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양장) - 유년의 기억 소설로 그린 자화상 1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1953년생이신 나의 아버지는, 유년기 시절의 추억담으로 양은 주전자를 떠올리신다. 막걸리 받아오라던 아버지의 아버지, 즉 나의 할아버지의 심부름이 있던 날이면 어김없이 논두렁가에서 홀짝거리며 주린배를 채웠노라 말씀하시며 늘 혼이 났던 이야기를 하셨다. 나의 아버지의 어린시절로 그나마 나는 1950년대 이후의 이야기들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 전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할아버지나 할머니(일찍 돌아가셔서)가 계시지 않던 탓에 그 이전의 세계는 미지(未知)의 세계였다.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 말이다.

 

 

 

박완서 선생님의 책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은 1930년~1950년대의 유년기 시절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그런데 보통 유년기 시절을 자서전이나 에세이로 표현 할 텐데 이 책엔 ‘장편소설’로 분류했다. 이유는 ‘기억의 불확실성’이라 했다. 기억이라는 것이 결국은 각자의 상상력이라서, 선생님이 회상하고자 했던 기억 중에 온전한 사실로만 채울 수 없었노라 고백하시는 장면에서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었다. 더불어 얼마 전 기억상실을 다뤘던 소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 과연 이것이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모디아노. 문학동네.p247). 사람의 기억력이란 편의에 따라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으니 그런 부분들은 신경 쓰지 않고 읽기로 했다. 그저 선생님이 들려주실 유년기 시절이 내가 처음 열어본 미지의 문이였으므로.

 

 

 

소설을 크게 세가지 단락으로 나눠보자면, 8년간 유아기를 보낸 묵송리 박적골 벽촌마을과 서울로 올라와 초등학교를 지냈던 현저동마을 마지막으로 불안했던 시국으로 자주 이사를 하며 사춘기를 보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 우리는 어려서 삼시 밥 외의 군것질거리와 소일거리를 스스로 산과 들에서 구했다. 삘기,찔레순, 산딸기, 칡뿌리, 메뿌리, 싱아, 밤 ,도토리가 지천이였고, 궁금한 입맛뿐 아니라 어른을 기쁘게하는 일거리도 많았다. 특히 산나물이나 버섯이 그러했다. 특히 항아리버섯이나 싸리버섯은 어찌나 빨리 돋아나는지 우리가 돌아서면 땅 밑에서 누가 손가락으로 쏘옥 밀어 올리는 것 같았다,p31

 

 

 

벽촌마을의 기억들은 화사한 봄날 같았다. 흰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송도(개성)을 다녀오신 할아버지의 소맷자락 속 노란 봉투의 정겨운 이야기부터, 푸세식 화장실의 도깨비떼, 며느리들이 옹기종기모며 바느질하던 이야기 그리고 산천을 뛰어놀던 이야기들이 참 싱그러웠다. 할아버지 댁이 없던 내 어린시절과 비교해보자면 무척 부러운 추억담 이였는데 훗날, 선생님이 방학이면 어김없이 벽촌마을을 내려가시며 도시에서만 살고 있는 아이들을 참 가엾어 하시는 대목에선 나를 두고 하시는 이야긴 양 참 부러웠다.

 

 

 

‘ 그것은 내 마음속에서 평화와 조화가 깨지는 소리였고, 순응하던 삶에서 투쟁하는 삶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본능적으로 감지한 두려움이였다’p50

 

 

'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 만큼이나 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있었다. 그 줄기에는 마디가 있고, 찔레꽃 필 무렵 줄기가 가장 살이 오르고 연했다. 발그스름한 줄기를 꺾어서 겉껍질을 길이로 벗겨 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했다...나는 마치 상처 난 몸에 부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급하고도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p89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현저동 마을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선생님은 심리적 변화를 크게 경험하신듯 했다. 자유롭게 뛰어놀던 친구들과 산천을 뒤로하고, 복잡스럽고 인심 사납고 청결하지 못한 동네의 모습은 시골의 순박한 아이의 눈에는 신천지라기보다 지옥도에 가깝지 않았을까. 아버지를 일찍 여의였던 탓에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다가 혼이났던일, 어머니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옳고 그름을 저울질 하는 내면의 변화들을 그렸다. 을씨년스러운 산을 넘어 학교로 향하던 시간에 소설의 제목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은 산천을 뛰어놀며 하얀 궁둥이를 까놀던 순박했던 시골 아이의 동심에 대한 그리움이였다.

 

 

 

못다 읽은 책을 그냥 놓고 와야하는 심정은 내 혼을 거기다 반 넘게 남겨 놓고 오는 것과 같았다,p157

 

' 세상의 누가 돌연 젊음을 엄습하는 운명적이고도 무분별한 정열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을까.‘p207

 

' 그날 밤 그 여자와 숙부 사이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때로는 사춘기 소녀의 상상력이 무르익은 중년의 실생활보다 더 외설스러울 수도 있다‘p226

 

 

 

중학교부터 대학시절까지의 모습에선 시선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시선에서 또래와 주변 인물들로 옮겨가며 사회정세(情勢)에 까지 두루두루 변화하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문학소녀가 되어가는 감수성이 좋았는데 그 당시 도서관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참 놀라웠고, 세계문학전집이나 <아 아 무정> 이란 제목의 레미제라블도 있었다니 고전(古典)이란 단어의 참 뜻을 느껴볼 수 있었다. 사춘기의 외설스러운 상상력이나, 몰래 영화 관람하던 짜릿한 모습은 어린 아이에서 소녀로 변모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었다. 또한 전시 상황에 함께 마음조리고, 가족들에게 벌어진 수난의 시절에선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좌익 우익 사상(思想)이란 시국(時局)에서 발생한 전쟁의 파편으로 모두가 전쟁의 피해자가 아니였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소설을 읽기 전엔 금방 읽을 수 있을꺼라 생각했으나 빠르게 읽어내진 못했다. 생소한 단어들의 등장으로 잠시 책을 내려놓고 단어를 찾아봐야했기 때문이다. ‘여북해야’‘ 개 팔아 두냥 반 ’‘ 뒤란치레 ’와 같은 단어들을 만나면 생소하기도 했지만 재밌었고 또 놀라웠다. 『박완서 소설어사전』이라는 책도 있다는 사실도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책을 가지고 초등학교에선 슬로우 리딩을 한다고 한다. 슬로우 리딩 이라면 『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 』 (이토우지다카. 21세기북스)의 다카시 선생님이 생각난다. 국어 책은 뒤로 한채 ‘은수저’라는 고전소설로 3년동안 깊게 읽는 수업을 진행하셨다는 이야기를 읽고 참 부러웠는데 우리나라 초등학교에서도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로 시작했다고 하니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이렇게 좋은 소설을 아이들과 함께 슬로우 리딩 독법을 한다고 하니 많은 격려와 박수를 보내고 싶다. 부디 이런 좋은 책들이 널리 깊게 읽혀지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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