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게릴라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 - 북한과 제3세계 관계사 너머의 글로벌 히스토리 14
벤자민 영 지음, 고자연 외 옮김 / 너머북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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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몇 년 전 우연히 유튜브에서 북한이 만든 영상물 하나를 보게 됐다. 영상물의 제목은 백두의 영광이었고, 외국인이 지은 시라고 소개됐다. 아프리카 기니에서 온 인물이 백두산 천지에 올라 시를 읊었다. 기니에서 온 사람은 기니주체문학사상연구회 회장인 아브톨라이에 디알로였고, 그는 유창한 프랑스어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에 대한 존경심과 주체사상에 대한 자신의 긍정적인 생각을 로 읊었다. 영상 마지막에는 프랑스어로 말하던 기니인이 김정은 장군 만세!”를 한 번은 프랑스어로, 두 번은 우리말로 외친다. 영상 자체가 매우 희망차 보였고, 별생각 없이 보면 가슴이 웅장해지는 음악이 연속적으로 나왔다. 만약 대다수 한국인이 이 영상을 본다면 상당히 어이가 없을 것이다. 아마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나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영상 자체가 (meme)’화될 가능성도 높다.

 

한국인 대다수는 그렇게 소비하고 분석하겠지만,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영상을 보며 북한이 이런 영상물을 찍고 편집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됐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영상물이 북한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이를 알려면 결국 북한의 역사, 즉 북한의 제3세계 외교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23년 니제르와 부르키나파소, 말리로 대표되는 아프리카 사헬 지대의 국가들에서 반정부·반서방 봉기가 일어났다. 이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부르키나파소의 젊은 지도자 이브라힘 트라오레였다. 트라오레는 부르키나파소가 더 이상 서구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지 않아야 한다라고 주장했고, 현재도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움직임을 두고 일각에서는 미국과 서방 중심의 일극 체제가 끝나고 러시아와 중국, 그 밖의 제3세계 국가들이 중심이 되는 다극화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주장한다. 니제르와 부르키나파소에서 일어난 반서방 쿠데타 과정에서는 그 나라 사람들이 자국 국기와 더불어 두 나라의 깃발을 들고나온 모습이 서방 언론에 포착됐다. 하나는 현재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의 깃발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깃발인 인공기였다.

 

여담으로 필자는 한 여행 유튜버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알려진 아프리카의 부룬디를 방문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 영상에서 유튜버는 부룬디에서 가장 좋은 대학의 도서관에 갔고, 한국 관련 책을 찾다가 결국 김일성 저작집을 소개받았다. 한국 사람들이 이름조차 모르는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Korea’라고 했을 때 북한의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인 것 같다. 반정부 시위와 봉기, 쿠데타에서 북한의 깃발이 등장한 것이 과연 우연일까? 또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알려진 부룬디의 대학 도서관에서 한국인 유튜버가 소개받은 ‘Korea’ 관련 서적이 김일성 저작집인 것 역시 단순한 우연일까? 필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결국 이 부분은 북한의 역사를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제부터 이야기해 보겠다.

 

2. 책 내용과 1960~70년대 북한 외교의 독자성

 

실제로 북한은 냉전 시기 제3세계라는 범주 속에서 외교적 독자성을 가진 나라였다. 3세계라는 범주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묶을 수 있는 매우 넓은 개념이다. 3세계는 아시아·아프리카·유럽·북아메리카·남아메리카의 국가들을 포괄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냉전기 사회주의 국가임을 분명히 했고 사회주의 진영을 강력히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제3세계 국가들과의 관계에 무관심하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북한은 냉전 시기 고립되지 않았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벤자민 영(Benjamin Young)은 북한의 제3세계 외교사를 주제로 논문을 썼다. 영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의 북한 제3세계 외교사를 연구했으며, 북한이 전혀 고립되지 않은 국가였음을 역사학적으로 보여줬다. 그의 논문은 2021년 영미권에서 먼저 출간됐고, 2026년에는 한국어로 번역됐다.

 

책은 1950년대 북한이 전후 재건을 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은 한국전쟁의 여파와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해야 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동시에 1955년 반둥 회의를 통해 점차 태동하기 시작한 제3세계와 비동맹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다. 북한은 인도네시아의 국부로 불린 수카르노와의 관계를 강화했고, 1965년 미국 CIA가 주도한 쿠데타로 그가 축출될 때까지 북한과 인도네시아의 관계는 돈독했다. 1960년대 북한은 반미 투쟁의 최전선에 있던 라틴아메리카의 쿠바와 동남아시아의 베트남과도 관계를 강화했다.

 

쿠바는 1898년부터 대략 60년간 미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고, 1961년 미국 존 F. 케네디 정부의 침공을 받았다. 이후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했고, 1962년에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해 제3차 세계대전이 임박하기도 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미국은 쿠바에 대한 제재와 봉쇄를 끊임없이 이어 나갔는데, 북한은 사회주의 형제국인 쿠바를 도와 미국에 맞섰다. 북한과 쿠바의 관계는 그 이후에도 우호적으로 유지됐다. 피델 카스트로가 1986년 북한을 공식 방문했다는 것은 양국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베트남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았으며, 전쟁 이후 프랑스가 다시 침략했다. 베트남의 국부로 불린 호찌민은 혁명 군대를 규합해 프랑스에 맞서 싸웠고,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100년간 지속된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종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미국이 베트남을 자의적으로 분단했고, 베트남은 미국의 분단과 침공으로 전쟁을 치르게 됐다. 당시 북한은 미국의 베트남전쟁을 한반도의 전쟁 위기와 연결해 보았고, 북베트남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도왔다.

 

북한의 베트남 지원은 한국전쟁과 연결해서 보아야 북한이 왜 베트남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 시기 북한은 무차별 폭격을 겪었고, 대공 방어망이 전무해 국토가 사실상 달 표면과 같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파괴됐다. 북한 인구의 20%가 미군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추정이 있을 정도니, 북한이 전쟁에서 겪은 고통은 결코 작지 않았다. 1964년 통킹만 사건 당일부터 1972년 크리스마스까지 북베트남은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았다. 한국전쟁 때와 달리 북베트남에는 중국과 특히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최신식 대공 무기가 존재했지만, 북베트남 전역 또한 초토화됐다. 북베트남에는 100만 톤 이상의 폭탄이 투하됐고, 1972년 제2차 라인배커 작전만 보아도 미군이 해당 작전에서 사용한 폭탄의 폭발력이 히로시마 원자폭탄 5개와 맞먹는다고 하니, 북베트남 사람들이 겪었을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한국전쟁에서의 폭격 경험과 미국의 베트남 분단 및 침공 등은 북한이 베트남을 돕게 된 가장 큰 동기였을지도 모른다. 북베트남 측이 북한의 도움을 극찬했던 것을 보면, 북한이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책의 내용을 인용하겠다.

 

김일성과 회담 후, 레 탄 응이는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북한 지도자들은 매우 솔직하고 개방적이었으며, 우리와 완전한 의견 일치를 보였고, 그들의 지원은 매우 직접적이고 정직했고 이기적이지 않았다." 주북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는 북한 정부의 동원 사업이 자국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보았지만, 레 탄 응이는 북한을 철저히 '이타적'이며 미국과 싸우는 베트남 투쟁을 전적으로 돕기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김일성은 베트남 지원을 통해 제3세계에서 자신의 혁명적 위상을 강화하려 했다. 북베트남 지도부가 김일성의 지상군 파병 및 지하터널 건설 전문가 지원 제안을 왜 수락하지 않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965년 가을, 북한은 중국 철도를 이용해 대량의 건설 자재, 공구, 자동차를 북베트남으로 보냈다. 이 지원은 북한 대외경제관리국이 주북한 중국대사관의 협조를 받아 조직했다. 중국 정부는 때때로 철도 사용 요금을 면제해 주기도 했으나, 북베트남에게 운송비 부담을 요구하기도 했다. 북한은 이 자재들을 북베트남에 아무런 대가 없이 제공했다. 그러므로 북한은 중국이 북베트남의 반미 투쟁을 충분히 지원하지 않는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1967년 소련 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 지도부는 중국이 베트남 지원에 충분히 협력하지 않는다고 비공식적으로 비판했다.”

 

벤자민 영, 옥창준 외 옮김, , 게릴라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 북한과 제3세계 관계사, 너머북스, 2026, 80~81.

 

1960년대 북한은 자신들과 더불어 쿠바와 베트남 같은 나라들이 혁명적 반제국주의 투쟁의 최전선에 있으며, 이들이 반제국주의 연대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김일성은 전 세계적인 반미·반제국주의 연대를 구상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1960년대 내내 고군분투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북한이 사회주의 진영 안에 있으면서도 바르샤바조약기구 국가들과 달리 소련에 종속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북한은 중국 및 소련과의 동맹 관계와 이들과의 연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련이나 중국에 일방적으로 종속된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앞서 언급한 1960년대 말 김일성과 북한의 세계관이 보여주듯이, 반미 투쟁의 최선봉은 실제로 미국의 침공과 억압을 받고 있는 나라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련과 중국에 일방적으로 끌려가지 않으면서 이 나라들이 단결해 서구의 지배를 거부해야 한다는 북한의 세계관은 수정주의와 교조주의, 즉 소련과 중국의 편향을 반대한다는 주체사상 이론과도 연결된다.

 

북한의 이러한 인식은 1970년대 들어 더욱 확대됐으며, 이른바 쁠럭불가담운동, 즉 비동맹운동 참여를 통해 한층 확장됐다. 이에 대해 저자인 벤자민 영은 북한이 1960년대의 실질적으로 대가 없는 원조에서 벗어나 1970년대에는 자국의 이익과 희생 및 지원에 대한 대가를 원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전자든 후자든 북한이 많은 나라에 지원과 원조를 제공한 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북한에 대한 대다수 사람의 인식과는 달리, 이 시기 북한은 전후 재건에 성공하고 사회주의를 완성해 나가는 국가라는 이미지가 매우 강했다. 실제로 북한은 1980년대 이전까지 한국보다 잘사는 나라였고, 동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사는 나라였다. 그런 맥락에서 북한은 이러한 국력과 힘을 바탕으로 제3세계의 혁명과 사회주의 전파를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믿었다.

 

1970년대 북한은 비동맹운동 가입을 전후해 박정희 정부와의 경쟁 속에서 수많은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었고, 1975년 유고슬라비아의 도움으로 비동맹운동에 가입했다. 한국이 가입하지 못한 것과 달리 북한은 가입에 성공했고, 이를 자국 외교의 거대한 성과라고 주장했다. 필자의 개인적 견해를 덧붙이자면, 1970년대 북한 외교의 핵심 성과는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 개선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영의 책에서는 제대로 다루지 않았지만, 북한은 1960년대 유고슬라비아를 현대 수정주의 비판의 맥락에서 강력히 규탄하고 비판했다. 그러다 1970년대에 들어 데탕트를 전후해 양국 관계를 발전시켰다. 김일성은 비동맹운동 가입 2개월 전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구성하던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를 방문해 티토를 만났고, 티토의 도움을 받아 비동맹운동에 가입했다. 이후에도 양국 관계는 비동맹운동에서의 협력 속에서 발전했다. 19778월 티토는 소련과 중국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평양을 찾아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북한은 1970년대 쁠럭불가담운동을 반제혁명의 역량으로 인식했고, 이를 위해 유고슬라비아와 접촉해 반미·반제 연대의 장으로 활용했다. 북한과 유고슬라비아의 관계에 대해서는 필자가 준비 중인 석사학위논문에서 더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북한이 외교적 확장에만 신경 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북한은 미국과 서방에 맞선 국가들에 실질적인 군사 원조를 제공했다. 1차 오일쇼크를 촉발한 제4차 중동전쟁에서 북한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맞서 이집트의 사다트 정권을 지원했고, 군사고문단을 비롯해 전투기 조종사도 시나이반도에 파병했다. 1973년에만 92명을 파병했다고 한다. 아직 이 부분은 공개되지 않은 자료가 많기에 더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1970년대 중후반까지 북한 군인들이 현지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북한의 베트남 지원도 2000년대에 들어 밝혀졌다. 또한 북한은 1970년대 중반 앙골라에서 내전이 발생하자 앙골라해방인민운동(MPLA)을 도왔고, 군사적으로도 적지 않은 지원을 한 것으로 확인된다. 쿠바와 소련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앙골라에 파병한 나라가 북한이라는 주장도 있을 정도다.

 

따라서 1970년대는 북한이 반미·반제 외교의 장을 아프리카 대륙으로 더욱 확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북한의 대아프리카 외교에는 당연히 박정희 정부의 해외 영향력을 약화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북한은 이 시기 앙골라, 이집트, 리비아, 마다가스카르, 에티오피아, 자이르(콩고의 옛 이름), 토고, 모리셔스, 라이베리아, 탄자니아 등 수많은 아프리카 국가에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1970년대 북한은 대아프리카 외교의 정점을 찍었고, 이와 같은 역사적 흐름은 2020년대 니제르와 부르키나파소의 반서방 쿠데타 및 봉기에서도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부룬디의 최고 대학 도서관에서 김일성 저작집이 ‘Korea’ 관련 책으로 소개된 것도 이 맥락에서 연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심지어 북한은 일본의 적군파와 미국의 흑표당, 그 밖의 제1세계 혁명 및 진보운동 조직과도 접촉했다. 솔직히 북한과 흑표당의 접촉은 매우 흥미롭다. 일본 적군파의 평양행은 지난해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화 굿뉴스를 통해 회자되면서 사람들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졌지만, 흑표당은 여전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여담으로 흑표당의 영어 이름인 블랙팬서(Black Panther)는 미국 마블 영화 시리즈의 블랙팬서에 모티브를 제공하기도 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역사인 것 같다. 정리하자면 북한은 1970년대에 제1세계와 제2세계, 3세계 모두와 접촉했고, 특히 제3세계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외교를 확장했다.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와 달리 고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3. 1980년대 북한에 대한 벤자민 영의 시각과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 그리고 사소한 오류

 

저자 벤자민 영은 1980년대에 들어 북한 외교가 좀 더 폭력적이고 부패했으며, 불법적·침략적인 성격으로 변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책을 끝까지 읽어 본 결과 어떤 맥락에서 말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크게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 영에 따르면 북한은 1980년대 남한과의 경쟁 속에서 이러한 노선을 걸었다고 한다. 저자는 1983년 버마 테러 사건과 1987KAL기 폭파 사건 등을 그 사례로 든다. 또한 북한이 에티오피아의 독재자 멩기스투 정권과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정권, 우간다의 오보테 정권을 도와 이들 군대가 폭력적으로 변하는 데 관여했다고 설명한다(230~231, 239, 242~243). 아무튼 이 시기 북한은 점차 경제적 위기를 겪었고,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대응해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막대한 자금을 사용하면서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워졌다고 한다. 본문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 시기 남한 운동권 조직 전대협의 대표 임수경이 방문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저자는 세계청년학생축전을 둘러싸고 북한 정권과 참가자들 사이에 예상보다 큰 입장 충돌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1990년대 초 다른 제3세계 국가들이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반면 북한은 개혁과 개방을 하지 않았고, 내부로 눈을 돌려 군사 개발, 특히 핵무기 개발에 집중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 1990년대 남한은 농촌 개발 사업에 상당한 투자를 하면서 박정희의 새마을운동 모델을 아프리카 국가에 수출한 반면, 북한은 관련 활동을 대부분 중단해 사실상 한국에 아프리카 외교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것, 그리고 반식민주의 발전 모델을 제시하던 국가에서 결국 생존 수단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국수주의 군주국이 되었다는 것이 아마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부분이 아닐까 싶다(268). 5장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은 저자의 시각은 필자가 보기에 지나치게 무리하며, 역사학적으로도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1983년 버마 테러 사건과 1987KAL기 폭파 사건은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저자 스스로 밝혔듯이 김정일이 랑군 폭탄테러에 직접 연루되었다는 결정적인 문서 증거는 없다”(202). 그런 상황에서 김정일의 세계관을 설명하는 과정에 버마 사건을 연결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심히 의심된다. 또한 KAL기 폭파 사건은 버마 사건보다도 논란이 더 많은 사건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작설도 제법 설득력 있게 제시된다. 이를 단정적으로 북한의 테러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적절할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이것과는 다른 이야기지만, 2010년에 일어난 천안함 사건의 경우 한국에서는 북한의 소행으로 설명하지만 영문 위키백과는 개요에서 한국과 북한 양측의 의견을 밝혔다. 또한 교전 세력 부분에서도 북한 추정이라고만 표기했다. 예전에는 알 수 없음으로 표기된 것을 본 적이 있다. 즉 사건의 진상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은 역사학적으로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중서라면 모를까, 자신의 역사학 박사학위논문을 기반으로 한 단행본에서 지나치게 단정적으로 서술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논리적 연결이 다소 무리했다는 이야기다.

 

앞서 언급한 1980년대의 아프리카 지원도 그러하다. 책에서도 북한 군대가 몇몇 학살에 가담했다는 증거를 밝히지는 않으며, 영국 등 서방의 추정을 지나치게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 가운데 읽으면서 가장 황당했던 것은 북한이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학살을 지원했다는 대목이다. 북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라고 하더라도, 북한이 폴 포트 정권을 승인한 것과 학살을 지원한 것은 매우 다른 이야기다. 일각에서는 김일성이 폴 포트를 지지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전대미문의 대학살을 북한의 지지와 연결해 단정적으로 서술한 것은 잘못된 서술이다(247). 이 부분은 캄보디아의 역사를 알아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전쟁 시기 캄보디아에서는 1970년 닉슨 정부의 침공으로 론 놀과 크메르루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전쟁 과정에서 특히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그 여파로 50만 명이 죽었다. 이 때문에 폴 포트의 킬링필드 이전에 이미 미국이 제1차 킬링필드를 자행했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 시기 시아누크는 크메르루주와 협력해 론 놀을 무너뜨렸고, 결국 크메르루주가 집권했다.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는 말 그대로 캄보디아를 지옥으로 몰고 갔고, 2차 킬링필드로 150만 명이 죽었다. 1978년 베트남 공산당의 군대가 크메르루주 정권을 전복할 때까지 북한과 폴 포트의 관계는 지속됐다. 여기서 놓치기 쉬운 점은 당시 많은 이가 캄보디아 크메르루주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에서는 필자의 주관적 견해를 좀 더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실제로 노엄 촘스키 같은 인물도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폴 포트를 옹호한 적이 있었다. 베트남전쟁을 연구하고 현재도 진보운동을 하는 학자인 가레스 포터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리영희 교수가 문화대혁명에 대해 초기에 제한된 정보로 무리하게 미화했던 맥락과 비슷하다. 이 학자들은 나중에 실체가 알려진 뒤 비판하게 됐다. 북한은 초기에 폴 포트 정권과 접촉했다가 이후에는 접촉을 중단하고 시아누크와의 관계를 강조했다. 시아누크 역시 초기에 협력했으나 이후 크메르루주와 갈등하게 되었는데,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북한도 그러지 않았나 싶다. 1978년 이후 폴 포트와 크메르루주 관련 언급이 로동신문등 북한 매체에서 사라진 것을 보면 아마 그럴듯하다. 이런 추정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영이 설명한 크메르루주와의 관계를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제3장에 등장하는 베네수엘라 공산주의자이자 시인인 라메다의 사례도 관련 자료를 직접 확인하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국제앰네스티의 이야기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가 싶다. 본문에서는 라메다가 심한 구타를 당했다고 언급하며 수용소의 끔찍한 실상을 강조한다(137). 이 역시 교차 검증이 필요한 자료라고 본다. 예를 들어 책에서 김일성을 직접 만난 인물로 언급되는 루이제 린저는 자신의 저서에서 북한 교화소를 창살 없는 교화소라고 표현했다. 적절한 사례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2010년대 북한에서 교화소에 수감된 미국인 매튜 토드 밀러는 구타가 없었다고 말했고, 비슷한 시기 선교 활동을 하다가 체포돼 교화소에 수감된 케네스 배 역시 노동은 힘들었지만 구타와 폭력은 없었다고 했다. 물론 이러한 사례도 충분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부분에는 여러 논란이 있는 만큼 영의 인용이 적절했는지는 충분히 의심해 볼 만하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사소한 실수도 언급하겠다. 3장에서 저자는 북한이 비동맹운동을 외교적 도구로 활용한 사실을 언급하며 김일성과 티토가 1977년에 만난 일을 짧게 다루고 있다. 본문에는 “19779, 티토가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났다라고 나오는데, 엄밀히 말해 날짜가 틀렸다(170). 티토가 북한을 방문한 기간은 824일부터 30일까지다. 벤자민 영이 인용한 출처는 필자도 읽어 본 기밀 해제된 루마니아 대사관 문서다. 이 문서는 윌슨센터 디지털 아카이브에 있다. 9월은 루마니아 대사관이 티토의 북한 방문을 보고한 시점이지, 티토가 북한을 방문한 시점은 아니다. 티토는 평양 방문 이후인 그해 9월 베이징을 방문했다. 북한자료센터에서 관련 자료를 일일이 찾아봤기에 이 부분은 확실하다. 물론 큰 실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역사책에서는 세부 사항이 중요하다.

 

4. 추가적으로 궁금한 점

 

앞에서 책의 내용 가운데 동의하기 어려운 점을 길게 이야기했다. 물론 이러한 지적을 한다고 해서 필자가 이 책의 가치를 전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흥미진진하게 읽었기에 이렇게 긴 서평을 쓰게 됐다. 읽으면서 궁금증이 생긴 부분도 많았다. 북한과 제3세계의 외교를 깊이 다루다 보니 굉장히 많은 국가와 단체, 인물이 언급된다. 그중 가장 의아했던 사례는 바로 북한과 자이르(콩고)의 관계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콩고는 1959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했다.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은 파트리스 루뭄바였고, 루뭄바는 소련과 관계를 돈독히 했다는 이유로 미국과 벨기에 당국에 의해 제거됐다. 루뭄바가 죽은 이후 미국과 벨기에 당국이 내세운 인물은 한때 벨기에군 장교로 복무했던 모부투였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미국이 루뭄바보다 모부투 같은 친미 독재자를 내세웠다고 주장했는데, 어째서 북한과 자이르의 관계가 좋았는지 궁금해졌다. 참고로 모부투는 1980년대 대한민국 대통령이던 전두환과 만나 양국의 친선 관계를 강화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가 알던 모부투는 친미 독재자이자 전두환과 친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북한이 모부투가 이끄는 콩고와 관계를 강화한 것은 의아했다. 북한은 분명 모부투 집권 전후로 루뭄바를 옹호했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1960년대 초 루뭄바를 옹호한 로동신문기사를 북한자료센터에서 읽은 적이 있다.

 

또한 북한과 라틴아메리카의 관계도 많이 궁금하다. 1980년대 한국 운동권 사이에서 해적판으로 출판된 북한 자료인 조국통일전선에 실린 글을 읽어 본 적이 있다. 해당 책에는 1973년 칠레의 아옌데 정부가 미국의 쿠데타로 전복된 이후 북한이 발표한 성명이 실려 있었다. 참고로 살바도르 아옌데는 1969년 북한과 북베트남을 방문했고, 김일성의 북한을 보고 무상의료에 감탄했다. 칠레와 북한의 관계도 분명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것 같다. 북한과 칠레의 관계는 짧은 기간이지만 분명 돈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쿠데타 이후 피노체트가 집권한 뒤 북한은 어떻게 반응했고, 한국은 칠레를 어떻게 보았을까 하는 문제의식과도 겹친다. 아옌데의 사례가 책에서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또한 북한과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부의 관계가 언급되기는 하지만 너무 짧게 다뤄진 점도 아쉽다. 이왕 다룰 것이라면 이 부분도 좀 더 자세히 다루었으면 좋겠다.

 

그 밖에도 북한이 남태평양의 작은 국가인 피지 같은 나라와 접촉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 남북한이 외교 경쟁에서 수많은 나라를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장에 따르면 1970년대 중후반 소련 외무부 극동 제1부 차장인 미하일 바스마노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계속해서 사회주의 국가들과 외교정책을 조율하려 하지 않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있으며 소련 등 동구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168). 이는 북한의 자주외교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을 남긴다. 첫째, 북한이 독자성을 가졌다고 해서 사회주의 진영 자체와 단절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둘째, 비슷한 시기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 중 하나인 동독의 호네커 정부와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부와 북한의 관계가 상당히 좋았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은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즉 사회주의 진영 내부의 연대와 갈등, 그 속에 존재하는 간극과 공통점, 차이점이 궁금할 따름이다.

 

5. 맺음말

 

오랜만에 재미있는 독서를 했다. 솔직히 쓰고 싶은 내용이 많지만, 분량상의 한계로 다 다루지는 못했다. 이 책은 북한을 소련과 중국의 꼭두각시나 종속국이 아니라 독자성을 가진 국가로 보았다는 점에서 기존 관점보다 진일보한 성격을 지닌다. 한국인들은 흔히 북한을 세계적으로 고립된 나라로 인식하지만, 벤자민 영의 책은 그러한 인식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역사학적으로 부각한다. 사료 활용도 독특하다. 대한민국의 외교 문서를 1차 사료로 활용해 북한 외교사를 재조명했다. 로동신문같은 북한의 1차 자료도 활용하지만, 해당 자료의 보도 내용을 깊이 추적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보기에 북한과 제3세계 외교라는 주제 자체가 너무 큰 것 같다. 한국 대학 역사학과에서 누군가 이런 주제로 석·박사학위논문을 쓰려고 한다면, 지도교수님이 거의 100%의 확률로 주제가 너무 넓고 시간적 범위도 너무 넓으니 반드시 줄여!”라고 할 가능성이 높다. 학위논문으로 북한과 제3세계 자체를 다룬 것은 너무 광범위하지만, 그만큼 역사적으로 다양한 사례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책 앞부분에는 한국어판 서문이 실려 있는데, “북한에서 새롭게 나타난 친러 성향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를 통해 북한은 국제 무대에서 핵으로 무장한 독불장군의 지위를 유지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너무 미국 중심의 시각이 아닌가 싶다(9). 영의 미국인 정체성은 감사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동물도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나는 반려견도 감사의 말에 등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대목은 확실히 미국인다운 정체성을 보여준다(353). 사족이지만 필자가 보기에 두 대목은 벤자민 영의 미국인 정체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벤자민 영이 제시한 역사학적 근거와는 별개로 그의 시각에는 솔직히 의아한 부분이 많았지만, 이 책을 많은 이에게 추천하고 싶다. 책의 옮긴이인 옥창준 선생의 말대로 지금 이 시기에 북한 대외관계사를 쓸 때는 소련, 중국, 미국, 남한과의 관계망이 아니라 제3세계라는 측면이 반드시 조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363). 북한을 강대국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바라봐 왔기 때문이다. 벤자민 영의 책이 지닌 장점은 북한과 제3세계의 관계를 조명하면서 북한이 강대국에 휘둘리는 국가가 아니었음을 역사학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이다. 많은 이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며 긴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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