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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 27분 책 읽어주는 남자
장-폴 디디에로랑 지음, 양영란 옮김 / 청미래 / 2014년 9월
평점 :
태어나면서 부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이름을 부여받고 36년동안 투명인간처럼 살아야했던 남자가 있다. 길랭 비뇰(Guylain Vignolles)은 빌랭 기뇰(Vilain Guignol- 심술쟁이, 꼭두각시)가 되어 갖은 놀림에 시달린 남자. 거기다 소심한 성격인지라, 부모님께 말 한마디 못해본 길랭 비뇰.
' 서른여섯 해를 사는 동안 그는 남의 눈에 띌때마다 터져나오는 웃음과 놀림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 잊혀진 존재, 보이지 않는 투명 인간으로 사는 방법을 익혔다.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뚱뚱하지도 비쩍 마르지도 않은 남자. 그저 시야 언저리에서 언뜻 보일락 말락 하는 희미한 실루엣, 아무도 찾지 않은 외딴 곳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 스스로의 존재를 부인할 정도로 주변 풍광과 하나가 되어버린 사람, 한마디로, 그 긴 세월동안 길랭 비뇰은 존재하지 않기 위해서 살아왔다"p9
이런 길랭 비뇰에게도 세상에서 온전하게 존재하는 시간이 있다. 6시 27분이면 플랫폼에 들어오는 지하철 보조의자에 앉아 낱장으로된 종이를 가죽가방에서 꺼내들고 낭독하는 시간이야 말로 길랭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가 낭독하는 종이는 일정치가 않았다. 어떤날은 요리책, 어떤날은 탐정소설, 어떤날은 역사책등 두서없이 잡히는 낱장대로 읽곤했지만, 언제나 그가 낭독하는 시간이면 함께 탑승한 승객들은 조용히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그가 다니는 회사는 엉뚱스럽게도 책을 파쇄하는 공장이다. 짐짝처럼 트럭에 실려오는 수만톤의 책을 '체르스토르 500'이라는 기계에 쑤셔넣고 하루종일 파쇄하는 날이면, 그는 알수 없는 슬픔과 그의 오래된 친구 주세페를 떠올린다. 한때 자신과 함께 공장에 일했지만, 파쇄기의 오작동으로 두 다리를 잃게된 주세페. 그를 떠올릴때면 길랭은 이 체르스토르라는 거대한 기계가 단순히 종이를 파쇄하는게 아니라 뭐든지 먹어치우려는 욕망으로 꿈틀대고 있음을 느끼며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가 다니는 회사 '스테른 컴퍼니'에는 아주 독특한 인물과 괴롭히는 상사와 직원이 있다. 12음절 정형시로만 대화하는 경비원 '이봉 그랭베르'는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아 길랭의 작은 쉼터가 되어주지만, 세상을 이분법적 잣대로 쪼개보는 건방진 아첨꾼 '브뤼네르'와 자신의 유리왕국에서 공장 내부를 훤히 내려다보며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참견하는 공장장 '펠릭스 코왈스키(100킬로미터의 거구라 사람들은 '뚱뚱이'라고 부른다)'는 시시때때로 길랭의 일에 간섭하거나 참견하며 짜증스럽게 만들곤 하는 여느 직장생활의 모습과도 똑같은 모습을 엿보게된다.
이런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를 지하철 낭독시간으로 풀고있던 길랭은 어느날 우연히 자신이 늘 앉던 보조의자에서 떨어진 usb를 줍게 되고 그 속에 72개의 문서파일을 발견하며 한 장씩 읽게된다. 그 문서의 주인공은 28살의 '쥘리'라는 여성의 일기임을 알아챈다. 그 일기에 흥미를 느낀 길랭은 매일 조금씩 지하철 안에서 낭독하게면서 그녀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되는데......(책을 읽을분들을 위해 뒷이야기는 남긴다.)
인물들의 생생한 묘사와 대사가 맛깔스러워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듯 재밌게 읽었다. 그렇다고 빵빵터지는 웃음을 기대하지는 마시길. 소소하게 큭큭 거리며 즐길 수 있는 소설임을 밝힌다.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늘 길랭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일에 놓이게 된다는것을 깨닫는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하고, 만나기 싫은 사람과 만나 일을 해야 하며, 듣기 싫은 잔소리속에 살아가야하는. 그래서 늘 숨고 싶은 '투명 인간'이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길랭과 우리의 다른 모습이라면,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할때 살아 있음을 느끼는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그 일을 하기 위해 하루를 기쁨으로 보낼 수 있다는것, 우리에겐 그런 일이 있는가 살펴볼 일이다. 그런 길랭의 긍정적인 마음에 이끌려 다른 긍정적인 일들이 생겨나는 모양새가 영 나쁘지 않게 다가온다. 다만 결말 부분이 아쉽게 끝나는게 안타까웠지만, 길랭과 주세페의 남다른 우정이 뭉클했고,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쥘리)을 통해 길랭은 미쳐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을 명쾌하게 해결해가는 과정을 느끼며 점점 쥘리에게 이끌리는 길랭의 모습도 나쁘지 않아 참 마음에 드는 소설 한 권을 읽어 기분 좋은 밤이였다.
흑과 백 사이에는 아주 밝은 빛깔에서 시작해서 아주 어두운 빛깔에 이르기 까지 무수히 다양한 뉘앙스의 회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해주려고 온갖 수사를 동언하기도 했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p26
` 잊지 말게, 애송이. 우리와 출판 업계의 관계는 똥구멍과 소화의 관계야! 전혀 다르지 않다고!`
공중 화장실을 관리하는자는, 그것이 어떤 화장실이건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려서 일기를 쓰리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그저 아침부터 저녁까지 걸ㄹ질을 하고, 금속 부품의 광을 내고, 바닥을 문지르고, 때를 빼고, 헹구며, 화장실에 화장지나 채워놓는 일이나 할 줄 알지, 그 외 다른 일은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하지만 내가 락스로 뭉개진 손가락으로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려 나의 생각을 기록한다고 하면, 그 대목에서는 상당한 이해심을 필요로 한다. 아니, 그정도가 아니라 의심의 눈초리 마저 보낸다, 마치, 대단한 오해 내지는 캐스팅 실수가 이닌지 의아해 하는 것이다... 이 지구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28년 동안 산 경험을 토대로 얻은 교훈이라면, 옷이 신부를 만든다는 것이며 사제복 밑에 무엇이 숨어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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