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에클레시아 - 6평 카페의 기적 같은 이야기
양광모 지음 / 선율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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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사역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냥 교회 예배만 왔다 갔다 하니 무슨 사역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카페 목회가 있다는 것도 이 책을 읽었을 때야 알게 되었다. 하긴 예배를 꼭 교회에서만 드리라는 법 있나? 벌써 오래 전부터 서울의 알만한 교회는 예배당이 아닌 학교 강당을 이용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다. 교회만 계시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도 계시고, 병원, 교도소, 양로원 어디에나 계신다. 그러니 카페라고 계시지 않을 리 없다. 결국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한 사람들의 모임이니 장소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 그 옛날 그리스도인이 핍박을 받을 때 동굴에서도 예배를 드렸다. 더구나 북한의 지하 교회 사람들은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예배를 드리는지 알 수 없다. 무엇보다 21세기다. 최첨단 4차 산업을 부르짖을 때 교회는 여전히 20세기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런데 난 왜 이 책에서 사역의 다양성과 희망을 보기 보단 왠지 모를 우울함과 답답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물론 처음에는 어떤 희망을 가지고 읽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기존의 것과 무엇이 다른지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쎄, 내가 현재 너무 건강하고 스마트한 교회를 다녀서일까? 아니면 오랫동안 예배만 드리는 선데이크리스챤으로 전락한 탓일까? 아니면 욕하면서 닮는다고 나도 한때는 모든 교회의 칭송을 받는 교회를 다녔지만(현재도 다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응하기는 정말 쉽지 않아 울기도 많이 울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그러다 어느새 동화되고 닮은 것인가? 그러나 나는 평신도로서 그렇게 상처 받고, 울면서 교회를 다닐 필요가 있을까에 대해선 한 번도 회의를 해 본적은 없다. 싫으면 그 조직에서 나오면 그만인 것이지 교회 자체를 부정하고, 신앙을 배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건 어찌 보면 사람과 사람과의 갈등의 문제였지 조직의 문제는 아니었다.

 

오늘 날 대형 교회가 비판을 받고 있다. 하도 비판을 받으니까 이것도 하나의 트렌드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분명 대형 교회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소형 교회는 문제가 없는가?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 모이는 곳은 어디나 문제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다. 대형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소형 교회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확신하는가? 그렇게 말하는 건 말의 오판이며 논리의 비약이다. 하나님이 언제 그에게 이것을 판단하고 비판하라고 명령하셨는가? 요는 그도 교회를 다닐진대 비판하는 데는 빠르고 기도하는 데는 느리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그것부터 점검해 봐야할 일은 아닐까?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무슨 대형 교회를 옹호한다고 오해할까봐 그것도 조심스럽긴 하다. 요는 그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면 그런 과격하고도 이분법적인 비판은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토기장이의 비유에 대해서 나온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빚을 때 어떤 그릇은 귀히 쓰일 그릇으로, 어떤 건 천히 쓰일 그릇으로 빚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토기장이가 그 용도에 맞게 빚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형 교회의 비판이 어디에서 나왔겠느냐는 것이다. 상대적인 열등감을 느끼는 소형 교회 목회자들에게서 나왔을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대형 교회 자체의 내분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또한 동시에 사이비 종교의 음모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은 영적으로 봤을 때 분열케 하는 사탄 마귀의 짓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대형교회의 부정과 부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모범적인 교회가 어느 날 사회적 이슈가 되고 비판을 받을 때 평신도로서 그것을 감내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난 그런 교회를 지금도 다니고 있다. 나라고 그런 교회 다니고 싶겠나? 그런데 나도 잘 모르겠다. 왜 다니고 있는지. 늘 다니던 교회를 다니는 관성 때문이라고 말 한다면 섭섭한 말이 될 것이다. 그 교회 말고도 좋은 교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중 하나를 선택에 옮겨가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됐다. 다른 건 고사하고 은혜 받은 교회는 함부로 못 떠나겠는 것이다. 선대 목사님이 한때 기독교계 명망 있는 지도자였고, 그분의 기독교계에 미친 설교와 공로라는 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런 교회에서 조차 상처를 받았다. 상처만 받았다고 한다면 못 다닐 교회가 내가 지금 현재 다니는 교회다. 분명 은혜를 받았기에 나는 교회가 공격을 받고 비판을 받을 때 같이 비판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었다. 이건 또 신비라고 밖에는 얘기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왜 이런 말을 구구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교회 사역자들은 평신도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목회자들은 교회는 하나님이 지으시고 있게 하셨다고 교인들에게 철석 같이 가르쳐 놓고 그들은 정작 교회에 있지 않은 것 같다. 평신도는 교회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교회와 함께 순교할 마음이 있는데 과연 교회 사역자들은 그럴 마음이 있는지 묻고 싶기는 하다. 새로운 목회를 해 보겠다고 잘 나가던 교회를 사임을 했다. 거기에 나름의 이유와 기도로 씨름한 나날과 명분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떠나면서 지금까지 알아왔고 격려해줬고 격려 받았던 교인들을 두고 발길이 떨어지던가? 잘 나가는 교회 목사들은 떠나는 뒷모습도 멋이 있더라. 그리고 당장 떠나지 않더라도 교회 안에 서서 각 지역을 거점 삼아 2년마다 한 번씩 뺑이 돌리더라. 그러니 목사와 평신도 간에 무슨 정을 쌓겠는가? 저 목사는 길어야 2년 후면 헤어질 사람. 물론 기도 부탁 정도는 하고 그러면서 사람을 파악하는 정도지 오래 두고 볼 사이는 못 되더라.

 

남자들은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고, 어디나 그렇지만 교회도 남성 목회자가 다수를 이루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비해 평신도는 여성이 많다. 언제나 그렇지만 여성은 대화를 원하는데 남자는 지시하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지 듣는 귀는 발달되지 못했다. 내가 이 책이 가면 갈수록 별로라고 생각했던 건 ‘6평 카페의 기적 같은 이야기라고 했으니 생생히 살아있는 그야말로 활어회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섬기던 교회에서도 내내 가르쳤을 목회의 신학적 원리를 이 책에서조차도 반복하고 있더란 것이다. 그리고 저자 자신의 이야기는 없고, 교회에서 세례 받을 때 간증문처럼 그 카페를 다니면서 은혜 받은 성도들의 이야기가 주종을 이루었다. 그게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귀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기존의 교회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뭔가 형식과 틀을 과감하게 깰 필요도 있을 것 같은데 교회의 틀을 그대로 가지고 소형화시킨 건 아닌지.

 

나름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 목회자들은 제사장의 옷을 벗고 광야에서 외치는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즉 말씀만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성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중간자적 목회자의 탄생을 기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그것에 근접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글속엔 아직도 뭔가 자신이 없던 걸까? 뭔가 끊임없이 자신의 목회 형태를 설명하려고 하고, 합리화하려고 하는 게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마치 기업을 세일즈 하는 것처럼. 하긴 이제 5년 된 사역이라고 하던데 증명 보다는 설명이 더 많은 시기 아닌가? 한 사역이 뭔가를 증명하려면 적어도 1015년은 두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카페 목회를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우려하는 것도 없지 않다. 결국 거기서 은혜 받고 교인이 된 사람들이 훗날 어떻게 될 건지. 물론 그것까지 신경 쓸 건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성 교회에 대한 편견만 높아져 결국 진입하지 못하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눌러 앉을 건지.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교회를 허락하신 이유와 목적이 또 다른 측면해서 오염되고 훼손되는 건 아닌지. 분명 기성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교회가 새로워지려는 노력은 명백히 필요한 거지만, 교회는 기성 교회가 아니면 배울 수 없고 알 수 없는 신앙의 깊이와 넓이가 있다.

 

책을 보면 교회가 너무 많은 프로그램을 한다고 지적하는 대목이 나온다. 난 이게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 한국 초대교회 시절 사경회를 하면 거의 하루 종일 했다고 한다. 얼마나 말씀 듣는 게 좋으면. 게다가 우리나라 교육열 끝내주지 않는가? 물론 저자가 지적이 처음도 아니고 나름 타당성은 있다. 하지만 그게 본질적인 것인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는 있다. 평신도들은 옛날의 평신도들이 아니다. 옛날엔 사회가 단순하지만 지금은 복잡하다. 그러므로 뭐든 취사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너무 많은 프로그램을 한다고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제는 뭐든 편중이고 편식이 문제 아닌가?

 

이런 식으로 해서 마치 기성 교회는 없어져야 할 암적인 존재로 몰아가는 건 아닌지? 그리고 그 주범(?)이 한때 그런 교회에서 일했던 사람이라면 그 민망함은 또 어쩔 것인가? 그건 마치 괜찮은 집을 지어놓고 게스트 하우스나 마당에 텐트쳐 놓고 지내는 집주인은 아닌지.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다 못 짓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지었다. 모름지기 왕이 지었으니 얼마나 화려했겠는가? 하지만 우린 솔로몬이 화려한 성전을 지었다는 것뿐 그 성전이 어떻게 운영이 되었는지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오늘 날 교회가 너무 화려하다고 사회에서 뭐라고 하면 그것에 동조한다. 교회는 화려할 수도 있고 아담할 수도 있다. 그게 뭐가 문제가 되는 것일까?

 

교회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과 성도를 위한 공간이다. 거기에 존재하는 목회자와 주요 임직자들은 하나님의 종이며 관리자일 뿐이다. 오늘 날 교회가 목회자의 권한이 큰 건 유감이긴 하다. 아마도 그건 우리나라의 가부장 문화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또 그것이 아니면 성도들이 목사를 쥐고 흔든다. 언제나 그렇듯 조화는 없고 극과 극만 있다. 중요한 건 교회에 깃든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기존 교회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개척을 해야 하는 것인지는 분명 그 목회자의 몫일 것이다.

 

교회도 조직이고 보면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조직이 섞지 않으려면 자정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 자정 능력이 그 조직의 몇 퍼센트면 가능하겠는가? 5 퍼센트다. 이건 그냥 상징적인 숫자일 뿐 진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근거는 있다. 성경을 보면 의인 다섯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을 했다. 오늘 날 교회가 그토록이나 문제가 많다면 벌써 없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줄어들지언정 존재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왜 그럴까? 한 가지는 얘기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여러 방면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치유하는 교회를 자처했던 모 교회는 정말 유독 새신자 보다는 기성 신자들이 많았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은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치유 받고 섬기던 교회로 돌아가라고 했다. 모순을 지적할지 모르지만 그 교회도 나름 큰 교회다. 어느 교회는 새신자만 등록 가능한 교회도 있다. 그 교회도 나름 큰 교회다.

내가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어떤 형태의 목회가 됐던 사명을 받아서 하는 목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맡겨 주셨기 때문에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기존 교회에 문제가 너무 많아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새로운 형태의 목회를 한다. 물론 세상적으론 틀리지 않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하나님 편해서 그게 과연 최선인지는 따져 봐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하는 것이 나중엔 차선의 것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

 

나는 저자의 목회를 비판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단지 책을 읽어 보았더니 평신도에 대해 잘 모르기는 기성 교회 목회자와 무엇이 다른지 몰라서 나의 평소 생각을 밝히는 것뿐이다. 새로운 형태의 목회를 하던 기성 교회 목회를 하든 크게 봤을 때 평신도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단지 선택만 할 뿐이다. 결국 목회자란 그가 옳은 선택,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계속 도전을 주고 협력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직도 목회자는 평신도가 자신의 사역에 협력해 주길 바라고 있다. 그게 잘못 됐다기 보다 선후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아무튼 저자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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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2-08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독교인이 아니어서 잘 모르겠지만 규모가 큰 교회보다 작은 교회가 문제점이 더 많을 듯합니다. 한 사람의 권력이 크게 작용하는 곳도 역시 작은 교회일 듯해요.
정들만 하면 2년 후 떠나는 목사 - 이것은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하는 걸 피하려는 목적도 있는 건가요?

stella.K 2018-02-08 13:29   좋아요 0 | URL
캬~! 역시 예리하시군요.
그런데 알려지기는 큰 교회가 문제가 많은 것처럼
그렇게 보도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작은 교회라고 문제가 없겠냐는 거죠.
마치 작은 교회는 동정을 받아야할 거처럼 되고.
물론 작은 교회에서 힘들 게 목회하시는 분들 계시죠.
그니까 제 말은 교회뿐 아니라 무엇을 보더라도
장단점을 보고, 긴 안목에서 보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완벽한 조직이나 단체는 없으니까요.

그건 맞아요. 그런데 그것도 장단점은 있는 거죠.
같은 사람 2, 3년 봐주기는 어려울 수도 있거든요.
저도 어떤 일을 하건 그 조직에서 2, 3년 이상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제가 워낙에 그런 체질이 못 되서
상처 받는 일도 많답니다.ㅋㅋ

2018-02-08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8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련꽃 필 무렵 당신을 보내고
이춘기 지음, 이복규 엮음 / 학지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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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한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이 일기의 주인인 이춘기 옹은 아내가 암 발병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전엔 왜 일기를 안 썼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래도 그가 왜 그때를 기점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지 알 것도 같다. 물론 아내의 발병 사실에 만감이 교차했겠지만 그렇다고 속절없이 무너질 수마는 없지 않았을까? 스스로 마음을 다잡기 위해 그는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읽는 나는 왜 이리도 마음이 먹먹하던지. 뭔가 동화된 느낌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이 책을 20대 초반에 읽었더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까운 누구도 불치의 병으로 죽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때까지 불행은 다 나와 한 다리 건너의 사람들의 것인 줄 알았다.

 

당시는 1960년대가 막 시작됐을 때다. 나의 아버지 돌아가셨던 90년대도 암은 어려웠는데 그 시절은 더 암담하지 않았을까? 시간차만 있다뿐이지 그나 우리 집이나 하루 세끼 밥 먹고 돈 버느라 일했고, 밤이면 자는 똑같은 일상을 살았을 텐데 이렇게 누구는 병이 들고, 누구는 그 병든 가족을 간호해야하며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는 게 참 아득하다. 그때부터 시작된 이춘기 옹의 일기는 참 담담하고 담백하다.

 

내가 남의 일기를 이렇게 문학으로 향유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물론 최근 카프카의 일기를 읽어 본 적이 있다. 남의 일기를 읽는 것만큼 관음의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하는 게 어디 그리 흔한가? 그런 기대를 가지고 카프카의 일기를 읽기 시작하다가 그만 학을 떼었다. 어찌나 어렵고 난해하던지. 카프카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있으면 모를까 나 같이 지식이 일천한 사람은 멋모르고 펼쳐들다 낭패 보기 쉽다. (그건 또 어쩌면 시간에 쫓겨서 읽느라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기억 속엔 사춘기 때 읽었던 <안네의 일기>를 읽었던 감동은 여전하다. 그렇게 엄혹하고 참혹한 세상에서도 그녀의 일기는 얼마나 순수했는지.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던 것 같다. 그나마 최근 들어 유명 작가의 일기가 나오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한동안 일기를 문학의 범주에 넣어 주지도 않았(던 것 같). 이 책 말미에도 이춘기 옹의 일기를 엮은 이복규 교수가 그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 책은 우리 학계에서 비교적 열세에 있는 일기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일기인 만큼 이춘기 옹의 개인 일상사를 다루고 있지만 아내의 간호기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물가, 사람 사는 표정, 역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한 이름 없는 사람으로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다루고 있다.

 

솔직히 우리나라처럼 사대주의가 강한 나라가 또 있을까? 같은 말을 하더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말의 값어치가 달라진다. 어느 분야든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특히 역사를 보는 시작은 더하다. 전문가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것만을 들으려고 하고 믿으려고 한다. 그래서 너무 한정적이다. 예를 들면, 이 책 읽다보면 1997625일에 이춘기 옹이 쓴 6.25 회상 부분이 나온다. 한 개인으로 그날이 어땠는지를 짧지만 강렬하게 쓰고 있다. 벌써 29년이 지난 시점인데도. 거기에 그런 말이 나온다.

......아이들이 개 두 마리하고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난데없는 총성이 나더니 마당의 개 두 마리가 그만 피를 토하고 죽어 나자빠지고, 아이들은 마당에 그대로 쓰러졌다(354p).

얼마나 놀랍고 사실적인가? 그 일이 일어났던 똑같은 시간에 어떤 사람은 또 어떤 것을 보고 어떻게 쓸지 새삼 궁금하기도 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을 인지하는 것이야 똑같겠지만 보고 느끼는 것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린 사실이란 관점에서 이것을 좀 더 넓게 수용해야할 필요가 있는데 개인이야 어떻든 오직 교과서에만 의존하려고 하니 우린 역사를 너무 소극적이고 소홀하게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삼 개인의 6.25 회상기란 책이 있으면 한 권 사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시대를 표현한다면 나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다음 날을 회상하고 싶다. 그날 내가 일기를 썼는지도 기억에 없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하지만 그 시절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열심히 일기를 썼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이 기억해 줄만한 건 이춘기 옹이 그날의 시세를 일기에 자주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화폐개혁이 있기 전이라 원 대산 환으로 계산을 했다. 그리고 62년인가? 그때 화폐 개혁이 되면서 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게 좀 이해가 갔다. 당시론 복숭아를 재배해 그것으로 살림을 꾸리곤 했는데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을 테니 돈의 들고 남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도 자수성가한 자린고비 스타일이라 병으로 사경을 헤매시기 전까지 조그만 수첩에 돈의 지출내역을 꼬박꼬박 적으셨던 기억이 난다. 그걸 지금도 가지고 있었다면 좋은 기록이 되지 않았을까? 일기였다면 내가 어떻게든 보관했었을 텐데 저런 건 써서 뭐하나 구두쇠니까 저러시겠지 하며 관심도 갖지 않은 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난 중학교 들어가면서 일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전까지야 방학숙제로 썼으니 그걸 일기라고 할 수도 없고 그걸 쓴 노트는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확실히 중학교는 초등학교완 달라도 많이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일기 쓰기가 성인이 되고부터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내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기를 쓰지 않았다. 그런 사람을 쫓은 건 아니지만 어떤 신념 비슷하게 안 쓰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죽을 때 가급적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일기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일기를 쓰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이 이 세상을 살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이 친구는 그 반대였던 것이다. 그래도 너만의 고백이나 정리가 필요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그러자고 살아 있는 사람에게 짐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그 일기를 태워줄 사람이 필요한데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일견 타당한 것도 같았다. 아니 오히려 멋있게 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쓴 일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난 이때부터 일기에 대한 애증이 시작이 된 같다. 정말 나도 그 친구처럼 죽을 때 될 수 있으면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과 기록의 의무와 흔적이 서로 충돌했다. 그런 와중에 인터넷에선 블로그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걸 쓰니 굳이 일기라고 따로 쓰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의 엮은이도 노트든, 스마트폰이든 블로그든 어디든 열심히 기록하라고 권한다. 그런데 일기를 블로그에다 쓰는 건 간단치가 않다. 그건 낙서나 잡담의 의도가 많고,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몇 번의 정서가 필요하다. 또 아니 할 말로 함부로 대놓고 누구 욕도 못하겠다(물론 비밀글로 쓸 수도 있지만 블로그의 기본은 글을 공개한다는 것에 있다). 책엔 이 옹이 재혼녀와 의붓딸에 대한 미움도 가감 없이 쓰곤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고전적 일기 쓰기는 그것이 가능하다. 누가 문법 틀리고, 철자 틀려도 뭐랄 사람이 없다. 요즘엔 다시 고전적 일기 쓰기를 하고 있는데 블로그에 쓰는 것 보다 훨씬 편한 마음으로 쓸 수 있어 좋다. 하지만 난 엮은이의 말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무엇이 됐든 써라다.

 

사실 일기는 어떠한 비판이나 가치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이 쓴 사람에 대한 예의 같기는 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시대 차와 성의식의 차이로 인한 해석과 가치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 옹이 아내를 잃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도 이해가 갔지만, 이후 재혼과 삼혼을 하는 동안 결혼에 대한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새삼 놀랍기도 하고 좀 아쉽기도 했다. 그것은 그때는 가부장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시대였고, 또 그러니만큼 여성의 지위가 그리 높지 않았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한다. 그는 그저 가정을 건사할 여인이 필요했다. 식모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그래서 결국 재혼녀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나가는데 그가 일기 중 성경 잠언을 인용한 바 있는 이 현숙한 여인이 당시의 남자들에게 어떻게 이해됐을지 알고 새삼 놀라웠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봐줄 필요는 있어 보인다. 그래야 연구 가치가 있는 거니까.

 

하지만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짐, 두 어린 아들에 대한 애틋함, 하다못해 기독교인으로서 너무 바빠 예배를 드리지 못한 생활인으로서의 버거움이 일기에 올올이 드러나 찡했다. 문체가 좋은 글만이 문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진솔한 글을 읽으면 자신이 평범해서 초라하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간의 위대함은 이런 평범함에서 오는 것이다.

 

난 이 책 계기로 엮은이 말대로 우리나라가 개인의 일기를 활발히 연구하는 풍토가 조성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이것조차도 사대주의에 빠져 유명하고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의 일기만을 연구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책은 그야말로 초야에 묻힌 한 노인의 일기고, 기록이며 미시사이기도 하다. 그가 원래 유명해서가 아니라 30년을 일기를 쓰다 보니 유명해졌다. 작지만 한 가지 일을 매일 성실하게 한다는 건 중요하다. 그러므로 일상이 무료하다, 의미가 없다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평범한 사람은 평범함에 묻혀 사는 거지만 그 평범함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걸 이춘기 옹은 몸소 보여줬다.

 

사실 처음엔 책의 두께가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이춘기 옹이 30년간 쓴 것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다. 좀 더 편집을 다양화 하거나 내용이 겹치는 것을 제외하고 그대로를 보여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기엔 이 옹이 유명하지 않아서인지 뭔지 모르게 아쉬웠다. 하지만 하루를 의미 없이 보냈다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그러지 않으려면 관찰하고 일기를 쓰라고. 그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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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2-02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 너머에서도 의미를 찾으시며 읽으시는 것 같아요.
작고 사소한 것 같아도 꾸준히, 성실하게 한다는 것, 중요한데 갈수록 그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지요? 한방에 대박을 터뜨려야 성공한 것으로 보는 사회 풍토가 안타까워요.
저도 6살때 그림일기를 시작으로 꾸준히 써왔는데, 어릴 때 쓴 그 그림일기장을 어머니께서 이사하시면서 다 버리셨다는군요 ㅠㅠ

stella.K 2018-02-03 18:19   좋아요 0 | URL
일본은 그런 풍토가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작고 소소해도 재밌고 즐거우면 기꺼이 읽어 주잖아요.
우리나라는 쓸때없이 대륙적 기질이 있어서일까요?
그냥 그렇게 봐주기로 했습니다.ㅋㅋ

이책 정말 편안하게 읽혀서 좋았어요.
일찍 상처하고 가장으로 참 부단히 노력하며 살았구나
그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아 마땅하고 노년엔 복락을 누려야 하는데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게 참 아쉽더군요.
그런데 우리네 인생이 다 비슷하지 않겠어요?
그냥 위로하고 위로 받으며 살면 좋겠어요.^^

2018-02-03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2-03 18:22   좋아요 1 | URL
아, 그랬나요? 옛날 선비는 그랬군요.
우린 기록을 함부로 다루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이춘기 옹의 일기가 이렇게 나올 것 같으면
더 많은 사람들의 일기가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근데 일기는 잘 쓰고 계십니까?
우리 역사 한번 만들어 보십시다요!ㅋㅋ

2018-02-03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2-03 18:28   좋아요 1 | URL
ㅎㅎ 그건 운이 좋아서 낸거죠.
무엇보다 저 같이 초야에 묻힌 사람의 책이
뭐 그리 대단해서 후속을 내자고 하는 출판사가 있겠습니까?ㅋ

그런 건 고사하고 저도 일기 쓰고 있는데
나중에 저 죽어서라도 책 내자고 하는 출판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ㅎ
님도 건강하시죠? 댓글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2018-02-04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K님, 오늘은 입춘입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올해도 좋은 일들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stella.K 2018-02-05 13:07   좋아요 0 | URL
입춘대길 건양다경. 좋은 말이죠.
서니님도 그리 되시길 빌어드립니다.^^
또 새로운 한 주입니다. 힘차게 시작하시길!

페크pek0501 2018-02-0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뭔가 풀어 내서 속 시원해지는 느낌이 좋아서 일기를 씁니다. 제가 나중에 보려고 기록을 위해 일기를 쓰기도 하지요.
제가 죽은 다음에 글이 흔적으로 남는 건 싫어서 만약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다고 느끼면 가족에게 제가 쓴 모든 것들을 태워 없애 달라는 유언을 할 것 같아요. ㅋ

stella.K 2018-02-06 20:36   좋아요 0 | URL
오, 그러지 마세요.
그리고 가족이 듣지도 않을 거예요.
유산으로 남겨야죠.ㅋㅋ
 

어제 결혼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그런 말을 한다.

인생 살아가는데 딱 두 벌의 옷만 있으면 되겠더라고.

그는 최근 자신의 집을 허물고 다시 지었는데

그러느라 무려 1년 넘게 세간살이를 창고에 두고

전전하며 살았단다.

그렇게 살아보니 자신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쥐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인생 살아가는데 단 두 벌의 옷만 있으면 되겠더란 말이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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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군 2018-01-28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복이랑 일상복
잠옷은...?

stella.K 2018-01-29 14:33   좋아요 0 | URL
ㅎㅎ 두 벌 옷인데 잠옷은 사치 아닐까요?^^

페크pek0501 2018-01-28 2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벌이라면 여름 옷과 겨울 옷일 것 같아요. 봄과 가을엔 겨울 옷을 좀 걷어 입으면 될 테니. ㅋ

집집마다 물건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이사를 하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사를 하게 되면 아무래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공간만 차지하는 것들을 버리게 되니까요. 옷도 입지 않는 걸 버리게 될 테니까요.

딱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저는 무엇을 가질까요?
답 : 카드 한 장

stella.K 2018-01-29 14:39   좋아요 0 | URL
그분은 창고에 물건을 보관하고 계셨다니
모르긴 해도 번갈아 입을 옷을 생각하고 그리 말씀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희도 이사 올 때 물건을 많이 버리고 왔죠.
요즘 사람들 캐리어 두 개만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다는데
여기저기 옮겨 다니고. 나름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카드에 한 가지를 보탠다면 노트북 정도...?!^^

2018-01-31 2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1 1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1 14: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1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블루레이] 대호
박훈정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이 영화는 사실 좀 뻔한 게 그려지는 영화였다.

한때는 명포수였던 천만덕이 왜 포수의 일을 접고 이름 없는 약초꾼으로 살아가는지는 차치하고라도, 그의 아들 석이 천둥벌거숭이처럼 나오는 거 보면 너도 언젠간 개처럼 죽겠구나 싶었다. 천만덕과 대척을 이루는 구경 또한 최후가 어떨지 영화를 보면서 알 것 같았고, 나중엔 엔딩에 이르기도 전에 천만덕이 어떻게 죽을지도 알 것 같았다. 이러면 재미없지 않을까? 그런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뭔가 빤한데도 보게 만들었고 나중에 코끝까지 시큰하게 만들었다.

 

사실 최민식이 주인공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난 이 영화를 언제 볼지 기약이 없었다. 물론 지금도 빨리 본 건 아니지만.핑계지만 이 영화에 영화 찍으러 히말라야까지 다녀왔다던(?) 황정민만 나왔어도 난 더 늦게 봤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니 그 옛날 영화 <취화선>을 비롯한 최민식의 영화 몇 편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최민식은 정말 연기를 잘하는 멋진 배우란 생각이 든다. 영화 중간에 오랜만에 구경(정만식)과 칠구(김상호)와 셋이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결코 좋은 분위기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는 구경이 오래 전에 포수 일을 그만둔 만덕에게 다시 일을 하자고 설득하는 자리다. 하지만 만덕과 구경이 과거에 맺힌 일이 있어 말이 설득하는 자리지 결코 범상치 않은 자리다. 그때 만덕 역의 최민식이 앉아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그야말로 그림이다. , 이 배우는 어쩜 앉아 있는 모습도 그림 같을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사실 최민식의 일련의 영화들을 보면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느낌이다. 웬만해서 MSG를 치지 않는 담백한 연기다. 물론 다소의 익살스러움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늘 카리스마와 남자의 고독을 연기해 왔다. 늘 똑같은 연기라면 질릴 법도 한데 어떤 영화에 그를 갖다 놓아도 그는 그만의 시그니처를 연기한다. 문득 가식 없이 정석대로 노래를 불러 엘리지의 여왕이라 칭송을 받는 트로트 가수 이미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를 일컬어 영화계의 이미자라고 하면 너무 약한 표현일까?

 

영화를 보는데 문득 예전에 본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가 생각이 났다.

당연하다. 두 영화 모두 호랑이가 나온다는 공통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두 영화 모두 만족스럽긴 하다. 하지만 굳이 흠을 잡자면 호랑이를 너무 인간화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나는 가끔 동물을 의인화 시킨 영화, 예를 들면 <주토피아><라따뚜이> 같은 영화가 탐탁치가 않은데 물론 모두 좋은 영화긴 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우린 동물을 너무 많이 길들여 왔거나 죽여 왔다. 좋은 의도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역시 동물을 동물 그대로 봐주지 못하고 인간 멋대로 해석하려는 저의가 느껴져 탐탁지 않은 것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의미에서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에게 대호란 이름이 붙여졌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혹시 예전에 천만덕이 어미 호랑이는 죽였으나 새끼 호랑이 두 마리는 살려주고 스스로 사냥이 가능할 때까지 죽지 않도록 돌봐준 것, 그래서 그 새끼 호랑이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나중에 산짐승에 갈갈이 찢겨 죽은 만덕의 아들을 장례라도 치를 수 있도록 그의 집 앞에 가져다 놓은 은혜 갚을 줄 아는 호랑이라서 대호라고 했을까? 하지만 이런 설정 자체가 너무 자의적이다. 솔직히 그 대호가 은혜 갚을 줄도 모르고 석이가 누군지도 모른 채 갈갈이 찢겨 죽인다고 해도 만덕은 대호를 원망하거나 똑같이 죽일 자격은 없다. 지리산 아니야 당장 인왕산에 호랑이의 씨가 마른 것도 알고 보면 인간 때문 아니겠는가? 호랑이가 사냥 본능을 잃어버린 채 동물원에서 주는 먹이나 먹어가며 살게 만든 것도 인간 때문 아니겠느냔 말이다.

 

내가 얼마나 호랑이에 대한 이해가 없었느냐면, 호랑이 한 마리를 잡는데 일본군 일개 대대가 출동하고 대호는 그 많은 사람을 죽이는데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물론 CG의 힘이라고 썩소를 날리기도 했지만 또 생각해 보면 나는 지금까지 호랑이가 한 떼의 사람들을 삽시간에 죽였다는 뉴스 보도는 고사하고 역사 자료도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저렇게 죽였을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확실한 건 호랑이는 용맹하다는 것뿐.

 

나중에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은 뭐라고 했나 싶어 네*버를 기웃거려 보았다. 보니 좀 가관이었다. 이런 영화를 두고 여전히 종북 타령이다. 모든 건 깔떼기라고 어떻게 이런 영화에 종북 논리가 가능한 건지 이 종북의 망령이 참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렇지 않으면 왜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했느냐는 볼멘소리도 있었던 것 같다. 이건 또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까 계속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것 아니냐는 숨은 의도까지 파헤치느라 참 바빴겠구나 싶었다.

 

우린 언제쯤이면 영화를 영화 자체로 볼 때가 올까? 이 영화는 김탁환의 <밀림무정>을 원작으로 한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김탁환도 저런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썼을까?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어찌 보면 이 이야기는 신선 같은 이야기다. 전설이라고 말하기도 못하고, 설화라고 말하기도 뭐하다.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찾았을지 모르겠으나 단지 분명한 건 그는 언제나 그렇듯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를 찾고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북이니 일본 위안부 문제니 하는 정치적 현안과 연결시키기 보단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찾는 게 영화를 보는 관객의 몫은 아닐까?

 

이 영화는 누가 진정한 포수인가를 묻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또한 동시에 현대인에게 생각을 즉 철학하기를 촉구하는 영화 같다. 아무리 배운 거 없는 무지렁이 포수라도 그 삶에 철학이 있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당시는 호랑이 한 마리를 잡으면 장가 밑천은 되었나 보다. 그러니까 석이가 그토록 호랑이를 잡고 싶었던 거겠지. 당장 그의 정인이 다른 사람한테 시집을 갈지도 모른다는데 이 사실만큼 자신이 포수가 되어야할 확실한 명분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포수가 되기엔 몸도 마음도 너무 어리다.

 

그나마 구경이 약삭빠르다. 일본군으로 구성된 한 편대를 산에 오르게 만들고 호랑이에게 죽게 만들고 나중에 그 호랑이 까지 잡는다는 소위 이이제이 전법을 쓰려고 했으니 말이다. 포수가 호랑이만 잘 잡으면 됐지 뭘 더 바라겠는가. 하지만 그도 진정한 포수가 될 수 없었다. 그래도 그의 죽음은 장렬했으니 아주 초라하지만은 않다.

 

천만덕이 진정한 명포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가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해도 그 짐승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아무리 새끼 호랑이라 하더라도 수성이 자라고 있다. 이 새끼가 나중에 자라면 제 어미처럼 사람을 여럿 잡아 죽일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잘만 잡으면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다. 무엇보다 그의 아들도 언제 죽일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법칙으로 치자면 언제가 됐든 죽여야 마땅했다. 하지만 죽일 수 있을 때 그는 죽이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다. 당장 어미를 잃은 새끼 호랑이가 불쌍했을 것이다. 그땐 그의 부인 즉 석이의 엄마가 살아 있을 때이기도 하다. 그의 처가 죽은 후에 엄마 없는 석이를 생각했다면 일견 이해는 한다. 요즘에야 개체수 확보니 해서 동물의 씨를 함부로 말릴 수 없었지만 그땐 그런 것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호랑이를 죽일 수 있을 때 명포수가 되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수로 아내를 죽게 만들고 그것 때문에 포수 일을 그만 두었을 때 진정한 명포수가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아내를 죽게 만들었다는 그 죄책감과 아내가 없는 고독감이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고민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약초꾼으로 이 산 저 산을 방황하고 돌아다니면서 자연과 하나 되는 것을 몸으로 받아 들였겠지.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 사랑하는 아들이 죽고 호랑이로부터 본의 아닌 위로를 받았을 때였을 것이다. 그때 인간은 함부로 호랑이를 죽이고 말고 할 권리가 없었다는 걸 깨닫지 않았을까? 또 마침 대호도 두 새끼를 잃어버린 상태다. 자식을 잃은 건 대호나 만덕이나 똑같다.

 

만덕이 대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때야 알 것만 같다. 그리고 그것은 만덕의 뜻이기도 하다. 만덕이 대호에게 하는 몇 마디 되지 않은 대사와 산꼭대기에서 대호에게 절하는 장면이 제법 비장하면서도 처연하다. 대호는 만덕이 자신을 죽여줬으면 좋겠고, 만덕은 대호가 자신을 죽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 둘은 하나가 되고 자연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대호가 만덕을 죽일 수 있을 때 멈칫했다. 왜 그랬을까? 그 옛날 자신이 새끼였을 때 자신을 죽이지 않았던 만덕을 기억했던 걸까? 아니면 나는 당신의 총에 죽을 테니 당신은 살아남으라고 했던 걸까? 하지만 만덕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낭떠러지에서 함께 죽는 방법을 선택한다. 어찌 보면 만덕의 명포수는 호랑이를 잘 죽여서가 아니라 대호가 완성시켜 준 것은 아닐까? 또한 이렇게 동물과 인간이 교감했을 때야 비로소 감동은 오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난 <주토피아><라따뚜이> 같은 영화에서 그다지 감동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고.

 

지금도 엔딩 장면을 생각하면 코끝이 찡하다. 같이 떨어져 죽고 그 위로 하얀 눈이 쌓인다. 몇 안 되는 엔딩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최민식의 묵직한 연기에서 진한 허무주의가 느껴진다. 또한 대호에 대한 연민이 느껴졌다.

 

오래 전 나의 싸부는 작가 김탁환은 작가라기 보단 좋은 스토리텔러 같다고 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그런 작가가 누군가 같은 작품을 가지고 영화든 드라마든 제 2, 3차 작업을 할 때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증폭시켰을지 알 수가 없다. 모르긴 해도 감독은 영화 작업을 했을 때 신나지 않았을까? 이제까지 만나 보지 못한 이야기를 가지고 최민식이란 걸출한 배우와 작업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했을 것 같다.

훗날 다시 보고 싶은 영화 목록에 끼워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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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8-01-26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하신대로 묵직하지만 빤한 스토리가 사람들에게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갈리게 만듭니다. 전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봤던 영화입니다.

stella.K 2018-01-27 10:16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십니다. 잘 지내시죠?
맞아요. 스토리는 빤한데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
나중엔 찡하더라구요.
스토리는 몇 갈래로 정해져 있죠. 문제는 어떻게 다르게
보여주느냔데 좋더라구요.^^

서니데이 2018-01-26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최민식이 나오는 영화라서 소식은 들었는데, 제가 좋아하는 영화가 아니어서 지나갔던 것 같아요. 영화가 좋으면 원작이 있는 책은 원작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는데, 영화 소개가 좋으면 영화를 보고 싶을 때도 있어요.

동물을 의인화하는 것이 좋은 점도 있겠지만, 가끔은 동물인 그 자체보다 의인화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 같아요. 어떤 동물에 대한 선입견을 때로 사람에게 투영하기도 하고, 또는 반대로 사람의 성격이나 행동을 동물이 그러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 같아서요.

오늘 많이 추웠는데, 잘 보내셨나요.
따뜻하고 좋은 금요일 밤 되세요.^^

stella.K 2018-01-27 10:21   좋아요 1 | URL
영화적 감동을 위해 희생하는 거죠.
이거 보면서 동물의 왕국을 열심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물을 동물 자체로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

<밀림무정>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김탁환은 이야기 발굴 하나만큼은 독보적인 것 같아요.
부지런히 쓰기도 하고. 전 그 부지런함이 부럽더군요.ㅋ

오늘은 바람이라도 덜 부니 그나마 좀 난 것 같습니다.
즐건 주말 보내시길.^^

2018-01-26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1-27 10:27   좋아요 0 | URL
CG가 좀 아쉽긴 하죠.
정말 옛날에 호랑이가 저렇게 삽시간에
그처럼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의문스럽기도 하구요.
그래도 이 영화는 최민식을 위한 영화더군요.
실망시키지 않았어요.
사실 그동안 이 영화는 영화 전문 채널에서 많이 했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실시간 영화 별로 안 좋아해요.
리와인드를 할 수 없잖아요.
월정액 가입한 게 있어서 그 돈 뽑아 먹으려고 열심히 보려고 하는데
시간과 체력이 받혀주질 않네요.ㅋ
 
이상 평전
고은 지음 / 향연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나름 좋은 책이긴 하나 저자의 편견이 작용하는 것 같고,
이상의 실체를 알고나니 동경은 사라지고 감당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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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3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1-23 15:13   좋아요 0 | URL
그럴 거예요.
그는 태어나면서 청년이었다고 자신을 그렇게 규정했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빨리 죽은 건지...
그래도 짧은 세월 해 볼 건 다해봤다는 생각이 들어요.ㅋ

cyrus 2018-01-23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에서 거리가 먼 도서관에 이 책이 있어서 어떤 내용인지 대충 봤어요. 문장이 어려워서 끝까지 못 읽겠더라고요.

stella.K 2018-01-23 15:13   좋아요 0 | URL
그래? 읽는덴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서니데이 2018-01-24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진짜 추웠는데, 무사히 잘 보내셨나요.
금요일까지 춥다고 하는데, 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 따뜻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stella.K 2018-01-25 13:03   좋아요 1 | URL
상냥한 서니님, 오늘도 어제만큼 춥네요.
정말 내일은 정점을 찍으려나 봅니다.
주말에 결혼식에 가야하는데 걱정입니다.
그래도 주말은 좀 덜 추울 것 같지만...
서니님도 건강 조심하셔요.^^

transient-guest 2018-01-25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봤던 영화나 다른 곳에서 단편적으로 접한 이상의 모습은 흔한 ‘그 시절‘ ‘문학‘을 하는 사람은 ‘이래야 한다‘고 규정된 클리셰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키처럼 성실한 소설가보다는 ‘예술하는 사람은 이래야 한다‘는 어떤 고정관념에 매우 가까운 모습으로 살아갔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요즘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많이 있을 듯 합니다.

stella.K 2018-01-25 13:08   좋아요 1 | URL
어쩌면 이상은 요즘을 살았다면 좋았을 사람은 아닌가 싶기도 해요.
아니면 우리가 1930년대를 너무 모르고 있거나.
그 시절도 퇴폐와 환락이 넘실거렸더라구요.
하긴 <자유 부인>이 이때쯤 나오지 않았나요?
암튼 이상 덕분에 그 시대를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