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그동안 다양한 책을 읽어왔지만, 파울로 코엘료의 이 소설 만큼이나 오래도록 나의 머리속에 각인된 책은 없었던듯 싶다. 이 소설이 너무 좋아 코엘료의 다른 책들을 찾아 읽으며 느낀점이 있다면 그 깊이를 드러낼 수 없는 심오함 ,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플롯의 짜임새, 밀란 쿤데라 못지않은 성(性)에 대한 애착, 집착, 표현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선사했다는 것이다.
정신병원과 자살이라는 삶의 극단에서 청춘의 시간을 통과했다는 파울로 코엘료. 그래서인지 이 소설은 그의 삶을 닮았다고 느낀다. 주인공 베로니카가 문득 자살을 결심하고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는 장면에서 부터 시작하는 소설의 첫 장면은 충격과 의문을 던져 주었다. 24살의 나이에 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자살을 결심했다면 그녀가 너무 조숙했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 그녀에게 어리석다 이야기해야 할까.
시간이 지나면 나는 다시 똑같은 바, 똑같은 나이트 클럽에 드나들거야. 친구들과 세상의 불의와 문제점들에 대해 토론도 벌이고, 호수 주변을 산책 하기도 하겠지. 수녀원의 내 방으로 돌아가게 되겠지. 나는 책을 읽으려고 애쓰거나, 텔레비젼을 켜고 매번 똑같은 프로그램들을 볼거야. 전날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기 위해 자명종을 맞추겠지. 도서관에서는 내게 맡겨진 일들을 기계적으로 반복할 거야. 난 극장 맞은편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을거야. 언제나 똑같은 벤치에 앉아서. 역시 점심을 먹으려고 똑같은 벤치를 택해 앉은 여자들. 시선은 언제나 처럼 텅비어 있지만 뭔가 엄청나게 중요한 일에 몰두하는 척하는 다른 여자들 곁에서 p35~36
하지만 나는 베로니카에게 어리석음 또는 조숙했다는 표현보다도 너무 일찍 열어버린 그녀의 판도라 상자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 사람들은 누구나 존재하는 생의 권태로운 마음을 가슴속 깊은 곳에 꼭꼭 숨긴채 모르는척 살아가고 있지만, 어느날 문득 그 비밀스런 상자의 문에 도달해 버린 이들이 느끼는 삶의 공허한 마음들.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존재인지, 매일 똑같이 재깍재깍 돌아가는 시계바늘 처럼 규칙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어떠한 희망도, 기쁨도 느껴지지 않던 절망감에 빠져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했던 그녀의 마음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 결국 따지고 보면 산다는 게 내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복잡한 것도 아닌데
왜 다른 사람 처럼 평범하게 살아가지 못하느냐고 계속해서 물어대겠지" p37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절망적인 삶에 좌절하는 이들에게 세상은 말한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지 못하느냐고. 그런데 말이다. 세상에서 요구하는것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자기만의 개성과 특색이 녹아든 스펙을 쌓으라 요구하면서도 인생은 다른이들처럼 똑같이 살고 똑같이 느끼며 평범하게 살아가는게 정답이라 이야기 한다. 이처럼 웃기며 모순된 말이 또 있을까.
자살이라는 선택 덕분에 정신병원에 입원하게된 베로니카는 의사로부터 길어야 일주일을 살 수 있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된다. 일주일의 시간을 기다리느니 빠른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병원을 나가고 싶어하는 베로니카는 병동에 돌아와 자신은 미친게 아니라 자살을 시도했을 뿐이라고 강력히 항의하다가 문득 의문을 갖는다. 도대체 미쳤다는게 무엇이냐고.
" 미친 사람이란 자기 세계속에 사는 사람이야. 정신 분열증 환자, 성격이상자, 편집광처럼 말이야, 다시말해 뭇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이지.... 하지만, 시간도 공간도 없고 그 둘의 결합만 있다고 믿었던 아인슈타인, 또는 대양 저 너머에 절벽이 아니라 다른 대륙이 있다고 확신했던 콜럼버스, 또는 인간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장담했던 에드먼드 힐러리, 또는 독창적인 음악을 창조해냈고 다른 시대 사람들처럼 옷을 입고 다녔던 비틀스, 아마 너도 이미 그들에 대한 이이기는 들은 적이 있을 거야. 이 모든 사람들, 그리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 역시 그들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살았어"p53
같은 병실의 제드카에게서 자기만의 세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미친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그 세계속에는 창조와 정복, 발견 그리고 미래를 바꾸어 놓았던 힘이 있음을 듣게되고 그런 의미에서 자신만의 세계속에 빠져살았던 베로니카 역시 '미친'사람의 일부였다는 사실과 이 세상이 자신을 판단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루 하루 지나갈수록 자신의 생의 불꽃이 꺼져가고 있음을 느낀 베로니카는 정신병원의 자유로운 생활에서 깊은 내면속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결국 자신이 원하던 삶은 도서관 사서 자리가 아니라 음악을 열렬히 원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 삶에 도달하지 못하고 파괴했던 이가 다름아닌 자신이였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후회스러움을 느낀다.
"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내 하루 하루가 지겹도록 똑같았던 건 바로 내가 원했기 때문 이라는 걸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p71
소설은 베로니카, 제드카, 마리아, 에드아르라는 네 명의 인물의 교차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은 괜찮느냔 물음을 던진다. 살아가면서 원하는 일에 대해 열렬히 갈망해본적이 있는지, 무언가를 원함에 있어 다른이들의 시선이 두려워 포기한 적은 없는지. 다른 사람과 생각이 다르다고 도망치려고 했던적은 없는지, 다른사람에게 자존심을 내세우느라 그들과 같은 삶을 모방하고 있진 않는지, 부모 혹은 주변의 기대심에 자신의 꿈을 펼쳐보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진 않느냐고 말이다.
" 자존심이란게 뭔데? 모든 사람이 널 착하고 예의 바르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넘치는 사람으로 여기길 바라는게 자존심이야? 자연을 봐, 동물 다큐멘터리를 더 자주 보라구, 짐승들이 자기 영토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싸우는지 관찰해봐"p142
의사의 농간이라 말할 수 있는 결말에 도달하며(소설을 읽을분들을 위해 결말은 남겨둔다) 죽음에 이른 베로니카가 선물과도 같은 다음날을 맞이하며 마무리 되는 소설에는 인간에게 죽음이 두려운것은 한정된 삶이 있기 때문이며, 뒤집어 생각해볼때 그렇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행복함, 감사함, 꿈, 의지, 희망 같은 일렬의 감정들을 느낄 수 있고 삶이 더 풍요로워 질 수 있으며 그 의지는 온전히 자신에게 있음을 이야기 한다.
스물 중반에 읽었던 소설이 서른 중반에 읽은 지금까지 여전한 여운과 감동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점은 소설이 갖은 커다란 매력 중 하나인거 같다. 내 생의 순간마다 불쑥 찾아드는 권태로움과 지루함, 따분한 문제들의 선택이 분명 내 안에 있음을 끊임없이 들려주는 파울로 코엘료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이 소설이야 말로, 내 인생의 책 한 권이였노라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