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렐란드라 C. S. 루이스의 우주 3부작 2
C.S. 루이스 지음, 공경희 옮김 / 홍성사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 요약 。。。。。。。                    

 

     전작인 『침묵의 행성 밖에서』에서 말라칸드라(화성)에 다녀왔던 랜섬은, 이제 ‘페렐란드라’라고 불리는 금성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금성에 도착한 그는 태초의 순결함을 지니고 있는 초록빛 여인을 두고, 악한 영에 쓰인 웨스턴과 페랄란드라의 역사의 흐름을 두고 대결을 펼친다. 에덴동산에서 벌어졌던 충격적인 사건이 금성에서 재현된다.

 

 

2. 감상평 。。。。。。。                  

 

     이야기 전체에 에덴동산에서의 유혹, 대속(램섬, ransom)과 발뒤꿈치의 상함, 어두운 동굴 속에서의 사흘, 왕의 즉위와 같은 성경적 메타포가 가득한 작품이다. 저자인 루이스는 이런 신학적 주제들을 문학적 용어로 풀어내면서 매우 풍성하고 깊은 내용을 담아낸다. 흔히 조직신학 하면 딱딱한 용어들로 구성된 서술들의 집합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원래 그런 걸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서술의 정확성을 기하려는 노력의 결과가 그런 식의 경향을 낳곤 한다. 신학이 아닌 영문학을 전공한 루이스는 이런 한계를 보다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이런 멋진 작품까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참 귀한 자산이다.

 

     이야기의 초반은 성경이 말하는 낙원(혹은 에덴, 새 예루살렘)에 관한 멋진 형상언어들로 가득해 설렘을 주고, 중반은 웨스턴과 랜섬의 논쟁을 통해 죄와 악의 문제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이끌어낸다. 극 후반부의 랜섬의 모험은 다소 이탈하는 느낌도 없진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수난과 승귀에 대한 훌륭한 이미지 묘사이기도 하다.(그래도 좀 덜 어울리는 느낌도 있다)

 

     참 닮고 싶은 작가다.

 

 

     덧, 이 책을 번역해 낸 번역자 공경희 님에게도 특별한 감사를 하고 싶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게 눈에 선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줄거리 。。。。。。。           

 

     제법 규모 있는 장난감 회사를 운영하는 윌터 블랙. 어여쁜 아내와 두 아들까지 둔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다 잘 되고 있는 것 같지만,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깊은 우울증이 그것. 오랜 기다림 끝에 아내조차 그런 그에게서 손을 놓고 말았고, 결국 집을 나온 그는 자살을 시도한다. 바로 그 순간 나타난 비버. 비버는 과거로 다시 돌아가려 하는 대신,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명령한다. 그의 말을 듣기로 하고 변신을 시작하는 윌터 블랙. 하지만 꼭두각시놀이를 언제까지나 계속 할 수는 없었다.

 

 

 

2. 감상평 。。。。。。。                           

     깊은 우울감에 빠져서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괴로움을 주는 우울증. 단순한 우울감의 과장된 표현으로부터, 뇌 속의 특정 기능의 장애나 호르몬의 이상과 같은 내과적 질병, 혹은 영적인 문제 등 다양한 원인이 제시되는 만큼 복잡하고, 당연히 치유도 쉽지 않은 질병이다. 영화는 바로 이 우울증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영화 속 비버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 아마도 융(Jung) 유의 (집단)무의식의 일종이 아닌가 싶다. 의식에 비해 억압되어 있는 무의식에 집중을 하고, 그것이 지시하는 방향을 정답으로 받는 것이 좋다는 이 해답은 ‘행복한 척, 다 잘되는 척 하며 평생을 사는 게 진짜 미친 것이다’라는 영화 속 한 대사에 잘 반영되어 있다. ‘척’으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진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유로운 삶을 살라는 매력적인 목소리다.

 

     하지만 그건 좋게 봐서 그렇다는 거고, 결국 이런 식의 메시지는 자신이 원하는 건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고 살아도 좋다는, 일종의 방종과 무질서를 초래할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자아(自我)가 신(神)이 된 상태라고 할까. 그리고 인간의 사회적 차원은 그렇게 단순히 눈 한 번 감는다고 잊힐 만큼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영화 속 윌터가 결국 맞닥뜨리게 된 한계가 바로 이것이었다.)

     마침내 윌터는 비버로부터도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를 진정으로 치유로 이끈 것은 결국 가족(다른 말로 하면 인간관계, 혹은 사회적 정황이 함께 하는 격려와 회복)이었다. 영화 후반부에 가서야 드러나는 진짜 주제다. 조금 진부해보이긴 해도, 원래 진리는 오랫동안 가까운 곳에 있어온 것들일 가능성이 높다. 새롭다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니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모든 걸 무너뜨리고 새롭게 변화시킬 비버가 아니라 가족이다.

 

 

     조디 포스터나 맬 깁슨의 연기력이야 딴죽을 걸만 한 레벨이 아닌 게 분명하고, 감독까지 맡았던 조디 포스터의 연출력도 괜찮다. 볼만한 영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줄거리 。。。。。。。         

 

     펜실베니아 북부 한 철도 조차장에서 일어난 어이없는 사고. 기관사가 조정실에서 내려 철로변경 레버를 움직이려 하는 순간, 열차의 브레이크가 풀렸고 달리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열차에는 폭발성 물질로 가득 찬 탱크가 연결되어 있었다. 열차를 세우거나 차선책으로 탈선시키기 위한 모든 계획들이 수포로 돌아갈 무렵, 강제 퇴직을 앞두고 있던 프랭크와 그에게 일을 배우고 있던 윌이 열차를 세우기 위한 마지막 작전에 돌입한다.

 

 

 

 

 

2. 감상평 。。。。。。。                     

     위험한 물질을 가득 실은 열차를 세우기 위한 영웅들의 이야기라면 처음부터 속도감을 잘 살려내는 게 영화의 관건이었다. 감독과 배우들은 어느 정도 이 미션에 성공을 한 듯하고, 덕분에 영화를 제법 몰입도 있게 즐길 수 있었다. 어차피 인물들 사이의 심각한 내적 갈등이나 복잡한 인간관계 같은 걸 중심으로 삼지 않았기에 머리 아플 일도 없다. 그냥 편하게 즐기면 되는 영화. 1억 달러 이상의 엄청난 자금을 컴퓨터 그래픽이 아닌 현장 제작에 쏟아 부어 만든 영화답게, 요즘 자주 보이는 식의 인위적인 영상과는 다른 아날로그적 향기가 듬뿍 느껴진다.

 

     영화 속 사고의 원인 물론 기관사의 부주의 때문이기도 하지만, 첨단 기술에 대한 과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열차의 운행과 관련된 모든 통제를 컴퓨터를 이용해 중앙에서 완전히 컨트롤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정작 사고가 나고 나서는 무용지물로 변해버렸다. 자동으로 운행되는 열차 시스템은 인간으로부터 비롯되는 부주의와 실수를 방지해주기도 하지만, 역으로 기계와 기술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를 막아주지는 못하는 거였다. 시스템을 더 정교하게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는 반론은, 요점을 잘못 짚은 것.

 

     약간 옛날식의 영화긴 하지만, 볼만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줄거리 。。。。。。。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어느 날. 자체적인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주식회사인 ‘타마린(Tamerlane)’은 중동의 가상 국가 투라키스탄를 폭격해 초토화를 시킨 후, 재건을 명분으로 박람회를 열어 개발이권을 팔아넘기려 한다. 하지만 여기에 귀찮은 존재가 나타났으니 오마 샤리프라는 이름의 석유재벌이 투라키스탄 전역에 송유 파이프관을 설치하고 있었기 때문. 재주는 자신들이 넘고 돈은 엉뚱한 사람이 가져가는 걸 막기 위해 파견된 전문 킬러 브랜드 하우저. 오마샤리프를 제거하기 위해 파견된 하우저가 좌충우돌 벌이는 약간은 어설픈 활약기.

 

 

2. 감상평 。。。。。。。                  

 

     "악당을 없애기로 계약했는데 병원 노동조합원, 기자, 농업회사, 가톨릭 해방신학자, 몰락한 콜롬비아 커피 농부 이들이 야만인이고 타락한 문명 반대자들이라고? 우린 중앙아메리카를 묘지로 만들었어요."

 

     영화 속에서 브랜드 하우저가 했던 대사 가운데 한 부분인데, 이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주는 핵심적인 내용이다. 기존의 가장 큰 준거집단이었던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 점차 약화되면서 급격히 부상하고 있는 조직이 바로 기업이다. 다국적 기업이 확산되면서 더 이상 특정 국가에 소속되지 않게 된 그들은 오로지 ‘이익’만을 위해 일하는 조직으로, 당연히 정의나 평화와 같은 가치들은 안중에 없다. 이런 조직들이 권력을 잡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영화는 여실히 보여준다. 얼마든지 전쟁을 일으키고, 이익을 가로막는 사람들은 암살해버리면 그만이라는 식의 태도. 개인의 자아실현의 기회는 사라지고 오로지 힘과 물질을 소유하고 있는 이들이 모든 것을 조종하는 세상.

 

 

     다만 이 괜찮은 주제를 가지고 영화를 이렇게 밖에 만들 수 없었나 싶은 생각에 아쉬움이 많이 든다. 일단 영화의 장르 자체가 대단히 모호해져버렸는데, 영화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풍자와 조소(嘲笑)는 너무나 자주 등장하는 어설픈 코미디와 연출 + 연기로 인해 가벼워져버렸다.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실제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일부분이라는 점을 볼 때 충분히 진지하게 만들어도 될 것 같았는데 말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잘 만든 영화라고는 하기 어려울 듯.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장르의 영화는 아직인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줄거리 。。。。。。。        

 

     미래의 어느 세상.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 하나가 의사 앞에 앉아 있다. 자신의 이름을 네모 노바디(Nobody)라고 소개하는 그는, 이름 그대로 자신이 ‘아무도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이상한 것은 노인이 자신을 서른네 살이라고 소개하고 있다는 것.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신기술로 인해 누구도 죽지 않게 된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자연사를 앞두고 있던 그를 취재하기 위해 기자 한 명이 병원으로 잠입을 하게 되고, 네모는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2. 감상평 。。。。。。。                               

 

     영화가 좀 어렵다. 노바디가 풀어 놓는 이야기를 듣고 기자가 내뱉은 말처럼, 그의 이야기는 너무나 모순되고 말이 되지 않는다. 동시에 이 사람이 되기도 하고, 다시 저 사람의 삶을 살고 있기도 하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각각의 네모들은 어린 시절 동네에서 만난 애나, 앨리스, 진이라는 세 명의 친구들과 결혼을 하고 그에 맞는 삶들을 살아간다. 공교롭게도 각각의 이야기 속 네모들은 모두 삼십 대 중반 죽음을 맞는다. 그렇다면 지금 남아 있는 노인 네모는 누구인가?

 

 

 

     영화의 키워드는 역시 ‘선택’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고 결정하느냐에 따라 각각의 삶의 모습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결과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 어느 것이 과연 최선일까? 이럴 때 그 옛날 일밤에서 이휘재가 열연했던 ‘인생극장’처럼 두 선택지의 삶을 다 살아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고 편할까.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 그랬다. 그는 각각의 삶을 다 살아보았다(이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느냐, 비유적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내용에 대한 이해가 약간 달라질 수 있다). 영화 속 ‘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본 뒤에야 비로소 여기까지 왔다.’라는 구절은 바로 이걸 가리킨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언급한 대로 그 모든 삶들의 결론은 삼십 대를 채 다 살지도 못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하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

 

     영화 속에는 초끈이론이며 평행우주, 빅크런치 같은 물리학 이론들이 잔뜩 등장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현대물리학 속에서 찾으려고 시도하는 듯하지만, 사실 이것들은 답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 있는데, 다른 평행 우주, 혹은 다른 선택 속의 나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때문에 영화의 결론부에 가서 각각의 선택에 따른 결과들은 나름대로 가장 최선의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선문답 같은 대답이 주어지는 것도 나름 이해가 간다.

 

     결국 중요한 건 그 선택들의 결과로 있는 지금의 나일뿐이다. 모든 삶을 다 살아본다고 하더라도 어떤 하나의 길이 완전하고 완벽할 수는 없다는 거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좌우되지 말고(영화 속에서 중요하게 반복되는 장면 중 하나인, 이혼하려는 부모 사이에서 누구를 따라갈까 고민하는 장면은 이 점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좀 더 주체적인 사고와 판단으로 지금을 살아가는 게 최선일 뿐이다. 적어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이다.

 

 

     간만에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괜찮은 영화를 봤다. 어떤 것이 최선인가를 고민(만)하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라는 메시지가 강렬하게 다가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