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법 익혀야 현대사회 소외 극복"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지음 |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스테디셀러는 출판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효자’ 상품이다. 꾸준히 돈을 벌어주어 보다 야심찬 기획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요즘은 좀 덜하지만 한때 가장 많은 스테디셀러를 갖고 있다는 평을 들었던 문예출판사의 ‘효자’는 단연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다.

지금이야 저작권법이 강화돼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해적출판시대에는 중복출판이 일반화됐었고 이런 중복출판의 첫 번째 타깃은 늘 스테디셀러일 수밖에 없었다. ‘사랑의 기술’뿐만 아니라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데미안’, ‘갈매기의 꿈’, ‘어린 왕자’, ‘독일인의 사랑’ 등은 새로 창업하는 출판사들이 으레 살림밑천으로 출판하던 고정 메뉴였다. 당장 한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사랑의 기술’을 두드리니 17종이 서로 다른 출판사에서 나와 있었다.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중복출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스테디셀러의 중요한 자격요건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프롬의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 정확하게 직역하면 사랑하기(loving)의 기술 혹은 기예(art)라는 제목은 이미 ‘사랑은 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두루 섭렵한 프롬은 흔히 우리가 저지르는 사랑에 대한 세 가지 오류를 지적하는 데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의 문제를 사랑하기가 아니라 사랑받기의 문제로 여기고, 사랑하는 능력보다는 사랑하는 대상을 찾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사랑을 막 시작하는 순간의 강렬한 감정만을 사랑으로 착각한다.”

이런 착각을 깨닫고 사랑도 음악이나 그림, 건축, 의학, 공학과 같은 넓은 의미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배워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사랑하기는 제대로 시작된다. 보기에 따라 통속적인 사랑의 기법을 이야기하는 듯하면서도 실은 그가 겨냥하는 것은 역시 사회사상가답게 소외를 부르는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현대사회가 시장의 교환 원칙 지배를 받고 있고 인간의 가치도 결국은 경제적 교환가치 정도로 전락했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있고 이런 정황 때문에 사랑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이 같은 성찰을 바탕으로 그는 사랑의 실천에도 큰 비중을 둔다. 그가 권하는 실천의 핵심은 정신집중이다. 자신에게 집중해 먼저 자립을 이뤄야 한다. 자립하지 않은 자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집착일 뿐이다. 이어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도 그 사람에게 집중해야 한다. 이런 집중은 더욱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쉽지 않기에 일정한 훈련을 해야 한다. 결국 프롬은 성숙한 성찰적 사랑이야말로 자기를 되찾고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을 1976년에 처음 냈던 문예출판사 전병석 사장은 “지금도 1년에 1만여권씩 나간다”며 “얼마 전에는 드라마에 여주인공이 잠시 들고 나와서 화면에 비치는 바람에 한 달에 5만부도 나간 적이 있다”고 말했다. 사랑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잠재독자들이 그만큼 우리 사회에 많다는 뜻인지 모른다.

(이한우기자 hwlee@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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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5-09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기술, 참 좋아하는 책입니다.^^

stella.K 2004-05-09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 볼려구요.
 





아침에 눈을 뜨면 문득 천장의 벽지 무늬가 낯설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매일 습관처럼 보는 방이 갑자기 생경하게 느껴지고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누군가 나를 4차원의 세계에 옮겨 놓은 듯,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순간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릴 때가 있다. 시간이 되면 일어나 기계처럼 학교 가고, 버릇처럼 가르치고 이런저런 일에 치여 밤이 되면 지쳐 잠들고…. 벌써 오월인데,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 속에 그야말로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 허무할 뿐 아니라 죄의식마저 느낄 정도이다. 장영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뭔지, 하루하루 귀중한 삶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저 타성처럼 살아가며 정말 내 삶이 단지 그냥 한 마리 벌레보다 나은 게 무엇인지 간혹 섬뜩한 공포로 다가온다. 그런 맥락에서 카프카의 ‘변신’(1915)이 단지 기괴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인간실존의 허무와 절대 고독을 주제로 하는 ‘변신’은 바로 이렇게, 사람에서 벌레로의 ‘변신’을 말한다.

가족의 생계를 떠맡고 상점의 판매원으로 고달픈 생활을 반복해야 하는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깨어났을 때 자신이 흉측한 벌레가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문밖에서 출근을 재촉하는 가족들의 소리가 들리지만, 그는 ‘장갑차처럼 딱딱한 등을 대고 벌렁 누워 있는’ 벌레가 되어 꼼짝할 수도 없다. 겨우 문밖으로 나갔을 때 식구들은 경악하고 그를 한낱 독충으로 간주한다. 그는 ‘변신’ 이전의 가족에 대한 사랑을 그대로 유지하며 벌레로서의 삶에 적응해 보려고 노력해 보지만 가족의 냉대는 더욱 심해간다. 그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줄 알았던 가족은 모두 새로운 직장을 잡고, 그레고르는 없어져야 할 골칫거리일 뿐이다. 어느 날 그림에 달라붙어 있는 그레고르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기절하자 아버지는 그에게 사과를 던져 큰 상처를 입힌다. 며칠 뒤 각별히 아끼던 누이동생이 하숙생들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들으러 나가지만 벌레의 존재를 보이고 싶지 않은 가족에 의해 방에 감금된다. 그 이튿날 청소를 하러 왔던 가정부는 그레고르의 죽음을 알리고, 가족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함께 피크닉을 간다.

‘변신’은 벌레라는 실체를 통해 현대 문명 속에서 ‘기능’으로만 평가되는 인간이 자기 존재의 의의를 잃고 서로 유리된 채 살아가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그레고르가 생활비를 버는 동안 그의 기능과 존재가 인정되지만 그의 빈자리는 곧 채워지고 그의 존재의미는 사라져 버린다. 인간 상호 간은 물론, 하물며 가족 간의 소통과 이해가 얼마나 단절되어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프라하 유대인 상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법학을 전공하고 스물다섯 살되던 해부터 일생을 보험국 관리로 일했다. 기계적이고 천편일률적인 생활에 매여 오직 밤에만 글을 쓸 수 있었지만, 결국 마흔한 살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그 직업을 떠나지 못했다. ‘변신’은 어쩌면 그가 일생을 통해 느꼈던 철저한 소외와 고립감을 묘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장영희교수
헨리 8세의 왕비였던 앤 여왕이 부정의 누명을 쓰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말은 “오월이군요”였다. 햇볕이 너무 밝아서, 바람이 너무 향기로워서, 나뭇잎이 너무 푸르러서, 꽃이 너무 흐드러져서, 그래서 세상살이가 더욱 암울하고 버겁게 느껴지는 이 아름다운 오월, 새삼 내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며 본능으로 사는 벌레가 아닌 진정한 인간으로의 ‘변신’을 꿈꾸어 본다.

(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조선일보 Books 서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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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5-09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영희 교수의 담담하게 써내려간 글, 잘 읽고 갑니다.^^

겨울 2004-05-09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은 뒤, 고독감과 소외감이 극에 다랄 때면 벌레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요. 어짜피 존재감없이 살바에는 인간보다는 벌레가 되자고요. 바퀴나 모기, 파리를 제외한 거미.... 무지 심각하게 읽은 책입니다.

stella.K 2004-05-09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3년 전이던가? 아는 누구로부터 <변신>을 드라마한 비디오를 본적이 있었죠. 감독의 연출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아, 이런 내용이었구나 했습니다.
저도 읽고나면 인간 존재의 허망함을 느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것 같긴 합니다. 그래도 중학교 때 이 책을 읽으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했었거든요, 이렇게 작품 설명을 읽고나면 좀 이해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출처 : 보슬비 > 사진가가 된 발레리나

..

S#1-If I were a butterfly

오늘은 예전부터 한번은 꼭 다루고 싶었던 무용과 그 순간의 포착을 다룬 사진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소개할 작가는 엘레인 메이슨이란 전직 솔로이스트 무용가 입니다. 그녀는 화려했던 예전의 무용가로서의 삶과 그 이후에 무용작품만을 전속으로 찍는 작가로서 성장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 국립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로 3년에 걸쳐 작품의 주요배역을 맡았던 뛰어난 솔로이스트였던, 그녀는 지금 영국사진작가 협회로 부터 2년 연속 사진작가상을 거머쥐고 있는 세계적인 무용사진 작가입니다. 무용가 출신답게 무용이 가지는 가장 미학적 특징인 육체로 빚어내는 언어의 성질을 가장 잘 이해하고 렌즈로 이것을 표현하는 작가가 된 것이죠.

S#2-Standing on the Tiptoe

저는 개인적으로 무용에 대한 애정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제 서재 한켠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는 무용에 관한 많은 책들, 이덕희 선생님의 '발레에의 초대'라는 책을 시작으로 무용이란 예술언어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읽고 보고 해석하면서 많은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뉴질랜드에서도 새벽에 그곳의 발레학교를 다녔구요. 새벽의 여명과 함께 발레센타로 뛰어가 몸을 녹이고 몸의 구석구석을 찢어내는 일은 힘들었지만 참 해볼만한 경험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여기 캐나다로 유학오기 전에도 바로 국립 발레단에서 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면서 현대적으로 구성된 몸의 움직임과 아름다움에 한장 취했더랬죠. 인간이 발끝으로 설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는군요. 발레에서 흔히 말하는 '쉬르라 뽀앵'은 그렇게 해서 무용의 역사 속으로 주요한 테크닉의 하나가 되어 갑니다.

S#3-Romeo & Juliet

아래 작품은 그녀가 최근에 찍은 영국 로얄 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진입니다. 무용용어중에 '발레닥숑'이란 것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행동이 있는 발레, 이야기로 구성된 발레란 뜻이지요. 로미오와 줄리엣도 바로 이런 전통속에 위치하는 작품이구요. 엘레인 메이슨의 사진이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의 구성 속에서 육체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고 그것을 전달한다는 데 있습니다. 극적 구성일수록 무용수의 감정이 보는 이들에게 전달되는 '메타키네시스' 과정-무용가의 육체를 통해 빚어지는 영혼의 움직임이 관객에게 전달되는것-을 렌즈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좀 어려운 용어가 많이 나오네요. 죄송합니다^^

아래의 작품은 영국 로얄 발레단의 고정 작품중의 하나인 '마농 레스코'와 '오네긴'입니다. 오늘날의 현대발레는 고전의 매력과 역사성 속에서 새로운 변신을 많이 시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학부시절 참 소중하게 읽었던 연극미학책이 한권 있습니다. 피터 브룩이란 영국의 연출가가 쓴 '빈 공간'이라는 책인데요. 그는 여기서 장식과 소품, 화려한 의상으로 가득하지만 생명력이 없는 고전극을 '죽은 연극'이라고 규정합니다. 최근까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백조의 호수'같은 작품에서 흔히 보이는 변화없는 안무와 힘없는 율동, 고정된 법칙들이 바로 이러한 생명력을 빼앗아 가는 요소가 되는 것이죠.

엘레인 메이슨의 작품에서 바로 이러한 진부함과 싸우며 새로움을 발견하려는 노력을 봅니다. 끊임없는 수련속에서 빚어지는 예술로서의 무용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치열하게 인간의 육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짙어가는 가을의 시간, 아마 한국에선 '이야기가 있는 발레'시리즈가 한창일것 같네요. 어떠세요? 오늘 한번쯤 친구 혹은 가족들과 무용한편 보러가시는 것은 말이에요......

[출처]뮤크박스'이사오 사사키와 시노자키의 Fly me to the Moon'

오늘 들으시는 곡은 일본의 대표적인 뉴에이지 피아니스트 이사오 사사키와 첼리스트 시노자키의 공동 연주 작품인 Fly me to the Moon입니다. 가을의 달빛아래 몸을 맡기고 아름답게 하루를 마무리 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해보며.....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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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5-09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넘 좋네요! 퍼가요~^^
 

짝짓기가 만든 인류의 진화

제프리 밀러 지음 | 김명주 옮김 | 소소 | 728쪽


“인류 역사는 곧 짝짓기의 역사다.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것은 5억년 전 눈과 뇌를 지닌 동물이 처음 진화한 이래 우리 유전자가 불패의 성관계를 이어온 덕이다.”

진화심리학계에서 손꼽히는 소장 학자는 책(원제 Mating Mind: How Sexual Choice Shaped the Evolution of Human Nature)에서 ‘성(性)선택’을 진화론의 주 동력으로 내세운다. 상대 유전자의 품질을 감별·선택하는 ‘감독관’과 상대의 식별 능력을 속여 간택받길 원하는 ‘수험생’ 사이에 존재하는 ‘관문’의 변화가 진화(론)를 설명하는 핵심어라는 것이다. 진화(자연선택)는 ‘적자생존’이 아니라 ‘성선택’의 문제다.

성선택은 생존을 위한 자연선택보다 훨씬 지능적이다. ‘자기 유전자 확산’이란 확실한 목표를 갖고 덤벼들기 때문에 상대를 선별하는 데 예민하고, 선택하는 이의 특정 유전형질에 관한 호오(好惡)가 분명히 작용하기에 진화 속도도 빠르다.

“수컷은 과시하고 암컷이 고른다”고 한 다윈의 진화론은 성선택론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성 우위론적 주장에 대한 반감, ‘음란한 무신론(섹스에 대한 담론)’에 거부감을 지닌 열 없는 학자들의 성향 탓에 성선택 이론이 거의 100년간 잠복했고, 남성중심주의 퇴조와 함께 비로소 빛을 보게 됐다고 밀러는 해설한다.

(박영석기자 yspark@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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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05-06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 책은 조심스럽네요. 읽어야 할지... <이기적 유전자>에 성을 추가한 것 같기도 하고..

stella.K 2004-05-06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전 둘 다 안 읽어 봐서요...

바람구두 2004-05-07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한 제 유일한 소망은 책 표지만큼 내용도 야했으면 하는 겁니다. 흐흐.
진화는 아직도 인류의 문제인가? 아니면 과학자의 문제인가?
궁금해질 때가 종종 있어요.
전쟁과 마찬가지로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과학자에게만 맡겨둘 수 없는 일 중 하나가 아닐런지....
 

매튜 본의 댄스 뮤지컬 호두까기 인형
틀에 갇힌 예술 벗어나 대중 속으로…유쾌한 패러디 실험



▲ 댄스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매튜 본.
22세에 무용에 입문한 44세의 영국 안무가 매튜 본. 고전 발레를 패러디해 스스로 ‘댄스 뮤지컬’이라 이름 붙인 그의 작품들을 본다면 차이코프스키(1840~1893)는 어떤 표정이 될까. 지난해 남성 백조로 그득한 ‘백조의 호수’를 보고 열광한 관객들은 그 잔상을 즐기며 매튜 본의 다음 공연을 상상해왔다. 8일 개막하는 ‘호두까기 인형!’(30일까지 서울 LG아트센터). 이것만은 알고 보자.

■이번엔 뭘 뜯어고칠까

온전한 건 차이코프스키의 음악뿐이다. 중산층 가정의 화려한 파티는 온데간데없다. 배경은 춥고 남루한 고아원. 몹쓸 원장은 후원인들이 아이들에게 준 선물을 가로채 벽장 안에 넣어버린다. 밤중에 벽장에서 나온 호두까기 인형이 주인공 클라라를 환상의 세계로 데려가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매튜 본은 원작과 달리 1막을 우울한 공간으로 설정, 환상(2막)으로의 점프를 더 극적으로 꾸민다. 또 사탕과자 나라에서 벌어지는 2막에는 욕심 많은 왕과 왕비, 봉봉 왕자와 슈가 공주, 감초 젤리 등 원작에 없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며 클럽댄스와 재즈댄스 등이 뒤섞인 현대적 춤을 보여준다.


▲ ‘호두까기 인형!’에서 고아원을 탈출한 아이들이 스케이트를 타고 환상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 차이코프스키의 눈송이 왈츠가 흐른다.

■비틀기의 핵심을 들추면

귀로는 고전 발레의 음악이, 눈으론 현대의 춤과 이야기를! 그는 (대사와 노래는 없지만) 뮤지컬을 끌어안는다. 예술적이지만 틀에 갇힌 발레 대신 감각적인 춤과 화려한 쇼로 무대를 풍성하게 채워 대중과 가까워지려는 바람 때문이다. 매년 12월이면 소녀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달려가는 고전 ‘호두까기 인형’이 아니라, 여름철에도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경쾌한 공연을 지향하며 비틀고 뒤집는다. 뮤지컬처럼 빠르고 잦은 무대 전환, 빼어난 음악적 해석, 드라마틱한 이야기 전개, 우스꽝스러운 춤을 배열하는 감각이 없었다면 친숙한 고전을 배경으로 동시대인들의 관심을 삽입하는 그의 패러디는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관객을 즐겁게 하라!

매튜 본이 스스로에게 걸 법한 주문(呪文)이다. 1992년 초연한 그의 ‘호두까기 인형!’은 2002년 훨씬 대중적으로 손질돼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 유명한 작품이 아니면 흥행이 어려운 영국 공연계의 장벽을 뚫은 그의 기발한 댄스 뮤지컬들은 “오락에 치우친 안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지만 대중들은 더없이 열광한다. ‘백조의 호수’ ‘신데렐라’ ‘카맨(Car Man·‘카르멘’을 개작)’ 등 그의 패러디는 고전 발레를 넘어 다른 영역을 넘본다. 발레의 ‘우아한 그림’ 대신 ‘요란한 극(劇)’을 강조해온 본은 내년엔 영화를 제물로 삼을 예정. 그의 손을 거칠 영화는 놀랍게도 팀 버튼의 ‘가위손’. 과연 팀 버튼이 구축한 환상적 세계마저 뛰어넘을 수 있을까.

(02)2005-0114

(박돈규기자 coeur@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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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5-06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너무 재밌겠어요!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DVD살까 하고 있었는데, 이게 훨씬 더 궁금하네요.. 국립발레단 판 호두까기 인형을 작년에 봤는데, 과연 원작을 어떻게 바꿔놓았을지 너무너무 궁금해요! 보러가고 싶어라.. 퍼갈게요.. ^^

waho 2004-05-0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발레 공연 함 봤다가 넘 지루해서 도중 포기한 적이 있어요. 현대 무용도 공짜로 볼 기회가 생겨서 갔는데 공연 이른도 내용도 아무 생각도 안나던데요...
뭘 몰라서 그런건지...

stella.K 2004-05-06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레가 지루하긴 하죠. 발레 언어를 알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메튜 본 건 현란하기도 하고 익살스러운 면도 있어서 지루하단 느낌은 거의 없었어요.

panda78 2004-05-06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 발끝으로 서 있는 것만 봐도 즐겁더라구요.. ^^;;;

icaru 2004-05-07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엘지 아트 센터에서 했던 그 공연을 봤었었어요... 빌리 엘리어트에서 나온 아담 쿠퍼가... 일본 공연시에는 ‘왕자&건달’로 나왔었던 공연이라기에...... 디비디로도 보았는뎅.. 아담 쿠퍼의 몸동작을 더 자세히 볼 수 있다는 것 외엔...산만스럽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