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2 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시대의창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YTN 돌발영상 고정화면> 

  작년 7월 경 YTN의 사장이 구본흥씨로 바뀌었다. 언론 통제라는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사측은 주주회의를 강행했고 구본흥씨를 사장으로 인선했다. 많은 기자들이 반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까만 양복을 입으신 분들을 앞에 모셔 놓고 AT필드(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그 AT필드)를 쳐가면서 사장 인선을 마쳐버렸다. 그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면서 AT필드(Asloute Terror Field)가 저것이구나 생각을 했다. 주주총회를 지켜보면서 언론의 독립을 외치던 기자들과 노조들에게 주주총회 자리는 절대적인 공포의 장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무력감으로 당을 쳤을 것이며, 믿었던 선배들의 꺾여진 기자 정신에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 모든 울분 때문일까 주저앉아 서럽게 우는 젊은 기자들의 모습이 눈에 밟혔고 그들의 아픔에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구본흔 사장으로 YTN의 사장이 교체되면서 그런 생각을 해봤다. 조만간 돌발 영상이 사라지겠는걸? PD수첩이라든지 2580이라든지 시사 프로그램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게 들렸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들었다. 설마 가장 인기 있는 코너를 없애지는 않겠지? 본인은 뉴스채널을 YTN만 고수했으며 그 이유는 전적으로 돌발영상 때문이었다.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아 돌발영상은 자리를 감추었고, 나는 텔레비전 채널을 MBN으로 고정시켜 버렸다. 왜냐고? 팝콘영상 때문이다. 기자의 편집이 최소한도로 들어가 현장의 모습을 날 것 그대로 전해 주는 것이 돌발영상과 팝콘영상의 매력이 아니었던가? 아마 MBN의 팝콘 영상마저 사라져버린다면 나는 뉴스채널을 그다지 관심있게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개콘보다 더 재미있었던 돌발영상이 폐지되고 난 후 왜 그렇게도 언론탄압이라는 말을 썼었는지 알 것 같았다. YTN의 뉴스를 가만히 살펴보면서 묘하게 지금까지와는 핀트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몇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대놓고 정부 편을 들지 않지만, 묘하게 촛불집회에 관하여 부정적인 뉘앙스를 던지는 말들을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답답한 마음을 품고 있던 가운데 촘스키의 책을 읽게 되었다. 1권은 며칠에 걸려서 읽었지만 2권은 단숨에 읽어 내렸다. 언론에 대한 그의 생각이, 민주주의와 기업과 정권에 대한 그의 생각이 내 가슴에 막혔던 체증들과 의문들을 다 풀어 주는 것 같았다. 물론 그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상당히 과격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부분도 물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의 이야기과 생각은 그의 이름값을 할만했다. 

  촘스키는 미국을 중심으로 정부와 기업과 언론의 검은 카르텔에 관하여 이미 지적한바 있다. 이에 대해서 궁금하다면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시대의 창"라는 책을 보길 권한다. 촘스키는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라 생각하는 것들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닌 손상되고 변질된 민주주의라고 단언한다. 그저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을 따름이지 실제적인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고 한다. 오히려 지금 정치체제는 귀족주의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과거의 귀족 대신에 지금은 기업과 자본가들이 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다르달까? 과거에는 혈통에 의하여 엘리트와 비엘리트가 구분지어졌지만 지금은 자본에 의하여 엘리트돠 비엘리트가 구분지어 진다고 말하는 그의 주장은 충분히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어찌되었던 촘스키는 기업과 이를 지원하는 정부(사실상 기업과 정부는 한통속일 뿐이다. 사익을 대놓고 추구하느냐 공익으로 포장해서 챙기느냐의 차이만 있을뿐이지)는 현대 기술의 총아인 언론을 이용하여 국민을 세뇌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세뇌라는 말이 과격하다면 달래고 있다고 할까? 아니면 전체를 보지 못하게 일부만 보여주면서 자기들이 정해놓은 방향으로 여론이 몰리도록 통제하고 있다고 할까? 왜 이렇게 군사력과 물리력이라는 단순하면서도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방법을 두고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매커니즘을 사용하는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더 효과적이며 그 효과가 거의 반영구적이기 때문이다.  

  촘스키는 그 예로 지금까지 미국이 사용해왔던 과거의 정책들을 들고 있다. 베트남, 니카라과, 브라질, 멕시코, 라오스, 칠레, 이스라엘, 그리고 한국 등등 이러한 예들은 수도 없이 많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면 이라크를 들 수 있을 것이며, 조만간 북한과 이란도 그 예에 들어가지 않을까? 미국은 항상 민주주의를 대의 명분으로 내세운다.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해서라면 민가에 폭격을 하는 것도 허용이 된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어린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쯤이야 감수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지라도 타협해서는 안된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국미느이 투표에 의해서 선출된 지도자마저도 쿠데타를 통하여 갈아치워야 한다. 이것이 미국이 말하는 민주주의다. 이것이 미국이 세계에 뿌려놓은 민주주의의 실체이다. 그러나 이게 정말 민주주의인가? 이것이 정말 대중을 위한 민주주의인가, 아니면 엘리트를 위한 민주주의인가? 그 대답은 누가 봐도 뻔하다. 다국적 기업을 위해 일하는 민주주의, 헤지펀드를 위해 압력을 행사하는 민주주의, 이것이 미국식 민주주의의 현실이 아니던가? 이러한 현실을 언론을 통하여 교묘하게 조작한다. 거짓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결코 전체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이러한 조작에 사람들은 쉽게 넘어간다. 그리고 언론이 선전하는 민주주의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그것들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자기에데 돌아올 것이 뻔한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국의 사회체제는 어느새 삼각형에서 마름모를 지나 팔자형으로 이행하고 있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이미 제3세계에서는 실행이 완료 되었으며, 한국은 이미 많이 진행이 되었고, 미국마저도 거의 완성이 되어가고 있다. 세계 금융위기는 이 현상을 부추기는 촉매제 역할을 할뿐이다. 금융위기라고 하지만 위기는 중산층까지의 위기이지 상층의 위기는 아니다. 위기를 딛고 상층으로 올라가는 중산층은 기회가 될 것이지만 대다수의 중산층은 하층으로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다. 시스템이 그렇다. 이것을 바꾸려면 촘스키는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직적인 움직임을 엘리트들은 원하지 않기 때문에 언론을 통하여 방해한다. 여기에 속지 말고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것이 촘스키가 말하는 세상의 권력이다. 

  도킨스의 저서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에서 제목을 따왔다. 신 망상이 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만들어진 미국식 민주주의가 되었것, 미국식 민주주의의 망상이 되었건 이대로 간다면 대안은 없다. 그저 비정치적인 모습을 가장한 권력의 포기만이 있을 뿐이다. 요즘 대한 민국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대안을 세우는데 가장 필요한 책이 아닐까? 부디 미국식 민주주의가 만병통치라는 과대망상에서 우리가 깨어 나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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