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처럼 현실의 벽을 돌파하라
김서택 지음 / 홍성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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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히 김서택에 의한 김서택 방식의 설교집 굳이 리뷰를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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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성경 : 절기 이야기 - 성경의 비밀을 푸는 절기이야기 열린다 성경
류모세 지음, 권혁승 감수 / 두란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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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에 관한 배경 지식 불필요한 성경 구절이 들어가 양이 늘어났다 후회막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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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1-09-21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이 서평을 적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나중에 4권 전부 묶어서 한번에 서평 작성하련다.
 
열린다 비유 : 포도원 품꾼 이야기 예수님의 비유 시리즈 3
류모세 지음 / 두란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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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유 시리즈 세번째 포도원 품꾼에 관한 비유에 대한 책이다.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알레고리적으로 해석도어 왔던, 그래서 뭔가 껄쩍지근하게 넘어갔던 비유를 원래 의도대로 해석하기 위한 좋은 길잡이이다.  

  저자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당시의 후견인-의뢰인 제도와 선한 눈- 악한 눈의 상용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이 두 가지에 대한 이해를 간과하고 넘어간다면 우리는 비유의 의도와는 다르게 하나님을 고약한 포도원 주인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으며, 해방신학자들처럼 성경을 곡해할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가 무엇인가? 

  첫재 후견인-의뢰인 제도는 번역상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다. 그래서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담기가 어렵다. 차라리 시오노처럼 그냥 파트로네스-클리엔테스로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파트로네스는 클리엔테스에게 생필품과 법적인 보호 같은 보호 장치를 제공하는 은혜를 베풀고, 클리엔테스는 파트로네스를 위하여 표와 인적 자원과 같은 사회적인 명예와 권력을 제공해 눈다. 파트로네스-클리엔테스는 로마에서 시작되어 근동에 전래된 개념으로 모든 사회가 이 시스템 안에서 돌아간다. 로마와 속주도, 로마 황제와 헤롯 왕가도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개인적인 관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도 아우르는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 시스템은 우리에게는 낯선 것이지만 예수님의 시대와 성서가 씌여지던 시기에는 선거의 4대 원칙만큼이나 명확한 개념이었다. 포도원 주인과 포도원 품꾼도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 관계에서 이해해야 비유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선한 눈-악한 눈 상용구의 이해이다. 눈은 심장 곧 그 사람의 심성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 당신의 일반적인 사고이다. 선한 눈은 선한 심성으로 악한 눈은 악한 심성으로 연결이 되는데 악한 심성이라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성서 시대는 풍족한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일반 대중에 의한 재화의 획득이 어려웠으며, 특별한 사치품이나 소비재의 획득은 거의 불가능하던 시대이다. 이 시대에 특정 물건에 대한 욕심은 단순히 소유의 욕구 차원을 넘어서 그것을 소유한 자에 대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저주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하루 온 종일 일해 한 데나리온을 받은 일꾼들이 주인을 악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주인이 타인에게, 즉 자기보다 못한 이에게 은혜를 베푼 것에 대한 불평이요, 원망이요, 저주이다. 그렇기 때문에 포도원 주인이 "너희들 것이나 가지고 꺼져라."고 화를 냈던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이해하고 비유를 다시 한번 읽어보자. 그러면 이 비유는 상당히 정치적으로 익히게 된다. 포도원 주인은 후견인으로서 일하지 못하고, 그래서 빈곤의 상태에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은혜를 베푼다. 복지가 실종되어 버린 사회 속에서 주인은 가진 자로서의 책무를 다한 것이다.(당시 사회 속에서 가진 자가 후하게 나누어 주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다.) 주인은 경제 정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 사람의 필요(모든 사람들이 하루를 빠듯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분량인 한 데나리온, 요즘 말로 치면 최저 생계비라고 할 수 있다.)에 따라서 최저 임금을 보장했다. 물론 여기에서 발생하는 금전적인 피해는 본인이 감수했다. 그런데 원래 한 데나리온의 품삯으로 계약을 한 이들이 이러한 최저 생계비에 반감을 표하면서 웃돈을 요구한다. 이들이 열심인 것은 생존을 위한 최저 생계비 보장보다는 자기의 이익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이 아닌가? 현대의 노조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다. 자기들의 월급과 보너스, 이익을 위해서는 똘똘 뭉쳐 연대하면서도 자신들보다 더 못한 처지의 비정규직들, 파견 근로자들, 혹은 아르바이터들을 위하여서는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회사와 타협할 순간이 오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비정규직들의 생존과 이익을 무시하거나 자신들의 이익과 맞바꾼다. 오늘 노조가 손가락질 당하고, 빨갱이라는 언론의 플레이에 맥을 못추고 당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악한 눈, 악한 자들이라고 규정한다.  

  비단 노조의 문제만은 아니다. 포도원 품꾼들의 행동 양식이 우리의 행동 양식이기도 하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지만 다른 이의 이익, 나보다 더 못한 이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이기적인 우리의 모습 속에서, 그러한 기독교인의 모습 속에서 악한 자들이라는 하나님의 분노한 음성을 듣는 것 같아서 두렵다. 비유의 모순을 통하여 우리를 향해 던지는 하나님의 정의의 화두와 날선 주님의 음성에 가슴 한 켠이 뜨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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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 2013-07-30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편협한 사고이군요..보수언론이 만든 귀족노조의 프레임워크(framework)에 사로잡힌 신자유주의적 사고..설령 정규직 노조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파업한다고 해도 전경련, 경총 등이 정치권에 로비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에 절반도 못 획득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시길...

saint236 2013-07-30 23:11   좋아요 0 | URL
보수 언론이 만든 귀족노조 프레임이라고 하시지만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요? 정규직 노조들이 비정규직들을 배려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요. 자본가들이 하는 것보다 덜 악하니 괜찮다는 뜻인지요. 마지막으로 와룡님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관점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네요. 제가 잘못봤다고 한다면 님이 보는 예수님의 관점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설득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요? 느닷없이 이건 아니네요. 다시 생각해보세요라는 무례한 말은...

복음 2013-08-18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나가다 보고 글을 적습니다. 이 예수님의 비유는 두분의 설명이나 그 글에서 적은 내용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19장 30절의 내용과 20장16절의 내용을 보아 하나의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이 땅의 가치는 서열이 있지요, 그러나 구원에는 우열이 없습니다. 처음 믿은자나 나중에 믿은자나 구원은 동일한 가치라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구원은 질투의 눈으로 볼 문제가 아니지요. 구원은 선물이요, 상속받는 것입니다.(마19:29)

saint236 2013-08-19 22:10   좋아요 0 | URL
비유를 다른 시선으로 살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성경을 해석하는데 이것은 이것이다 여기서 절대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이단으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일정한 틀만 넘어가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 해석의 자유는 있는 것이 아닐까요?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 요한복음 복음서와의 낯선 여행 1
김진호 지음 / 동연출판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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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처럼 그렇게 거창한 글은 아니고, 개인적인 생각을 적어본다. 먼저 이 책의 내용과 주제에 대한 제대로 된 리뷰를 보고 싶다면 얼그레이님의 리뷰를 볼 것을 권한다. 이 리뷰는 책의 내용과 주제 자체를 다루기 보다는 그 내용과 주제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적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 한신대 학생회와 같이 일할 기회가 있었다. 신학적인 사상이나 이런 것을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친목행사로 체육대회를 여는 것이었다. 몇 학교에서 모여서 함께 행사를 준비했었는데 가장 마음에 안드는 학교가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한신대이다. 내가 한신대를 가장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하다. 시간 약속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개념하면서 권리와 회의 진행에 대해서만큼른 철저하게 자신들의 몫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행사 당일에도 1시간이나 늦게 나타나서 아직 자기들이 도착하지 않았는데 행사를 시작했다고 화내며 언성을 높였었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말이다. 안병무 선생님을 존경하면서도 한신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그날부터 지금까지 쭉 안좋게 이어지고 있다.  

  몇년 전 후배가 결혼한다고 하는데, 그 대상이 한신대 신학과를 졸업해서 목회를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순간 당황했다. 내가 알기로 그 후배의 신앙관은 일반적인 의미로 지극히 평범하고,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걱정이 되어서 생각이 많이 맞지 않을텐데 괜찮겠냐고 묻자 씩 웃으며 한마디 한다. "요즘 한신대 많이 달라졌어요." 그렇다. 내가 가지고 있던 한신대에 대한 것들, 민중신학, 지극히 사회참여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오늘날 시쳇말로 먹히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왜 한신대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늘어 놓느냐하면, 이 책이 가지는 한계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서이기 때문이다.  

  민중이라는 말은 영어 사전에도 Minjung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영어로 번역할 수 없는 몇 안되는 단어 중에 하나일 것이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 교회가 성장과 부와 권력을 위해서 국가 권력과 타협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축복하며 면죄부를 쥐어주던 시절, 그래도 타협하지 않고 신앙인의 양심을 지키면서 약자들과 함께 해왔던 신앙운동이요, 삶의 양태가 민중신학이라고 알고 있다. 제3세계에 제3세계 신학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민중 신학이 있다면 자랑스러워하고, 제3세계 신학을 기웃거리면서 민중신학 또한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안병무를 알았고, 함석헌을 알았으면, 문익환을 알았다. 오랫 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존경할 만한 목사님들을 만니지 못했던 시절 이런 분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행복했었다. 

  그런 나였기에 저들은 안병무 선생님의 학풍을 이어 받았구나하는 한신대 학생에 대한 막연한 부러움이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만난 그 학생은 약속을 수시로 어기는 삶의 모습으로서 나를 실망시켰던 것이다. 여기에 민중신학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삶이 따라가지 않는 신학은 헛된 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저자인 김진호 목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글은 나에게 왠지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전해준다. 내가 이 책에 몰두하지 못한 이유이다. 

  둘째로 이 책이 가지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은 후배의 이야기이다. "이젠 달라요."라는 말과 함께 순복음같다는 말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한신대가 가지는 학풍마저 부정해 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안병무 선생이 가르친 것이 결국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 삼박자 축복보다 못한 것으로 취급받는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그리고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를 이 책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책에 적힌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구구절절이 옳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공감은 고사하고 이 책이 읽히지도 않는다. 공부하기 위하여 이 책을 사야하는 학생들이라면 모를까 순수하게 요한복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이 책을 구매하는 일은 드문 일일 것이다. 그 드문 사람 중에서도 이 책을 마지막까지 읽는 사람은 더 드물 것이다. 그렇게 더 더 드문 사람 중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고 읽을 사람은 더 더 더 드물 것이다. 왜? 공산당 혁명이, 맑스 레닌 주의가 대다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읽히지 못했던 것과 같은 이유다. 아무리 좋을 말을 늘어 놓고, 진리를 늘어 놓으면 무엇하냐? 이 책을 읽어야 할 사람들에게 그들이 던지는 말은 그들만의 말인것을. 독자들에게 쉽게 읽히지 못한다는 말이다. 신학 전공자들을 위해 쓴 책이라면 내 오지랖이 도를 지나친 것일테지만 만약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읽히고 싶다면 충분히 고려애햐 할 사안이다.

  삶이 따르지 않는 학문, 그들만의 말 잔치로 끝나는 학문! 

  솔직히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이 갖는 한계가 아닐까? 신학이든, 학문이든, 아니면 정치든 상관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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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가방 2011-08-10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다 그런 건 아니겠지요.
전 '삶이 따르지 않는 학문'보단 '삶으로 구현해 낼 수 없는 학문(혹은 신앙)'이 실제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정말로 자기들이 말하는 대로 믿는다면 결국 아무 것도 믿지 않아야 하는 그런..

saint236 2011-08-11 11:11   좋아요 0 | URL
삶으로 구현해 낼 수 없는 학문이라..왠지 공감이 가네요. 여하튼 기독교인으로서 느끼는 가장 큰 안타까움은 삶과 신앙 사이의 괴리입니다. 쉽지 않다고 포기해서는 안되는데..말만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네요.
 
이것이 성공이다 - 하나님의 놀라운 심리를 일깨우는 토저의 명쾌한 심리학 규장 A. W. 토저 마이티 시리즈 5
A. W. 토저 지음, 이용복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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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물 한 살 한참 순수하던 그 시절 나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던 일이 있었다. PD수첩을 통해 방영되었던 길 잃은 목자라는 프로그램이다. 그것은 당시까지 내가 가지고 있었던 순수한 신앙에 큰 상처를 주었고, 한동안 교회를 불신하게 만들고 방황하게 만들었다. 그 후로 참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많이 고민했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세계에서 내노라 하는 대형 교회들이 주로 한국에 있다. 신도시 쪽에가면 몇 천명 모이는 교회들이 꽤 많다고 한다. 장로 출신의 대통령이 당선되어 교계의 지도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의기양양하다. 지역의 국회의원들이 선거철만 되면 이교회 저교회 인사를 다닌다. 어느새 교회는 꽤 큰 힘을 소유한 집단이 되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교회는 어느새 꽤 많은 욕을 먹는 집단이 되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 걱정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무엇인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 이대로는 안되는데 하는 답답함이 생긴다.  

  그런 답답함에 토저의 책을 읽게 되었는데 수십년 전에 씌여진 이 책에서 나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당신이 어떤 교회에 가보았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교인들은 그 교회의 유력한 '돈줄' 장로 주변으로 몰려들고, 교회는 이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목회자는 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한다. 이 사람의 말 한마디에 교회가 일사분란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연합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자기의 견해를 결코 표현하는 법이 없는 교인들은 이 사람의 말이면 전부 용납한다. 이것이야말로 '죽은 자들의 차가운 관용'이 아니겠는가? 또 다른 어떤 교회에서는 담임목사가 교회를 개척하고 성장시켰다는 그 공로를 빙자해서 교회를 사유화하여 전횡적으로 치리해나간다. 목사의 전횡과 부당한 처사에 대한 교인들의 이의 제기는 하나님에 대한 이의 제기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이렇게 강압된 교회의 일사분란함은 사실상 '죽은 시신들의 차가운 연합'에 불과할 뿐이다.(p199-200) 

  2000년대의 한국 교회가 아니다 50~60년 전의 미국 교회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소름끼치도록 오늘의 한국 교회와 닮아 있다. 여기에 자식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현상만 포함시키면 그대로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모습이다. 매우 절망스러운 상황이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서 읽히고 있는 것이며, 읽힐 필요가 있는 것이다. 

  토저는 교회가 성공이라는 것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판단했다. 교회가 이야기하는 성공이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참된 교회는 세상이 바라보는 시각으로는 절대로 성공할 수가 없다. 오히려 실패해야 마땅하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자기에게 유익한 것마저도 하나님 때문에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버리려고 하는가? 아니다. 더 샇아두려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잘 연구해서 리더십을 공부한다. 재테크 방법을 연구한다. 부동산에 골몰한다. 성경에 나오는 것 외에는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토저의 단호함이 너무나 절실하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에 너무 목을 매지 마라. 교회가 추구해야할 성공은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꺼이 실패하라. 두려워 하지 말라. 토저의 불을 토하는 듯한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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