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유럽의 좌파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줬다. 비록 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지는 못했으나, 혁명이 준 영향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1920년대 비록 이탈리아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즘 운동이 성공하여 파시스트 체제가 등장했지만, 무솔리니 집권 전 사회주의 체제로 나아가려는 시도와 노력이 있었다. 이를 이탈리아 역사에서는 ‘붉은 2년(Biennio Rosso, 비엔니오 로소)’라고 부른다. 오늘은 이 붉은 2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비엔니오 로소,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대략 2년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가열차게 진행됐다. 보통 붉은 2년이라고 번역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였다. 20세기 초 유럽은 상호 경쟁하는 두 개의 거대한 동맹으로 조직 되었는데, 하나는 국, 프랑스, 러시아가 맺은 삼국협상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리고 이탈리아가 맺은 삼국동맹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이 두 세력이 싸운 전쟁이었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한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 청년에게 암살당한 것이 전쟁의 계기였다. 전쟁은 1914년에 시작되어 양측의 참호전을 반복하다가 1918년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끝이 났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그전까지 존재했던 그 어떤 전쟁보다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전쟁이었다. 4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대략 1,000만 명 이상이 죽었고, 2,000만 명이 부상당했다. 기관총의 발달과 독가스, 탱크, 전투기, 후장대포 등 최신식 무기의 개발은 전쟁을 대량학살극으로 바꿔놓았다. 무기는 현대화되었으나 전쟁방식이 구식이어서 양측의 군인 사망자는 상상을 초월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는 1년간의 고민 끝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항하는 편에 서게 됐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이탈리아 또한 승전국이 됐다. 그러나 다른 교전국들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도 적잖은 전쟁 사상자가 발생했다. 대략 65만 명이 넘는 이탈리아 병사가 전쟁 기간 3년 동안 전사했고, 최소 50만 명이 부상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승전국들의 이익 배분 과정에서 큰 성과를 얻지 못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졌다. 거기다 1917년 연합국 편이었던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여 볼셰비키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섰다.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은 혁명을 전 세계로 전파해야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러시아 혁명은 독일에서의 군인·노동자 혁명으로 황제를 몰아내게 만들었고, 헝가리에서도 1919년 소비에트 정부를 잠시나마 들어서게 했다.

(붉은 2년 당시 파업에 동참한 노동자 사진)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이탈리아 민중들은 시위와 봉기를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전쟁이 끝나던 1918년 이탈리아의 평균실질임금은 전쟁 전인 1913년의 64.6%에 머물렀고, 이에 따라 사회 불안이 고조되는 가운데, 러시아 혁명의 성공 소식까지 들리자 “러시아를 따라가자”는 분위기가 생긴 것이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에서는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에 영향을 받아 노조 및 좌파 조직이 세력을 확장했다. 이탈리아 사회당의 경우 1918년 2만 4,000명의 조직원을 보유했는데, 1920년에는 20만 명으로 무려 10배나 조직원이 증가했다. 노조 조직인 이탈리아 노동총동맹은 200만 명의 회원수를 기록했으며, 아나키스트 노조도 80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1919년 이탈리아 인민당(PPI)이 창당되기도 했으며, 가톨릭 사제였던 루이지 스트루초가 이끌었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및 보통선거 형태로 치러진 1919년 선거에서 사회당은 국회에서 156석을 획득했고, 인민당은 국회에서 99석을 획득했다. 이들이 내세운 입후보자들이 대거 당선된 것이다. 이에 반해 이전 선거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던 자유주의 성향의 입후보자들은 179석을 얻는 데 그쳤다. 1919년 사회당과 인민당 그리고 아나키즘 단체의 성장은 이른바 ‘붉은 2년(Biennio Rosso)’을 의미했다.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8시간 노동과 임금 및 일자리 보장을 요구하는 파업이 물에 기름을 쏟아 부은 듯 들끓었다. 1919년 9월 토리노의 피아트 사에서 공장평의회 조직이 처음 생겨났고, 다른 지역에서도 불과 몇 달 사이에 연이어 공장평의회 조직들이 생겨났다. 이탈리아에서의 사회주의 확산은 이렇게 전개됐다.

(1920년 파업 당시 밀란의 한 공장을 점거한 무장 노동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노동운동이 자연발생적으로 확산됐는데, 파업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정치적 주장으로 전환됐다. 1919년 총파업 횟수는 1,663회로 전전의 810회보다 2배로 폭발적 증가세를 보였고, 1920년에는 1,881회로 늘어났다. 공장 노동자 파업은 농촌으로 파급되어 농촌 파업이 1913년 97건에서 1920년 189회로 확산되었다. 파업 지도자들은 러시아 혁명 지도자들과의 연대를 주장했다. 1920년 3월 29일에 토리노의 피아트 공장을 중심으로 철강노동자들이 전국적인 총파업을 주도했으며, 이는 120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할 정도로 광범위했다. 그해 6월에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의 수는 대략 50만 명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전국적인 파업을 주도한 중요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쉬(Antonio Gramsci)다. 안토니오 그람쉬는 1891년 이탈리아 사르데냐에서 태어났다. 그는 20세인 1911년 이탈리아 북부의 공업 도시 토리노의 토리노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으며, 언어학을 전공했다. 이 시기 그람쉬는 철학·역사학·문학 등 인문학 분야도 열심히 공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1913년 그람쉬는 이탈리아 사회당(PSI)에 가입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5년 사회당 신문기자로 일했으며, 이후 붉은 2년이라 불리는 기간에 노동자 파업을 주도했다. 

(안토니오 그람쉬 관련 포스터, 안토니오 그람쉬는 1921년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 멤버이다. 그는 무솔리니 집권 하에서 감옥에 가게 됐다. 이후 옥중수고를 썼으며 1937년 옥사했다. 1980년대 전두환 독재정권시절 그의 책이 국내에도 소개되어 운동권들 사이에서도 읽혔다.)


붉은 2년 시기인 1920년 4월의 총파업은 결과적으로 11만에 실패로 종결됐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월에도 노동운동이 벌어졌고, 8월과 9월에 격화됐다. 9월 당시 파업에 참여한 무장 노동자들은 토리노의 185개 철강회사를 점거했으며, 이탈리아의 지올리티 내각은 결국 군대를 동원했다. 토리노에 5만명의 군인들이 파견되었고, 노조상층부가 노동자들의 공장점거를 지지하지 않으면서 이 파업도 노동자들이 공장 점거를 풀면서 끝났다. 


1920년 9월 19일 이탈리아 노동총연맹은 기업주 대표들과 인금인상과 노동조건 해건을 약속받는 대신에 공장점거를 푼다는 대원칙에 합의했다. 사회당도 사회적 대타협에 합의했다. 이로써 2년에 걸친 이탈리아 혁명운동은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그람쉬를 비롯한 사회당 내 좌파들은 노동운동의 패배가 사회당과 노조 지도부의 무능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당시 그람쉬가 제시한 새로운 노동조직가 운동의 방향이 이 시기에 급격히 부상했다. 당시 그람쉬가 조직한 노동조직은 러시아와 헝가리 및 오스트리아 등에서 실행된 소비에트 모델을 기반으로 하여 구상됐다. 그람쉬는 공장, 건설 현장, 광산, 농장, 상점 및 일반 농민 개개인을 망라하는 모든 노동 계층의 생산단위를 기본으로 평의회를 조직하고자 했다.


그람쉬가 구상했던 공장평의회 조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미 각 공장에 존재하고 있던 내부위원회를 기반으로 구성원을 대표하는 대표위원을 선출한 뒤 다시 대표위원회를 구성한다. 둘째, 이때 선거를 통해 대략 노동자 15명당 한 명의 대표위원을 선출하고, 공장의 각 계층과 분야의 대표자를 선출한 뒤 공장대표위원회를 조직한다. 셋째, 공장대표위원회가 각 지구나 구역별로 지구위원회를 구성하는 단위가 되며, 구역에 속한 모든 노동자, 즉 운전기사, 상정 종업원, 식당 웨이터, 청소부, 개인 고용 노동자 등의 대표가 포함될 수 있도록 한다.

(이탈리아 공산당 깃발, 이탈리아 공산당은 무솔리니 하에서 탄압받았으며 지하로 숨었다.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무솔리니가 축출되자 이탈리아 내에서 빨치산 운동에 주력하여 나치와 무솔리니에 맞서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와 더불어 서유럽에서 가장 큰 세력을 확보한 정당이 되었다 미국의 정치공작으로 집권에 실패했다.)


그람쉬는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모델을 토대로 동지들을 규합해, 보르디가, 타스카, 톨리아티, 테라치니와 함께 1921년 1월 이른바 이탈리아 공산당(Communist Party of Italy)을 창당했다. 그람쉬가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했을 당시, 이른바 붉은 2년은 끝난 상태였다.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좌파 조직만 성장했던 것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1919년부터 베니토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파시스트 단체가 창설되었고, 이들은 1921년 최초로 파시스트당을 창당했다. 다음 해인 1922년 무솔리니는 자신이 만든 군사를 로마로 진군시켰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등에 업고 수상이 됐다. 무솔리니가 집권한 이후 이탈리아 사회당과 공산당을 포함한 좌파조직은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고 지하로 숨었다.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자 그람쉬는 1926년 무솔리니 치하에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됐다. 20년 형을 선고받은 그람쉬는 옥중에서 저작활동을 이어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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