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김여흔 > 온 마음으로 기다리고 느껴야 하는


 

스님도 웃고 나도 웃고. 햇잎을 따서 말린 우전차라 그런지 목을 넘는 찻물이 쓰지 않다. 오늘 이발 하셨나봐요? 왜 눈이 부셔 차마 눈을 들 수가 없는가? 툭툭 뱉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엉겨붙은 마음 골에 따스하게 와 닿는다. 이렇게 몇 일만 더 살면 나도 해동하겠다. 속절없이 울음만 가득 담은 마음으로도 웃을 수 있겠다. 저도 여기와 살까봐요. 이그, 그럼 안되지 나랑 눈맞아 신방이라도 차리게 되면 어쩌누.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까요. 이 茶라는 게 말이야 마음 수양하는데 또 한몫 거들거든 사람의 생각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지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반복되면 품성이 쌓이고 그렇게 품성이 쌓이면 또 德이 된다 이 말씀이거든 이 茶라는 게 그렇거든 내장을 다스리는데 아주 선수라구 변비치료에다 해독작용에다 피로회복에도 효과가 있대요

난 그렇더라구 따뜻하게 뎁혀진 찻잔을 쥐고 한 모금씩 들이킬 때마다 참선하는 마음이 들거든 자판기에서 커피 뽑아 마실 땐 후루룩 쩝쩝 하고 말면 그뿐이지만 이건 그렇지가 않거든 찻물이 옳게 끓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숙우에서 적당히 물이 식을 때를 참아야 하고 다관에서 적당히 차가 우러날 때까지 조급함을 눌러야 하거든 적당한 온도라야 차의 제맛이 나지 너무 급하게 따르면 차가 싱겁고 너무 오래 두고 있으면 또 너무 써진단 말이야 차향도 마셔야 하지 찻잔에서 전해지는 온기도 느껴야 하지 혀끝에서 느껴지는 쌉쌀한 맛과 울대를 타고 넘어가면서 내는 물소리도 들어야 하거든 세상만사가 다 그 안에 있는 게야 그렇게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기다리고 느껴야 하는 게야 그리고 삼키는 거지 그 뒤는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다 저 알아서 정화를 해 주거든 자, 茶나 마시자구. 고두례를 올리고 대나무 발을 걷고 나서니 이미 비는 그쳐 있었다. 도량에 퍼지는 목탁 소리. 은은하다. 하늘 가득 날리는 찻잎.

마녀물고기님의 글 『茶』中

 

 

 

 

벌써부터 방 한 켠에 찻상을 마련해
온갖 다기며 물주전자, 커피메이커까지 갖추어 놓고도
다건, 숙우, 다관에는 쉽게 손이 가질 않았었다.
차를 마시는 법을 작년 풀씨네 식구에게 정식으로 배우긴 했어도
따라주는 잔에만 익숙했었던 거였다.

오늘 물끄러미 다기들을 보고 있노라니
왠지 요놈들이 처연해 보여
다건을 깔고 가부좌를 틀면서 물주전자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등을 꼿꼿이 펴고 명상이라도 하듯
조심스레 배운대로 적당히 물을 식히고 두 잔에 몇 번을 나누어 따르고.
하지만 영 어색하기만 했다.
숙우에 채워진 물의 양이 다관과 두 잔에 꼭 들어 맞는다.
신기하기도 하지, 도예가의 정성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 하다.

낯설고 어색하고 내게 맞지않는 듯 하지만
차츰 내 것이 되겠지.
그러면서 애지중지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야.

 

 

Photo  PUDOG EE『한국적 미』
Write  김여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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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디셀러를 베스트셀러와 고전 사이라고 부른다면 폭력적인 정의(定義)가 될까? 예상되는 비판을 무릅쓰고 이런 정의를 고집할 때 여기에 딱 들어맞는 책 하나를 고른다면 신영복 성공회대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돌베개)일 것이다.

세월의 풍파를 이기고 살아남는 고전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중층적(重層的) 의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베스트셀러에서 스테디셀러를 거쳐 이미 ‘시대의 고전’의 목록 속에 들어가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것은 암울했던 우리 역사의 특정시기와 관련된 처절한 기록이다. 소위 ‘돌진적 근대화’가 최고 속도를 내던 시기에 시각을 달리해야 했던, 한 젊은 좌파지식인이 겪어야 했던 시대와의 불화에 대한 생생한 증언록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이념적 잣대로 평가하기에 앞서 그가 그렇게 살았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 우리 현대사의 소중한 단편이다.

두 번째로 그것은 편지형식으로 된 사상서이다. 좌우의 문제가 녹아들어 있고 동서양의 대립에 대한 사색이 번득이며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겠다는 만만찮은 야심도 읽힌다. “서구적인 것을 보편적인 원리로 수긍하고 우리의 것은 항상 특수한 것, 우연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사고의 식민성’은 우리들의 가슴에 아직도 자극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 이것이 1979년 2월 25일에 쓴 편지에 나오는 대목이니 지금도 좌파들이 빠지기 쉬운 마르크스주의의 서구중심주의와 보편주의에 담긴 오류를 일찌감치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역경 속에서 얻어낸 삶에 관한 담담한 통찰이 빛나는 에세이의 한 정점을 이룬다는 점이다. “나는 어린이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 놀림의 느낌이 전혀 없는 질문을 궁리하여 말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 이 책을 관통하는 배려의 정신이 가장 도드라지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뛰어넘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스테디셀러에서 고전의 반열로 밀어가는 동력은 세상에 대한 그의 거리두기인지 모른다. 그의 문체를 통해 읽을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그의 태도는 열정을 삭히면서도 결코 식지는 않는 인간과 역사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이 평범한 능력이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이다. ” 그래서 그는 “가장 선한 것은 무릇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1988년 8월 15일 20년의 감옥생활을 끝내고 가석방될 무렵 햇빛출판사에서 출간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당시 사회분위기와 맞물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 사이에 사회주의권 붕괴다, 영상시대의 도래다 하며 사회 흐름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에도 젊은층을 중심으로 필독서로 꼽힐 만큼 확고한 자리를 굳힌 이 책은 1998년부터 출판사를 돌베개로 옮겨 재출간되고서도 10만부 가까이 나갔다.

돌베개 한철희 대표는 이 책이 스테디셀러가 될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해 “생각이나 사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편지 하나하나가 갖는 보편적인 힘, 삶에 대한 성찰의 편린, 잔잔한 감동 등에 힘입은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한우기자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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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5-05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영복 교수의 책은 정말 곁에 두고, 조금씩 조금씩 아껴 가며 읽고 싶어지죠. 또 그렇게 하고 있구요. ^^

stella.K 2004-05-05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더불어 숲>에 이어 조만간 두번째로 이 책을 사 볼 생각입니다.^^

잉크냄새 2004-05-05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더불어 숲>을 다 읽으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나 <엽서>중 한권을 사 볼 생각입니다.

waho 2004-05-05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영복 교수의 책은 모두들 좋아하시는 듯...저두 물론 좋아해요.
 

“문학과 과학은 인간에 내재된 상상력의 실현”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지음
김은국·김현숙 옮김/바다/516쪽

▲ 인간 등정의 발자취
“그리스인들이 반인반마(半人半馬), 켄타우로스의 전설을 만들어낸 것은 자유자재로 말을 다루는 스키타이족에 대한 경이와 공포 때문이었다.” 저자는 폴란드 출신답게 당시 그리스인들이 느꼈을 공포감을 “1939년 폴란드 전역을 휩쓸며 달려오던 나치의 탱크부대에나 비길 수 있는 엄청난 것”이었다고 말한다. 과학자라기보다는 문명사가, 문명사가라기보다는 ‘인류의 철학자’라고 불려야 적절할 브로노우스키는 “말을 탄다는 생각은 기계를 발명한 것만큼이나 당시에는 깜짝 놀랄 일이었음에 틀림없다”고 통찰한다.

브로노우스키, 새삼 소개가 필요없을 만큼 이미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린 과학자이자 문명철학자이다. 그는 “문학과 과학은 동일한 경험의 두 가지 서로 다른 언어”로 보았다. 둘 다 결국은 세계를 해석해내는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인간 등정’이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던 잠재적인 상상력의 실현을 의미한다. 좁게는 과학기술의 발전, 넓게는 인간문화의 발전은 결국 그 같은 상상력의 구체화라는 것이다.

내용은 한마디로 종횡무진이다. 인류의 기원을 좇아 에티오피아의 오모강 골짜기를 찾아간다.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를 추적하기 위함이다. 진화 과정의 경이로움에 젖어있노라며 어느새 브로노우스키의 발은 근동 땅을 딛고 인간의 문화적 진화, 즉 문명의 발상 과정을 이야기한다. 이 두 가지 진화에서 뒤떨어져야 했던 신대륙에서 그가 찾아낸 주제는 지구의 역사 이야기다. 초창기 지구 내부의 움직임의 흔적들이 가장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시간적인 이동도 눈부시다. 100만년 전 북아프리카에서 70만년 전 자바섬으로, 그러다가 농업의 탄생을 이야기하며 1만여년 전으로 건너뛴다. 농업은 인류에게 비로소 문화의 역사를 가능하게 해주었고 도시의 조직화라는 한 단계 뛰어넘는 문명을 선사한다.


▲ 브로노우스키는 잃어버린 제국의 도시를 찾아 경관에만 몰두하지 말고 도로, 다리, 통신을 느껴보라고 말한다. 이 셋은 어떤 문명에서건 진보적 발명이라는 것이다. 사진은 잉카문명의 유적 마추픽추
돌을 다루는 인간의 손놀림에서 출발해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의 신비를 벗겨내고 돌 속의 구조를 이해하기 시작한 인간의 상상력은 결국 미켈란젤로를 거쳐 현대의 헨리 무어까지 연결시키는 그의 광대한 시야에 입을 다물기가 힘들 정도다. 불의 이야기는 합금으로, 다시 연금술을 거쳐 존 돌턴의 원자론에서 일단락된다. 음악과 수학이 한데 어우러지고 천문학과 종교재판, 영국혁명과 새로운 동력, 그리고 공장의 탄생 등도 인간 등정의 정점들이다.

고대벽화를 설명하는 다음 구절에 브로노우스키의 시각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무기를 만든 사람들과 벽화를 그린 사람들은 동일한 작업, 즉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미래의 예상, 현재 있는 것에서부터 무엇이 나올지 추론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끌어내는 능력이야말로 상상력의 본질이며, 이런 상상력을 가진 인간에 대한 그의 신뢰는 무궁무진하며, 당연히 그는 이런 인간이 만들어낸 인류문명과 과학에 대해서도 무한한 자긍심을 가져도 좋다고 말한다.

(이한우기자 hwlee@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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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05-05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고 싶은 책입니다. 비싸서 좀 망설여지기는 하지만..

stella.K 2004-05-05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요. 그냥 올려봤어요. 언젠가는 사게되겠지요.

waho 2004-05-05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근데 넘 비싸네요. 지금 찾아보니...허걱...
 

조각칼로 파헤친 세상 소리없이 가슴을 베고 가버려…
서성란 소설집/문이당

대저, 소설이란 무엇이고 소설가란 누구인가? 요즘 들어 부쩍 이 질문을 내게 자주 한다. 답은 작가마다 다를 것이다. 나 역시도 내게 맞는 내 답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질문의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잊을까 봐 수시로 던지곤 한다.

이제 소설은 잊혀진 장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손아귀에 힘이 불끈 쥐어진다. 기초예술분야가 천대받는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소설은 아직 숨겨진 광맥이 무궁하게 많다고 누군가는 그것을 캐내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불 나간 집에 전깃불이 들어오듯 일시에 환하게 밝아질 그런 날도 있을 거라고 중얼거리는 작가가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도저한 답을 가지고, 남들 배추씨 뿌리러 우르르 몰려갈 때 혼자 무씨 뿌리러 묵묵히 가는 작가가 있다. 그가 바로 서성란이다. 서성란<사진>은 ‘혹시?’ 하고 뒤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뚜벅뚜벅 앞으로만 걸어갈 뿐이다. 그가 즐겨 신는 단화가 남긴 발자국은 그래서 더욱 선명하다.

서성란은 1996년 중편 ‘할머니의 평화’로 실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작년에 ‘모두 다 사라지지 않는 달’이라는 장편을 상재했고 일 년 만에 그의 첫 소설집이자 두 번째 책인 ‘방에 관한 기억’을 가지고 다시 독자 앞에 돌아와 섰다.

“아이는 아라비아 숫자가 적힌 종이 카드를 손에 쥐고 잠이 들었다. 여간해서는 낮잠을 자지 않는 아이다. 방 안 여기저기에는 아이가 가지고 놀던 숫자 카드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잠든 아이를 안아 요 위에 눕히고 손에 쥐어져 있던 카드를 빼내려 하자 잠결에도 아이는 손을 꼭 쥔 채 모로 돌아누워 버린다. 잠든 아이의 얼굴에는 상처가 깊이 패어 있다. 관자놀이와 양 볼은 찢어져 아물지 않은 상처와 보랏빛 멍자국들로 어지럽다.”(‘모델하우스’ 233쪽)


▲ 소설가 서성란
세모꼴의 조각칼로 예리하게 파헤친 듯한 이 간결한 문장은 독자의 어떤 참견도 거절한다. 표제작인 ‘방에 관한 기억’을 포함해 여덟 편의 중단편이 실린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딱 손에 쥐기 좋을 만큼 한 움큼씩 나뉘어져 붉은 리본에 감긴 고급 소면이 떠오른다. 작가는 잘 삶긴 쫄깃한 면발을 따뜻한 육수에 풀어 내놓았다. 국수를 한입 머금고 있다가 입 속으로 ‘쪽’ 하고 빨아들일 때 국숫발이 입 천장에 찰싹 달라붙는 명랑한 소리를, 그 유쾌한 즐거움을 독자들은 책의 곳곳에서 보고 듣고 느낄 것이다.

이 책에는 그가 첫 책에서부터 집요하게 그리고 있는 발달 장애아와 그 어머니들의 모습,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혜롭게 살아갈 능력을 지니지 못한 아버지, 불어난 몸 때문에 사회와 남편에게 버림받는 여성, 사랑의 상처를 광기에 가까운 동성애의 집착으로 표현하는 여성, 가난과 줄기찬 투쟁을 하고 있는 가족들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그의 글에는 페미니즘적 저항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심리적 굴절이나 종교적 초월도 보이지 않는다.”(문학평론가 황광수) 그저 담담히 응시할 뿐이다. 지독할 정도로 담담해서 오히려 섬뜩하게 만든다. 가령 이런 말들.

“하긴 우리 부모는 이제까지 나한테 아무 것도 준 것이 없으니까요.”(‘산초’ 42쪽)

슬프지도 않는데 슬픔을 요구하거나, 안개를 뿌려 문장을 달달하게 만들거나, 읽고 난 뒤 ‘그래서 뭐가 어쨌단 말이야?’ 하는 허전함이 남게 하지도 않는다. 단지 조각칼로 날카롭게 파헤칠 뿐이다. 잘못하다간 그의 조각칼에 가슴을 베이기 십상이다. 도둑처럼 스며들어와 소리도 없이 긋고 가니까. 내출혈이 걱정되면 마음을 굳게 먹고 이 책을 펼칠 일이다.

(이현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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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는 12시간 일하고 36시간 쉬었다
신명호 지음
시공사/294쪽



▲ 조선시대의 궁녀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높인 MBC TV 드라마‘대장금’의 한 장면. 의녀는 다른 궁녀와 마찬가지로 공노비 중에서 선발됐고, 내의원에 소속돼 궁중 여성들을 치료했다. 이들은 출퇴근을 했으며 혼인도 가능했다.
“설한단(雪漢緞·고급 비단) 남치마와 불빛 모단(毛緞) 족도리며/ …항아(姮娥·중국 고대신화의 달의 여신)가 적강(謫降)한가 속태(俗態)도 전혀 없네.”(‘한양가’ 중에서 궁녀를 묘사한 부분)

인터넷에서 ‘월간궁녀’나 ‘궁녀센스’라는 잡지 형태의 희한한 게시물을 한 번쯤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최근 많은 TV 사극에서 궁녀들은 궁중 암투극의 필수적인 조연을 넘어서 당당한 주인공으로까지 격상되고 있다. 일상사와 생활사로 관심이 집중되는 교양 역사서의 흐름이 이런 대중적인 관심과 만나면 이제 책이 한 권 나와야 한다. 바로 이 책이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조선시대의 궁녀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을 하는 과정이 ‘역사의 무의식 속에 침잠해 있던 기억들을 되살려내는 느낌’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궁녀에 대한 기존의 지식은 생존 궁녀의 증언을 토대로 한 이규태 저 ‘개화백경’(1971)과 김용숙 저 ‘조선조 궁중 풍속 연구’(1987)가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방대한 기록 속에서도 궁녀에 대한 내용은 드물다. 궁녀란 원칙적으로 ‘왕의 여자’였으므로 왕 말고는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역모사건에 대한 법정 기록인 ‘추안급국안’에 궁녀들의 인적사항과 업무가 대단히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었고, 이 책의 주요 자료가 됐다.

왜 궁녀인가? 수천 년간 침묵을 강요받았던 그들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문화인 왕실의 생활문화를 창조하고 전승한 주역이었다는 것이다. 왕실의 음식과 옷과 육아의 담당자가 그들 아니면 누구였겠는가? 그들은 지밀(왕·왕비의 침전과 대청 등 근무)·침방(옷·이부자리 제작)·수방(수를 놓는 일)·생과방(음료·과자 담당)·소주방(음식 담당)·세수간(세숫물과 목욕물)·세답방(빨래)으로 그 부서가 구분돼 있었고, 정5품에서 종9품까지 직급이 나누어졌다.

▲ 궁녀
방마다 궁녀 전체를 총괄하는 제조 상궁과 부제조 상궁이 있었고, 이들은 각 처소의 궁녀들을 대표하는 실력자였다. 궁녀들도 하녀를 두었는데 방자·취반비·무수리 등이 그들로, 넓은 의미의 궁녀에 포함된다. 궁궐 안에는 우물이 부족해 물을 긷는 ‘무수리’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궁녀들은 생각보다 많은 급료를 받았는데 1년에 적어도 쌀 10가마는 보장됐다. 이러다 보니 갖은 이권에 개입해 재산을 모으는 궁녀까지 생겼다.

궁녀에 대한 웬만한 궁금증은 이 책에서 거의 풀린다. 사극에서 방문을 열어주는 궁녀는 잠도 자지 않고 24시간 대기했을까? 아니다. 주·야간으로 교대했고 보통 12시간 일하고 36시간 쉬었다. 임금의 승은을 입지 못한 궁녀는 어떻게 성적 본능을 해소했을까? 내시·별감과의 스캔들, 심지어 동성애까지 기록 곳곳에 보인다. 여가 시간은 어떻게? 바느질, 글씨(궁체) 연습, 투호….

3년 전 ‘마지막 궁녀’가 세상을 떠난 대목은 서글프다. 1966년까지 순종의 황후인 윤 황후를 모셨던 성옥염 상궁은 이후 절에 들어가 살았는데, 유품은 지갑에 들어 있던 2만3000원이 전부였다고 한다. 어쩌면 최초의 전문직 여성이었을지도 모를 그들의 삶은 끝내 전근대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일까.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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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5-05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어보구 싶어요. 값이 좀 내리거나 이벤트하면 얼른 데리고 올려구요. 물론 평이 좋아야겠지만...요즘 자꾸 사는 책마다 실패하는게 많아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