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이 되고 난 이후 미군정 통치를 거치면서, 과거 일제에 적극 협력했던 친일파들은 친미파가 되어 신분세탁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이들은 학계와 정치, 군사, 경찰, 행정, 기업 등 대부분의 분야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내에서 친일파를 청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바로 반민특위의 활동이 그러했다.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줄임말로 친일파 청산을 목적으로 활동했던 단체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고 궁극적으로 이 조직을 해체시킨 주체는 바로 대통령인 이승만이었다. 19491월 반민특위는 한 사람을 체포했다. 그가 바로 노덕술이다.

 

노덕술은 189961일 울산 장생포에서 태어났다. 1918년 경찰이 되기 위해 경남순사교습소에 지원했으며, 졸업 후 일제 말단 순사로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1921년에는 순사부장을 맡았고, 1924년에는 경부보 시험에 합격하여 경남지역에서 근무했다. 그는 경찰에 있으면서 상승 가도를 달렸는데, 당시 일본인도 달기 힘든 경부자리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가 높은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그가 일제가 원하는 데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다 죽이고 잔인하게 고문했기 때문이다.

 

노덕술의 악질적인 고문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이어졌다. 1927년 일제의 신간회 탄압이 있자, 노덕술은 신간회 간부인 박일향을 잡아들여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신간회 탄압 당시에만 노덕술에게 고문을 받아 죽은 독립운동가는 3명이나 된다. 노덕술의 고문 방식은 아주 다양했으며, 일설에 따르면 그의 고문은 일본인 형사들도 기겁할 정도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일설에 따르면 일제 경찰이 전국의 고문기술을 총 정리했는데, 그 가운데 70% 가량이 노덕술의 기술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1928년 반일 학생모임인 혁조회를 적발하여 이들 회장 김규직 등 9명을 잡아들여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그리고 잡아들여 고문한 9명 중에 3명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노덕술은 이에 동참한 고등학생들을 2차례에 걸쳐 구속하여 모질게 고문했다. 193251ML(Marx-Lenin)당원인 김재학이 메이데이(May Day) 시위행렬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노덕술에게 고문당했다. 노덕술은 그를 직접 검거해 두 손을 뒤로 두 발을 앞으로 결박해 천장에 매달아 구타와 함께 숱한 고문을 했으며, 그가 통영에서 1년 남짓 근무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잡혔고, 또 고문당했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노덕술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인터뷰가 나온다.

 

하여간 통영에서 엄청나게 잡혀가지고 제일 많이 고문한 사람들이 허가비 노덕술이 한경부 이런 사람들이야. 솔직히 말하면 그는 들어가면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반쯤 죽여 버리지요 뭐.”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노덕술은 1933년에는 경부가 됐고, 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3년에는 경시자리까지 올랐다. 조선인 가운데 일제 경찰로 경시를 단 사람은 35년 식민 지배를 통틀어 21명뿐이었다는 사실에서, 그가 얼마나 악질적인 친일 경찰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또 부패한 경찰이었다. 1931년 일제의 만주사변 이래로 노덕술은 화물자동차 징발과 군수품 수송에 적극 나섰으며, 일제 공훈 기록으로만 따져도 노덕술은 1937년에서 1938년 사이에는 841938년에서 1940년에는 104회에 달했다. 1949년 반민특위 조사 기록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60만 원이나 되는데, 현재 시세로 하자면 100억 원이 넘는다.

 

1945년 해방을 맞은 시점에서 노덕술은 평양경찰서장으로 있다가, 소련군이 진주하자 친일 인사로 지목되 구금당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금에서 벗어나 남한으로 내려왔으며, 미군정 하에서 수도경찰청장이던 장택상과 경무부장이던 조병옥이 친일 경찰을 재등용하는 정책을 실행하게 되면서, 노덕술은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장택상은 노덕술에게 날개를 피게 해줬다. 194646일 우익 거물인사인 송진우 암살범들을 검거한 공로로 노덕술은 경찰 수뇌부에 인정받았으며, 그해 5월에 있던 정판사 사건에서 조선 공산당 재정부장이던 이관술을 잔인하게 고문했다. 놀랍게도 이관술은 노덕술에게 일제시대때 총 3번이나 고문을 당했다. 그 외에도 노덕술은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좌우합작운동으로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인 여운형 암살 배후에 있던 것으로도 추정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을 고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약산 김원봉은 19472월 자택에서 볼일을 보던 중 노덕술에게 체포돼 갖은 고문을 당하고 뺨을 맞는 수모를 겪었다. 노덕술이 김원봉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한 명분은 바로 미군정 포고령 위반이었다. 해방 된 땅에서 악질 친일 경찰이 전설적인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고 탄압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노덕술은 위기를 맞았다. 그해 10월 반민특위가 출범하자, 노덕술은 우익 테러리스트인 백민태를 찾아, 반민특위와 연관된 이들을 사전에 죽이려 했다. 노덕술이 사전에 죽이려 했던 인물들 중에는 김병로나 신익희 그리고 김상덕과 같은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던 반면, 유진산이나 이철승 그리고 김두한과 같은 극우 반공주의자들도 있었다. 놀랍게도 백민태라는 인물이 반민특위에 자수하면서, 노덕술은 체포당했다. 노덕술은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그를 지원해준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대통령 이승만이다. 결국 이승만의 도움으로 그는 풀려났고, 반민특위도 이승만에 의해 해체됐다. 이승만은 노덕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 같은 애국자가 있어 내가 발 뻗고 잔다.”

 

한국전쟁이 있던 1950년 노덕술은 군으로 자리를 옮겨 중령이 됐고, 육군 제1사단 헌병대장을 지냈다. 그는 이승만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고, 심지어 주한 미대사 무초가 이승만에게 전달한 서한에는 그를 높게 평가하는 구절이 등장할 정도다. 그랬던 노덕술이지만 1955년 돌연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재판에 회부된 이유는 그가 밀수와 관련이 있다. 이후 노덕술은 고향인 울산으로 내려왔으며, 19604.19 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국회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까지 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그는 호의호식 하다가 19684169세의 나이로 편하게 생을 마감했다.

 

노덕술이 이렇게 잘먹고 잘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친일파를 앞세워 나라를 만든 미국과 이승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덕술이라는 존재가 만들어낸 대한민국의 모순은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거쳐 박처원과 이근안으로 이어졌다. 독립운동을 탄압하던 친일파들은 해방 후 친미파가 되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고,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는 민주화 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이런 악질 친일파를 애국자로 둔갑시킨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 부르는 이들이 한심할 따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