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3월 16일 새벽 찰리 중대원을 태운 헬리콥터가 윌리엄 캘리(William Calley) 중위가 이끄는 찰리 중대 소대원 30명을 이른바 미라이-4(My Lai Four) 지역 인근에 내려 놓았다. 미라이 마을에 진입한 병사 30명은 이후 4시간 동안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있는 생명체는 남김 없이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인근에 있는 미케(My Khe) 지역으로 가서 양민을 학살했다. 총 504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학살당했고, 이중 17명이 임산부, 173명이 어린이 그리고 56명이 5개월 미만의 유아였으며, 총 274채가 불에 탔으며 수천 마리의 가축이 죽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이다.
(노근리 학살 현장인 쌍굴다리, 글쓴이는 작년 겨울과 가을에 방문한 적이 있다.)
미라이 학살은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 내의 반전여론을 확산시킨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자행하는 짓들이 바로 이러한 학살극이었음이 드러났다. 미라이 학살을 통해, 미국인들은 민간인과 베트콩의 구분 없이 학살할 수 있는 자유사격지대(Free Fire Zone)의 실체와 그로 인한 민간인 피해의 진상을 제대로 알게 됐다. 이와 같은 진실이 밝혀짐에 따라, 베트남 전쟁의 명분은 완벽히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미라이 학살이 일어나기 18년 전, 미국은 아시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 전쟁이 바로 한국전쟁(Korean War)이다. 한국전쟁이 북한의 침공으로 발발하자, 미국은 즉각적으로 군사 개입했다. 1950년 7월 2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 지상부대가 부산항을 통해 상륙했고, 7월 5일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에서 한국전쟁에 투입된 스미스 부대는 남하하는 인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오산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스미스 부대는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에게 패배했다. 즉각적인 지상군 개입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7월 19일 대전 전투에서 미군은 2,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속출했고, 지휘관이던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소장이 포로로 붙잡혔다.
(영화 작은 연못의 포스터, Kill Them All이라는 영화의 문구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학살을 연상시킨다.)
결국 미군은 그해 8월에 낙동강 전선이 형성될 때까지, 후퇴하기 바빴다. 백인이 대다수이던 미군의 경우 북한군을 ‘열등한 노란색 인종’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유색 인종과 그 문화를 비문명적이라고 생각하는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을 항복시켰던 역사적 경험도 작용했다. 이런 사고를 가졌던 미군은 후퇴를 거듭했고, 이 과정에서 대량의 양민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노근리 학살(No Gun Ri massacre)이다.
(영화 작은 연못에서 나온 피난민들의 모습, 피난민들은 3일간 쌍굴다리 밑에서 이렇게 학살당했다.)
1950년 7월 23일 후퇴하던 미군은 충북 영동군 주곡리 일대 주민들에게 소개령(분산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짐을 싸서 임계리로 이동했고, 2일 뒤인 25일 미군은 임계리에 모인 지역주민 수백 명(최소 600명)을 후방으로 인도해 하가리 하천변 노천에 숙박시켰다. 다음 날인 26일 피난민들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 노근리를 지나가는 경부선 철도를 따라 피난을 갔다. 그러자 갑자기 미군기가 나타나 주민들을 향해 폭격과 기총사격을 가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명이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최소 수십 명은 죽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군의 항공 폭격과 기총 사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항공기 공격을 피해 쌍굴다리 안으로 달아났다. 이것이 이날 오후 2~3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 노근리 지역에 있던 미군 제7기병연대는 노근리 철도 언덕과 위, 쌍굴 앞뒤에 기관총 부대를 배치하여 도망친 민간인들을 완전히 포위했다. 그러고 나서 굴다리 밖으로 나오는 피난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쌍굴다리를 포위한 미군들은 굴다리를 나오려는 민간인들은 기관총을 발사하여 사살했다. 피난민들은 공포와 갈증, 배고픔에 떨며 28일 오전까지 이 쌍굴다리에 숨어있어야 했다. 배고품을 못견딘 아이들이 울면, 미군은 쌍굴다리를 향해 집중 사격을 했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노근리 학살을 표현한 그림)
노근리 학살은 7월 26일 오후 3시부터 29일 새벽까지 무려 60시간 동안 진행됐다. 이 학살로 죽은 사람은 어린 아이와 노인, 여성을 가리지 않았다. 겁먹은 피난민들은 아비규환의 지옥 속에서 미군에게 학살당했다. 몇 명이 야음을 틈타 쌍굴을 탈출했고, 쌍굴 안에서 살아남은 이는 20명도 안된 것으로 확인된다. 3일간의 학살로 노근리에서 최소 300명에서 많게는 500명이 미군에게 학살당했다. 학살을 마친 미군은 노근리를 떠나 남으로 후퇴했다. 이것이 바로 후퇴하던 미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었다.
(노근리 학살의 시작을 알린 미군의 항공폭격과 기총사격)
노근리 학살이 한국 사회에서 알려지게 된 것은 2001년이 되어서다. 한국전쟁 이후 극단적 반공주의 사회였던 한국에서 노근리 학살을 꺼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노근리 사람들은 침묵해야 했다. 한미동맹과 반공을 외치는 사회는 이들의 아품을 감추려했고, 그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조사 과정에서의 미국 정부의 반응은 다소 미온적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최소한 이에 대한 자료 중 일부는 파괴하지 않았고, 정보공개법을 통해 이를 공개했다. 조 잭먼 등 당시 부대원들이 용기 있게 증언을 해주었으며, AP 같은 언론도 병사들에 대한 심층 취재를 해 노근리의 비극이 알려질 수 있었다. 이후 노근리 학살 이야기는 2010년 국내에서 영화 ‘작은 연못(A Little Pound)’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노근리 이야기, 2011년에 출판된 노근리 학살 관련 만화책이다.)
노근리 학살은 미군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였다. 그러나 노근리 학살은 베트남 전쟁 시기 미라이 학살 만큼의 호소력을 갖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한국전쟁이 미국에서 매카시즘(McCarthyism)이 강화되는 시점에 치러진 전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과는 달리 반전여론이 너무나도 미미했다. 그리고 전쟁 자체가 원점에서 끝나며 미국인들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이것이 바로 노근리 학살이 한국전쟁의 미라이 학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미국인들이 모르는 결정적인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