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교회 이야기
한희철 지음 / 포이에마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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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도 순복음 교회, 소망교회, 사랑의 교회, 온누리 교회, 광림교회, 금란교회, 임마누엘교회, 오륜교회, 명성교회, 영락교회...

 

  한국에서 내노라하는 교회들을 열거해 봤다. 혹 누군가 이 글을 보고 자기 교회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서운해 할지도 모르겠다. 위의 저 교회 명단에 자기 교회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꽤 유명한 교회들도 있을 것이고, 대부분 그런 교회들은 자존심이 상할지도 모르겠다. 혹 어떤 사람들은 더 열심히 전도하려고 다짐을 할지도 모르겠다.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위에 열거한 교회를 포함하여 대한민국에서 난다 긴다하는 교회들이 대부분 이시기에 덩치를 불렸다. 세계 기독교 역사상 예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성장하였고, 그 결과 교회는 대단한 자본과 사람과 권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 권력을 사회를 위하여 사용했으면 좋았을텐데 자기 교회 건물을 짓고 부동산을 구입하고, 덩치를 불리기에 대부분의 힘을 쏟아 부었다. 당연히 90년대를 거치면서 교회 성장은 멈추고 오히려 하락세에 들어섰다. 많은 교회들이 소위 말하는 문을 닫고 폐업 신고를 했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사실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도,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다. 왜냐? 위에 열거한 대형 교회들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Mega Church들 때문이다. 계속 성장하는 그 교회들을 보면서 많은 교회들은 저렇게 되고 싶다는 꿈에 부풀었고, 그 꿈을 향하여 달려갔다. 그러나 꿈은 꿈일 뿐이다. 교회 성장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라 인력과 자본과 시스템, 그리고 권력에 의해 유지되었고 고착되었다. 이미 사회에서도 한물간 2세 경영 3세 경영을 교회에서는 제사장 가문이라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당연시 하였다. 뭔가 잘못되었다.

 

  난 목사 아들이다. 아버지는 늦게 신학교에 가셔서 늦게 목회를 하셨고, 시골로만 돌아다니셨다. 원래 농사를 지으셨던 분이니 농촌에서 목회하시는 것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다른 분들처럼 양복을 깔끌하게 입고 돌아다니지도 않으셨고, 슬리퍼에 츄리닝 바람으로 동네를 다니셨다. 그러다가 담배를 엮고 있는 집에 들어가서 함께 담뱃잎을 엮으면서 언제 교회 올거냐고 이제 좀 교회에서 얼굴 좀 보자고 전도하셨다. 시내에 나가시는 분들이 계시면 고물 봉고차로 모셔다 드리고, 혹 누군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관공서에 함께 가셔서 일도 봐주시곤 하셨다. 아마 처음에는 목사라고 거리를 두었겠지만 한 두해가 지나고 나면 그냥 동네 사람이었다. 지나가다 인사를 해도 왠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그런 동네 아저씨 말이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못마땅하셨겠지만 내겐 목사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서울로 학교를 올라오니 안 그랬다. 왠지 내가 이상한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그런가 보다 넘어갔다. 솔직히 나도 큰 교회를 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 친구들이 부러웠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한희철 목사님의 책을 접했다. 한희철 목사님이라는 이름 때문에 선택했는데 내용이 공감이 간다. 그분이 적으신 글은 내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삶과 그대로 겹치고 있기 때문이다. 단강에서 목회를 하시면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원주에 도착하여 감리사님의 차를 타고 어딘지도 모르는 단강으로 가며, 산과 들을 지나 마을이 나타날 때면 단강이 이쯤이어도 좋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때마다 차는 멈춰 서지 않았고, 그러다가 마침내 들어선 곳이 비포장도로, 덜컹거리는 길을 달려가며 아무 곳이라도 좋습니다, 멈춰만 주십시오, 모든 기대를 포기했을 때 그때 나타난 곳이 단강이었습니다.(p 15)

 

  한목사님의 고독, 답답함, 절망감이 고스란히 손에 잡힌다. 모든 기대와 희망을 포기했을 때 나타난 곳이 단강이었다. 어머니가 오셔서 교회와 살 집을 보고 울고 가셨다는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리라. 내 할머니도 동일하셨으니 말이다. 그렇게 외진 곳에서 목회를 하는데 교인이 늘어나겠는가? 그렇다고 예산이 튼튼하겠는가? 가족들이 풍족하지는 않다고 해도 굶지 않고 살만한가? 돌이켜 보면 어릴 때 수제비를 참 많이 먹었던 것 같다. 철들고 20년 동안 수제비를 먹지 않았으니 말이다. 수제비를 먹은 이유야 뻔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아버지는 평생 그렇게 사셨다. 그게 목사의 길이려니 생각하셨다. 어머니의 바가지를 묵묵부답으로 대응하셨다. 답답하면 교회 가셔서 "아버지 아시지요!" 한 마디 하셨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한목사님도, 그리고 내 아버지도 인생의 깊은 의미를 깨달으신 것 같다. 그곳에서 비로소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신 것 같다. 그래서 그곳이 당신들에게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교회였으리라. 교회가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깊이 음미해 볼만한 부분을 적어본다.

 

-교회가 세워진지 몇년 됐죠?

-3년 됐습니다.

-지금 몇명 모입니까?

-20여명 모입니다.

-첨엔 몇명 모였나요?

-20여명 모였습니다.

피식 웃었다. 자격심사, 둘러 앉은 심사 위원들이 3년동안 그대로인 숫치를 두고 웃었다.나도 웃으며 그랬다.

-작년 한해 동안 세분 이사가고 세분 돌아가셨습니다.

모두들 다시 웃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면서

-됐습니다. 나가세요.

그렇게 자격심사가 끝났다.

 

*감리교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하면(요즘은 대학원을 졸업하면) 서리 전도사 1년, 준회원 전도사 2년(대학원 졸업이 필수가 되기 전에는 4년, 아버지는 이 과정을 하셨다. 한목사님도 이 과정일 것이다.) 총 3년(과거에는 5년)의 과정을 거쳐야 목사 안수를 받는다. 매해 다음 과정으로 올라갈 자격이 되는지를 심사하는 것이 자격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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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2-12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종교와는 별 관련없이 생활하는 사람다만
한희철목사님의 이야기는 무척 감동적입니다.

saint236 2012-02-14 06:25   좋아요 0 | URL
기독교인의 삶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아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꽤 소중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달린 서평들이 대부분 알라딘 서평 도서라는 것이...

차트랑 2012-02-15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독교인의 삶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
정말 옳으신 말씀입니다.
적극 공감합니다 세인트님!!

2012-02-15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15 2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16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17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회적 하나님 - 교회는 왜 사회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는가
케네스 리치 지음, 신현기 옮김, 김홍일 감수 / 청림출판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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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이라는 말에서 당신은 어떤 것을 떠올리는가?

 

  보상? 아니면 책임?

 

  둘다 맞는 말이다. 사는 동안 말씀대로 순종해서 살다보면 이 세상을 떠날 때 유업으로 받을 곳이 천국이다. "예수 믿고 천당가라"라는 고전적인 전도의 멘트에는 "천국=하나님의 보상"이라는 메시지가 강하게 녹아 있다. 매 시간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 속에도 이 사실은 분명히 녹아 있다. 내가 무슨 용가리 통뼈도 아니고 이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나도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 중에 하나이다. 만약 기독교 신앙에서 우리에게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메시지를 전해 주지 못한다면 기독교 신앙을 삶에서 실천하고 싶은 욕심은 상당부분 약화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천국의 전부인가? 교회에서는 마치 이것이 천국의 전부인 것처럼 선포되고 있지만 천국=보상이라는 개념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철저한 왜곡을 불러일으킨다. 천국이라는 말 속에는 보상과 더불어 책임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내가 다니는 감리교회에는 감리교 교리적 선언이라는 신앙 고백이 있다. 그중에 7번째 항목에 이런 것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 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

 

  천국이 보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맡겨진 또 다른 책임을 천명하는 신앙 고백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두 말할 것 없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인류 사회이다. 보상으로 주어지는 내세의 천국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천국을 만들어갈 책임은 철저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이다. 그러나 숙제라는 것이 대부분 그렇듯이 매우 귀찮고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세에 보상으로 주어질 천국만을 선포하는 조금은 쉬운 길을 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그것이 옳은 길은 아니며, 많은 사람들이 선택했다고 그것이 제대로 된 길은 아니다. 800만이 넘는 기독교 인구를 자랑하지만 영향력을 잃고 매일 욕을 얻어먹는 한국 교회의 현실이 이것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사회적인 하나님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천국을 만들어갈 책임이 있다는 사실 상기시킨다. 만약 이 책임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다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으실 것이다.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 제대로 대답하고, 바르게 살아갈 때 천국에 대한 이해는 더 깊어질 것이며 기대감은 더 커질 것이다 부디 한국 교회가 천국을 이루어 가야하는 책임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 책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수십년 전에 출간 되었던 책(레이건 대통령과 대처 수상의 집권 시절)이었던지라 오늘날 읽기에는 다소 시대적인 감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번역에도 다소 무리가 따르기도 하고, 책을 읽으면서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논점을 파악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이라면 한번쯤은 읽고 고민을 해볼 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임에는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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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1-30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인지라
특별히 드릴말씀은 없습니다만
좋은 글에 추천 한 방 드리고 갑니다~

saint236 2012-01-30 23: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꾸벅...^^
 
사도행전 속으로 4 - 택한 나의 그릇, 사도행전 8.9장 이재철 목사의 사도행전 설교집 4
이재철 지음 / 홍성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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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8장과 9장의 강해 설교로 사울의 회심과 낙향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몇가지 고민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적어본다.

 

  첫번째 한국 기독교의 광신적인 편협함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로 존경받는 사울의 등장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사도행전 속으로 3권의 말미에 보면 스데반의 순교와 그로 인한 사울의 등장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속으로 4권에서는 이렇게 등장한 사울이 스데반의 순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기록하면서 시작한다. 사도행전 8장 1~3절에서는 사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회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얻가 옥에 넘기니라

 

  스데반이라는 한 사람이 죽었다. 아무렇게나 살았던 사람도 아니요, 경건한 삶을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죽었는데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조금도 애석해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울의 생각이 유대교적인 틀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그렇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자기의 신념과 종교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편협한 사고는 열정적이면 열정적일수록 더 위험하고, 비인간적이 되어 버린다. 사울이 꼭 그렇다. 열심을 내면 낼수록, 유대교에 독실하게 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고 목숨에 위협을 받는다. 열심을 내지 않으니만 못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사울의 모습을 보면서 더 안타까워지는 것은 편협한 사울의 모습이 한국 교회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불교, 유교 문화권에 속해 있던 우리 나라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은 꽤나 유연하고 전략적인 사고가 필요한 일이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면서 다른 종교를 비난하는 현 한국 교회의 모습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 백번양보해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야 기독교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포기해선 안된다고 하더라도 산사에 찾아가서 불상을 훼손하는 광신적인 모습은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울의 편협함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성과 회개가 없다면 앞으로 한국 교회는 자신의 편협함 때문에 거꾸러지게 될지도 모를 노릇이다.

 

  둘째 하나님의 선택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당시 스데반 정도는 아니지만 사울보다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아마도 사명자라는 말로부터 가장 먼 사람을 꼽자면 사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하나님은 사울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인 것을 깨닫게 해주는 일이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핍박하고, 그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사울을 선택하셨다면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할 사람은 없을테니 말이다. 사람들을 가려가면서 정죄하고 편가르는 한국 교회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셋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숙성의 시기가 필요하다. 사명을 받았다고 다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명을 받았어도 일할 수 있는 적절한 시간이 있다.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해야할 일은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자기 자신을 돌보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에 조금도 망설임없이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 사울이 그렇게 열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지만 실패하고 고향으로 낙향했던 것도 사울을 하나님의 그릇으로 빚어가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이다. 돌아가는 것 같지만 그 시간이 사울을 마지막까지 달려가도록 충전하고 준비하는 시간이 되었다. 준비가 되지 않고 열정만으로 뛰어나갔다가 도중에 멈추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기만성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각나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백주년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는 직분의 호칭제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워진다. 직분을 직위로 착각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지만 빈대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 되지 않을까 싶어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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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
맥스 루케이도 지음, 최종훈 옮김 / 청림출판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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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눈을 뜨며 하루를 시작한다. 무엇엔가 쫓기듯이 정신없이 살아간다. "어!"하는 사이에 하루가 지나간다. 잠자리에 들며 하루를 마감하기 전 하루를 돌아본다. 오늘은 무엇을 하고 살아왔는가? 오늘은 어떤 일때문에 힘들어 했던가? 하루를 되새겨 보다보면 정말 많은 일들이 벌어졌음을 알게 된다. 그러한 일 가운데에는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어서 지치게 하는 것들도 있고, 숙면을 방해하는 것들도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것이다. 죽을만큼 힘들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그것이 별것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이라.

 

  대개 이러한 일들은 나의 힘으로 되는 것들이 아니다. 때론 친구들의 도움으로, 때론 지인의 도움으로, 때론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의 변화로!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기독교 신앙에서는 이것을 은혜라고 한다. 잊을 수 있는 것도 은혜고,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을 정도로 내 마음이 커진 것도 은혜다.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상황,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사방이 우겨싸임을 당한 것 같은 상황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솟아날 틈이 분명히 있다. 쉽지 않고 죽을만큼 힘들기 때문에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갈 뿐이다. 이러한 아주 작은 틈이 존재하는 것 또한 은혜다.

 

  교회를 다니면서 은혜라는 말만큼 절실히 깨닫는 것도 없다. 그런데 그 은혜라는 것이 묘하게도 한번에 왕창 쏟아지지 않는다. 그때그때 넘어지지 않을만큼 최소한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과거에 하나님은 참 쪼잔한 분이라고 생각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딱 그만큼만 필요했던 것이다. 아무리 많이 부어 주어도 내가 그것을 담을 수 없으니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루케이도가 이 책을 통해서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 은혜는 왕창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은 내가 어떻게 감당하지 못할만큼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도로, 내가 넘어지지 않고 버틸만큼으로주어진다는 것이다. 왜? 그게 나에게 최적이니까! 나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의존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는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 뜻대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교만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온갖 부침과 절망과 위기 속에서, 해도 너무한다고 투덜거리는 속에서 어느새 나는 성장해 있다. 인간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내가 상상도 못했던만큼 성장해 있다.

 

  과거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내렸던 만나를 쪼잔한 하나님의 행위라고 오해했던 적이 있다. 스팀팩도 아니고 반짝 주어지는 마약이라고 오해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뜨거워 진다. 만나는 매일 매일 내리는 것이기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힘이 되었던 것이며, 그들을 성장 시켰던 것이다.

 

  오늘 잠자리에 들면 내일도 하루가 시작된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다. 죽을만큼 힘들지만 죽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하루 하나님의 만나를 기대한다. 그날 딱 내게 필요한 만큼 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기대해 본다. 정말 견디기 힘들 때 이 책을 펴놓고 그날 내게 주실 일용할 양식을 분명히 주심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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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기독교는 비겁할까? -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행동.의
디이트리히 본회퍼 지음, 만프레드 베버 엮음, 정현숙 옮김 / 국제제자훈련원(DMI.디엠출판유통)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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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좋으나 제목은 비겁! Freiheit zum Leben이 ˝정말 기독교는 비겁할까?˝로 번역될 줄이야. 리뷰작성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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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12-23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원래 뜻은 뭐가 되야 하는 건가요?

saint236 2011-12-24 00:24   좋아요 0 | URL
freiheit가 자유(freedom)이고 leben이 삶(life)이니 삶에의 자유, 혹은 자유로운 삶 정도로 번역이 되지 않을까요?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와 행동에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본회퍼는 독일 사람들이 존경하는 신학자 2사람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지성의 대명사 바르트, 다른 하나는 행동의 대명사 본회퍼! 본회퍼의 사상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nachfolge(영어 제목 The cost of discipleship 한국 제목 나를 따르라 개인적으로 영어 제목이 더 원제에 가깝습니다.)를 읽어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워낙 오래 전에 번역한 것이라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지만요. 요즘 새로 번역된 책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저는 예전 번역본을 봤었습니다.

stella.K 2011-12-24 12:00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한국식 제목은 원제에서 빗나가도 너무 빗나갔네요.
뭐 안 그렇다는 역설의 뜻이 강한 것 같습니다만.
그런데 세인트님은 신학을 하셨나요? 왠지 그럴 것 같아요.^^

saint236 2011-12-24 13:07   좋아요 0 | URL
ㅎㅎ 본회퍼를 참 좋아하는지라...

stella.K 2011-12-24 13:11   좋아요 0 | URL
아하!^^

Johanna 2014-09-19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실은 `자유로운 삶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원고를 보냈고, 이 소책자가 청소년들에게 읽혀지기를 바랐는데, 번역자로서도 참으로 유감입니다... 그리고 예리한 지적과 섬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본회퍼를 무척 좋아하는 분이라 하시니, 책 소개를 하고 싶습니다.
이 책은 지금은 은퇴하신 만프레드 베버라는 할아버지가 `청소년들을 위해` 다양한 본회퍼 저서에서 짧막한 내용을 발췌하여 만든 소책자입니다. 이 책을 읽은 후, 본회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면 목적을 달성한 셈이지요.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되어, 본회퍼 저서들을 읽어 보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부족하나마 이 책을 소개한 저의 뜻이 성취된 것이라 보시고 너그러히 이해해 주세요.

saint236 2014-09-19 17:47   좋아요 0 | URL
홍보 문제 때문에 책 제목이 바뀐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실제로 이렇게 보게 되네요. 책 제목 때문에 많은 실망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 나네요.

Johanna 2014-09-23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갑자기 생각이 나서 다시 들어와 봤어요.
본회퍼 글은 내용도 뛰어나지만, 정말 아름다운 문장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문학 전공자인 제가 읽어도 감탄이 나올 때가 많답니다. 원서 읽기가 가능하다면, 한 권쯤 원서를 읽어 보시도록 권하고 싶어요. 진리를 찾는 삶에 기쁨 있으시길 바라며!

saint236 2014-09-25 22:31   좋아요 0 | URL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본회퍼의 저작이 가지는 힘은 본회퍼라는 저자의 힘도 있지만 베트게라는 편집자의 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요. 본회퍼의 단편들을 모아서 그렇게 훌륭한 책들을 만들어 낸 베트게도 존경할만한 사람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