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빨강머리 앤 - 낭만을 잊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른이 된 앤 셜리가 전하는 말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허씨초코 그림, 신선해 옮김 / 앤의서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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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소녀시대를 지배했던 빨강 머리 앤은 언제 읽어도 흥미롭다특히 온갖 것에 이름을 붙여주고 말을 거는 다정한 앤단짝 다이애나와의 무궁무진한 에피소드그 다음엔 길버트와의 우정사랑을 둘러싼 장밋빛 분위기는 어른이 되어 읽어도 설레고 미소를 짓게 한다책을 받아보니 예상보다 판형도 작고 얇았다빠르게 넘겨보니 간간히 들어있는 일러스트와 짤막한 문장이 마치 앤의 어록만을 따로 모아놓은 듯한 느낌이었다어라앤의 대학시절을 비롯한 뒷이야기가 완전히 들어있지는 않겠구나 싶었다역시 그랬다이 작품은 에이번리의 앤레드먼드의 앤윈디 윌로우즈의 앤앤의 꿈의 집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앤이 했던 주옥같은 말들과 그녀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장면들을 뽑아서 새로 엮은 것 같다또 영어로 된 원문도 함께 싣고 있어서 원작의 생생함도 맛볼 수 있다여백이 많은데 활자가 좀 컸더라도 좋았을 것 같다하지만 상상력으로 무장한 톡톡 튀는 앤의 대사는 살아 있었다온전하게 연대기적으로 엮어진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앤의 말을 통해서 이게 어느 부분에 들어있는 이야기였지상상하며 읽는 재미는 쏠쏠하다.

 

 쉴 새 없이 재잘거리던 소녀 앤이 스무 살이 되었다꿈을 꾸는 듯한 눈빛과 끊임없이 공상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희망과 웃음을 주던 앤의 어록을 만나 보자.

 

 

방법이 있다면 네 인생에 오로지 행복과 기쁨만 있게 해주고 싶어.”

길버트가 닥쳐올 위기를 경계하듯 말하자 앤이 재빨리 맞받았다.

그건 굉장히 어리석은 생각이야시련과 슬픔이 없으면 인생이 제대로 성장하고 원숙해질 수 없어물론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다 마음 편한 시기에나 가능한 일이겠지만.”(P25)

 

 세상에애어른이 따로 없다시련과 슬픔은 성장의 밑거름이 된다는 말우리는 수없이 듣고 있다좋지 않은 상황에서 빨리 빠져나가느냐 머뭇거리느냐는 삶의 태도와 자세에 있겠지앤의 초긍정적인 자세와 태도는 의기소침해 있는 우리에게 다시금 일어설 의욕을 샘솟게 한다.

 

셜리 양 생각에도 내가 그렇게 늙었나요채신없이 굴고 싶진 않지만…… 전부터 늘 구슬 달린 망토를 무척 갖고 싶었어요누가 봐도 멋지다고 할 만한 물건이라고 생각했고…… 마침 요즘 다시 유행하니까요.”

난 자신 있게 말씀 드렸어.

늙었다니요당연히 아주머니는 늙지 않으셨어요자기가 입고 싶은 대로 입는 사람은 절대 늙은이가 아니에요정말로 늙어버리면 꼭 집어 뭘 입고 싶다는 생각조차 나지 않겠죠.”(P39)

 

이 세상은 썩 괜찮은 곳이에요어쨌든그렇죠마릴라 아주머니저번에 린드 아주머니는 세상이 별로가고 푸념 하셨거든요뭔가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거라 잔뜩 기대할 때마다 반드시 어는 정도는 실망하게 된다면서…… 생각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어요아마 그 말이 맞을 거예요하지만 그래서 좋은 점도 있는 걸요나쁜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기도 하니까요……거의 항상생각보다 훨씬 더 나은 결과가 나와요.”(P53)

 

 살아있기에 기쁨도 슬픔도 느끼는 것이다영원히 계속되는 것도 없다달도 차면 기울 듯이 기쁨이 다하면 슬픔이 오기도 하고 그런 굴곡을 통해서 겸손도 배우게 되지 않을까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고 걱정거리를 만들어서 하기도 한다생각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나쁜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기도’ 하다는 앤의 지혜로운 말에 감탄을 하게 된다온갖 걱정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무엇엔가 집중할 일이다항상 생각보다 나은 결과가 나온다는 앤의 말을 믿어보자.

 

결국 가장 즐겁고 기분 좋은 날이란 대단히 인상적이거나 경이롭거나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벌어지는 날이 아니라그저 단순하고 소소한 기쁨들이 실에서 알알이 미끄러져 나오는 진주알처럼 살며시 연달아 다가오는 그런 날들이라고 생각해요.”(P63)

 

그러니까요선생님이런 상상들이 그렇게 많이 이상한가요?”

아니야 얘조금도 이상하지 않아어린이가 떠올리기엔 너무 신비롭고 아름다운 상상이라서 그렇지백 년이 걸려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런 상상을 이상하다고 여기는 거야하지만 폴상상하길 멈추지 마넌 언젠가 시인이 될 거야선생님은 그렇게 믿는단다.”(P65)

 

누구나 언제든 눈이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을 찾아낼 수 있어요.”

(One can always find something lovely to look at or listen to.)(P92~93)

 

 그럭저럭 어제와 같은 일상을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뭐 특별한 일 없을까지루해하기도 한다그러다가도 주변의 커다란 고통이나 아픔을 보게 되면 아무 일 없는 소박한 일상이 행복한 거구나 깨닫기도 한다앤이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자. ‘소소한 기쁨들이 실에서 알알이 미끄러져 나오는 진주알처럼’ 그렇게 연달아 다가오는 날들이 기분 좋은 날이라고 하고 있다지금현재의 시간을 소박하게 보내면서도 절대 지루해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어 폴과 나누는 대화는 정말 앤답다상상력의 대가가 아닌가꿈을 실어주고 응원을 한다기계적으로 지식을 주입시키고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잠시도 딴 짓을 할 수 없는 아이들의 학교생활이 떠오른다상상을 통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꿈도 키우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확장되는 건 아닐까누구나 언제든지 눈이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앤의 열린 마음이 담대하고 멋지다상상하는 힘이 마음을 굳건하게 하고 꿈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는 것 일 것이다.

 

다이애나의 신혼집은 초록 지붕 집에서 3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으니 앞으로는 앤과 다이애나가 예전처럼 항상 붙어 다닐 수 없다고개를 들어 다이내나 방의 불빛을 바라보면서앤은 지난 몇 년간 자신이 저 불빛에 얼마나 의지했느지를 생각했다그러나 이제 여름 저녁 어스름이 내려도 저 불빛은 더 이상 반짝이지 않을 것이다괴로움에 겨운 눈물이 앤의 잿빛 눈에 넘칠 듯 차올랐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누구나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고 변할 수밖에 없다니!”(P123)

 

 영혼의 단짝이었던 다이애나가 결혼을 하게 되어 더 이상 붙어 다닐 수 없게 되자 앤의 슬픔은 이만저만이 아니다이 작품이 쓰인 시대적 상황과 지금의 비교는 차치하더라도 얼마나 부러운 장면인가서로가 경쟁자인 요즘으로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친구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어여쁘기만 하다.

 

불쑥 레슬 리가 물었다.

그런데 외롭진 않은가요혼자 있을 때도…… 절대로?”

아뇨외롭다고 느낀 적은 평생 한 번도 없는 것 같아요.

혼자 있을 때에도 정말 좋은 벗이 있거든요상상역할놀이…….

때로는 혼자 있는 시간이 참 좋답니다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고 음미하기 딱 좋거든요.“(P139)

 

앤은 꿈꾸듯 말했다.

나는 삶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싶어사람들에게 지식을 더 심어주는 게 아니라……

물론 그것도 가장 숭고한 포부인 걸 알지만…… 나로 인해 사람들이 더 즐겁게

살아간다면……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절대로 존재하지 못했을소소하지만

기쁘거나 행복한 생각을 떠올리며 살아간다면 너무나 좋을 것 같아.“

길버트는 감탄하며 말했다.

난 네가 매일매일 그 꿈을 실현해내고 있다고 생각해.”(P153)

 

 참으로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오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앤의 순수한 마음과 그것을 사랑하는 길버트의 따뜻한 눈빛을 상상할 수 있다.

 

난 1년 내내 봄이게 해달라고 할래.

모두의 마음과 우리 모두의 삶도 언제나 봄이면 좋겠어.”(P155)

 

삶의 모든 것을 대학에서 배우는 건 아니야어디에서든 삶이 교훈을 주는 걸.’(P165)

 

꿈꾸기에 늙은 나이 같은 건 없어요그리고 꿈은 결코 늙지 않아요.”(P171)

 

 1년 내내 봄 같다면 좋겠지따뜻한 날씨처럼 삶도 봄 날씨 같다면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그런 긍정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도 좋겠다우리가 삶을 통해 배우는 것은 언제든 어디서든 마음만 있다면 가능할 것이다꿈을 꾸기에 늙은 나이늦은 나이란 없다고. 76세에 화가의 길에 들어선 모지스 할머니도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어떤 마음을 갖고 하루하루 살아가느냐에 있다오늘 행복하면 내일도 행복하다고 했다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신혼기를 거치고 중년이 되고 할머니가 된 앤의 어떤 모습일까모습은 변했어도 상상력과 꿈을 꾸는 듯한 빛나는 눈빛은 그대로 일거라고.

 

다이아몬드 왕관도 대리석 예식장도 필요 없어그냥 너만 있으면 돼.(중략)

그리고 기다리는 문제라면그건 문제가 아니야우린 그저 행복할 거야서로를 기다리면 일하고 꿈꾸면서 말이야이제부터는 꾸는 꿈들은 무척이나 달콤할 거야.”(P217)

 

하지만 진주는 눈물을 부른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건 걱정하지 않아눈물은 슬퍼서만이 아니라 행복해서 나올 때도 있잖아.

나야말로 가장 행복했던 순간마다 눈물이 나던걸마릴라 아주머니가 나더러 초록 지붕 집에서 살아도 된다고 말씀하셨을 때전에는 한 번도 입어본 적 없었던 예쁜 드레스를 매튜 아저씨한테서 처음으로 선물 받았을 때네가 병마를 이기고 곧 회복할 거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그러니까 진주로 된 약혼반지를 줘.

길버트난 삶의 기쁨과 더불어 슬픔도 기꺼이 받아들일 테니까.”(P221)

 

 사랑에 빠지면 용감해지는 걸까맨 마지막의 삶의 기쁨은 물론 슬픔도 기꺼이 받아들일 거라는 앤의 삶의 태도에 다시 한 번 감동하게 된다사랑하는 사이에서도 조건이 붙는 등 예전과 많이 변질된 시대에 참 사랑이란 무엇인가 상기시켜 주었다물론, 몽고메리의 작품이 쓰인 시대적 상황과는 전혀 다른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앤이 살았던 배경은 아름다운 자연을 품고 있는 시골 마을그 자체로 감성을 풍성하게 하였지만우리는 높은 건물이 우뚝 솟은 회색 도시에 살고 있다성공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세상이다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는다좌절하기도 하고 다시 힘을 내어 달려보기도 하지만 역시 녹록치 않은 세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소녀시절로 들어가 앤을 불러내어 만날 필요가 있다대학시절교사시절신혼시절을 모아놓은 짤막한 앤의 이야기는 샘솟는 옹달샘처럼 우리에게 웃음과 희망을 준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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