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의 반공주의 국가 미국

(로널드 레이건, 그는 켈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냈던 대통령으로 미국 사회를 다시 반공주의적 사회로 만들고자 했다.)

1980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재선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그리고 이란 인질 사건 등으로 인하여 카터에게 크게 실망한 미국 국민들은 좀 더 미국적이고 보수주의적인 후보에게 매력을 느꼈는데, 그 후보가 바로 전직 영화배우이자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했던 보수주의자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은 로널드 레이건은 일반투표에서 51%를 얻어 41%를 얻은 카터를 꺾고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은 소위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라고 하는 정책을 내세웠다. 이것은 ‘공급 중심 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에 기반한 것이었다. 로널드 레이건은 미국 국내의 각종 사회, 경제 문제에서 줄곧 극단 보수적인 경향을 보이며 보수주의자들의 편에 섰다. 그는 자유 기업 제도와 기업가의 판단을 믿었고, 자유 방임주의만이 경제 불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레이거노믹스를 추진하면서 도시 지원, 노인 의료 보장제, 저소득층 의료 보조, 식량 구입권,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 보조금, 학교 급식 등을 포함한 여러 종류의 복지와 사회 보장에 사용되는 예산을 삭감했다. 그는 부유층과 기업의 이익에 부합하여 그들에게 세금을 삭감하는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 레이건의 경제 정책이 나름의 효과를 가져와서 1980년 당시 12.4%였던 인플레이션이 1982년에는 7%까지 하락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레이건의 경제 정책으로 혜택을 본 계층은 당연히 미국의 대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부유층들이었다.

(스타워즈 계획, 실제로 로널드 레이건은 스타워즈 계획을 세워 소련을 군사적으로 앞지르고자 했다.)

 

레이건 재벌과 자본가 위주의 경제 정책을 추진했던 이유는 바로 그의 반공주의적 시각에 있었다. 미국 공화당 출신의 대통령이었던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 있었던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미국이 세계를 이끌어야 한다 생각했고, 이를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여 소위 악의 제국 소련에 맞서야 한다는 망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미국의 침략전쟁인 베트남 전쟁을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숭고한 사업’으로 생각했었다. 실제로 로널드 레이건의 재임 기간 동안 미육군의 광고 예산은 무려 1억 달러 이상으로 급증했다. 또한 그가 추진했던 해군 증강 계획으로 1986년에는 “해군 함대 600대 및 항공모함 15대 확충 계획”이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1981년 10월 2일 레이건 정부는 미국 전략 무기 시스템 재정비 계획을 발표하며 소련을 대상으로 핵 우위를 점하고자 했다. 그가 재임안 8년 동안 군사 지출은 매년 약 1500억 달러에서 3천억 달러로 두배가 되었는데, 이는 미국 예산 총액의 30%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1983년 소련의 대한항공 격추 사건 당시 한국측 기사)

 

이렇게 미국이 다시 소련과의 체제 및 군사경쟁으로 대응하자 미국과 소련의 갈등은 극심해졌다. 그러던 1983년 3월 레이건은 미국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영화 ‘스타워즈’의 이름을 딴 전략 방어 계획인 ‘스타워즈 계획(Starwars Plan)’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20세기 말까지 우주와 지상에 빛이나 빔을 이용하는 지향성 에너지 무기에 공격용 위성과 요격 미사일이 더해지는 다중 미사일 방어 체계를 구축하여 소련의 공격 미사일을 요격한다”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러한 레이건의 망상적 계획은 현실 세계와 영화 세계를 착각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고, 적잖은 과학자들로부터도 ‘미친 짓’이라는 비난을 받았었다.

(백무현 작가의 만화 전두환에 나온 소련의 대한항공 격추 사건의 이면, 로널드 레이건은 이 사건을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는 것으로 이용했다.)

로널드 레이건이 집권하면서 미국 사회은 굉장히 많이 반공화 되어가고 있었다. 1982년 6월 12일 미국 뉴욕에서 100만 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핵무기 반대 시위가 열렸는데, 레이건은 시위하는 사람들을 빚대어 “이는 소련 KGB의 사주로 일어난 것”이며 그들은 미국이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1983년 8월에는 269명을 태우고 대한민국 김포공항으로 가던 대한항공 비행기 KAL 007기가 소련의 사할린 상공에서 격추되는 일이 있으면서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소련에 대한 적대의식을 좀 더 고취시킬 수 있었다. 사실 여기에는 대한항공이 미국을 위해 염탐했다는 얘기도 존재하고, 소련측에서 착륙을 요구했을 때, 이를 거부하고 비행기의 고도를 올렸다는 점에서 많은 의문점이 남는 사건이었다. 어쨌든 이 사건이 터지자 미국의 레이건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국방 예산을 증가했고, 미국에서는 반소련 감정이 생겨났으며, CIA는 그 사건을 통해 니카라과 정부군에 대항하는 콘트라 반군에게 2400만 달러를 지원했다.

(1984년에 개봉한 반소련 영화 레드 던)

 

레이건의 이런 반공적 사상은 미국 영화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미국의 헐리우드 영화사는 베트남 전쟁의 상처를 건드리는 <디어헌터 Deer Hunter>나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 그리고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와 같은 영화들을 만들었지만, 1980년대에는 반공성향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1980년대에 나온 반공영화 3가지를 뽑자면, <레드 던 Red Dawn>과 <람보 시리즈 Rambo> 그리고 <탑 건 Top Gun>을 들 수 있다. 붉은 새벽이라는 제목을 가진 영화 레드 던은 소련의 지시로 이루어진 핵전쟁으로 미국의 대도시가 대부분 초토화된 직후, 평화로운 콜로라도주의 도시를 침공한 저 화려한 소련과 쿠바, 니카라과 연합군을 상대로 학생들이 게릴라 전을 펼쳐 침략자들을 몰아낸다는 허무맹랑한 영화다. 제작비로 420만 달러가 들었던 이 영화는 제작비의 9배 이상인 3837만 달러를 기록하며 나름 흥행했다.

(실베스터 스텔론이 출연한 액션 영화 람보)

 

2019년에 새 시리즈가 개봉할 정도로 미국인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던 영화 람보는 1980년대 미국의 반공정서와 베트남 전쟁의 패배 의식을 보여준다. 영화 람보는 전직 그린베레 출신인 람보가 베트남 전쟁 이후 베트남에 억류되어 있던 미군 포로들을 구출하러 베트남에 침투하여 활약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영화에 등장한 람보는 소련 군사고문단장 프톱스키 중령과 북베트남군에게 모진 고문을 받는데, 이를 끝까지 극복해낸 람보는 M-60 기관총 두정을 들고 북베트남군과 이를 지원하는 소련 군사고문단을 몰살시킨다. 주인공 람보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UH-1 헬기가 날라오자 그 헬기에 올라타 병사들을 해치우고 헬기를 강탈해 돌아가 적의 본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포로들을 모두 구출하게 된다. 이런 서사를 보여주는 영화 람보는 1980년대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미국인들에게 일종에 반공의식을 고취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톰 크루즈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탑 건)

 

미남 배우 톰 크루즈가 출연한 영화 ‘탑 건(Top Gun)’은 1986년 미군에게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제작되었다. 인도양 어느 곳에 배치된 미국 항공모함에서 근무하는 주인공 톰 크루즈는 영화상에서 아주 매력적으로 묘사된다. 그는 유혹적이게도 기름을 바르고, 햇볕에 그을리고, 멋있는 가죽 재킷을 입고, 오토바이를 몰고, 소울 노래를 부르는 매력 넘치는 전투기 조종사다. 거기다 미모가 아름다운 금발의 아가씨를 매혹할 정도로 연애 능력도 뛰어나서, 영화상에서 아주 화려하고 로맨틱한 연출까지 보여준다. 그는 작전 중에 전우를 잃지만 이를 극복하고 인도양 어느곳에서 소련제 전투기인 ‘미그기(MiG)’와 공중 대결을 펼쳐 유혈 사태 없이 상대편을 굴복시키며, 금발의 여주인공 품에 안는다. 이렇게 액션과 로맨스, 전투의 화려함까지 보여주며 미군을 홍보했던 영화 탑 건은 미국 내 극장에서 무려 5천만 명 가까지 관람했다. 따라서 미군은 영화 탑 건을 통해 자신들이 적 소련을 굴복시키는 장면을 미국과 전 세계에 홍보하고, 돈까지 벌어들이는 일거양득을 보았다.

영화와 대중매체를 통해 미국과 미군을 홍보하며 공산주의에 대해 반감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던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국제적으로도 많은 군사 개입과 문제를 초래했다. 로널드 레이건은 다른 나라 문제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승리를 얻기도 했는데, 1983년에 있었던 그레나다 침공이 그러했다. 1983년 10월 카리브해의 섬나라 그레나다 상공에서 미군의 C-130 공군 수송기의 뒷문이 열렸다. 수송기의 뒷문이 열리자 미국의 특수부대인 SEAL 팀식스 대원들은 강하했고, 예정대로 강하 지점에 도착했다. 로널드 레이건과 국가안보회의 참모진들이 비밀스럽게 준비한 ‘절박한 분노 작전(Operation Urgent Fury)’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레나다 침공 당시 미군)

1983년 10월 25일 미국은 1만 명의 해병대와 공수특전단을 앞세워 인구 11만 명 밖에 안되는 카리브해의 조그마한 섬 그레나다를 침략했다. 이는 소위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극도로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레이건 정부가 “그레나다 내에 있는 미국인 1000명을 쿠바의 위협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정당방위다.”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로 미국이 그레나라를 침공한 목적은 쿠바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도한 봉기를 진압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그레나다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인들도 미국의 그레나다 침략을 거세게 반대했다. 뉴욕타임스와 로스앤젤레스타임스가 밝힌 것에 따르면 “미 국무성은 어떻게 해서든 그레나다 침략이 미국인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얻어내기 위해, 그레나다 의과대학의 미국인 교직원들에게 미 의대생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이야기하도록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

(미군에게 붙잡힌 그레나다인)

미국은 그레나다 침략 과정에서 병원을 비롯한 민간 시설에 무차별 폭격과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대부분의 사상자는 당연히 그레나다인이었고, 대략 1000명 정도의 그레나다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레나다 침공 과정에서 미군측 사상자는 134명으로 알려졌는데, 이 중 사망자는 19명이었다. 그리고 미군측 사상자 대부분은 아군끼리의 상호총격전으로 부상 또는 사망한 것이었다. 그레나다 침공 과정에서 로널드 레이건은 그레나다를 공산주의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과 인명을 구조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이는 타국에 대한 엄연한 침략 행위였다. 그레나다 침공을 통해 미국의 레이건 정권은 지지도가 15%나 상승했으며, 그레나다에서의 승리에 환호했다.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

그로부터 3년 뒤인 1986년 미국은 리비아를 대상으로 기습 폭격을 감행했다. 그 이유는 로널드 레이건에게 있어서 리비아의 카다피는 미국의 이익에 방해가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레이건이 제거하려고 했던 카다피는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1969년 친서방 왕정 세력들에 맞서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Muammar al-Gaddafi)’는 물 부족 국가인 리비아에 농업과 산업 개발을 추진하여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산업 시스템을 소비 경제 국가에서 가능한 생산중심의 자립경제로 변화시켰다. 토지 또한 스스로 경작할 수 있는 만큼의 땅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고, 자본주의식 착취구조인 임금제도를 철폐하고자 했다. 그는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69년부터 1975년 사이 총 11만 212 가구의 주택을 건설하여 비어있는 건물에 필요한 가구에게 분배했다. 그리고 카다피는 리비아 사회에서 차별받던 여성들에게 균등한 교육, 고용, 국가건설의 기회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1968~78년 사이 중등교육을 받는 여학생 수가 4배 이상 증가했다. 또한 카다피는 전기와 교육이 리비아 인민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했었다.

(1986년 리비아 폭격 당시 항공모함에서 이륙하는 미군 전투기)

미국이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가 등을 지게 된 것은 1980년부터였다.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것을 거절했던 리비아의 카다피는 결국 미국과의 관계가 나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고, 1980년 9월 리비아 공군이 리비아 공군기지 부근에서 돌아다니던 미군 정찰기를 격추시키면서 양국의 사이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1986년 초에 일어났던 로마와 비엔나 공항의 폭파사건이 리비아 측의 지원을 받아 일어난 것으로 생각한 레이건은 그해 3월 리비아가 자신들의 영해임을 주장하는 수역에 일부러 미 해군함을 침범시켰다. 1986년 4월 서베를린의 미군 전용 디스코클럽 폭파사건을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레이건은 이를 리비아의 테러 행위라 주장하며 카다피를 죽이기 위한 기습 폭격을 감행하게 되었다. 미국의 레이건 정권은 리비아의 카다피를 죽이기 위해 트리폴리와 뱅가지에 무차별 공습을 퍼부었고, 카다피는 살아남았지만, 230명 이상의 리비아인들이 미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죽거나 다쳤다.

(콘트라 반군)

(이란 콘트라 사건 당시 타임즈 기사)

 

미국을 보수주의화 시켰던 로널드 레이건은 결국 1986년 이란 콘트라 스캔틀을 겪으며 위기를 맞았다. 레이건 정부는 당시 레바논에 억류되어 있던 미국 인질들을 석방하는 데 있어 이란의 힘을 빌렸는데, 그 과정에서 비밀무기판매도 진행했다. 18개월간 탱크격파용 토우미사일 1만 2000기와 항공기 파괴용 호크미사일 235기등을 이란에게 판매했고, 그러한 무기판매대금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콘트라 우익 반군을 지원하기 위한 지원자금으로 사용했다. 이것은 미국 스스로가 테러국으로 규정한 이란에게 비밀리에 무기를 팔면서 불법적으로 콘트라 반군을 지원한 행위였다. 거기다 그 시기 미국은 이란 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지원했었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 정권을 지원하며 여러 가지 물자와 무기를 지원했고, 그 무기는 후세인 정권이 쿠르드족을 학살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란 콘트라 스캔들은 레이건 정부에게 있어 큰 비판점이 되었다.

레이건 정부가 추진했던 ‘레이건 독트린(Reagan doctrine)’은 소위 1947년 해리 트루먼이 주장했던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남미의 엘살바도르에서 사회주의 성향의 게릴라들이 인권 유린을 자행하는 호세 두아르테(Jose Duarte)의 우파 독재 정부를 전복시키려 하자 엘살바도르 독재 정부를 지원했었다. 이처럼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내세우면서 뒤에서는 타국의 인권을 짓밟았다. 레이건 정부의 폭력은 니카라과나 엘살바도르 그리고 그레나다와 같은 중남미 국가와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등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또한 적잖은 국방비 지출로 레이건 정부는 경제적 적자가 급증했었다. 복지분야의 지출은 줄어들었고, 부유층들만 그 혜택을 보았다. 따라서 1980년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전형적인 친제국주의적 정부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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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머핀 2020-02-27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성스런 글 잘 봤습니다 :)

NamGiKim 2020-02-27 18:06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