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전쟁 - 세계 역사와 지도를 바꾼 (다신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가톨릭, 개신교, 힌두교)
도현신 지음 / 이다북스 / 2021년 6월
평점 :
절판


  카렌 암스트롱의 새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라딘에서 검색해보니 "신의 전쟁"이라는 책이 걸린다. 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아내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에 도서관에 책을 신청했다. 책을 사면서 아내 눈치를 보는 것은 공간 때문이다. 아내는 아이들이 크기 때문에 방을 따로 주어야 한다고 했다. 딸에게는 방을 줬고, 그동안 서재로 쓰던 방을 아들에게 줘야 하는데, 아직 초등학생인 관계로 방을 따로 안줘도 된다면서 버티고 있었다. 이사를 몇번 하면서 책을 많이 처분했다. 알라딘 중고서적에 팔기에는 아까워서 후배가 작은 도서관을 한다고 해서 200~300권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도 아직 처분 못한 책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아내의 결론은 책을 더 늘리지 말고 도서관을 이용하라는 것이다. 취미 생활로 하는 건프라도 올려 놓을 공간이 없으니 책 욕심을 많이 접었다. 주문하고 기다리다가 받은 책이 "신의 전쟁"이다. 신의 전쟁은 신의 전쟁인데 암스트롱이 아니라 도현신의 책이다. 처음 들어보는 저자이기에 실망감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읽을만은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처음 기준이 암스트롱이었다는 점이다. 암스트롱을 기대하고 이 책을 보니 눈에 찰리가 없다.


  게다가 이 책은 아이들에게 교과서로 읽힐 수는 있겠지만, 무엇인가 종교의 이름을 내건 전쟁에 대한 깊은 통찰을 원하던 내겐 눈에 차지 않았다. 물론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조로아스터교 등 다양한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진 많은 전쟁과 폭력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제목에 부합한다. 그렇지만 책의 많은 분량은 기독교에, 그리고 그 다음은 이슬람교에 할애하고 있다. 그러니 신들의 전쟁이라기 보다는 기독교와 무슬림의 신들의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게다가 각 전쟁을 규정한 타이틀도 상당히 작위적이다. 마카베오 전쟁을 "인류 최초의 종교전쟁"이라고 규정한 것은 "왜?"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만든다. 역사에 대해서 조금만 아는 사람은 이 보다 더 이전에 종교전쟁이 있었음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부제를 잡았다면 그 부제에 맞는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그냥 제목이 그러니 너는 그렇게 받아들여라는 투로 말한다. 


  책을 소개하면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가톨릭, 개신교, 힌두교 그리고 다신교, 이단 종파에서 조로아스터와 나미교까지 종교의 대립과 충돌에거 신의 전쟁으로 이어진 세계 역사를 들여다 본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소개를 보면서 뜨악했다. 다른 서적이라면 모르겠지만 최소한 종교를 다루는 서적이라면 기독교, 가톨릭, 개신교를 섞어서 사용하면 안된다. 구성 자체를 타종교끼리, 그 다음에는 한 종교 안에서 서로 다른 파벌끼리의 문제로 엮었다면 이러한 오해는 없지 않았을까? 나름대로 짜임새 있게 책을 엮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뒤죽박죽 같아 보이는 점도 있다. 또는 세포이 항쟁처럼 모든 사회, 계급적인 이유보다 종교적인 이유를 앞세운 것은 종교 전쟁이라는 틀로 엮기 위해서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이런 이유가 있고, 그 중에서 종교적인 이유도 있으니, 이 책에서는 종교적인 면에 집중해 보자는 식의 솔직하고 논리적인 접근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주어진 분량에 비하여 너무 많은 것들을 건드렸고, 가지치기에 실패하였으니, 읽는 재미는 분명히 있지만, 들인 품에 비해 얻는 것이 부족하다. "세계 역사와 지도를 바꾼 신의 전쟁"이라는 제목에서 "예비"를 작게 적는 후보 경선 포스터의 꼼수를 읽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윤동주의 "쉽게 씌여진 시"가 생각 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께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책이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PS. 분명히 말하지만 보는 재미는 있다. 그러니 별 두개로 평가를 한 것이다. 그러나 기대만큼은 아니기에 별 세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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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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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개-"


  1. 야생 상태의, 또는 질이 떨어지는, 흡사하지만 다른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2. 헛된, 쓸데없는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3. 정도가 심한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개라는 접두사에 대한 설명이 이와 같다. 그렇다면 "개**"이 붙은 말은 대체로 부정적인 말이라는 의미인데, 요즘은 약간 다르게 사용한다. 아직 사전에 등재된 것은 아니지만 "아주"라는 의미로 개를 사용한다. "개이득" 이런 말이 그런 의미이다. 그런데 아직 나에겐 이러한 것들이 불편다. 그래서 아이들이 "개**"을 쓸 때마다 표준어를 사용하라는 말로 혼을 내곤 한다. 자기 친구들 다 사용한다는 말에,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괜찮지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항상 혼을 낸다. 그런데 어느날 중1인 딸이 텔레비전 앞에서 이 책을 보더니 매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는 것이다. 왜 그러나 싶었더니 "아빠도 이런 책 보네."였다. 아무리 그것이 철학책이라고 말을 해도 그 녀석에게는 제목 만큼의 임팩트는 없었나 보다. 


  책 제목 그대로 한국에서는 개소리가 넘쳐난다. 어떤 사람들의 말이 개소리라는 것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 "개소리다."라고 비판을 한다. 그런데 정작 왜 개소리인가라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이런 마음을 먹는 것이 우리만은 아닌 듯 싶다. 그렇게 배웠다는 저자도 "개소리"에 대해서 파고들다니 말이다. 물론 영어 "bullshit"의 번역을 개소리로 한 것이지만, 내가 보기엔 꽤 적절한 번역이다. 예전처럼 점잖지 못하다는 말로 빈 말이나 헛소리로 번역하는 것은 그 의미를 정확하게 번역하지 못한 것이다.


  저자는 개소리는 거짓말이 아니라고 한다. 최소한 거짓말은 자신이 남을 속이기 위하여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은 자각을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 진실이 무엇인지를 고려한다. 진정한 거짓말은 대부분의 진실에 약간의 거짓을 섞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거짓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또는 아무리 100% 거짓을 말한다고 해도, 진실은 알아야 그것을 피해서 거짓말을 할 수 있으므로, 거짓말이란 역설적이게도 항상 진실을 의식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개소리는 다르다. 개소리에는 진실에 대한 고려나, 의식도 없다. 그래서 저자는 개소리가 더 위험하고 해롭다고 한다. 그냥 뱉어내면 되기 때문이다.


  상당히 조심스러운데, 내가 개소리라고 생각했던 말이 있다. 의도가 명확하게 담겨 있고, 누군가에 대한 비난이 담겨 있고, 그래서 편 가르기에 딱 좋은 말. 그것이 진실이냐 거짓이냐는 상관이 없는 말. "시선강간"이라는 말이다. 요즘 많이 사용되는 말이기 때문에, 이 말을 개소리로 치부하거나 불편함을 내비치면, 분명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내 지인들 중에도 있겠지만, 저자가 말하는 개소리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그냥 내가 규정하면 그대로 따라라는 오만함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 안에는 상대에 대한 어떤 타협이나 이해도 없다. 이 말을 거부하면 시선강간을 찬성하는 마초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싫으면 이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말에 동의하지 못하지만 마초가 아닌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설 수가 없다.


  개소리가 대체로 그렇다. 대선을 앞두고 각 당마다 경선이 진행 중이다. 언론들은 자신들이 싫어하는 정권이라 온종일 비판을 해댄다. 진보 쪽에서는 타협하는 현정권의 모습에 실망해서 비판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마미손은 너는 부동산 정책에 실패해서 청년들에게 자기집 마련의 꿈을 빼앗아 갔으면서 왜 청와대라는 비싼 집에 살고 있냐고 한다. 방역과 국민의 기본권을 두고 토론을 한다. 곳곳에서 많은 소리들이 넘쳐나는데, 귀담고 들을 소식이 많지 않다. 한동안 뉴스를 꾾었던 이유가 이것인데, 요즘 다시 뉴스를 끊고 싶어진다. 내가 정의고, 내 생각의 틀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무 곳에서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 논리와 근거로 조금만 살펴보면 이해되지 않을 말인데도, 상관없다. 비판을 받아도, 허무맹랑해도 상관없다. 왜냐고? 개소리이기 때문이다. 토론이나, 타협의 목소리가 아닌 개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방 천지에 개소리가 넘쳐 난다.


  그런데 괜히 개에게 미안해 진다. 그들이 실제로 뱉은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냥 "멍멍" 소리 밖에 못내는 개들인데, 수없이 많은 말은 사람들이 하고, 거기에 애꿎은 "개"를 붙여 버리니 말이다. 개 보기가 부끄러워지는 2021년의 9월을 시작한다.


 PS. 이 책 또한 개소리가 아닐까? 물론 다른 의미의 개소리 말이다. 가끔 가볍게 농담처럼 던진 말을 진담으로 받아 끝없이 진지하게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분명히 무엇인가 대단한 지적인 토론과 근거가 뒷받침되는데, 결론은 "이걸 뭐 이렇게까지."이다. 이 책이 그런거 같다. 어느날 갑자기 저자가 개소리에 흥미를 느껴서 철학적으로 개소리를 연구한 끝에 내놓은 실없는 결과물! 이 책을 보고 "큭큭" 댄 이유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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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가방 2021-09-01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요샌 뉴스를 열심히 피하게 되더군요..
 
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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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때 할머니와 보낸 시간이 많았다. 할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시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꾸신 아버지! 그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은 어린 시절 기억으로도 버티기 쉽지 않았다. 입하나 줄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할머니는 나를 항상 데리고 다니셨다. 게다가 나는 할머니에게 상당히 귀여운 손자였었다. 사촌형들과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내가 5~7살 때 막내 사촌형은 고등학생이었다. 바로 뒤의 동생이 2살 아래인 여동생, 4살 아래인 남동생, 그리고 5살 아래인 사촌 동생이었다. 집안 형편으로보나 나이로 보나 할머니에게 금쪽같은 손자였던 것이다. 부모님의 사랑보다는 할머니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자랐고, 할머니 집에서는 내가 왕이었다. 그러다가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다시 부모님과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두고두고 할머니가 생각이 난다. 얼굴은 하나도 생각이 안나지만, 할머니의 냄새와 분위기, 그리고 촉감은 생각이 난다.


  카프카의 변신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계속 할머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 집을 위하여 헌신하던 잠자! 어느날 갑자기 그는 벌레가 되었다. 지금까지 집안의 가장으로서 사랑받고 존경받았던 그였지만 벌레로 변하게 되면 그는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말아야하는 꼭꼭 숨겨야 하는 치부가 되었고, 부모조차도 외면하는 존재가 되었다. 집에 있지만 없는 존재, 없는 것처럼 애써서 여겨지는 존재가 되었다. 화가 난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상처를 입어도 아무도 그를 치료해 주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가족들은 그를 위한다는 말응 하면서 그의 흔적을 하나씩 없애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날 잠자는 죽게 된다. 그가 죽은 날 가족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행을 간다.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우울했던 분위가가 그렇게 밝게, 그리고 상쾌한 느낌을 주면서 끝이 난다. 


  가족들에게 잠자는 어떤 존재였을까? 그리고 어떤 존재가 되었던 것일까? 왜 잠자는 집안의 기둥이요 가장에서 치부요 짐으로 변해버렸던 것일까? 그의 외형이 바뀌어서일까? 벌레로 변한 그의 외형 때문일까? 아니다. 그가 그렇게 가족들에게 짐이 되어버린 것은 그의 효용성이 다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잔인한 말이지만 "효용성"이라는 말이 정확하다. 만약 그가 계속해서 집안의 경제를 책임졌다면 벌레가 무슨 대수이겠는가? 그의 외모가 무엇을 바뀌었든지 상관이 없을 것이다. 아낌없이 베풀었지만, 부모님을 위해서, 동생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그의 능력이 끝나는 그 지점에서 그는 짐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렇다 그는 잠자에서 짐으로 변신해 버린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할머니가 떠오른 이유가 무엇일까? 잠자의 모습에서 많은 노인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처할머니도 요양병원에 입원하셨다가 돌아가셨다. 집에서 모시다가 어쩔 수 없이 병원에 모셨는데, 그날 가족들이 다 힘들어 했다. 평생 모시고 같이 사셨던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정말 힘들어 하셨다. 자주는 아니지만 살아계시는 동안 아내와 병원에 찾아서 말동무를 해드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하시는 말씀이 어떤 사람은 가족들이 아무도 안 찾아 온다는 것이다. 요양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한번도 안 찾아 보다가 돌아가시면 장례 치르기 위해서 나타난다고 하셨다. 그런 모습이 한 두 명은 아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입원 기간이 오래되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하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래서 긴 병에는 효자가 없다는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근력, 경제력, 또렷한 정신 등 여러가지로 말하겠지만, 결국은 "효용성"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또한 능력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겟다. 능력이 없어지는 순간에 잠자에서 짐이 되어 버리는 것처럼, 능력이 없어지는 순간에 누구나가 짐이 될 수 있다. 차마 버리지 못해서 애써 외면하는 존재가 되어 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가?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그런데 이 말이 최근들어 사회 전반에 걸쳐서 공정의 기준이 되었다. 능력대로 인정받는 세상, 능력대로 대우받는 세상! 그것이 공정이다. 시험 점수가 낮으면 비정규직, 업무 능력이 저하되면 퇴직, 근력이 딸리면 낮은 임금 등 여러가지 능력을 기준으로 공정한 가격을 매긴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과연 인간적인가? 능력이 공정한 것이라면 그 공정은 인간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차가운 것이고, 공정이 그러한 것이라면 난 기꺼이 불공정을 택할 것이다.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소위 말하는 내 능력도 퇴보해 가고 있다. 경쟁력도 사라지고 있고,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어느샌가 나도 누군가에게 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정해진 길이다. 그렇다면 공정 담론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요즘들어 할머니가 유달리 보고 싶은 이유가 따뜻함이 그리워서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번역은 엉망이다. 변신에 대한 몇 가지 번역본을 읽었지만, 이렇게 엉망인 번역은 처음본다. 번역한 사람들이 독일어는 열심히 공부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어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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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8-26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추천해 주실 번역본이 있을까요?ㅎ

saint236 2021-08-26 19:38   좋아요 1 | URL
변신만 보자면 ‘2004년판 좋은생각/이영희 옮김‘도 괜찮습니다 전 번역은 가독성이ㅜ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요 대신 단편은 민음사 번역본아 도 많이 포함되어 있고요

막시무스 2021-08-26 19: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ㅎ

바람돌이 2021-08-27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솔출판사판으로 읽었는데 매끄럽게 읽혔었어요. 같은 책의 몇가지 번역본을 같이 보시다니 진자 대단하셔요. 저는 따를 수 없는 경지!! ^^;;
우리 인간의 마지막은 결국 잠자처럼 무용해지면서 폐기되는걸까요? 능력지상주의의 지금 사회에서는 요양병원은 무수한 잠자들의 마지막 장소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saint236 2021-08-28 11:27   좋아요 0 | URL
일부러 읽으려고 그런 것은 아니고요 유명한 소설을 겹치는 부분들이 있어서 여러 번역본을 읽게 되네요.
 
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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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개봉작 중에 이퀼리브리엄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로는 보지 못하고, 2004년 비디오로 빌려서 보게 된 영화이다. 지금도 심심하면 가끔씩 보는 영화인데, 크리스천 베일의 권총 액션이 환상적이다. 존윅의 권총 액션이 나오기 전에 단연 독보적인 권총 액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권총을 사용하는 액션 영화는 많이 있지만, 권총 사격술 자체를 액션의 영역에 끌어 올린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일 것이다.(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이다.)


  영화관에서 개봉될 당시만 해도 내가 몰랐던 것으로 보아 그다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영화같다. 이 무슨 망발이냐 하겠지만, 그 당시 군 입대를 1년 앞둔 시점이라 거의 모든 영화는 챙겨봤었기 때문에 자신할 수 있다. 당시 이 영화가 나왔던 것도 잘 몰랐을 정도이니, 크리스천 베일 영화치고는 그렇게 크게 홍보가 되지 않았던 영화같기도 하다. 최근에 1984를 보면 다시 한번 돌려봤던 영화인데, 아직까지 볼만하다. 통쾌한 액션을 원하는 사람은 한번식 보기를 권한다. 영화의 줄거리에 대해서는 굳이 밝히지 않겠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김빠지는 일이요, 유즈얼 서스펙트에서 "절름발이가 범인이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테러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퀼리브리엄의 세계관은 1984의 세계관과 거의 동일하다. 셋이냐, 하냐라는 차이, 빅브라더와 파더의 차이, 비극과 순응이냐 전복과 통쾌한 액션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감정을 통제하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은 1984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다. 아마도 영화의 각본을 쓴 사람이 1984에서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본다. 


  1984의 배경은 조지 오웰 당시에는 대단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것들이겠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는 현실이다. 텔레비전과 CCTV를 적절히 섞어 놓은 것 같은 텔레스크린, 그리고 이를 통한 감시는 오늘날에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어떤 이들은 "베리 칩"과 백신을 거론하면서 국민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하지만, 이미 우리 주위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신용카드와 휴대폰을 통하여 동선을 파악하는 일은 기본 중의 기본이 되었고, 그래서 작년 집회 때 전모 목사는 현금 쓰고 휴대폰을 꺼놓으라는 지령을 내리지 않았던가? 책의 내용을 읽어가는 중에 눈에 딱 들어오는 대목이 있었다. 모든 기술은 적정한 수준에 멈추어 있거나, 오히려 퇴보하지만, 경찰의 감시에 대한 기술은 나날히 발전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매우 위험하고 소름끼치는 일인데, 더 소름이 끼치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그것을 용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에 열성적인, 그러나 잠꼬대를 어린 딸이 고발하여 끌려온 사람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모습을 보면, 전체주의가 왜 무서운지을 알게 된다.


  전체주의에 대한 여러가지 정의들이 있겠지만, 내 나름대로의 판단은 길들이는 것이다. 어떤 거대한 담론을 던진다. 그리고 그 담론은 대체로 "국가"가 된다. 거대하고, 모호해서 비판할 수 없지만, 너무 쉽게 압도되어 순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요즘 많이 말하는 국익, 국격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지만, 누구도 반대하지 않고, 반대하더라도 쉽게 자기의 생각을 꺾어버리게 만드는 것을 보라. 국익이라는 말로 아프간 난민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국익이라는 말로 아프간 난민을 수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반되는 주장을 하는데, 그 근거는 국익이다. 상반된 주장이 어느 순간 하나로 합쳐지면, 그것은 완전무결한 정책이 된다. 그리고 이것의 오류를 드러내는 행동들은 모두 국익에 반대되는 행동이 된다. 끊임없이 과거를 고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국익과 국격들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판단하느냐는 것이다. 1984에서냐 빅브라더와 당이 존재하지만 현실 세계에는 누가 그 세력인가? 너무나 큰 권력을 쥐어주지만 이 또한 모호하기에 더 위험하다. 프롤은 절대로 혁명을 할 수 없다는 말이 더 마음에 걸리는 이유이다.


  1984는 소설이다. 그러나 너무 현실적이다. 그래서 더 씁쓸하고 소름이 끼친다. 차라리 이퀼리브리엄처럼 액션이나 혁명의 통쾌함이라도 있으면 모르겠지만, 오웰은 그렇지 않다. 마음마저도 꺾이고, 결국에는 죽는 순간에도 빅브라더의 은총과 온화한 미소를 바라보는 윈스턴의 모습은 그래서 더 여운이 남는지도 모르겠다. 


  동물농장, 1984에 이어 이젠 카탈로니아 찬가를 보려고 하는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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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8-26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퀼리브리엄!!saint236님.감사합니다!

saint236 2021-08-26 19:39   좋아요 0 | URL
며칠 전에 다시 봤는데 역시 재미있습니다 이퀼리브리엄
 
이솝 우화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4
이솝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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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솝 우화"


  어린 시절 많이 들었던 이야기들이 이솝 우화에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간혹 깜짝 놀랄만한 내용을 발견하고는 "헉"이라는 감탄사를 내뱉곤 했다. "서울 쥐 시골 쥐, 해와 바람, 사자와 생쥐, 학과 여우, 코끼와 거북이" 등 어린 시절 우리가 교화서나 동화책을 통하여 들었던 이야기들의 출처가 이솝우화이다. 그만큼 아이들에게 많이 읽히는 책이라는 반증이리라. 그리고 내용도 어렵지 않고, 주인공이 동물이기 때문에 더욱 더 부담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금도끼 은도끼"도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나라마다 비슷비슷한 이야기들이 있으니 우리나라 전래동화처럼 고대 그리스도에도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출처를 찾다보니 금도끼 은도끼가 전래동화가 아니라 이솝 우화의 번역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06년, 1907년에 번역되어 초등학교 교과서에 소개가 되었는데 번역이 너무 잘 되어서 한국 전래동화로 알고 있을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헤르메스가 노인으로 그리고 산신령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것이 현지화라는 것이구나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읽던 이솝 우화를 다커서 읽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생각하겠지만 어른이 되어서 읽는 이솝 우화는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 우화라는 말의 의미처럼 이솝 우화는 단편이라 부르기도 부끄러운 아주 짧은 글들이 모여 있는 책이다. 그런데 짧은 길이에 담겨 있는 생각은 결코 짧지 않다. 우리가 흔히 촌철살인이라고 말하는데, 이솝 우화는 촌철살인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186번 "볼일부터 먼저"라는 글에서는 나랏 일을 소홀히하고 이솝 우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자신 마저도 풍자의 소재로 만들고 있는 이솝의 대범함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자기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자신감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풍자이리라. 그의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글은 182번 대머리의 사연이다. 


  백발이 되어가는 사람에게 두 사람의 첩이 있었습니다. 젊은 첩과 늙은 첩이었지요. 늙은 첩은 나이 아래 사내를 둔 것을 부끄러이 여기어 그가 올 때마다 검은 머리를 뽑았습니다. 노인을 애인으로 두고 있다는 것이 싫은 젊은 여인은 흰 머리를 뽑았습니다. 두 사람은 이렇게 해서 그를 온통 대머리로 만들고 말았지요.(이솝 우화 207p)


  읽으면서 얼마나 낄낄대게 만든 글인지 모르겠다. 이솝 우화의 내용들이 이렇게 유쾌한 것들이 많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각 글마다 달려 있는 교훈이 쌩뚱맞은 것들이 많다는 점이다. 당장 위릐 이야기만 해도 "잘 맞지 않는 동반자들은 복을 얻지 못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마나 이것은 봐줄만하다. 이 책을 읽어 본 사람들은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들도 종종 보인다. 굳이 찾은 옥의 티는 이것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촌철살인의 깊이는 166번을 보면 알 수 있다.


  두 소년이 고기를 사러 함께 상점에 갔습니다. 푸줏간 주인이 등을 돌렸을 때 한 소년이 내장을 슬쩍해서 친구 호주머니에 집어넣었습니다. 몸을 돌린 푸줏간 주인은 내장이 없어진 것을 보고 두 소년이 훔쳤다고 나무랐습니다. 슬쩍한 소년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맹세하였고 그것을 가진 소년은 슬쩍하지 않았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들의 속임수를 꿰뚫어 본 푸줏간 주인은 말했습니다.

  "거짓 맹세로 나를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 그러나 하느님은 못 속여."(이솝 우화 190p)


  두 소년 모두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진실을 말했다. 그렇지만 그 진실이라는 것이 합쳐지면 불의가 된다. 참 아이러니한 장면이기도 하고, 자신의 불의를 교묘하게 부정하는 두 소년의 모습은 참으로 교활하다. 이 글을 읽으면서 문득 몇 가지 재판이 머리를 스쳐간다. 아마 들어본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술은 먹었고 운전은 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최근에는 이런 것도 있다. "미등기 이사이고 부회장은 명예직이니 그가 한 일은 취업이 아니다. 기업의 큰 방향에 대해 조언을 한 것이다." 법, 재판은 양심을 근거로 사실을 따지는 것인데, 사실을 따지면서 양심은 뒤로 미루어 둔다. 그러니 하나하나를 놓고보면 맞는 것 같은데, 그것들의 총합은 거짓이 되는 기묘한 상황이 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재판을 진행하는 사람들이 이솝 우화의 "거짓말쟁이가 된 진실"이라는 글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순간을 모면하려고 진실을 이리 저리 찢어붙인 결과가 거짓된 판결이라면 얼마나 웃기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 모순과 궤변을 어떤 평론도, 웅변도 이 짧은 글만큼 잘 보여주지 못한다.


  이솝 우화를 읽다 보면 이러한 보석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아이들에게 권선징악이라는 가치관을 가르치지 위하여 이솝 우화를 읽히는 것도 의미는 있겠지만, 현실을 직시하는 풍자와 해학의 도구로 이솝 우화를 어른들이 읽는 것은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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