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 구운몽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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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시절부터 들어온 유명한 작품임에도 이제야 읽게 되었다. 고인의 추모를 계기로 리뷰대회를 열어주신 관계자들께 감사한 마음이다. 제목으로 보아서는 시위 현장의 모습과 광장에서의 민중의 역사를 다룬 이야기인가 했었는데, 읽어가면서 깨닫게 된 광장은 인간의 삶의 터전, 바로 그것이었다. 이 작품을 통해서 당시 처한 상황에서 이명준이 겪어야 했던 운명적인 개인사와 국가에 대한 이데올로기와 사랑, 자유를 둘러싼 환경에서 그 고통과 갈망이 얼마나 컸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는 바로 당시 사회의 어떤 이의 아들이었고 오빠였으며, 이웃의 고통이기도 했을 것이다.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징이 울리는 원시인의 광장으로부터 한 사회에 살면서 끝내 동료인 줄도 모르고 생활하는 현대적 산업 구조의 미궁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광장이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혈거인의 동굴로부터 정신병원의 격리실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밀실이 있다.

                                                    (중략)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의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P18, 1961년판 서문)


 광장과 밀실의 대조를 들어가며 끌어가는 이 이야기는 우리 삶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거친 삶의 현장인 광장과 아늑함을 느끼는 밀실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우리의 삶을 이루는 과정일 터이다. 오래전 쓰인 작품이지만 오늘날도 여전히 분단국가인 상황에서 남북이산가족으로 남아 있는 이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의 월북으로 인해 이명준은 서에 불려가 고문을 당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고백하도록 강요당한다. 권력의 힘으로 짜 맞춘 그들의 밀실에서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 내보내진다. 밝은 대낮에 민중에게 보여도 아무 상관없다는 처사다. 법률의 혜택도 이명준 에게는 미치지 않는다. 뭇 시선 또한 놀라움으로 커졌다가 제자리로 돌아갈 뿐이다. 이러한 일이 지금은 없을까 싶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그대로 재현되고 있을 것이다. 팽배한 무관심은 비리를 저지르도록 부추긴다.


 두어 번의 부름 후에 이명준의 마음 저 밑에서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의 파문이 인다.

자 보람 있는 삶이 끝내 자네 것이 된 거야. 갈빗대가 버그러지도록 벅찬 불안에 살 수 있게 되지 않았나. 하루의 시간이 어두운 무서움으로 짙게 칠해진, 알차게 익은 시간이란 말일세. 자네가 그렇게 조르던 바람이 아닌가. 이제 심심하단 말은 말게.’

스스로 두려운 불안을 어떻게 이겨낼까 몸부림친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의지할 혈육도 없이 맞닥뜨린 상황이 섬뜩해진다. 이미 추악한 탐욕과 배신, 살인이 난무하는 한국 정치의 광장에 신물을 느끼던 이명준은 월북을 결심하게 된다.


 새로운 세계는 어땠을까. 월북 후에 바라 본 만주벌판의 붉은 저녁노을은 활활 타오르건만 정작 자신은 심장의 두근거림을 잊은 지 오래다. 그래도 일말의 기대감은 있었겠지. 하지만, 만주의 저녁노을과 달리 잿빛 공화국을 마주대한다. 마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맥 빠진 얼굴들이다. 자신은 최대한 죽이고 당 선전부의 뜻을 살려야 한다. 새로운 삶을 다짐하고 늦은 시간가지 공부를 하면 노력했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현실에 허탈감을 감추지 못한다.


어느 모임에서나, 판에 박은 말과 앞뒤가 있을 뿐이었다. 신명이 아니고 신명 난 흉내였다. 혁명이 아니고 혁명의 흉내였다. 흥이 아니고 흥이 난 흉내였다. 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소문뿐이었다. 월북한 지 반년이 지난 이듬해 봄, 명준은 호랑이굴에 스스로 걸어 들어온 저를 저주하면서, 이제 나는 무얼 해야 하나?’(P124)


 누구를 위한 당이고 국가인가. 인민들은 당에게 끌려 다니기만 하지 아무런 감정이 없는 존재다. 굿만 보고 무관심 일색인 그들은 당의 노리개가 될 뿐이라고 아버지에게 외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실체 없는 두 사상은 언제나 권력을 가진 자들의 배를 불려주었다. 인민들은 힘없는 나약한 존재다. 그것도 살기 위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하는 민중의 삶은 얼마나 가여운가.


 남녁도 북녘도 명준이 의지하고 살만한 광장은 없었다. 당에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지만, 날선 시선을 느끼며 값진 요령을 깨닫는다. 옛날 S서에서 취조를 받고 느꼈던 마음의 방문이 부서지는 소리. 두 번이나 거부당하는 삶의 광장. 전쟁은 끝났지만 두 체제의 믿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 그것은 이명준으로 하여금 중립국으로 가는 인도 배 타고르호를 타도록 만든다.


 윤애의 반쪽 사랑에 비하면 은혜는 온전한 사랑이었다. 대중의 광장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은혜와의 사랑으로 치유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밀실이었던 동굴에서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어쩌면 마지막 남은 삶의 의미였을 수도 있는 은혜의 죽음을 알고 얼마나 황망했을까. 그것이 그를 푸른 심연의 광장으로 뛰어들게 했을까. 어디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삶, 그곳에서는 자유를 마음껏 향유하고 있을까. 여기서도 저기서도 원하는 삶은 이룰 수 없었다. 혁명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지만 한 개인의 힘은 약했다. 이미 짜여진 사회조직을 바꿀 만큼 힘을 실어주지도 못했다. 어쩌면 시대의 아픔일 수도 있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뿌리치고 제3국만을 고집했던 이명준의 저 안의 고여 있던, 자유를 향한 갈망이 안타까웠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이 작품을 읽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있어 광장과 밀실의 의미는 무엇일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민중이 이어가는 삶이 곧 역사가 된다. 대중의 광장보다는 심해의 밀실을 택했지만 그를 나약하다고 탓할 수는 없다. 개인을 발붙이게 할 수 없는 국가의 이념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올바른 민주주의 광장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는 없겠지만 전보다 조금씩 나아가는 건강한 광장을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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