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교회 이야기
한희철 지음 / 포이에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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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도 순복음 교회, 소망교회, 사랑의 교회, 온누리 교회, 광림교회, 금란교회, 임마누엘교회, 오륜교회, 명성교회, 영락교회...

 

  한국에서 내노라하는 교회들을 열거해 봤다. 혹 누군가 이 글을 보고 자기 교회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서운해 할지도 모르겠다. 위의 저 교회 명단에 자기 교회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꽤 유명한 교회들도 있을 것이고, 대부분 그런 교회들은 자존심이 상할지도 모르겠다. 혹 어떤 사람들은 더 열심히 전도하려고 다짐을 할지도 모르겠다.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위에 열거한 교회를 포함하여 대한민국에서 난다 긴다하는 교회들이 대부분 이시기에 덩치를 불렸다. 세계 기독교 역사상 예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성장하였고, 그 결과 교회는 대단한 자본과 사람과 권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 권력을 사회를 위하여 사용했으면 좋았을텐데 자기 교회 건물을 짓고 부동산을 구입하고, 덩치를 불리기에 대부분의 힘을 쏟아 부었다. 당연히 90년대를 거치면서 교회 성장은 멈추고 오히려 하락세에 들어섰다. 많은 교회들이 소위 말하는 문을 닫고 폐업 신고를 했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사실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도,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다. 왜냐? 위에 열거한 대형 교회들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Mega Church들 때문이다. 계속 성장하는 그 교회들을 보면서 많은 교회들은 저렇게 되고 싶다는 꿈에 부풀었고, 그 꿈을 향하여 달려갔다. 그러나 꿈은 꿈일 뿐이다. 교회 성장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라 인력과 자본과 시스템, 그리고 권력에 의해 유지되었고 고착되었다. 이미 사회에서도 한물간 2세 경영 3세 경영을 교회에서는 제사장 가문이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당연시 하였다. 뭔가 잘못되었다.

 

  난 목사 아들이다. 아버지는 늦게 신학교에 가셔서 늦게 목회를 하셨고, 시골로만 돌아다니셨다. 원래 농사를 지으셨던 분이니 농촌에서 목회하시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다른 분들처럼 양복을 깔끌하게 입고 돌아다니지도 않으셨고, 슬리퍼에 츄리닝 바람으로 동네를 다니셨다. 그러다가 담배를 엮고 있는 집에 들어가서 함께 담뱃잎을 엮으면서 언제 교회 올거냐고 이제 좀 교회에서 얼굴 좀 보자고 전도하셨다. 시내에 나가시는 분들이 계시면 고물 봉고차로 모셔다 드리고, 혹 누군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관공서에 함께 가셔서 일도 봐주시곤 하셨다. 아마 처음에는 목사라고 거리를 두었겠지만 한 두해가 지나고 나면 그냥 동네 사람이었다. 지나가다 인사를 해도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그런 동네 아저씨 말이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못마땅하셨겠지만 내겐 목사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서울로 학교를 올라오니 안 그랬다. 왠지 내가 이상한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그런가 보다 넘어갔다. 솔직히 나도 큰 교회를 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 친구들이 부러웠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한희철 목사님의 책을 접했다. 한희철 목사님이라는 이름 때문에 선택했는데 내용이 공감이 간다. 그분이 적으신 글은 내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삶과 그대로 겹치고 있기 때문이다. 단강에서 목회를 하시면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원주에 도착하여 감리사님의 차를 타고 어딘지도 모르는 단강으로 가며, 산과 들을 지나 마을이 나타날 때면 단강이 이쯤이어도 좋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때마다 차는 멈춰 서지 않았고, 그러다가 마침내 들어선 곳이 비포장도로, 덜컹거리는 길을 달려가며 아무 곳이라도 좋습니다, 멈춰만 주십시오, 모든 기대를 포기했을 때 그때 나타난 곳이 단강이었습니다.(p 15)

 

  한목사님의 고독, 답답함, 절망감이 고스란히 손에 잡힌다. 모든 기대와 희망을 포기했을 때 나타난 곳이 단강이었다. 어머니가 오셔서 교회와 살 집을 보고 울고 가셨다는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리라. 내 할머니도 동일하셨으니 말이다. 그렇게 외진 곳에서 목회를 하는데 교인이 늘어나겠는가? 그렇다고 예산이 튼튼하겠는가? 가족들이 풍족하지는 않다고 해도 굶지 않고 살만한가? 돌이켜 보면 어릴 때 수제비를 참 많이 먹었던 것 같다. 철들고 20년 동안 수제비를 먹지 않았으니 말이다. 수제비를 먹은 이유야 뻔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아버지는 평생 그렇게 사셨다. 그게 목사의 길이려니 생각하셨다. 어머니의 바가지를 묵묵부답으로 대응하셨다. 답답하면 교회 가셔서 "아버지 아시지요!" 한 마디 하셨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한목사님도, 그리고 내 아버지도 인생의 깊은 의미를 깨달으신 것 같다. 그곳에서 비로소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신 것 같다. 그래서 그곳이 당신들에게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교회였으리라. 교회가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깊이 음미해 볼만한 부분을 적어본다.

 

-교회가 세워진지 몇년 됐죠?

-3년 됐습니다.

-지금 몇명 모입니까?

-20여명 모입니다.

-첨엔 몇명 모였나요?

-20여명 모였습니다.

피식 웃었다. 자격심사, 둘러 앉은 심사 위원들이 3년동안 그대로인 숫치를 두고 웃었다.나도 웃으며 그랬다.

-작년 한해 동안 세분 이사가고 세분 돌아가셨습니다.

모두들 다시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면서

-됐습니다. 나가세요.

그렇게 자격심사가 끝났다.

 

*감리교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하면(요즘은 대학원을 졸업하면) 서리 전도사 1년, 준회원 전도사 2년(대학원 졸업이 필수가 되기 전에는 4년, 아버지는 이 과정을 하셨다. 한목사님도 이 과정일 것이다.) 총 3년(과거에는 5년)의 과정을 거쳐야 목사 안수를 받는다. 매해 다음 과정으로 올라갈 자격이 되는지를 심사하는 것이 자격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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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2-12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종교와는 별 관련없이 생활하는 사람다만
한희철목사님의 이야기는 무척 감동적입니다.

saint236 2012-02-14 06:25   좋아요 0 | URL
기독교인의 삶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아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꽤 소중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달린 서평들이 대부분 알라딘 서평 도서라는 것이...

차트랑 2012-02-15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독교인의 삶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
정말 옳으신 말씀입니다.
적극 공감합니다 세인트님!!

2012-02-15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15 2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16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17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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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밥바라기별 이후로 황석영의 책은 읽지 않을 생각이었다. 작가의 이름 때문에 선택한 책이었으나 워낙 실망했던터라 똑같은 실망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황석영의 책이 나왔다는 말에도 무심히 지나갔다. 그러다가 알라딘 중고 매장이란 곳이 오픈했다는 말을 들었다.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벼르고 벼르다가 동생 생일을 맞아 안국동에 건너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렀다. 한참을 고르고 고르던 중에 원하던 책은 얻지 못하고 그냥 이 책 하나 들고 나왔다. 그게 작년 10월 말의 일이었다. 사놓고 벌써 몇달이 흘렀지만 선뜻 손이 안가기는 마찬가지였다. 읽어야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에 고민을 하던 중에 며칠전부터 읽기 시작했다. 3일동안에 절반쯤 읽었나? 어제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는다. 새벽에 일찍 나가야하기에 엎치락뒤치락하던 끝에 잠이 안 오니 책이나 읽자고 읽던 책을 폈다. 그런데 참 묘하다. 강남몽이라는 책의 제목이 묘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강남이요, 뜬 눈으로 밤을 꼬박 새우고 있으니 정신이 몽롱하다. 말도 안되는 생각이지만 이게 강남몽인가 싶어 혼자 실실 웃어본다.

 

  강남!

 

  세련의 대명사다. 부의 대명사다. 이번 정권에 들어서는 권력의 대명사다. 오죽하면 강부자라는 말이 세간에 회자가 되었겠는가? 그뿐 아니다. 묘하게 강남은 진보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리버럴좌파, 캐비어좌파의 한국판 강남좌파라는 말이 강부자의 뒤를 이어 등장하지 않았는가? 나꼼수의 마초 김총수는 강남대 비강남의 구도를 한나라당에서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잠실에서 살기 시작한지 6년이 지났는데 그전만 해도 강남은 막연한 현대화의 상징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6년을 살고 난 지금은 그저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 밖에는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사는 이곳이 또 한강 이남이라는 의미 외에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그렇게도 강남이라는 말 속에는 온갖 복잡다단한 의미가 숨어 있단 말인가?

 

  저자는 강남 형성사를 써보고 싶었다고 했다.

 

  삼십여년에 걸친 남한 자본주의 근대화의 숨가쁜 여전과 엄청난 에피쏘드를 단순화하고, 이를테면 꼭두각시, 덜머리집, 홍동지, 이심이 등등처럼 캐릭터화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인형 같은 캐릭터들은 남한사회의 욕망과 운명이라는 그물망 속에서 서로 얽혀서 돌아가고 그러면서 모르는 사이에 역사가 드러나게 하면 어떨까.(p376-377)

 

  아마 저자도 강남이라는 말 속에서 다른 의미를 느꼈나보다.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의 근대화, 부동산 투기, 압축성장, 권력형 비리, 폭력조직, 물신주의 풍조를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서 써내려 간다. 박선녀, 홍양태, 강은촌, 김진, 심남수 등등 소설의 등장 인물들은 다양한 모습들을 대표한다. 드라마틱한 인생,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하는 해방 1세대, 주먹하나로 조직의 구도를 재편하지만 역시 세월 앞에서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주먹들, 꿈을 접고 부동산 투기에 올인한 인생, 부동산 투기에 몸담았던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지식인, 자기집 하나 마련해보겠다고 이리저리 등떠밀리는 인생, 하루하루 출근하며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평범한 인생! 강남몽이라는 책 속에는 다양한 인생들의 이야기가 거미줄처럼 얽히고 섥혀있다. 삼풍백화점 붕괴라는 단순한 사건을 황석영은 부실공사라는 단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과 모순적인 구조, 인간의 욕망으로 이해한다.

 

  그래서일까? 강남몽에는 피해가자 누구고 가해자가 누구인지 알수가 없다. 다들 강남이라는 개발지에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할수밖에 없었던 나름대로의 핑계도 있다. 절대 악인으로 보였던 이도 소설이 진행되면서 어느새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바뀌어 있다. 김진은 사랑하는 이를 잃었고, 백화점 붕괴를 바라보며 과거를 지우고 싶어했던 심남수도, 사업이 부도가 난 박기섭도, 홍양태와 강은촌도 돌고돌고 돌아 어느새 피해자가 되고, 아픔을 곱씹고 있다. 강남이라는 개발지는 모두에게 지옥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夢이라는 말 속엔 그런 의미가 들어 있나보다. 남가일몽, 호접지몽, 구운몽, 홍루몽! 몽자가 들어간 많은 말처럼 그렇게 욕망을 좇아 살았지만 그들의 욕망은 한낮의 꿈처럼 깨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 꿈에 왜 그리 인생 전부를 쏟아부었던 것인지...

 

  강남몽! 소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 진행형이다. 가락시영아파트 재개발, 은마아파트 재개발, 8학군, 도곡동...강남은 아직 꿈에서 깨어나고 있지 못하다. 깨어나기는 커녕 더 많은 이들이 강남이라는 꿈속의 세계로 들어간다. 분명 그 안에서 어떤 이는 한밑천을 잡을 것이고, 어떤 이는 쪽박을 찰 것이며, 어떤 이는 성공을, 어떤 이는 실패를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돌고돌고 돌아서 결국은 원점이다. 아니다. 원점보다 못하다. 모두가 가해자가 되고 동시에 모두가 피해자가 될 것이다. 황석영은 꿈꾸는 강남을 깨우기 위해서 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돌이 얼마나 아플지는 모르겠지만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제 나갈 시간이 되어가는데, 잠에 취해 강남에서 몽롱하게 서평을 남기는 나는 강남몽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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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선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예슬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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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IMF 직격탄을 맞은 세대이다. 97학번인 내가 대학을 들어가던 해 IMF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 내 기억으로 당시 경제정책을 운영했던 사람이 강만수였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에 가던 것이 보편적인 흐름이었는데 IMF로 인해서 이러한 보편적인 흐름이 깨졌다.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직행했던 사람들이 꽤 있었다. 후배들 가운데에는 1학기만 마치고 군에 지원하는 경우도 흔했다. 어차피 갈 군대 빨리 갔다오자는 자위적인 명분 속에는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아픔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IMF와 더불어 대학종합평가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 척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학생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 대학의 서열을 매겨서 국비 지원 혜택에 차등화를 두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다리던 학교도 대학종합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다. 갑자기 등록금이 오르고, 공나물 시루와 같던 강의실은 그나마 조금 한산해졌다. 대종평을 위해서 시간 강사를 대거 투입한 결과였다. 그래봐야 콩나물 시루가 만원 버스로 바뀐 정도이긴 하지만 말이다. 수업의 70~80%가 100명이 넘는 대규모였다. 고등학교 한반이 절대로 50명이 넘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상상도 못할 숫자이다. 일주일 내내 그런 수업을 들어가면서 비싼 등록금을 내고 다녔다. 물론 당시 등록금이 지금 대학생들의 등록금에 비할바가 아니지만 말이다. 시간이 가면서 대종평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기준이 한 가지로 모아지기 시작했다. 등록금? 학생 대비 교수수? 아니다. 취업율이다. 각 학교마다 자기 학교의 취업율을 뻥튀기하기 시작했다. 어느 학교는 98%라고 한다. 어느 학교는 100%라고도 한다. 물론 내가 졸업한 학교도 아르바이트와 같은 비정규직도, 혹은 2년이 채 안되는 단기적인 일자리도 취업했다고 표시해달라는 말을 대놓고 졸업생들에게 요구했다. 대종평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함이란다.

 

  그 뒤로 15년이 흘렀다. 취업 3종 세트, 5종 세트라는 말이 회자된지 오래다. 학교의 서열화는 더 심해졌다. 대기업의 대학 소유는 당시 아주대, 인하대 정도만 떠올릴 수 있었는데 요즘은 중앙대도 있고 성균관대도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찾아보면 더 많을 것이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공부하는 새벽 두시 하버드의 도서관 사진이 싸이에 돌면서 우리나라 대학은 너무 놀고 먹는다는 비난이 거셌다. 그렇지만 그렇게 거세게 비난하고 도서관에서 목숨걸고 공부하던 사람이나, 술렁술렁 놀던 사람이나 지금 사는 모습은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 태어날 때부터 진골 성골인 사람들을 제외하고 해골인 사람들의 가능성이라는 것이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요즘은 더 한 것 같다.

 

  졸업하고 바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 4년, 대학원 2년 장장 6년 동안 쏟아부은 등록금이며, 기숙사비며, 용돈이며, 책값이며 모든 것들을 계산해 보았다. 5천만원이 조금 안되었다. 그때만해도 등록금이 싼 축에 속했고, 그중에서도 내가 나온 대학은 인문계열이라 실습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까웠다. 이 많은 돈을 쏟아부어서 얻은 것이 꼴랑 종이 두 장이다. 대학 졸업장, 대학원 졸업장! 물론 두 졸업장은 모두 졸업식장에서 받지 않고 나중에 교무처에 가서 수령해 왔다. 차라리 그 돈으로 장사를 했더라면이라는 생각도 해봤다. 그래도 나는 낫다. 요즘은 더하다고 한다. 분명 내 자녀가 대학을 다닐 때는 더 할 것이다.

 

  뭔가 잘못되었다. 大學이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한 학사과정"을 거쳐서 "대기업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의 고시원"이 된지 오래다. 김예슬의 말처럼 88만원 세대로 변해 버린지도 오래다. 모두 문제가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 해결책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좀 더 빘나 일자리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것만 요구하고, 바뀌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그 오만하고 꽉 막힌 사고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김예슬은 이러한 해결책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게 과연 최선인가? 그렇게 해결된다고 인간을 자원으로 보는 문제가 바뀌는가? 바뀔 것이 있겠는가? 한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살린다는 이건희 회장의 사고 방식이 이 사회를 지배하는 한 여전히 우리는 승자와 패자로 나뉘어져서 아귀다툼을 할 뿐이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그녀의 선언에서 한없이 슬픔과 아픔을 느낀다. 대학을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거부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선언을 하고, 행여라도 자신이 약해져서 다시 돌아올까봐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피켓을 들고 얼굴을 팔아야 했던 그녀의 결단은 무엇을 위한 결단일까? "학"이 아니라 "삶"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그녀의 당연한 이야기가 왜 존중받지 못하고 철없는 치기로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왜 그녀의 용기있는 결단을 좌빨로 몰아붙이고, 정치를 위한 포석으로 곡해하는가? 한장한장 넘겨가면서 속상했고, 아팠고, 서글펐다. 세상이 점점 더 팍팍해지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난다. 대학 졸업자로서, 대학원 졸업자로서, 또 부모로서, 다른 사람들 앞에 서는 사람으로서,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이런 불합리의 시대와 대학 졸업장이라는 폭력의 시대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어느새 기득권이 되어버린, 그래서 그녀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없는 내가 두렵다. 그녀가 거부한 대학을 그녀가 다시 포용하도록 바꾸어 가는 것이 선배된 우리의 책임이 아닐까? 그녀의 용기와 결단 앞에 한없이 부끄러워져 차마 응원한다는 말도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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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2-03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리가 살아있는 곳, 상아탑인 대학이
국민을 슬프게한다면
어디에 있는 그 누가 국민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고
위로해줄 수 있단 말입니까요 ㅠ.ㅠ

진리가 살아있는 곳이 대학이 맞는 것인지....
진리가 죽어버린 대학에 다니기를 거부한 '김예슬 선언'은
정말 대한민국의 비극 중 하나인 듯 하여
가슴이 무척 아픕니다...

saint236 2012-02-04 02:03   좋아요 0 | URL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는 대학의 이념이 "자본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로 바뀐지는 이미 오래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바뀌지 않고 더 심화되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라떼 2012-02-10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억압받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다
상처받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
-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중에서

저항하는 젊음, 김예슬씨의 고뇌와 행동이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 같습니다.
<김예슬 선언>을 읽고난 진솔한 이야기가 가슴을 울려 옵니다.
고맙습니다. 출판사 '느린걸음'에서 출간된 좋은 책들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요? 기제된 메일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saint236 2012-02-10 18:21   좋아요 0 | URL
느린걸음 출판사 관계자 분이신가 보네요. 좋은 책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달려라 정봉주 - 나는꼼수다 2라운드 쌩토크: 더 가벼운 정치로 공중부양
정봉주 지음 / 왕의서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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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풍집필 중입니다."

 

  나꼼수에 나와서 설레발칠 때는 그냥 설레발인줄 알았다. 그런데 왠걸! 의외다. 어떤 분이 "신이여, 진정 이렇게 멋진 말을 제가 했단 말입니까?"라는 정봉주의 말을 바꾸어 "신이여, 정말 이 책을 정봉주가 썼습니까?"라고 평했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이다.

 

  책을 쓸 정도로 훌륭한 지식을 갖추지 않았고 내 자신이 누군가에게 인생의 격언이 될 만한 말을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만큼 열심히 사는 사람은 지천에 깔려 있고, 그래서 남들에게 무너가 좋은 말을 하고 그들에게 귀감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이 책을 쓰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프롤로그 중에서)

 

  그의 말대로 그는 책을 쓸 정도로 훌륭한 지식이나 학위를 갖추고 있지도 않다. 그저 잘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깔대기를 가져다 대는 것이다. 그럼에도 남들이 다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가져다 내는 그의 얍삽함이 밉지 않다. 아닌척 하면서 그런다면야 얄밉기도 하겠지만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챌 정도로 깔대기를 가져다 댄다. 얼마나 깔대기를 가져다 대는지 꼬깔콘 협찬까지 이끌어 낼 정도이다. 그럼에도 그가 하는 행위들이 얄밉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는 그가 주장하는 대로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이긴 한가보다. 그가 빠진 나꼼수가 그의 수감 이전에 비하여 매력을 잃어가는 것도 수긍이 간다. 공지영의 말마따나 "어느 정치가가 이토록 잘난 척을 하면서 이토록 귀여움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책에서도 그런 정봉주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달려라 정봉주"

 

  솔직하게 책 제목이 촌스럽다. 어려운 외국어를 끌어다 쓰고, 사람들의 구매열에 불을 지를 정도로 자극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이 많이 팔리는 이유가 무엇일까?(내가 가진 책은 14쇄이다. 이 페이스면 조만간 김용민 미래 교수의 자랑처럼 18쇄를 달성할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마음의 빚 때문이 아닐까? 어떤 이들은 정봉주에게서 노무현의 냄새가 난다고 하는데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이리라.

 

  우리가 정봉주에게 마음의 빚을 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고,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신문지 상에서처럼 어설프게 이니셜 표시도 하지 않는다. 그냥 날 것 그대로 까발린다. 책에 적힌 내용도 날 것 그대로이다. 얼마나 도가 심하냐면 국회의원 선거를 위해서 원 포인트레슨까지 받았다는 사실을 거리낌없이 밝힌다. 스스로 탄돌이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자신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대들었던 사실도 밝힌다. 박영선 의원을 서울 시장 후보로 만들기 위하여 봉고차를 동원했다는 사실도 속시원하게 밝힌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구태의연한 모습이라고 이렇게 해서는 민주당의 발전이 없다는 사실도 밝힌다. 한껏 민주당을 까대지만 민주당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이 곳곳에 묻어 있다. 최고 권력자의 비리에 대해서도 거리낄 것이 없다. 그것 때문에 자신이 감옥에 수감될 지도 모르면서(실제로 감옥에 수감되었다.) 할 말은 한다. 아마 박원순 서울 시장의 당선에 정봉주만큼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봉주라는 인물에 대해서, 특히 국회의우너 정봉주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른다. 나꼼수를 통해서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 알았다. 홍정욱, 나경원 같은 사람들도 아는데 정봉주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보다 더 잘안다. 아니다. 여전히 잘 모른다. 그가 왜 BBK에 목숨을 걸었는지, 팽 당할 것이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모하게 파고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국민을 위해서라는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너무 때가 탔나 보다. 그렇지만 내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그는 참 열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Passion이라는 말 가운데 고난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을 정도로 열정적인 것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렇지만 그는 그러한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을 보고 달렸다. 그리고 지금도 달리고 있다. 그렇기에 "달려라 정봉주"라는 제목이 잘 어울린다. 여타 국회의원에 비하여 촌스럽지만 열정적이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가 좋다. 그 무모함이 답답한 한국의 정치 지형을 바꿀 것이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기꺼이 책을 사면서 그에 대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아 본다.

 

  그렇지만 여기서 멈추고 싶진 않다. 그가 계속 달리는 모습이 보고 싶다. 감옥에서 건강을 위해서 구보하는 것이 아니라 만년설이라도 녹일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열정이 구태로 꽁꽁 얼어 붙어 있는 한국의 정치 지형을 녹이도록 달리는 모습이 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지켜 볼 것이다. 민주당이 그를 어떻게 구할 것인지. 조폭도 의리를 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민주당이 보인 모습은 BBK 이후 그를 팽한 아주 의리없는 모습뿐이다. 그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못한 그를 쓰고 버린 모습 뿐이다. 그런 야당을 위해서 누가 표를 몰아주겠는가? 제 식구 챙기기라는 오명이 두렵다면 처음부터 그를 BBK로 몰아 넣지 말아야 했다. 당을 위해서, 그것도 개인의 비리가 아니라 상대 후보의 비리를 밝히기 위해서 열정적으로 달리다가 감옥까지 간 그를 챙기지 못하는 무기력하고 의리없는 당이 국민을 챙길 수는 있겠는가? 어림없는 이야기이다.

 

  어투는 한없이 가볍지만, 내용은 한없이 무거운, 열정만큼은 뜨거운 그의 책이 유쾌하다. 상코ㅔ하고 통쾌하다. 나는 그가 계속 달리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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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2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빨리 이 유쾌한 분이 바깥으로 나오셔서 예전처럼 깔대기를 들이대 주시길 저도 바랍니다. (나꼼수 이전엔, 저도 이런 분이 있는 줄 몰랐지요. 울나라 정치인 중에 이런 분도 있구나 하고 반가웠었지요.)

saint236 2012-02-02 12:20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차트랑 2012-02-02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민이 달려주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계속 달려야 한다에 한표~!!!
아니, 한방~!!!

saint236 2012-02-02 17:30   좋아요 0 | URL
저도 한방이요^^
 
사회적 하나님 - 교회는 왜 사회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는가
케네스 리치 지음, 신현기 옮김, 김홍일 감수 / 청림출판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천국이라는 말에서 당신은 어떤 것을 떠올리는가?

 

  보상? 아니면 책임?

 

  둘다 맞는 말이다. 사는 동안 말씀대로 순종해서 살다보면 이 세상을 떠날 때 유업으로 받을 곳이 천국이다. "예수 믿고 천당가라"라는 고전적인 전도의 멘트에는 "천국=하나님의 보상"이라는 메시지가 강하게 녹아 있다. 매 시간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 속에도 이 사실은 분명히 녹아 있다. 내가 무슨 용가리 통뼈도 아니고 이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나도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 중에 하나이다. 만약 기독교 신앙에서 우리에게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메시지를 전해 주지 못한다면 기독교 신앙을 삶에서 실천하고 싶은 욕심은 상당부분 약화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천국의 전부인가? 교회에서는 마치 이것이 천국의 전부인 것처럼 선포되고 있지만 천국=보상이라는 개념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철저한 왜곡을 불러일으킨다. 천국이라는 말 속에는 보상과 더불어 책임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내가 다니는 감리교회에는 감리교 교리적 선언이라는 신앙 고백이 있다. 그중에 7번째 항목에 이런 것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 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

 

  천국이 보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진 또 다른 책임을 천명하는 신앙 고백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두 말할 것 없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인류 사회이다. 보상으로 주어지는 내세의 천국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천국을 만들어갈 책임은 철저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그러나 숙제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듯이 매우 귀찮고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세에 보상으로 주어질 천국만을 선포하는 조금은 쉬운 길을 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그것이 옳은 길은 아니며, 많은 사람들이 선택했다고 그것이 제대로 된 길은 아니다. 800만이 넘는 기독교 인구를 자랑하지만 영향력을 잃고 매일 욕을 얻어먹는 한국 교회의 현실이 이것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사회적인 하나님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천국을 만들어갈 책임이 있다는 사실 상기시킨다. 만약 이 책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다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으실 것이다.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 제대로 대답하고, 바르게 살아갈 때 천국에 대한 이해는 더 깊어질 것이며 기대감은 더 커질 것이다 부디 한국 교회가 천국을 이루어 가야하는 책임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 책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수십년 전에 출간 되었던 책(레이건 대통령과 대처 수상의 집권 시절)이었던지라 오늘날 읽기에는 다소 시대적인 감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번역에도 다소 무리가 따르기도 하고, 책을 읽으면서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논점을 파악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이라면 한번쯤은 읽고 고민을 해볼 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임에는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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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1-30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인지라
특별히 드릴말씀은 없습니다만
좋은 글에 추천 한 방 드리고 갑니다~

saint236 2012-01-30 23: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