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알고 있는 상식이나 지식은 백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스을 통해 탈레반이나 빈 라덴에 대해 접하면 긍정적인 이미지 보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나에게 다가오고 화면을 통해 늘 삭막하게 초원도 없고 동물도 없어 보이는 곳에 빨간 땅이 보이는 것이 그나마 갖고 있는 이미지의 전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전작인 '연을 날리는 소년'은 책이 아닌 영화로 보게 되었다. 영화의 내용이 재미있었고, 이 책은 베스트셀러라 읽게 되었다. 책의 두께가 만만치 않지만 결코 그 두께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책에 몰입하여 읽게 되었다. 그것도 고통스럽게 슬픔을 간직하고 마음이 아파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살을 스쳐 피가 나오는 느낌을 갖고 읽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베스트셀러에 대해 오히려 선입견을 갖고 거부하거나 멀리하려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이 책이라면 그런 선입견을 갖고 있을 필요가 없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고 이 책을 읽고 있는 이 곳에서 살고 있는 내 삶에 대해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 특히, 남자라면 더더욱.

 

두 명의 주인공이 있다. 한 명은 자신의 갖고 있는 걸 순종하고 운명이라고 여기며 받아들이는 마리암이라는 여자와 그보다 20살 정도 어리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는 라일라라는 여자.

 

마리암이라는 여성이 친 아버지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한 후에 고통 받는 삶이 나오고 끝이 나고 다음에 라일라라는 인물이 나와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지고 가족을 모두 잃는 장면으로 끝이 날 때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라는 제목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생각을 했다.

 

소설은 두 여자가 만나게 되기 전 도입부를 그렇게 설정한 것이였다. 두 여자가 같은 공간에서 살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아니, 슬픔과 고통과 거세 당한 희망이 시작된다. 하루 하루가 고통과 슬픔으로 첨철되어 있어도 내일을 기약하며 살아 갈 수 있는 힘은 내일은 오늘과 다를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고 그들에게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지켜 보는 고통이다. 그나마, 처음부터 갖지 못하고 - 그것이 자유, 지식, 자산, 자녀등등 그 어떤 것이든지 - 있는 사람에게는 그나마 자신이 있는 현실을 순응하고 살아갈 수 있다. 게다가 볼 수 있는 미디어마저 없다면 더더욱 현실에 순응할 수 밖에 없다. 무엇인가 캥기는 것이 있는 위정자들은 언론을 통제하고 억압하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준다.

 

나만 못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모든 것이 다 비슷하다면 비참한 삶이라도 적응하지만 나만 그렇다고 느끼거나 알게 되면 상대적인 박탈감이 나를 짓누르게 되어 어제와는 다른 삶을 걷게 된다. 못사는 국가일수록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빈부격차가 커질수록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체제전복이 일어나는 것은 못 가진자들의 잘못이 아니라 가진자들의 잘못이다.

 

우리나라가 지금과 같이 먹고 살기에 지장이 없는 나라가 된 것은 - 여전히 못 먹는 사람은 있어도 굶어 죽는 사람이 없는 것이 - 누구 하나 이견없이 교육의 힘이라고 한다. 교육을 통해 앎의 상태가 확장되고 그 아는 것을 실천하고 실천함에 따라 그에 맞는 환경이 만들어져기 때문이다.

 

두 여인의 삶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교육을 통한 지식의 힘이였다. 교육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마리암은 체제에 순응하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억압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나마 우리나라의 중학교정도까지의 교육을 받은 라일라는 마리암보다 좀 더 진취적으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에 대항한다. 난 절대적으로 교육의 힘이라 믿는다.

 

아무리 개인이 똑똑해도 자신이 보고 배운 것 만큼 세상에 대해 알고 믿고 실천을 하게 된다. 이런 삶 말고도 다른 삶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본 적이 없고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 삶을 받아 들이고 그런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대항할 수 있다고 본다.

 

노예 할아버지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은 자신의 삶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왔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 여기고 다른 삶은 자신에게 있을 수 없다고 믿고 살았던 것이다. 나중에 그 분의 인터뷰를 통해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분에게 누군가 지식을 전달한 후 그런 삶이 아닌 다른 삶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을 보게 되었다.

 

그처럼,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 나오는 두 주인공은 자신의 의지와 능력 상관없이 단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그런 삶을 살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끔찍하고 억울한 삶일까? 무엇보다 이런 생각을 난 할 수 있지만 그들은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 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내전으로 인해 행복하고 오붓하게 식사를 하다 폭탄으로 인해 온 가족을 잃어버리거나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교육 받을 기회가 박탈당하고, 치료 받을 시설까지 폐쇄당하고, 혼자서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법으로 금지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그 어린 나이에 ( 10살 전후일 수도 있는) 결혼을 해야 하는 곳에서 살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했다.

 

끊임없는 내전과 외부의 침략으로 인해 핍폐해지는 나라지만 떠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지만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여할 운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억압을 포함한 만행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라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무서운 믿음이라는 문제와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또한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기독교와 함께 지구에 있는 양대 종교이고 기독교보다 더 원칙에 충실하고 종교에 대한 믿음이 더 중심이라는 정도의 상식만 갖고 있다. 같은 동양이라는 범주에 속하지만 처절하게 서구화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들의 행동이나 문화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다. 다만, 단지 그렇게 그들을 무조건 매도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도 그런 행동들을 못 가진자와 비천자들에게 태연하게 저질렀다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지만 최소한 대 놓고 겉으로 하지는 않는다, 이제.

 

물론, 단순히 책에 나온 것만 가지고 이슬람이나 아프니간스탄에 살고 있는 여성들이나 그들을 억압하는 남성들의 사고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은 성급할 수 있지만 불행히도 다수의 책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전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을 반영한 서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편견일 수 있지만.

 

며칠동안 두 여성의 삶을 같이 공유하고 그들의 궤적으로 쫓아가며 가슴이 망막하고 답답하고 얹잖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프니간스탄이라는 나라의 상황상 해피엔딩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종착점을 갈수록 두 여성의 삶에서 희망은 커녕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는 삶에서 그들의 끈이 끊어지는 상황이 오지만 행복을 간직하고 떠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나마 감사하지만 책을 들고 있는 손을 통해 들어오는 슬픔이라는 감정은 눈물이라는 행동으로 분출되었다.

 

제발 이런 일들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책을 접게 되었다. 지금이 아닌 미래를 위해 소설속의 인물은 행동하게 된 것이 위안을 주지만 마리암과 라일라라는 두 여성과 함께한 여정에서 공유하게 된 감정의 끈은 여전히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한 동안 이들의 - 내 머리속에서 재 가공된 인물들이라도 - 여정은 나에게서 빠져 나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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