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디셀러를 베스트셀러와 고전 사이라고 부른다면 폭력적인 정의(定義)가 될까? 예상되는 비판을 무릅쓰고 이런 정의를 고집할 때 여기에 딱 들어맞는 책 하나를 고른다면 신영복 성공회대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돌베개)일 것이다.

세월의 풍파를 이기고 살아남는 고전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중층적(重層的) 의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베스트셀러에서 스테디셀러를 거쳐 이미 ‘시대의 고전’의 목록 속에 들어가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것은 암울했던 우리 역사의 특정시기와 관련된 처절한 기록이다. 소위 ‘돌진적 근대화’가 최고 속도를 내던 시기에 시각을 달리해야 했던, 한 젊은 좌파지식인이 겪어야 했던 시대와의 불화에 대한 생생한 증언록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이념적 잣대로 평가하기에 앞서 그가 그렇게 살았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 우리 현대사의 소중한 단편이다.

두 번째로 그것은 편지형식으로 된 사상서이다. 좌우의 문제가 녹아들어 있고 동서양의 대립에 대한 사색이 번득이며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겠다는 만만찮은 야심도 읽힌다. “서구적인 것을 보편적인 원리로 수긍하고 우리의 것은 항상 특수한 것, 우연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사고의 식민성’은 우리들의 가슴에 아직도 자극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 이것이 1979년 2월 25일에 쓴 편지에 나오는 대목이니 지금도 좌파들이 빠지기 쉬운 마르크스주의의 서구중심주의와 보편주의에 담긴 오류를 일찌감치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역경 속에서 얻어낸 삶에 관한 담담한 통찰이 빛나는 에세이의 한 정점을 이룬다는 점이다. “나는 어린이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 놀림의 느낌이 전혀 없는 질문을 궁리하여 말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 이 책을 관통하는 배려의 정신이 가장 도드라지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뛰어넘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스테디셀러에서 고전의 반열로 밀어가는 동력은 세상에 대한 그의 거리두기인지 모른다. 그의 문체를 통해 읽을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그의 태도는 열정을 삭히면서도 결코 식지는 않는 인간과 역사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이 평범한 능력이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이다. ” 그래서 그는 “가장 선한 것은 무릇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1988년 8월 15일 20년의 감옥생활을 끝내고 가석방될 무렵 햇빛출판사에서 출간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당시 사회분위기와 맞물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 사이에 사회주의권 붕괴다, 영상시대의 도래다 하며 사회 흐름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에도 젊은층을 중심으로 필독서로 꼽힐 만큼 확고한 자리를 굳힌 이 책은 1998년부터 출판사를 돌베개로 옮겨 재출간되고서도 10만부 가까이 나갔다.

돌베개 한철희 대표는 이 책이 스테디셀러가 될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해 “생각이나 사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편지 하나하나가 갖는 보편적인 힘, 삶에 대한 성찰의 편린, 잔잔한 감동 등에 힘입은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한우기자 h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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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5-05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영복 교수의 책은 정말 곁에 두고, 조금씩 조금씩 아껴 가며 읽고 싶어지죠. 또 그렇게 하고 있구요. ^^

stella.K 2004-05-05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더불어 숲>에 이어 조만간 두번째로 이 책을 사 볼 생각입니다.^^

잉크냄새 2004-05-05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더불어 숲>을 다 읽으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나 <엽서>중 한권을 사 볼 생각입니다.

waho 2004-05-05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영복 교수의 책은 모두들 좋아하시는 듯...저두 물론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