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 따라서 대구 병원에 다녀오던 날, 오랜만에 알라딘 샵에 들러 책을 찾아보다가 덜컥 최영미 시인의 시집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돌아오던 기차 안에서 읽기 시작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처음 알게 된건 <언니네 마당>vol.5 을 읽으면서 였는데 그때 이런 글을 읽었다.

 

 

 

 

 

 

 

 

 

 

 

 

' 스무 살에 끝나버린 서른의 잔치를 미리 엿보았고, 그로부터 다시 스무해가 흘러 지나간 서른의 잔치를 되새김질 한다. 가을의 시작은 그 어느 계절보다 찬란하나, 가을의 끝은 그 어느 계절보다 스산하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내 인생에 가을을 통과하고있다.'

 

사랑과 인생,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저 글을 읽으며 이 시집을 꼭 읽고 싶었는데 알라딘 샵에서 우연스럽게 찾게 되었고 그렇게 읽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선운사'에서로 시작되는 시를 읽으며 사랑에 관련된 시려나 하는 마음을 잠시 갖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농밀해지는 언어를 느끼는 순간, 이 솔직하고 거침없는 성격의 시인과 친밀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목욕>

 

한때 너를 위해

또 너를 위해

너희들을 위해

씻고 닦고 문지르던 몸

이제 거울처럼 단단하게 늙어가는구나

투명하게 두꺼워져

세탁하지 않아도 제 힘으로 빛나는 추억에 밀려

떨어져 앉은 쭈그렁 가슴아-

살 떨리게 화장하던 열망은 어디 가고

까칠한 껍질만 벗겨지는구나

헤프게 기억을 빗질하는 저녁

삶아먹어도 좋을 질긴 시간이여 p35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사랑, 이별, 가족, 일상, 도시의 풍경을 담은 시집인데 이 시집의 특징은 시인의 감성을 정제(精製)시키지 않고 그대로 투과하여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알라딘 출판사 서평에 따르면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성적인 비유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녀의 표현처럼 이 한 권의 시집에는 과감하고 도발적인 시어가 가득했다. 그러메도 이 시집이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건 과감하고 도발적인 그녀의 표현이 응큼스럽지 않다던 김용택 시인의 표현처럼 자연스러운 순수한 인간 자체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던 만큼 출간 후 그녀의 파격적인 시어들이 많이 회자(膾炙)되었고 며칠 전 팟캐스 '노유진'에서도 진중권 교수님이 이 시집을 언급하며 그때의 파급성을 짧게 언급한 부분도 듣게되어 반가웠는데 알라딘 출판사 서평을 잠시 옮겨 그 부분을 살짝 살펴보자면,

 

'남자가 여자를 지나간 자리처럼 / 시리고 아픈 흔적을 남겼을까'(「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네 몸 안에 이미 다른 피가 고여 / 녀석과 간음할 생각으로 / 뱃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어떤 게릴라」)
'아아 컴 - 퓨 - 터와 씹할 수만 있다면!'(「Persnal Computer」)
'내 마음을 받아달라고 / 밑구녁까지 보이며 애원했건만' (「차와 동정」)
'어젯밤 / 꿈 속에서 / 그대와 / 그것을 했다 // 그 모습 그리며 실실 웃다 '(「꿈 속의 꿈」)
'발기한 눈알들로 술집은 거품일 듯 / 부글부글 취기가 욕망으로 발효하는 시간 / 밤공기 더 축축해졌지'(「또다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알라딘 출판사

 

그냥 이렇게 도발적인 부분만 엮어놓고 보자면 문제가 있을성 싶고, 이 시집 전체를 읽고 느껴야지 진정한 '최영미' 시인의 매력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녀도 까발리듯 자신을 뱉어낸 표현들에 조심스런 마음을 비춘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수렁에 대해, 내 위를 밟고 간 봄들, 바퀴자국조차 없이 스쳐 지나간 사람들에 대해, 팔자에 대해 운명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날 꼼짝 못하게 하는 이 더럽도록 아름다운 세상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애써 차린 화려한 감정의 밥상을 지금 마주 대하자니 얼마간 도로 물리고픈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 고통은 이 시들처럼 줄을 맞춰 오지 않고, 아직도 나는 시 에게로 가는 길을 모르므로'p125~126

 

그래서 더 사랑스럽다. 그녀. 최영미 시인이. 요즘처럼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를 시들이 많은때에 읽으면 읽는대로 감성이 느껴지는 시집이기에 사랑스럽다. 또 감정을 포장하기 위해 애쓰느라 뜻 모를 시어로 변색되지 않아서 좋다. 그리고 그렇게 차려낸 감정의 밥상 앞에 한 번쯤 얼굴 붉힐 줄 아는 여성이라서 더 사랑스럽다. 그렇기에 도발스러우면서도 응큼스럽지 않은 그녀의 시가 계속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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