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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비유 : 포도원 품꾼 이야기 ㅣ 예수님의 비유 시리즈 3
류모세 지음 / 두란노 / 2011년 7월
평점 :
비유 시리즈 세번째 포도원 품꾼에 관한 비유에 대한 책이다.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알레고리적으로 해석도어 왔던, 그래서 뭔가 껄쩍지근하게 넘어갔던 비유를 원래 의도대로 해석하기 위한 좋은 길잡이이다.
저자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당시의 후견인-의뢰인 제도와 선한 눈- 악한 눈의 상용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이 두 가지에 대한 이해를 간과하고 넘어간다면 우리는 비유의 의도와는 다르게 하나님을 고약한 포도원 주인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으며, 해방신학자들처럼 성경을 곡해할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가 무엇인가?
첫재 후견인-의뢰인 제도는 번역상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다. 그래서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담기가 어렵다. 차라리 시오노처럼 그냥 파트로네스-클리엔테스로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파트로네스는 클리엔테스에게 생필품과 법적인 보호 같은 보호 장치를 제공하는 은혜를 베풀고, 클리엔테스는 파트로네스를 위하여 표와 인적 자원과 같은 사회적인 명예와 권력을 제공해 눈다. 파트로네스-클리엔테스는 로마에서 시작되어 근동에 전래된 개념으로 모든 사회가 이 시스템 안에서 돌아간다. 로마와 속주도, 로마 황제와 헤롯 왕가도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개인적인 관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도 아우르는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 시스템은 우리에게는 낯선 것이지만 예수님의 시대와 성서가 씌여지던 시기에는 선거의 4대 원칙만큼이나 명확한 개념이었다. 포도원 주인과 포도원 품꾼도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 관계에서 이해해야 비유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둘째 선한 눈-악한 눈 상용구의 이해이다. 눈은 심장 곧 그 사람의 심성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 당신의 일반적인 사고이다. 선한 눈은 선한 심성으로 악한 눈은 악한 심성으로 연결이 되는데 악한 심성이라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성서 시대는 풍족한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일반 대중에 의한 재화의 획득이 어려웠으며, 특별한 사치품이나 소비재의 획득은 거의 불가능하던 시대이다. 이 시대에 특정 물건에 대한 욕심은 단순히 소유의 욕구 차원을 넘어서 그것을 소유한 자에 대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저주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하루 온 종일 일해 한 데나리온을 받은 일꾼들이 주인을 악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주인이 타인에게, 즉 자기보다 못한 이에게 은혜를 베푼 것에 대한 불평이요, 원망이요, 저주이다. 그렇기 때문에 포도원 주인이 "너희들 것이나 가지고 꺼져라."고 화를 냈던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이해하고 비유를 다시 한번 읽어보자. 그러면 이 비유는 상당히 정치적으로 익히게 된다. 포도원 주인은 후견인으로서 일하지 못하고, 그래서 빈곤의 상태에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은혜를 베푼다. 복지가 실종되어 버린 사회 속에서 주인은 가진 자로서의 책무를 다한 것이다.(당시 사회 속에서 가진 자가 후하게 나누어 주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다.) 주인은 경제 정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 사람의 필요(모든 사람들이 하루를 빠듯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분량인 한 데나리온, 요즘 말로 치면 최저 생계비라고 할 수 있다.)에 따라서 최저 임금을 보장했다. 물론 여기에서 발생하는 금전적인 피해는 본인이 감수했다. 그런데 원래 한 데나리온의 품삯으로 계약을 한 이들이 이러한 최저 생계비에 반감을 표하면서 웃돈을 요구한다. 이들이 열심인 것은 생존을 위한 최저 생계비 보장보다는 자기의 이익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이 아닌가? 현대의 노조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다. 자기들의 월급과 보너스, 이익을 위해서는 똘똘 뭉쳐 연대하면서도 자신들보다 더 못한 처지의 비정규직들, 파견 근로자들, 혹은 아르바이터들을 위하여서는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회사와 타협할 순간이 오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비정규직들의 생존과 이익을 무시하거나 자신들의 이익과 맞바꾼다. 오늘 노조가 손가락질 당하고, 빨갱이라는 언론의 플레이에 맥을 못추고 당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악한 눈, 악한 자들이라고 규정한다.
비단 노조의 문제만은 아니다. 포도원 품꾼들의 행동 양식이 우리의 행동 양식이기도 하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지만 다른 이의 이익, 나보다 더 못한 이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이기적인 우리의 모습 속에서, 그러한 기독교인의 모습 속에서 악한 자들이라는 하나님의 분노한 음성을 듣는 것 같아서 두렵다. 비유의 모순을 통하여 우리를 향해 던지는 하나님의 정의의 화두와 날선 주님의 음성에 가슴 한 켠이 뜨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