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교양강의 돌베개 동양고전강의 6
푸페이룽 지음, 심의용 옮김 / 돌베개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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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에서 놀기 시작한지 거진 4년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알라딘을 하기 전에는 오로지 오프라인 서점만 애용했는데 직장에 매이기 시작한 후부터는 인터넷 서점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인터넷 서점을 한번도 사용해 보지 않았던지라 어디가 괜찮은지 후배에게 물었고 추천을 받은 곳이 이곳이다. 처음에는 책을 한 두권씩 사다가 어느 순간 서재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기웃거리기를 몇 번. 무료하고 답답한 일상 가운데 취미를 붙인 곳이 이곳이다. 처음에는 그냥 재미로, 취미로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을 끄적거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글이 샇이다 보니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서평단 활동도 하고, 마이 리뷰에 뽑혀서 적립금도 받고 하다보니 어느새 자유롭게 끄적거리던 글이 다른 이들의 이목을 신경쓰는 글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래도 난 비교적 하고 싶은대로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이 책을 통해서이다. 

  서평을 작성하기 전에 책에 대한 서평이 혹 있는가 궁금해서 찾아보던 중에 딱 한편의 서평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서평을 꼼꼼이 읽고 그 분의 서재에 들어가서 이런 저런 글을 뒤적거리다 보니 점점 서평에 대한 자신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꽤 재미있게 읽은 책인데 그 분은 이 책에 대해 혹평을 했기 때문이다. 그 분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장자 쪽에는 상당한 수준의 연구를 한 듯하고 다른 역본들의 오역한 곳을 찾아 내어 원뜻을 기록할 정도로 대단한 분이다. 그런 분이 혹평한 책에 대한 서평을 올리자니 왠지 부담이 되는거다. 그 순간 "아.. 내가 서평을 쓰면서 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 썼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 서평을 쓸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조금은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억지로 용기를 짜내어 본다. 

  언젠가 친한 친구와 농담으로 비틀즈의 "Let it be"를 부르면서 장자를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내비 둬 내비둬 내비 둬 내비둬 지혜의 말씀 내비 둬"라고 멋대로 번역해서 부르면서 아마도 비틀즈가 장자를 읽었을 것이라는 시덥지 않은 농담이다. 그만큼 장자를 읽고 나면 여러가지 얽매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데 소요유는 고사하고 서평이라는 것에 얽매여 있던 내가 우스웠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나에겐 정말 고마운 책이다. 

  소요유(逍遙遊)! 

  얼마나 가슴 떨리는 말인지 모르겠다. 한낱 눈 앞의 일에 내 모든 시선을 고정시키고 멀리 보지 못하는 나에게는 너무나 요원한 경지이다. 성경에서도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니 당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신앙인으로 살아오면서도 결국은 내 앞에 벌어지는 것들 때문에 울고 웃고 흔들리지 않았던가? 그런 내가 책상 머리 앞에 붙여 두고 항상 쳐다보던 글이 유치환의 바위이다.  

  내 죽으면 한개 바위가 되리라. 아례 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非情의 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

  (줄 바꾸기가 영 서툴러서 연이 사라져 버렸지만)이 시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읽으면서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를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다. 단언컨대 이 시가 없었다면 아마도 그 시절을 버티기 힘들었을 것 같다. 몇 달전인가? 교회에서 만난 분 중에 관계가 틀어져서 고민하고 있던 분에게 "제가 힘들 때 보고 힘을 얻었던 글이예요."하면서 이 시를 적어서 건네 주기도 했었다. 그 만큼 이 시가 나에게 준 깊이와 위로, 그로 인한 즐거움은 내가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고, 그 후 버티는 것에서 벗어나 즐겁게 그 어려움들을 기거이 받아 들일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눈을 확 잡아 끌었던 부분이 있었는데 그 부분에서 유치환의 바위가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이 드러나는 경지에 이르도록 수행한 사람을 장자는 진인眞人, 지인至人, 신인神人, 천인天人이라고 불렀습니다. 대종사 편에서 몇 단락에 걸쳐 '고대의 진인'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읽어보면 매우 감동적입니다. 그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잠을 자도 꿈꾸지 않고, 깨어 있어도 근심이 없다."(其寢不夢 其覺無憂) 

  이러한 진인은 현대인의 눈에도 굉장히 행복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까?(224p) 

  유치환이 바위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것이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아마도 유치환은 장자에 대해서 알았을 것이다.  

  장자는 불우한 시기에 태어나서 참 간소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요유의 기쁨을 만끽하면서 살았는데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참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얽어매서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현대인이 느끼는 박탈감과 상실감은 아마도 이런 자유의 박탈감이 아닐까? 물질 문명의 최첨단을 달리는 현대에, 그것도 철저하게 자본주의화 된 세상 속에서 장자가 인기가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인생의 즐거움, 자유로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저자는 장자의 내용을 서양의 철학과 접목하여 우리에게 설명한다. 프로이트와 호접몽을, 인간의 죽음과 영혼을 고대 그리스 철학과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장자의 내용을 돕기 위해서는 시도하는 참신한 발상이지만 때론 그 참신한 발상이 장자를 오도하게 만든다. 이 책을 혹평하신 분이 지적한 부분도 바로 이것이다. 그래도 장자에 대해서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접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내가 시를 적어 드린 그 분이 여름방학 중고등학생인 자기 아들에게 읽히고 싶은 책의 목록을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나는 주저없이 돌베개의 교양 강의 시리즈를 추천했다.  

  ps. 돌베개 출판사 관계자님과 우연한 기회에 트윗을 하게 되었는데 다음에 나올 교양 강의 시리즈는 귀곡자라고 한다. 조만간 나올 것이라고 하시는데 언제쯤 나올지 궁금하다. 나오면 돌베개 교양 강의 시리즈라는 이름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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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데이지 2011-08-07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도 돌베개 교양강의 시리즈 무척 좋아하는데..
다만 읽고 뭔가 따지는 걸 잘 못하는 것 뿐......이에요~~ㅋㅋ
저도 돌베개 교양강의 시리즈....이 이름만으로 그냥 주저하지 않고 구입할 예정이어요~~
뭐~읽을때 좋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쵸?

saint236 2011-08-07 10:26   좋아요 0 | URL
그렇죠. 자기가 좋으면 되죠. 다음 귀곡자 기다리고 있습니다.

cyrus 2011-08-07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완역으로 된 <장자>를 읽어보려고 했는데,, 언론이나 교수신문에서 번역의 완성도를 칭찬한 책인데도 대체로 후하게 평을 준 책이 없더군요. 아무래도 동양사상 고전들은
역자들마다 서로 다른 입장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한 권에 한 번만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역자가 쓴 원전이나 <교양장자강의> 같은 좀 더 내용을 심화, 보충할 수 있는
책을 같이 읽어주는게 좋은거 같아요, ^^

saint236 2011-08-07 10:28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런데 문제는 전 원전을 아직 안 읽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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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 

  나나미는 이 책을 위의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덮고 나서 그의 말을 한 군데 수정해본다.  

  신이 그것을 원하실까? 

  십자군 전쟁을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한 마디로 십자군 전쟁을 요약하는 것은 너무 오만하고, 무리한 일이 아닐까? 나나미가 말했듯이 십자군 전쟁은 중세의 종교적인 광기와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 거기에 왕권과 교황권, 그리고 봉건 영주들의 여러가지 정치적인 문제들이 미묘하고 복잡하게 얽혀서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신이 그것을 원하셨다는 말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모든 것을 신에게 책임지우는 것은 종교적인 입장을 떠나서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  

  혹자는 저자의 필력이 쇠퇴한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판단하기도 한다. 그가 로마인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준 소설적인 재능을 기대했다면 충분히 그럴만도 하지만 난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 그가 소설처럼 써 내린 로마인 이야기보다는 비교적 역사적인 사료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이 책이 읽기에는 더 역동성이 떨어지고 무미건조하지만 역사가가 아닌 소설가로 평가를 받는 그의 오명을 약간은 벗겨주지 않을까?  

  책에 등장하는 중세의 영웅들(이슬람의 입장에서는 침략자이겠지만)의 파란만장한 인생, 화려한 영웅담, 그리고 정치적인 센스, 굳건한 종교적인 신념이 그들의 인생을 우리의 기억 속에 되살려 놓는다. 그들이 걸어갔던 행보가 어느 입장에서 보는지에 따라서, 그리고 어느 시대에 보는지에 따라 그들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겠지만 한 가지 신념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어 내는 그들의 굳건한 모습이 다만 부러울 뿐이다. 이 사람들에 비하면 부시에 의하여 저질러진 이라크 침공은 십자군 전쟁을 패러디한 짝퉁 일뿐이요, 속내가 너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세련되지 못한 행위이다. 자본이라는, 자원이라는 속내를 솔직히 드러냈다면 욕을 덜 먹지 않았을까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해본다.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해본다. 첫째는 과연 신의 뜻이란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십자군 이야기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형민우씨의 프리스트라는 만화를 다시 봤다. 얼마 전에 할리우드에 의하여 영화로 제작되어 유명세를 탔지만 영화와 원작 만화를 모두 본 나로서는 그 영화는 원작에 대한 테러 수준일 뿐이다. 원작에 담겨 있는 믿음에 대한 고뇌와 고민, 의심은 기독교 신앙을 거의 포기할 뻔 했던 나에게 깊이 곱십어 볼만한 내용이다. 그 만화를 그리는 가운데 장모님과 아내가 옆에서 걱정하면서 잔소리를 했다는 형민우씨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믿음의 근본부터 흔드는 내용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음미하면서 읽어볼 가치가 있는데 곳곳에 숨겨져 있는 신의 뜻에 대한 그의 견해 때문이다. 이반 아이작이라는 신부가 테모자레를 결계에서 풀어 주는 장면에서 신의 뜻의 운운하는 다른 신부에게 던진 말이 참 의미 심장하다. 

  "신의 뜻을 오판하는 것은 가장 큰 죄악이야-이반 아이작(프리스트 6권 중에서)" 

  그렇다. 세상에서 가장 큰 범죄는 신의 뜻을 오판하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과 신념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 놓고 신의 이름을 덮어 씌우는 것만큼 큰 죄악이 어디있겠는가? 신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많은 범죄들이, 그리고 오늘날 벌어지는 많은 종교 분쟁들이 모두 신의 뜻을 오판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물론 십자군 전쟁도 예외일 수는 없다. 마치 자신만이 신의 뜻을 알고 있는 것처럼 신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여 신의 뜻을 오판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반인륜적인 범죄, 그리고 반인류적인 범죄는 그칠 수가 없을 것이다. 종교인들은 특히 마치 자신만이 신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행한다고 오만하게 생각하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둘째 순수한 신념과 의도는 과연 선한 결과를 낳는가? 고금을 틍털어 이 문제만큼 많은 정치학자들, 철학자들, 윤리학자들에게 고민을 던져준 질문은 없을 것이다. 1차 대전 이전 서구에 팽배했던 현상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선하게 그리고 윤리적으로 산다면 그 사회는 지상 천국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다.) 즉 인간에대한 근거없는 낙관이 결국 1차 대전과 2차 대전이라는 충격 속에 세계를 빠뜨리지 않았는가? 순수한 신념은 오히려 이기적인 인간성보다 인류를 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동조하게 만든다. 히틀러에 동조했던 독일인들이 모두 악인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대부분은 선하고 순수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종종 순수한 신념을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물론 십자군 전쟁에도 이 부분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사람들의 음흉한 속셈을 경계하고 순수한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순적이게도 적절한 현실 감각이 필요하다. 이 현실 감각은 때론 지극히 정치적이고, 때론 타협적일 수도 있다. 정치적이고, 타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순수한 신념만큼은 잃지 않고 지켜내야 하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순수한 신념만을 지키면서 불타협을 고수하다가 그 신념마저 꺾이는 사람을 본다. 혹은 너무 타협하다가 순수한 신념이 변질되는 사람도 본다. 현실 감각이 없이 순수한 신념만 가지고 있다가 보수 집권층에게 이용당하는 국민들이 있는가 하면 불타협을 고수하다가 설 자리마저 잃어가는 진보층이 있고, 혹은 너무 타협하다가 신념마저 잃어버리고 진보 대통합이라는 명목하게 말도 안되는 타협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타협이 아니라 야합을 함에도 스스로 타협이라 생각한다. 

  십자군 이야기를 읽고 신문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본다면 이 책을 통하여 얻을 것이 정말 많다. 만약 신문을 들여다 보지 않는다 해도 얻을 것은 충분히 있다. 그렇지만 전자에 비하면 후자는 새발의 피 정도일 것이다. 

  이 책과 함께 형민우씨의 프리스트, 그리고 영화 킹덤 오브 해븐, 살라딘 다시 보기를 읽는다면 충분히 재미있고, 더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프리스트와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전쟁은 그 다지 권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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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2 - 박노자 교수가 말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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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개콘 코너 중에 나에게 씁쓸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것이 하나 있다. 서울 메이트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경상도 출신의 세 친구들이 서울말에 적응해 가는 이야기이다. 허경환은 완벽한 서울 말을 구사하는 캐릭터로, 류정남은 엄청난 사투리를 구사하는 캐릭터로, 양상국은 능력은 안되면서 류정남의 사투리를 촌스럽다 비웃으면서 허경환의 서울말 구사 능력을 한없이 부러워 한다. 그런데 문제는 완벽한 서울말을 구사한다는 허경환의 어투도 그렇게 서울스럽지 않다는데 있다. 억지로 끝말을 올리면서 서울 말이라고 하지 않나, 사투리를 설명하거나 급하면 아주 찐~한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구사된다.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 2권"을 읽으면서 왜 갑자기 서울메이트가 떠올랐던 것일까? 기획자가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서울 메이트가 가지고 있는 절대 기준과 그것에 의한 편가르기, 그리고 길들이기라는 통제 시스템이 그 안에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경상도에서 성장한 세 남자가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움을 억지로 제거하면서 서울말이라는 절대 기준을 세우고 거기에 자신을 맞추어 간다. 완벽하게 적응해서 서울 사람이 다 되었다고 말하는 허경환은 1등 국민, 사투리를 버릴 수 없어서 촌 사람 취급을 받고 놀림 받는 류정남은 3등 국민, 허경환(1등 국민)을 부러워 하지만 서울말 구사 능력은 류정남(3등 국민)보다 약간 나은 정도인 2등국민 양상국! 서울말은 세 사람을 편가르고 줄세우고, 몸값을 책정하는 절대 기준이 된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세 사람을 길들이고 통제하는 매커니즘(길들이기)이 된다. 그렇지만 1등 국민인 허경환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사투리를 자제할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통제 매커니즘에 충실해도 통치자가 될 수 없다. 그렇지만 세 사람은 이 통제 매커니즘 안에서 어떻게 해서든 인정받고, 철저하게 적응하려 한다. 그 모습이 지켜보는 이로하며금 파안대소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잠깐 생각해 볼 것은 서울말을 그 어느 것으로 바꾸어도 이 통제 매커니즘은 유효하다는 것이며, 우리 삶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말을 영어로 바꾸어보면 어떤가? 스능성적으로, 혹은 부모의 재산 규모로, 혹은 출신지역, 혹은 미국으로 바꾸어 생각해 보면 어떤가? 소름이 끼치지 않는가? 단어만 바꾸었을 뿐인데 웃기는 개그가 소름끼치는 현실로 둔갑해 버리지 않는가? 김형곤씨가 일찍 작고하지 않았다면 무릎을 칠만한 시사 개그가 될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 

  박노자가 당신들의 대한민국 1권과 2권을 통하여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라는 제목 자체가 순혈 주의, 지역 주의, 학벌 주의와 같은 기준을 세워 놓고 나와 남을, 안과 밖을 가르고 있으며, 나와 같은 곳에 소속되지 않은 타인에 대한 공격심과 분노, 적대감을 심어 줌으로 인하여 내부를 결속하고 나아가 밖은 물론 안의 구성원들마저 착취하는 통제 매커니즘 까발리고 있는 것이다. 몇 년후에 출간된 "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서(박노자/푸른역사)"와 같이 읽어본다면 박노자가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통하여 까발리는 통제 매커니즘이 무엇인지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말한대로 박노자는 외부에서 유입된 새로운 피인지라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혹은 알아챘다고 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을 골라내어 그것들이 왜 문제이며, 우리들에게 어떤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적절하고 날카롭게 설명한다. 박노자 스스로가 외국인의 인권과 그들의 귀화와 이주에 대하여 열려 있을 때 한국은 새로운 피를 수혈받아 더욱 발전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주장에 대한 증거가 되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이 아쉬움 때문에 서평의 제목 마지막에 ?를 붙인 것이다.) 그의 말이 이성적으로는 옳지만 감정적으로는 거부감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가 지적하는 족벌의 문제, 군벌의 문제, 군대나 교육의 문제, 정치의 문제는 이성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전혀 잘못된 것이 없다. 다만 너무나 논리적이고, 너무나 원칙적이어서 왠지 감정적으로 동의가 되지 않는 기묘한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가령 군대에 대한 그의 공격적인 말들은 과연 러시아에서도 군대에 대한 경험이 없는 박노자가 한국 군대에 대하여 그렇게 자신있게 모든 것이 옳지 않다는 식으로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는 감정적으로 동의가 되지 않는다. 그가 지적하는 것들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들은 것인지라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관행들(공관병을 가정교사로 이용한다는지)을 가지고 혹은 부정적인 면들만 가지고 침소봉대하지 않았는가 하는 반발감도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 경험이 없기에 논리적일 수는 있지만 그 안에 몸을 담아 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여 감정적인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는 것(예를 들면 자녀의 병역 면제를 위해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부모들의 마음을 이해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박노자의 장점이자 단점이 아닐까 한다.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만은 아니지 않은가? 가끔은 놀라울 정도로 반이성적이 되어 감정적으로 행동함을 기억한다면 그의 주장이 사람들의 감정적인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함이 왜 그렇게도 치명적인 단점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글을 읽다가 문득 드는 의문 한가지는 군 개병제와 모병제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먼저 124p의 글을 인용해 보면 이렇다. 

  그러나 유승준을 왕따시켜봐야 국민 개병제로 인한 심각한 문제들 - 군 안에서의 인권 유린, 장기 복무로 인한 고학력자의 수학 능력 저하, 지배층의 고질적 병역 기피 문화 등 - 이 해결될 것도 아니지 않은가? 유승중에게 분노를 퍼붓는 것보다는, 군축과 모병제로 점차적인 전환을 모색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인 해결법일 것이다. 모병제로 가야 약자에 대한 일상적인 폭력으로 이어지는 사회 전반의 군사 문화가 드디어 그 자취를 감출 것이다.(124p)

  박노자는 모병제만이 군대 문화의 폐해를 줄이고 더 나아가서는 근절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239p의 글을 살펴 보면 꼭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은 않다. 

  국민 개병제의 쇠퇴와 모병제의 유행을 들고 국민/민주국가의 후퇴를 논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나는 그걸 오히려 핵심부 국가의 대외 군사 압력이 강화되는 조짐으로 생각한다. 영국 군대가 지금 미군과 함께 아프간, 이라크 침략의 주역을 담당한다는 상황은 영국 군대가 징병제였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3세계에서의 더러운 전쟁들을 위해서 징병제 군대가 아닌 전문적 모병제 군대를 사용할 때, 본국의 여론이 보통 비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핵심부 자본의 잉여 가치 수취의 규모와 방식이 각각 지구화, 국제화되는 만큼, 대내외적 착취의 강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부 민족국가의 물리력의 역할이 커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징병제의 폐지는 남성에 대한 군사적인 훈육의 중지를 의미하는 차원에서 긍정적 의미도 내포한다. 그런데 이미 세계를 금융,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자들의 손에서는 모병제 군대란 위험한 살인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239p) 

  사회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는 군대 문화를 근절하기 위해 모병제를 대안으로 내세우지만 그 모병제라는 것이 오늘날과 같이 자본의 손에, 통제자들의 손에 의해 위험한 살인도구로 사용될 위험이 상시 존재한다. 아니다. 상시 존재하다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박노자가 모병제를 개병제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우기 위해서라면 이에 대한 대비책 또한 언급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너무나 무책임하게 모병제로 가자는 발언으로 여겨져 조중동 찌라시에 의하여 적절하게 편집되어 빨갱이 박노자도 모병제를 지지한다, 혹은 박노자도 국익을 생각한다 정도로 사용되지 않겠는가? 게다가 그는 미국의 모병제를 책의 곳곳에서 심하게 비판한다. 사회의 최하층에게 중산층으로의 계급 상승을 약속하면서 그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우는 정부를, 그리고 정부의 약속을 믿고 타자를 침략하여 공격하는 미군의 비인간적이고 무식함을 비판한다. 이것은 미군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병제가 가지는 근본적인 문제일 것인데 만약 모병제 실시를 찬성한다면 나의 깨끗함을 위하여 누군가가 더러운 일을 감당하도록 강요하는 자기 기만이 되지 않을까?  

  박노자의 주장에 한편으로는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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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성공이다 - 하나님의 놀라운 심리를 일깨우는 토저의 명쾌한 심리학 규장 A. W. 토저 마이티 시리즈 5
A. W. 토저 지음, 이용복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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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물 한 살 한참 순수하던 그 시절 나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던 일이 있었다. PD수첩을 통해 방영되었던 길 잃은 목자라는 프로그램이다. 그것은 당시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던 순수한 신앙에 큰 상처를 주었고, 한동안 교회를 불신하게 만들고 방황하게 만들었다. 그 후로 참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많이 고민했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세계에서 내노라 하는 대형 교회들이 주로 한국에 있다. 신도시 쪽에가면 몇 천명 모이는 교회들이 꽤 많다고 한다. 장로 출신의 대통령이 당선되어 교계의 지도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의기양양하다. 지역의 국회의원들이 선거철만 되면 이교회 저교회 인사를 다닌다. 어느새 교회는 꽤 큰 힘을 소유한 집단이 되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교회는 어느새 꽤 많은 욕을 먹는 집단이 되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 걱정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인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 이대로는 안되는데 하는 답답함이 생긴다.  

  그런 답답함에 토저의 책을 읽게 되었는데 수십년 전에 씌여진 이 책에서 나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당신이 어떤 교회에 가보았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교인들은 그 교회의 유력한 '돈줄' 장로 주변으로 몰려들고, 교회는 이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목회자는 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한다. 이 사람의 말 한마디에 교회가 일사분란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연합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자기의 견해를 결코 표현하는 법이 없는 교인들은 이 사람의 말이면 전부 용납한다. 이것이야말로 '죽은 자들의 차가운 관용'이 아니겠는가? 또 다른 어떤 교회에서는 담임목사가 교회를 개척하고 성장시켰다는 그 공로를 빙자해서 교회를 사유화하여 전횡적으로 치리해나간다. 목사의 전횡과 부당한 처사에 대한 교인들의 이의 제기는 하나님에 대한 이의 제기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이렇게 강압된 교회의 일사분란함은 사실상 '죽은 시신들의 차가운 연합'에 불과할 뿐이다.(p199-200) 

  2000년대의 한국 교회가 아니다 50~60년 전의 미국 교회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소름끼치도록 오늘의 한국 교회와 닮아 있다. 여기에 자식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현상만 포함시키면 그대로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모습이다. 매우 절망스러운 상황이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 읽히고 있는 것이며, 읽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 

  토저는 교회가 성공이라는 것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판단했다. 교회가 이야기하는 성공이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참된 교회는 세상이 바라보는 시각으로는 절대로 성공할 수가 없다. 오히려 실패해야 마땅하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자기에게 유익한 것마저도 하나님 때문에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버리려고 하는가? 아니다. 더 샇아두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잘 연구해서 리더십을 공부한다. 재테크 방법을 연구한다. 부동산에 골몰한다. 성경에 나오는 것 외에는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토저의 단호함이 너무나 절실하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에 너무 목을 매지 마라. 교회가 추구해야할 성공은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꺼이 실패하라. 두려워 하지 말라. 토저의 불을 토하는 듯한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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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세트 - 전4권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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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한번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소풍 전날만 되면 특별한 곳에 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동네 뒷산으로 가는데도 왠지 마음이 설레어 잠을 자지 못했다. 하루 갔다가 돌아오는 소풍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설렜는데 중고등학생이 되어 수학여행이라는 것을 가게 되자 난리가 났었다. 한달전부터 최신 유행곡을 익힌다, 무슨 옷을 입고 갈 것이냐, 혹 마음에 드는 여학생을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이냐 등등 여러가지 일들로 들뜨고 분주했었다. 그러나 정작 여행을 가면 단체로 여기저기 관람을 하고 돌아오기에 여행에 관한 기억은 그다지 없다. 다만 기억에 남는 것은 3박 4일 간의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집이 왠지 더 반갑고, 부모님들을 보면 고마운 마음이 절로 드는 것이었다. 아마 여행이 가지고 가장 큰 힘이 이것일 것이다. 익숙한 것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하고 감사하게 만드는 것! 여행만이(남자는 군대도...) 주는 경험이다.  

  귀한 자식일수록 여행을 보내라. 

  우리 귀에 익숙한 말이다. 귀한 자식이라고 품에 안고만 있다면 그것은 자녀를 약하게 만드는 지름길이 된다. 가끔 MT를 가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녀석들을 볼 때마다 도대체 집에서 무엇을 가르쳤는지, 저래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혼자서 끌끌거리곤 했다. 오히려 귀한 자식일수록 밖으로 막 돌리는 것이 필요하다. 집을 떠나 멀리 여행을 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넓어지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보고 되며,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방향에 대한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선뜻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빠서? 일이 많아서? 가족들 때문에? 여러가지 이유를 대지만 사실은 겁이 나서가 아닐까? 여행 계획은 수도 없이 세우지만 막상 낯선 곳으로 들어간다는 두려움 때문에 쌌던 짐을 다시 푸르고 있지는 않는가? 그런 사람들에게 이 책은 아주아주 달콤한 유혹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사 놓고 꽤 오랜 시간동안 공을 들여서 읽었다. 각 권은 길어야 5일 이내에 다 읽었지만 한 권을 읽고 다음 권을 읽기까지 꽤 오랜 휴식을 가졌다. 내용은 어렵지 않지만 그 내용을 잘 씹어서 소화시키고,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유혹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이다. 지금이라도 떠나고 싶지만 아직은 준비도 안되어 있고, 용기도 없기 때문에 조금만 더 앉아 있기 위해 바로 다음 권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한없이 한비야씨를 부러워 한다. 모든 것을 다 남겨두고 떠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세계 여행이라는 계획을 막상 실행으로 옮기니 말이다. 게다가 여자 혼자서 낯선 곳으로,그것도 오지로만 다니면서 현지의 삶을 체험하는 것은 더 어렵고 두려운 일일텐데 4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그렇게 할 수 있다니 의지도, 힘도, 체력도 정말 대단하다. 게다가 이렇게 여행하는 가운데 자기 인생의 후반전을 올인할 수 있는 일을 발견했다니 정말 부럽다. 젊은이들에게, 청소년들에게 왜 이 책이 권장도서가 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4권까지 다 읽었으니 한비야씨처럼 오지 여행은 아니지만 당장 이번 휴가에 강원도쪽으로 조용히 여행을 다녀오련다. 아직은 아이들이 어려서 갈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지만 아이들일 초등학생 정도만 되면 짐싸들고 지리산 둘레길을 한바퀴 돌고 싶다. 아이들과 이런 저런 말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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