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낮은 나의 밤보다 아름다운가

이우일 등 지음/청림출판

 

‘아침형 인간’이 이데올로기적 강제로 작용하는 시기, 사람들은 어설픈 규범적 선동에 불안마저 느끼곤 한다. 여기 사회 각계 인사 19명이 ‘아침형’이란 틀에 일대 반격을 가한다. 자유·낭만의 시간, 고독·젊음의 표상,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질 수 있는 감성적 시간 ‘밤’ 을 위한 항변이다.

“이젠 ‘낮잠형 인간’ ‘토막잠형 인간’이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을 듯하다. 도대체 사람들은 어떤 틀을 분류해 가둬 놓지 않으면 안 되는 족속들인가?”(이은희 연구원) “조형인간(朝型人間)을 옮겼다고 해도, 일본어의 냄새가 강하게 남아 있다. 형(型)은 자동차나 로봇에 붙여야 하는 말이지, 인격을 가진 인간에게 붙일 말이 아니지 않은가?”(박상현 미술사 석사)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오리 다리가 비록 짧지만 이어주면 걱정거리가 되고 학의 다리가 길지만 끊으면 슬픈 일이다. 만물은 제각기 나름의 타고난 본성을 따를 때 각자 모두 행복할 수 있다”는 장자의 말을 인용한다.

강용혁 한의사는 사상의학을 동원, “소음인(少陰人)들은 아침형 인간의 라이프 스타일에 체질적으로 안 맞는다”고 말한다.

“‘난 반드시 ○○해야 한다’ 같은 자신과의 약속도 싫고 규칙을 깰수록 재미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이우일 일러스트레이터) “올빼미 목을 비틀어도 밤은 반드시 온다”(신동민 일러스트레이터)처럼 자유인을 위한 속시원한 일갈이 이어진다. 그들은 또 말한다. “당신의 낮은 정녕 나의 밤보다 아름다운가?”라고.

(박영석기자 yspark@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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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진/우맘 > 폴 오스터 신간 -신탁의 밤-

[이주의 신간] 우연으로 쌓아올린 운명, 그 세겹 이야기
소설가가 소설 속 주인공으로… 짜릿한 글 맛 낸 추리적 작법

신탁의 밤/폴 오스터 글/황보석 옮김/열린책들

“세계는 내 머리 속에 있고, 내 몸은 세계 속에 있다.”

뉴저지의 뉴어크에서 가구점 집 아들로 태어난 폴 오스터(Paul Auster·57)는 무명 시절 열일곱 군데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적도 있다. 지금은 “재치 넘치는 언어, 도회적(뉴욕적)인 감성”을 통해 “동시대인들의 열망과 좌절, 고독과 절망, 강박 관념 등을 그려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해 왔다”는 평을 듣는 세계적 작가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뛰어난 연주가의 스타일과 음악적 구조 때문에 오스터의 소설을 무척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처럼 작가가 주인공이 되는 소설가 소설은 일종의 유체이탈이다. 소설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소설 속의 주인공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극도의 리얼리즘과 극도의 작가주의를 동시에 겨냥하면서 가장 기묘한 방법으로 소설의 입체성을 획득한다.

오스터는 ‘스모크’(1996) ‘블루 인 더 페이스’(〃) ‘다리 위의 룰루’(1998) 같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거나 감독을 하기도 했다.

운명은 우연(偶然)을 먹고 자란다. 운명의 침입으로 얼룩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생은 대개의 경우 열정과 비밀의 구렁에 내던져져 있다. 우리는 때로 무작위적인 우연의 힘에 저항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 내면에 잠복한 미래의 암시를 염탐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게 글쓰기의 전부인지도’ 모른다.(287쪽)

스승처럼 알고 지내는 선배 작가 존 트로즈가 그의 삶에 엄청난 결과를 안겨줄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주인공 시드니 오어(Sidney Orr)는 아직은 크게 성공하지 못한, 서른네 살 소설가다. 아내인 그레이스 테베츠는 ‘어느 순간 와 닿는 빛의 강도와 색조에 따라 색이 변하는 눈’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다. 오어는 출판사 미술부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그레이스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까지 이른 마당이다.

오스터의 신작을 기다리는 세계 곳곳의 열성 팬들은 제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겠으나 무엇보다 스토리의 묘미가 압권이다. ‘이야기는 모든 운명의 증언이기’ 때문일까. 2003년에 발표했던 이번 장편도 대략 세 겹으로 겹쳐지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당신이 펼친 소설 속 주인공인 시드니 오어는 소설을 쓰는 작가다. 그런데 독자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것은 오스터의 소설 속에서 주인공 오어가 쓰는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닉 보언도 뉴욕의 한 출판사에서 소설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닉 보언은 1927년에 쓰인 후 원고 상태로 전해오는 어떤 소설을 읽고 있는데, 그 세 번째 소설의 제목이 ‘신탁의 밤’이다.

정리하자면, 소설①의 주인공은 소설가 시드니 오어, 소설②의 주인공은 출판편집인 닉 보언, 소설③의 주인공은 영국군 대위 르뮈엘 플래그다. 마치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에서처럼 이 세 주인공들은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전혀 다른 액자에 갇혀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 역시 우연, 운명 그리고 현재에 징후를 드러내는 미래의 검은 망토 자락에 휘둘리는 삶을 견디고 있다.

소설③의 주인공 플래그 대위는 제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박격포탄 폭발로 눈이 멀고 간질병을 닮은 발작 증세를 일으킨다. 그는 발작 도중에 미래를 이미지로 예언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얻지만, 사랑에 빠진 여인과 결혼하기 전날 예기치 못했던 발작을 일으키고 그 애인이 채 1년도 가지 않아서 어떤 행위를 할지 미리 알게 된다. 플래그 대위가 그처럼 가혹한 운명의 벼랑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독자의 궁금증은 더욱 가렵다.

이 같은 소설③을 읽게 되는, 소설②의 주인공 닉 보언은 아무런 예고 없이 11층 아파트의 건물 정면에 붙어 있는 이무기 돌이 떨어져 삶이 끝날 수도 있었다는 경험 때문에 ‘인생을 닥치는 대로 바꾸기로’ 결심한다(이 또한 대실 해밋이란 소설가의 작품 속 일화를 소설 속 작가 오어가 재창조한 것이다). 그는 직장과 아내를 버리고 전혀 낯선 도시인 캔자스시티를 향해 밤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닉 보언은 예순일곱 살 먹은 흑인 택시운전사를 만나고, 세계 유명도시의 전화번호부를 수집하는 기묘한 일에 휘말리다가 지하의 방사선 대피소에 홀로 갇히게 된다. 자, 닉 보언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스토리로 소설②를 쓰던 소설①의 주인공 시드니 오어는 아내 그레이스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돈을 좀 벌어볼 요량으로 타임머신에 관한 공상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가 퇴짜를 맞기도 하며, 중국인 문구점 주인이 안내하는 갈봇집에 가서 오럴 섹스를 경험하기도 한다. 또 존 트로즈의 아들인 제이콥이 오어의 아파트를 도둑질하는 사건과 그레이스가 아무 말 없이 외박을 하는 일도 벌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을 몰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시드니와 그레이스는 ‘옷을 반쯤 벗은 채 침대로 가려다 결국 그러지도 못한 채 바닥에 구르며’(240쪽) 격렬한 섹스에 탐닉하기도 한다.

시드니 오어가 아내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은 연역적 추론을 통해서였다. 불명확했던 과거의 애매함들에 대해 마치 현재진행형 소설을 쓰듯 특정 구도를 설정하자 모든 일의 아귀가 희한하게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시제(時制)로서 과거이자 소설 작법상의 미래였다.

▲ 폴 오스터는 문학성과 대중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 작가다. 현재 뉴욕의 브루클린에 살고 있다.
오스터의 최대 출세작인 ‘뉴욕3부작’(1986)에 나오는 주인공 퀸은 빨간 공책에 글을 썼고, 이번 장편에서 주인공 시드니 오어는 파란 공책에 글을 쓴다. 둘 다 소설가다.

오스터는 거의 예외 없이 추리적 작법을 즐겨 쓴다. ‘어디로 갔어? 어떻게 된 게야?’ 같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면서 찡한 여운이 남는 것은 이중 삼중의 상자를 뚫고 우연의 총탄 세례를 맞아가며 운명적 사랑을 껴안는 휴머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운명의 바닥에는 허무주의라는 배설구를 만들어 카타르시스를 돕는다. ‘사람은 우연한 일로 죽으며 눈먼 우연이 용서해 주는 동안에만 살아 있다’(80쪽)는….

세 겹으로 장치한 ‘소설가 소설’의 장점은 소설가와 소설 사이의 공간을 좁힐 수 있다는 점이다. 그때 수집하는 아이디어와 에피소드는 피부감각적으로 적나라하다. “나는 스스로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한다”는 오스터는 재래식 리얼리즘의 강박관념을 깨고, 대신 허구(소설)보다 더 기이(奇異)한 사실들을 채집한다.

또 하나 오스터의 작법은 ‘상자 속에서 상자 꺼내기’(차이니즈 박스)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쓰는 테크닉이다. 오스터를 오스터답게 만드는 것은, 풀면 또 나오고 풀면 또 나오는 ‘다중의 상자’라는 구조 밑에, ‘막다른 방은 없다’는 오스터 특유의 문학적 전략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뉴욕3부작’에서도 ‘방안에는 창문 없는 칸막이 방으로 통하는 문이 또 하나 있었고’(196쪽), 이번 장편에서도 소설②의 주인공이 갇히는 지하 벙커에는 ‘또 하나의 방’이 있다. 이것은 ‘그전까지 썼던 모든 것은 지금 이야기하려고 하는 끔찍한 일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다’(287쪽)는 긴장고조 방식이다.

이번 장편은 ‘환상의 책’ ‘달의 궁전’ ‘공중 곡예사’ 등에 이어 국내에 번역되는 열다섯 번째 책이며, 황보석은 그중 아홉 권을 번역했다. 소설가 김영하 같은 오스터 매니아뿐 아니라, 오스터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독자들께도 진심으로 권해 드린다.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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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언더우드家 "이젠 한국 떠납니다"
연세대·새문안 교회 설립…4代 119년간 현대사에 큰 공

4대(代)에 걸쳐 한국과 인연을 맺어온 언더우드 일가가 입국 119년 만에 한국을 떠난다. 언더우드 일가는 지난 1885년 언더우드 1세인 원두우(元杜尤·미국명 호러스 G 언더우드)씨가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입국한 이후 명문 사립 연세대를 설립하는 등 한국의 교육·종교·사회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원두우씨의 증손자인 원한광(元漢光·61) 한·미교육위원회 위원장(연세대 재단이사)은 10일 “4대에 걸쳐 언더우드가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봉사는 다 했다고 생각한다”며 “올 10월쯤 아내와 함께 자녀들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원 위원장은 3년 전부터 환갑이 되면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해 왔으며 한국에서 입양한 두 딸 등 슬하에 2남2녀를 두고 있다. 원 위원장이 한국을 떠나면 일가 중 연세대와 관련을 맺지 않고 있는 원 위원장의 동생 원한석(49·개인컨설팅회사 근무)씨만 국내에 남는다.

원 위원장은 떠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정민 연세대 신학과 교수는 “아쉽지만 언더우드 가문의 시대적 소명이 끝난 것이 엄연한 역사의 한 부분”이라며 “이제 우리가 더이상 도움을 받는 나라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 도움을 주는 나라, 도움을 줘야할 나라가 됐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 원두우 박사의 묘를 한국으로 이장한 가족들이 서울 마포구 외국인 묘지공원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뒷줄 오른쪽 두번째가 손자인 원일한 연세대 재단이사, 앞줄 왼쪽이 증손자인 원한광 연세대교수.

언더우드 일가는 한국 현대사의 증인이다. 언더우드 1세는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한 뒤 광혜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으며, 연희전문학교와 새문안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한국 민족이 일본에 주권을 침탈당할 만한 나라는 도저히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며 “문화를 보존하고 나면 언젠간 독립국가로 바로 설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태어난 2세 원한경(元漢慶) 박사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연희전문학교로 돌아와 교육학을 가르쳤으며, 제3대 교장을 지냈다. 역사상 처음으로 백두산 천지의 깊이를 잰 것도 이들 언더우드 1세와 2세 부자로 알려져 있다. 원한경 박사는 1951년 6·25전쟁의 와중에서 심장병으로 한국에서 사망했고 부인은 1949년 공산당의 테러로 절명, 한국사의 아픔을 함께했다.

3세인 원일한(元一漢) 박사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 해군에 재입대, 한국을 위해 봉사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대위로 전역했지만 위기에 빠진 한국을 위해서 다시 군에 입대한 것이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했으며, UN군 정전협상 수석 통역장교를 맡아 정전(停戰) 협정의 전 과정에 참여했다.

이후 그는 연세대 교수를 비롯해 한·미협회 부회장, 한국성서공회 이사, 광주기독병원 이사, 한·미우호협회 고문 등으로 활동했다. 올 1월 그가 사망했을 때 러포트 주한미군사령관은 “한·미 간에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내가 찾아가 조언을 받던 분”이라며 “한·미 우호를 위해 애쓰시던 모습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인의 친근한 벗이었다. 유재건 열린우리당 의원은 “대학 시절 모두들 원일한 박사님의 인자한 모습에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천사라고 생각했다”며 “언더우드 일가는 120여년 전 암울했던 시기에 한국에 와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한국사람과 똑같이 생활한 위대한 선구자들이었다”고 말했다.

원일한 박사는 99년 5월 미국 뉴저지주에 안장된 할아버지 원두우 박사(언더우드 1세)의 유골을 한국으로 이장, 서울 마포구 합정동 외국인 묘지공원에 안장했다. 한국에서 숨을 거둔 아버지 원한경 박사(언더우드 2세)가 묻힌 장소였다. 원 박사도 숨을 거둔 뒤 같은 곳에 묻혔다. 작고한 언더우드 1세부터 3세까지 모두 ‘제2의 고향’인 한국에 묻힌 것이다.

한국을 떠나는 4세 원한광 위원장은 “앞으로 여생은 미국에서 살겠지만 숨을 거둔 뒤 묻힐 장소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김봉기기자 knight@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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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이상범· 최순우·권진규 등 이달내 지정
이광수·이상·이중섭·박종화·홍난파 등 줄이을듯


20세기 한국의 문화예술을 이끌었던 인물들의 고택(古宅)이나 작업장이 사상 처음으로 문화재로 지정된다. 서울시는 9일 ‘님의 침묵’의 한용운(韓龍雲·1879~1944), 조선 후기 천재화가 장승업의 화풍을 계승했던 한국화가 이상범(李象範·1897~1972), 한국미를 국내외로 알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미술사학자 최순우(崔淳雨·1916~84), 전통에 바탕을 둔 한국적 리얼리즘을 조각으로 승화시킨 권진규(權鎭圭·1922~73)가 작품활동을 했던 고택과 화실(畵室) 등을 지정예고기간을 거친 뒤 5월 하순쯤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또 이광수 이상 이중섭 박종화 홍난파 마해송 등이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했던 9채의 고택〈표〉에 대해서도 문화재 등록을 최근 문화재청에 신청했다. 이에 따라 이들 건물들은 오는 6월 등록문화재로 등록될 것으로 보인다.

근·현대 한국 문화예술계를 이끌었던 인물들이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했던 고택들은 그동안 “문화예술적으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나, 문화재적인 가치는 낮다”는 이유로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한국 문단의 사실주의 대표작가였던 현진건(玄鎭健·1900~43)의 종로구 부암동 고택, 청록파 시인 박목월(朴木月·1916~78)의 용산구 원효로 4가 고택이 최근 잇따라 헐리면서 근·현대 문화예술인들의 ‘문화유적’을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울시는 이에 따라 올해 들어 철거 위기에 놓였던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1915~2000)의 관악구 남현동 봉산산방(蓬蒜山房), 화가 이상범의 종로구 누하동 화실(畵室), 작곡가 홍난파(洪蘭波·1898~1941)의 종로구 송월동 1번지 고택을 매입하는 등 근·현대 문화예술인들의 문화유적 보존에 박차를 가했고, 지난 4월에는 서울시에 있는 근·현대 문화예술인들의 고택을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심의를 벌였다. 이번 지정 조치는 앞으로 각 지방에 산재한 근·현대 문화예술인들의 고택이나 작업실 등이 문화재(등록문화재)로 지정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독립운동사에 남을 한용운 고택

종로구 계동 43번지, ‘ㄷ’자 형식의 목조 기와집이다. 대지 35평 건평 15평. 만해(卍海)는 설악산 오세암에서 1918년 이곳으로 옮겨와 월간지 ‘유심(惟心)’을 창간하며 계몽적 성격의 논설과 수필·시를 발표했다. 3·1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될 때까지 거주했던 곳으로, 독립운동사와 불교사에 길이 남을 곳으로 꼽힌다.

◆'수묵화의 터전' 이상범 화실과 고택

화실은 종로구 누하동 181번지에, 고택은 누하동 178번지에 접해 자리하고 있다. 30대 초반부터 타계할 때까지 여기서 살았다. 평범하고 친숙한 산천 들녘을 담은 화풍을 이곳에서 창조했기에, 현대 한국 수묵화의 터전으로 평가되는 공간이다. 그는 1955년 6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화실과 고택을 “나의 모든 창조적인 계기를 계시·정리·실현해 주는 곳이자 내 생명이 이뤄지는 곳”이라고 평했다.

◆'한국미술사 연구의 산실' 최순우 고택

성북구 성북2동 126-20번지에 있는 대지 110평의 목조 기와집이다. 한국미술사 연구의 토대를 닦았던 선생이 말년에 6년 동안 거주했던 곳이다. 최근 내셔널트러스트에서 매입해 기념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국적 리얼리즘' 권진규 아틀리에

성북구 동선동3가 251-13번지에 있다. 대지 23평의 시멘트 양옥이다. 동세대 작가들이 서구 조각의 흐름을 모방하기에 골몰할 때, 신라 토우 등 전통에 뿌리를 둔 한국적 리얼리즘의 세계를 정립하려 했던 선생이 일본에서 귀국한 직후부터 자살로 생을 마칠 때까지 15년 동안 활동했던 공간이다. 일본에서 교수직을 제의했지만 조국에서의 삶이 더 중요하다며 거절했던 그는 막상 국내에서는 ‘시대착오적 복고주의자’라고 비판받았다. 가난과 질병·멸시 속에서도 예술혼을 지켜냈던 한 예술가의 삶이 오롯이 담긴 공간이다.

(신형준기자 hjshin@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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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을 선택한 부부의 고뇌
문(門)/나쓰메 소세키 장편소설
유은경 옮김/향연/246쪽/9000원



▲ 영문학자이자 뛰어난 하이쿠 시인이기도 했던 작가 나쓰메 소세키. 일본 근대 문학사에서 최고의 작가로 손꼽히는 그는 인간 존재의 내면 탐구라는 진지한 주제를 탐구했다.
일본 근대문학의 선구자이며 국민작가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나쓰메 소세키(1867~1916). 인간의 내면적 우울과 불안을 밀도 있게 그려낸 그는 20세기 초 서구의 근대화 물결 속에 나름의 근대적 인간상과 삶의 모습을 모색하는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1000엔짜리 지폐에 얼굴이 새겨질 만큼 일본 국민들에게 추앙을 받는 작가다. 국내에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등의 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은 불륜을 선택한 데 대한 죄의식을 안고서 세상으로부터 유리된 채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부부의 고뇌를 담았다. 장편소설 ‘산시로’ ‘그후’와 함께 사랑을 주제로 한 그의 초기 3부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대학 시절 가장 친한 친구의 애인을 빼앗은 소스케와, 애인을 버린 오요네는 사랑은 얻었으나 세상 밖으로 내쫓기게 된다.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던 소스케에게서 친구는 떠나고, 가족과 친척의 외면 속에서 학교와 사회로부터도 고립된다. 오요네는 세 번에 걸친 임신이 실패로 돌아가자 심한 정신적 가책까지 느끼게 된다. 평생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자의식과 고독에 시달리는 이들 부부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면서도 결국 도피하게 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스케는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지도 않은 채 사회와 거의 단절된 생활을 한다. 아버지의 유산 처리나 동생의 진학 문제에 대해 소극적으로만 대처한다. 이들 부부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금실 좋게 살아가지만, “어느 틈엔가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과거라고 하는 어둡고 깊은 구렁텅이 속에 떨어져 있었다.”(46쪽)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절벽 밑의 작은 셋집은 그들의 위태롭고 불안한 심정을 암시한다. 드라마틱한 사건 대신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 속에 숨어있는 복선과 섬세한 심리묘사를 읽어내는 것이 그의 소설의 감칠맛이다.

▲ 문
“이 비극이 언제 어떤 형태로 다시 자기 가족을 엄습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이따금 그의 머릿속에 안개처럼 드리웠다. …간신히 자기 차례가 되어 차가운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는 문득 이 모습은 원래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144쪽)

자기와 관계없이 돌아가는 세상이지만, 불시로 문득문득 고개를 내미는 과거의 죄의식은 이들 부부의 가슴을 억누르곤 한다.

소스케가 대학시절 애인을 빼앗은 옛 친구 야스이의 소식을 듣고 곧 그와 대면할 상황에 처하게 되자 소설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극도의 내적 갈등을 겪는 소스케는 산사로 찾아들어가 참선을 시도하지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 소스케로 인해 만주나 몽골로 떠돌며 살게 된 친구 야스이는 소스케 앞을 가로막고 선 ‘문’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오래도록 문 밖에서 서성이는 운명으로 태어난 듯했다. …눈 앞에는 견고한 문이 언제까지나 전망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문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245쪽)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친구의 존재감에 늘 불안해했던 소스케는 친구 야스이의 굴레를 활짝 벗어젖히고 싶었다. 하지만 평생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그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앞에서 초조해한다. 그는 여전히 무능하고 무력하게, 닫힌 문 앞에 남겨져 있을 뿐이다.

작품의 결말에 오요네는 유리창으로 비쳐드는 화창한 햇살을 바라보며 새봄이 왔다고 좋아하지만, 소스케는 고개를 숙인 채 “하지만 다시 또 겨울이 올 거야”(256쪽)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사랑과 불륜, 죄 등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천착하는 소세키 특유의 내면적 문장이 독자를 반성적 성찰로 이끄는 작품이다.

(최홍렬기자 hrchoi@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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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4-05-09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최근에 읽은 소설이 '도련님'인데 그의 다른 작품이 무겁고 내면으로 가라앉는 느낌인반면 도련님은 유쾌하고 가벼워서 즐겁게 읽었죠. 음, '문'의 스토리만 보아도 궁금해집니다. 꼭, 읽어보고싶네요. 나쓰메 소세키의 글은 혹독한 겨울도 봄을 잉태하기 위한 시련일 뿐이라고 위로하는 듯 평화롭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