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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대호
박훈정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이 영화는 사실 좀 뻔한 게 그려지는 영화였다.
한때는 명포수였던 천만덕이 왜 포수의 일을 접고 이름 없는 약초꾼으로 살아가는지는 차치하고라도, 그의 아들 석이 천둥벌거숭이처럼 나오는 거 보면 너도 언젠간 개처럼 죽겠구나 싶었다. 천만덕과 대척을 이루는 구경 또한 최후가 어떨지 영화를 보면서 알 것 같았고, 나중엔 엔딩에 이르기도 전에 천만덕이 어떻게 죽을지도 알 것 같았다. 이러면 재미없지 않을까? 그런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뭔가 빤한데도 보게 만들었고 나중에 코끝까지 시큰하게 만들었다.
사실 최민식이 주인공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난 이 영화를 언제 볼지 기약이 없었다. 물론 지금도 빨리 본 건 아니지만.ㅠ 핑계지만 이 영화에 영화 찍으러 히말라야까지 다녀왔다던(?) 황정민만 나왔어도 난 더 늦게 봤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니 그 옛날 영화 <취화선>을 비롯한 최민식의 영화 몇 편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최민식은 정말 연기를 잘하는 멋진 배우란 생각이 든다. 영화 중간에 오랜만에 구경(정만식)과 칠구(김상호)와 셋이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결코 좋은 분위기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는 구경이 오래 전에 포수 일을 그만둔 만덕에게 다시 일을 하자고 설득하는 자리다. 하지만 만덕과 구경이 과거에 맺힌 일이 있어 말이 설득하는 자리지 결코 범상치 않은 자리다. 그때 만덕 역의 최민식이 앉아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그야말로 그림이다. 아, 이 배우는 어쩜 앉아 있는 모습도 그림 같을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사실 최민식의 일련의 영화들을 보면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느낌이다. 웬만해서 MSG를 치지 않는 담백한 연기다. 물론 다소의 익살스러움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늘 카리스마와 남자의 고독을 연기해 왔다. 늘 똑같은 연기라면 질릴 법도 한데 어떤 영화에 그를 갖다 놓아도 그는 그만의 시그니처를 연기한다. 문득 가식 없이 정석대로 노래를 불러 엘리지의 여왕이라 칭송을 받는 트로트 가수 이미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를 일컬어 영화계의 이미자라고 하면 너무 약한 표현일까?
영화를 보는데 문득 예전에 본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가 생각이 났다.
당연하다. 두 영화 모두 호랑이가 나온다는 공통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두 영화 모두 만족스럽긴 하다. 하지만 굳이 흠을 잡자면 호랑이를 너무 인간화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나는 가끔 동물을 의인화 시킨 영화, 예를 들면 <주토피아>나 <라따뚜이> 같은 영화가 탐탁치가 않은데 물론 모두 좋은 영화긴 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우린 동물을 너무 많이 길들여 왔거나 죽여 왔다. 좋은 의도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역시 동물을 동물 그대로 봐주지 못하고 인간 멋대로 해석하려는 저의가 느껴져 탐탁지 않은 것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의미에서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에게 ‘대호’란 이름이 붙여졌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혹시 예전에 천만덕이 어미 호랑이는 죽였으나 새끼 호랑이 두 마리는 살려주고 스스로 사냥이 가능할 때까지 죽지 않도록 돌봐준 것, 그래서 그 새끼 호랑이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나중에 산짐승에 갈갈이 찢겨 죽은 만덕의 아들을 장례라도 치를 수 있도록 그의 집 앞에 가져다 놓은 은혜 갚을 줄 아는 호랑이라서 대호라고 했을까? 하지만 이런 설정 자체가 너무 자의적이다. 솔직히 그 대호가 은혜 갚을 줄도 모르고 석이가 누군지도 모른 채 갈갈이 찢겨 죽인다고 해도 만덕은 대호를 원망하거나 똑같이 죽일 자격은 없다. 지리산 아니야 당장 인왕산에 호랑이의 씨가 마른 것도 알고 보면 인간 때문 아니겠는가? 호랑이가 사냥 본능을 잃어버린 채 동물원에서 주는 먹이나 먹어가며 살게 만든 것도 인간 때문 아니겠느냔 말이다.
내가 얼마나 호랑이에 대한 이해가 없었느냐면, 호랑이 한 마리를 잡는데 일본군 일개 대대가 출동하고 대호는 그 많은 사람을 죽이는데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물론 CG의 힘이라고 썩소를 날리기도 했지만 또 생각해 보면 나는 지금까지 호랑이가 한 떼의 사람들을 삽시간에 죽였다는 뉴스 보도는 고사하고 역사 자료도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저렇게 죽였을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확실한 건 호랑이는 용맹하다는 것뿐.
나중에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은 뭐라고 했나 싶어 네*버를 기웃거려 보았다. 보니 좀 가관이었다. 이런 영화를 두고 여전히 종북 타령이다. 모든 건 깔떼기라고 어떻게 이런 영화에 종북 논리가 가능한 건지 이 종북의 망령이 참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렇지 않으면 왜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했느냐는 볼멘소리도 있었던 것 같다. 이건 또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까 계속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것 아니냐는 숨은 의도까지 파헤치느라 참 바빴겠구나 싶었다.
우린 언제쯤이면 영화를 영화 자체로 볼 때가 올까? 이 영화는 김탁환의 <밀림무정>을 원작으로 한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김탁환도 저런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작품을 썼을까?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어찌 보면 이 이야기는 신선 같은 이야기다. 전설이라고 말하기도 못하고, 설화라고 말하기도 뭐하다.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찾았을지 모르겠으나 단지 분명한 건 그는 언제나 그렇듯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를 찾고 거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북이니 일본 위안부 문제니 하는 정치적 현안과 연결시키기 보단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찾는 게 영화를 보는 관객의 몫은 아닐까?
이 영화는 누가 진정한 포수인가를 묻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또한 동시에 현대인에게 생각을 즉 철학하기를 촉구하는 영화 같다. 아무리 배운 거 없는 무지렁이 포수라도 그 삶에 철학이 있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당시는 호랑이 한 마리를 잡으면 장가 밑천은 되었나 보다. 그러니까 석이가 그토록 호랑이를 잡고 싶었던 거겠지. 당장 그의 정인이 다른 사람한테 시집을 갈지도 모른다는데 이 사실만큼 자신이 포수가 되어야할 확실한 명분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포수가 되기엔 몸도 마음도 너무 어리다.
그나마 구경이 약삭빠르다. 일본군으로 구성된 한 편대를 산에 오르게 만들고 호랑이에게 죽게 만들고 나중에 그 호랑이 까지 잡는다는 소위 이이제이 전법을 쓰려고 했으니 말이다. 포수가 호랑이만 잘 잡으면 됐지 뭘 더 바라겠는가. 하지만 그도 진정한 포수가 될 수 없었다. 그래도 그의 죽음은 장렬했으니 아주 초라하지만은 않다.
천만덕이 진정한 명포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가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해도 그 짐승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아무리 새끼 호랑이라 하더라도 수성이 자라고 있다. 이 새끼가 나중에 자라면 제 어미처럼 사람을 여럿 잡아 죽일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잘만 잡으면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다. 무엇보다 그의 아들도 언제 죽일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법칙으로 치자면 언제가 됐든 죽여야 마땅했다. 하지만 죽일 수 있을 때 그는 죽이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다. 당장 어미를 잃은 새끼 호랑이가 불쌍했을 것이다. 그땐 그의 부인 즉 석이의 엄마가 살아 있을 때이기도 하다. 그의 처가 죽은 후에 엄마 없는 석이를 생각했다면 일견 이해는 한다. 요즘에야 개체수 확보니 해서 동물의 씨를 함부로 말릴 수 없었지만 그땐 그런 것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호랑이를 죽일 수 있을 때 명포수가 되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수로 아내를 죽게 만들고 그것 때문에 포수 일을 그만 두었을 때 진정한 명포수가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아내를 죽게 만들었다는 그 죄책감과 아내가 없는 고독감이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고민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약초꾼으로 이 산 저 산을 방황하고 돌아다니면서 자연과 하나 되는 것을 몸으로 받아 들였겠지.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 사랑하는 아들이 죽고 호랑이로부터 본의 아닌 위로를 받았을 때였을 것이다. 그때 인간은 함부로 호랑이를 죽이고 말고 할 권리가 없었다는 걸 깨닫지 않았을까? 또 마침 대호도 두 새끼를 잃어버린 상태다. 자식을 잃은 건 대호나 만덕이나 똑같다.
만덕이 대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때야 알 것만 같다. 그리고 그것은 만덕의 뜻이기도 하다. 만덕이 대호에게 하는 몇 마디 되지 않은 대사와 산꼭대기에서 대호에게 절하는 장면이 제법 비장하면서도 처연하다. 대호는 만덕이 자신을 죽여줬으면 좋겠고, 만덕은 대호가 자신을 죽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 둘은 하나가 되고 자연으로 돌아가길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대호가 만덕을 죽일 수 있을 때 멈칫했다. 왜 그랬을까? 그 옛날 자신이 새끼였을 때 자신을 죽이지 않았던 만덕을 기억했던 걸까? 아니면 나는 당신의 총에 죽을 테니 당신은 살아남으라고 했던 걸까? 하지만 만덕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낭떠러지에서 함께 죽는 방법을 선택한다. 어찌 보면 만덕의 명포수는 호랑이를 잘 죽여서가 아니라 대호가 완성시켜 준 것은 아닐까? 또한 이렇게 동물과 인간이 교감했을 때야 비로소 감동은 오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난 <주토피아>나 <라따뚜이> 같은 영화에서 그다지 감동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고.
지금도 엔딩 장면을 생각하면 코끝이 찡하다. 같이 떨어져 죽고 그 위로 하얀 눈이 쌓인다. 몇 안 되는 엔딩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최민식의 묵직한 연기에서 진한 허무주의가 느껴진다. 또한 대호에 대한 연민이 느껴졌다.
오래 전 나의 싸부는 작가 김탁환은 작가라기 보단 좋은 스토리텔러 같다고 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그런 작가가 누군가 같은 작품을 가지고 영화든 드라마든 제 2차, 3차 작업을 할 때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증폭시켰을지 알 수가 없다. 모르긴 해도 감독은 영화 작업을 했을 때 신나지 않았을까? 이제까지 만나 보지 못한 이야기를 가지고 최민식이란 걸출한 배우와 작업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했을 것 같다.
훗날 다시 보고 싶은 영화 목록에 끼워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