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는 것
이재철 지음 / 홍성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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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는 목사님 홈페이지에서 이 그림을 발견하고 "뭐지?"라는 생각으로 글을 읽기 시작했다. 어디서 많이 보던 글 같은데라는 생각을 가지고 읽다보니 이 책이었다. 나도 몇번 읽었던 책인데 이 그림을 기억해 내지 못하다니 헛읽었구나는 생각이 들어 얼굴이 화끈 거렸다. 다시 읽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신앙의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스페인 화가 고야의 작품 중에 '이빨 사냥'이 이 있다. 한 여인이 교수형으로 사형당한 시체의 입으로부터 치아를 뽑아내려는 그림이다. 본래 짐승에게만 해당되는 ‘이빨’이란 단어를 그림 제목의 우리말 번역에 동원한 것은, 그것이 죽은 시체의 치아를 가리키기 때문인 듯하다. 그림 속엔 죽은 사형수의 시체가 교수대의 줄에 매달려 축 늘어져 있다. 그 앞에서 한 여인이 무서움에 떨며 시체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얼굴을 뒤로 돌린 채, 한 팔만을 뻗어 시체 입 속의 치아를 뽑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죽은 사람의 시체, 그것도 교수형으로 사형당해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시체라면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하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왜 무서움을 무릅쓰면서까지 한낱 시체의 치아를 사냥하려는가? 고야가 살던 18세기 스페인에 만연해 있던 미신 때문이었다. 즉 사형당한 시체의 치아엔 신통한 힘이 있어 그것을 지닌 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미신이었다.

고야가 그 미신의 내용을 소재로 ‘이빨사냥’을 그린 것은, 그처럼 하찮은 미신에 빠진 어리석은 여인 한 사람을 조롱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 여인을 통해 모든 크리스천들을 비판하려 함이었다. 당시 가톨릭이 국교였던 스페인의 모든 국민은 크리스천이었다. 집집마다 성상으로 장식되지 않은 집이 없었고, 주일마다 성당에서는 거룩한 미사가 드려졌다. 사람들은 성당에서나 집에서나 자기 소원 간구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실생활은 전혀 딴판이었다. 자기 욕망을 성취하는 길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마치 시체의 이빨을 사냥하고 있는 그 미련한 여인처럼 말이다. 고야가 보기엔 그들이 참된 크리스천일 수가 없었다. 결국 고야의 ‘이빨사냥’ 역시 그릇된 선택을 당연시하고 있는 인간 어리석음에 대한 한탄-주님의 한탄에 맥이 닿아있는-이었다. 그리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주님의 이 한탄으로부터 자유로운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니다.                  -113p 인용

  이것이 비기독교인만의 문제가 아님은, 크리스천인 우리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예배에는 경건한 모습으로 어김없이 참석하지만, 실생활 속에서는 ‘이빨사냥’ 속의 여인처럼 욕망의 성취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우리 자신 말이다. 이 세상을 회복시키는 한 알의 밀알이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타락시킨 공범으로서의 우리 자신 말이다.  -114p 인용

  우리는 생존의 차원을 넘어 선진국이 되기를 원하는 단계에 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단호하게 부정직과 결별하징 낳으면 안 된다. 바른 선택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선진국은 돈으로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바른 삶의 선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거짓된 선택의 되풀이로는 선진국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계속 주님의 한탄거리가 될 뿐이다. 마치 '이빨 사냥' 속의 여인처럼 말이다.         -115p 인용

  나폴레옹은 일평생 자기 야욕과 야망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이다. 그는 자기 야망을 위해 무려 100만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전장에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유배지인 세인트헬레나에서 죽은 뒤엔 그곳에 매장되었다가, 20여 년이 지나서야 한 줌의 재가 되어 앵발리드 성당에 안치되었다. ‘불구의’ ‘쓸모없는’ ‘무효의’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프랑스어 형용사 앵발리드(invalide)는 ‘부상자’ 또는 ‘상이군인’을 뜻하기도 한다. 그 성당의 이름이 앵발리드인 것은, 지금은 군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주위 건물이 본래 전쟁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으로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어떻든 나폴레옹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앵발리드 성당에 안치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기 야망의 노예로 살던 그의 삶 자체가 세상에서는 황제로 군림했을지언정 하나님 앞에서는 불구의 삶이요, 아무 쓸모없는 무효, 즉 앵발리드의 삶이었음을 웅변해 주고 있다.

  턱을 고이고 생각에 몰두해 있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그 너머 나폴레옹의 앵발리드 성당-그것은 참으로 묘한 대조였고, 심오한 영적 메시지를 던져 주었다. 주님의 말씀 안에서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보며 생각하는 크리스천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그럴듯하게 자신을 꾸며도 결국 하나님 앞에서는 ‘앵발리드’일 수밖에 없다. 말씀 안에서 생각지 않는 자는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고, 인간의 중심 그 자체로부터는 죽음 이외의 것-참된 것은 솟아나지 않는다. -135p 인용

  나는 이 재철 목사님 설교를 참 좋아한다. 좀더 엄밀히 말하면 그 분의 설교집을 좋아한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분의 살교 테잎을 구해서 듣기는 했지만 설교집만큼 강력하지는 않다. 이분의 설교집을 읽으면서 갖는 생각은 참 박식하다는 것이다. 세계문화와 사회적인 모습들, 뉴스 등 여러가지 모습을 가지고 하나씩 짜맞추어 가면서 우리로 하여금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도록 만든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어느새 코너까지 몰려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길이 결코 기분나쁜 것은 아니다. 한국에 이런 분이 있구나라는 생각에 가슴 한켠이 뿌듯해 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분의 책이 나오면 모두 사서 몇번을 읽는 것이다. 장담컨대 내가 설교집을 이렇게 열심히 읽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재철 목사님을 보면 "울며 씨를 뿌리는 사람"이 떠오른다. 황제의 논리와 믿음의 논리를 비교하면서 황제의 논리가 아닌 믿음의 논리를 따라 살아갈 것을 우리에게 주문하고 있지만 이 시대 대다수의 청년들이 믿음의 논리가 아닌 황제의 논리를 추종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믿음의 논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참 미련한 모습같아 보이지만 이분은 미련한 그 길을 선택하셨다. 왜 그럴까? 씨뿌리는 그런 마음이 아닐까? 씨도 뿌리지 않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는 것이 이 분이 택하신 길이 아닐까? 언젠가 의의 푸른 나무가 가득한 세상을 꿈꾸면서 말이다.

  이빨 사냥이라는 이야기가 참 머리에 남는다. 우리 나라에서 기독교는 더이상 사회의 빛과 소금이 아니다. 천덕꾸러기요 이익집단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물론 아직까지도 세속에 물들지 않은 다수의 신앙인들이 있지만 힘을 쓰는 소수들이, 대형교회의 소수들이 철저하게 이익집단화 해버렸다. 장로 대통령을 말하고, 마귀 새끼를 말하고, 빨갱이를 말하는 교회가 어찌 복음을 말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복음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복받는 이야기, 출세하는 이야기, 성공하는 이야기만 넘쳐난다. 마치 다단계 프로그램을 듣는 것처럼 내가 어떻게 기도해서 복받았는가하는 이야기만 넘쳐 난다. 단 한번이라도 내가 예수 믿고서 어렵지만 그래도 예수 때문에 산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았다. 분명 후자가 믿음의 본질일텐데 우리는 전자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러니 이빨 사냥에 치중할 수밖에.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에 참석하지만 그 안에 진정한 경건이 있는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신앙이 사회를 바꾸어 가는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요, 예수님의 충성된 제자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천덕꾸러기인가? 당신의 믿음의 자리를 살펴보라. 믿음의 논리가 무엇인지, 믿음의 자리가 어디인지, 내 믿음의 원천은 어디에서부터 나며, 내 믿음의 틀은 어떠한지 철저하게 돌아보라. 시간이 가면서 내 신앙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돌아보라. 황제의 논리와 주님의 논리 중 나는 무엇을 선택했는지 돌아보라.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본인도 유구무언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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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일생 믿음의 글들
이재철 지음 / 홍성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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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청년아,

  그대가 만약 그대 욕망의 궁을 짓는 데 그대의 일생을 걸면, 그 궁이 무너지기도 전에 그대 자신이 먼저 그대의 모든 것을 잃고 모두와 단정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그대의 궁을 스스로 허물고 진리의 전을 복원하는 데 그대의 일생을 바치면, 그대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얻게 될 것이다. 그대가 다윗의 일생을 통해 이 사실을 터득하고 그대 일생의 방향을 바르게 설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대 인생을 사랑하고 아끼는 길이요, 그대로 인해 새로워질 조국과 인류의 미래를 사랑하고 지키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군중이 아니라, 깨어 있는 한 인격을 당신의 도구로 쓰심을 잊어서는 안된다.          -9p 책을 열며에서 인용

  서해에서 잡히는 생선이 중국 배에 잡히면 중국산이 되고, 우리나라 배에 잡히면 국산이 된다. 똑같은 곳에 살아도 어느 배에 잡히느냐에 따라서 가격이 천차만별인데 그 이유는 생선이란 얼마나 신선하냐에 그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선(生鮮)이다는 말이 내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 갈겼다. 결국 신앙이란 소급의 대상, 즉 영적인 신선도를 얼마나 지키느냐에 따라 판가름난다는 말이 아니던가? 비전의 사람에서 바울을 발견했다면 인간의 일생에서는 다윗을 발견했다. 많은 설교가들이 다윗에 관하여 이야기했지만 내가 즐겨보고 공감하는 책은 딱 두개이다. 하나는 유진 피터슨의 "다윗 이야기: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요, 다른 하나는 바로 "인간의 일생"이다. 이 두 책은 다윗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결코 식상하지 않다. 오히려 지금가지 내가 모르고 지나갔던 혹은 간과하였던 것들에 대하여 다시 이야기 해준다. 유진 피터슨의 책이 나에게 다윗 이야기를 상상력을 동원하여서 읽어야 함을 가르쳐 줬다면 이 책은 나에게 다윗의 일생을 그 등장에서부터 마무리까지 어떻게 영적인 신선도를 유지하는지 살펴보며 평가하는 법을 가르쳐 줬다.

  역사의 지평이라는 챕터에서는 다윗의 등장을 준비하는 룻과 보아스에 관하여, 홀로, 더불어라는 장에서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선다는 것과 다른 이들과 더불어 선다는 것의 의미를, 베레스 웃사에서는 영적인 신선도를 아직 잃지 않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다윗을, 에덴과 아단에서는 거듭된 성공으로 영적인 신선도를 잃어가는 다윗을, 퇴장과 등장에서는 마지막까지 하나님 앞에 한 맹세와 자기 믿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다윗의 마지막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윗의 이야기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각 부분으로 나누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한 마디를 하기 위함이다. "영적인 신선도를 지키며 살아라."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함이다. 다윗은 결코 흠이 없는 인물이 아니다. 그의 일생은 피로 점철된 인생이다. 골리앗과의 전쟁, 장인과의 전쟁, 자식과의 전쟁, 자식들 간의 암투 등 모든 것들을 지켜 보며 살아온 인생이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네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내 성전을 지으실 수 없다고 선언하셨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인생이요, 모든 왕들의 기준이 되었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그의 인생관에 달려 있다. 마지막을 멋있게 장식했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영적인 신선도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맹세한 것을 마지막까지 지키기 위하여 하루하루 힘겨운 싸움을 하였기 때문이다.

  처음 신앙 생활을 쉽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구원에 이르는 가장 쉬운 길이 죽기 전에 영접하고 죽는 것이라 하는 농담은 빈말이 아니다. 그만큼 영적인 신선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성공한 다음에는 말해 무엇 할 것인가? 게다가 사람들은 영적인 신선도를 지키려는 노력 또한 하지 않는다. 영적인 신선도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기 보다는,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하루하루 힘겹게 투쟁하기 보다는 그 욕망을 풀어 놓아 버린다.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내버려 둔다. 그리고그 욕심에 충실한다. 성경의 가르침에 "Let it be!"를 외치면서 하루하루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이것을 위해 신앙과 하나님마저 이용한다. 이런 세상 가운데에서 프로 크리스천이란 어던 모습인가?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인간의 등장과 퇴장은 무엇인가? 이 책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여, 프로 크리스천이 되라."

PS. 이 책 또한 참 많이 산 책이다. 앞으로도 쭉 사서 나누어 줄 생각이다. 그리고 몇번씩 곱씹어 가면서 돌아본다. 나는 영적인 신선도를 지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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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사람
이재철 지음 / 홍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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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비전이 없으면 방자해집니다. 망상을 좇으면 패가망신합니다. 야망의 노예가 되면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해치는 흉기가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비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으십시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그분을 비전으로 삼아,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자에게 섬김과 봉사를 다하는 진정한 크리스천, 참된 목사가 되십시오. 그때 우리의 생이 다하는 날, 이 땅에 남아 있는 자들이 우리의 마지막 장도를 박수로 환송해 줄 것입니다. 아니 그 순간, 하늘나라로 입성하는 우리를,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박수로 친히 맞아주실 것입니다.    -201p 인용

  장담하건대 지금까지 나만큼 이 책을 많이 산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이재철 목사님을 참으로 신실하게하는 책을 통하여 접하게 되었고 그분의 설교에 매료되었다. 그 후 난 그분의 열성팬이 되어 그분의 책을 모두 구해 읽게 되었다. 몇번씩이나 되풀이 해서 읽고, 내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 기회가 있을 대마다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었던 책 목록 가운데 꼭 들어가 있던 책이다. 내가 왜 이렇게 이 책에 천착하게 되었는가? 이 책이 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화두를 던져주는 책이기 때문이었다.

  비전의 사람! 이 말은 내 인생의 화두였다. 무엇이 비전인가? 지금까지 그저 꿈을 갖고 살면된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비전과 꿈은 다른 것이라고, vision이란 effort가 요구되지만 dream은 그저 머릿속의 생각에 멈추고 마는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준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나는 나름대로 노력하며 살아왔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위 친구들에게, 청년들에게 선물로 주게 되었다. 비전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내게 있어서 신앙을 풀어가는 화두가 되기 대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은 야망이거나 망상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던 이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그 굼을 성취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자기가지도 죽이고 마는 야망인 경우가 많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간 삶의 끝이 대부분 이렇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 이루었는데 허망하다는 느껴지는 경험. 아마도 욕망을 충족되고 난 다음 느끼는 허탈감일 것이다. 이런 것은 비전이 아닐 것이다. 기독교인이 따라야 하는 비전은 더더욱 아니다. 또 어떤 이들은 거창한 꿈을 꾸지만 꿈만 꾸다 끝나버린다. 시작을 안하기 때문이다. 평생 계획만 하다가 이루는 것 하나 없이 끝나버린다. 야망에 몸을 맡기는 사람보다 더 한심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노력은 도외시한채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아서, 내게 주어진 환경이 좋지 않아서라며 핑계를 댄다. 이런 종류의 신앙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변명의 도구로 사용해 버린다.

  이 책은 사도 바울의 인생을 4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자신의 야망을 좇아 살아가는 눈먼 사람으로서의 사울, 자신의 현실이 어던 것인지 깨닫고 자기의 죄를 발견하는 비늘벗은 사울, 말씀으로 바로서고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인지 신앙을 바로 정립하는 성전의 사람 바울,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여주신 비전을 향하여 흔들리지 않고 달려가는 비전의 사람 바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에게 바울을 본받으라 권한다. 특별한 존재 바울을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전혀 다를바 없는 바울의 모습,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비전의 사람이 될 것을 권한다. 이 책의 설득력과 파워는 바로 솔직한 자기 고백과 바울의 모습을 잘 해석한 저자에게서부터 연유한다.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특히 젊은 크리스천들에게 곡 권하고 싶은 책이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이 이 책을 구매할지 장담할 수 없지만 기회가 있는대로 이 책을 권해주려고 한다. 울며 씨를 뿌리는 사람의 마음으로. 이시대 젊은 크리스천들이여 성공이나 야망에 눈을 팔지말고 비전에 목숨을 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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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 당대비평, 평화네트워크 공동 기획
노암 촘스키 외 지음 / 삼인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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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1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대명콘도에 있었다. 세미나에 참석한 후 함께 모여 라면을 끓여 먹던 중 텔레비전에서 비행기와 충돌하여 무너져 내리는 쌍둥이 빌딩의 마지막 모습을 중계해 주고 있었다. 무슨 영화가 저렇게 다큐멘터리 화면같이 나오냐라며 투덜거리던 우리는 그것이 뉴스 화면이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어린 시절 내가 알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빌딩 목록에 이름을 올리던 그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렸다. 자본주의 제국인 미국의 핵심인 맨하탄에 무너질 것처럼 버티고 서 있던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렸다. 이 장면을 기켜보는 사람들은 모두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멍한 상황이 지나간 다음, 각자가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 세미나가 끝난 다음 주 수업의 모든 주제는 9.11로 모아졌다. 특히 내가 전공하던 윤리는 더욱더 날카롭게 이것들을 분석할 것을 내게 요구하였다.

  몇주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난 또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아프간을 침공한 것이다. 물증도 없이 자신들의 심증만 가지고 오사마 빈라덴을 9.11의 배후로 지명하였다. 그리고 오사마 빈라덴을 내 놓지 않는 탈레반 정권을 응징하기 위하여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탈레반 정권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들을 포장하였다. 항구적인 자유를 위하여 독재 정권, 반인권적인 정권 탈레반을 무너뜨리는 거룩한 사명을 미국은 자처했던 것이다. 현격한 무력의 차이는 탈레반 정권을 수도에서 몰아 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소련화 맞장떴던 전력이 있던 사람들이다. 소련을 상대하던 똑같은 전법으로 미국을 상대하기 시작하였고 전쟁이 시작된지 7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버티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만 끝난 것이 아니다. 다음은 사담 후세인이었다. 대량 살상무기가 테러에 사용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할 때 나는 미국이 북한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의 속내는 이라크에 있었다. 사담 후세인은 아버지 부시에게 걸프전에서 얻어맞고 이젠 아들에게 조차 얻어맞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이번에는 얻어 맞는 것으로 부족해서 미국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판결을 받게 되었다. 재판 결과 후세인은 교수형을 당했다. 죄명은 시아파 학살과 쿠르드족 학살이었다.

  이제 미국은 이란과 북한을 조준하고 있다. 특히 이란에 대한 조준은 그 강도가 심상치 않다. 미국에 대하여 더 강경한 북한에 비하여 덜 강경한 이란을 미국이 정조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북한은 미국에 하등의 쓸모가 없는 땅이나 이란에는 미국에 막대한 부를 안겨줄 석유가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하여 중국 포위라는 거대한 전략을 완성할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까지 감안한다면 필연코 차지해야 하는 땅이다. 그러나 미국은 결코 이런 자기들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자유와 평화라는 빛좋은 선물로 멋있게 포장해 버릴 뿐이다.

  자유와 평화는 미국이 자기들의 대규모 테러를 포장할 때 주로 쓰는 말이다. 이 말에 속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 이러한 포장지에 의심을 갖는 것은 반민족적이요, 반자유적인 이적행위로 간주되어 버린다. 이미 이 땅에서 미국은 영원한 우방이요, 우리의 혈맹이요, 형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아프간과 이라크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이라크 재건을 위한 인도적인 차원이라는 말을 써가면서 사실은 미국에게서 무엇인가 단물을 얻어먹기 위함이 아니던가? 어째 하는 짓이 지구촌 양아치 미쿡이 보여주는 모습을 꼭 닮아 있다. 그러니 우리 나라가 미국 똘마니 취급 받는 것이 아니던가?

  진짜 평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라면, 자유를 위해서라면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탈레반, 오사마 빈라덴, 후세인을 키워주고 그 위치에 올린 사람이 누구인가? 자유라는 미명하에 민간인을 학살하고 굶어 죽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슬로건 하에 록히드 마틴을 비롯하여 미국의 군수산업을 먹여 살리고 세계에 무기를 유통하는 이가 누구인가? 이것을 기억한다면 미쿡의 행위가 여지없이 양아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통하여 미국 본토의 안전을 유지하겠다고 한다. 더 강력한 국방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의 경찰로서의 역할, 두 지역에서 전쟁을 수행해 이길 수 있는 막강한 힘을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MD체제라는 새로운 장난감을 마련하려고 한다. 러시아와 중국이 반대를 해도 스타워즈라는 망상을 버리지 못한다. 맘에 안들면 약속을 파기하면 되지 않겠나, 내가 하는 일에 신경꺼라, 꼬우면 니들도 힘을 키우던가라는 식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해댄다. 그러면서도 평화를 이야기하고, 테러와의 전쟁을 이야기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이 딱 들어 맞는다.

  진짜 평화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미국같은 양아치 놀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말이 과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미국의 행동은 양아치 딱 그대로이다. 으슥한 곳에 진치고 있어서 지나가는 동네 꼬마들 불러 삥뜯는 양아치다. 자기보다 강자는 건드리지 않고 약자는 철저하게 우롱하고 빼앗는 양아치이다. 문제는 미국보다 강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미쿡이라는 양아치 형님의 똘마니로 들어서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한 구역 분할받을 것이라는 부푼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그러니 지구촌의 평화는 여전히 요원한 일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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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복종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 지음, 박설호 옮김 / 울력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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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인간은 독재자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

  이 질문에서부터 이 책은 출발한다. 수많은 인민이 단 한사람의 독재자에게 복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리 대중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인가? 독재자가 강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힘으로 굴복시키기 때문인가? 아니다. 독재자가 강한 것은 인민이 자발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이다. 인민이 스스로에게 주어진 자유를 망각하고 자기의 눈과, 팔과, 몸과, 삶을 독재자에게 내어 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독재자를 무너뜨릴 수 있는가? 총칼도 필요없다. 그저 자발적인 복종을 멈추면 된다. 독재가가 사용할 땔감을 모두 치워버리면 된다. 그러면 독재자는 스스로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인민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교육이다. 스스로 노예 상태에 머무는 것이 행복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교육 때문이다. 교육은 때론 사회 시스템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회적인 관습의 모습이나 신분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교육을 깨버릴 때 우리는 진정 자유와 평등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과정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성으로 가능하다. 인간의 이성은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선한 것이다. 이 이성을 가지고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자각하게 된다. 이 책의 과정을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성을 통하여 계몽하게 되고, 계몽된 상태는 우리에게 자유를 가르쳐 주고, 자유를 알게된 우리는 독재자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결국 이성이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 억압받고, 이 땅에 독재자가 등장하고 그 위세를 떨쳐가는 이유가 단순히 이성의 부재이기 때문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에 대한 희망이 얼마나 쉽게 절망으로 변하였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보지 않았는가?

  중세를 마치면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맞으면서 신학의 대안으로 인문학이 대두외었다. 계시의 대안으로 이성이 대두되었다. 인간의 이성이 발현되기만 한다면, 인간의 이성을 억누르는 억압기재가 사라져버리고, 인간이 자유를 누리기만 한다면 이 땅에 독재자는 사라지에 될 것이고, 인간은 진정 자유하고 행복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행복한 망상이 이 땅에 가득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성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들이 이 땅에 더 많은 분란을 가져왔으며, 이성이라는 것 조차도 독재자의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리지 않았는가?

  르네상스를 끝으로 인간의 이성에 대한 낙관주의가 사라졌는가? 아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 땅에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전 유럽에 팽배했던 시절이 있었다. 인간 개인이 선하고 윤리적으로 산다면 그 사회는 당연히 선해질 것이라는 순진무구한 생각이 전 유럽을 휩쓸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1차 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이지 않는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출현이지 않는가?

  라 보에티와 인문학자들이 갖고 있던 인간의 이성에 대한 난관론은 그저 맹목적인 것으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그런 순진한 생각이 오늘날에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 인간이 이성적이기만 하다면 독재자는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은 오늘날 구시대적인 발상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자발적인 복종을 멈추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의 이성이 자발적인 복종을 멈추는 대안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직접행동에 나설 수 밖에 없다. 라 보에티는 말한다. 폭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애쓸 필요 없다. 그저 복종하지 않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정말 이것으로 충분한가?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복종하지 않는다면 독재자의 폭정은 자연스럽게 멈추어져 버릴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성장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복종하지 않는 것, 그것은 그저 침묵하는 것일 뿐이다. 자기 위안일 뿐이다. 역사적인 일에 대한 책임회피일 뿐이다. 나에겐 오히려 이것이 자발적인 복종이다.

  얼마전 우리 사회에게는 심각한 분열이 있었다. 미국산 소 수입건으로 사회가 양쪽 진영으로 갈라져서 싸웠다. 수입 반대를 외치는 이들을 향하여 이명박 대통령이 했던 이야기가 무엇인가? "맘에 안들면 안사먹으면 그만"이 아니던가? 모든 것은 시장에서 조절이 된다는 시장만능주의가 아니던가? 그러니 시끄럽게 떠들지 말라는 것이 그 말의 이면에 감추어진 의미가 아니던가? 이런 사회에서 그저 침묵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자발적인 복종이 아니던가?

  ps. 책이 난해하다. 번역도 매끄럽지 못하고. 더 실망한 것은 보론과 이에 대한 참고 자료가 본문보다 더 많다는 것이다. 아마도 책의 분량을 채우기 위해서인 것 같다. 보론을 읽고 나서 더 난해해졌다. 앞으로 이 책을 읽는 사람은 과감히 보론을 생략하는 것이 본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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