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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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 

  나나미는 이 책을 위의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덮고 나서 그의 말을 한 군데 수정해본다.  

  신이 그것을 원하실까? 

  십자군 전쟁을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는 한 마디로 십자군 전쟁을 요약하는 것은 너무 오만하고, 무리한 일이 아닐까? 나나미가 말했듯이 십자군 전쟁은 중세의 종교적인 광기와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 거기에 왕권과 교황권, 그리고 봉건 영주들의 여러가지 정치적인 문제들이 미묘하고 복잡하게 얽혀서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신이 그것을 원하셨다는 말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모든 것을 신에게 책임지우는 것은 종교적인 입장을 떠나서 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  

  혹자는 저자의 필력이 쇠퇴한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판단하기도 한다. 그가 로마인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준 소설적인 재능을 기대했다면 충분히 그럴만도 하지만 난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 그가 소설처럼 써 내린 로마인 이야기보다는 비교적 역사적인 사료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이 책이 읽기에는 더 역동성이 떨어지고 무미건조하지만 역사가가 아닌 소설가로 평가를 받는 그의 오명을 약간은 벗겨주지 않을까?  

  책에 등장하는 중세의 영웅들(이슬람의 입장에서는 침략자이겠지만)의 파란만장한 인생, 화려한 영웅담, 그리고 정치적인 센스, 굳건한 종교적인 신념이 그들의 인생을 우리의 기억 속에 되살려 놓는다. 그들이 걸어갔던 행보가 어느 입장에서 보는지에 따라서, 그리고 어느 시대에 보는지에 따라 그들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겠지만 한 가지 신념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어 내는 그들의 굳건한 모습이 다만 부러울 뿐이다. 이 사람들에 비하면 부시에 의하여 저질러진 이라크 침공은 십자군 전쟁을 패러디한 짝퉁 일뿐이요, 속내가 너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세련되지 못한 행위이다. 자본이라는, 자원이라는 속내를 솔직히 드러냈다면 욕을 덜 먹지 않았을까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해본다.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해본다. 첫째는 과연 신의 뜻이란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십자군 이야기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형민우씨의 프리스트라는 만화를 다시 봤다. 얼마 전에 할리우드에 의하여 영화로 제작되어 유명세를 탔지만 영화와 원작 만화를 모두 본 나로서는 그 영화는 원작에 대한 테러 수준일 뿐이다. 원작에 담겨 있는 믿음에 대한 고뇌와 고민, 의심은 기독교 신앙을 거의 포기할 뻔 했던 나에게 깊이 곱십어 볼만한 내용이다. 그 만화를 그리는 가운데 장모님과 아내가 옆에서 걱정하면서 잔소리를 했다는 형민우씨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믿음의 근본부터 흔드는 내용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음미하면서 읽어볼 가치가 있는데 곳곳에 숨겨져 있는 신의 뜻에 대한 그의 견해 때문이다. 이반 아이작이라는 신부가 테모자레를 결계에서 풀어 주는 장면에서 신의 뜻의 운운하는 다른 신부에게 던진 말이 참 의미 심장하다. 

  "신의 뜻을 오판하는 것은 가장 큰 죄악이야-이반 아이작(프리스트 6권 중에서)" 

  그렇다. 세상에서 가장 큰 범죄는 신의 뜻을 오판하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과 신념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 놓고 신의 이름을 덮어 씌우는 것만큼 큰 죄악이 어디있겠는가? 신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많은 범죄들이, 그리고 오늘날 벌어지는 많은 종교 분쟁들이 모두 신의 뜻을 오판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물론 십자군 전쟁도 예외일 수는 없다. 마치 자신만이 신의 뜻을 알고 있는 것처럼 신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여 신의 뜻을 오판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반인륜적인 범죄, 그리고 반인류적인 범죄는 그칠 수가 없을 것이다. 종교인들은 특히 마치 자신만이 신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행한다고 오만하게 생각하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둘째 순수한 신념과 의도는 과연 선한 결과를 낳는가? 고금을 틍털어 이 문제만큼 많은 정치학자들, 철학자들, 윤리학자들에게 고민을 던져준 질문은 없을 것이다. 1차 대전 이전 서구에 팽배했던 현상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선하게 그리고 윤리적으로 산다면 그 사회는 지상 천국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다.) 즉 인간에대한 근거없는 낙관이 결국 1차 대전과 2차 대전이라는 충격 속에 세계를 빠뜨리지 않았는가? 순수한 신념은 오히려 이기적인 인간성보다 인류를 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동조하게 만든다. 히틀러에 동조했던 독일인들이 모두 악인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대부분은 선하고 순수한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종종 순수한 신념을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물론 십자군 전쟁에도 이 부분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사람들의 음흉한 속셈을 경계하고 순수한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순적이게도 적절한 현실 감각이 필요하다. 이 현실 감각은 때론 지극히 정치적이고, 때론 타협적일 수도 있다. 정치적이고, 타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순수한 신념만큼은 잃지 않고 지켜내야 하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순수한 신념만을 지키면서 불타협을 고수하다가 그 신념마저 꺾이는 사람을 본다. 혹은 너무 타협하다가 순수한 신념이 변질되는 사람도 본다. 현실 감각이 없이 순수한 신념만 가지고 있다가 보수 집권층에게 이용당하는 국민들이 있는가 하면 불타협을 고수하다가 설 자리마저 잃어가는 진보층이 있고, 혹은 너무 타협하다가 신념마저 잃어버리고 진보 대통합이라는 명목하게 말도 안되는 타협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타협이 아니라 야합을 함에도 스스로 타협이라 생각한다. 

  십자군 이야기를 읽고 신문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본다면 이 책을 통하여 얻을 것이 정말 많다. 만약 신문을 들여다 보지 않는다 해도 얻을 것은 충분히 있다. 그렇지만 전자에 비하면 후자는 새발의 피 정도일 것이다. 

  이 책과 함께 형민우씨의 프리스트, 그리고 영화 킹덤 오브 해븐, 살라딘 다시 보기를 읽는다면 충분히 재미있고, 더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프리스트와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전쟁은 그 다지 권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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