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리나 부인과 두더지 손님
에르네스토 페레로 지음, 파올라 마스트로콜라 그림, 김현주 옮김 / 재승출판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퀴리나 부인은 이탈리아의 명문가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고, 학창시절 도시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한 재원이었다. 부인이 이곳 롬바르디아 지방 산동네에서 혼자 살기 시작한 것은 15년 전에 과부가 되면서부터였다.

퀴리나 부인의 정원에는 로즈마리와 세이지, 차이브, 바질, 토마토, 치커리밭, 호박이 주렁주렁 열린 밭도 있었다. 잔디밭에는 커다란 수국, 모란, 백일초 한 다발이 앤티크 장미들과 거의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며 펼쳐져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조화로웠다. 이 세상의 모든 가정과 단체에서 본받아야 할 만한 완벽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대문만 닫으면 혼란한 세상과 차단되는 공간. 정기 구독한 신문으로 매일 일어나는 재해와 폭력, 불행한 사건을 담고 있는 세상을 알 수 있었다.


잔디밭 한가운데에는 안네타 대고모님이 심은 최소한 백 년이 넘는 늙은 배나무가 있었다. 배들은 해마다 열매를 맺었고 근처 수녀들이 주워다가 잼을 만들어 구호소 수용자들에 제공하곤 했다. 이렇게 부인은 정원을 가꾸고 정리하며 그 반듯한 질서를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곤 했다. 부인은 외로움도 별로 느끼지 않았으며, 혼자 지낼 수 있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다. 건강상태도 최고였다. 스스로도 완벽하게 만족할 만큼. 자신은 농부들이 좋아하는 소 품종인 ‘브루나 알피나(Bruna alpina)'에 속한다며 으스댔다. 브루나 알피나는 16세기 이탈리아에 서식하던 힘 좋고 수명도 길고 젖도 많이 나오는 암소 품종이다.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자신의 규칙에 따라 정원을 다스리는 한 죽음 따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오직 눈부신 5월의 아침 풍경만 가득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아침, 부인의 고요한 규칙을 깨는 풍경이 있었으니.

부드럽고 푹신한 잔디 양탄자를 밟으며 걷다가 풀밭을 지나왔을 때 화가 치밀고 증오심이 끓어올라 참을 수 없어 폭발하는 듯 했다.

땅이 파헤쳐져 원뿔 모양으로 쌓여 있었던 것이다.

퀴리나 부인의 비명은 30미터나 떨어진 식료품점까지 들렸고, 이에 위풍당당하고 친절한 안토니에타 부인이 달려왔다. 일명 ‘숭고 부인’이라고 불렸다.


퀴리나 부인의 백과사전에는

‘모든 두더지가 낮이든 밤이든, 여름이든 겨울이든 언제나 생기 있고 아주 활동적이다. 대부분의 두더지가 행동이 민첩하여 땅속에 굴을 파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일부 수중생활을 하는 습성이 있는 두더지들은 수영도 매우 잘한다’고.

딸인 마리아 피에라도 밤새 인터넷을 뒤져서 조사를 했다. 두더지들은 서로의 땅굴이 연결되도록 파고 악명 높은 원뿔 모양 흙더미는 땅굴 보수작업이 남았을 때 쌓아두는 것이었다. 이 흙더미로 땅굴을 깨끗하게 유지한다고 한다. 흙을 파다가 식물의 뿌리를 손상시키기도 하지만 먹지 않는다. 두더지들의 움직임이 빠른 것은 매일 자기들의 체중과 비례하는 영양분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즉 땅굴 파기는 먹이를 찾기 위한 활동이라고.

또 두더지가 외롭게 산다고 했다. 짝짓기를 하면 평균 세 마리에서 다섯 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고 젖을 떼고 나면 되도록 빨리 바깥세상으로 내보낸다. 그렇게 새끼를 떠나보내고 혼자 살면서 자신의 영역을 맹렬하게 지킨다.

퀴리나 부인은 불쾌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두더지가 조금 지나치게 영리하고, 모범적인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동물들의 세계에서는 새끼를 망치는 어미가 절대 없다.


“글쎄요. 두더지가 부모들은 못하는 걸 하더라고요. 요즘은 부모가 항상 대기하고 있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스마트폰이나 소셜네트워크 같은 것에 빠져 바보가 되게 만들기도 하죠. 아이들을 방치해두면 그렇게 점점 덜 스마트해지고 있어요. 이게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죠.”(p51)

“먹이 사냥이 너무 바빠서 서로 갈등이나 싸움을 만들지도 않아요. 요즘은 이런 것을 두고 자원의 최적화라고 부르죠.”(p52)

퀴리나 부인은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주고받는 것이 균형을 이룬다면 고독한 삶이 공생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일찍이 에피쿠로스도 숨어서 살라고 당부했었다. 시인들이 침입자 편에 서 있다는 것도 부인의 마음을 거슬렸다.


숭고 부인의 권유로 처음으로 통마늘로 두더지 퇴치를 시도한다.

두 번째는 땅굴 입구 근처에 병을 꽂고 그 위에 금속 막대를 올려놓는 것이었다. 바람이 불 때 부딪히는 진동으로 쫓아내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땅굴 입구에 호스를 끼워 넣고 하룻밤 동안 수도꼭지를 열어 놓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방법이다. 또 야생 고양이를 동원하고, 다음엔 금속 파이프. 모두 실패.

다음은 덫이다. 딸과 사위가 덫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여 최대한 부드러운 덫을 구입 했다. 숭고 부인과 함께 덫을 설치하고 두더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미운 적을 막상 마주할 준비가 안 됐는데... 드디어 적이 나왔다. 두더지는 파헤친 흙에 앞발을 올려놓고 미동도 하지 않고, 부자연스럽게 부인쪽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브루나 알피나 암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려고 지팡이를 잡았는데도 두더지는 꼼짝을 하지 않는다. 마주한 두더지의 눈에서 왜 체키나의 눈이 보이는가. 체키나는 전쟁중에 부인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굶어죽지 않게 매일 알을 하나씩 낳아 준 암탉이다.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너희 언니’이며 가족처럼 지냈던.

퀴리나 부인이 지팡이를 들어 내리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잠시 풀밭에 내려놓고 다시 돌아봤을 때는 두더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모두 패배로 끝났다.

이제 두더지와의 전쟁은 그만 두고 싶었다. 자신과 두더지가 공통점이 너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친구인 아델라이데에게 고백한다. 동료처럼 지내고 있으며, 애완동물이나 다름없지만 매일 먹이를 챙겨줄 필요도 없다고 말이다.


그 후 문득 두더지가 부인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바로 ‘경쟁상대’였다.

“우리의 인생에는 경쟁상대가 필요해요. 그래야 제자리에 멈춰 서지 않고 해이해지지도 않죠.”

성탄절을 앞둔 퀴리나 부인의 생일에 손자들로부터 두더지 박제 인형을 선물로 받았다. 두더지의 털은 얼마나 부드러웠는지. 어리시절 체키나와의 추억이 물밀 듯이 밀려옴을 느낀다. 겨울이 오고 눈이 두껍게 땅을 덮었는데, 퀴리나 부인은 전혀 흔적이 없는 땅 속의 두더지가 걱정이 된다. 딸과의 통화도 화제거리가 없어서 짤막하게 끝났다. 다시 여름이 오고 화려하게 핀 수국 아래 신선한 흙더미를 발견한다.


“돌아왔어!”

두더지의 흔적에 퀴리나 부인은 마냥 생기가 돌았다. 경쟁상대가 돌아온 것이다. 우리에게 활력을 주는 경쟁상대 말이다. 우리와 공존하는 삶의 동반자인 것이다. 어린시절 시골에서 밭고랑에 죽어 있는 두더지를 본 적이 있다. 무서웠었다. 몸집은 뭉뚝하고 통통하며 발바닥이 분홍색이었던. 날렵하지도 않은 그 몸으로 어떻게 땅을 파고 다닐까 궁금했었다. 그 후 두더지는 볼 수 없었다. 땅 속의 광부 두더지는 아직도 어디선가 밭을 갈고 있을까. 세상의 만물은 모두 존재의 이유가 있겠지.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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