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우 - 한비자와 진시황
양선희 지음 / 나남출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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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에 배운 기억으로 진시황은 분서갱유와 만리장성을 구축한 중국 천하를 최초로 통일한 황제, 한비자(韓非子)는 제자백가 중 법가(法家)의 사상을 완성시킨 학자였다. 그 외에 더 깊은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접한 적이 없어서 오히려 다른 선입견 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역사적 사실과 저자의 상상력이 보태져서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렵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혼란한 전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는 무렵에서 천하통일을 하기 전 1년 정도의 기록이라고 되어 있다. 한비자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傳記)소설이 아닌 책략(策略)소설이다. 그러므로 《전국책》과 같은 책략서나 《손자병법》,《울료자》등의 병법서,《노자》와《순자》등의 생각을 많이 빌려 왔다고 한다.

 

 한비의 고분(孤憤) ·오두(五蠹)의 논설을 보고 “이 사람과 교유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까지 감탄한 영정의 간절한 마음이 닿아서 만남이 이루어지고, 기댈 곳이 없어서 늘 고독했던 영정의 마음속에 한비의 존재는 깊숙이 자리하게 된다.


‘절벽’

 인생이 무엇이냐는 영정의 물음에, 한비의 대답이다. 영정은 이 말을 듣는 순간 그 낯선 말에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곱씹을수록 눈물이 흐른다. 여불위의 단단한 팔에 안겨 있다가 조희에게 떠넘겨진 불안한 기억을 더듬어 찾아낸다. 아비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평생의 상처로 다가왔을까. ‘내 인생도 늘 절벽이었다. 한비처럼... .’ 또한 이후 한비의 운명을 예견하듯 마음이 싸늘하게 내려앉는 말이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꿰뚫어 욕망을 멀리하여 마음을 수양하고자 노자(老子)에 심취하였던 한비. 날로 어지러워지는 세상에 대한 근심이 커지면서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타고난 말더듬이 장애와 그의 세상을 읽어내는 그의 혜안도 장애라면 장애였다. 형 세자의 안위를 위해 초나라 볼모로 보냈는데, 오히려 그의 영특함이 세상에 알려졌고 급기야는 영정의 스승이 되어버렸다. 당시 최고의 음양가(陰陽家) 옥화의 예언대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었다. 고국 한나라를 생각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사직을 돌보지 않고 경솔하게 자만심만 내세우는 왕, 국내의 우수한 인물은 임용하지 않고 사람이 없다고 타박만 하는 왕이 어떻게 강국 진나라와 대적할 수 있겠는가.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은 외정(外政)이 아니라 내정(內政)에 있다는 말은 자연스런 진리다. 국가원수와 조정 관리의 불신, 국민이 정부를 믿지 않고, 국민들끼리의 단결이 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분열되고 와해되기 마련이다. 타국에서는 그것을 반기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한다. 우리에게 당면한 현실 문제가 자연스럽게 겹친다.


 영정이 천년왕국의 야망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중에,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는 이사와 조나라를 먼저 쳐야 한다는 한비와의 대결구도가 분분하다. 한비의 상소에 감탄하는 영정, 조나라 정벌이 유력시되자 이사는 격분한다. 순자(荀子)의 제자로 동문수학했던 벗이 아니라, 이제는 자신의 앞날을 가로막는 원수일 뿐이다.


 대대로 조나라 한단 최고의 갑부인 여불위는 ‘주군을 세워 나라를 안정시키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만큼의 이익이 있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자초에게 투자하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의 애첩인 조희와 짝을 지어주는 통 큰 마음속에는 검은 야망이 끓고 있었다. 정경유착의 고리는 고금(古今)의 전통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무소불위의 권력과 셀 수 없는 재산을 남기고 자결을 하다니. 그 정도의 재산이라면 왕위를 찬탈할 수도 있었겠다. 영정의 아비였던 것일까, 추측하게 된다. 아들의 나라를 온전하게 유지시키려는 아비의 마음이었던 것일까.


 책략소설답게 계략 대 계략으로 치열한 머리싸움이 진행된다. 조나라로 진군한 전쟁은 승전보를 울리며 함양성은 승리에 도취되어 어디든 잔치가 벌어진다. 강한 왕과 규율이 잡힌 조정, 가장 이상적인 조정의 모습을 적국에서 바라봐야 하는 한비의 마음은 마냥 부럽기만 하다. 흠모했던 상앙의 변법으로 한나라를 부흥시키고자, 피를 토하듯 왕에게 직언을 하며 간언을 했지만, 모두 무시당했다. 망국의 길로 매진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 심경은 얼마나 무너지고 있었을까. 도(道)와 세상을 논하며 문재(文才)를 닦았는데, 그것을 적국의 왕의 권력을 위해 써야 하다니. 이제는 구걸이라도 해서 백성의 목숨만은 지키려고 하는 한비의 처지가 안타깝다.


 고국을 포기했나 싶으면서도 한비의 가슴 깊은 곳에는 어떻게든 구하려는 생각으로 꽉 차 있다. 아직 벼슬 없이 명색이 ‘사부’라는 위치에 있지만, 의심의 긴장감을 느끼며 아슬아슬하게 지내고 있는 느낌이다. 영정과 한비는 서로 깊이 마음을 털어놓고 위로하고 위로받는 벗이 되었지만, 서로의 갈 길은 다르다. 벗이지만, 적(敵)일 수밖에 없는 운명의 아이러니. 사려 깊은 한비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다. ‘성공해도, 실패해도, 가만히 있어도 나는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는 걸 선택할 수는 없다.’(p266).


 전설적인 조나라의 이목 장군의 전술로 인해 진나라의 2차 원정은 완패. 한편 요가는 이사를 찾아가 함께 살 길을 모색한다. 한비를 향한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기에 죽기를 각오하고 영정에게 계책을 설토한다. 얼마나 절실한 웅변인지 등을 돌렸던 영정은 다시 요가의 관직을 회복해 놓는다. 한비의 목숨은 이들이 쥐고 있다. 그토록 한비를 총애하던 영정도 이로움의 저울질 앞에서는 헌신짝같이 버린다.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그래왔다. 벗이라는 이름으로 충실하게 부려먹고 자신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가차 없이 내친다. 적국의 책사(策士)노릇을 하다가 억울한 죽음에 당면한 한비의 말은 마음이 무겁다.


‘내가 애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애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어. 진나라가 부강해지는 100년 동안 군주가 넋 놓고 앉아 애쓰지 않은 나라를 어찌 하늘이 벌하지 않겠는가? 아니다, 모두 나의 죄다. 혁신해야만 살 길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행동하지 못하고 죽간만 희롱한 죄,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한 죄... 내가 죽어 마땅한 죄는 땅과 하늘을 덮고도 남으리라.’


 역사 속에서 지혜를 얻는다는 말은 오래된 진리다. 신하는 자신의 이해득실을 위해서 일하지, 국가와 군주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군주의 총애를 팔아서 제멋대로 권세를 부리는 일이 오늘날에도 벌어지고 있었다. 인간의 끝이 없는 욕망은 언젠가는 그 욕망으로 인해 다치게 된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같다. 잠깐 살다 가는 인생인데.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적이 되기도 하는 세상이다. 역사 속의 다양한 인간 군상의 욕망과 심리를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단지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똑같이 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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