 주장된 김일성 가짜설은 김일성이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치민처럼 숨어 지내던 시절이 있어서 지어진 음모론일 뿐 이를 증명할 구체적인 증거는 아무것도 없으며, 심지어 박정희 정권 시기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이후락마저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 김일성이 독립운동가 김일성이 맞다고 인정했을 정도다.

 

또한 1945년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미군이 접수하게 된 한반도 이남은 민중의 불만이 들끓었다. 1944년부터 일제의 패망을 준비했던 여운형은 해방 후 자신의 조직이었던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족하여 새나라 건설을 위한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서울에 입성한 미군정은 여운형이 이끌던 건국준비위윈회와 그가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과거 조선 총독부의 행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친일 세력들을 이용했다. 이는 19458월 대일선전포고 이래로 한반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며 제국주의 군대를 무찔렀던 소련군의 군정 통치하고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거기다 미군정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를 도왔고 미군정의 지원을 받는 이승만은 친일세력인 한민당과 결탁하여 사회의 더 나은 사회와 임금인상 그리고 친일파 청산을 바라던 민중을 상대로 빨갱이 척결에 나섰다. 심지어 몽양 여운형과 우사 김규식이 전개했던 좌우합작운동도 이승만 세력의 공격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이후 남한 사회에서 전국적인 노동자 투쟁을 벌이던 세력들은 결국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서 진압당했다. 194843일에 시작된 제주 4.3 봉기는 미군정과 우익세력의 잔인함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는 사건이었다. 제주4.3 봉기와 이에 반대하여 좌익 성향의 군인들이 일으켰던 여순 민중항쟁은 미군정과 우익 세력들에 의해 아주 잔인하게 진압당했고, 민간인 학살을 야기했으며, 이 봉기를 진압한 이들은 채병덕과 같은 친일세력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이라는 게 1930년대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시점에서 시작된 것이었고, 해방 이후 민중들의 투쟁과 미군정의 폭압 통치로 인해 민중들이 이들에 맞서 싸우는 투쟁의 형태였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1950년 북한에서 일으켰다고 알려진 한국전쟁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세력과 이들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이승만 친일 친미 제국주의 정권에 맞서 싸우는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4. 민간인 학살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에는 미국과 한국정부가 한반도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도 있다. 위에서 한국전쟁의 기원을 설명하며 예시로 든 제주 4.3 항쟁과 여순민중항쟁은 수많은 민간인 피해를 초래했다. 4.3 항쟁에서 학살 당한 민간인은 최소 3만 명에서 45000명에 해당되는데, 이들 중 최소 80% 이상이 진압을 감행했던 친일 출신의 우익 경찰들과 이북의 친일 지주 출신의 자식들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의 저지른 짓이었다. 이들이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 노인 아이었고, 1살 내지는 2살짜리 갓난아기들도 매우 많았다.

 

제주4.3 항쟁의 진압을 반대하여 좌익성향의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던 여순민중항쟁 또한 최소 수천 명에서 1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는데, 여수와 순천에서 해방구를 형성하여 지주와 자본가들을 대상으로 인민재판을 했던 좌익 성향의 게릴라들과는 달리, 봉기를 진압하러 온 토벌군인들은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을 빨갱이로 몰아 처형했다. 여순민중항쟁에서 진압군으로 나섰던 인물 중에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파푸아뉴기니와 필리핀 전역에서 일본군 장교로 전투를 치렀던 김종원이라는 인물도 있었는데, 그는 체포한 민간인들을 모아놓고 일본도로 민간인들의 목을 배는 것을 즐겼으며, 이런 일본군 출신의 지휘관의 명령을 따르는 진압군들에 의해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고, 학살당한 이들 대부분은 여자와 아이 그리고 노인이었다.

 

이런 잔인한 민간인 학살은 1950년 한국전쟁 초기에도 남한 전역에서 일어났다. 특히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좌익 활동을 하던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만든 국민보도연맹은 전쟁이 시작되면서 학살의 대명사가 됐다. 전쟁 초기 인민군이 신속하게 진격을 하자, 후퇴하던 한국군은 보도연맹원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보도연맹원들 대다수가 그저 쌀이나 보리 조금 더 준다는 이유로 가입하거나, 가입하면 어떤 경제적인 혜택을 기대하고 어려운 삶을 자력으로 극복하고자 가입했던 인물들이 대다수였다는 점에서 엄연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승인으로 일어난 보도연맹 학살로 최소 30만 명에서 50만 명이 학살당했고, 많게는 100만 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민간인 학살은 1950915일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이 진격하면서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서울을 수복하고 난 이후에는 인민군 부역자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학살이 일어났고, 지리산에 고립된 빨치산들을 토벌하면서도 일어났다. 1951년에 일어났던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보면 이 또한 학살당한 이들 대다수가 여성, 노인, 아이라는 점에서 한국군의 양민학살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전쟁 초기 북한의 인민군에 의한 학살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이 저지른 학살은 인민재판과 같은 형식이었고, 주로 지주나 자본가 친일파들 그리고 남한 군경의 가족들을 대상으로 벌어졌다. 쉽게 말해 인민군은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는 것이다. 2000년대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도한 진실화해조사위원회는 한국전쟁 시기 좌익과 우익의 학살을 조사했는데, 조사 결과 인민군의 학살은 전체 사례에서 1/6에 불과했다.

 

한국전쟁에서 초기에 신속히 군사개입을 감행한 미국도 민간인 학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1968316일 베트남의 미라이라는 마을에선 30명의 미군이 504명의 민간인을 잔인하게 학살했는데, 1950726일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 마을에선 미군 제1 기병사단에 의해 3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또한 미군은 한국전쟁 당시 우익 군경들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을 전혀 말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이 좌익 소탕한다는 것을 옹호하며 이를 전적으로 도왔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전쟁범죄는 역시 무차별 폭격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초기에 개입했을 때부터 제공권을 장악했는데, 폭격 또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드레스덴이나 도쿄 폭격 같이 대규모의 융단 폭격은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로 이어졌다. 석기시대라는 단어를 쓰기 좋아했던 커티스 르메이의 폭격 방식으로 인하여 한국전쟁에선 무수히 많은 남북한 민간인들이 미군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최소 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의 난민이 생겼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 전역에서 미군이 사용한 폭탄의 양은 50만 톤이고, 그 중 16~20만 톤이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데 사용됐다. 그러나 미국이 한국전쟁 기간 3년 동안 전쟁에서 사용한 폭탄의 양은 635000톤이었다. 이것은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사용한 네이팜 폭탄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로, 사용한 네이팜 폭탄의 양까지 합치면 총 665000톤이 된다.

 

미군의 폭격은 비단 북한만을 대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북한의 피해가 가장 커서 수도 평양은 쑥대밭이 되었고, 원산은 달이 표면으로 변했다. 심지어 미군의 B-29 폭격기는 북한 뿐만 아니라, 북한의 동맹국인 중국에게도 행해졌다. 중국의 단동이나 심양같은 곳도 미군의 폭격에 시달렸다. 또한 이런 미군의 무차별 폭격은 남한에서도 일어났다. 전쟁 초기 인민군의 진격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을 때, 미군은 북한이 점령한 남한 땅 전체를 대상으로 폭격을 감행했다. 1951년 한국전쟁이 다시 38선 부근에서 원점으로 돌아왔을 때도 미군은 남한에서 폭격임무를 수행했다. 이 폭격 임무는 지리산에 숨어든 빨치산들을 대상으로 행해졌다. 미군은 북한과 남한 내의 공산주의자들을 대상으로 세균전을 감행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프랑스 파리에선 유엔군 총 사령관이던 리지웨이 장군의 프랑스 입국을 거부하는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었다. 이처럼 한국전쟁에서 미군과 한국군은 민간인 전체를 적으로 규정하고 싸웠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5. 결론: 한국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전쟁의 명칭, 인식하는 관점, 전쟁의 기원, 민간인 학살까지 살펴보았다. 이런 역사적 맥락과 한국 현대사적 흐름을 보았을 때,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충분하다. 사실 남한 정부가 정부 수립 초기에 임정 독립운동가들과 남로당 출신이었다가 박헌영과의 노선 갈등으로 전향한 조봉암을 초기 내각에 구성하긴 했지만, 사회에서의 큰 권력은 미군정과 결탁하여 살아남은 친일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이 문화계와 군, 대한민국 행정을 장악했다. 이승만 본인이 독립운동가였을지는 몰라도(이것도 매우 논란이 많지만), 그의 정권은 친일파 정권이나 다름없었다.

 

해방 이후 여론조사에서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다는 사실에서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가 반민중적 정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했던 이들이 일반 양민에서 민간인이 되가는 과정은 베트남 전쟁에서 일반적인 민간인이 베트콩에 가입하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폭격이나 수색과 섬멸 작전으로 가족은 잃은 이들이 베트콩에 가입했듯이, 한국전쟁 시기 양민에서 빨치산에서 활동하게 된 이들 대다수가 미국과 이를 추종하는 반민중세력에게 가족을 잃거나 극심한 탄압을 받아, 복수심을 가지고 혁명군에 가입을 했던 이들이었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의 탄압을 받으면서 펜으로 군사독재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가 리영희 선생은 그 시기 전환시대의 논리를 집필하여 미국의 침략전쟁이던 베트남 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했다. 1776년 건국 이래 미국이 최초로 패배한 전쟁인 베트남 전쟁은 현재 미국에서도 정통성을 북베트남과 호치민 정권에게 대도록 주고 있고, 대체로 전쟁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이나 플래툰, 플 메탈 자켓, 74일생 등의 영화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시각을 대변하고 있다.

 

주제를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전쟁으로 돌리면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미국인들이 상당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잊혀진 전쟁이라는 점이 한몫 하지만, 미국 언론에서 얘기하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상당히 대한민국 우익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의 공화당이나 민주당이나 크게 다를 거 없다. 잊혀진 전쟁이라는 사실에서 한국전쟁은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미국과 서방세계에 민족해방전쟁으로 기억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의 맥락을 민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나 다름 없었다. 한국의 지배계급은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한 친일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북한의 지도부는 항일 빨치산에 두고 있었다. 굳이 당시 북한정권의 균형을 이루었던 박헌영 계열의 남로당과 연안파 그리고 소련파까지 합치면, 만주항일 빨치산과, 일제시기 경성 트로이카로 대표되는 국내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 중국 공산당과 연합했던 독립운동 세력 그리고 소련의 붉은 군대의 일원으로 독일과 일본에 맞서 싸웠던 반파시즘 세력까지, 항일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군이 일본에서 신속히 투입한 스미스 부대가 맞닥뜨린 인민군 부대는 중국의 마오쩌둥으로부터 받은 조선족 사단이었다. 이 조선족 사단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큰 공로를 세웠던 혁명 군대였다. 따라서 한국전쟁이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주장은 상당히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고, 브루스 커밍스의 시각이 틀리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지금까지도 한국의 수구세력들에 의해 미화되고, 반공주의적으로 해석되는 주제다. 그래서 이 전쟁을 민족해방전쟁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상당히 민감하고 심한 반감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브루스 커밍스를 포함하여 한국전쟁을 다르게 보려고 하는 사람들의 관점 또한 근거가 매우 타당하고, 기존의 반공주의적 해석을 얼마든지 뒤집고 남을 정도로 실증주의적 사관이라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한국전쟁은 분명히 반민중적 정권에 맞선 민족해방전쟁이었다. 현재 남과 북의 상황이 어떻든 역사는 정직한 것이다. 약산 김원봉 서훈이 논란이 되는 시점에서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 공개적으로 말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십상이겠지만, 나중에 시대가 변했을 때 이 전쟁의 성격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따라서 역사의 진실과 정직함을 추구한다면 한국전쟁이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이 부정당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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