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는 12시간 일하고 36시간 쉬었다
신명호 지음
시공사/294쪽



▲ 조선시대의 궁녀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높인 MBC TV 드라마‘대장금’의 한 장면. 의녀는 다른 궁녀와 마찬가지로 공노비 중에서 선발됐고, 내의원에 소속돼 궁중 여성들을 치료했다. 이들은 출퇴근을 했으며 혼인도 가능했다.
“설한단(雪漢緞·고급 비단) 남치마와 불빛 모단(毛緞) 족도리며/ …항아(姮娥·중국 고대신화의 달의 여신)가 적강(謫降)한가 속태(俗態)도 전혀 없네.”(‘한양가’ 중에서 궁녀를 묘사한 부분)

인터넷에서 ‘월간궁녀’나 ‘궁녀센스’라는 잡지 형태의 희한한 게시물을 한 번쯤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최근 많은 TV 사극에서 궁녀들은 궁중 암투극의 필수적인 조연을 넘어서 당당한 주인공으로까지 격상되고 있다. 일상사와 생활사로 관심이 집중되는 교양 역사서의 흐름이 이런 대중적인 관심과 만나면 이제 책이 한 권 나와야 한다. 바로 이 책이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조선시대의 궁녀의 실체를 밝히는 작업을 하는 과정이 ‘역사의 무의식 속에 침잠해 있던 기억들을 되살려내는 느낌’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궁녀에 대한 기존의 지식은 생존 궁녀의 증언을 토대로 한 이규태 저 ‘개화백경’(1971)과 김용숙 저 ‘조선조 궁중 풍속 연구’(1987)가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방대한 기록 속에서도 궁녀에 대한 내용은 드물다. 궁녀란 원칙적으로 ‘왕의 여자’였으므로 왕 말고는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역모사건에 대한 법정 기록인 ‘추안급국안’에 궁녀들의 인적사항과 업무가 대단히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었고, 이 책의 주요 자료가 됐다.

왜 궁녀인가? 수천 년간 침묵을 강요받았던 그들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문화인 왕실의 생활문화를 창조하고 전승한 주역이었다는 것이다. 왕실의 음식과 옷과 육아의 담당자가 그들 아니면 누구였겠는가? 그들은 지밀(왕·왕비의 침전과 대청 등 근무)·침방(옷·이부자리 제작)·수방(수를 놓는 일)·생과방(음료·과자 담당)·소주방(음식 담당)·세수간(세숫물과 목욕물)·세답방(빨래)으로 그 부서가 구분돼 있었고, 정5품에서 종9품까지 직급이 나누어졌다.

▲ 궁녀
방마다 궁녀 전체를 총괄하는 제조 상궁과 부제조 상궁이 있었고, 이들은 각 처소의 궁녀들을 대표하는 실력자였다. 궁녀들도 하녀를 두었는데 방자·취반비·무수리 등이 그들로, 넓은 의미의 궁녀에 포함된다. 궁궐 안에는 우물이 부족해 물을 긷는 ‘무수리’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궁녀들은 생각보다 많은 급료를 받았는데 1년에 적어도 쌀 10가마는 보장됐다. 이러다 보니 갖은 이권에 개입해 재산을 모으는 궁녀까지 생겼다.

궁녀에 대한 웬만한 궁금증은 이 책에서 거의 풀린다. 사극에서 방문을 열어주는 궁녀는 잠도 자지 않고 24시간 대기했을까? 아니다. 주·야간으로 교대했고 보통 12시간 일하고 36시간 쉬었다. 임금의 승은을 입지 못한 궁녀는 어떻게 성적 본능을 해소했을까? 내시·별감과의 스캔들, 심지어 동성애까지 기록 곳곳에 보인다. 여가 시간은 어떻게? 바느질, 글씨(궁체) 연습, 투호….

3년 전 ‘마지막 궁녀’가 세상을 떠난 대목은 서글프다. 1966년까지 순종의 황후인 윤 황후를 모셨던 성옥염 상궁은 이후 절에 들어가 살았는데, 유품은 지갑에 들어 있던 2만3000원이 전부였다고 한다. 어쩌면 최초의 전문직 여성이었을지도 모를 그들의 삶은 끝내 전근대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일까.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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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ho 2004-05-05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어보구 싶어요. 값이 좀 내리거나 이벤트하면 얼른 데리고 올려구요. 물론 평이 좋아야겠지만...요즘 자꾸 사는 책마다 실패하는게 많아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