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 있는 내용은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3>의 저자이자 미국사 전공자인 콜롬비아 대학 교수인 앨런 브링클리가 책에서 집필한 내용입니다.)

 

1953727, 한국의 판문점에서 교섭 당사자는 마침내 휴전 동의서에 서명했다. 두 적대 세력은 각자의 군대를, 전쟁 이전의 남북한 경계선인 38선을 따라 현 전선에서 1.5마일씩 후퇴시켜야 했다. 한국을 평화적으로 재통일할 수단을 강구하기 위해 1954년에 제네바 회담이 열렸지만, 사실 그 회담에서는 어떠한 합의도 끌어내지 못했으며, 휴전선은 양국 간에 명백하고도 영구적인 경계선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거의 동시에 미국은 동남아시아에서 길고도 쓰디슨 전쟁에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1945년 이후 프랑스는 한때 식민지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게 포기해야만 했던 베트남에서 예전의 권위를 되찾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반대하는 호찌민(Ho Chi Minh)의 강력한 민족주의 세력은 독립 투쟁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호찌민은 대서양헌장의 반식민지적 수사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연설에 기초하여, 1945년에 미국의 지원을 희망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제2차 세계대전 증 일본과 싸울 때 미국의 정보 세력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민족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였다. 트루먼 행정부는 호찌민을 무시하고 미국의 가장 중요한 냉전 우방 중의 하나인 프랑스를 지원했다.

 

호찌민은 1954년까지 공산주의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한편, 미국은 1950년 이래 베트남에서 프랑스가 벌이는 성과 없는 전투의 비용 대부분을 지불하고 있었다. 1954년 초, 12,000명의 프랑스 군대는 디엔비엔푸(Dien Bien Phu)라는 부락에서 위험스런 포위 상태에 놓여 있었다. 미국이 개입해야만 프랑스 군대가 완전히 괴멸당하는 상황을 막을 수 있었다. 아이젠 하워는 국무 장관 덜레스, 부통령 닉슨, 그 외 여러 사람이 강력히 권하는데도 의화나 미국의 여타 우방이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베트남에서 미군의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를 거절했다.

 

미국의 원조가 없게 되자, 프랑스의 디엔비엔푸 요새는 마침내 195457일에 붕괴되었다. 그해 여름, 한국에서의 협정을 고려하던 제네바 회담에서, 프랑스는 재빨리 갈등의 조정에 동의했다. 미국이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었던, 19547월 베트남에 관한 제네바 협정은 17도선을 따라 베트남을 잠정적으로 분단시키는 것이었다. 북쪽은 호찌민이, 남쪽은 친서방 체제가 지배하게 되었다.

 

민주 선거는 1956년에 베트남을 통일할 토대가 되었다. 그 협정은 프랑스의 베트남 개입이 끝나고 베트남에서 미국이라는 존재가 확대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부각시켰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친미 정권을 세우는 데 협력했으며, 정권의 우두머리로 소수 세력인 가톨릭교도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을 세웠다. 패배를 예상한 디엠은 1956년 선거를 허용하지 않았다. 북쪽에서 어떤 공격을 가해 와도 미국이 군사원조를 풍족히 제공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디엠은 선거를 거부하면서도 안전하다고 느꼈다.

 

출처: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3 p.374~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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