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지 끌렸던 건 아닌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을 맡고, 모건 프리먼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만 하겠다 싶었다. 더구나 넬슨 만델라 역을 모건 프리먼이 아니면 누가 맡겠는가?  

하지만 이 영화가 그동안 나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은, 재미없을 거란 동물적 육감만은 아니었다. 넬슨 만델라라면 존경하긴 하지만 이런 도덕적 인물은 책으로 읽으면 감동이겠지만, 왠지 영화로보면 반감이 된다.  

이 영화가 전기 영화는 아니지만, 만델라란 인물이 실명으로 거론이 되고, 주인공으로 나왔다면 점에서 전기 영화를 방불케 하는 것도 있다. 그래서 말이지만 전기 영화는 흥행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그래서도 이 영화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던 것으로 안다.  

더구나 정말 넬슨 만델라가 럭비를 좋아했을까? 그럴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니 내가 넬슨 만델라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는 것과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는 것외에 아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가 어떻게 저항했는지 아는 것이 없다.  

    
그래서 갑자기 이 책들이 땡겼다.  

영화는 만델라의 인간적인 모습도 보여진다. 이를테면, 굉장히 겸손한 사람인 것. 인종화합을 강조했다는 점. 하지만 가족과는 그다지 화목하게 지내지 못했다는 점 등.  

인상적인 건, 그는  조그만 고마움에도 Thank you. 라고도 하지 않고 꼭 Thank you very much.라고 인사한다. 그리고 늘 사람들의 행운을 빌어준다. 그런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겸손한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는 역시 오욕칠정이 표현되야 볼 맛이 난다. 도대체 만델라와 럭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물론 스포츠가 국가의 위상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만한 것인지에 관해선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만델라는 럭비 주장 선수를 친히 대령령 관저로 불러 친히 차를 대접했을 것이다. 그 만남이 가져오는 파장은 놀라워, 아무튼 끝은 해피엔딩이다.  

말하자면 넬슨 만델라는 영감을 불어넣는 지도자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덕분에 남아공 럭비의 위상도 올라갔다는 것도 보여주고. 

하지만 럭비는 다른 스포츠와 달리 알고는 있으나 대중화되지 못했고 그래서 관중들의 흥미를 끌만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영화는 너무 착하다. 단지 이 영화 하나 때문에 흑인을 바라보는 일반인의 시각이 달라졌다는 것이 아닐가? 백인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흑인을 그려내는 감독의 시각은 상당히 중립적이란 느낌이 든다. 아니, 오히려 이쯤되면 중립적이 아닌 긍정적이라고까지 해야하지 않을까? 

하지만 난 늘 삐딱이여서 한마디 더 붙이자면, 예전엔 백인의 의로움을 부각시킬 땐 백인만으로도 충분히 그것을 부각시킬 수 있었다(예를들면 '파워 오브 원' 같은 영화). 그러나 지금은 이 영화에서처럼 흑인을 긍정적으로 부각해야 더불어 자기들의 위상도 높아지게 됐다고나 할까? 물론 이건 순전히 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어쨌든 세상이 좋아쳤다.  

지금은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이 영화를 보며 물근 드는 생각은, 나도 한번 남아공에 가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델라라 이후 그 나라가 인권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한번 직접 가서 보고 싶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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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굴복하지 않는다 Invictus : William Ernest Henley
    from 루체오페르의 家 2010-07-31 20:29 
    굴복하지 않는다  Invictus : William Ernest Henley  기적은 고통과 함께 온다. 영국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1849∼1903)의 삶도 그랬다. 그는 12세 때 폐결핵에 걸렸다. 뼛속을 파고든 몹쓸 균 탓에 훗날 왼쪽 무릎 아래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시인은 항상 쾌활하고 열정적이었다.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떡 벌어진 덩치에 목발을 짚고 다니던 친구를 『보물섬』에 등장시켰다.
 
 
마녀고양이 2010-07-31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삐딱이 생각이 맘에 들어 추천부터 누릅니다. ^^
어쩐지 아픈 곳을 찌르는 말인데여.. 옆에 있는 사람을 추천하고 칭찬하는 것은,, 결국 나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일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되니까여. 생각거리를 주시네여~

stella.K 2010-07-31 18:46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저는 아무래도 미국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이
있나봐요. 반미주의잔가?ㅋ
그래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했다니까 완곡어법을 쓴 거지
다른 감독이 했다면 더 심하게 말했을지도 몰라요.ㅋㅋ

루체오페르 2010-07-31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 자체보다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인빅터스'라는 시가 좋았습니다.
예전에 '룬의 아이들 윈터러' 라는 소설에서 처음 알게된 후로 수시로 되새겨보는 시입니다.
시의 원저자의 삶도 이름대로 정복당하지 않는,굴하지 않는 삶이었기에 더욱 와닿습니다.

남아공 월드컵 개막식 전날 만델라의 손녀가 교통사고로 사망해서 개막식에도 갑자기 불참했었죠. 위대한 인물이지만, 당분간은 슬픔을 견뎌야겠죠.

stella.K 2010-07-31 18:48   좋아요 0 | URL
헉, 이게 시의 제목이었군요.
혹시 시 전문을 볼 수 있다면 좋겠는데...^^

만델라에게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안 됐네요.
그 사람에겐 왜 이리도 고난이 많은 건지.
그러니까 위대한 사람이 됐겠지만요...

루체오페르 2010-07-31 20:31   좋아요 0 | URL
정리가 잘 된 글이 있어 트랙백으로 걸어둡니다.^^
 
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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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컨대, 내가 강남에 산지도 어느 덧 30년 세월을 넘어 40년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한곳에 이렇게 오래 살게될 줄은 정말 몰랐다.    

처음 강남 땅을 밟은 건 아주 어렸을 때다.  부모님이 그 집을 계약하고, 앞으로 이 집에 살게 될 거라고  나를 처음 데려가신 적이 있다. 아마 모르긴 해도, 부모님은 전 주인에게 잔금을 치르기 위해 그 집을 가셨던 것 같고, 앞으로 이 집이 우리집이 될 거라니 나는 좀 얼떨떨한 기분이었고,  믿기지도 않았다. 그 집 주인 내외는 뭔가 우리와는 달라 보였다. 고상하고 지적여 보엿다고나 할까? 물론 그런 집에서 산 사람에 대한 착시 효과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고 그 사람네들은 제법 근사하게 보였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그해 가을 우린 정말 이사를 했다. 한강 다리를 건너 우리 가족이 탄 차가 미끄러지듯 현깃증을 느끼며 굴다리를 지나면 강남구 신사동 경계다. 굴다리를 지나 올 때 달린 간판엔 강남의 전신인 '영동 지구'란 팻말이 달려 있었다.  그날로부터 나의 친척들은 우리 엄마를 부를 때 'ㅇㅇ 엄마'라고 불리지 않고 '영동'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 엄마는 친척들로 부터 그렇게 불려진다.   

새로운 집은 중구 광희동이란 먼저 살던 집과는 사뭇 달랐다. 먼저 살던 동네는 기와집 아니면 지붕을 슬레이트로 덮은 집이 많았지만, 새집은 그때만해도 새롭게 불리던 '양옥'이라 불리우기에도 손색이 없는 집이었다. 우리집이 있던 골목엔 시에서 찍어내듯 비슷한 구조의 '시형주택'이란 것이 쪼르라니 있었는데, 딱 두 집이 개인주택이었고, 그중 하나가 우리집이었다. 마당엔 잔디에 꽃도 많았고, 집 뒤론 '대머리산'이란 조그만 야산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집만 좋았다 뿐이지 도무지 이 동네가 먼저 살던 집 보다 뭐가 좋은지를 어린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땅은 아직도 닦이지 않아서 바람이 불라치면 흙바람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고, 비가 오면 진창이되어 미끄러질듯 뒤뚱거리거나 발이 땅에 깊이 들어가 한 발 띄어 놓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언덕 꼭대기에 있었던 우리집은 나올 땐 어떻게 나왔는데, 다시 들어갈 땐 어떻게 저 흙언덕을 올라갈 것인가 한숨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적어도 먼저 살던 동네는 시멘트 길이라 그런 문제점은 없었다. 이쯤되면 먼저집이 그리웠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강남'의 기억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면 소가 달구지를 매고 지나가는 것을 볼 수가 있고, 실개천을 건너야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랫길엔 개천도 있어 오폐수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없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불과 2,3년 안에 개천은 메워지고, 땅은 회색 시멘트도 잘 닦여졌다. 지금도 궁금한 건, 그 비슷한 시기에 달구지 매던 소도 자취를 감췄던 것 같은데 그 소는 어디로 갔을까? 하는 것이다. 모르긴해도,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그 소의 주인은 얼마의 돈을 받고 동네를 떠나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다른 모든 건 다 잊어도 달구지 매고 거리를 지나다녔던 그 소의 걸음걸이를 잊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내 말을 믿지 못할 지도 모른다. 오늘 날, 이렇게 세련된 도시에서 무슨 희귀한 소리냐고. 정말 희귀한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내가 아는 '강남'은 분명 그랬다. 

황석영 작가. 확실히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굵직하고도 독보적인 작가임에 틀림없다. 어떻게 이 한권의 책에 '강남 형성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사를 관통하며 물 흐르듯 풀어낼 수 있을까? 그 막힘없는 필치에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 이 책을 읽었다. 특히, '아, 소설도 이렇게 쓸 수 있구나.'하며 감탄했던 건, 몇몇을 제외하곤 거의 실명 또는 실제의 사건을 조금의 각색도 없이 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슨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소설체로 쓰고 있으니 무슨 '비사(秘史)'를 조근조근 듣는 것도 같다.  

특히, 첫 장면을 1995년 '삼풍 백화점'이 무너졌을 당시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볼 때, 이는 필시 '강남'에 대한 아니, 우리나라 전반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는 하나의 예시를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물론 당시 삼풍 백화점이 무너져 내렸을 때, 이것이 주는 적지 않은 사회적 파장이 있었다. 안전불감증은 물론이고, '빨리 빨리'가  줬던 후유증,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건이 다른 곳도 아닌 '강남'의 한 복판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과연 현대의 자본주의 세례가 그렇게 달고 좋기만 한 것이냐는 사회적 각성과 비판까지, 실로 우리나라 현대사에 남을만한 사건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사건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묘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어떻게 백주대낮에 하고 많은 땅중에 그 상류층만 다닌다던 백화점이 일순간 무너져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누가 그렇게 될거라고 감히 상상이나 해 봤겠는가? 그때 그 근처에 발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던 일반 시민들조차 하도 어이가 없어 한동안 멍한 상태였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가 될만한 사건은 비록 내 삶과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동공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때로 신기할 때가 있다. 그래서 '국민'이라고 하고 인간이라 했는가 보다.   

어쨌든 그 사건을 가지고 황석영 선생은, 자유당 때부터 있어 온 정치 깡패 김진의 이야기를,  꽃뱀이자 복부인의 박선녀의 이야기를, 기회주의자 심남수의 이야기를, 또한 빠질 수 없는 조폭 홍양태의 이야기를, 그리고 가난한 자를 대변하는 임수정의 이야기를 깍아지른 듯 배치시켜 놓았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대성 백화점'이란 성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사실, 강남의 제2의 새마을 운동(시형주택이 허물어지고 다가구 건물이 들어선 것)과 그로인해 '나가요'업소의 사람들이 방을 점령하고 사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긴 하지만, 선생의 소설이 전혀 근거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웬지 일견 불만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 밝혔던대로, 나의 '강남'은 이런 아름다운 기억이 있는데, 그리고 나와 비슷하게 그곳을 기억할 사람도 있을텐데, 작품은 너무 거시적이고 어두운 강남을 다룬 것은 아닌가 아쉬웠던 것이다. 

그리고 상대적인 것인지, 아니면 실제적인 분석에 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젠 강남이 지난 세대 동안 누려왔던 명성과 또 앞으로 누릴 수혜 때문에 '강남 불패'니 '강남 신화'니 하는 말을 공공연히 수면위로 떠올랐다. 불과 한 세대 동안(적어도 내 기억 속엔 그렇다. 우리집이 이사 오자 곧바로 개발붐이 일어났으니까) 강남은 비약적인 발전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저런 말이 강남을 제2의 고향으로 알고 살아 온 나에겐 그다지 편하게만 들리지 않는다.  

나의 아버지는 그 옛날 왜 이 강남으로 이사 올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아버지도 그 시절 개발붐이 일어날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이사할 생각을 하셨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네가 하도 삭막하여 2,3년 정도만 살다가 나올 생각을 하셨다고도 하니 그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기도 하다. 또한 그렇게도 유행해 마지않았던 '부동산 투기의 시대' 때도, 우린 지난 30여년 동안 마치 남의 나라에서 이사 온 사람처럼 살았다. 글쎄, 우린 점 같은 건 보지 않지만, 아마도 점쟁이들은 우리 가족의 사주를 보면 부동산 운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집 같이 살고 있는 강남 사람들이 더 있지 않을까?  

강남이 다 높은 빌딩에, 주상복합 건물, 으리으리한 빌라만 들어차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이 강남 어디에선가 빈곤층은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이 또 언제 제3차 강남 개발붐이 일어 살던 곳을 떠나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 개발이란 건 이제 없는 사람만이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니다. 평범하게 한달 벌어 한달 먹고 사는 중류층 가정에도 언제 살던 곳을 내주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강북도 강남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고 하며 들썩이는 것 같다. 그렇다면 거기에 원래 살고 있던 주민들은 철거민으로 내려앉을 것이고, 이사를 가야할 것이다. 물론 그들 중엔 이것을 반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살던 곳을 떠난다는 게 어디 쉬운 것인가? 원래 강남에 살던 사람이 개발이 되자 성남 등지로 밀려났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산다고 들었다.  이런 사람들의 상처를 강남 사람들이 알까? 그런 헤아림도 없이 밀어내기만 했다. 강북도 그러지 않겠는가? 또 성남이 개발이 되면 그곳에 사는 사람은 또 밀려나야 한다. 이런 철거민의 악순환의 고리를 해결하지 못한 채 계속 개발만을 외친다면 그것도 민주주의 국가라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이 보호되면서 개발을 된다면 그것 이상의 좋은 개발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강북은 강남을 벤치마킹하지 못해 안달이다. 도대체 강남이 겉으로야 화려하지만 뭘했다는 것인가? 그래서 강북에도 삼풍 백화점이 생기고 그런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어딨겠는가? 강북은 강남과는 뭔가 달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물질적 개발은 이루었을지 몰라도 정신적인 개발은 이루지 못한다면 그러고 개발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언제부턴가 강남은 내게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을 제외하고 그다지 매력적인 곳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내가 이 작품에서 위로를 받았던 건 끝에 다뤄졌던 임수정의 부분이다. 부자라고 해서 오래 잘 사는 것이 아니며, 가난하다고 해서 언제나 절망 속에 사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춰 주신다. 마지막 생존자로 임수정이 구출되고 이야기가 마무리 되고 있다.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탐욕하지만 않는다면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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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0-07-29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문장의 후반부가 굉장히 인상깊은 리뷰군요.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되돌아 보지요.^^

stella.K 2010-07-30 16:07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야클님도 강남에 꽤 오래 사셨나 봅니다.^^

2010-07-30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30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30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30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31 0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꿈꾸는섬 2010-07-30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남에 오래 사셨군요. 님의 사신 이야기와 책의 이야기가 어우러져 재미난 리뷰가 되었네요. 강북을 강남처럼 만들게 되면 또다시 철거민들의 비애가 시작되겠지요.ㅠ.ㅠ

stella.K 2010-07-31 13:17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전 제발 위에 계신 분들 개발에 대해 다시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ㅜ
 
궁녀 - Shadows in the Palac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감독 : 김미정
주연 : 박진희, 윤세아

원래 공포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본 영화는 그전부터 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물론 개봉 당시 그다지 평이 좋았던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사극의 색다른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정말 못 만들었다면 어떻게 못 만들었는지, 거기에 하나 더 얹어서 '무서워 봤자 얼마나 무섭겠어?' 하는 자만도 섞여 이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원래 영화를 볼 땐 주로 밤 이슥한 시간에 보는 습관이 있는데 무서울 걸 감안해 난 이 영화의 전반부는 방에 불을 켜고 봤다.  그리고 중반부부턴  '뭐 역시 생각보다 안 무섭네.'하며 불을 끄고 봤다. 그것이 오히려 잘못이었다. 이때부터 제대로 무서운 걸 몰랐고, 중간에 불을 다시 켜고 볼까 잠시 망설이기도 했다. 

사실 어찌보면 아주 무서운 것은 아니다. 감독이 인간의 섬짓한 정도의 공포감을 유효적절하게 끌어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괴물이 등장해서 사람을 놀래키는 그런 것은 아니다. 그때 느끼는 공포감은 사실은 더 정확히는 혐오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섬짓함 그 자체란 생각이 든다. 특히, 영화 종반부 죽은 월령이(서영희 분, 이 배우는 처음부터 죽는 것으로 나와서 사람을 제대로 무섭게 만든다) 밤에 대나무에서 스~윽하고 치맛자락을 퍼트리며 바닥으로 사뿐히 내려앉다가 화면이 블랙 아웃이 되는데 가히 압권이란 할만하다.  

이렇게 감독은 요소 요소에 인간의 섬짓함과 배신감, 혐오감을 비교적 세련되게 구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감독이 여자인듯 싶은데, 그만한 연출력이라면 차기작을 기대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화면도 제법 세련되고, 조선후기를 배경으로 한만큼 물건에 대한 고증도 나름 잘했다는 느낌도 든다. 사실 그냥 추리극도 어려운데 역사 추리극은 조금 더 어렵지 않을까? 게다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여름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한을 품은 유령의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복수를 영화적 장치로 잘 활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전에 가끔 경복궁을 가노라면 그것이 오늘 날엔 굉장히 넓은 것 같아도, 그 시대 적지 않은 궁인들이 살았다고 하면 실제로는 그다지 넓었을 것 같지가 않다. 그 시대 궁인들이 지켜야 할 수칙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게다가 궁녀들은 오로지 임금에 매인 몸이고 보면 거기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비리와 추잡한 일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 것들을 추적해서 이렇게 영화를 만든다는 건 나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 영화가 안고 있는 한계는 분명히 있어 보인다. 어떤 이는 연출의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을 차치하고라도, 나는 역시 주제의 한계를 못 벗어나는구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영화는 역시 제목에서 알다시피 여자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그럴까? 남자들은 거의 나오지 않고 나오더라도 조역이나 단역으로 밖엔 나오지 않는다. 알려진 배역이 있다면 이형익 역의 김남진 정도다. 어느 시대 궁녀들의 이야기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여자(궁녀)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서 페미니즘을 표방하지는 않아 보인다. 만일 이 영화가 페미니즘을 표방한(적어도 가미한) 영화가 되려면 어느 특정 신분의 여성들을 보여줌으로 해서 여자의 억압된 현실을 보여주던가, 아니면 진보적 의미에서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해 주던가 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오히려 그것을 전복시킨다고 볼 수가 있다. 영화는 여전히 남아선호 사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여자의 한과 복수는 이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절대운명과 또한 이것을 지키고 또 마침내는 신분의 상승과 정복까지를 바라 보는 여자의 욕망만을 보여주며, 또한 그러는 과정에서의 암투를 보여주는 것이 고작이다. 

왜 소설이고, 영화고 여자는 아들과 엮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까? 모든 여자들이 다 아들을 원하는 것만도 아닌데 말이다. 더구나 보수적인 조선시대를 다뤘던 것만큼 여자는 바른 말을 하면 안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특히 월령의 죽음의 배후를 밝히는 천령(박진희 분)을 보라. 우린 모처럼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새로운 여성상을 보는가 했다. 얼마나 똑똑하고, 용이주도하며,  의분으로 가득찬 인물인가? 천령의 활약상은 정말 볼만했다. 하지만 그 끝은 어떠한가? 궁에서 살아남으려면 봐도 못 본척, 눈을 가리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사실만 혹독하게 깨닫는 것으로 끝난다.  

어디 그뿐인가? 미쳐가는 정렬도 볼만했다. 하지만 남자를 가슴에 품고 기행을 하는 옥진은 과연 순정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더구나 옥진을 고문하는데 바늘로 손톱에 꽂는 장면 보는 것도 괴롭긴 하지만,  어찌보면 감독의 가학적 기호를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마저 들게 만들었다.  게다가 옥진은 금실로 자기 살에 한땀 한땀 연서를 새겨 넣기까지 한다. 도대체 감독은 관객이 느끼는 혐오감의 수위를 어디까지 높여 놓으려고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이 영화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그냥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말그대로 호러 공포 영화로 보면 되는 걸까?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가 함부로 말하고, 넘치는 정열 때문에 행동해서 좋을 것이 없으니 자중자애해라. 뭐 그런 뜻인가? 그러기엔 구태의연하지 않는가?  연출은 21세긴데 이야기의 주제는 19세기다. 세기를 이어줄만한 주제를 발견하기가 애매모호 하다.  단지 부여하자면 '여자의 적은 여자다' 뭐 그런 건가? 난 이런 이분법의 논리 싫은데...  

한마디로 용두사미라고 밖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아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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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7-28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녀 잼나지 않아요? 전 진짜 인상깊게 봤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천령이 임신한거랑,, 이차저차 마지막 부분이 좀 별루였어요.
맥락이 끊겨버린다 해야 할지... 그래도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좋은 영화라는거겠지요.

stella.K 2010-07-28 16:21   좋아요 0 | URL
저도 재밌게 봤어요.
주제가 영 빛을 발하지 못해 아쉬워요.
근데 마고님은 무서운 영화도 좀 보시네요.
못 보는 사람은 일체 못 보든데...^^

후애(厚愛) 2010-07-29 0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년전에 <궁녀> DVD로 구매해 놓고 무서워서 못 보고 있다가 조카들 보라고 보내 주었는데 조카들도 무서워서 아직까지 못 보고 있다고 합니다. ㅎㅎ


stella.K 2010-07-29 11:17   좋아요 0 | URL
여름에는 이런 영화 한번쯤 봐줘야 해요.
그래야 형제우의도 더욱 돈독해진답니다.
무서워서 착달라붙어 볼테니까요.ㅋㅋ

꿈꾸는섬 2010-07-30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TV에서 봤어요. 한밤중에...무서웠지만 볼만한 영화였어요. 중간중간 광고가 너무 많아 산만했지만 말이에요.ㅎㅎ

stella.K 2010-07-31 13:18   좋아요 0 | URL
헉, 광고요? 유선방송이었나 봅니다.
짜증 지대로셨겠습니다.쩝
 
박범신이 읽는 젊은 작가들
박범신 엮음 / 문학동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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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박범신이란 작가가 나를 사로잡고 있다.  <은교>로부터 시작된 그의 책과의 인연은 이제 3권째를 읽고 있다. 물론 생각 같아서는 그의 일련의 작품집을 독파해 보고 싶긴한데, 가늘게 오래 갈수는 있어도, 짧고 굵게는 못하는 성격적 단점을 가졌기에 아무래도 그의 책은 틈나는대로 오래도록 읽게 될 것 같다.   

사실 이 책은 박범신 작가가 썼다고 볼 수는 없다. 그저 200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한 '금요일의 문학이야기'에서 박범신 작가는 사회를 맡고, 9주 동안 우리나라의 젊은 작가 12명과 독자와의 대담을 엮은 책이다.   

내가 이 책을 뒤늦게 나마 읽을 생각을 했던, 박범신이라는 '브랜드 네임(?)' 때문이기도 하지만, 얼마 전, 모출판사에서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읽는데 실패한 탓에도 있다. 어쩌면 그리도 안 읽혀지던지...! 그런데 그것을 예전엔 작가 탓으로 돌리거나, 나와는 안 맞는 책이라고 덮어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웬지모를 위기의식 같은 게 느껴진 것이다. 이를테면 아, 나도 이제 정말 기성세대에 편입되는 걸까? 하는,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자괴감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그나마 조금 위로가 됐던 건, 그 상의 심사를 맡았던 누구라면 알만한 대작가께서도 요즘 젊은 작가의 작품을 읽어내기가 힘들었다는 말씀을 남기셨단다.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내가 오히려 위로 받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비슷한 말을 하신 분이 또 있으니 그분은 바로, 박범신 작가다. 박범신 작가 역시 앞서 말한 그분과 같은 세대를 사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로선 두 번 위로를 받는 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러면서 이 책을 읽으면 요즘 작가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읽었다. 

읽고나서의 느낌을 얘기하자면, 초대된 12명의 작가들의 하나 같은 공통점은, 1명을 제외하고 모두 70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그나마 가장 마지막에 소개된 박성원이란 작가는 69년 생으로 70년대 생에 가깝다고나 할까?)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우선, 새마을 세대고 그래서일까? 소위 말하는 크게 '있는 집 자식'들은 아니어도 생활 하는데 크게 불편함이 없는 가정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이다. 그러니 '절대 가난'을 체험해 보지 않았고, 책도 원하느만큼 읽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문학을 하게된 동기는 저마다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하나 같이 안정된 분위기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자족'하는 분위기에서 글을 쓴다고나 할까?  

사실 우리나라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이 책의 어느 작가의 말처럼 다소의 불편을 감수하며 글 쓰는데만 집중하면 크게 불편할 것도 없다고 한다.  그러니 나는 왜 작가가 됐을까? 앞으로 글 써서 밥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하는 정체감에서 오는 갈등 같은 것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게 과연 어떤 의밀까?  물론 안정적이고, 한번 정한 길을 흔들림 없이 갈 수 있다는 것도 되겠지만, 결핍을 모르고, 갈등하지 않으며,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세계가 전부인 양 살아 간다는 것도 되지 않는가? 또 그런 생각 속에 사는 건 금방 권태로워지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내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거의 읽어낼 수 없었던 건, 내가 아는 작가들은 자기 체험이나 현실사회와 나를 연결시켜 글을 썼지만(대표적으로 참여문학), 젊은 작가들은  다분히 관념적이고 자기 상상에 매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관념과 상상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코드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기존의 기성 작가는 피 같은 글을 썼지만, 상상력이 부재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한때 나는 우리나라 작가들이 왜 이리도 상상력이 없냐고 불평한 적도 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나는 그들의 코드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기성 작가들은 나는 이런 삶을 살았다고 독자들에게 펼쳐 보이고 설득하려고 한다면, 요즘의 작가들은 새로움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독자더러 "따라 올 테면 따라와 봐." 하며 다소 거만하면서도 유혹의 손짓을 한다. 물론 그것에 동조하고 기꺼이 따라가 주는 독자도 있겠지만, 나는 도무지 그들의 불친절함이 마뜩치 않다. 

아쉽게도 난, 이 책에 등장하는 작가의 책중 유일하게 읽은 작가는 심윤경의 <달의 제단>이었다. 다른 작가와 그들의 작품은 읽어보지 못했고, 읽을 시간도 없으며, 앞으로도 읽을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심윤경의 <달의 제단>은 나 역시도 약간은 아쉽기도 했지만, 소재주의라고 비판을 받았다는 건 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 문학은 한동안 사회를 비판하느라 주제는 있으나 소재는 거의 전무하지 않았나? 그래서 문학의 사대주의에 빠졌던 것도 사실이다. 모르긴 해도 몇몇 작가들을 빼놓고 자기 문학에서 사회를 비판하는 주제의 소설을 쓰는 작가는 이제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재주의로 가야하지 않을까? 일본이나 미국 같은 나라는 얼마나 다양한 소재를 가지고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많은가? 하긴, 그맘도 이 책은 4년 전의 책이다. 이젠 소재주의를 비판할 사람도 없을 것 같다. 소재주의 비판한다면 그건 게으름을 은폐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만큼 세월이 흘렀으니 이 책에 등장하는 작가들은 이제 30대 후반에서 40을 갓넘을 작가들이 되었다. 그들은 또 요즘 젊은 작가들을 뭐라고 얘기할까?         

이들 중엔 실제로 모출판사나, 신문사에서 주는 일명 '젊은 작가상'을 수상한 작가들도 다수 있었던 것으로 안다. 갑자기 그들이 부러워졌다. 그것은 그야말로 젊은 작가에게만 수여하는 상이다. 우리나라에 기라성 같은 영화상에서 '신인상'은 아무나 받을 수 없는 상처럼 그 상도 그런 것이다. 그러니 늦게 데뷔한 작가가 있다면 그런 상을 받아 보기야 하겠는가? 하기야, 엊그제 '무릎팍도사'에 나왔던 배우 김남길은 데뷔 7년차에 백상 예술상 '신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나이의 많고 적음, 활동의 연수와 상관없이 영화의 '신인상'에 해당하는 '젊은 작가상'도 소위 말하는 '유망주'에게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으니 또 하나 드는 생각은, 고백하건데 내가 20대 때, 나는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노년을 다루지만 당시는 중년을 다룬 작품이 많았다. 그런데 그의 작품이 이제야 이해가 가고, 정말 좋은 작품이란 생각을 새록새록 하는 것이다. 하긴, 20대 때 중년을 어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나에게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건 꼭 그런 느낌이다. 분명 나도 젊은 날을 살아왔는데도 말이다. 문학은 그렇게 인간의 삶과 함께 발효의 과정을 거치며, 10년 20년 후에도 말할 수 있는 가치있는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과연 이들의 작품도 그럴 수 있을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이 책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해당 작가의 작품을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는 단점을 가졌다. 그러나 또 달리 말하면 그래서도 다이제스트로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거기엔 사회를 맡은 박범신 작가의 유려한 말솜씨가 한몫했다고 할 수 있는데, 어느 대담 프로그램이고 사회자는 딱 물어볼 것만을 물어봐야 한다는 고정관념 같은 것이 있는데, 선생은 그런 것을 깨고 특별히 사회 본다는 느낌없이 자연스럽게 그 시간을 이끌어 갔다. 아마 모르긴 해도 초대 작가들은 편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언젠가 박범신 작가는 그런 얘기를 했다. 자기 안에는 늙지 않은 짐승이 살고 있다고. 상당히 인상적인 말이라 한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바라기는 여기 등장한 12명의 작가도 자기안에 그런 짐승 한마리씩 키웠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여러 분야에서 총체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문학계만큼은 늙지 않고, 마르지 않는 샘으로 남아줬으면 좋겠다.  

또한 정말 바라기는, 이들이 문학의 중흥의 주역이 되기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 작가는 언제까지 가난한 직업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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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0-07-26 0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러 왔어요~ ㅋㅋㅋ
<캡쳐 이벤트> 끝까지 참여해 주세요~
행복한 한주 되시길 바랍니다.^^

stella.K 2010-07-26 10:45   좋아요 0 | URL
제가 그다지 빠르지가 못해서 될 것 같지는 않겠지만
수시로 가보긴 하겠슴다.^^

gimssim 2010-07-26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소설을 참 많이 읽었어요.
그랬는데 언제부턴가 소설을 읽지 않게 되었는데 저도 stella09님이 말씀하신 그런 이유인 것 같아요.
박범신은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데 재미있게 읽혀요.
옛날에는 여성취향의 연애소설을 많이 쓰셨는데 나이가 들면서 더 성공한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stella.K 2010-07-26 10:4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나이 먹어서 성공하는 작가가 참 보기 좋더라구요.^^

hnine 2010-07-26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의 목차를 살펴보니 과연 요즘 소위 우리 나라의 잘 나가는 젊은 작가들이네요.
어느 분야에서 웬만큼 탄탄한 기반을 이루었다는 것이 그 분야 새로운 경향에 대해 무감해지게 하는 원인이 되지 않으려면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한 본인의 노력도 필요하고 겸허한 마음 자세도 필요하고 그럴 것 같아요.

stella.K 2010-07-26 10:44   좋아요 0 | URL
이들은 나름 치열하게 노력할 거예요.
똑똑한 사람들이니까. 단지 저와 이들의 갭이 갈수록 날거라는 것이
왠지 모르게 서글퍼져요. 어쩔 수 없겠지만요.ㅠ

Seong 2010-07-26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의미 없는 존재는 없듯이, 다들 의미 있는 작가들일 것입니다. 다만, 그 글을 읽는 내가 그의 예술을 지지하느냐, 지지하지 않느냐로 갈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
요즘 고민하는 것과 stella09 님의 글에 대한 생각이 섞이니 댓글이 걷잡을 수 없어지네요... ㅠㅠ

stella.K 2010-07-26 12:09   좋아요 0 | URL
그럴 땐 조용히 추천만 하는 거예요.ㅋㅋ

순오기 2010-07-26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범신 책을 읽지 않아서 조용히 추천만 하고 가요.
혹시 '메롱'에 삐지신 거 아니죠?^^

stella.K 2010-07-26 13:49   좋아요 0 | URL
설마요. 귀여우셨는 걸요.ㅎㅎ
추천 감사합니다. 순오기님.^^

마녀고양이 2010-07-26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세여.. 그런데 저 역시 국내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서
이 책은 무리가 있겠어요.. ㅠㅠ

stella.K 2010-07-26 16:14   좋아요 0 | URL
저 역시 그랬어요. 하지만 밝혔다시피 저는 박범신 작가가 좋아서
읽은 거랍니다.흐흐

2010-07-26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6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0-07-26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공감합니다. 요새 재기발랄한 통통 튀는 작가. 김애란 정도를 읽어 봤나 봐요. 저는 크게 와닿지 않더라구요. 그리고 박완서 작가도 너도 최근에 완전 몰입했었거든요. 정말 늙어 간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가난한 작가. 저도 제발 부자 작가들좀 많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저번에 윤대녕이 인터뷰한 거 보고 깜짝 놀랐어요. 몇 년을 소설을 위해 수입없이 살다 사만 부 정도 팔아 사천 만원 번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새는 사만 부도 많이 팔리는 거라고 하고...가슴이 아프더라구요. 너무 척박한 것 같아요.

stella.K 2010-07-27 10:21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왜 작가들 중엔 럭셔리한 사람이 나오면 안 되느거냐구요.
그런 사람 혹 있으면 안 좋게 보잖아요. 구라같다고.
작가는 좀비 같은데가 있어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암튼 우리나라 문예정책이 좀 달라졌으면 좋겠어요.ㅠㅠ
 
나는 왜 저항하는가 - 국가에 의한, 국가를 위한, 국가의 정치를 거부하라
세스 토보크먼 지음, 김한청 옮김 / 다른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우선, 그림이 투박하면서도 강렬하다.  몇몇은 컬러로 그린 그림도 있는데 그건 꼭 이중섭의 그림을  보는 것도 같고, 토속적인 아프리카 어느 화가의 그림을 보는 것도 같다. 그처럼 이미지는 강하며 선동적인 느낌도 준다. 또한 판화로 찍은 듯 흑백대비의 그림은 여러색을 사용하기 보다 흑과 백이란 대비적 색깔이 이토록이나 강렬한 것이구나 새삼 느끼게도 된다.  

저자 세스 토보크먼은 급진적인 정치 예술가라고 한다. 그는 만화로 세상의 은폐된 진실, 정치적 야합을 고발하는 작가라고 한다.  

이 책을 보면, 가진 자의 횡포와 힘없는 자의 억압을 그림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내가 예전에 읽었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생각 나게도 했다.  이 책 역시 있는 자들의 횡포에 대해 꽤나 논리적이면서도 고발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두 책 모두 보고 있으면 나는 정말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 날 일어나고 있는 수 많은 전쟁과 인종폭동, 노동력 착취, 심지어 자연재해의 문제 이면에는 있는 자들의 횡포와 교묘한 술수가 작용을 한다.  이것은 확실히 상업주의와 물질만능주의의 폐혜다. 이 문제는 나라의 지도자와 기업인들이 조금만 생각을 달리해도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문제를 직시하지 않으며 해결하려고 들지도 않는다. 설혹 해결할 수 있다고 해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나설수도 있고, 나서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들이 마음을 고쳐 먹어주길 기대하겠는가? 우리에게 힘이 없을까? 우린 지레 똑똑한 자, 있는 자를 이겨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줄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 전쟁의 문제를, 인권의 문제를, 노동의 문제를 저들의 손에 맡겨둘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의 피해 지역은 아프리카나 남미 같은 제3 세계 지역이다. 그 나라의 사람들, 특히 어린 아이나 힘없는 여성들이 어떤 삶을 살지는 보지 않는 이상 상상을 불허한다.   

내가 이 책에서 다소 충격적으로 본 것은 '나체의 힘'이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가장 무시무시한 저주는, 여자들이 자신들을 괴롭히는 남자에게 성기를 내보는 것이라고 한다. 여자의 나체를 본 남자는 성불구가 되거나 미치거나 죽게 된다고 한다. 나이지리아에 석유붐이 일어났을 때 농촌에 송유관이 들어오고 기름 유출 사고로 물고기가 죽고, 식수가 말랐으며,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의 수가 세 배 이상 급증하자, 니제르 삼각주의 여인들은 저주의 상징인 나체 시위를 했다고 한다. 저항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물론 이후 그쪽 지역의 삶이 나아졌는지에 대해선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것을 개기로 더 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고, 이라크 전쟁이 임박했을 때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아메리카 대륙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옷을 벗고 평화 심벌을 만들어 저항했다고 한다. (76~79p) 물론 그렇다고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저항이 무의미했다고도 볼 수 있을까? 훗날 역사적으로 볼 때 그들의 저항 운동이 필요없었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라크 전쟁의 폐해를 세계가 고스란히 뒤집어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시간을 돌이켜 볼 때 댐에 둑이 무너진다고 외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것은 제2의 이라크 전쟁을 막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를 작고 나약하다고 생각하는 건 어느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눈을 크게 뜨고 내 이웃의 아픔과 외침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당장은 내게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지레 속단하지 마라. 그것은 결국 우리의 후세가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짐을 대신 짊어지는 것이며,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의미를 확대 재생산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나 개인적으론,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글쎄, 만화로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다 보니 약간은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우리가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를 보여주기 보단, 저자의 캐릭터에 맞게 은폐된 진실이나 정재계 인물들의 정치적 야합을 알라는데만 촛점을 맞추지 않았나 싶다.  그런 아쉬움만 걷어낸다면 이 책은 편하고 안락한 것에만 길들여지길 원하는 보통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기에 나름 좋은 책이라고 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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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7-26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스텔라님.. 정말 다양한 책들을 읽으시네요.
새삼 감탄감탄 중~ 좋은 리뷰입니다.

stella.K 2010-07-26 16:13   좋아요 0 | URL
아유, 뭘요. 그나마 만화여서 보기가 좋았답니다.
마고님도 기회되시면 한번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