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마도 5%가 되지 않을 것이라 본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지만 아무런 금전적인 걱정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다시 또 1%가 안되지 않을까 한다. 자신이 잘 하는 일을 하는 것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의 차이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자신이 잘 하는 것을 하는 것이 좋다라는 이야기를 하지만 잘 하는 것이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인지는 사실 직접 하기 전에는 모른다. 무엇이든 자신이 직접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인지 잘 하는 것인지를 떠나 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것이 인생을 사는 묘미가 아닐까 한다. 평생 무엇인가를 하고 싶다고 갈구하면서 끝내는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막상 그 일을 했을 때 정말로 그 일로 인해 자신이 행복을 느끼면서 일을 하게 될 것인지는 미지수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기성세대라고 하는 분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비춰 이런 저런 제안을 후대에게 한다. 결국에는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일을 하지 못하고 먹고 살기 위한 일을 하는게 다반사이다. 혹은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마음속에 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갖춘 후에 하라고 이야기하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것이 과연 올바른 답인지는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인생을 사는 경우도 허다하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하고 싶은 일을 하다 경제적 문제로 그만 두었기 때문에 경제적 자립을 한 후에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일은 아니지만 내가 새롭게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문제에 대해 소설로 풀어 쓴 이야기다. 한 40페이지 정도까지는 나름대로 기대를 했다.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고 싶지만 결국에 경제적 문제로 인해 - 자신의 능력으로 포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 이유는 능력이 부족해도 스스로 그 점에 대해 인정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 경제적 자립을 택한 후 취미 삼아 하던 사진 찍는 일을 고민하는 걸 읽으며 어떻게 이 사람이 변화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 흥미가 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150페이지까지 좀 지루하게 내용이 진행된다. 뜬금없이 이혼 이야기가 나오고 불륜이 등장하고 뜻하지 않은 살인이 등장하면서 소설의 초반에 나온 방향제시대로 진행되지도 않았고 책을 택할 때 나름대로 원하는 내용이나 예상하는 전개와는 무관하게 스토리가 이어져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지 흥미가 점점 떨어졌다.

 

책 자체가 무겁고 진지한 작품이라기 보다는 - 표현이 애매하지만 - 통속적인 소설이기 때문에 일반 미니 시리즈의 드라마처럼 어느 정도는 책을 읽는 독자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방향으로 흘러야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뒤로 갈수록 책의 내용은 독자들이 기대하는 방향으로 점점 달려간다.

 

'빅 픽처'를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고 싶어 했고 꿈 꾸웠던 내용을 대신 주인공이 하는 것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준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을 읽는 독자의 기대를 배신하는 것이라 어쩔 수 없는 측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택한 독자들이 원한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완벽하게 '빅 픽처'를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기대를 충족하고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래, 나도 저런 꿈을 꾸웠어'라고 감탄을 외치게 만들어 준다. 뒤로 갈수록 과연 이것이 많은 책들에서 다뤄지는 꿈으로 귀결이 될 것인가나 최근 유행하는 가상현실로 대체 될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졌다.

 

책이 나온 시점이 10년이 넘어 아마도 가상현실은 조금 힘들었을 것 같지만 그런 결말이 되지 않으면 책의 결말이 이도 저도 아닌 용두사미로 끝날 수 있어 궁금했는데 나름대로 생각지 못한 반전으로 끝을 맺게 되어 괜찮았다. 이왕 길을 달렸으면 그 길의 끝을 보여주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만큼 행복하고 부러운 사람이 없겠지만 과연 그 길을 꼭 가야만 행복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솔직히 반반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가보지 못하는 것보다는 실패하더라도 한번 도전을 하는 것이 후회를 하더라도 자기 위안은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은 소설이라는 분야로 한정하기에 그가 이야기하고 알리고자 하는 내용들이 한정되고 작아진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종교 지도자가 자신들의 신도내지 일반인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고자 하는 설교를 이렇게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리는 것이 아닌가 한다. 더구나, 코엘료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거의 매년 책을 출판하고 있으니 그의 책은 1년에 한 번씩 성도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한다.

 

코엘료의 소설은 특정 공간에 속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실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외부 상황이나 현재 처한 환경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마음과 심리라 할 수 있는 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던져진 '연금술사'가 가장 성공한 설교 메세지이지만 코엘료가 전파하는 메세지는 특정 종교라고 할 수 도 있을 정도로 자신의 내면 모습을 보라는 이야기를 다양한 형식과 이야기로 전달한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마녀 삼부작이라고 하는 책 중에 하나로 영화로도 제작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까지 개봉은 되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는 개봉했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사실, 여자가 주인공이라 마녀 삼부작인것이 아닌가하는데 '포르토벨로의 마녀'처럼 직접적으로 마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마녀라는 존재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행동이나 생각과 사고를 하는 인물중에 여자라고 한다면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은 뭐 마녀라고 해도 될 것도 같다. 그런데, 이 책은 1명의 여 주인공이 시작을 하지만 정확하게는 3명의 주인공이 - 굳이 포함시키자면 스스로 모든 테스트가 끝난 후 퇴원하는 사람까지 포함하자면 4명 - 자신에게 벌어지는 외부와 내부의 변화를 정신병원이라는 특정 공간에서 자아를 찾아가고 그 자아중 일부를 발견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쳤다'라는 의미를 좋게 해석하면 무엇인가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열중하는 모습을 우리는 미쳤다는 표현으로 한다. 흔히 스포츠 경기에서 평소와는 다른 경기력을 보이는 선수에게 '저 선수 오늘 미쳤다'라고 하는데 안 좋은 표현으로는 '저 여자 머리에 꽃 꼽았어'라는 표현을 통해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행동과 생각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책에 나온 것처럼 우리와 같은 행동을 하면 일반인이고 다른 행동을 하면 미친 사람이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라는 단체다. 각자 개인은 각각 자신의 가치관이나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데 그가 남들에게 비치는 모습이 나와 다를 때는 개성이 강하다거나 특이하다고 하지만 '우리'라고 하는 단체와 많이 다를 때 미쳤다고 한다.

 

잘 미치면 사회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하지만, 그건 그가 성공했을 때 사람들이 뒤늦게 그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 그렇다 해도 여전히 그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인물들은 있기 마련이다 -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전까지는 극단적으로 미친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모든 사람들이 우측 방향으로 갈 때 혼자 좌측방향으로 가면 우리는 미쳤다고 하지만 실제로 누가 옳은 것인지에 대한 해답은 나중에 알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함께 우측에 있다는 심리적 만족감과 포만감에 빠지게 된다. 스스로 왼쪽이 옳다고 판단을 내렸어도 남들의 이목과 집중이 두렵고 멸시와 조롱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우측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측으로 가라는 것이 아마도 코엘료가 지속적으로 책에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 아닐까 한다.

 

물론, 이 책에서는 단지 그 이야기만이 아니라 실제로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에게 그의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때 오히려 살고자 하는 의지로 자신의 삶을 다시 재편하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자살이 많은 이 사회에 꽤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한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굳이 자살할 이유가 없고 남은 생애동안 살고자하는 의지를 보여주든 인생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든 무엇인가를 하다보면 자살을 하려고 했던 자신의 이유가 변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은 하지만 이해를 할 수 없는 내 입장에서 볼 때 이렇게 그들에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심어주는 것도 우리가 자살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대안이 아닌가 한다. 문제는 내 옆에 있는 사람들 중에 누가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책에서 처럼 자살을 시도했던 인물에게는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함께 있을 수 있다면 1
안나 가발다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세계사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리 일상상의 평범함을 다룬다고 하여도 소설은 소설이고 드라마는 드라마이다. 우리가 사는 지겹다고 할 수도 있는 반복적인 일상생활은 결단코 소설에서 소재로 쓰이고 출판될 수는 없다. 출판되는 모든 것은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 쓰여져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의 호기심이나 흥미를 끌지 못하면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일기를 쓰는 것과 차이가 없다.

 

외국 소설을 읽을 때 늘 그렇듯이 영미권 단어에 익숙하여 그나마 영미권쪽 문화를 볼 때는 받아들이는 속도가 그나마 빠르지만 평소에 접하지 않는 문화권의 소설은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의 이름부터 혼동되어 - 이름에서부터 남자인지 여자인지에 대한 구분을 할 수 있는 우리나라 책을 읽는 것과 달리 - 몇 십페이지가 지나도록 읽고 있는 대상자의 행동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고 읽고 있다가 '아, 이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구나'하게 되었다.

 

소설에는 크게 4명의 중요한 사람이 나오는데 초반에 순차적으로 한 명씩 등장을 하고 퇴장을 하여 각 인물들이 만날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을 제시하게 된다. 하등 상관없이 일단 만난 후에 다시 과거로 거슬러 어떻게 만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의 소설은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요리사와 청소부와 집에서 놀고 있는 세 명의 젊은이와 할머니가 등장하는데 책에 대한 리뷰가 많이 있었고 프랑스에서 엄청나게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라고 하여 책에 대한 소개나 어떤 내용인지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보지 않고 읽게 되었다. 1권을 거의 다 읽었을 때 책 겉표지에 있는 문구를 보니 요리사와 화가의 이야기란다.

 

초반에 청소부가 등장하고 과거에 어떤 식으로 그림을 배웠고 그림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소개가 나왔을 때만 해도 그림에 대한 소질이 있는 청소부라고 생각을 했다. 요리사는 예의 바른 사람인 것으로 착각을 한 이유가 요리사와 화가의 이야기가 초반부에 차례로 등장하여 내 스스로 혼돈을 하고, 요리사 이야기가 나오더니 청소하는 이야기가 나오네하고 착각을 했었다.

 

우연한 계기로 우리나라 개념으로 대략 300평 정도 되는 넓은 집에 3명의 남녀가 동거를 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어느 누구도 그 큰 집에 거주하면서 집세도 내지 않고 거주하는데 그 큰집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거주가 시작되면서 서로가 워낙 집이 넓어 그런 점도 있지만 자신 만의 공간에서 상대방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으며 각자의 생활(삶)을 존중하며 흔히 광고멘트로 쓰이는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1권을 다 읽을 때 까지 화가와 관리인 - 특별히 직업을 규정하기 힘든 존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집 자체가 유산으로 인한 다툼으로 인해 잠시 관리를 맡게 되었고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지만 현재는 우표를 파는 직업을 갖고 있으니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데 이렇게 잡다하게 쓰고 보니 한 마디로 백수인 듯 하다. 우리나라 관점으로 보면ㅋㅋ - 이 사랑이 피는 줄 알았다. 그러면서도 요리사가 중간에 끼어들어 삼각관계 비슷하게 진행되어 최종적으로 화가와 요리사가 연결되는 것으로 생각을 했었다.

 

각자가 자신만의 사연을 간직하고 - 하긴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도 다 자신만의 이야기와 사연을 간진한다. 아마도 나이가 30살만 되어도 며칠은 이야기할 수 있는 삶이 그(녀)에게 녹아 있을 것이다. 재미가 있느냐의 여부를 떠나서 - 모인 3명의 남녀에게 요리사의 할머니까지 동거에 포함되어 주택이라기보다는 귀족이 살았던 거대한 성이라 부를 수 있는 집에 거주하게 된다.

 

소설에 나온 3명의 남녀는 모두 그가 살았던 가정사에 평범하지 않고 가족으로부터 끊임없는 멸시와 왜곡된 가치관을 주입받아 세상에 대해 하얗다는 개념만으로는 볼 수 없지만 조금은 세상에서 행동하는 자세와 생각이 삐뚫어졌어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모난 것 없이 무난하게 살아간다. 이 정도는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지 않을까 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을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타인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른다. 우리나라 50대 이상의 남성들이 대부분 가족에게 친절하고 베푸는 이미지보다는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이미지로 되어 있는 것은 그들의 윗 세대로부터 받은 사랑의 종류가 그러하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이처럼 자신이 받아 보지 못한 것을 타인에게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책에 나온 4명의 인물도 그처럼 받은 것이 드물고 힘들어 주는 것에도 서툴러 시행착오를 거치지만 온갖 실수와 오해를 살만한 행동을 하더라도 상대방에게서 떠나려 하지 않고 같이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타인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를 보지 않거나 그를 이해거나 인정하려 들면 되는데 책에 나온 주인공들은 상대방을 떠나지 않고 머물렀기 때문에 서로가 사랑을 얻게된다.

 

모든 나라의 문제는 가족의 해체에 따른 자식들의 삐뚫어진 세계관과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책에 나온 프랑스의 가족들은 한결같이 - 도시를 떠난 지방의 가족들은 제외하고 - 올바른 가족은 없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가치관과 습관이 다른 4명의 남녀가 모여 철저하게 타인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행동을 배려하고 이해하고 존중하여 진정한 가족이 탄생하게 된다.

 

부부란 상대방에 대한 이해보다는 인정을 해야 한다고 본다. 아무리 빨리 결혼을 해도 20년을 넘게 타인으로 살고 각자의 가치관과 생활습관이 정착된 성인이 된 후에 만나기 때문에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상대방의 행동이나 습관이 나와 다름을 힘들지만 인정할 때에 비로소 진정으로 사랑을 간직한 결혼생활이 지속될 수 있다고 본다.

 

책은 행복하게도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그것도 각자가 자신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자신의 행동과 습관을 적용하여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 좋게 마무리된다. 책 제목처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사랑이라는 감정만으로는 힘들지만 넓은 개념의 사랑으로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알고 있는 상식이나 지식은 백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스을 통해 탈레반이나 빈 라덴에 대해 접하면 긍정적인 이미지 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나에게 다가오고 화면을 통해 늘 삭막하게 초원도 없고 동물도 없어 보이는 곳에 빨간 땅이 보이는 것이 그나마 갖고 있는 이미지의 전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전작인 '연을 날리는 소년'은 책이 아닌 영화로 보게 되었다. 영화의 내용이 재미있었고, 이 책은 베스트셀러라 읽게 되었다. 책의 두께가 만만치 않지만 결코 그 두께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책에 몰입하여 읽게 되었다. 그것도 고통스럽게 슬픔을 간직하고 마음이 아파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살을 스쳐 피가 나오는 느낌을 갖고 읽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베스트셀러에 대해 오히려 선입견을 갖고 거부하거나 멀리하려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이 책이라면 그런 선입견을 갖고 있을 필요가 없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고 이 책을 읽고 있는 이 곳에서 살고 있는 내 삶에 대해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 특히, 남자라면 더더욱.

 

두 명의 주인공이 있다. 한 명은 자신의 갖고 있는 걸 순종하고 운명이라고 여기며 받아들이는 마리암이라는 여자와 그보다 20살 정도 어리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는 라일라라는 여자.

 

마리암이라는 여성이 친 아버지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한 후에 고통 받는 삶이 나오고 끝이 나고 다음에 라일라라는 인물이 나와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지고 가족을 모두 잃는 장면으로 끝이 날 때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라는 제목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생각을 했다.

 

소설은 두 여자가 만나게 되기 전 도입부를 그렇게 설정한 것이였다. 두 여자가 같은 공간에서 살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아니, 슬픔과 고통과 거세 당한 희망이 시작된다. 하루 하루가 고통과 슬픔으로 첨철되어 있어도 내일을 기약하며 살아 갈 수 있는 힘은 내일은 오늘과 다를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고 그들에게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지켜 보는 고통이다. 그나마, 처음부터 갖지 못하고 - 그것이 자유, 지식, 자산, 자녀등등 그 어떤 것이든지 - 있는 사람에게는 그나마 자신이 있는 현실을 순응하고 살아갈 수 있다. 게다가 볼 수 있는 미디어마저 없다면 더더욱 현실에 순응할 수 밖에 없다. 무엇인가 캥기는 것이 있는 위정자들은 언론을 통제하고 억압하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준다.

 

나만 못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모든 것이 다 비슷하다면 비참한 삶이라도 적응하지만 나만 그렇다고 느끼거나 알게 되면 상대적인 박탈감이 나를 짓누르게 되어 어제와는 다른 삶을 걷게 된다. 못사는 국가일수록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빈부격차가 커질수록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체제전복이 일어나는 것은 못 가진자들의 잘못이 아니라 가진자들의 잘못이다.

 

우리나라가 지금과 같이 먹고 살기에 지장이 없는 나라가 된 것은 - 여전히 못 먹는 사람은 있어도 굶어 죽는 사람이 없는 것이 - 누구 하나 이견없이 교육의 힘이라고 한다. 교육을 통해 앎의 상태가 확장되고 그 아는 것을 실천하고 실천함에 따라 그에 맞는 환경이 만들어져기 때문이다.

 

두 여인의 삶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교육을 통한 지식의 힘이였다. 교육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마리암은 체제에 순응하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억압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나마 우리나라의 중학교정도까지의 교육을 받은 라일라는 마리암보다 좀 더 진취적으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에 대항한다. 난 절대적으로 교육의 힘이라 믿는다.

 

아무리 개인이 똑똑해도 자신이 보고 배운 것 만큼 세상에 대해 알고 믿고 실천을 하게 된다. 이런 삶 말고도 다른 삶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본 적이 없고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 삶을 받아 들이고 그런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대항할 수 있다고 본다.

 

노예 할아버지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은 자신의 삶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왔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 여기고 다른 삶은 자신에게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살았던 것이다. 나중에 그 분의 인터뷰를 통해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분에게 누군가 지식을 전달한 후 그런 삶이 아닌 다른 삶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을 보게 되었다.

 

그처럼,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 나오는 두 주인공은 자신의 의지와 능력 상관없이 단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삶을 살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끔찍하고 억울한 삶일까? 무엇보다 이런 생각을 난 할 수 있지만 그들은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 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내전으로 인해 행복하고 오붓하게 식사를 하다 폭탄으로 인해 온 가족을 잃어버리거나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교육 받을 기회가 박탈당하고, 치료 받을 시설까지 폐쇄당하고, 혼자서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법으로 금지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그 어린 나이에 ( 10살 전후일 수도 있는) 결혼을 해야 하는 곳에서 살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했다.

 

끊임없는 내전과 외부의 침략으로 인해 핍폐해지는 나라지만 떠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지만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여할 운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억압을 포함한 만행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라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무서운 믿음이라는 문제와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또한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기독교와 함께 지구에 있는 양대 종교이고 기독교보다 더 원칙에 충실하고 종교에 대한 믿음이 더 중심이라는 정도의 상식만 갖고 있다. 같은 동양이라는 범주에 속하지만 처절하게 서구화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행동이나 문화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다. 다만, 단지 그렇게 그들을 무조건 매도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도 그런 행동들을 못 가진자와 비천자들에게 태연하게 저질렀다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지만 최소한 대 놓고 겉으로 하지는 않는다, 이제.

 

물론, 단순히 책에 나온 것만 가지고 이슬람이나 아프니간스탄에 살고 있는 여성들이나 그들을 억압하는 남성들의 사고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은 성급할 수 있지만 불행히도 다수의 책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전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을 반영한 서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편견일 수 있지만.

 

며칠동안 두 여성의 삶을 같이 공유하고 그들의 궤적으로 쫓아가며 가슴이 망막하고 답답하고 얹잖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프니간스탄이라는 나라의 상황상 해피엔딩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종착점을 갈수록 두 여성의 삶에서 희망은 커녕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는 삶에서 그들의 끈이 끊어지는 상황이 오지만 행복을 간직하고 떠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나마 감사하지만 책을 들고 있는 손을 통해 들어오는 슬픔이라는 감정은 눈물이라는 행동으로 분출되었다.

 

제발 이런 일들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책을 접게 되었다. 지금이 아닌 미래를 위해 소설속의 인물은 행동하게 된 것이 위안을 주지만 마리암과 라일라라는 두 여성과 함께한 여정에서 공유하게 된 감정의 끈은 여전히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한 동안 이들의 - 내 머리속에서 재 가공된 인물들이라도 - 여정은 나에게서 빠져 나가지 않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 도둑놀이
퍼 페터슨 지음, 손화수 옮김 / 가쎄(GASSE)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0을 먹은 남자가 혼자 산다고 생각하면 아름다운 그림보다는 좀 궁상맞다는 표현이 맞지 않을까 한다. 현대의 방송시스템이 만들어 낸 잘못된 선입견인지 몰라도 여성이 그렇게 살아도 궁상맞다고 생각되지 않는데 남성이 혼자 산다면 처량해 보이는 것은 꼭 선입견은 아닌 듯 하다. 60을 넘은 남성들 중에 능력있는 남성은 그렇게나 꼭 재혼 - 젊은 여성이든 비슷한 연배이든 - 이 많은 것을 보면 말이다.  상대적으로 여성들은 같은 조건에 눈에 들 띄이는 것이 숨겨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의 인생을 살다보면 어느 특정시기나 사건을 계기로 그 전과 그 이후로 나눌 수 있게 되는데 - 모든 사람이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결혼을 기준으로 할 수 있다. 본인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 이 책의 제목인 말도둑 놀이를 전후로 주인공의 인생은 아이에서 청년으로 변화를 맛보게 된다.

 

좋게 표현하면 자연과 벗삼아 호연지기를 기르며 - 나이가 69세지만 - 살고 있고 안 좋은 쪽으로는 독거노인처럼 살고 있는 주인공이 중간 중간 과거를 회상하게 된 사람들과 사건을 만나며 현재와 과거각 되풀이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책에 나온 주인공은 남자 혼자 살고 있지만 결코 외롭거나 궁상맞지도 않고 스스로 독립적인 삶을 선택해서 외부의 모든 소음을 차단한체 살아가고 있다.

 

소년시절에는 누구나 좋은 것보다는 안 좋은 것에 더 관심이 끌리고 멋있어 보인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게 된 말도둑 놀이는 소년에게 다시는 소년으로 돌아 갈 수 없는 사건을 알게 해 준다. 책은 무척 담담하게 과거를 회사하고 느릿느릿 이야기가 전개된다. 급박한 사건도 없고 긴장 넘치는 줄거리도 없다.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어릴 쩍 회상을 통해 과거를 그리고 있지만 결코 평범하지는 않은 삶을 보여준다. 특히, 소년들에게는 그 누구보다 자신들의 아버지가 바로 영웅이자 모든 것이다. 어릴 때 보이는 아버지의 모든 행동과 말투와 선택은 절대적이고 카리스마를 품어 도저히 따라갈수 없는 저 높은 존재이다.

 

특히, 아버지와의 추억이 정확하게 아버지가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라면 더더욱 아버지에게 갖고 있는 감정과 기억은 강력한 모습만이 뇌리속에 남아있지 않을까 한다. 책의 주인공에게 아버지는 그런 존재다. 그가 한 모든 행동과 생각은 나이를 먹게 된 지금의 나보다 어리지만 아버지를 더욱 추억하게 만들고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발자취를 쫓게 만든다.

 

주인공의 삶 자체는 그다지 특별한 건 없이 평범하다. 아버지 부재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힌트도 책에는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에 가서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고 - 정확하게 버렸다고 생각을 하지는 않는 듯 하다 - 떠났을지라도 그에게 아버지는 평생을 쫓아가야할 멘토가 되어버렸다.

 

우연히 맞주치게 된 옆 집 이웃에게 더 많은 비밀과 고통과 감정이 숨어 있지만 인생의 후반기를 시작한 두 인물들에게는 그런 비밀이나 고통을 갖고 가기에는 그들의 인생에선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미 과거는 추억의 대상일뿐 현재를 지배하는 뿌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총 3파트로 나눠져 있는 줄거리에서 한 파트마다 주인공은 조금씩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간다. 아니,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어른의 입장이 된 지금의 내가 볼 때 아버지가 어떤 감정으로 나를 지켜보았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 철저하게 내 입장에서 과거를 회상하기 때문에 - 그 당시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아들로써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써 아버지 앞에 서려고 노력을 한 게 아닐까 한다.

 

'아버지 제가 여기 있어요. 아버지의 아들로써 아니라, 한 남자로써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한 개인으로써 말이죠.'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소설에서는 결코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더구나, 그런 이야기를 직접 하는 것처럼 촌스런 소설도 없을 것이다. 불행히도 그런 책들이 제법 많은 것이 현실이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그 책을 읽는 독자가 느끼는 감정과 사고로써 그 안에 살아가는 것이지 작가가 이러쿵 저러쿵 요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고 난 본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소재는 꽤 많은 곳에서 쓰인다. 당연히 이 책의 주인공이 노르웨이 사람이니 더더욱 작품의 배경으로 쓰이는 것은 당연하다. 얼마나 우거지고 울창한지 숲 속에서 해가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지 않을까 막연히 유추해 보게 된다. 그런거 보면 책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얼마나 대단하지 노르웨이의 숲을 가보고 싶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노르웨이를 다녀 온 분의 말에 의하면 소득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많고 풍요롭다고 한다. 

 

시끄러운 공간에서 시끄러운 환경에 물들어 소음과 더불어 이책을 읽게 되었지만 수목원과 같은 고요한 곳에서 한적하게 내리째는 햇살을 맞으며 새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적막한 곳에서 한장 한장 읽다보면 소년의 성장과 더불어 풍요로워진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