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키 키린의 편지 - 삶을 긍정하는 유연한 어른의 말 키키 키린의 말과 편지
NHK <클로즈업 현대+>·<시루신> 제작부 지음, 현선 옮김 / 항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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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우리 큰 아이와 키키 키린이 나오는 영화 오다기리 죠의 도쿄 타워를 보았다. 생활력 없는 남편 때문에 고생하며 아들을 키우는 강인한 엄마, 예전의 우리시대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다. 인상 깊은 장면은 도쿄 타워가 보이는 병실에 누워 아들과 함께 대화하는 장면이다. 다 나으면 그 타워를 보러가자고 했는데 결국은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렇게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싶다. 오랫동안 암 투병으로 고생을 했다는데 아마 그 영화를 촬영할 당시에도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환자 역할이 자연스러웠나보다.

 

  이 책을 통해서 키키 키린이 많은 편지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지인이 아니라 일반인에게 쓴 편지가 많아서 놀라웠다.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인데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왕따 근절 운동을 하는 사람, 홋카이도 무인 역에 쓴 편지, 영화의 모델이 여성에게 보낸 편지, 강연회 주최측에 보낸 자필 팩스라든가 성인의 날을 맞은 많은 청년들에게 쓴 편지 등이 들어있다. 여기에 실린 편지는 NHK <클로즈업 현대+><시루신> 제작부에서 만든 것을 모아 놓은 것이라 한다.

 

  한센병 환자가 걸어온 인생을 그린 영화 <>의 모델이 된 여성을 찾아간 이야기가 있었다. 자신이 배우라는 신분을 밝히지 않고 약속도 없이 만나서 그 사람 본연의 모습을 보고 온 것이다. 그 주인공 모습을 제대로 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서 투철한 직업정신 또한 느낄 수 있었다. 한센병으로 13세에 가족과 격리된 우에노의 인생은 우리가 아웅다웅 경쟁하며 살아가는 모습과는 또 달라 보인다.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가면서 없는 사람취급을 받으며 살아온 건 아닌지. 영화에서 키키 키린은 도쿠에가 되어 그들의 삶의 의미를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듣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러니 특별히 뭐가 되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거야.(P51)

 

  무엇이 되기 위해 희망을 갖는 것도 그들에게는 사치다. 그저 보고 듣기 위해서 태어났고 그래서 살아갈 의미가 있다는 위로에도 마음이 짠해지는 것은 왜일까. 갑자기 다녀간 후에 키키 키린은 우에노 마사코에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우에노 마사코 씨께

 

1018일 날이 참 좋았죠.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영화 <> 촬영 끝마쳤습니다.

헤이세이 26(2014) 122

-날씨가 좋았어요.

 

  간결하지만 다정함이 느껴진다. 우에노 마사코는 지금도 키키 키린의 편지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으며 손님이 올 때마다 자랑할 수 있도록 손닿는 곳에 둔다고. 사람은 떠났어도 산 사람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우에노 마사코가 들려 준 말도 여운이 남았다.

 

남은 인생이 그렇게 길 것 같지 않지만, 올바르게 살고 싶어요. 인간으로 태어나서 믿는 구석이 없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신념을 가지고 사는 건 정말 힘든 일이지만,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요. 고맙습니다.”(P52)

 

  키키 키린은 2015년 방송 촬영 중 짬을 내어 나가노 현 우에다 시에 있는 무곤칸이라는 미술관을 들르게 된다. 이곳에는 태평양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미술학도가 남긴 그림이 전시되어 있고 매년 성인식을 열리고 있다고 한다. 성년이 된 이들의 새 출발을 축복하는 자리에 저명인사를 초대하곤 하는데 관장의 초대로 2016년 성인식에 참석하게 된다. 특이한 점은 성인식에 참여한 모든 청년에게 초대 손님이 직접 편지를 건네는 이벤트였다. 여기에 청년들에게 쓴 편지가 들어있는데, 청년들의 설문을 참고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춤 편지를 썼다는 게 놀라웠다. 바쁜 스케줄과 암에 걸린 사실을 공표한 뒤였음에도 청년들을 위해서 시간을 냈다는 것은 그녀의 따뜻한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 중 쓰야마 준이치에게 쓴 편지가 마음에 와 닿았다.

 

쓰야마 준이치 씨께

 

장래 희망란이 비어 있더군요.

나는 우연히 열여덟에 배우가 되었는데

육십이 넘어서야 겨우, 앞으로 연기자를

목표로 삼기로 정했어요.

난 좀처럼 입을 잘 열지 않는 아이여서

말하는 게 익숙지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타인의 말을 듣는 귀를 키워줬어요.

단점을 장점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내 특기죠.

자기 안의 목표가 확실하지 않다면

열정을 발휘하는 누군가가 있는 곳에 한 발 들이는 것도

방법이에요.

……

 

나이 육십에 연기자를 목표로 삼았다는 말은 꿈 없는 청년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였을까.

취재가 끝날 무렵에는 쓰야마가 키키 키린의 인터뷰 발언을 알려주었는데

연기를 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서,

생업을 위해서 연기를 통해 여러분과 만나고 있다.”고 했단다

  절대로 삶을 허투루 살지 않았을 것 같은 모습이 떠올라 숙연해졌다. 연기하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치열한 삶이었던 것이다. 그동안에도 연기를 하고 있었으면서도 어떻게 육십이 넘어서 목표로 삼았다는 것인지, 위트가 느껴졌고 웃음이 났다. 그렇게 연기와 삶을 구분하지 않고 성심을 다해 살았다는 말이겠지. 꿈이 없을 때는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찾아가보라고 일러준다. 다른 사람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삶의 의욕을 느끼기도 하지 않은가.

 

키키 키린 씨께

 

편지 감사합니다.

……

이전에는 꿈이나 목표는 자주 바꾸면 안 되고 늘

그것을 향해 정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편지를 읽으며 꼭 평생을 걸 만한

꿈이나 목표가 없어도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유연한 태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표가 작거나 꿈이 좀

엉뚱해도 괜찮다는 걸 알아서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

쓰야마 준이치

 

  쓰야마는 처음엔 편지의 내용을 이해 못했지만 거듭 읽어보면서 참뜻을 깨닫고 마음의 변화를 보면서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모두들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으며 키키 키린의 깊은 사랑과 존경심을 느끼고 있었다.

 

가느다란 실 하나로

겨우 이어져 있네요.

말 한마디 안 나와서

힘들고

곤란한

노파입니다.

K.KIKI

 

 

 

 

 

  키키 키린의 마지막 메시지가 된 편지다. 그녀가 세상을 뜨기 한 달 전 골절로 입원하게 되어 발표되었는데 일 관계자들에게 그 상황을 알렸다고 한다. 굵직하고 힘이 넘치던 글씨가 여기서는 정말 가늘어졌다. 병으로 인한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짐작할 수 있어서 마음이 짠해 왔다. 삶에 있어서 언제나 솔직하고 정중하고 진지하게 살았던 모습을 여러 사람들에게 쓴 편지로 알 수 있었다. 상황은 좀 다를지라도 우리는 거의 비슷비슷한 문제로 고민하며 살아가지 않을까.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을 잃지 않았던 키키 키린의 편지는 우리에게 위로를 주고 깊은 감동을 준다. 암 투병으로 오랫동안 힘들었다는 키키 키린의 삶을 알게 되고,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겠지만. 미리 아프기 전에 운동도 열심히 하고, 너무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다는 적당히 유연한 삶을 지향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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